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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니코스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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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그라니코스 전투는 기원전 334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시아 제국을 상대로 소아시아에서 벌인 첫 번째 주요 전투이다. 알렉산드로스는 헬레스폰토스를 건너온 후, 그라니코스 강에서 페르시아군과 맞붙었다. 페르시아군은 멤논의 초토화 작전 제안을 거부하고 강둑에 기병을 배치했으나, 알렉산드로스의 기습적인 공격에 패배했다. 마케도니아군은 300~400명의 사상자를 냈고, 페르시아군은 1,000명의 기병과 3,000명의 보병이 전사했다. 이 전투의 승리로 알렉산드로스는 소아시아의 그리스 도시들을 해방하고 페르시아 제국 정복의 발판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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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니코스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교전그라니코스 전투
일부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전쟁
샤를 르 브룅의
샤를 르 브룅의 "그라니코스 전투"(1665)는 기병 전투의 중심에 있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묘사함.
날짜기원전 334년 5월
장소트로아드 지역의 그라니코스 강 (오늘날의 비가 강, 발리케시르 주, 튀르키예)
좌표27.2811127
지도 유형서아시아#터키
지도 릴리프
지도 크기300px
결과고대 마케도니아의 승리
영토 변경알렉산드로스 대왕, 소아시아 절반을 획득
교전 세력
교전국 1마케도니아 제국
코린토스 동맹
교전국 2아케메네스 제국
지휘관 및 지도자
마케도니아 제국 지휘관알렉산드로스 대왕
파르메니온
필로타스
아민타스
소크라테스
니카노르
페르디카스
코에누스
크라테루스
아민타스
필리포스
멜레아그로스
아가톤
필리포스
칼라스
클레이토스
아케메네스 제국 지휘관아르시테스
로도스의 멤논
아르사메스
스피트리다테스
레오미트레스
니파테스
페테네스
미트로부자네스
아르부팔레스
미트리다테스
파르나케스
오마레스
병력 규모
마케도니아 제국 병력총 18,10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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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기병 4,200명
* 1,800명 헤타이로이 기병대
* 1,800명 테살리아 기병대
* 600명 그리스 동맹 기병대
경기병 900명
* 프로드로모이
* 파이오니아인
* 트라키아인
중보병 12,000명
* 9,000명 페제타이로이
* 3,000명 히파스피스테스
경보병 1,000명
* 궁수
* 아그리아니아인
아케메네스 제국 병력총 14,000–40,00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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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병 10,000–20,000명
보병 4,000–20,000명
* 4,000–5,000명 그리스 용병
* 0–16,000명 기타 보병
사상자 및 피해
마케도니아 제국 사상자총 115명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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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병 85명 사망
* 보병 30명 사망
아케메네스 제국 사상자총 5,000–6,00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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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병 1,000명 사망
* 그리스 용병 2,000–3,000명 사망
* 그리스 용병 2,000명 포로

2. 배경

기원전 334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아버지 필리포스 2세가 암살당한 후 국내 통합을 공고히 하고 아시아로 출발하였다. 알렉산드로스는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건너 프리기아 태수의 치소가 있는 다스킬리움으로 진군하였다. 많은 페르시아 총독들은 제레아(Zelea) 마을에 병력을 집결시키고 그라니코스 강둑에서 알렉산드로스를 맞이할 준비를 하였다.

로도스의 멤논은 청야전술을 제안하였으나, 지휘권을 가진 태수는 이를 거부하였다.

기원전 338년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승리한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는 대부분의 그리스 도시 국가들을 코린토스 동맹에 강제로 가입시켰다. 이 동맹의 목표는 제2차 페르시아 원정에 대한 복수를 위해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제국에 전쟁을 거는 것이었다. 필리포스 2세는 다른 그리스 국가들을 설득하여 자신을 동맹의 지도자로 선출하게 하고 전쟁 준비를 시작했다.

