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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만베크 바키예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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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쿠르만베크 바키예프는 키르기스스탄의 정치인으로, 2005년부터 2010년까지 대통령을 역임했다. 2000년 총리로 임명되었으나, 2002년 시위 진압으로 사임 후, 2005년 레몬 혁명을 통해 대통령 직무대행이 되었다.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권위주의 통치를 강화하고 부정부패 및 족벌주의로 비판받았으며, 2010년 반정부 시위 유혈 진압으로 축출되어 벨라루스로 망명했다. 이후 살인 및 직권 남용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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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만베크 바키예프
기본 정보
쿠르만베크 바키예프 (2009년 촬영)
2009년 촬영
원어 이름Курманбек Салиевич Бакиев
로마자 표기Kurmanbek Saliyevich Bakiyev
출생일1949년 8월 1일
출생지소비에트 연방 키르기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마사단
거주지벨라루스 민스크
배우자타티아나 바키예바
파트너나즈굴 톨로무셰바
자녀2
학력사마라 국립 기술 대학교 (쿠이비셰프 폴리테크닉 연구소)
정치 경력
직책키르기스스탄 대통령
재임 기간2005년 8월 14일 – 2010년 4월 15일
대통령 권한대행2005년 3월 25일 – 2005년 8월 14일
전임 대통령이셴바이 카디르베코프 (권한대행)
후임 대통령로자 오툰바예바
총리메데트베크 케림쿨로프
펠릭스 쿨로프
아짐 이사베코프
알마즈베크 아탐바예프
이스켄데르베크 아이다랄리예프
이고르 추디노프
다니아르 우세노프
총리 (첫 번째 임기)
직책키르기스스탄 총리
대통령아스카르 아카예프
이셴바이 카디르베코프 (권한대행)
재임 기간2005년 7월 10일 – 2005년 8월 15일
전임 총리메데트베크 케림쿨로프 (권한대행)
후임 총리펠릭스 쿨로프
총리 (두 번째 임기)
대통령아스카르 아카예프
재임 기간2005년 3월 28일 – 2005년 6월 20일
총리 권한대행2005년 3월 25일 – 2005년 3월 28일
전임 총리니콜라이 타나예프
후임 총리메데트베크 케림쿨로프 (권한대행)
총리 (세 번째 임기)
대통령아스카르 아카예프
재임 기간2000년 12월 21일 – 2002년 5월 22일
전임 총리아만겔디 무랄리예프
후임 총리니콜라이 타나예프
기타
정당아크 졸

2. 생애

쿠르만베크 바키예프는 키르기스스탄의 정치인으로, 2005년부터 2010년까지 대통령을 역임했다.

바키예프의 집권 기간은 여러 정치인들의 암살, 교도소 폭동, 경제적 어려움, 그리고 수익성 높은 사업체에 대한 장악권 다툼으로 얼룩졌다.[5][6][7][8] 2006년에는 비슈케크에서 수천 명이 시위에 참여하면서 정치적 위기에 직면했다. 그는 대통령 권한 축소, 의회와 총리에게 더 많은 권한 부여, 부패 및 범죄 근절이라는 공약을 이행하지 않았다는 비난을 받았다. 바키예프는 야당이 자신에 대한 쿠데타를 모의하고 있다고 주장했다.[9]

2007년 4월, 야당은 바키예프의 사퇴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고,[10] 4월 11일 비슈케크에서 대규모 시위가 시작되었다. 바키예프는 4월 10일 자신의 권력을 축소하는 헌법 개정안에 서명했지만, 시위는 계속되었고, 시위대는 그가 사퇴할 때까지 남아 있겠다고 말했다.[11] 4월 19일 시위대와 경찰 간에 충돌이 발생한 후 시위는 종료되었다.[12]

바키예프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중국키르기스스탄 간의 관계가 강화되었고, 키르기스스탄에서 중국 유학생 수가 증가했다.[13] 2009년 2월, 바키예프는 모스크바에서 러시아 대통령 드미트리 메드베데프와의 회담 후, 러시아가 20억달러를 투자하겠다고 약속한 뒤 키르기스스탄 미 공군 기지의 철수를 발표했다.[14]

바키예프는 2009년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되었다.[15] 재선 후 그는 정치 및 경제 개혁에 대처할 것으로 예상되었다.[16] 유라시아 데일리 모니터는 2009년 9월 10일 그의 스타일이 블라디미르 푸틴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와 같은 다른 지도자들과 닮았다고 보도했다. 키르기스스탄 국민들은 2008년-2009년 겨울과 같은 정전 위험에 대해 우려하고 있었다.[16] 2010년 겨울, 키르기스스탄은 정기적으로 발생하는 순환 정전과 단전으로 고통받았으며, 에너지 가격은 상승했다.[17] 2010년 4월 1일 러시아는 키르기스스탄에 대한 에너지 수출에 대한 관세를 부과했다. 이는 즉시 연료 및 운송 가격에 영향을 미쳤으며, 4월 6일 탈라스에서 대규모 시위로 이어졌다고 한다.[18]

2010년 1월, 키르기스스탄은 경제 관계 개선을 논의하기 위해 중국에 사절단을 파견했다.[19] 키르기스스탄의 국영 전력 회사인 Natsionalnaya electricheskaya syet과 중국 테비안 일렉트릭은 3.42억달러 규모의 다트카-케민 500kv 송전선 건설 계약을 체결했다. 이는 키르기스스탄의 중앙아시아 전력 시스템 의존도를 줄였을 것이다. 사절단은 바키예프의 아들이 이끌었다.[19] 2010년 2월 키르기스스탄은 에너지 요금을 인상해야 했다. 난방비는 400%, 전기는 170% 인상될 것이라고 보도되었다.[20] 러시아는 2010년 3월까지 그의 정부를 지원했다.

