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이노스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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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코이노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대의 장군으로, 알렉산더의 측근 중 신뢰가 두터운 인물이었다. 기원전 335년 북벌을 시작으로 동방 원정에 참여하여 여러 주요 전투에서 보병을 지휘했으며, 특히 히다스페스 전투에서 큰 역할을 했다. 기원전 326년, 군대의 피로를 감안하여 알렉산더에게 귀환을 건의했으나, 며칠 후 병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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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아르코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대의 탐험가이자 장군으로, 인더스 강을 따라 항해하여 페르시아만까지 도달했으며, 그의 항해 기록은 아리아노스의 저서 《인디카》의 자료로 활용되었다. - 알렉산드로스 대왕 휘하의 장군 - 스타산드로스
스타산드로스는 알렉산드로스 3세 사후 제국 분열기에 아레이아와 도란기아나 태수를 지냈으며,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페르시아 원정 친위대 출신으로 디아도코이 전쟁에서 에우메네스를 지지하여 안티고노스에 맞섰으나, 가비에네 전투 패배 후 행적이 묘연해졌다. - 기원전 4세기 그리스 사람 - 플라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제자이자 아테네에 아카데메이아를 설립하여 철학, 수학 등을 가르치고 이데아론, 영혼론 등을 주요 사상으로 삼아 서양 철학에 큰 영향을 미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이다. - 기원전 4세기 그리스 사람 - 투키디데스
투키디데스는 기원전 5세기 아테네의 역사가이자 장군으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집필을 위해 망명 생활을 했으며, 그의 책은 객관적인 서술과 정치적 통찰력으로 후대 역사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코이노스 (장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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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코이노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휘하에서 많은 전투에 참여하여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 기원전 330년 드란기아나 전투에서 경장보병을 지휘하고 아라크세스강에 다리를 놓는 작업을 했다.[23] 박트리아에서는 귀순했다가 배신한 아레이아의 태수 사티바르자네스를 제압했다. 같은 해 필로타스 재판에서는 헤파이스티온, 크라테로스와 함께 필로타스를 배신자라고 격렬하게 비난하며 고문을 통해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원전 328년 소그디아나에서 스피타메네스와의 전투 때 아르타바조스와 함께 스피타메네스가 도망친 스키타이인의 땅에 파견되었다. 아르타바조스가 은퇴한 후에는 스피타메네스의 공격을 격퇴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스피타메네스가 살해당하면서 전투에서 승리했다.[24]
기원전 327년 아스파시오이인과 앗사케노이인에 대한 작전에서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지휘 하에 전투를 치렀으며[25], 바지라라는 마을에 분견되었다.[26] 히다스페스강(젤룸강)에서 도하를 위해 인더스강에 배를 운반하는 임무를 완수했고, 기원전 326년 히다스페스 전투에서는 우익 보병부대를 지휘하여 적의 좌익 공격에 큰 공을 세웠다.[27][28]
마케도니아 군이 아케시네스강(체나브강)을 건널 때에는 후속 부대의 도하를 지원하기 위해 남겨졌다. 히파시스강에서는 더 이상 진군을 거부하는 병사들을 대표하여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회군을 설득하기도 했다. 그러나 며칠 지나지 않아 코이노스는 병으로 사망했다.
