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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틴 아센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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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콘스탄틴 아센 1세는 1257년 불가리아 귀족들에 의해 차르로 추대되어 불가리아를 통치했다. 그는 세르비아 왕가의 후손임을 자처했으며, 헝가리, 비잔티움 제국과 대립하며 영토 분쟁을 겪었다. 특히 비잔티움 제국과의 외교적 갈등 속에서 여러 차례 결혼을 통해 관계 개선을 시도했으나, 몽골의 침입과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불안정한 통치를 이어갔다. 말년에는 낙마 사고로 인한 신체 마비와 이바일로의 난으로 인해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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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틴 아센 1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보이아나 교회의 프레스코에 있는 콘스탄틴 아센의 초상화
보이아나 교회의 프레스코에 있는 콘스탄틴 아센의 초상화
통치 기간1257년 – 1277년
이전 통치자미초 아센
후임 통치자이바일로
배우자이레네 두카이나 라스카리나
마리아 팔라이올로기나 칸타쿠제나
자녀미하일
왕가아센 왕조
부친티호미르 (티흐)
모친정보 없음
사망일1277년
이름
불가리아어Константин Тих Асен (콘스탄틴 티흐 아센)
로마자 표기Konstantin Tih Asen (콘스탄틴 티흐 아센)
기타
신분불가리아의 차르 (1257년–1277년)

2. 초기 생애

콘스탄틴 티흐는 소피아 또는 스코페 지역에 영지를 소유한 부유한 보야르 (귀족)였다.

2. 1. 출신 배경

콘스탄틴 티흐는 소피아 또는 스코페 지역에 영지를 소유한 부유한 보야르 (귀족)였다. 콘스탄틴은 스코페 근처의 성 조지 수도원에 보낸 헌장에서 자신이 세르비아의 스테판 네마냐의 손자라고 밝혔다. 비잔틴 역사가 게오르기 파히메레스는 그를 "반(半) 세르비아인"이라고 묘사했다. 그는 어머니 또는 아버지 쪽으로 세르비아 왕가와 관련이 있었을 수 있다. 역사학자 스르잔 피리바트리치에 따르면, 만약 그가 네마냐의 부계 친족이었다면, 그의 아버지 티흐는 네마냐의 형제인 티호미르의 아들이었을 것이다. 피리바트리치와 다른 학자들[1][2]는 콘스탄틴이 12세기 말 스코페를 지배했던 불가리아 보야르 요한 티호미르의 아들이나 조카였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만약 콘스탄틴이 어머니를 통해 세르비아 왕가와 관련이 있었다면, 네마냐의 딸이나 조카가 그의 어머니였을 것이다.

2. 2. 가계 논란

콘스탄틴 티흐는 소피아 또는 스코페 지역에 영지를 소유한 부유한 보야르 (귀족)였다. 콘스탄틴은 스코페 근처의 성 조지 수도원에 보낸 헌장에서 자신이 세르비아스테판 네마냐의 손자라고 밝혔다. 비잔틴 역사가 게오르기 파히메레스는 그를 "반(半) 세르비아인"이라고 묘사했다.

이러한 기록들을 바탕으로, 그는 어머니 또는 아버지 쪽으로 세르비아 왕가와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역사학자 스르잔 피리바트리치에 따르면, 만약 그가 스테판 네마냐부계 친족 관계였다면, 그의 아버지 티흐는 네마냐의 형제인 티호미르의 아들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피리바트리치와 다른 학자들은[1][2] 콘스탄틴이 12세기 말 스코페를 지배했던 불가리아 보야르 요한 티호미르의 아들이나 조카였을 수도 있다는 다른 가설도 제시한다. 만약 콘스탄틴이 어머니를 통해 세르비아 왕가와 관련이 있었다면, 스테판 네마냐의 딸이나 조카가 그의 어머니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3. 불가리아 차르 즉위

1257년 미하일 2세 아센과 칼리만 2세 아센이 연이어 사망하여 아센 왕조의 남계가 단절된 혼란 속에서, 스코페 출신의 귀족 콘스탄틴 티흐는 벨리코 터르노보의 보야르(귀족)들에 의해 미초 아센을 대신하여 불가리아의 차르로 선출되었다.[5]

3. 1. 혼란스러운 정국

13세기 후반의 불가리아.


1256년 말 혹은 1257년 초, 불가리아 황제 미하일 2세 아센이 그의 사촌 칼리만 2세 아센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나 칼리만 2세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암살되면서 아센 왕조의 남성 직계 혈통은 단절되었다.[5] 이로 인해 불가리아는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미하일 2세 아센의 장인이었던 마초 공작 로스티슬라프 미하일로비치와 처남이었던 미초 아센이 왕위를 주장하며 나섰다. 로스티슬라프는 비딘을 점령했고, 미초 아센은 불가리아 남동부 지역을 장악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수도 벨리코 터르노보를 중심으로 한 귀족(보야르)들의 지지를 얻는 데는 실패했다. 대신 귀족들은 스코페 출신의 콘스탄틴 티흐에게 왕위를 제안했고, 그는 이를 수락하여 1257년 새로운 차르로 즉위했다.