2010년 4월, 수도에서 발생한 유혈 폭동으로 정부가 무너진 후 바키예프는 남부 도시인 오시로 도피한 것으로 알려졌다. 새로 구성된 과도 정부 수반인 로자 오툰바예바는 바키예프가 사퇴하지 않았으며 지지 세력을 규합하려 한다고 선언했다.[34] 혁명이 발생했을 당시 바키예프는 워싱턴에서 일련의 회담을 위해 미국으로 향하고 있었다.[35]

2010년 4월 13일, 바키예프는 자신의 안전이 보장된다면 대통령직에서 사퇴할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36] 2010년 4월 15일 오후 7시, 바키예프는 사임서에 서명한 후 카자흐스탄으로 키르기스스탄을 떠났다.[37][38] 오툰바예바는 바키예프를 재판에 회부하기 위해 계속 압력을 가할 것이라고 말했다.[39]

4월 20일, 벨라루스 대통령인 알렉산드르 루카셴코는 의회에서 "바키예프와 그의 가족 4명이 월요일 저녁부터 민스크에 손님으로 머물고 있다...그들은 현재 우리 국가의 보호를 받고 있으며, 개인적으로 대통령의 보호를 받고 있다"고 말했다.[40][41] 4월 21일, 바키예프는 민스크에서 기자 회견을 열고 "나는 쿠르만베크 바키예프이며, 국제 사회에서 인정받는 키르기스스탄의 합법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이다. 나는 나의 사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9개월 전 키르기스스탄 국민들은 나를 대통령으로 선출했고, 나를 막을 수 있는 권력은 없다. 나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죽음뿐이다"라고 말하며 오툰바예바 정부를 "불법적인 패거리"라고 불렀다.[42]

키르기스스탄에서는 바키예프가 2010년 봉기 당시 시위대 살해에 연루된 혐의로 결석재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48] 키르기스 정부는 그 이후 바키예프의 인도를 요구했지만 벨라루스는 거부했고, 이는 키르기스-벨라루스 관계에서 많은 갈등의 원인이 되었다.[45] 그는 아내 타티아나, 두 아들, 그리고 키르기스스탄인 애인 나즈굴 톨로무셰바와 함께였다.[46] 2012년 2월, 바키예프가 2010년에 벨라루스 시민권을 부여받았다는 보도가 있었다.[47] 2017년 자유유럽/자유라디오 방송의 벨라루스 서비스와의 인터뷰에서 바키예프는 메드베데프푸틴, 그리고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가 민스크로의 그의 안전한 출국을 조율하는 데 관여했다고 주장했다.[48]

2019년 2월, 미국 재무부는 바키예프가 훔친 400만달러 이상을 키르기스스탄 정부에 반환했다고 발표했다.[49] 2019년 8월 6일, 바키예프는 70세 생일을 맞이하여 독립궁에서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을 만났다.[50] 루카셴코는 바키예프에게 전통적인 꽃과 상징적인 선물을 전달한 후 자신의 집무실에서 만나 관련 문제를 논의했다.[51][52] 이 만남은 키르기스 외교부의 분노를 샀으며, 외교부는 다음 날 "이는 두 나라 간의 우정과 협력 원칙에 근본적으로 부합하지 않는다"고 말했다.[53][54] 2021년 7월, 바키예프는 쿰토르 금광 개발과 관련된 부패 혐의를 받았다.[54]

바키예프의 아내 타티아나 바실리예브나 페트로바(타티아나 바실리예브나 바키예바)는 생산 엔지니어이며, 러시아계 민족으로 사마라에서 태어나 현재 몰도바인 지역에서 자랐다.[55][56]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바키예프 가족 여러 명이 정부 요직을 차지했으며, 최소 5명의 가까운 친척이 정권 상층부에서 일했다. 그의 형 자니쉬는 대통령 경호실장이었다. 또 다른 형 마라트는 키르기스스탄의 주독일 대사였다. 또 다른 형 아딜은 키르기스스탄 주중국 대사의 고문이었다.[57] 쿠르만베크의 퇴출 이후, 그의 막내아들 막심은 과도정부로부터 횡령 및 권력 남용 혐의를 받았다. 그는 러시아로부터 3억달러의 대출금 중 약 3500만달러를 자신의 개인 은행 계좌로 이체한 것으로 의심받고 있다.

키르기스어 외에 러시아어우즈베크어를 구사한다.[58] 사실혼 배우자 바키예바 나즈굴 톨로무셰바와 사이에는 2004년생 아들 다니야르와 2000년생 딸 레이라가 있다. 2023년 1월 15일, 바키예바 나즈굴은 심부전으로 사망했다.[59]

2. 1. 초기 생애 및 경력

1949년 8월 1일 키르기스스탄 남부 마사단에서 태어났다. 비슈케크 종합 기술 대학교를 졸업하고,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경제 활동을 했다.[62] 1978년 쿠이비셰프 공과대학(현 사마라 국립 기술대학교)을 졸업했다. 1974년 소련군 복무를 마친 후, 1979년 잘랄아바트로 이주하여 1985년까지 플러그인 커넥터 공장에서 일했다.[2] 1972년에는 쿠이비셰프 공과대학(현재 사마라 국립 공과대학)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했다. 군 복무 후 사마라(쿠이비셰프)에서 전기 기술자, 이후 전기 기사로 일했다. 키르기스스탄으로 돌아와 잘랄아바트에서 기술자로 승진했으며, 1985년에는 콕잔가크(Көк-Жаңгак)시의 "프로필" 공장장이 되었다.

1990년부터 1991년까지 키르기스 공산당 코크-양악 시 위원회 제1서기를 지냈다. 1995년부터 잘랄아바트주 주지사와 추이주 주지사를 역임했다.[2]

2. 2. 총리 시절 (2000-2002)

2000년 12월 21일 아스카르 아카예프 정부의 총리로 임명되었으나, 2002년 남부 악시에서 일어난 반정부 시위 당시 5명이 사망하면서 이에 대한 비난이 일었다.[62] 결국 총리직에서 사임하고 키르기스스탄인민행동당(PMK)의 당수로 활동하였다. 이후 권력 독점을 막기 위한 반정부 활동을 벌여 2005년 3월 레몬 혁명을 성공시켰고, 그 공로로 대통령 직무대행으로 임명되었다.