같은 시기, 아케메네스 제국은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의 암살 이후 혼란에 빠져 있었다. 이로 인해 고대 이집트가 제국에서 다시 독립하는 등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당시 소아시아에는 대규모 페르시아 군대가 없었고, 페르시아 함대도 에게 해에 곧 나타날 것으로 예상되지 않았다. 필리포스는 제국의 혼란을 이용하려 했지만, 그의 전체 군대가 아직 준비되지 않아 소아시아에 대규모 침공을 감행할 수 없었다. 기원전 336년 봄, 그는 수천 명의 병력으로 구성된 마케도니아 원정군을 소아시아 서부 해안에 상륙하도록 명령했다. 이 선봉대의 임무는 가능한 한 많은 영토를 정복하거나, 적어도 주력군의 나중 이동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헬레스폰트 해협의 아시아 측에 교두보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선봉대는 필리포스의 최고 장군인 파르메니온이 지휘하고, 아탈루스가 부사령관을 맡았을 가능성이 높다. 초기에는 캠페인이 성공하여 소아시아 서부의 많은 그리스 도시들이 마케도니아에게 평화적으로 항복했다. 그러나 기원전 336년 말, 필리포스가 암살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필리포스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 3세가 즉위했으며, 마케도니아의 권위를 재확립하기 위해 먼저 알렉산더의 발칸 원정에서 발칸 반도와 그리스에서 일어난 여러 반란을 진압해야 했다. 한편, 기원전 336년 가을 무렵, 다리우스 3세가 아케메네스 제국의 새로운 대왕이 되었다. 그는 제국을 안정시키고 마케도니아 원정군에 대한 반격을 시작했다.

다리우스는 이집트 반란 진압을 우선시했으며, 이는 기원전 336년 말에서 기원전 335년 2월까지 일어났을 것이다. 이 일이 끝나자 그는 로도스의 멤논을 고대 그리스 용병 부대의 선두에 세워 소아시아로 보냈다. 멤논은 마그네시아 아드 시필룸 또는 마그네시아 온 마이앤더에서 마케도니아 군대를 격파했는데, 아마도 기원전 335년 초 봄이었을 것이다. 그해 말, 또 다른 마케도니아 군대가 트로아스에서 페르시아 군대에 의해 격파되었다. 기원전 335년 말까지 대부분의 그리스 도시들은 페르시아의 통제를 회복했으며, 원정군은 아비도스와 로이테움만을 유지했다.

알렉산드로스는 발칸 반도와 그리스에서 반란을 진압한 후 기원전 334년 초 봄에 군대를 헬레스폰토스로 진군시켰다. 그의 군대는 보병 약 32,000명과 기병 약 5,000명으로 구성되었다. 그는 20일 후 세스토스에 도착했고,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건너기 위해 군대를 분할했다. 군대의 주력은 세스토스에서 소아시아의 아비도스로 수송되었고, 알렉산드로스는 남은 보병과 함께 엘라에우스에서 건너 시게움 곶 근처에 상륙했다. 그는 일리움을 방문한 후, 아리스바, 페르코테, 람프사쿠스, 콜로나이, 헤르모토스를 지나갔다.

다리우스는 알렉산드로스의 움직임을 어느 정도 시점에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대왕은 아직 경고하지 않았고, 소아시아의 방어를 그곳의 사트라프들에게 맡겼다. 그 이유는 알렉산드로스가 아직 해외에서 지휘관으로서의 면모를 증명하지 못했고, 마케도니아 원정군이 전년도에 큰 어려움 없이 격퇴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페르시아 사트라프들과 지휘관들은 알렉산드로스가 건너왔다는 소식을 듣고 젤레이아 근처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군대는 헬레스폰토스 프리기아의 사트라프인 아르시테스, 리디아이오니아의 사트라프인 스피스리다테스, 킬리키아의 사트라프인 아르사메스, 레오미트레스, 페테네스, 니파테스, 그리고 로도스의 멤논이 이끌었다.

젤레이아에서 페르시아인들은 국정을 논의하기 위해 회의를 열었다. 고대 역사가 아리아누스와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멤논은 마케도니아인들과의 정면 대결을 피하라고 조언했다. 그는 마케도니아 보병이 페르시아군보다 우월하고, 알렉산드로스가 직접 참석했지만 다리우스는 함께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초토화 작전을 권고했다. 아르시테스와 다른 페르시아인들은 멤논의 조언을 거부했는데, 이는 그들이 백성들의 재산을 보호하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한 멤논이 다리우스의 총애를 얻기 위해 전쟁을 연장하려 한다고 의심했다.

회의 후 페르시아군은 그라니쿠스 강의 동쪽 둑에 자리를 잡고 알렉산드로스의 공격을 기다렸다.

