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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란논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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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크란논 전투는 기원전 322년에 테살리아에서 벌어진 전투로, 알렉산드로스 3세 사후 아테네를 중심으로 일어난 그리스의 마케도니아 지배에 대한 반란의 결과이다. 반란군은 초반에 우세를 점했으나, 마케도니아의 증원군 도착으로 인해 병력 열세에 놓였다. 전투는 마케도니아 군의 승리로 끝났고, 안티파트로스는 개별 강화를 통해 그리스 연합을 와해시켰다. 결국 아테네는 항복하고 민주주의가 폐지되었으며, 마케도니아 수비대가 주둔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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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란논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전투명크란논 전투
전쟁라미아 전쟁
시기기원전 322년 8월
위치테살리아 크란논
결과마케도니아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마케도니아
교전국 2아테네, 아이톨리아 동맹, 테살리아
지휘관 및 지도자
마케도니아안티파트로스, 크라테로스
그리스 연합군안티필로스, 메논
병력 규모
마케도니아보병 40,000명, 투석병 및 궁병 3,000명, 기병 5,000명
그리스 연합군보병 25,000명, 기병 3,500명
피해 규모
마케도니아130명 사망
그리스 연합군500명 사망

2. 배경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3세가 사망하자, 아테네인들은 레오스테네스를 지도자로 하여 마케도니아의 그리스 지배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용병을 모집하고 아이톨리아 동맹 등을 아군으로 끌어들였다. 초기에 아테네를 비롯한 반란군은 병력 면에서 안티파트로스가 이끄는 마케도니아 군에 비해 우위를 점했고, 초반에는 유리하게 전투를 진행했다. 그들은 안티파트로스를 라미아에 포위했고, 궁지에 몰린 안티파트로스는 소아시아에 있던 마케도니아 장군들에게 원군을 요청했다.[7]

그러나 라미아 포위 중에 레오스테네스가 머리에 돌을 맞아 사망하고, 안티필로스가 후임 장군으로 취임했다.[8] 안티파트로스의 원군 요청에 처음 응하여 보병 20,000명과 기병 1,400명을 이끌고 온 레온나토스는 안티파트로스를 라미아에서 탈출시켰지만, 그 대가로 그리스 기병과의 전투에서 전사했다.[9] 이어서 크라테로스가 이끄는 마케도니아 군(보병 10,000명, 기병 1,500기, 페르시아인 궁병・투석병 합계 1,000명)이 도착했고, 레온나토스의 군까지 합쳐졌다.

크라테로스로부터 지휘권을 넘겨받은 안티파트로스는 군대를 이끌고 테살리아로 진입했다. 이에 대해, 그리스 연합군은 초전의 승리로 상황을 낙관하여 각자 고향으로 돌아갔고, 병력이 충분하지 않았다. 그리스 연합군은 아군의 도착을 기다리려 했지만, 마케도니아 군이 공격해 왔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에 응했다.[10]

2. 1. 알렉산드로스 3세의 죽음과 반란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3세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아테네인들은 레오스테네스를 지도자로 삼아 마케도니아의 그리스 지배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용병을 모집하고 아이톨리아 동맹 등을 동맹군으로 합류시켰다.[7]

초기에 아테네를 비롯한 반란군(총 22,500명, 기병 500기)은 안티파트로스가 이끄는 마케도니아 군보다 병력 면에서 우위에 있었고, 전투를 유리하게 이끌었다. 반란군은 안티파트로스를 라미아에 고립시키고 포위 공격을 가했다. 궁지에 몰린 안티파트로스는 소아시아의 마케도니아 장군들에게 지원군을 요청했다.[7]

그러나 레오스테네스가 라미아 포위 중 머리에 돌을 맞아 전사하면서, 안티필로스가 후임 장군이 되었다.[8] 안티파트로스의 원군 요청에 응답하여, 레온나토스가 보병 20,000명과 기병 1,400기를 이끌고 도착하여 안티파트로스를 라미아에서 탈출시켰으나, 자신은 그리스 기병과의 전투에서 전사했다.[9]

이후 크라테로스가 이끄는 마케도니아 군(보병 10,000명, 기병 1,500기, 페르시아인 궁병 및 투석병 1,000명)이 도착해 레온나토스의 군대와 합류했다. 이로써 마케도니아 군은 중장보병 40,000명, 궁병 및 투석병 3,000명, 기병 5,000기로 그리스 연합군을 병력 면에서 압도하게 되었다.