왕위에 오른 콘스탄틴 티흐는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고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첫 번째 아내와 이혼하고, 1258년 니케아 제국의 황제 테오도로스 2세와 이반 아센 2세의 딸 엘레나 사이에서 태어난 딸 이레네 두카이나 라스카리나와 결혼했다.[5] 이 결혼을 통해 그는 강력했던 아센 왕조와의 연결고리를 만들었고, 이후 '콘스탄틴 아센'으로 불리게 되었다. 또한 이 결혼은 불가리아와 니케아 제국 간의 동맹으로 이어졌으며, 이는 비잔티움 역사가 게오르기오스 아크로폴리테스가 터르노보를 방문했을 때 확인되었다.

그러나 콘스탄틴 아센의 통치는 시작부터 순탄치 않았다. 1259년부터 1261년까지 그는 왕위를 노리는 미초 아센뿐만 아니라 북쪽의 헝가리 왕국과도 전쟁을 벌여야 했다. 1259년 헝가리의 벨러 4세가 불가리아를 침공했으며, 이에 맞서 콘스탄틴 아센은 1260년 잠시 바나트의 세베린 지역을 탈환하기도 했다. 하지만 1261년, 헝가리의 왕자이자 미래의 왕 이슈트반 5세가 이끄는 군대에 의해 세베린을 다시 빼앗겼고, 불가리아의 비딘까지 일시적으로 점령당했다. 비록 비딘은 러시아계 귀족 야코프 스베토슬라프의 활약으로 되찾았지만, 그는 비딘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며 불가리아와 헝가리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는 행보를 보였다.

같은 해(1261년), 콘스탄틴 아센은 미초 아센과의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패배한 미초 아센은 비잔티움 제국으로 망명하여 황제 미하일 8세에게 의탁했다. 한편, 미하일 8세는 1261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하고 비잔티움 제국을 복원했지만, 곧이어 콘스탄틴 아센의 처남이자 니케아 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던 요안니스 4세를 폐위시키고 눈을 멀게 만들었다. 이 사건은 황후 이레네와 콘스탄틴 아센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비잔티움 제국과의 관계는 급격히 악화되었다.[6]

1264년, 콘스탄틴 아센은 몽골(킵차크 칸국)이 비잔티움 제국 영토를 침공할 때 동참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불가리아의 국제적 위상 개선에도 실패했다. 1268년 황후 이레네가 사망하자, 콘스탄틴 아센은 1269년 미하일 8세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그의 조카딸인 마리아 팔라이올로기나와 재혼했다. 그러나 결혼 당시 약속했던 지참금(메셈브리아 항구 포함)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서 양국 관계는 다시 악화되었다. 이에 불가리아는 라틴 제국의 부활을 꾀하던 시칠리아 왕국의 카를로 1세와 동맹을 맺었다. 미하일 8세는 이에 맞서 자신의 사생아 유프로시네를 강력한 몽골 지도자 노가이 칸에게 시집보냈고, 1274년 노가이 칸은 비잔티움의 동맹으로서 불가리아를 침공하여 약탈했다. 같은 해, 미하일 8세가 로마 가톨릭 교회와의 통합을 시도한 제2차 리옹 공의회는 정교회 국가인 불가리아와의 관계를 더욱 멀어지게 만들었다. 특히 황후 마리아와 그녀의 어머니는 비잔티움 내에서 교회 통합에 반대하는 귀족들을 지지했다.

통치 말년에 콘스탄틴 아센은 낙마 사고로 인해 부분적으로 마비 증세를 보였고, 원인 모를 통증에 시달렸다. 국정 운영은 점차 황후 마리아 팔라이올로기나의 손에 넘어갔다. 그녀는 1272년 자신의 아들 미하일 아센 2세를 공동 황제로 즉위시키며 권력 기반을 다졌다. 마리아는 1270년대 비잔티움 제국과의 외교를 주도했으며, 독자 세력을 형성했던 비딘의 야코프 스베토슬라프를 회유하여 굴복시킨 뒤 1276년 암살했다.

그러나 계속되는 전쟁에서의 실패, 반복되는 몽골의 침입, 그리고 경제적 불안정은 민중의 불만을 극대화시켰다. 결국 1277년, 돼지치기 출신 이바일로가 이끄는 대규모 민중 봉기(이바일로의 난)가 발발하였다. 콘스탄틴 아센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진압에 나섰으나, 전투에서 참패하고 이바일로의 군대에게 살해당하며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3. 2. 귀족들의 추대

미하일 2세 아센의 사망 후 콘스탄틴 티흐는 불가리아 왕위에 올랐지만, 그의 즉위 과정은 불분명하다. 1256년 말 또는 1257년 초에 미하일 아센은 그의 사촌인 칼리만 2세 아센에 의해 살해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칼리만 역시 살해되었고, 아센 왕조의 남계는 끊어졌다.

