달라이 라마
1. 개요
달라이 라마는 1642년 티베트의 주권자가 된 겔룩파 불교의 역대 전생자를 통칭하는 이름으로, 관음보살의 화신으로 여겨진다. 16세기 몽골의 알탄 칸이 3대 달라이 라마 소남 갸초에게 '달라이 라마' 칭호를 수여한 이후, 그 법통을 잇는 모든 화신들에게 사용되었다.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 불교의 종교적, 정치적 지도자로서, 1959년 14대 달라이 라마 텐진 갸초가 인도 망명하기 전까지 티베트를 통치했다. 14대 달라이 라마는 현재 망명 정부를 이끌며 티베트의 독립과 불교의 가르침을 전파하고 있으며, 중국 정부와의 갈등 속에서 달라이 라마의 계승 문제와 관련하여 다양한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 직책 | 달라이 라마 |
|---|---|
| 티베트어 | ཏཱ་ལའི་བླ་མ་ |
| 로마자 표기 | Ta-la'i bla-ma |
| IPA (티베트어) | táːlɛː láma |
| 의미 | 티베트 불교의 정신적 지도자 아발로키테슈바라의 화신으로 여겨짐 |
| 거주지 | 맥로드 간지, 다람살라, 인도 (1959년–현재) 포탈라 궁 (1649년–1959년, 겨울 거주지) 노르불링카 (1783년–1959년, 여름 거주지) |
| 웹사이트 | 달라이 라마 공식 웹사이트 |
| 현직 | 텐진 갸초, 제14대 달라이 라마 |
|---|---|
| 첫 번째 달라이 라마 | 겐둔 드룹파, 1대 달라이 라마 (사후 1578년 추대) |
| 성립 | 1391년 |
| 존칭 | 성하 |
|---|---|
| 영어 존칭 | His Holiness |
| 역할 | 티베트 불교의 정신적 지도자 중국 공산주의 통치 이전에는 티베트의 정신적, 세속적 통치자 |
|---|---|
| 지위 계승 | 각 달라이 라마는 보살 아발로키테슈바라의 화신으로 믿어짐 이전 달라이 라마 사망 후 어린아이에게서 환생을 찾음 |
| 일본어 표기 | ダライ・ラマ法王 |
|---|---|
| 한국어 표기 | 달라이 라마 |
| 로마자 표기 (일본어) | Dalai-rama Hōō |
-
불교 지도자 -
부처
부처는 '깨달은 자'를 뜻하는 말로, 불교에서는 고통의 소멸의 길을 찾고 더 이상 배울 필요가 없는 경지에 이른 존재를 가리키며, 부처의 본성과 성불 과정에 대한 견해는 불교 종파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된다. -
티베트의 승려 -
파스파
파스파는 티베트 불교 승려이자 사캬파 지도자로서 몽골 제국의 쿠빌라이 칸의 제사 및 원나라의 국사를 역임하며 파스파 문자를 창제하고 티베트-몽골 불교 세계에서 정치와 종교 간의 관계를 정립하는 데 기여했다. -
티베트의 승려 -
제10대 판첸 라마
제10대 판첸 라마는 1938년 칭하이성에서 태어나 1949년 즉위하여 중국 정부를 지지하며 활동하다가, 티베트 정책 비판으로 비판받았으나 석방 후 복권되었고, 1989년 사망하여 타살 의혹을 낳았다. -
보살 -
성관음
성관음은 1면 2비의 형상을 한 관음보살로, 육관음 중 하나로서 대자(大慈)의 관음으로 여겨지며 지옥을 교화하는 역할을 하고, 머리 위의 아미타여래 화불로 식별된다. -
보살 -
문수보살
문수보살은 대승 불교에서 지혜를 상징하며 석가모니불의 협시로서 반야의 공을 설하고, 화엄경에서는 선재동자를 깨달음으로 이끄는 숭배의 대상이다.
2. 역사
1642년 티베트의 주권자가 된 데이픈사 주지의 역대 전생자에 대한 통칭은 티베트의 교화주(敎化主)라는 관음보살의 화신이 전생한 것으로 민간에서 믿고 있다. 촌카파가 개종한 겔룩파 불교가 급속히 발전해서 종래의 여러 파와 대립하고, 각각 동서의 유력민족과 결탁해서 항쟁했다. 겔파의 저항운동을 조직한 겐둔ㆍ개초의 사망 후, 세력결속의 상징으로서 반대파의 습관에 따라서 전생자(轉生者)가 선출되었다.