2000년 12월부터 2002년 5월 22일까지 키르기스스탄 총리를 역임했다. 잘랄라바드주에서 발생한 폭동으로 5명이 사망하고 80명이 부상당한 후 해임되었다.[62] 2002년 10월에는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2003년 2월에는 중도 의원 그룹인 "키르기스스탄의 지역"에 합류했다.

2. 3. 대통령 당선 (2005)

2005년 대통령 선거에서 바키예프는 53%의 투표율과 89%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3][4]

3. 대통령 재임 (2005-2010)

2005년 튤립 혁명으로 아스카르 아카예프 정권을 무너뜨리고 권력을 잡은 바키예프는 2005년 7월 10일 대통령 선거에서 89%의 압도적인 득표율로 당선되었다.[3][4] 그러나 그의 집권 기간은 정치적 불안정과 부패, 경제난 등으로 점철되었다.

2007년 10월, 바키예프는 “빛나는 길”(Ak Jol)당 집행위원회 의장으로 선출되었으나, 대통령 재직으로 인해 당적은 정지되었다.

바키예프 정권은 권위주의 통치를 강화하고, 정적과 언론을 탄압하며, 가족과 측근을 요직에 앉혀 부정부패를 일삼았다. 특히 그의 아들 막심 바키예프와 동생 자니쉬 바키예프는 국정에 깊숙이 개입하여 권력을 남용하고 이권을 챙겼다는 의혹을 받았다.

바키예프는 마나스 공군기지 운영과 관련하여 미국러시아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펼쳤다. 초기에는 미국에 기지 사용을 허가했지만, 이후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기지 폐쇄를 추진하기도 했다.

결국, 경제난과 부정부패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면서 2010년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발생했다. 시위대를 향한 발포 명령으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바키예프는 벨라루스로 망명하여 정권을 잃게 되었다.

3. 1. 초기 개혁 시도와 좌절

2005년 튤립 혁명 이후 바키예프는 7월 10일 대통령 선거에서 53%의 투표율과 89%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3][4] 그러나 바키예프의 집권 기간은 여러 저명한 정치인들의 암살, 교도소 폭동, 경제적 어려움, 그리고 수익성 높은 사업체에 대한 장악권 다툼으로 얼룩졌다.[5][6][7][8]

2006년, 바키예프는 비슈케크에서 수천 명이 참여한 일련의 시위로 정치적 위기에 직면했다. 시위대는 바키예프가 대통령 권한 축소, 의회와 총리에게 더 많은 권한 부여, 부패 및 범죄 근절이라는 공약을 이행하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반면 바키예프는 야당이 자신에 대한 쿠데타를 모의하고 있다고 주장했다.[9]

2007년 4월, 야당은 바키예프의 사퇴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고,[10] 4월 11일 비슈케크에서 대규모 시위가 시작되었다. 바키예프는 4월 10일 자신의 권력을 축소하는 헌법 개정안에 서명했지만, 시위는 계속되었고 시위대는 그가 사퇴할 때까지 남아 있겠다고 말했다.[11] 4월 19일 시위대와 경찰 간의 충돌이 발생한 후 시위는 종료되었다.[12]

3. 2. 권위주의 통치 강화

2005년 튤립 혁명 이후, 바키예프는 2005년 7월 10일 대통령 선거에서 53%의 투표율과 89%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3][4] 그러나 그의 집권 기간은 여러 정치인들의 암살, 교도소 폭동, 경제난, 그리고 주요 사업체 장악권 다툼으로 얼룩졌다.[5][6][7][8]

2006년, 바키예프는 비슈케크에서 수천 명이 참여한 시위로 정치적 위기를 맞았다. 시위대는 그가 대통령 권한 축소, 의회와 총리 권한 강화, 부패 및 범죄 근절 공약을 이행하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바키예프는 야당이 쿠데타를 모의하고 있다고 주장했다.[9]

2007년 4월, 야당은 바키예프의 사퇴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고,[10] 4월 11일 비슈케크에서 대규모 시위가 시작되었다. 바키예프는 4월 10일 자신의 권력을 축소하는 헌법 개정안에 서명했지만, 시위는 계속되었고, 시위대는 그가 사퇴할 때까지 남아 있겠다고 말했다.[11] 4월 19일 시위대와 경찰 간의 충돌이 발생한 후 시위는 종료되었다.[12]

2009년 드미트리 메드베데프(왼쪽)와 바키예프(오른쪽)


바키예프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중국키르기스스탄 간의 관계가 강화되었고, 키르기스스탄에서 중국 유학생 수가 증가했다.[13] 2009년 2월, 바키예프는 모스크바에서 러시아 대통령 드미트리 메드베데프와의 회담 후, 러시아가 20억 달러를 투자하겠다고 약속한 뒤 키르기스스탄 미 공군 기지의 철수를 발표했다.[14]

바키예프는 2009년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되었다.[15] 재선 후 그는 정치 및 경제 개혁에 대처할 것으로 예상되었다.[16]

유라시아 데일리 모니터는 2009년 9월 10일 그의 스타일이 블라디미르 푸틴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와 같은 다른 지도자들과 닮았다고 보도했다. 키르기스스탄 국민들은 2008년-2009년 겨울과 같은 정전 위험에 대해 우려하고 있었다.[16] 2010년 겨울, 키르기스스탄은 정기적인 순환 정전과 단전으로 고통받았으며, 에너지 가격은 상승했다.[17] 2010년 4월 1일 러시아는 키르기스스탄에 대한 에너지 수출에 대한 관세를 부과했다. 이는 즉시 연료 및 운송 가격에 영향을 미쳤으며, 4월 6일 탈라스에서 대규모 시위로 이어졌다고 한다.[18]

2010년 1월, 키르기스스탄은 경제 관계 개선을 논의하기 위해 중국에 사절단을 파견했다. 키르기스스탄의 국영 전력 회사인 Natsionalnaya electricheskaya syet과 중국 테비안 일렉트릭은 3.42억달러 규모의 다트카-케민 500kv 송전선 건설 계약을 체결했다. 이는 키르기스스탄의 중앙아시아 전력 시스템 의존도를 줄였을 것이다. 사절단은 바키예프의 아들이 이끌었다.[19]

2010년 2월 키르기스스탄은 에너지 요금을 인상해야 했다. 난방비는 400%, 전기는 170% 인상될 것이라고 보도되었다.[20] 러시아는 2010년 3월까지 그의 정부를 지원했다.