마초 공작 로스티슬라프 미하일로비치 (미하일과 칼리만의 장인)와 미초 아센 (미하일의 처남)이 불가리아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다. 로스티슬라프는 비딘을 점령했고, 미초는 불가리아 남동부를 장악했지만, 둘 다 벨리코 터르노보를 통제하는 보야르(귀족)들의 지지를 얻을 수 없었다. 보야르들은 콘스탄틴에게 왕위를 제안했고, 그는 그 제안을 받아들여 1257년 차르로 선출되었다.

콘스탄틴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첫 번째 아내와 이혼하고 1258년니케아 제국의 황제 테오도로스 2세와 엘레나 아세니나 불가리아의 딸, 즉 이반 아센 2세의 외손녀인 이레네 두카이나 라스카리나와 결혼했다. 불가리아 왕족의 후손과의 결혼은 그의 입지를 강화했다. 그 후 그는 '콘스탄틴 아센'이라고 불렸다. 이 결혼은 또한 불가리아와 니케아 사이에 동맹을 맺었고, 이는 1~2년 후 비잔티움 제국의 역사가이자 관리인 게오르기오스 아크로폴리테스가 터르노보에 왔을 때 확인되었다.

4. 대외 관계



콘스탄틴 아센 1세의 통치 기간 동안 불가리아는 주변의 강대국들과 복잡한 대외 관계를 맺었다. 1257년 귀족들에 의해 차르로 추대된 그는 전임자인 미초 아센1261년 축출하고, 제위의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해 아센 왕조와의 연결고리를 강조하며 '아센'이라는 성을 사용했다. 또한 니케아 제국 황제 테오도로스 2세의 딸 이리니 두카이나 라스카리나와 결혼하여 초기에는 니케아 제국과의 관계를 다졌다.[5]

그러나 그의 통치는 곧 주변국과의 갈등으로 점철되었다. 북쪽으로는 헝가리 왕국벨러 4세1259년부터 1261년까지 전쟁을 벌였으며, 이 과정에서 세베린 바나트와 비딘 지역을 둘러싼 공방이 벌어졌다. 비록 야코프 스베토슬라프의 도움으로 비딘을 일시적으로 되찾기도 했으나, 그는 점차 불가리아와 헝가리 양측과의 관계를 유지하며 비딘에서 독자 세력을 구축했다.

남쪽에서는 1261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복하고 비잔티움 제국을 부활시킨 미카일 8세 팔레올로고스와의 관계가 급격히 악화되었다. 미카일 8세가 콘스탄틴의 처남이자 니케아 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던 요한네스 4세 라스카리스를 폐위시키고 실명시키자, 황후 이레네의 복수심과 맞물려 양국 관계는 적대적으로 변했다.[6] 콘스탄틴은 1262년 트라키아를 침공하여 일시적으로 영토를 확장했으나, 비잔티움의 반격으로 1263년 점령지는 물론 흑해 연안의 주요 도시들까지 상실했다. 이후 1269년 첫 부인 이레네가 사망하자 미카일 8세의 조카 마리아 팔라이올로기나 칸타쿠제노스와 결혼하며 관계 개선을 시도했지만, 지참금으로 약속된 영토 반환 문제가 불거지면서 갈등은 계속되었다.[8] 불가리아는 비잔티움에 대항하기 위해 라틴 제국의 부활을 꾀하던 시칠리아 왕국의 카를로 1세와 동맹을 맺기도 했다.[7]

동쪽의 골든 호드(몽골)와의 관계도 중요했다. 불가리아는 약 20년간 명목상 골든 호드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있었으며, 1264년에는 비잔티움 제국을 견제하기 위해 몽골군과 연합하여 비잔티움 영토를 침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동맹은 오래가지 못했고, 오히려 1274년에는 비잔티움과 동맹을 맺은 몽골의 유력자 노가이 칸이 불가리아를 침공하여 약탈하는 결과를 낳았다.[8] 이는 미카일 8세가 딸을 노가이 칸에게 시집보내 맺은 외교적 성과였다.

또한, 1274년 미카일 8세가 제2차 리옹 공의회를 통해 로마 가톨릭교회와의 교회 통합을 추진하자, 동방 정교회를 고수하던 불가리아와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콘스탄틴의 두 번째 부인 마리아와 그녀의 어머니는 비잔티움 내 교회 통합 반대파와 입장을 같이하며 갈등을 심화시켰다.

이처럼 콘스탄틴 아센 1세의 치세 동안 불가리아는 헝가리, 비잔티움 제국, 몽골 등 주변 강대국과의 끊임없는 전쟁과 외교적 압박에 시달렸으며, 이는 영토 상실과 국력 약화로 이어졌다. 이러한 대외 관계의 불안정은 국내 정치의 혼란과 경제적 어려움을 가중시켜, 결국 통치 말기 이바일로의 난과 같은 대규모 민중 봉기를 초래하는 한 요인이 되었다.[9]

4. 1. 헝가리와의 갈등



1259년부터 1261년까지 콘스탄틴 아센 1세는 헝가리 왕국벨러 4세와 전쟁을 벌여야 했다. 헝가리의 지원을 받은 로스티슬라프 미하일로비치는 1259년 불가리아를 침공했다. 이듬해인 1260년, 로스티슬라프가 장인인 벨러 4세의 보헤미아 왕국 원정에 참여하기 위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콘스탄틴은 그의 영토로 쳐들어가 비딘을 다시 점령했다. 그는 또한 군대를 보내 세베린 바나트를 공격했지만, 헝가리 사령관 케메니의 아들 로렌스가 이를 격퇴했다.