이 전생활불소남ㆍ개초는 1578년 청해에 가서 몽골의 알탄 칸과 만나 달라이 라마의 칭호를 받았다. 달라이는 그 이름의 일부 개초(대해(大海))에 대한 몽고어이다. 그가 몽골 포교 중에 사망하자, 겔파는 알탄ㆍ한계의 군사력에 의지해서 그 조카의 아들을 새로운 전생자로 뽑고, 그의 사망 후에는 오이라이트부의 구시 한과 결탁해서 당시의 티베트정부를 멸망시키고, 신전생자인 로산 캐초를 주권자로서 달라이 라마 5세로 하고, 거슬러 올라가서 초대를 추가했다.
5세는 고파 불교의 신봉자로서 많은 저작을 남겼는데, 말년에 몽고의 지배를 둘러싸고 청조와 대립하였으며, 연애시인인 6세는 청에 납치되어서 도중에 청해에서 사망했다. 청은 그 권위를 부정하고자 하였으나, 민중의 저항으로 부득이하게 그의 전생자가 된 7세를 인정했다. 7세는 말년에 주장대신(駐藏大臣) 살해사건의 처리를 평가받아서 1751년부터 주장대신 감시를 조건으로 정권의 재발족을 허가받았다.
8세는 정치에 관심이 없어 권력의 독점을 섭정 등에 허용했기 때문에 실권계승의 암투가 계속되어서 9세부터 12세까지의 달라이 라마는 요절하였다. 13세 투프텐 개초는 러시아, 영국과 청조의 외교정책에 농락당하면서 허무하게 독립을 외치면서 망명을 계속하고, 귀국 후 판첸 라마 6세와 대립하여, 후자를 부득이하게 중국망명을 시켰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서 중국과의 관계가 악화되어서, 14세는 1959년 이후 중국과 대립해서 인도로 망명하였다.
달라이 라마 측에서는 티베트의 다른 모든 불교 종파는 달라이 라마를 전 티베트의 종교적 정치적 지도자로 인정한다고 주장한다. 판첸 라마는 종교적으로 달라이라마에 다음 가는 지위에 있다. 겔룩파의 공식적인 지도자는 간덴 트리파(Ganden Tripa, 겔룩파의 창시자 총카파가 세운 첫 번째 사원 간덴사의 주지)이다. 달라이 라마는 겔룩파가 티베트에 진출한 이래(17세기 중엽부터 중화인민공화국이 티베트를 차지한 1959년 달라이 라마 14세가 인도로 망명하기까지) 티베트의 통치자였다.
‘달라이 라마’라는 칭호는 몽골의 알탄 칸이 3대 달라이 라마 소남 갸초에게 봉헌한 이름인데, 그는 겸손의 의미로 자신의 스승과 그의 스승에게 1대, 2대 달라이라마의 칭호를 올리고 자신은 3대 달라이라마가 되었다. 몽골어 ‘달라이’는 갸초(Gyatso, 지혜를 가진 영혼)와 함께 ‘바다’를 뜻하며, 티베트어 ‘라마’는 산스크리트어의 ‘구루(grub, Drup)’에 해당하는 말로 ‘영적인 스승’이라는 뜻이다. 즉 "바다와 같은 지혜를 가진 스승"이라는 뜻이다.
사람들은 달라이 라마가 자비의 보살인 관세음보살(Chenrezig티베트어)의 화신이라고 믿으며, 달라이 라마가 죽은 뒤에 차기의 달라이 라마가 다시 환생하였다고 믿는다. 특히 텐진 갸초는 1959년 중국의 티베트 통치에 반대하여 인도로 망명하였다.
