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바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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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이바르스는 킵차크 출신으로, 맘루크 왕조의 제5대 술탄(1260-1277)이다. 몽골군에 맞서 아인잘루트 전투에서 승리하여 이슬람 세계의 영웅으로 칭송받았으며, 십자군과의 전쟁에서 안티오키아를 함락시키는 등 괄목할 만한 전과를 올렸다. 그는 중앙 집권 체제를 강화하고, 몽골과의 외교를 통해 국력을 신장시켰으며, 카이로-다마스쿠스 간 기마 전령 시스템을 구축하는 등 내정에도 힘썼다. 바이바르스는 다마스쿠스에 묻혔으며, 그의 업적은 이집트와 시리아에서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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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바르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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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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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이집트와 시리아의 술탄, 알-말리크 알-자히르 루큰 알-딘 |
즉위 | 1260년, 살리히야에서 |
전체 이름 | 알-말리크 알-자히르 루큰 알-딘 바이바르스 알-분두크다리 아부 알-푸투 |
출생일 | 1223년 7월 19일 또는 1228년 |
출생지 | 킵차크 초원 크림 반도 |
사망일 | 1277년 7월 1일 (50/55세) |
사망지 | 맘루크 술탄국 다마스쿠스 |
종교 | 이슬람 |
통치 | |
재위 기간 | 1260년 10월 24일 – 1277년 7월 1일 |
이전 통치자 | 사이프 앗딘 쿠투즈 |
다음 통치자 | 알-사이드 바라카 |
가족 | |
배우자 | 일투트미시 카툰 (베르케의 딸) |
자녀 | 알-사이드 바라카 살라미쉬 키지르 티드카르바이 카툰 |
왕가 | 자히리 |
왕조 | 바흐리 왕조 |
2. 생애
바이바르스는 킵차크족 출신으로 흑해 북쪽 스텝 지역인 다슈트-이 킵차크에서 태어났다.[13][14][15][16][17] 출생 연도는 1227년에서 1228년 사이, 혹은 1223년으로 추정된다.[18] 그는 바를리 부족 출신으로, 몽골 제국의 침략을 피해 제2 불가리아 제국으로 피난했다가 포로로 잡혀 룸 술탄국의 노예 시장으로 팔려갔다.[18][19] 이후 하마의 아이유브 왕조 고위 관료에게 팔려 카이로로 보내졌고, 1247년 주인이 체포되면서 이집트 술탄 아스-살리 아유브의 소유가 되었다.[19]
1249년 프랑스의 루이 9세가 이끄는 제7차 십자군에 맞서 만수라 전투와 파리스쿠르 전투에서 승리하며 맘루크 군인으로서 활약했다.[22][23][24] 1254년 술탄 아이바크가 맘루크 군단장 아크다이를 살해하자, 시리아로 망명했다.[94] 1260년 몽골 제국의 침입이 임박하자, 쿠투즈와 화해하고 아인잘루트 전투에서 몽골군을 격파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109] 전투 후 쿠투즈가 암살당하고, 바이바르스는 맘루크 왕조의 술탄으로 즉위했다.[25][26][114]
즉위 초, 바이바르스는 카이로 시민들의 불안을 잠재우고,[115][116][117] 다마스쿠스에서 일어난 신자르의 반란을 진압했다.[27][28][29] 1261년에는 아바스 왕조의 칼리파를 카이로에서 보호하며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했다.
1268년 안티오키아 공국을 멸망시키는 등 십자군과의 전쟁을 지속했다.[38] 1271년 에드워드 1세가 이끄는 제9차 십자군과 휴전을 맺기도 했다.[25] 일 칸국에 대항하기 위해 킵차크 한국과 동맹을 맺고, 비잔티움 제국, 시칠리아와도 통상 관계를 맺었다.[42][43]
2. 1. 초기 생애
바이바르스는 킵차크족 출신으로, 흑해 북쪽의 스텝 지역인 다슈트-이 킵차크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13][14][15][16][17] 이븐 타그리버르디는 그의 출생 연도에 대해 엇갈린 정보를 제공하는데, 625년(1227년 12월 12일 – 1228년 11월 29일)에 태어났다고도 하고, 1247년에 바이바르스가 약 24세였다고 언급하여 1223년에 더 가깝게 태어났을 것이라고도 추정한다. 그는 바를리 부족 출신이었다. 동족인 쿠만인이자 목격자인 바드르 알-딘 바이사리의 증언에 따르면, 바를리족은 몽골 제국의 군대를 피해 제2 불가리아 제국(자료에서는 왈라키아)에 정착하려 했다. 그들은 1242년경 불가리아에 도착한 크림 반도 또는 알라니아에서 흑해를 건넜다. 한편, 불가리아와 세르비아에 대한 몽골 침략으로 쿠만 난민들이 최근 정착한 지역까지 침략했다.[18]1242년 몽골군의 침입으로 바이바르스는 포로가 되어 노예 상인에게 팔려갔다. 몽골군 침입 이후 중동 노예 시장은 공급 과다 상태였고, 바이바르스는 신체적 특징 때문에 구매자를 찾기 어려웠다.[84] 하마의 아이유브 왕조 왕족에게 팔렸지만 피부색이 검다는 이유로 반환되었고,[83] 다마스쿠스로 옮겨져 800디르함 (약 40디나르)에 구매되었지만, 한쪽 눈에 백내장 반점이 있다는 이유로 다시 반환되었다.[80][83] 결국 하마로 돌아가 아이유브 왕조의 아미르 (사령관)인 아이다킨 알-분두크다리에 의해 구매되어 노예 신분에서 해방되었다. 마술에 뛰어났기 때문에 아이유브 왕조의 귀족이 그를 사서 술탄 앗 살리흐 나짐 앗 딘 아이유브의 맘루크군에 편입시켰고, 이후 술탄의 경호대장이 될 정도로 출세했다.