쿠르만벡 바키예프의 동생 자니쉬는 2008년 7월 국가안보국을 이끌면서 국가의 억압 기구를 상징하는 인물이 되었다. 국제 인권 단체들은 고문, 불법 구금, 집회의 자유 제한 등 심각한 인권 침해 사례를 보고했다. 특히 키르기스스탄 남부 지역에서는 여러 민족 간의 긴장이 고조되면서 상황이 매우 심각했다.[21]

야당 기자인 G. 파블류크는 고문을 당한 후 호텔 창문에서 떨어졌다. 또한 야당으로 전향한 고위 관리 메데트 사디르쿨로프가 살해되었다.[22] 당국은 그의 죽음을 교통사고로 위장하려 했지만, 나중에 그가 납치되어 교살되고 불태워졌으며, 바키예프 대통령의 동생 자니쉬 바키예프가 살인에 직접 관여했음이 밝혀졌다.[23]

정부는 독립 언론에 압력을 가하여 야당 신문과 텔레비전 방송을 폐쇄하고 비판적인 인터넷 자료에 대한 접근을 차단했다. 2008년부터 2010년 사이에 바키예프 정권은 야당 정치인들을 적극적으로 박해했다.[24] 기록된 사례들에는 야당 지도자들이 조작된 혐의로 체포되고 기소되는 것을 포함하며, 이는 국가의 정치적 긴장을 악화시켰다.

2006년 3월 2일, 바키예프의 형인 자니쉬가 국가안보국 부국장으로 임명되었다.[25]

2009년 가을, 쿠르만벡 바키예프는 그의 아들 막심 바키예프가 이끄는 중앙개발혁신투자청을 설립했다.[26] 동시에 정부는 공공요금(전기, 난방)을 두 배로 인상했다. 2010년 1월에는 휴대전화 통화세(통화당 2센트)가 부과되었다. 야당에 따르면 이 세금은 막심 바키예프가 소유한 AsiaUniversalBank OJSC 계좌로 직접 입금되었으며, 이를 통해 그는 500만달러의 자금을 손에 넣었다.[27]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 카빌로바는 막심 바키예프의 협박 후 해외로 도피했다. 2008년 9월 26일, 클라라 카빌로바의 영상 메시지가 공개되었다. 그녀는 10월 5일 선거에서 투옥된 의원 후보의 석방을 제안한 후 부당한 압력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영상에서 카빌로바는 쿠르만벡 바키예프 대통령의 아들인 막심 바키예프가 그녀를 방문하여 "노골적인 압력과 욕설"로 그녀를 위협했다고 말했다.[28]

과도정부 구성원들은 막심 바키예프와 그의 동료들이 미군 기지에 대한 연료 공급을 장악하여 많은 돈을 벌었다고 여러 차례 밝혔다.[29]

위키리크스에서 KirTAG가 입수한 미국 대사관의 외교문에 따르면, 카자흐스탄 뉴스통신사 KazTAG의 보도에 따르면 키르기스스탄 전 대통령 쿠르만벡 바키예프의 아들인 막심 바키예프에게 지급된 은행 면허 매수액은 최대 50만달러에 달했다.[30]

3. 3. 경제 정책 실패와 민생 악화

튤립 혁명 이후 바키예프는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집권 기간 동안 경제적 어려움과 수익성 높은 사업체에 대한 장악권 다툼이 발생했다.[5][6][7][8]

2008년-2009년 겨울, 키르기스스탄 국민들은 정전 위험에 대해 우려하고 있었다.[16] 2010년 겨울에는 정기적인 순환 정전과 단전으로 고통받았으며, 에너지 가격은 상승했다.[17]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2010년 1월, 키르기스스탄은 중국과 경제 관계 개선을 논의하기 위해 사절단을 파견했다.[19] 키르기스스탄 국영 전력 회사와 중국 테비안 일렉트릭은 3.42억달러 규모의 송전선 건설 계약을 체결하여 중앙아시아 전력 시스템 의존도를 줄이고자 했다.[19]

그러나 2010년 2월, 키르기스스탄은 에너지 요금을 인상해야 했다. 난방비는 400%, 전기는 170% 인상될 것이라고 보도되었다.[20] 2010년 4월 1일, 러시아는 키르기스스탄에 대한 에너지 수출에 대한 관세를 부과하여 연료 및 운송 가격 상승을 야기했고, 이는 4월 6일 탈라스에서 대규모 시위로 이어졌다.[18]

3. 4. 외교 관계

바키예프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키르기스스탄은 여러 국가와 외교 관계를 맺었다. 특히, 에너지 문제와 관련하여 러시아, 중국과의 관계 변화가 있었다. 2010년 겨울, 키르기스스탄은 순환 정전 및 단전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며, 에너지 가격이 대폭 인상되었다. 난방비는 400%, 전기 요금은 170% 인상될 것이라고 보도되었다.[20]

3. 4. 1. 러시아, 중국, 미국과의 관계

바키예프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중국키르기스스탄 간의 관계가 강화되었고, 키르기스스탄에서 중국 유학생 수가 증가했다.[13] 2009년 2월, 바키예프는 모스크바에서 러시아 대통령 드미트리 메드베데프와의 회담 후, 러시아가 20억달러를 투자하겠다고 약속한 뒤 키르기스스탄 미 공군 기지의 철수를 발표했다.[14]

유라시아 데일리 모니터는 2009년 9월 10일 그의 스타일이 블라디미르 푸틴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와 같은 다른 지도자들과 닮았다고 보도했다.[16]

2010년 1월, 키르기스스탄은 경제 관계 개선을 논의하기 위해 중국에 사절단을 파견했다.[19] 키르기스스탄의 국영 전력 회사인 Natsionalnaya electricheskaya syet과 중국 테비안 일렉트릭은 3.42억달러 규모의 다트카-케민 500kv 송전선 건설 계약을 체결했다. 이는 키르기스스탄의 중앙아시아 전력 시스템 의존도를 줄였을 것이다. 사절단은 바키예프의 아들이 이끌었다.[19]

2010년 4월 1일 러시아는 키르기스스탄에 대한 에너지 수출에 대한 관세를 부과했다. 이는 즉시 연료 및 운송 가격에 영향을 미쳤으며, 4월 6일 탈라스에서 대규모 시위로 이어졌다고 한다.[18] 러시아는 2010년 3월까지 그의 정부를 지원했다.