1945년 티베트는 중국으로부터 독립하는데 성공하였지만 1949년 마오쩌둥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하고 티베트 정부에 대하여 중국의 일부로 편입하면서 갈등이 생겨났다.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지역자치를 권하였으나, 티베트인들이 호응하지 않자 중국은 1950년 여름 무력으로 창두를 점령하였다. 이에 달라이 라마(텐진 갸초)는 어쩔 수 없이 중국의 '화평해방'을 받아들여 1951년 5월 티베트 협정에 조인한 뒤, 1954년 티베트 지방정부 주석, 전국 인민대표대회 티베트 대표, 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 등을 역임하게 되었다.
하지만 1959년 3월 티베트에서 반(反)중국 반란이 일어나 총 12만여 명에 달하는 티베트인들이 학살되고, 중국군에 의해 6,000여 개의 불교사원이 파괴되자 국제적 지원과 티베트 독립운동을 지속하기 위해 인도로 망명하였다. 이어 인도 동북부의 히말라야산맥 기슭인 다람살라에 티베트 망명정부를 세우고, 1963년 티베트 헌법을 기초하는 한편, 40여 년 간 학교·수공예공장·예술학교 등을 설립해 티베트 문화의 정체성을 지키는 데 주력하였다.
2.1. 겔룩파의 화신 라마 제도 도입
1대 달라이 라마 겐둔 둡빠(1391년~1474년)는 쫑카파의 제자로, 겔룩파 확장에 기여했지만, 정치적 권력은 없었다. 14세기 말, 쫑카파가 창시한 겔룩파는 급속히 발전하며 기존 종파들과 대립했다. 겐둔 둡빠 사후, 그의 전생자(화신)가 선출되면서 달라이 라마의 계보가 시작되었다.
겐둔 둡빠는 나르탕 사원에서 교육받고 쫑카파의 제자가 된 후, 겔룩파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시가체에 타쉴룬포 사원을 세워 겔룩파의 영향력을 확장했다. 겐둔 둡빠는 학자이자 성자로 존경받았으며, '판첸'과 '탐체 켄파'(전지전능한 자)라는 칭호를 받았다.
겐둔 둡빠 사후, 닝마파 수행자 가정에서 태어난 상예 펠이라는 소년이 그의 환생으로 인정받아 2대 달라이 라마 겐둔 가초 팔장포(1475–1542)로 개명되었다. 겐둔 갸초는 드레풍 사원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겔룩파의 영향력을 더욱 확대했다. 그는 라모 라초에서 환영을 보고, 이후 달라이 라마를 찾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3대 달라이 라마 소남 갸초(1543~1588)는 1578년 알탄 칸에게서 "달라이 라마" 칭호를 받았다. 몽골어로 '달라이'는 '바다'를 뜻하며, 티베트어 '라마'는 '영적인 스승'을 의미한다.
2.2. 달라이 라마 칭호의 유래
소남 갸초는 1578년 몽골의 알탄 칸을 만나 "달라이 라마"라는 칭호를 받았다. 이 칭호는 몽골어로 '바다(달라이)'와 티베트어로 '스승(라마)'을 결합한 것으로, "바다와 같은 지혜를 가진 스승"이라는 뜻을 지닌다. 소남 갸초의 법명인 '갸초(Gyatso)'는 티베트어로 '바다'를 의미하며, 이후 달라이 라마의 법명에 '갸초'가 포함되는 전통이 되었다.
소남 갸초는 알탄 칸에게 자신이 드로곤 쵸걀 파그파의 환생이고 알탄 칸이 쿠빌라이 칸의 환생이라고 밝히며, 칸을 칭기스 칸 가계의 후계자로 지정하는 동시에 그의 후원을 확보했다. 알탄 칸과 그의 추종자들은 샤머니즘 대신 불교를 국가 종교로 받아들였고, 몽골법은 티베트 불교법에 따라 개정되었다.
1587년, 소남 갸초는 명나라 만력제로부터 "두얼즈창(朵儿只唱)"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2.3. 권위의 성장과 티베트 통일
5대 달라이 라마 가왕 롭상 갸초(1617년 ~ 1682년)는 구시 칸의 지원을 얻어 1642년 티베트를 통일하고, 달라이 라마를 정점으로 하는 간덴포탕 정권을 수립했다고 여겨진다. 5대 달라이 라마는 뛰어난 학승이었을 뿐만 아니라, 몽골 호족 구시 칸의 지원으로 티베트의 정치적 지배자가 되었다. 이후 역대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는 물론 몽골인과 만주인에게도 영향력을 가진 종교적 권위자와 티베트 통치라는 정치적 권위를 가진 군주를 겸비한 승려 군주가 되어, 티베트 제1의 도시 라사를 기반으로 하는 정체의 최고 권위자로 군림했다.