아이다킨은 1246년에 술탄 사리흐의 미움을 받아 하마로 좌천되었다가 용서받고, 카이로로 이주했다.[84][85] 그러나 다시 사리흐의 분노를 사 재산을 몰수당했고, 바이바르스는 사리흐 직속 맘루크 군단인 바흐리 맘루크에 편입되었다. 사리흐 휘하에서 바이바르스는 처음에는 의상 담당으로 임명되었고,[83] 20세 무렵 연대장의 지위에 올랐다.[86]
맘루크 군인으로서 바이바르스는 1249년 프랑스의 루이 9세가 이끄는 제7차 십자군 때 처음으로 활약했다. 이집트는 술탄 사리프가 병으로 군 통제가 어려워지자 맘루크 군단에서 군단장을 대신해 지휘를 맡아 1250년 만스라 전투에서 루이 9세를 격파하고 포로로 잡았다.
이집트의 술탄 살리흐가 죽고, 투란 샤, 샤자르 알 두르, 술탄 아이바크 순으로 지배자가 바뀌었다. 1254년 맘루크에 대한 반항 등을 거쳐 술탄 아이바크가 권력을 잡은 후, 아이바크는 바이바르스 소속이자 맘루크군의 군단장인 아크다이를 살해했다.[94]
바이바르스는 동료들과 이집트를 탈출해 다마스쿠스의 나시르에게 망명했다. 이후 바이바르스는 나시르와 사이가 나빠져 카라크성주 무기스에게 갔으나, 바이바르스가 이집트군에게 패배하면서 무기스와의 관계도 나빠졌다.[96]
1260년 몽골 제국의 훌라구 군대가 시리아에 육박하자, 아크다이를 살해했던 쿠투즈는 바이바르스와 화해했다. 7월 3일 쿠투즈와 바이바르스 연합군은 아인잘루트 전투에서 몽골군을 격파하고 사령관 키트부가를 죽였다. 바이바르스는 이집트로 개선하던 도중 쿠투즈를 살해했는데, 이는 군단장 아크다이를 살해한 것을 용서하지 않았고 쿠투즈가 자신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바이바르스는 그대로 카이로에 들어가 맘루크 왕조 5대 술탄이 되었다.
2. 2. 맘루크 군인으로서의 활약
1242년 바이바르스는 몽골군의 포로가 되어 노예 상인에게 팔려갔다. 그는 신체적 특징 때문에 처음에는 아무도 사려 하지 않았지만, 마술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아이유브 왕조의 귀족에게 팔렸고, 술탄 앗 살리흐 나짐 앗 딘 아이유브의 맘루크군에 편입되었다. 이후 능력을 인정받아 술탄의 경호대장까지 승진했다.바이바르스가 맘루크 군인으로서 처음으로 활약한 것은 1249년 프랑스의 루이 9세가 이끈 제7차 십자군 전쟁 때였다. 당시 이집트는 술탄 살리흐가 병으로 군 통솔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바이바르스는 맘루크 군단을 이끌고 1250년 만스라 전투에서 루이 9세를 격파하고 포로로 잡는 큰 공을 세웠다.

1250년, 바이바르스는 제7차 십자군을 이끈 루이 9세를 상대로 두 번의 중요한 전투에서 승리하는 데 기여했다. 첫 번째는 알 만수라 전투로, 바이바르스는 십자군 기사들이 마을로 들어오도록 성문을 열어두는 전략을 사용했다. 십자군 기사들은 비어 있다고 생각한 마을로 돌진했지만, 이집트 군대와 마을 주민들에게 포위되어 큰 피해를 입었다. 아르투아의 로베르는 한 집에 숨었고,[22] 젊은 윌리엄 롱스페를 비롯한 대부분의 템플 기사단이 전사했다. 템플 기사단 기사 중 단 5명만이 살아남았다.[23] 두 번째는 파리스쿠르 전투로, 이 전투의 승리로 제7차 십자군은 사실상 종식되었고 루이 9세는 포로로 잡혔다. 이 전투에서 이집트군은 최근 사망한 아스 살리 아유브의 어린 아들 투란샤 술탄이 이끌었다. 십자군과의 승리 직후, 바이바르스와 맘루크 병사들은 투란샤를 암살했고, 아스 살리 아유브의 미망인 샤자르 알-두르가 술타나로 즉위했다.[24]
이후 이집트의 지배자는 투란 샤, 샤자르 알 두르, 아이바크 순으로 바뀌었다. 1254년, 맘루크에 대한 반란 진압 후 술탄 아이바크가 권력을 장악하자, 그는 바이바르스 소속의 맘루크군 군단장 아크다이를 살해했다.