불가리아의 세베린 침공은 벨러 4세를 자극했다. 1261년 3월, 보헤미아오타카르 2세와 비엔나 평화 조약을 체결한 직후, 벨러 4세는 아들이자 후계자인 이슈트반 5세가 지휘하는 헝가리 군대를 불가리아로 보냈다. 헝가리군은 비딘을 점령하고 하류 다뉴브 강의 을 포위했다. 콘스탄틴은 결전을 피하고 수도인 터르노보로 후퇴했다. 헝가리군은 그해 말 불가리아에서 철수했다. 이후 불가리아는 루스의 왕자 출신인 야코프 스베토슬라프의 도움으로 비딘을 되찾았으나, 그는 비딘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며 불가리아와 헝가리 양측 사이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4. 2. 비잔티움 제국과의 전쟁



1261년 말, 콘스탄틴의 아내 이레네의 오빠이자 니케아 제국의 황제였던 요한네스 4세 라스카리스는 그의 전 공동 통치자였던 미카일 8세 팔레올로고스에 의해 폐위되고 두 눈까지 멀게 되는 비극을 겪었다.[5] 미카일 8세는 이미 그해 7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하여 비잔티움 제국을 부활시키고 단독 황제의 자리에 오른 상태였다. 이러한 제국의 부활은 발칸 반도의 세력 균형을 근본적으로 바꾸었으며, 황후 이레네는 오빠에게 가해진 잔혹한 행위에 대한 복수심으로 콘스탄틴을 설득하여 미카일 8세와 적대하게 만들었다.[6]

콘스탄틴은 비잔티움 제국, 베네치아 공화국, 아카이아 공국, 에피루스 전제 공국 간의 전쟁을 기회로 삼아 1262년 가을, 트라키아를 침공하여 스타니마카(현 아세노브그라드)와 필리포폴리스(현 플로브디프)를 점령하는 군사적 성공을 거두었다. 당시 불가리아 남동부를 점령하고 있던 전 황제 미초 아센은 비잔티움과 동맹 관계였으나, 콘스탄틴의 공격을 피해 메셈브리아(현 네세바르)로 도주했다. 콘스탄틴이 메셈브리아를 포위하자, 궁지에 몰린 미초는 비잔티움에 도움을 요청하며 도시를 넘기는 대가로 망명을 제안했다. 미카일 8세는 이를 수락하고 1263년 미하일 두카스 글라바스 타르카네이오테스 장군을 파견하여 반격에 나섰다. 비잔티움 군대는 트라키아로 진격해 스타니마카와 필리포폴리스를 되찾았고, 글라바스 타르카네이오테스는 미초로부터 메셈브리아를 점령한 뒤 흑해 연안을 따라 남하하며 아가토폴리스(현 아흐토폴), 소조폴리스(현 소조폴), 안키알로스(현 포모리에)까지 차례로 점령했다. 비잔티움 함대 역시 비치나를 비롯한 다뉴브 삼각주의 주요 항구들을 장악했다. 한편, 불가리아 남서부를 장악하고 있던 귀족 야코프 스베토슬라프는 처음에는 콘스탄틴에게 충성했으나, 비잔티움의 공격을 받자 헝가리의 도움을 받아 벨러 4세의 봉신이 되었다. 이 전쟁의 결과로 불가리아는 1263년 말까지 비잔티움 제국과 헝가리에게 상당한 영토를 상실하며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고립된 콘스탄틴은 골든 호드(조치 울루스)의 타타르족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골든 호드의 칸들은 약 20년간 명목상 불가리아 군주의 종주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미카일 8세에게 폐위되어 비잔티움에 억류되어 있던 전 룸 술탄국의 술탄 카이카우스 2세 역시 골든 호드의 도움으로 복위를 노리고 있었다. 카이카우스 2세는 골든 호드의 유력자였던 자신의 삼촌에게 밀사를 보내 타타르족이 불가리아와 연합하여 비잔티움을 침공하도록 설득했으며, 콘스탄틴에게도 접근하여 석방을 도와주면 막대한 보상을 약속했다. 1264년 말, 수천 명의 타타르 군대가 얼어붙은 다뉴브강 하류를 건너 비잔티움 영토를 침공했고, 콘스탄틴도 곧 합류했다. 그러나 콘스탄틴은 전투 중 말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다. 불가리아-타타르 연합군은 테살리아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오던 미카일 8세를 기습했으나 황제를 사로잡지는 못했다. 콘스탄틴은 비잔티움의 요새 아이노스(현 터키 에네즈)를 포위하여 항복을 받아냈고, 비잔티움은 카이카우스 2세를 석방하는 데 동의했다. 카이카우스는 골든 호드로 망명했지만, 그의 가족은 계속 억류되었다. 이 침공은 비록 카이카우스 2세를 구출하는 성과를 거두었지만, 불가리아의 전반적인 상황을 개선하지는 못했다.