5대 달라이 라마는 포탈라궁을 건설하고, 티베트 불교의 종교적, 정치적 권위를 확립했다. 달라이 라마 측에서는 티베트의 다른 모든 불교 종파는 달라이 라마를 전 티베트의 종교적, 정치적 지도자로 인정한다고 주장한다.
호슈트 부족의 지도자 구시 칸은 1637년 청나라에 사절단을 파견한 이후 티베트 정복에 착수하여, 오이라트군을 이끌고 1642년까지 중앙 티베트, 암도, 캄 등 티베트 대부분을 제압했다. 구시 칸은 암도를 호슈트 부족의 직할지로 하고, 중앙 티베트 전역을 달라이 라마에게 기증하여 광대한 달라이 라마 영토를 만들었다. 이로써 달라이 라마를 정점으로 하는 정권이 중앙 티베트에 수립되었다. 그 후 구시 칸과 초대 섭정 수남 춘펠이 차례로 죽었기 때문에, 5대 달라이 라마는 착실하게 자신의 권력을 강화할 수 있었고, 그를 티베트의 최고 권위자로 추대했던 몽골인들의 종주권은 유명무실해졌다. 초기 달라이 라마 정권은 중앙 티베트에만 지배력을 미쳤지만, 후에 그 지배 지역을 확대해 나갔다. 이렇게 해서 명실상부 5대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의 지배자가 되었다고 여겨진다.
구시 칸의 티베트 정복은 티베트 종교계와 세속 권력 구조에 큰 변동을 가져왔다. 달라이 라마의 지위는 이전의 "겔룩파의 유력한 지위"라는 종교적 권위뿐만 아니라, 티베트에서 가장 비옥하고 인구 밀도가 높은 달라이 라마 영토를 장악하고, 구시 칸 일족과 그에 종속하는 여러 봉건 영주들의 영주권 인정, 각지 겔룩파 사원의 인사권 인정 등에 관여하는 등, 종교적·세속적 권위와 권한을 티베트 지배 지역에서 행사하는 성속 양권을 모두 갖춘 지위가 되었다.
2.4. 외부 세력의 개입
5대 달라이 라마 사후, 섭정 데시 상예 갸초(Desi Sangye Gyatso)는 6대 달라이 라마를 비밀리에 옹립하고, 5대 달라이 라마의 권위를 이용해 겔룩파의 일들을 처리했다. 그러나 6대 달라이 라마는 승려 생활을 포기하고 평민의 삶을 선택하여 논란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몽골 코슛 부족의 라장 칸(Lha-bzang Khan)은 청나라의 지원을 받아 6대 달라이 라마를 폐위시키고, 새로운 달라이 라마를 옹립하려 했다. 그러나 티베트인들은 라장 칸의 간섭에 분개했고, 준가르 부족의 도움을 받아 라장 칸을 몰아내고 7대 달라이 라마를 옹립했다.
7대 달라이 라마는 청나라의 지원을 받았지만, 준가르 부족과의 갈등은 계속되었다. 청나라는 군대를 파견하여 준가르를 몰아내고 티베트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했다.
8대 달라이 라마는 정치에 거의 관여하지 않았고, 섭정과 '암반'(ambans)에게 실권을 맡겼다. 이후 9대부터 12대 달라이 라마는 모두 어린 나이에 사망하여, 섭정이 실권을 행사하는 기간이 길어졌다. 이 시기 티베트는 청나라의 영향력 아래 있었으며, 달라이 라마 계승에도 청나라의 개입이 있었다. 청나라 건륭제는 금병책첨 제도를 도입하여 달라이 라마 선정에 개입했다.
2.5. 티베트 독립과 중국의 침략
13대 달라이 라마 툽땐 갸초는 1913년 티베트 독립을 선언했으나, 중국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1949년 마오쩌둥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하고 티베트를 중국의 일부로 편입하려 하면서 갈등이 생겼다. 중화인민공화국은 티베트에 지역 자치를 제안했으나, 티베트인들이 호응하지 않자 1950년 여름 무력으로 창두를 점령했다. 이에 달라이 라마(텐진 갸초)는 어쩔 수 없이 중국의 '화평해방'을 받아들여 1951년 5월 티베트 협정에 조인했다.