같은 해, 아이바크가 바흐리 맘루크의 지도자 파리스 아드-딘 아크타이를 살해하면서 이집트 내 권력 구도에 변화가 생겼다. 바이바르스와 칼라운 알-알피를 포함한 일부 맘루크들은 시리아의 안-나시르 유수프에게 망명하여 이집트 침공을 설득했다. 아이바크는 안-나시르 유수프에게 서신을 보내 망명한 맘루크들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해안 지역의 영토를 양도하겠다고 제안했지만, 안-나시르 유수프는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아이바크가 양도한 영토를 맘루크들에게 돌려주었다.
이에 바이바르스는 이집트를 탈출해 다마스쿠스의 나시르에게 의탁했다. 이후 나시르에게서도 물러나 카라크 성주 무기스에게 갔으나, 이집트군에게 패배하면서 무기스와의 관계도 악화되었다. 1255년, 안-나시르 유수프는 아크타이의 맘루크들(바이바르스와 칼라운 알-알피 포함)을 이끌고 이집트 국경을 공격했지만, 다시 패배했다. 1257년, 바이바르스와 다른 바흐리 맘루크들은 다마스쿠스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가서 총독 퀴튀크를 몰아내고 시장을 약탈했으며, 가자에서도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이후 나블루스에서 안-나시르 유수프의 군대와 전투를 벌인 후, 케라크의 군대에 합류하기 위해 도망쳤다. 연합군은 아이바크 통치 기간 동안 이집트 침공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이후 바이바르스는 '알라 알-딘 타이바르스 알-와지리'를 통해 쿠투즈에게 이집트 귀환을 요청했고, 쿠투즈는 이를 수락했다. 1260년 몽골 제국의 훌라구 군대가 시리아로 진격해 오자, 과거 아크다이를 살해했던 쿠투즈는 바이바르스와 화해했다. 같은 해 7월 3일, 쿠투즈와 바이바르스 연합군은 아인잘루트 전투에서 몽골군을 격파하고 사령관 키트부가를 처형하며 승리했다. 바이바르스는 아인 잘루트 전투에서 술탄 쿠투즈 휘하의 지휘관으로 참전하여 몽골군을 격파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전투 후, 술탄 쿠투즈는 사냥 여행 중 암살당했는데, 바이바르스가 군사적 공적에 대한 보상으로 알레포 총독 자리를 기대했으나 쿠투즈가 그의 야심을 경계하여 거절했기 때문에 암살에 연루되었다는 설이 있다.[25] 바이바르스는 쿠투즈의 뒤를 이어 이집트 술탄이 되었다.[26]
2. 3. 술탄 즉위
1260년 아인잘루트 전투에서 술탄 쿠투즈 휘하의 지휘관으로 몽골군을 격파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전투 후, 사냥 여행 중에 쿠투즈가 암살당했는데, 바이바르스가 군사적 성공에 대한 보상으로 알레포 총독직을 기대했지만 쿠투즈가 그의 야심을 두려워하여 거절했기 때문에 암살에 연루되었다고 한다.[25] 바이바르스는 쿠투즈의 뒤를 이어 이집트 술탄이 되었다.[26] 튀르크의 관습에 따라 쿠투즈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한 바이바르스가 새로운 술탄으로 추대되었다.[114]즉위 직후, 바이바르스는 카이로의 무카탐 요새로 들어가 부장들로부터 충성의 맹세를 받았다.[115] 그러나 카이로 시민들은 쿠투즈의 죽음과 바이바르스의 즉위에 당황하여 바흐리 맘루크에 의한 통치에 불안을 품었다.[116][117] 바이바르스는 쿠투즈가 부과했던 세금을 폐지하고, 바흐리 맘루크들에게 시민들에게 해를 가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함으로써 인심을 안정시켰다.[115]
1261년 훌라구에게 살해된 압바스 왕조 최후의 칼리파 알무스타심의 숙부를 카이로에서 보호했다. 이는 바이바르스에게 정권의 정당성을 부여하고 구심력을 높이는 데 결정적인 사건이 되었다. 다만 바이바르스는 칼리파에게 실권을 주지 않았기에 명목상의 존재였다.
바이바르스가 술탄 자리에 오른 직후, 신자르 알-할라비를 제외하고는 심각한 저항 없이 그의 권위를 확고히 했다.[27][28][29] 신자르는 다마스쿠스를 주장할 정도로 강력한 또 다른 맘루크 아미르였다. 몽골의 위협은 여전히 심각하여 바이바르스의 권위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될 정도였다. 그러나 바이바르스는 먼저 신자르를 처리하기로 결정하고[27][28][29] 다마스쿠스로 진격했다. 1261년 1월 17일, 바이바르스의 군대는 다마스쿠스 외곽에서 신자르의 군대를 격파하고 도시를 공격했다. 시민들은 신자르에게 충성을 다하며 저항했지만, 곧 진압되었다.