2. 1. 초기 생애와 배경
코이노스는 폴레모크라테스의 아들이며, 알렉산더 대왕의 측근 중에서도 가장 신뢰받는 사람이었다. 기원전 335년 알렉산더의 북벌에서 코이노스는 보병 부대를 지휘했다. 이듬해 시작된 동방 원정에서도 코이노스는 계속 보병 지휘관으로 참전했다. 그라니코스 전투, 이수스 전투, 테에로스 전투, 가우가멜라 전투 등 주요 전투에서 그의 이름이 언급되었으며, 가우가멜라 전투에서는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22] 기원전 334년 그라니코스 전투 이후, 코이노스는 신혼이었기 때문에 다른 신혼 병사들과 함께 왕의 배려(물론 정책적인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로 일시 귀국이 허용되었다. 그는 이듬해 고르디온에서 새로 징집된 병사와 함께 원정군에 합류했다.2. 2. 알렉산드로스 대왕 휘하의 활약
코이노스는 폴레모크라테스의 아들이며,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측근 중에서도 가장 신뢰가 두터운 사람이었다. 기원전 335년 알렉산드로스의 북벌과 이듬해 시작된 동정에서 보병 부대를 지휘하며 활약했다.그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주요 전투에서 탁시스 (1,500명의 팔랑기테스 부대)를 지휘했으며, 여러 전투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었다. 특히 마케도니아 전투 전통에 따라 가장 중요한 위치인 팔랑크스의 "최고" 보병 지휘관으로서 오른쪽에 배치되었다는 점은 그의 전술적 신뢰성과 전투에서의 용맹함을 보여준다.
2. 2. 1. 주요 전투에서의 역할
코이노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주요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장군이었다. 그는 그라니코스 전투, 이수스 전투, 테에로스 전투, 가우가멜라 전투 등 주요 전투에 참전했으며, 특히 가우가멜라 전투에서는 부상을 입기도 했다.[22] 기원전 334년 그라니코스 전투 이후에는 신혼이었던 다른 병사들과 함께 일시 귀국했다가 이듬해 원정군에 합류했다.기원전 330년 드란기아나 전투에서는 경장보병을 지휘하고 아라크세스강에 다리를 놓는 작업을 했다.[23] 박트리아에서는 귀순했다가 배신한 아레이아의 태수 사티바르자네스를 제압하는 데 기여했다. 같은 해 필로타스 재판에서는 헤파이스티온, 크라테로스와 함께 필로타스를 배신자라고 격렬하게 비난하며 고문을 통해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원전 328년 소그디아나의 스피타메네스와의 전투에서는 아르타바조스와 함께 스피타메네스가 도망친 스키타이 인의 땅에 파견되었다. 아르타바조스가 은퇴한 후에는 스피타메네스의 공격을 격퇴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스피타메네스가 살해당하면서 전투에서 승리했다.[24]
기원전 327년 아스파시오이 인과 앗사케노이 인에 대한 작전에서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지휘 하에 전투를 치렀으며[25], 바지라라는 마을에 분견되었다.[26] 히다스페스강(젤룸강)에서는 도하를 위해 인더스강에 배를 운반하는 임무를 완수했고, 기원전 326년 히다스페스 전투에서는 우익 보병부대를 지휘하여 적의 좌익 공격에 큰 공을 세웠다.[27][28]
이후 마케도니아 군이 아케시네스강(체나브강)을 건널 때에는 후속 부대의 도하를 지원하기 위해 남겨졌다. 히파시스강에서는 더 이상 진군을 거부하는 병사들을 대표하여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회군을 설득하기도 했다.