2.6. 14대 달라이 라마와 망명 정부
14대 달라이 라마 땐진 갸초는 1935년 7월 6일 티베트 오지의 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1940년 2월 5일 중앙정부는 라모 톤둡(拉木登珠)을 14세 달라이 라마로 승인했다.
1950년 11월 17일 참도 전투 중에 공식적으로 즉위했다. 1959년 4월 18일, 1951년 티베트 평화 해방을 위한 17개항 협정을 받아들이도록 압력을 받았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 협정에 따라 티베트는 공식적으로 중화인민공화국에 편입되었다. 같은 해 티베트 반란 이후, 인도로 망명하여 망명 티베트 정부를 이끌었다.
CIA 티베트 프로그램에 따라 중앙정보국은 1960년대 달라이 라마 행정부에 연간 1.7를 지원했다. 2001년, 망명 티베트인들의 선출된 의회에 정부 권한 일부를 양도했다. 당초 티베트 독립 운동을 목표로 했으나, 1980년대 후반에는 높은 수준의 자치를 추구했다.
2013년 뉴욕 해리스 인터랙티브(Harris Interactive)의 여론조사(미국 및 6개 주요 유럽 국가 대상) 결과, 14세 달라이 라마는 버락 오바마와 함께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2014년과 2016년, 티베트가 중국에 속하기를 원하지만 중국은 티베트의 문화와 문자를 보존해야 한다고 말했다.
2019년, 자신의 후계자가 인도에서 환생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또한 계승에 대한 중국의 간섭은 무효라고 경고했다.
2020년, 티베트 독립을 지지하지 않으며 노벨상 수상자로 중국을 방문하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공화국' 개념을 선호한다. 공화국 개념에서 소수 민족(티베트인, 몽골인, 만주인, 신장 위구르인)은 조화롭게 살 수 있다"고 말했다.
1989년, 비폭력 노선으로 티베트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세계 평화를 위해 노력한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루스벨트 자유상(1994), 세계안보평화상(1994) 등도 받았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중국과의 외교 관계 등을 이유로 달라이 라마의 방한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3. 역대 달라이 라마
몽골의 알탄 칸이 3대 달라이 라마 소남 갸초에게 봉헌한 칭호가 '달라이 라마'이다. 소남 갸초는 겸손의 의미로 자신의 스승과 그의 스승에게 1대, 2대 달라이 라마 칭호를 올리고 자신은 3대 달라이 라마가 되었다. 이후 이 법통을 잇는 모든 화신들에게 이 칭호가 사용되고 있다. 몽골어 ‘달라이’는 갸초(Gyatso, 지혜를 가진 영혼)와 함께 ‘바다’를 뜻하며, 티베트어 ‘라마’는 산스크리트어의 ‘구루(grub, Drup)’에 해당하는 말로 ‘영적인 스승’이라는 뜻이다. 즉, "바다와 같은 지혜를 가진 스승"이라는 뜻이다.
사람들은 달라이 라마가 자비의 보살인 관세음보살(Chenrezig티베트어)의 화신이라고 믿으며, 달라이 라마가 죽은 뒤에 차기 달라이 라마가 다시 환생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현재의 달라이 라마는 스스로 자신이 깨달은 자라는 것을 천명하지 않고 있다.
역대 달라이 라마는 총 14명이 인정되었다.