미국의 전폭적인 협조 하에 바키예프 가족은 마나스 공군기지를 통해 막대한 이익을 얻었으며, 특히 수익성 높은 연료 공급 계약을 통해 부를 크게 증대시켰다. 미 당국은 이러한 계약이 바키예프 가족 구성원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전문가들은 미국 의회에 출석하여 미국 정부가 마나스 공군기지를 유지하기 위해 잔혹한 가족 독재 정권인 바키예프 정권을 지원했다고 증언했다. 막심 바키예프의 이러한 음모에 대한 개입은 널리 알려져 있었고, 그의 사업 파트너인 예브게니 구레비치가 그들의 활동에 대한 세부 사항을 공개적으로 논의한 후 더욱 명확해졌다.[29] 키르기스스탄의 쿠르만베크 바키예프 전 대통령 가족은 2억달러에서 3억달러를 해외로 유출했다.[29]

위키리크스에 따르면, 키르기스스탄 주재 미국 대사는 수많은 정치적 공격, 협박 및 대규모 급습에 연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권위주의적 지도자인 바키예프 대통령의 아들 막심을 "부패했지만 영리하고 좋은 동맹"으로 묘사했다.[31]

미국은 또한 키르기스스탄의 아스카르 아카예프 전 대통령과 관련된 기업들이 연료 및 윤활유 공급에 관여한 사실을 인정했다. 레드스타사에 따르면, 2003년부터 2005년까지 미국은 아카예프의 아들이 소유한 마나스 국제 서비스에 8700만달러, 아카예프의 사위가 소유한 아알람 서비스 아카예프에 3200만달러를 지불했다. 전반적으로 2003년부터 2011년까지 이 두 회사는 연료 및 윤활유 공급 계약으로 18억달러를 확보했는데, 이는 2003년 키르기스스탄의 총 GDP 19억달러와 거의 맞먹는 규모이다.[32][33]

4. 2010년 반정부 시위와 축출

바키예프는 2005년 7월 키르기스스탄 대통령 선거에서 압승하여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러나 집권 기간 동안 여러 저명한 정치인들의 암살, 교도소 폭동, 경제적 어려움, 그리고 수익성 높은 사업체에 대한 장악권 다툼이 발생했다.[5][6][7][8]

2006년, 바키예프는 비슈케크에서 수천 명이 시위에 참여하면서 정치적 위기에 직면했다. 그는 대통령 권한 축소, 의회와 총리에게 더 많은 권한 부여, 부패 및 범죄 근절이라는 공약을 이행하지 않았다는 비난을 받았다. 바키예프는 야당이 자신에 대한 쿠데타를 모의하고 있다고 주장했다.[9]

2007년 4월, 야당은 바키예프의 사퇴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고,[10] 4월 11일 비슈케크에서 대규모 시위가 시작되었다. 바키예프는 4월 10일 자신의 권력을 축소하는 헌법 개정안에 서명했지만, 시위는 계속되었고, 시위대는 그가 사퇴할 때까지 남아 있겠다고 말했다.[11] 4월 19일 시위대와 경찰 간의 충돌이 발생한 후 시위는 종료되었다.[12]

바키예프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중국과 키르기스스탄 간의 관계가 강화되었고, 키르기스스탄에서 중국 유학생 수가 증가했다.[13] 2009년 2월, 바키예프는 모스크바에서 러시아 대통령 드미트리 메드베데프와의 회담 후, 러시아가 20억달러를 투자하겠다고 약속한 뒤 키르기스스탄 미 공군 기지의 철수를 발표했다.[14]

바키예프는 2009년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되었다.[15] 재선 후 그는 정치 및 경제 개혁에 대처할 것으로 예상되었다.[16] 유라시아 데일리 모니터는 2009년 9월 10일 그의 스타일이 블라디미르 푸틴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와 같은 다른 지도자들과 닮았다고 보도했다. 키르기스스탄 국민들은 2008년-2009년 겨울과 같은 정전 위험에 대해 우려하고 있었다.[16]

2010년 겨울, 키르기스스탄은 정기적으로 발생하는 순환 정전과 단전으로 고통받았으며, 에너지 가격은 상승했다.[17] 2010년 4월 1일 러시아는 키르기스스탄에 대한 에너지 수출에 대한 관세를 부과했다. 이는 즉시 연료 및 운송 가격에 영향을 미쳤으며, 4월 6일 탈라스에서 대규모 시위로 이어졌다고 한다.[18]

2010년 1월, 키르기스스탄은 경제 관계 개선을 논의하기 위해 중국에 사절단을 파견했다.[19] 키르기스스탄의 국영 전력 회사인 Natsionalnaya electricheskaya syet과 중국 테비안 일렉트릭은 3.42억달러 규모의 다트카-케민 500kv 송전선 건설 계약을 체결했다. 이는 키르기스스탄의 중앙아시아 전력 시스템 의존도를 줄였을 것이다. 사절단은 바키예프의 아들이 이끌었다.[19]

2010년 2월 키르기스스탄은 에너지 요금을 인상해야 했다. 난방비는 400%, 전기는 170% 인상될 것이라고 보도되었다.[20] 러시아는 2010년 3월까지 그의 정부를 지원했다.

2010년 4월, 바키예프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대에 경찰이 발포하면서 수도 비슈케크는 혼란에 빠졌다. 각 언론은 바키예프가 비슈케크에서 탈출했고, 전 외무장관인 로자 오툰바예바가 자신을 대표로 하는 과도정부를 수립했다고 선언했다고 보도했다. 사실상 정권이 붕괴된 후에도 대통령직 사퇴를 거부했으나, 4월 15일에 키르기스스탄을 탈출하여 사실상 벨라루스로 망명했다. 사임서에 서명했다는 보도도 있다. 자세한 내용은 2010년 키르기스스탄 폭동을 참조.