또한, 알-쿠라니라는 시아파 지도자가 이끄는 카이로에서 짧은 반란이 있었다. 알-쿠라니와 그의 추종자들은 야간 습격 중에 카이로의 무기고와 마구간을 공격했지만, 바이바르스는 그들을 포위하고 체포하여 반란을 빠르게 진압했다. 알-쿠라니와 다른 반란 지도자들은 바브 주웨일라에서 처형되었다.[27]
신자르의 반란을 진압한 후, 바이바르스는 아이유브 왕조를 처리하는 동시에 케라크의 군주를 조용히 제거했다. 알-아슈라프 무사, 호므스의 아미르와 하마의 아이유브 왕조 군주인 알-만수르 무함마드 2세와 같은 아이유브 왕조는 바이바르스의 술탄으로서의 권위를 인정하는 대가로 그들의 통치를 계속할 수 있도록 허용되었다.[30]
1258년 몽골이 이라크의 아바스 칼리파조를 멸망시키고 바그다드를 약탈하면서 이슬람 세계에는 칼리프가 없었다. 1261년 마지막 아바스 칼리프 알-무스타심의 삼촌인 아바스 난민 아부 알-카심 아흐마드가 카이로에 도착하자, 바이바르스는 그를 알-무스탄시르 2세로 선포하고 그로부터 술탄으로 임명을 받았다. 알-무스탄시르 2세는 그해 늦게 몽골군에게 살해되었다. 1262년, 알-무스타르시드 칼리프의 고손자, 아부 알-아바스 아흐마드가 알-하킴 1세로 선포되어 맘루크 술탄국이 1517년까지 지속되는 카이로의 아바스 칼리프의 계보를 시작했다. 대부분의 이슬람 세계는 이 칼리프들을 술탄의 단순한 도구로 여겨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지만, 그들은 여전히 그들의 통치에 어느 정도의 정당성과 장식적인 요소를 제공했다.
2. 4. 십자군과의 전쟁
1268년 훌라구의 죽음으로 혼란해진 틈을 타 북상하여 몽골에 협력했던 십자군 국가들의 여러 도시를 공략하여 완전히 파괴했다. 5월 14일 안티오키아를 포위해 약 4일 만에 함락시켜 안티오키아 공국을 멸망시켰다. 그 때 주민들을 모두 살해하고, 일부는 노예로 만들었으며 도시는 완전히 파괴했다.[38] 이는 기독교 국가들을 자극하여 에드워드 1세가 이끄는 십자군 파병을 불러일으켰다. 1271년 십자군이 침공해오자 그들과 싸웠고, 이후 에드워드 1세와 휴전을 맺었다. 일부 문헌에 따르면, 바이바르스는 에드워드 1세를 독살하려 했으나 실패했다고 전해진다.[25] 결국 에드워드는 아버지 헨리 3세의 죽음으로 인해 철수했다.그의 치세 동안 안티오키아뿐만 아니라, 알레포, 하이파, 아르스프 등 십자군의 여러 도시를 함락시켰다.
바이바르스는 술탄으로서 십자군 왕국과 평생에 걸쳐 투쟁했는데, 이는 기독교도들이 몽골을 도왔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몽골의 속국이 되어 다마스쿠스와 시리아에서 이슬람을 공격하는 데 참여했던 안티오크 공국을 시작으로 삼았다. 1263년, 바이바르스는 예루살렘 왕국의 잔존 수도인 아크레를 포위했지만, 대신 나사렛을 약탈하면서 포위 공격은 중단되었다.[31] 그는 아르수프 함락 전투(3월 21일~4월 30일)와 같은 전투에서 십자군을 격파하기 위해 공성 무기를 사용했다. 마을에 진입한 후, 그는 강력한 요새를 항복하면 방어하던 성 요한 기사단에게 안전한 통행을 제안했다. 기사단은 바이바르스의 제안을 받아들였지만, 결국 노예가 되었다.[32] 바이바르스는 성을 무너뜨렸다.[33] 그는 다음으로 아틀리트와 하이파를 공격하여 십자군의 저항을 파괴한 후 두 도시를 점령하고 요새를 파괴했다.[34]
같은 해, 바이바르스는 템플 기사단이 점령한 사페드 요새를 포위했는데, 이 요새는 1188년 살라딘에게 정복되었지만 1240년에 예루살렘 왕국으로 반환되었다. 바이바르스는 기사단에게 요새를 항복하면 기독교 도시인 아크레로 안전하게 통과할 수 있도록 약속했다. 수적으로 열세였던 기사단은 동의했다. 항복하자 바이바르스는 약속을 어기고 템플 기사단 주둔군 전체를 학살했다. 사페드를 점령한 바이바르스는 요새를 무너뜨리지 않고 대신 요새를 강화하고 수리했는데, 이는 전략적으로 위치가 좋고 잘 지어졌기 때문이다. 그는 사페드에 "왈리" 직위를 가진 새로운 총독을 임명했다.[35]