아리아누스에 따르면, 알렉산드로스는 그라니쿠스로 이동하는 동안 정찰병으로부터 페르시아군의 위치를 들었다. 그는 군대를 전투 대형으로 정렬했다. 파르메니온은 강을 건너기가 어렵고 전투 대형이 흐트러진 채로 열을 지어 건너야 할 것을 걱정했다. 그는 군대가 서쪽 둑에 야영하고 다음 날 새벽에 무혈 입성을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알렉산드로스는 기다리고 싶지 않았고 즉시 공격을 명령했다.

전투는 다이시오스로, 그레고리력으로는 5월에 벌어졌다. 전투 전에 일부 마케도니아 장교들은 종교적 관습에 따라 이 달에는 전투를 피해야 한다며 싸우기를 꺼렸다. 알렉산드로스는 이 달을 두 번째 아르테미시온으로 선언하여 이 문제를 해결했다.

3. 페르시아군의 배치

아리아노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 플루타르코스는 각자 저서에서 이 전투를 언급했는데, 그중 아리아노스의 기록이 가장 상세하다. 페르시아군은 기병을 보병 앞에 배치하고 강의 오른쪽(동쪽)에 병사들을 정렬시켰다.

페르시아군의 배치가 적절했는지에 대해 역사가들의 의견은 분분하다. 일부는 이러한 배치가 페르시아군의 전술적 실수였다고 지적하지만, 다른 이들은 페르시아군이 기병의 수적 우위를 이용하려 했다고 주장한다. 윌리엄 타른 경(Sir William Tarn)은 “페르시아군 사령관들은 사실 아주 적절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페르시아군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전사시켜서 가능한 한 초기에 전쟁을 끝내려 하였다”라고 말했다.

페르시아군은 그라니쿠스 강둑에 기병을 배치했다. 좌익은 멤논과 아르사메스가 각각 자신의 기병 부대를 이끌었다. 그 옆에는 아르시테스가 파플라고니아 기병을 지휘했다. 그 옆에는 스피리다테스가 배치되어 히르카니아 기병을 이끌었다. 중앙은 민족이 불분명한 기병이 지켰다. 우익은 1,000명의 메디아 기병, 레오미트레스가 이끄는 2,000명의 기병, 그리고 또 다른 2,000명의 박트리아 기병 부대로 구성되었다. 페르시아군은 알렉산드로스 자신이 이 좌익의 맞은편에 배치된 것을 알아차리고 기병의 일부를 좌익으로 이동시켜 증원했다. 그리스 용병들은 기병 뒤에 배치되었고 페르시아의 오마레스가 이끌었다.

역사가들은 페르시아 지휘관들이 내린 몇 가지 결정에 대해 비판한다. 그중 하나는 기병을 강둑에 배치한 것인데, 이는 기병이 돌격할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는 당시 페르시아 기병이 아직 돌격 전술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로 설명된다. 대신, 그들은 적의 대형에 접근하여 멀리서 으로 공격하여 붕괴시켰다. 일단 대형이 충분히 붕괴되면, 기병은 백병전을 위해 굽은 칼로 바꿨다. 마찬가지로, 역사가들은 멤논이 그리스 용병을 이끄는 데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최전선에서 기병 부대를 지휘하게 되었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가능한 동기는 페르시아 지휘관들이 그를 질투했고 그를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 있다. 멤논은 그들이 최전선에서 그들 가운데에서 통제하기 더 쉬웠을 것이다. 세 번째 비판점은 보병을 최전선에서 멀리 배치한 것이다. 현대 역사가들은 페르시아 지휘관들이 그 해 전년도에 마그네시아에서 마케도니아인들을 격파한 그리스 용병에 대한 분노 때문에 그렇게 했다고 시사했다. 기병만으로 알렉산드로스를 격파함으로써 그들은 자존심을 회복했을 것이다.

요약하면, 페르시아군은 그라니코스 강을 따라 전면에 기병을 배치하고, 그 뒤에 그리스인 용병으로 구성된 보병을 배치하여 전투에 임했다.

4. 전투

그라니코스 강 전투에서 양군 포진. 중앙을 좌우로 흐르는 그라니코스 강의 맞은편에서 방어하는 페르시아 군(적색)은 전면에 궁기병, 후방에 그리스 용병 보병을 배치했다. 공격하는 마케도니아 원정군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지휘하는 우익이 중앙을 향해 비스듬히 움직이는 형태의 공격을 시작했다.