2010년 반정부 시위 과정에서 시위대를 향해 발포를 명령하여 97명이 사망하고 500여 명이 부상당했다. 이후 벨라루스로 이주하여 망명 생활을 하고 있으며, 2013년 키르기스스탄 군사법원은 살인 및 지위 남용죄로 재산 몰수와 징역 24년을, 동생인 당시 국가방위청장 자니베크 바키예프에게는 재산 몰수와 종신형을 선고했다.[62]

5. 망명 이후

2010년 4월, 수도에서 발생한 유혈 폭동으로 정부가 무너진 후 바키예프는 남부 도시인 오시로 도피했다. 새로 구성된 과도 정부 수반인 로자 오툰바예바는 바키예프가 사퇴하지 않았으며 지지 세력을 규합하려 한다고 선언했다.[34] 혁명이 발생했을 당시 바키예프는 워싱턴에서 일련의 회담을 위해 미국으로 향하고 있었다.[35]

2010년 4월 13일, 바키예프는 자신의 안전이 보장된다면 대통령직에서 사퇴할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36] 2010년 4월 15일 오후 7시, 바키예프는 사임서에 서명한 후 카자흐스탄으로 키르기스스탄을 떠났다.[37][38] 오툰바예바는 바키예프를 재판에 회부하기 위해 계속 압력을 가할 것이라고 말했다.[39]

4월 20일, 벨라루스 대통령인 알렉산드르 루카셴코는 의회에서 "바키예프와 그의 가족 4명이 월요일 저녁부터 민스크에 손님으로 머물고 있다...그들은 현재 우리 국가의 보호를 받고 있으며, 개인적으로 대통령의 보호를 받고 있다"고 말했다.[40][41]

4월 21일, 바키예프는 민스크에서 기자 회견을 열고 "나는 쿠르만베크 바키예프이며, 국제 사회에서 인정받는 키르기스스탄의 합법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이다. 나는 나의 사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9개월 전 키르기스스탄 국민들은 나를 대통령으로 선출했고, 나를 막을 수 있는 권력은 없다. 나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죽음뿐이다"라고 말하며 오툰바예바 정부를 "불법적인 패거리"라고 불렀다.[42]

키르기스스탄에서는 바키예프가 2010년 봉기 당시 시위대 살해에 연루된 혐의로 결석재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48] 키르기스 정부는 그 이후 바키예프의 인도를 요구했지만 벨라루스는 거부했고, 이는 키르기스-벨라루스 관계에서 많은 갈등의 원인이 되었다.[45] 그는 아내 타티아나, 두 아들, 그리고 키르기스스탄인 애인 나즈굴 톨로무셰바와 함께였다.[46] 2012년 2월, 바키예프가 2010년에 벨라루스 시민권을 부여받았다는 보도가 있었다.[47] 2017년 자유유럽/자유라디오 방송의 벨라루스 서비스와의 인터뷰에서 바키예프는 메드베데프푸틴, 그리고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가 민스크로의 그의 안전한 출국을 조율하는 데 관여했다고 주장했다.[48]

2019년 2월, 미국 재무부는 바키예프가 훔친 400만달러 이상을 키르기스스탄 정부에 반환했다고 발표했다.[49] 2019년 8월 6일, 바키예프는 며칠 전에 기념한 그의 70세 생일을 맞이하여 독립궁에서 알렉산더 루카셴코 대통령을 만났다.[50] 루카셴코는 바키예프에게 전통적인 꽃과 상징적인 선물을 전달한 후 자신의 집무실에서 만나 관련 문제를 논의했다.[51][52] 이 만남은 키르기스 외교부의 분노를 샀으며, 외교부는 다음 날 "이는 두 나라 간의 우정과 협력 원칙에 근본적으로 부합하지 않는다"고 말했다.[53][54] 2021년 7월, 바키예프는 쿰토르 금광 개발과 관련된 부패 혐의를 받았다.[54]

6. 가족 관계 및 사생활

바키예프의 가족 및 사생활 관련 정보는 다음과 같다.


  • 배우자:
  • 타티아나 바실리예브나 페트로바 (타티아나 바키예바): 생산 엔지니어, 러시아계. 사마라 출생, 몰도바인 지역에서 성장.[55][56]
  • 나즈굴 톨로무셰바 (사실혼 관계): 2023년 1월 15일 심부전으로 사망.[59]

  • 자녀:
  • 마라트: 국가안보청 과장 겸 중령.
  • 막심: 2009년부터 정권 중추 참여, 한때 아버지의 후계자로 여겨짐. 2010년 영국 망명 요청, 2012년 런던에서 체포.[61] (횡령 및 권력 남용 혐의)
  • 다니야르 (나즈굴 톨로무셰바와 사이의 아들, 2004년생)
  • 레이라 (나즈굴 톨로무셰바와 사이의 딸, 2000년생)

  • 형제:
  • 자누이벡: 국가경호청장관 겸 소장.
  • 마라트: 주독일대사.
  • 아딜: 키르기스스탄 주중국 대사의 고문.[57]
  • 그외 형제 3명

7. 비판과 논란

바키예프는 레몬 혁명을 성공시킨 공로로 대통령 직무대행으로 임명되었으나, 집권 기간 동안 여러 논란에 휩싸였다. 2002년 남부 악시에서 일어난 반정부 시위 당시 5명이 사망하자 총리직을 사임하기도 했다.[62] 2010년 반정부 시위 과정에서는 시위대를 향해 발포를 명령하여 97명이 사망하고 500여 명이 부상당하는 참사가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바키예프는 벨라루스로 망명했고, 2013년 키르기스스탄 군사법원은 그에게 살인 및 지위 남용죄로 재산 몰수와 징역 24년을 선고했다.[62]