콘스탄틴 아센 1세 재위 시기 불가리아 영토


1268년 황후 이레네가 사망하자, 콘스탄틴은 1269년 미카일 8세의 조카인 마리아 팔라이올로기나 칸타쿠제네와 결혼하여 비잔티움과의 관계 개선을 시도했다. 그러나 결혼 지참금으로 약속되었던 안키알로스(현 포모리에)와 메셈브리아(현 네세바르) 항구 도시의 양도를 비잔티움 측이 이행하지 않으면서 양국 관계는 다시 악화되었다.[8] 이에 불가리아는 라틴 제국 부활을 목표로 하던 시칠리아 왕국의 카를로 1세와 동맹을 맺었다.[7] 미카일 8세는 이에 맞서 자신의 사생아 딸 유프로시네를 골든 호드의 실력자 노가이 칸과 결혼시켜 동맹을 강화했고, 1274년 노가이 칸은 비잔티움의 동맹으로서 불가리아를 침공하여 약탈했다.[8] 이 침공으로 불가리아는 안키알로스와 메셈브리아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8]

1274년 미카일 8세가 제2차 리옹 공의회에 사절을 보내 로마 가톨릭교회와의 교회 통합을 추진하자, 동방 정교회를 고수하던 불가리아와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비잔티움 내부에서도 교회 통합에 대한 반발이 심했는데, 콘스탄틴의 아내 마리아와 그녀의 어머니는 통합에 반대하는 비잔티움 귀족들의 입장을 지지했다.

콘스탄틴은 통치 말년에 낙마 사고 후유증으로 부분적으로 마비되었고 원인 모를 통증에 시달렸다. 국정 운영은 황후 마리아 팔라이올로기나 칸타쿠제네에게 넘어갔고, 그녀는 1272년경 아들 미하일 아센 2세를 공동 황제로 즉위시켰다.[9] 마리아는 1270년대 비잔티움과의 외교를 주도했으며, 1276년에는 비딘에서 독자 세력을 구축하고 황제를 참칭하던 야코프 스베토슬라프를 독살했다. 그러나 계속되는 전쟁 실패, 잦은 몽골군의 침입, 경제 불안정은 민중의 불만을 고조시켰고,[9] 결국 1277년 돼지치기 출신 이바일로가 이끄는 대규모 농민 반란(이바일로의 난)이 발발했다. 콘스탄틴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반란 진압에 나섰으나, 다리 부상으로 마차를 타고 지휘해야 했다.[9] 이 전투에서 콘스탄틴의 군대는 대패했고, 콘스탄틴 자신도 이바일로에게 사로잡혀 살해당했다.[9]

4. 3. 외교적 노력과 한계



1257년 콘스탄틴 티흐는 귀족들에 의해 미초 아센을 대신한 차르로 선출되었다.[5] 1261년 그의 군대는 미초 아센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패배한 미초 아센은 동로마 황제 미카엘 8세에게 망명했다. 콘스탄틴은 제위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 아센 가문의 혈통을 이어받은 니케아 황제 테오도로스 2세의 딸 이리니 두카이나 라스카리나와 결혼하여[5], "아센 (Асен)" 성을 사용했다.

1259년부터 1261년까지 콘스탄틴은 헝가리 왕국벨러 4세와도 전쟁을 벌여야 했다. 1259년 헝가리 군대가 불가리아를 침공했고, 1260년 콘스탄틴은 잠시 세베린(바나트) 지역을 되찾기도 했다. 그러나 1261년 헝가리 왕자 이슈트반 5세가 이끄는 헝가리 군대는 세베린을 탈환하고 불가리아의 비딘을 일시적으로 점령했다. 불가리아 군대는 러시아 출신 귀족 야코프 스베토슬라프의 도움으로 비딘을 되찾았지만, 그는 이후 비딘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며 불가리아와 헝가리 사이에서 양쪽과의 관계를 유지하려 했다.

1261년 말, 콘스탄틴의 아내 이리니의 오빠이자 니케아 제국의 황제였던 요한네스 4세가 공동 통치자 미카엘 8세에 의해 폐위되고 실명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미카엘 8세는 이미 그해 7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하여 동로마 제국을 부활시킨 상태였다. 이 사건에 분노한 왕비 이리니는 콘스탄틴을 설득하여 미카엘 8세와 적대하게 만들었다.[6] 1262년 가을, 콘스탄틴은 트라키아를 침공하여 스타니마카(현 아세노브그라드)와 필리포폴리스(현 플로브디프)를 점령했다.