그라니코스 전투 지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군대는 아비도스에서 진군하여 5월의 3일째 되는 날 페르시아 군과 마주하였다. 부사령관 파르메니온은 강의 상류를 넘어 다음날 새벽 기습을 가하자는 작전을 제안하였으나, 알렉산드로스는 즉각적인 공격을 선택하였다.

마케도니아군은 중무장 보병 팔랑크스를 중앙에, 기병을 양쪽에 배치하였다. 알렉산드로스는 컴파니언 기병과 함께 우익에 있었다. 페르시아군은 마케도니아군의 돌격이 알렉산드로스가 있는 쪽에 집중될 것이라 예상하고 병력을 중앙에서 측면으로 이동하였다.

전투는 파르메니온 휘하의 마케도니아 좌익 기병과 경무장 보병대가 양동작전을 시작하면서 개시되었다. 페르시아군은 마케도니아군 좌익 공격에 대응하여 방어를 강화했고, 마케도니아군의 공격은 격퇴되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가 기병부대를 이끌고 쐐기꼴 돌격을 시도해 페르시아군 전열 중앙을 강타하였다.

페르시아군은 귀족 기병대를 이끌고 반격했다. 전투는 혼전 양상이었고, 페르시아 고위 귀족 몇몇은 알렉산드로스나 경호부대에 의해 전사했다. 알렉산드로스 자신도 스피트리다테스에게 도끼 공격을 당해 기절했으나, 치명타를 가하기 전 클레이토스가 스피트리다테스를 공격하여 전사했고, 알렉산드로스는 빠르게 정신을 차렸다.

스피리다테스(이오니아와 리디아의 페르시아 총독)가 알렉산드로스를 뒤에서 공격한다. 샤를 르 브룅의 ''그라니쿠스 전투'' 세부 묘사.


마케도니아 기병대는 좌측으로 방향을 전환하여 페르시아 기병대에 접근했다. 이때 페르시아 기병대는 마케도니아 좌익부대와 전투 중이었다. 알렉산드로스 기병대의 이동으로 생긴 공간으로 마케도니아 보병대가 돌격하여 훈련도가 낮은 페르시아 보병대를 공격했다. 지휘관들이 전사한 페르시아 기병대는 중앙이 무너지자 퇴각했고, 보병대도 궤주하기 시작했다. 페르시아군은 패주하며 많은 전사자를 남겼다.

마케도니아군의 총 사상자는 300명에서 400명 사이였고, 페르시아군은 기병 1,000명과 보병 3,000명이 전사했는데, 대부분 패주하면서 발생한 피해였다. 로도스의 멤논 휘하의 그리스 용병대는 기병대 퇴각 후 전장에 남겨졌다. 이들은 평화적 타협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알렉산드로스는 보병대로 하여금 용병대를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8,000명이 학살당하고 2,000명이 노예가 되어 마케도니아에서 노역을 했다.

4. 1. 전투 결과에 대한 현대적 해석

역사가 피터 그린은 캘리포니아 대학 출판부에서 출간한 자신의 저서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Alexander of Macedon'')에서 이 전투에 대한 통설과는 다른 이론을 제시했다. 그린에 따르면 강둑은 페르시아 기병대가 아닌 보병대가 방어하고 있었으며, 알렉산드로스 휘하의 군사들은 막무가내로 공격을 가했다가 오히려 물러나야 했다. 알렉산드로스는 마지못해 파르메니온의 조언을 받아들여 밤중에 강을 건너 다음날 동이 틀 무렵 전투를 벌였다고 한다. 페르시아군은 서둘러 알렉산드로스가 강을 건넌 지점으로 이동했고, 보병대보다 빠른 기병대가 먼저 전장에 도착했다. 이후 전투는 고대 사료들이 묘사한 대로 진행되었다고 한다. 그린은 알렉산드로스가 자신의 초기 실패를 은폐하기 위해 사실을 왜곡했다고 설명하며, 자신의 해석을 설명하기 위해 부록 전체를 할애했다. 그러나 2013년 재판 서문에서 그린은 자신의 이론이 더 이상 설득력이 없다고 인정했다.