7. 1. 권위주의 통치와 인권 탄압

바키예프 집권 기간은 여러 저명한 정치인들의 암살, 교도소 폭동, 경제적 어려움, 그리고 수익성 높은 사업체에 대한 장악권 다툼으로 얼룩졌다.[5][6][7][8]

2006년, 바키예프는 비슈케크에서 수천 명이 일련의 시위에 참여하면서 정치적 위기에 직면했다. 그는 대통령 권한 축소, 의회와 총리에게 더 많은 권한 부여, 부패 및 범죄 근절이라는 공약을 이행하지 않았다는 비난을 받았다. 바키예프는 야당이 자신에 대한 쿠데타를 모의하고 있다고 주장했다.[9]

2007년 4월, 야당은 바키예프의 사퇴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고,[10] 4월 11일 비슈케크에서 대규모 시위가 시작되었다. 바키예프는 4월 10일 자신의 권력을 축소하는 헌법 개정안에 서명했지만, 시위는 계속되었고, 시위대는 그가 사퇴할 때까지 남아 있겠다고 말했다.[11] 4월 19일 시위대와 경찰 간의 충돌이 발생한 후 시위는 종료되었다.[12]

바키예프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중국과 키르기스스탄 간의 관계가 강화되었고, 키르기스스탄에서 중국 유학생 수가 증가했다.[13] 2009년 2월, 바키예프는 모스크바에서 러시아 대통령 드미트리 메드베데프와의 회담 후, 러시아가 20억달러를 투자하겠다고 약속한 뒤 키르기스스탄 미 공군 기지의 철수를 발표했다.[14]

바키예프는 2009년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되었다.[15] 재선 후 그는 정치 및 경제 개혁에 대처할 것으로 예상되었다.[16] '''유라시아 데일리 모니터'''는 2009년 9월 10일 그의 스타일이 블라디미르 푸틴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와 같은 다른 지도자들과 닮았다고 보도했다. 키르기스스탄 국민들은 2008년-2009년 겨울과 같은 정전 위험에 대해 우려하고 있었다.[16] 2010년 겨울, 키르기스스탄은 정기적으로 발생하는 순환 정전과 단전으로 고통받았으며, 에너지 가격은 상승했다.[17] 2010년 4월 1일 러시아는 키르기스스탄에 대한 에너지 수출에 대한 관세를 부과했다. 이는 즉시 연료 및 운송 가격에 영향을 미쳤으며, 4월 6일 탈라스에서 대규모 시위로 이어졌다고 한다.[18]

2010년 1월, 키르기스스탄은 경제 관계 개선을 논의하기 위해 중국에 사절단을 파견했다.[19] 키르기스스탄의 국영 전력 회사인 Natsionalnaya electricheskaya syet과 중국 테비안 일렉트릭은 3.42억달러 규모의 다트카-케민 500kv 송전선 건설 계약을 체결했다. 이는 키르기스스탄의 중앙아시아 전력 시스템 의존도를 줄였을 것이다. 사절단은 바키예프의 아들이 이끌었다.[19] 2010년 2월 키르기스스탄은 에너지 요금을 인상해야 했다. 난방비는 400%, 전기는 170% 인상될 것이라고 보도되었다.[20] 러시아는 2010년 3월까지 그의 정부를 지원했다.

쿠르만벡 바키예프의 동생 자니쉬는 2008년 7월 국가안보국을 이끌면서 국가의 억압 기구를 상징하는 인물이 되었다. 국제 인권 단체들은 고문, 불법 구금, 집회의 자유 제한 등 심각한 인권 침해 사례를 보고했다. 특히 키르기스스탄 남부 지역에서는 여러 민족 간의 긴장이 고조되면서 상황이 매우 심각했다.[21]

야당 기자인 G. 파블류크는 고문을 당한 후 호텔 창문에서 떨어졌다. 또한 야당으로 전향한 고위 관리 메데트 사디르쿨로프가 살해되었다.[22] 당국은 그의 죽음을 교통사고로 위장하려 했지만, 나중에 그가 납치되어 교살되고 불태워졌으며, 바키예프 대통령의 동생 자니쉬 바키예프가 살인에 직접 관여했음이 밝혀졌다.[23]

정부는 독립 언론에 압력을 가하여 야당 신문과 텔레비전 방송을 폐쇄하고 비판적인 인터넷 자료에 대한 접근을 차단했다. 2008년부터 2010년 사이에 바키예프 정권은 야당 정치인들을 적극적으로 박해했다.[24] 기록된 사례들에는 야당 지도자들이 조작된 혐의로 체포되고 기소되는 것을 포함하며, 이는 국가의 정치적 긴장을 악화시켰다.

2010년 반정부 시위 과정에서 시위대를 향해 발포를 명령하여 97명이 사망하고 500여 명이 부상당했다. 이후 벨라루스로 이주하여 망명 생활을 하고 있으며, 2013년 키르기스스탄 군사법원은 살인 및 지위 남용죄로 재산 몰수와 징역 24년을, 동생인 당시 국가방위청장 자니베크 바키예프에게는 재산 몰수와 종신형을 선고했다.[62]

7. 2. 부정부패와 족벌 정치

바키예프는 집권 초기 기대와는 달리 여러 정치인들의 암살, 교도소 폭동, 경제적 어려움, 수익성 높은 사업체 장악권 다툼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5][6][7][8] 2006년에는 대통령 권한 축소, 부패 및 범죄 근절 등의 공약 불이행으로 비난받으며 정치적 위기에 직면했다.[9]

2007년 4월, 야당은 바키예프의 사퇴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고,[10] 4월 11일 비슈케크에서 대규모 시위가 시작되었다. 바키예프는 자신의 권력을 축소하는 헌법 개정안에 서명했지만,[11] 시위는 계속되었고, 4월 19일 시위대와 경찰 간의 충돌이 발생한 후 종료되었다.[12]

2010년 겨울, 키르기스스탄은 정기적인 순환 정전과 단전으로 고통받았으며, 에너지 가격은 상승했다.[17] 2010년 4월 1일 러시아가 키르기스스탄에 대한 에너지 수출에 대한 관세를 부과하면서 연료 및 운송 가격이 즉시 상승했고, 이는 4월 6일 탈라스에서 대규모 시위로 이어졌다.[18] 키르기스스탄은 2010년 2월 에너지 요금을 인상해야 했는데, 난방비는 400%, 전기는 170% 인상될 것이라고 보도되었다.[20]