이에 미카엘 8세는 반격에 나섰다. 1263년 미하일 두카스 글라바스 타르카네이오테스가 이끄는 동로마 군대는 트라키아를 침공하여 스타니마카와 필리포폴리스를 되찾았다. 또한 동로마 군대는 미초 아센으로부터 메셈브리아(현 네세바르)를 넘겨받고, 흑해 연안의 아가토폴리스(현 아흐토폴), 소조폴리스(현 소조폴), 안키알로스(현 포모리에)까지 점령했다. 동로마 함대는 비치나와 다뉴브 삼각주의 항구들을 장악했다. 이러한 동로마의 공세 속에서 야코프 스베토슬라프는 헝가리의 도움을 받아 겨우 영지를 지킬 수 있었고, 결국 헝가리 왕의 종주권을 받아들였다. 이 전쟁의 결과로 1263년 말 불가리아는 동로마 제국과 헝가리에게 상당한 영토를 상실하며 외교적으로 고립되었다.

고립을 타개하기 위해 콘스탄틴은 골든 호드(타타르)에 도움을 요청했다. 당시 골든 호드는 약 20년간 명목상 불가리아 군주의 종주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마침 미카엘 8세에 의해 투옥되었던 전 룸 술탄국의 술탄 카이카우스 2세 역시 골든 호드의 도움으로 복위하기를 원했고, 콘스탄틴에게 자신을 풀어주면 금전적 보상을 하겠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1264년 말, 수천 명의 타타르 군대가 얼어붙은 다뉴브 강 하류를 건너 동로마 제국을 침공했고, 콘스탄틴도 이에 합류했다. 그러나 콘스탄틴은 전투 중 말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다. 타타르-불가리아 연합군은 동로마 황제 미카엘 8세를 사로잡는 데는 실패했지만, 아이노스(현 에네즈) 요새를 함락시키고 카이카우스 2세를 석방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 성공이 불가리아의 전반적인 상황을 개선하지는 못했다.

1268년 왕비 이리니가 사망하자, 콘스탄틴은 1269년 미카엘 8세의 조카 마리아 팔라이올로기나 칸타쿠제노스와 결혼하여 동로마와의 관계 개선을 시도했다. 그러나 마리아의 지참금으로 약속된 앙키알로스(현 포모리에)와 메셈브리아(현 네세바르)의 반환 문제가 불거지면서 양국 관계는 다시 악화되었다.[8] 불가리아는 라틴 제국 부활을 목표로 하던 시칠리아 왕 카를로 1세와 동맹을 맺었다.[7] 이에 미카엘 8세는 자신의 사생아 유프로시네를 골든 호드의 유력자 노가이 칸과 결혼시켜 외교적으로 대응했고, 1274년 노가이는 동로마의 동맹으로서 불가리아를 침공하여 약탈했다.[8] 이로 인해 불가리아는 앙키알로스와 메셈브리아에 대한 요구를 철회해야 했다.[8] 같은 해 미카엘 8세가 제2차 리옹 공의회에서 로마 교회와의 통합을 추진하자, 이에 반대하는 왕비 마리아와 그녀의 어머니가 동로마 내 반대파 귀족들과 연대하면서 양국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치세 말년에 콘스탄틴은 낙마 사고 후유증으로 부분적으로 마비되었고 질병에 시달렸다. 실권은 왕비 마리아에게 넘어갔고, 그녀는 1272년경 아들 미하일 아센 2세를 공동 황제로 즉위시켰다.[9] 마리아는 1270년대 동로마와의 외교를 주도했으며, 1276년에는 비딘의 야코프 스베토슬라프를 독살하기도 했다. 그러나 계속된 전쟁 실패, 반복되는 몽골군의 침입, 경제적 불안정은 결국 1277년 이바일로의 난을 촉발했다.[9] 콘스탄틴은 직접 반란 진압에 나섰으나 대패하고 이바일로의 군대에게 살해당했다.[9]

5. 국내 통치



1257년 귀족들의 지지로 미초 아센을 몰아내고 차르가 된 콘스탄틴 티흐는 이반 아센 2세와의 연관성을 강조하기 위해 '아센'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그의 외손녀 이레네와 결혼하여 정통성을 강화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의 통치는 대외 관계의 어려움과 내부 불안정으로 점철되었다.

1259년부터 1261년까지 헝가리벨러 4세와 벌인 전쟁에서 패배하여 바나트 지역을 상실했으며, 한때 비딘과 롬(오늘날의 로므)까지 점령당했다. 비록 루스 출신 귀족 야코프 스베토슬라프의 도움으로 비딘을 되찾았으나, 그는 비딘을 거점으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였다.