이후 1266년, 바이바르스는 몽골 제국에 복속했던 킬리키아 아르메니아를 침공했는데, 당시 국왕은 헤툼 1세였다. 바이바르스는 마리 전투에서 헤툼 1세의 군대를 격파한 후, 마미스트라, 아다나, 타르수스의 세 도시에 큰 피해를 입혔고, 헤툼이 몽골 군대와 함께 도착했을 때는 이미 국토가 황폐화된 상태였다. 헤툼은 아들 레오 2세를 돌려받기 위해 아르메니아 국경 요새의 통제권을 맘루크에게 넘겨주는 협상을 해야 했다. 1269년, 헤툼은 아들에게 양위하고 수도사가 되었지만 1년 후 사망했다.[36] 레오는 킬리키아를 몽골 제국의 신하로 유지하면서 동시에 맘루크에게 조공을 바쳐야 하는 난처한 상황에 놓였다.[37]
이로 인해 안티오크와 헤툼의 사위인 보에몽 6세 공작이 이끄는 트리폴리가 고립되었다. 킬리키아를 성공적으로 정복한 후 1267년, 바이바르스는 아크레와의 미결 문제를 해결하고, 다음 해에 남은 십자군 주둔군을 완전히 몰살했다. 1268년, 그는 안티오크를 포위하여 5월 18일 도시를 점령했다. 바이바르스는 주민들의 생명을 살려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약속을 어기고 항복 후 도시를 파괴했으며 많은 사람들을 살해하거나 노예로 만들었다.[38] 이로 인해 안티오크 공국이 멸망했다. 안티오크에서 남녀노소 학살은 "십자군 시대 전체에서 가장 큰 학살"이었다.[39] 사제들은 교회 안에서 목이 잘렸고, 여성들은 노예로 팔려갔다.[40]
그런 다음 그는 야파로 향했는데, 야파는 이벨린의 존의 아들인 가이의 소유였다. 야파는 12시간의 전투 끝에 3월 7일 바이바르스에게 함락되었고, 야파 시민 대부분이 살해되었지만, 바이바르스는 주둔군은 해치지 않고 내보냈다.[41] 그 후 그는 아슈켈론과 카이사레아를 정복했다.
1271년 3월 30일, 바이바르스는 인근의 더 작은 성들을 점령한 후, 샤스텔 블랑을 포함하여, 병원 기사단이 지키고 있던 크라크 데 슈발리에를 포위했다. 이 지역에 살던 농민들은 안전을 위해 성으로 피난했고, 외곽에 갇혀 있었다. 바이바르스가 도착하자마자 그는 성을 공격할 강력한 공성 무기인 망고넬을 세우기 시작했다. 이븐 샤다드에 따르면, 이틀 후 수비군의 첫 번째 방어선이 포위자들에게 점령되었는데, 그는 아마도 성 입구 바깥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교외를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44] 열흘간의 소강 상태 이후, 포위군은 수비대에 트리폴리의 병원 기사단 총장인 위그 드 레벨이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서신을 전달하여 항복을 허가했다. 수비대는 항복했고 술탄은 그들의 생명을 살려주었다.[44] 성의 새로운 소유자들은 수리를 시작했고, 주로 외곽에 집중했다.[45] 병원 기사단의 예배당은 모스크로 개조되었고, 두 개의 미흐라브가 내부에 추가되었다.[46]
바이바르스는 이후 트리폴리에 주목했지만, 1271년 5월 휴전을 요구하기 위해 그곳의 포위를 중단했다. 안티오크의 함락은 제9차 십자군 전쟁으로 이어졌고,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왕자가 이끌었다. 그는 1271년 5월 아크레에 도착하여 바이바르스에 대항하여 몽골과 동맹을 맺으려 했다. 그래서 바이바르스는 트리폴리와 에드워드와 휴전을 선언했는데, 어쨌든 에드워드는 바이바르스에게서 어떤 영토도 점령할 수 없었다.
2. 5. 몽골과의 관계
1260년 몽골 제국의 훌라구 군대가 시리아에 육박하자, 쿠투즈는 바이바르스와 화해했다. 같은 해 7월 3일 쿠투즈와 바이바르스 연합군은 아인잘루트 전투에서 몽골군을 격파하고, 사령관 키트부카를 죽여 승리했다. 이 승리로 몽골 제국의 아랍 세계 진출은 저지되었고, 맘루크 왕조는 이집트와 시리아를 통합하는 계기를 마련했다.[109]1268년 훌라구의 죽음으로 혼란에 빠진 틈을 타 북상하여 몽골에 협력했던 십자군 국가의 여러 도시를 공략하여 완전히 파괴했다.
몽골에 대해선 적대하던 일 칸국에 대항하기 위해 킵차크 한국과 동맹을 맺고, 비잔티움 제국, 시칠리아와도 통상관계를 열었다.