| 순서 | 이름 | 생몰년 | 티베트어 표기(와일리 표기법) | 비고 |
|---|---|---|---|---|
| 1세 | 껭둔 두빠 | 1391년 - 1474년 | dge-'dun grub-pa དགེ་འདུན་གྲུབ་པ་ | 추증 |
| 2세 | 껭둔 갸초 | 1475년 - 1542년 | dge-'dun rgya-mtsho དགེ་འདུན་རྒྱ་མཚོ་ | 추증 |
| 3세 | 수남 갸초 | 1543년 - 1588년 | bsod-nams rgya-mtsho བསོད་ནམས་རྒྱ་མཚོ་ | |
| 4세 | 윤텐 갸초 | 1589년 - 1616년 | yon-tan rgya-mtsho ཡོན་ཏན་རྒྱ་མཚོ་ | |
| 5세 | 로상 갸초 | 1617년 - 1682년 | blo-bzang rgya-mtsho བློ་བཟང་རྒྱ་མཚོ་ | |
| 6세 | 창양 갸초 | 1683년 - 1706년 | tshangs-dbyangs rgya-mtsho ཚངས་དབྱངས་རྒྱ་མཚོ་ | |
| 대립 6세 | 예셰 갸초 | 1686년 - 1725년 | ye-shes rgya-mtsho | 괄호 참조 |
| 7세 | 켈상 갸초 | 1708년 - 1757년 | bskal-bzang rgya-mtsho བསྐལ་བཟང་རྒྱ་མཚོ་ | |
| 8세 | 잠펠 갸초 | 1758년 - 1804년 | 'jam-dpal rgya-mtsho འཇམ་དཔལ་རྒྱ་མཚོ་ | |
| 9세 | 룬톡 갸초 | 1806년 - 1815년 | lung-rtogs rgya-mtsho ལུང་རྟོགས་རྒྱ་མཚོ་ | |
| 10세 | 툴림 갸초 | 1816년 - 1837년 | tshul-khrims rgya-mtsho ཚུལ་ཁྲིམས་རྒྱ་མཚོ་ | |
| 11세 | 케둡 갸초 | 1838년 - 1856년 | mkhas-grub rgya-mtsho མཁས་གྲུབ་རྒྱ་མཚོ་ | |
| 12세 | 틴례 갸초 | 1856년 - 1875년 | 'phrin-las rgya-mtsho འཕྲིན་ལས་རྒྱ་མཚོ་ | |
| 13세 | 둡텐 갸초 | 1876년 - 1933년 | thub-bstan rgya-mtsho ཐུབ་བསྟན་རྒྱ་མཚོ་ | |
| 14세 | 텐진 갸초 | 1935년 - 현재 | bstan-'dzin rgya-mtsho བསྟན་འཛིན་རྒྱ་མཚོ་ |
* 대립 6세 예셰 갸초는 달라이 라마 6세 창양 갸초 폐위 후, 호슈트 부의 수장에 의해 추대된 대립 달라이 라마였다. 그러나 꼭두각시로 여겨져 티베트 사회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4. 달라이 라마의 지위와 역할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 불교의 한 종파인 겔룩파의 승려이다. 겔룩파 내에서 가장 유명하며 사실상 겔룩파의 총수나 종주처럼 여겨지기도 하지만, 겔룩파의 종장은 아니다. 겔룩파의 최고 지도자는 총본산 간덴 사원의 주지(간덴 티파)이다. 간덴 티파는 겔룩파 학승의 정점에 서 있는 직책이며, 종조 쫑카파의 계승자로서 겔룩파의 교법을 관장하는 법주(法主)의 입장에 있다. 간덴 사원에서의 지위가 달라이 라마보다 높다는 점에서, 겔룩파 내에서의 종교적 격식은 달라이 라마보다 상위에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달라이 라마는 겔룩파의 유력한 종교 지도자로 시작된 전생 라마 제도였지만, 5대 달라이 라마 시대에 이르러 티베트를 지배하는 정치적 권위를 갖게 되었다.
달라이 라마라는 칭호는 몽골의 알탄 칸이 3대 달라이 라마 소남 갸초에게 봉헌한 이름이다. 몽골어 ‘달라이’는 갸초(Gyatso, 지혜를 가진 영혼)와 함께 ‘바다’를 뜻하며, 티베트어 ‘라마’는 산스크리트어의 ‘구루(grub, Drup)’에 해당하는 말로 ‘영적인 스승’이라는 뜻이다. 즉 "바다와 같은 지혜를 가진 스승"이라는 뜻이다.
대부분의 경우, 달라이 라마는 겔룩파의 지도자로 여겨지지만, 겔룩파의 최고 지위는 간덴 티파(간덴 사원의 주지)이며, 달라이 라마도 겔룩파 내에서는 간덴 티파의 아래에 있다. 그러나 간덴 티파라는 지위는 달라이 라마에 의해 임명되는 임기제 직책이며, 실제로 막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달라이 라마이다.