비잔티움 제국과의 관계 역시 순탄치 않았다. 1261년 미카일 8세가 콘스탄틴의 처남인 니카이아 제국 황제 요한네스 4세를 폐위시킨 사건으로 인해 관계가 악화되었다. 1268년 첫 왕비 이레네가 사망한 후, 1269년 미카일 8세의 조카 마리아와 결혼하여 관계 개선을 시도했으나, 지참금으로 약속된 영토(앙기알로스메셈브리아) 반환 문제가 불거지면서 다시 갈등이 깊어졌다.[8] 콘스탄틴은 시칠리아의 카를로 1세와 연대하여 비잔티움에 대항하려 했으나,[7] 미카일 8세는 킵차크 칸국노가이 칸과 동맹을 맺어 불가리아를 견제했다. 1271년 혹은 1272년 콘스탄틴이 트라키아를 침공하자, 비잔티움의 사주를 받은 노가이 칸의 군대가 불가리아를 침략하여 약탈을 자행했고, 결국 콘스탄틴은 영토 요구를 철회해야 했다.[8] 1274년 미카일 8세가 제2차 리옹 공의회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와의 통합을 추진하자, 정교회 신앙을 지키려는 불가리아와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통치 말년, 콘스탄틴은 낙마 사고로 심각한 부상을 입어 하반신이 마비되었고,[9] 국정 운영은 야심 찬 왕비 마리아에게 넘어갔다. 마리아는 1272년경 자신의 아들 미하일 아센 2세를 공동 황제로 즉위시키고,[9] 1276년 잠재적 경쟁자였던 야코프 스베토슬라프를 독살하는 등 권력 강화에 힘썼다.[8]

계속되는 전쟁 실패와 비용 지출, 반복되는 몽골 군대의 침입과 약탈, 그리고 경제적 불안정은 민중의 불만을 극도로 고조시켰다.[9] 결국 1277년 대규모 민중 봉기인 이바일로의 난이 발발하였고, 콘스탄틴 아센 1세는 반란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살해당하며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9]

5. 1. 권력 집중과 반발



1257년 귀족들에 의해 미초 아센을 대신하여 차르로 선출된 콘스탄틴 티흐는 자신의 지위를 강화하기 위해 '아센'이라는 이름을 채택했다. 이는 이반 아센 2세와의 연결성을 강조하려는 의도였으며, 니카이아 제국 황제 테오도로스 2세와 이반 아센 2세의 딸 엘레나 사이에서 태어난 이레네와의 결혼을 통해 정통성을 더욱 공고히 했다. 1261년 경쟁자였던 미초 아센은 콘스탄틴에게 패배하여 비잔티움 제국의 미카일 8세에게 망명했다.

콘스탄틴 아센은 1259년부터 1261년까지 헝가리벨러 4세와 전쟁을 벌였다. 1259년 헝가리의 침입에 맞서 1260년 잠시 바나트 지역을 탈환했으나, 1261년 헝가리의 왕위 계승자였던 이슈트반 5세가 이끄는 군대에게 다시 빼앗기고 비딘과 롬(오늘날의 로므)까지 점령당했다. 이후 비딘은 루스 출신의 귀족 야코프 스베토슬라프의 도움으로 되찾았지만, 그는 비딘을 거점으로 불가리아와 헝가리 사이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며 양측 모두와 관계를 유지했다.

1261년 콘스탄틴의 처남이자 니카이아 제국의 황제였던 요한네스 4세가 미카일 8세에 의해 폐위되고 실명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요한네스 4세의 누나였던 황후 이레네와 콘스탄틴은 크게 분노했다. 1264년 콘스탄틴은 몽골의 비잔티움 침공에 가담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해 불가리아의 국제적 위치 개선에는 기여하지 못했다.

1268년 황후 이레네가 사망하자, 콘스탄틴은 1269년 비잔티움 제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미카일 8세의 조카인 마리아 팔레올로기나 칸타쿠제네와 결혼했다. 미카일 8세는 결혼 지참금으로 메셈브리아(현재의 네세버르)와 안키알로스(현재의 포모리에)를 불가리아에 반환하겠다고 약속했지만, 1272년 콘스탄틴과 마리아 사이에서 아들 미하일 아센 2세가 태어난 후에도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이에 분노한 콘스탄틴은 1271년 시칠리아의 왕 앙주의 샤를 1세에게 사절을 보내 라틴 제국 복원을 목표로 하는 반(反) 비잔티움 동맹에 참여할 의사를 타진했다.

콘스탄틴 아센의 금인. 불가리아어로 된 비문: "+콘스탄틴, 그리스도 안에서, 불가리아인의 충실한 차르이자 자치 군주, 아센."


비잔티움의 미카일 8세는 불가리아의 움직임에 대응하여 킵차크 칸국의 실력자 노가이 칸에게 자신의 사생아 유프로시네를 시집보내 동맹을 맺었다. 1271년 혹은 1272년 콘스탄틴이 트라키아를 침공하자, 미카일 8세는 노가이 칸을 부추겨 불가리아를 공격하게 했다. 몽골(타타르) 군대는 불가리아를 약탈했고, 콘스탄틴은 결국 메셈브리아와 안키알로스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포기하고 철수해야 했다. 노가이 칸은 다뉴브강 삼각주 인근의 이사크체아에 거점을 마련하여 이후에도 쉽게 불가리아를 공격할 수 있는 위치를 확보했다. 1274년 미카일 8세가 로마 가톨릭 교회와의 통합을 추진한 제2차 리옹 공의회는 불가리아와의 관계를 더욱 악화시켰다. 황후 마리아와 그녀의 어머니는 교회 통합에 반대하는 비잔티움 귀족들의 입장을 지지했으며, 심지어 맘루크 술탄 바이바르스에게 비잔티움 공격을 요청하기도 했다.