일반적으로 페르시아 보병대와 용병대가 기병대의 후방에 자리 잡고 있었다는 인식은 군사적인 관점에서 매우 어리석은 일로 여겨진다. 그러나 당시 페르시아 지휘관들이 뛰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공격에 유리하고 방어에는 알맞지 않은 기병대로 강둑을 지키게 한 것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았다. 훈련이 안 되어 있어도 기병보다는 보병으로 하여금 강안을 지키게 하는 것이 더 현명하며, 기병대는 후방에서 돌파된 부분으로 달려가 적을 격퇴하면 되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의 거대한 자아와 고향에 패전 소식이 돌아갈 경우에 대한 정치적 고려로 인해 일시적인 패배도 인정할 수 없었다. 이로 인해 정치적 선전이 뒤따랐고, 전투는 알렉산드로스가 호메로스적인 영웅으로서 적에게 자살과도 같은 돌격을 감행한 것으로 각색되었다.

다른 역사가들은 디오도로스의 설명을 부정확하다고 일축하고 아리아노스와 플루타르코스의 이야기를 선호한다. 디오도로스가 묘사한 기병과 보병의 별도 전투는 마케도니아인에게는 전형적이지 않았을 텐데, 마케도니아인들은 항상 보병과 기병이 협력하도록 조정했기 때문이다. 밤이나 새벽에 그라니쿠스 강을 건너는 것은 페르시아인들에게 감지되어 저지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다른 곳에서 방해받지 않는 도하가 가능하더라도 페르시아 군대가 후퇴하도록 유도했을 수 있다. 그 경우 알렉산더는 당시 소아시아에 존재했던 유일한 페르시아 군대를 신속하게 파괴할 기회를 잃었을 것이다. 오후에 공격했다면 페르시아인들은 눈부신 햇살 속에서 싸워야 했을 것이고, 마케도니아인들은 새벽에 공격했다면 햇살을 등지고 싸울 수 있었을 것이다.

5. 영향

이 전투로 소아시아 대부분은 쉽게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항복했지만, 밀레투스에서는 페르시아 함대가 저항을 시도했다. 알렉산드로스는 당시 그리스 함대만으로는 페르시아 함대에 대항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함대를 일시 해산했다. 육군으로 상대 함대의 거점을 빼앗아 적 함대를 무력화하는 작전으로 전환하여 페르시아군 격퇴에 성공했다.

그라니코스 전투 이후, 포로로 잡힌 그리스 용병 2,000명은 노예로 토지를 경작하기 위해 마케도니아로 보내졌다. 알렉산드로스는 비록 그들이 그리스인이었지만, 페르시아에 복무함으로써 동족 그리스인을 배신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그리스인들이 페르시아와 싸우고 서로 싸우지 않도록 강제하는 헬레닉 동맹에서 맺어진 협정을 준수하지 않았다. 그는 또한 페르시아 갑옷 300벌을 아테네로 보내 아테나에게 봉헌물로 아크로폴리스에 바쳤다. 그는 그 위에 다음과 같은 비문을 새기도록 명령하여 통합된 그리스 군대에 스파르타인이 없음을 표시했다. "필리포스의 아들 알렉산드로스와 라케다이몬인을 제외한 모든 그리스인들이 아시아에 거주하는 야만인으로부터 빼앗은 전리품에서 이 봉헌물을 바칩니다."

알렉산드로스는 디온의 제우스 신전에 그라니쿠스 기념물이라고 알려진 조각상을 세웠다. 이 기념물은 리시포스가 만든 청동상으로, 초기 기병 돌격에서 사망한 알렉산드로스와 그의 동료 25명이 모두 말을 탄 모습이었다. 기원전 146년, 제4차 마케도니아 전쟁 이후, 이 조각상들은 퀸투스 카에킬리우스 메텔루스 마케도니쿠스에 의해 로마로 가져와 옥타비아식 회랑에 전시되었으며, 그는 카피톨리노 언덕 아래에 이를 건설했다.

다스키리움은 페르시아 수비대가 철수하고 파르메니온이 점령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사르디스로 진군했고, 사르디스는 그에게 항복했다. 그는 에페소스로 이동했고, 에페소스 역시 그리스 용병 수비대가 철수했다. 마그네시아와 트랄레스가 항복을 제안하자, 그는 파르메니온을 그 도시들로 보냈다. 그는 리시마코스를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던 아이올리스이오니아의 도시들로 보내 그곳의 과두정치를 무너뜨리고 민주주의 정부를 재건하도록 명령했다. 알렉산드로스가 밀레투스에 도착했을 때 그 도시는 저항했고, 그는 밀레투스를 포위했다.