2. 2. 2. 신혼 기간 중 귀국
기원전 334년 그라니코스 전투 이후 코이노스는 갓 결혼한 다른 병사들과 함께 왕의 배려(물론 정책적인 의도도 있었을 것임)에 의해 일시 귀국했다. 이들은 마케도니아에서 아내와 함께 겨울을 보내도록 보내졌다. 코이노스는 이들을 유럽으로 데려간 지휘관 중 한 명이었다.[22] 이듬해인 기원전 333년 봄, 코이노스는 새로 징집된 병사와 함께 고르디움에서 원정군에 합류했다.[23]2. 2. 3. 필로타스 처형 관여
기원전 330년 드란기아나에서 필로타스, 아민타스, 폴리페르콘 등과 함께 경장보병을 지휘했으며[22], 아라크세스강에 다리를 놓는 작업을 했다.[23] 박트리아에서 귀순한 아레이아의 태수 사티바르자네스가 벳소스에게 가담하자,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함께 급히 아레이아를 제압했다. 같은 해 필로타스 재판에서 필로타스의 여동생과 결혼했던 코이노스는 (자신의 안위를 위해) 헤파이스티온, 크라테로스와 함께 필로타스를 배신자라고 격렬하게 규탄하며 고문을 통해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 2. 4. 스피타메네스 격퇴
기원전 328년 소그디아나에서 스피타메네스와의 전투 때, 코이노스는 아르타바조스와 함께 스피타메네스가 도망쳤다는 스키타이인의 땅에 보내졌다. 아르타바조스가 고령을 이유로 은퇴한 후, 코이노스는 스피타메네스의 공격을 받았으나 격퇴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사게타이인과 스키타이인이 스피타메네스의 목을 가지고 투항했기 때문에, 코이노스는 나우타카의 왕에게 합류했다.[24]2. 2. 5. 귀환 건의와 죽음
기원전 326년 히다스페스 전투에서 우익 보병부대를 지휘하여 적의 좌익 공격에 큰 역할을 한 코이노스는,[27][28] 그 후 마케도니아 군이 아케시네스강(체나브강)을 건널 때 후속으로 오는 현지 인도인 부대의 도하를 지원하기 위해 아케시네스강에 남겨졌다. 히파시스강에 이르러 오래 지속된 원정에서 피폐해진 군이 더 이상 진군을 거부하자, 코이노스는 왕에게 말머리를 돌릴 것을 설득하였다. 알렉산드로스가 히파시스 강에 도착했을 때, 그는 정복을 더 밀어붙이려 했지만, 코이노스는 귀향의 필요성을 역설한 첫 번째 지휘관이었고, 왕은 그의 조언을 따랐다.그러나 그날 이후 삼일 후에 코이노스는 병사했다. 마케도니아 군대가 실제로 귀환을 시작했을 때, 코이노스는 질병으로 사망했고(기원전 326년), 왕으로부터 화려한 장례를 치렀다. 알렉산드로스는 그의 죽음을 애도했지만, 코이노스가 마치 그만이 고향을 다시 보게 될 운명인 것처럼 귀환의 필요성을 강력하게 주장했다고 전해진다.
참조
[1]
문헌
アッリアノス, VI. 2
[2]
문헌
アッリアノス, I. 6
[3]
문헌
アッリアノス, I. 14; II. 8, 23, 24; III. 11
[4]
문헌
クルティウス, III. 9. 7; IV. 13. 28
[5]
문헌
ディオドロスXVII. 57, 61
[6]
문헌
アッリアノス, I. 24, 29
[7]
문헌
クルティウス, V. 4. 20, 30
[8]
문헌
アッリアノス, III. 18
[9]
문헌
アッリアノス, III. 25
[10]
문헌
クルティウス, VI. 9. 30, 11. 10
[11]
문헌
アッリアノス, IV. 16
[12]
문헌
アッリアノス, IV. 17, 18
[13]
문헌
アッリアノス, IV. 24, 25
[14]
문헌
アッリアノス, IV. 27
[15]
문헌
アッリアノス, V. 8
[16]
문헌
アッリアノス, V. 12, 16, 17
[17]
문헌
クルティウス, VIII. 14. 15
[18]
문헌
アッリアノス, V. 21
[19]
문헌
アッリアノス, V. 27, 28
[20]
문헌
クルティウス, IX. 3. 3-15
[21]
문헌
クルティウス, IX. 3. 20
[22]
문헌
쿠르티오스, V. 4. 20 30
[23]
문헌
아리아노스, III. 18
[24]
문헌
ibid, IV. 17 18
[25]
문헌
ibid, IV. 24 25
[26]
문헌
ibid, IV. 27
[27]
문헌
ibid, V. 12, 16, 17
[28]
문헌
쿠르티오스, VIII. 14.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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