5대 달라이 라마의 미성년 시절, 영향력 있고 강력했던 소남 랍텐은 겔룩파를 위해 준가르 몽골에게 영감을 주어 적들을 공격하게 했다. 이로 인해 중앙 티베트에서 겔룩파의 정치적, 종교적 패권을 위한 길이 열렸다. 1642년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의 절대 통치자가 된 후 소남 랍텐은 사실상 티베트 정부의 실질적인 섭정이자 통치자인 "데시"(Desi, 총독)가 되었다. 이 기간 동안 소남 촉펠[랍텐]이 달라이 라마보다 더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가졌다.
1945년 티베트는 중국으로부터 독립하였지만 1949년 마오쩌둥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우고 티베트 정부를 중국의 일부로 편입하면서 갈등이 생겨났다.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지역자치를 권하였으나 티베트인들이 호응하지 않자 중국은 1950년 여름 무력으로 창두를 점령하였다. 이에 달라이 라마(텐진 갸초)는 어쩔 수 없이 중국의 '화평해방'을 받아들여 1951년 5월 티베트 협정에 조인하였다.
1959년 3월 티베트에서 반중국 반란이 일어나 티베트인들이 학살되고, 중국군에 의해 불교사원이 파괴되자 14대 달라이 라마는 인도로 망명하였다. 이후 다람살라에 티베트 망명정부를 세우고 티베트 독립운동을 전개하여, 1959, 1961, 1965년에 걸쳐 유엔 총회에서 중국 정부를 상대로 티베트의 인권과 자치권을 존중하라는 결의안을 채택하도록 하였다.
사람들은 달라이 라마가 자비의 보살인 관세음보살(Chenrezig티베트어)의 화신이라고 믿는다.
4.1. 중국 왕조와의 관계
달라이 라마는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 등 중국 왕조와 복잡한 관계를 맺어왔다.
* 원나라: 쿠빌라이와 팍파가 구축한 "시주와 귀의처" 관계는 티베트 불교(의 영수)가 천하의 불교 위에 선다는 사상의 시초가 되었다.
* 명나라: 영락제는 카르마파 5세에게 "대보법왕" 칭호를 수여하여, 명목상 카르마파가 티베트 불교의 권위자가 되었다.
* 청나라:
* 순치제는 달라이 라마 5세를 초청하여 "소령천하석교(所領天下釋教)" 칭호를 수여했다. 이는 명목상 달라이 라마가 카르마파의 지위를 계승한 형태였지만, 한족 불교까지 관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 달라이 라마 5세 시대에 호슈트 칸국의 구시 칸이 티베트 대부분을 제압하고 달라이 라마에게 기증하여 달라이 라마를 정점으로 하는 정권이 수립되었다.
* 달라이 라마 6세 이후 외부 세력(몽골, 청나라)의 개입으로 달라이 라마가 폐위되거나 섭정이 정무를 대행하는 등, 달라이 라마 본인이 항상 실권을 장악하지는 못했다.
* 달라이 라마 7세 때 달라이 라마 정권은 청나라의 보호를 받게 되었고, 달라이 라마는 청나라 황제를 위해 기원할 의무를 지게 되었다.
* 건륭제는 화신 라마 선정 방법에 개입하여 금병책첨 제도를 도입했다.
* 중화인민공화국: 달라이 라마의 칭호와 티베트 정교일치 체제 확립이 1653년 청나라 황제가 달라이 라마 5세에게 존칭을 수여한 데서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티베트 망명 정부는 이에 대해 달라이 라마 칭호는 달라이 라마 3세와 알탄 칸의 관계에서 시작되었고, 달라이 라마 5세의 정치적 권위는 구시 칸과의 관계에서 확립되었다고 반론한다.
14대 달라이 라마는 1959년 중국의 티베트 통치에 반대하여 인도로 망명하였다. 현대에 들어 판첸 라마가 중국 정부에 근접하면서 달라이 라마와 멀어졌고, 현재 달라이 라마가 지정한 판첸 라마와 중국 정부가 지정한 판첸 라마가 공존하고 있다.