페르시아군의 손실은 재앙 수준은 아니었는데, 군대의 상당 부분이 할리카르나소스로 후퇴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전략적인 결과는 아케메네스 제국에게 위태로웠다. 아나톨리아에서 아케메네스 사트라프들이 패배한 적이 있었고 사르디스도 포위된 적이 있었지만, 사르디스 요새가 함락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고, 적군은 할리카르나소스까지 중요한 장애물 없이 진군을 계속할 수 있었다.

이 전투에서 궤멸된 기병대는 페르시아의 정예 부대라고 할 수 있었다.

6. 더 보기



분류: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전투

분류:기원전 334년

분류:기원전 4세기 분쟁

분류:고대 마케도니아의 전투

분류:아케메네스 제국의 전투

분류:차나칼레 주

6. 1. 관련 인물

알렉산드로스 대왕다리우스 3세의 사위이자 페르시아 군의 장군 중 한 명인 미트라다테스를 쓰러뜨렸다. 그러나 대왕은 흰 깃털 장식이 달린 투구를 착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페르시아 군의 표적이 되어 스피리다테스에게 습격당했다. 클레이토스가 대왕을 구출하여 위기를 넘겼다.

6. 2. 관련 사건

기원전 338년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승리한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는 대부분의 그리스 도시 국가들을 코린토스 동맹에 강제로 가입시켰다. 이 동맹의 목표는 제2차 페르시아 원정에 대한 복수를 위해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제국에 전쟁을 거는 것이었다. 필리포스 2세는 암살 당하고, 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 3세가 즉위하여 마케도니아의 권위를 재확립하기 위해 발칸 반도와 그리스에서 일어난 여러 반란을 진압해야 했다.

한편, 다리우스 3세가 아케메네스 제국의 새로운 대왕이 되었다. 그는 제국을 안정시키고 마케도니아 원정군에 대한 반격을 시작했다. 다리우스는 로도스의 멤논을 고대 그리스 용병 부대의 선두에 세워 소아시아로 보냈고, 멤논은 마그네시아 아드 시필룸 또는 마그네시아 온 마이앤더에서 마케도니아 군대를 격파했다.

알렉산드로스는 발칸 반도와 그리스에서 반란을 진압한 후 기원전 334년 초 봄에 군대를 헬레스폰토스로 진군시켰다. 페르시아 사트라프들과 지휘관들은 알렉산드로스가 건너왔다는 소식을 듣고 젤레이아 근처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젤레이아에서 페르시아인들은 회의를 열었고, 멤논은 초토화 작전을 권고했지만, 아르시테스와 다른 페르시아인들은 백성들의 재산을 보호하고 싶어했기 때문에 멤논의 조언을 거부했다.

전투는 다이시오스 달, 즉 그레고리력으로 5월에 벌어졌다. 페르시아 군은 그라니코스 강을 따라 전면에 기병을 배치하고, 그 뒤에 그리스인 용병으로 구성된 보병을 배치하여 회전에 임했다. 마케도니아 군에서는 대왕이 우익을 지휘하고, 좌익을 장군들 중 연장자인 파르메니온이 이끌었다. 마케도니아 군 기병이 도하하여 페르시아 군의 전열을 향해 전진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경무장으로 활을 주된 무기로 사용하던 페르시아 군 기병은 마케도니아 군 기병과 뒤이어 도하해 온 보병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패주하기 시작했고, 후방에 대기하고 있던 그리스인 용병 부대 또한 아군 기병에게 버려진 채 마케도니아 군의 공격에 노출되었다. 그리스인 용병들은 항복하려 했지만, 대왕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공격을 계속하게 하여 그들 중 많은 수가 전사했고, 살아남은 자들도 이후 포로로 혹사당했다.

전투 중 대왕은 스스로 다리우스 3세의 사위이자 페르시아 군의 장군 중 한 명인 미트라다테스를 쓰러뜨렸지만, 스피리다테스에게 습격당하고 클레이토스에게 구출되는 등 여러 차례 위태로운 장면도 있었다.

이 전투에서 궤멸된 기병대는 페르시아의 정예 부대였으며, 이 전투로 소아시아 대부분은 쉽게 알렉산드로스에게 항복했다. 하지만, 밀레토스에서 페르시아 함대가 저항을 시도했다. 알렉산드로스는 당시 그리스 함대만으로는 페르시아 함대에 대항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함대를 일시 해산하고, 육군으로 상대 함대의 거점을 빼앗아 적 함대를 무력화하는 작전으로 전환하여 페르시아군 격퇴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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