바이바르스는 골든 호드의 칸인 베르케와 긴밀한 관계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42] 훌라구를 막 물리친 바이바르스는 즉시 베르케에게 사절을 보내 이 사실을 알렸다. 그 후 베르케가 이슬람으로 개종하자, 그는 이 소식을 알리기 위해 이집트로 사절을 보냈고, 바이바르스는 골든 호드에서 더 많은 사람들을 이집트로 보내 그들 또한 이슬람으로 개종하도록 했다.[42]
1261년/62년, 200명의 몽골인 기병이 가족을 데리고 이집트로 망명했다.[126][127] 바이바르스는 그들을 정중하게 대우하여 주거, 관직, 이크타를 부여했다. 호의적인 태도 덕분에 이듬해에도 이주민들이 이집트에 도착하여 바이바르스 치세에 3,000명의 몽골인이 이집트·시리아로 이주했다.[128]
1262년 말, 바이바르스는 베르케의 측근에게 사절단을 파견했다.[129] 바이바르스가 파견한 사절단과 엇갈리게 베르케로부터 파견된 사절단이 이집트에 도착하여 일 칸국을 세운 훌라구에 대한 군사 동맹 체결이 제안되었다.[130] 바이바르스는 사절의 방문을 기뻐하며 선물과 베르케의 개종을 축복하는 서신을 지닌 답례 사절을 파견했다.[131]
1262년부터 2년 이상 훌레구는 베르케와의 전쟁에 묶여 있었고, 바이바르스는 대 몽골전에 대비한 군비를 갖출 수 있었다.[132]
1271년 몽골과 룸 셀주크 왕조의 연합군이 시리아에 침입했다.[158] 몽골군과의 전투 중에 아바카가 휴전을 제안하는 사자를 파견했지만, 바이바르스는 아바카 자신이거나 그의 동생이 이집트로 오도록 요구하여 평화는 성립되지 않았다.[159]
1277년 아나톨리아의 몽골 & 조지아 연합군을 격파했다.
1267년 10월에서 11월 사이, 바이바르스는 골든 호드의 새로운 칸인 몽케 테무르에게 조문과 축하 편지를 써서 그에게 아바카와 싸울 것을 촉구했다. 바이바르스는 골든 호드와 따뜻한 서신 교환을 계속했는데, 특히 몽케 테무르와 달리 바이바르스에게 매우 협조적이었던 몽케 테무르의 장군 노가이와 그랬다.[43]
3. 내정
바이바르스는 '하리드망'이라 불리는 역참 제도를 정비하여 국내 정보 수집 능력을 향상시켰다.[118] 이는 유목민 통합 정책의 일환이기도 했다. 유목민들에게 역마을 공급하게 하고, 아미르의 지위와 이구다를 수여하여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했다.[118] 나일강의 범람이 문제없이 일어난 것도 바이바르스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살라딘 사후 아이유브 왕조처럼 카리스마에 의존한 왕조는 급속히 쇠퇴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바이바르스는 칼리프를 보호하고 정권을 강화하여 이를 극복했다. 그의 사후 아들이 폐위되는 등 정치적 혼란이 있었지만, 견고한 국가 기반 덕분에 체제가 빠르게 정립되었다.
1261년 칼리프 옹립과 함께 이집트-시리아 간 역참(바리드) 제도를 정비했다.[118] 수십 km마다 역사가 설치되었고, 가도를 따라 사는 아랍 유목민에게는 역에 배치될 말을 제공할 의무가 부과되었다.[118] 바리드 제도를 통해 카이로-다마스쿠스 간 4일 만에 이동이 가능해졌고,[72][182][184] 위급 상황에는 전서구로 경고를 전달했다.[180][185] 이 제도로 바이바르스는 카이로에 머무르면서도 각지 총독의 움직임을 감지할 수 있었다.[172][186] 중앙 집권 체제 확립, 아랍 유목민 통제 강화에 기여했다.[186]
바이바르스는 독실한 수니파 신자로,[78] 1266년부터 1268년까지 메카, 메디나의 샤리프 분쟁에 개입하여 히자즈로 원정을 갔다. 1269년에는 메카 순례를 마치고 휘하 장군을 메카 총독으로 임명했다.[189]
수니파의 4대 법학파를 공인하고 각 학파 대표 카디 4명을 임명했다.[180] 샤피 학파 대 카디가 최고위, 한발 학파, 말리크 학파, 하나피 학파 대 카디가 그 다음 지위였다.[190] 수니파 4학파가 명목상 동등한 입장을 가지면서 수니파 전체 권위가 향상되었고, 카디 임명을 통해 울라마 통제력도 강화되었다.[180] 국가 주요 수입원이던 매춘을 엄격히 단속했다.[66]