바키예프의 아들 막심 바키예프는 중앙개발혁신투자청을 설립하고,[26] 공공요금(전기, 난방)을 두 배로 인상했다. 또한 휴대전화 통화세(통화당 2센트)를 부과했는데, 야당은 이 세금이 막심 바키예프 소유의 은행 계좌로 입금되어 500만달러의 자금을 챙겼다고 주장했다.[27]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 클라라 카빌로바는 막심 바키예프의 협박 후 해외로 도피했고, 영상 메시지를 통해 막심 바키예프가 자신에게 "노골적인 압력과 욕설"로 위협했다고 주장했다.[28]

과도정부 구성원들은 막심 바키예프와 그의 동료들이 미군 기지에 대한 연료 공급을 장악하여 많은 돈을 벌었다고 밝혔다.[29] 위키리크스에 따르면, 막심 바키예프에게 지급된 은행 면허 매수액은 최대 50만달러에 달했다.[30]

미국은 바키예프 가족이 마나스 공군기지를 통해 막대한 이익, 특히 수익성 높은 연료 공급 계약을 통해 부를 크게 증대시켰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나스 공군기지를 유지하기 위해 바키예프 정권을 지원했다는 비판을 받았다.[29] 막심 바키예프는 살인, 정치 부패 및 반대파 탄압 등의 사실이 입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에서 망명을 받았다.[32]

키르기스스탄의 쿠르만베크 바키예프 전 대통령 가족은 2억~3억 달러를 해외로 유출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29]

7. 3. 2010년 반정부 시위 유혈 진압

2010년 바키예프 정부는 시위대를 향해 발포를 명령하여 97명이 사망하고 500여 명이 부상당했다.[62] 이후 바키예프는 벨라루스로 이주하여 망명 생활을 하고 있으며, 2013년 키르기스스탄 군사법원은 살인 및 지위 남용죄로 재산 몰수와 징역 24년을, 동생인 당시 국가방위청장 자니베크 바키예프에게는 재산 몰수와 종신형을 선고했다.[62]

2010년 겨울, 키르기스스탄은 정기적인 순환 정전과 단전으로 고통받았으며, 에너지 가격은 상승했다.[17] 2010년 4월 1일 러시아가 키르기스스탄에 대한 에너지 수출에 대한 관세를 부과하면서 연료 및 운송 가격이 즉시 영향을 받았고, 4월 6일 탈라스에서 대규모 시위로 이어졌다.[18]

2010년 1월, 키르기스스탄은 경제 관계 개선을 논의하기 위해 중국에 사절단을 파견했다.[19] 키르기스스탄의 국영 전력 회사인 Natsionalnaya electricheskaya syet과 중국 테비안 일렉트릭은 3.42억달러 규모의 다트카-케민 500kv 송전선 건설 계약을 체결했다. 이는 키르기스스탄의 중앙아시아 전력 시스템 의존도를 줄이는 데 기여했을 것이다. 사절단은 바키예프의 아들이 이끌었다.[19]

2010년 2월 키르기스스탄은 에너지 요금을 인상해야 했다. 난방비는 400%, 전기는 170% 인상될 것이라고 보도되었다.[20] 러시아는 2010년 3월까지 바키예프 정부를 지원했다.

8. 역대 선거 결과

선거명직책명대수정당득표율득표수결과당락
2005년 선거키르기스스탄의 대통령2대무소속89.50%1,776,156표1위
2009년 선거키르기스스탄의 대통령2대아크졸77.44%1,779,417표1위


참조

[1] 웹사이트 After years of turmoil, Kyrgyz voters go to the polls http://www.unhcr.org[...] 2018-04-07
[2] 웹사이트 Биография Курманбека Бакиева – РИА Новости, 12.02.2013 https://ria.ru/amp/s[...] 2017-10-16
[3] 웹사이트 Bakiev sworn in as Kyrgyz leader http://news.bbc.co.u[...] 2018-04-07
[4] 논문 What Really Happened in Kyrgyzstan https://muse.jhu.edu[...] 2006-04-00
[5] 웹사이트 Kyrgyz jail unrest claims lives http://news.bbc.co.u[...] 2018-04-07
[6] 웹사이트 Kyrgyz rally against corruption http://news.bbc.co.u[...] 2018-04-07
[7] 웹사이트 Kyrgyz MP shot dead in Bishkek http://news.bbc.co.u[...] 2018-04-07
[8] 웹사이트 Clashes erupt in Kyrgyz capital http://news.bbc.co.u[...] 2018-04-07
[9] 웹사이트 Thousands rally against Kyrgyz leader http://english.aljaz[...] 2019-08-09
[10] 웹사이트 Kyrgyzstan: Protests Gain Steam Ahead Of Major Antigovernment Rally http://www.rferl.org[...] 2007-04-09
[11] 웹사이트 Kyrgyz opposition stages large rally against embattled president http://www.iht.com/a[...] 2007-04-11
[12] 웹사이트 Kyrgyzstan: Overnight Violence Halts Bishkek Rallies http://www.rferl.org[...] 2007-04-20
[13] 웹사이트 Kyrgyzstan: Chinese student population growing, despite local fears http://www.eurasiane[...] 2018-04-07
[14] 웹사이트 Kyrgyz Eviction Warnings Intensify Over U.S. Air Base http://www.rferl.org[...] 2009-02-04
[15] 웹사이트 Kyrgyzstan Nominates President For Reelection http://www.rferl.org[...] 2009-05-01
[16] 뉴스 Bakiyev Promises Reform and Persecutes Opposition http://www.jamestown[...] The Heritage Foundation 2009-09-10
[17] 웹사이트 Kyrgyzstan: The Causes Behind the Crisis http://www.stratfor.[...] 2010-04-07
[18] 웹사이트 Kyrgyzstan: Is Putin punishing Bakiyev? http://www.eurasiane[...] 2010-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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