4.2. 판첸 라마와의 관계
판첸 라마는 달라이 라마에 이어 겔룩파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화신(환생) 라마로, 달라이 라마와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맺어왔다. 티베트 사람들은 이 두 화신 라마의 밀접한 관계를 태양과 달에 비유했다. 카르마파에서 샤르마파라는 화신 라마가 카르마파 법왕 사후 다음 법왕으로 선택된 전생자가 성인이 될 때까지 공백을 메우는 부법왕의 역할을 하는 것처럼, 달라이 라마와 판첸 라마도 이와 비슷한 정·부 법왕에 해당하며, 서로 사제 관계를 맺었다.
판첸 라마는 아미타불의 화신으로 여겨졌으며, 달라이 라마에 필적하는 지혜를 가진 고승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판첸 라마는 시가체에 상주하는 경우가 많았고, 달라이 라마가 미성년일 때 섭정으로서 정무를 대행한 것은 대부분 라싸에 있는 다른 라마였다. 또한, 판첸 라마는 원칙적으로 세속적인 정치 권력을 가지지 않았다.
1727년, 청나라는 겔룩파 내의 세력 균형을 맞추기 위해 판첸 라마의 정치 권력을 강화하고자 짱 지방과 서티베트를 판첸 라마의 영토로 정했다. 이 조치는 큰 정치적 효과는 없었지만, 이후 달라이 라마와 판첸 라마 사이에 (또는 라싸와 시가체 사이에) 여러 차례 마찰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현대에 들어 판첸 라마가 중국 정부에 근접하면서, 두 라마의 관계는 소원해졌다. 결국 지금은 달라이 라마가 지정한 판첸 라마와 중국 정부가 지정한 판첸 라마가 라마교(티베트 불교)의 지도자로서 다른 위치에서 공존하고 있다.
5. 달라이 라마의 계승
달라이 라마가 서거하면, 고승들은 유언, 신탁, 꿈, 징조 등을 통해 환생자를 찾는다. 이 과정은 히말라야 전통에 따라 마음의 흐름을 의도된 몸으로 옮기는 포와(phowa) 수행법과 관련이 있으며, 네충 오라클(Nechung Oracle)과 상의하여 진행된다.
고승들은 꿈을 통해 환영을 보기도 하며, 달라이 라마 화장 시 연기 방향을 통해 환생 방향을 짐작하기도 한다. 팔덴 라모(Palden Lhamo)는 라모 라초(Lhamo La-tso) 호수의 수호신으로, 1대 달라이 라마에게 환영을 통해 달라이 라마 계보를 보호하겠다고 약속했다.
몇 명의 환생 후보가 나타날 경우, 섭정, 고위 관리, 조캉(Jokhang) 승려, 티베트 장관은 역사적으로 후보자 이름을 항아리에 넣어 제비뽑기를 하는 방식으로 최종 결정을 내렸다. 최종 후보는 전생의 기억을 시험받으며, 전임자의 물건에 애착을 보이는 등의 행동을 통해 환생 여부를 확인받는다.
최종 선발된 환생자는 유아기에 종교적 권위를 갖는 법왕 계승 의식을 치른다. 성인이 되면(보통 18세) "티베트 왕"으로서 정치적 지위를 갖는 즉위식을 다시 거행하며, 이전까지는 섭정이 국가원수 지위와 정무를 대행한다.
14대 달라이 라마는 자신의 저서 망명 속의 자유(Freedom in Exile)에서 달라이 라마 사후 백성들이 더 이상 달라이 라마를 원하지 않을 가능성을 언급하며, 이 경우 환생자를 찾는 과정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차기 달라이 라마 선출에 대한 최종 결정권을 행사할 의도를 밝혔으며, 모든 고승은 정부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발표했다. 이는 텐진 갸초 사후 15세 달라이 라마 선출에도 적용될 것이다.
14세 달라이 라마는 1969년에 이미 달라이 라마 제도의 존속 여부는 티베트인들이 결정할 문제라고 말했으며, 미래에 티베트 불교도들이 자신의 환생 인정 여부를 투표로 결정할 가능성을 언급했다. 그는 중화인민공화국이 통제하는 국가나 자유롭지 않은 국가에서는 환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