1261년 맘루크 왕조에 망명한 무스탄시르 2세를 칼리프로 옹립했다. 무스탄시르 2세와 카이로에서 화려한 행진을 벌였으며, 이슬람교도, 유대교도, 기독교도도 참여했다.[120] 북인도, 모로코 이슬람 정권에 사절을 파견하여 후트바에 무스탄시르 2세 이름을 넣도록 요구했고, 이슬람 세계 각국에서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졌다.[191] 맘루크 왕조 술탄이 칼리프 보호자가 됨으로써 아이유브 왕조를 타도한 맘루크 정권 정통성을 보여주었다.[118] 하프스 왕조 알 무스탄시르와 관계가 악화되었지만, 1270년 루이 9세가 튀니스로 향했을 때 하프스 왕조에 지원을 제의했다.[192] 무스탄시르 2세 사후 하킴을 칼리프로 옹립하여 유사 칼리프 제도가 지속되었다.[120] 칼리프가 힘을 갖는 것을 위험시하여[193] 하킴에게 카이로 시민과 접촉을 금지했다.[194]
가마(마흐밀)를 실은 낙타를 선두로 하는 순례단을 메카로 파견하고, 카바 신전에 덮는 비단 덮개(키스와)를 헌상하는 연례 의식을 시작했다.[118] 칼리프 보호와 함께 성지 보호자임을 과시하여 술탄 권력을 정당화하려 했다.[118] 메카, 예루살렘 두 성지, 순례자 보호에 주력한 바이바르스는 "양 성지의 보호자"를 자칭했다.[79]
효율적인 행정가로서 4일 만에 카이로에서 다마스쿠스로 소식을 전달하는 기마 전령 시스템 등 기반 시설 건설 프로젝트에 관심을 보였다. 다리와 관개 및 운송 운하를 건설하고 항구를 개선했으며 모스크를 지었다. 이슬람 과학 후원자로 이븐 알-나피스 의학 연구를 지원했다.[64] 이슬람과 고양이의 특별한 관계를 증명하듯 카이로에 고양이 정원을 와크프로 남겨 고양이들에게 음식과 쉼터를 제공했다.[65]
회고록은 전투와 업적을 기록한 아랍 로맨스 ''시라트 알-자히르 바이바르스''에 기록되었다. 카자흐스탄, 이집트, 팔레스타인, 레바논, 시리아에서 영웅적 지위를 가지고 있다.
다마스쿠스에 있는 영묘 옆에 ''알-마드라사 알-자히리야'' 학교가 건설되었다. 아즈-자히리야 도서관은 다양한 지식 분야의 풍부한 필사본을 보유하고 있다.
4. 평가
바이바르스는 맘루크 왕조 200년의 기초를 쌓은 인물로, 십자군과 몽골군을 상대로 승리하여 군사, 정치 양면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아이유브 왕조의 살라딘과 비견될 정도로 명군으로 칭송받았으며, 그의 묘는 다마스쿠스에 있는 살라딘 묘 근처, 자신이 세운 앗자히리야 도서관 돔 건물 안에 있다.[54]
이집트와 시리아에서는 영웅으로 추앙받았지만, 안티오키아를 파괴하고 주민들을 가혹하게 처벌했기 때문에 기독교 국가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러나 비잔티움 제국과 교역을 하는 등 기독교 국가와 적극적으로 교류하기도 했다.
1277년 룸 술탄국을 침공하여 엘비스탄 전투에서 일 칸국 군대를 격파하고 카이세리를 점령했다.[50] 그러나 몽골군의 강력함과 보급 문제로 인해 시리아로 돌아가야 했다.[52]
바이바르스는 1277년 다마스쿠스에서 53세의 나이로 사망했는데, 독살설과 부상 또는 질병으로 인한 사망설이 있다.[53]
그는 벽안에 키가 크고 갈색 피부를 가진 우렁찬 목소리의 소유자였다.[177][178] 신중하고 금욕적인 성격으로 돈에 대한 집착이 없었으며,[66] 활동적이고 용감했지만 폭력적인 성격으로 부하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다.[172] 역사에 깊은 관심을 보였고, "과거의 일을 듣는 것은 어떤 경험보다 낫다"고 말했다.[179]
사냥과 폴로를 즐겼으며,[66] 카이로 교외에 경기장을 건설했다.[181] 말을 갈아타며 일주일 만에 카이로와 다마스쿠스 사이를 이동하고, 다시 폴로를 즐길 정도로 초인적인 체력을 가졌다고 전해진다.[182] 원영에도 능숙하여 갑옷을 입은 채 나일강을 헤엄치기도 했다.[181]
바이바르스와 칼라운의 측근이었던 이븐 압드 알-자히르(1223년 - 1293년)는 바이바르스의 전기를 저술했지만, 원전은 흩어져 없어졌고, 조카에 의해 개편된 텍스트만이 남아있다.[183]
5. 유산
바이바르스는 바흐리 맘루크 왕조의 초대 술탄으로, 맘루크 사회에서 실력 위주로 승진하여 1260년 아인 잘루트 전투에서 몽골군을 격퇴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60] 그는 이슬람 세계에서 수세기 동안 민족 영웅으로 여겨졌으며, 근동과 카자흐스탄에서도 여전히 그렇게 여겨지고 있다.