통치 말년, 콘스탄틴 아센은 낙마 사고로 허리 아래가 마비되는 심각한 부상을 입고 원인 모를 통증에 시달렸다. 국정 운영은 야심찬 황후 마리아 팔라이올로기나의 손에 넘어갔다. 그녀는 1272년 자신의 아들 미하일 아센 2세를 공동 황제로 즉위시켜 권력 기반을 다졌다. 마리아는 비잔티움과의 외교를 주도하는 한편, 왕위 계승의 잠재적 경쟁자였던 비딘의 야코프 스베토슬라프를 처음에는 구슬려 복속시켰다가 1276년 결국 독살하였다. 마리아의 이러한 권력 강화와 정적 제거는 귀족들의 반감을 샀으며, 콘스탄틴의 통치는 점차 인기를 잃어갔다.

마비된 콘스탄틴은 노가이 칸의 몽골 군대에 의한 반복적인 약탈을 막을 힘이 없었다. 계속되는 전쟁 실패, 외세의 침략, 그리고 경제적 불안정(콘스탄틴은 자신의 얼굴을 새긴 동전을 대량으로 발행한 최초의 불가리아 군주였지만, 이는 경제 상황 개선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은 민중의 불만을 극도로 고조시켰다. 결국 1277년, 돼지치기 출신으로 알려진 이바일로를 중심으로 대규모 민중 봉기인 이바일로의 난이 발발했다. 이바일로는 불만을 품은 농민과 하층민들의 지지를 얻어 빠르게 세력을 확장하고 상당한 지역을 장악했다. 콘스탄틴 아센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이바일로를 진압하려 나섰으나,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하고 자신의 전차 안에서 살해당했다.

5. 2. 이바일로의 난

콘스탄틴 아센 1세의 통치 말기는 여러 문제로 얼룩졌다. 비용이 많이 들었으나 성과 없는 전쟁, 몽골(노가이 칸 휘하) 군대의 반복적인 침입과 약탈, 그리고 경제적 불안정은 국가적 위기를 심화시켰다.[9] 더욱이 콘스탄틴 1세는 낙마 사고로 인해 하반신이 마비되는 심각한 부상을 입어[9] 국정을 제대로 돌보기 어려워졌고, 이로 인해 왕비 마리아가 실권을 장악했다. 그녀는 자신의 아들 미하일 아센 2세를 공동 황제로 즉위시키고,[9] 잠재적 경쟁자였던 비딘의 야코프 스베토슬라프를 독살[8]하는 등 권력 기반을 다지려 했지만, 이러한 조치들은 귀족들과 백성들의 불만을 가중시켰다.

중앙 정부가 몽골의 약탈을 효과적으로 막아내지 못하자, 백성들의 불만은 극에 달했다. 결국 1277년, 농민 출신인 이바일로가 주도하는 대규모 민중 봉기가 발생했다.[9] 이바일로는 불만을 품은 많은 하층민들의 지지를 얻으며 빠르게 세력을 확장하여 상당한 지역을 장악했다. 콘스탄틴 1세는 마비된 몸으로 마차에[9] 의지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반란 진압에 나섰지만, 이바일로가 이끄는 반란군에게 결정적으로 패배하였고 전투 중 마차 안에서 살해당했다.[9]

6. 가족 관계

콘스탄틴 티흐는 생애 동안 세 번 결혼했다. 첫 번째 부인과 그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

관계이름비고
첫 번째 부인알려지지 않음자녀 이름도 알려지지 않음
두 번째 부인이레네 두카이나 라스카리나니케아 제국 황제 테오도로스 2세의 딸. 자녀 없음. 1268년 사망.
세 번째 부인마리아 칸타쿠제네동로마 제국 황제 미하일 8세의 조카.
아들 (세 번째 부인 소생)미하일 아센 2세1277년부터 1279년까지 불가리아의 공동 황제로 즉위했다.[4]


참조

[1] 서적 History of Macedonia in the Middle Ages https://books.google[...] Gutenberg
[2] 서적 Godishnik na Sofiĭskii︠a︡ universitet, Fakultet po slavi︠a︡nski filologii https://books.google[...] Nauka i izkustvo.
[3] 서적 History of Bulgaria. Volume III-Second Bulgarian Empire Publishing House of the Bulgarian Academy of Sciences
[4] 서적 Medieval Bulgarian ruler Anubis
[5] 문서 イレネの母親は、ブルガリア皇帝[[イヴァン・アセン2世]]の王女エレナ([[:en:Elena Asenina of Bulgaria|Elena Asenina of Bulgaria]])であり、イレネはイヴァン・アセン2世の孫にあたる。
[6] 서적 ビザンツ帝国史
[7] 서적 ブルガリア 1
[8] 서적 ビザンツ帝国史
[9] 서적 ブルガリア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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