바이바르스는 몽골족을 이슬람교로 이끄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42] 그는 킵차크 칸국의 몽골족과 강력한 관계를 맺고 그들이 이집트로 여행하도록 조치했다. 킵차크 칸국 몽골족이 이집트에 도착하면서 상당수가 이슬람교를 받아들였다.[61]
그는 3차례에 걸쳐 십자군을 격파했고, 아인 잘루트 전투에서 몽골군을 격파하여 이슬람 세계에서 인기 있는 통치자가 되었다. 많은 학자들은 아인 잘루트 전투가 거대한 거시 역사적 중요성을 지닌다고 평가한다. 군사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무기고, 군함, 화물선을 건조했으며, 아인 잘루트 전투에서 폭발성 수동식 대포를 전쟁에 사용한 최초의 인물일 것이다.[62][63] 그의 군사 작전은 리비아와 누비아까지 확장되었다.
바이바르스는 이집트와 시리아 양쪽에서 많은 건축 사업을 수행했다. 항만 시설 및 도랑 정비를 실시했다.[67] 대표적인 건축물로는 카이로의 대 모스크와 자히리야 학교가 있다.[187] 이후 대 모스크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영국 점령군에 의해 군사 시설로 사용되었다.[78] 카이로에서는 알아즈하르 모스크를 수축했고, 다마스쿠스에서는 우마이야 모스크를 복원했다.
그는 자신의 문장인 사자를 종교적 요소가 없는 건축물의 장식에 사용했다.[74] 1266년 사파드 공략 후 요르단강에 다리를 건설했으며, 다리 양쪽에는 사자 조각상이 배치된 비문이 놓였다.[140] 예루살렘의 성 스테파노스 문에 두 마리의 사자 조각상을 장식했으며, 문은 사자문으로 불리게 되었다.[188]
6. 이름 및 외모
그의 모국어인 튀르크어에서 바이바르스(Baybars)는 "위대한 표범"[6] 또는 "군주 표범"[7]을 의미한다. (bay "부유한 사람, 귀족" + pars "표범" 참조). "바이바르스"는 튀르크어로 "호랑이의 베이"를 의미한다.[80]
바이바르스는 이름의 튀르크어 의미를 바탕으로 표범을 자신의 문장인 휘장으로 사용했으며, 동전과 건물에 모두 새겨 넣었다.[6] 알-루드(오늘날의 Lod) 근처의 바이바르스가 건설한 다리에 사용된 사자/표범은 쥐와 함께 묘사되는데, 이는 바이바르스의 십자군 적들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9]
바이바르스는 키가 크고 올리브색 피부에 파란 눈을 가진 남자로 묘사되었다. 넓은 어깨, 가는 다리, 우렁찬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으며, 한쪽 눈에 백내장이 있었다.[10][11][12] 벽안에 장신, 갈색 피부를 가진 우렁찬 목소리의 소유자로 기록되어 있으며,[177][178] 신중하고 금욕적인 성격으로 금전에 대한 집착은 보이지 않았다.[66]
7.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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イスラムの時代 マホメットから世界帝国へ
[155]
서적
イスラーム世界の興隆
[156]
서적
モンゴルvs.西欧vs.イスラム 13世紀の世界大戦
[157]
서적
イスラムの時代 マホメットから世界帝国へ
[158]
서적
モンゴル帝国史
[159]
서적
モンゴル帝国史
[160]
서적
モンゴル帝国史
[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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モンゴル帝国史
[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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モンゴル帝国史
[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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モンゴル帝国史
[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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モンゴル帝国史
[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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エジプト マムルーク王朝
[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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エジプト マムルーク王朝
[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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モンゴル帝国史
[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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モンゴル帝国史
[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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モンゴル帝国史
[170]
서적
モンゴル帝国史
[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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モンゴル帝国史
[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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モンゴル帝国史
[173]
서적
マムルーク 異教の世界からきたイスラムの支配者たち
[174]
서적
モンゴル帝国史
[175]
서적
イスラーム世界の興隆
[176]
서적
エジプト マムルーク王朝
[177]
서적
イスラーム世界の興隆
[178]
서적
アラブの歴史
[179]
서적
イスラーム世界の興隆
[180]
간행물
東アラブ世界の変容
山川出版社
[181]
서적
エジプト マムルーク王朝
[182]
서적
物語中東の歴史 オリエント5000年の光芒
[183]
서적
アラブが見た十字軍
筑摩書房
[184]
서적
マムルーク 異教の世界からきたイスラムの支配者たち
[185]
서적
エジプト マムルーク王朝
[186]
서적
マムルーク 異教の世界からきたイスラムの支配者たち
[187]
서적
アラブの歴史
[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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イスラーム世界の興隆
[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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エジプト マムルーク王朝
[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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エジプト マムルーク王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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イスラーム世界の興隆
[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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エジプト マムルーク王朝
[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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イスラーム世界の興隆
[194]
서적
イスラーム世界の興隆
[195]
서적
エジプト マムルーク王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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