크라테로스로부터 지휘권을 넘겨받은 안티파트로스는 군대를 이끌고 테살리아로 진입했다. 한편, 그리스 연합군은 초반 승리에 도취되어 일부 병력이 고향으로 돌아간 상태였다. 남은 병력은 보병 25,000명, 기병 3,500기에 불과했다. 그리스 연합군은 증원군을 기다리려 했으나, 마케도니아 군의 도발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전투에 응하게 되었다.[10]

2. 2. 초기 전황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3세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아테네인들은 레오스테네스를 지도자로 삼아 마케도니아의 그리스 지배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정했다.[7] 이들은 용병을 모집하고 아이톨리아 동맹 등 여러 동맹을 끌어들여 세력을 확장했다. 초기에는 아테네를 비롯한 반란군이 안티파트로스가 이끄는 마케도니아 군보다 병력 면에서 우위에 있었고, 전투 또한 유리하게 이끌어갔다. 이들은 안티파트로스를 라미아에 포위했고, 궁지에 몰린 안티파트로스는 소아시아의 마케도니아 장군들에게 지원군을 요청했다.[7]

그러나 라미아를 포위하던 중 레오스테네스가 돌에 머리를 맞아 사망하면서, 안티필로스가 후임 장군으로 임명되었다.[8] 안티파트로스의 지원 요청에 가장 먼저 응답한 레온나토스는 보병 20,000명과 기병 1,400명을 이끌고 와 안티파트로스를 라미아에서 탈출시켰으나, 자신은 그리스 기병과의 전투에서 전사했다.[9] 이후 크라테로스가 이끄는 마케도니아 군(보병 10,000명, 기병 1,500기, 페르시아 궁병 및 투석병 1,000명)이 도착했고, 레온나토스의 군대까지 합류하면서 마케도니아 군은 중장보병 40,000명, 궁병과 투석병 3,000명, 기병 5,000기로 불어나 그리스 연합군을 압도하게 되었다.

크라테로스로부터 지휘권을 넘겨받은 안티파트로스는 군대를 이끌고 테살리아로 진입했다. 한편, 그리스 연합군은 초반의 승리로 인해 상황을 낙관하여 병사들이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바람에 보병 25,000명과 기병 3,500기만이 남아있었다. 그리스 연합군은 증원군을 기다리려 했으나, 마케도니아 군의 도발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전투에 응하게 되었다.[10]

2. 3. 마케도니아의 증원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3세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아테네인들은 레오스테네스를 지도자로 삼아 마케도니아의 그리스 지배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용병을 모집하고 아이톨리아 동맹 등을 동맹으로 끌어들였다. 초기에 아테네를 비롯한 반란군은 병력에서 우위를 점하여 안티파트로스라미아에 포위하였다. 궁지에 몰린 안티파트로스는 소아시아에 있던 마케도니아 장군들에게 지원군을 요청했다.[7]

그러나 라미아를 포위하던 중 레오스테네스가 사망하면서 안티필로스가 후임 장군이 되었다.[8] 안티파트로스의 요청에 레온나토스가 보병 20,000명과 기병 1,400명을 이끌고 왔으나, 그리스 기병과의 전투에서 전사했다.[9] 이후 크라테로스가 이끄는 마케도니아 군(보병 10,000명, 기병 1,500기, 페르시아인 궁병 및 투석병 1,000명)이 도착해 레온나토스의 군대와 합류했다.

이로써 마케도니아 군은 총 중장보병 40,000명, 궁병과 투석병 3,000명, 기병 5,000기를 보유하여 그리스 연합군을 압도하게 되었다.

3. 전투

기원전 322년, 안티파트로스와 크라테루스는 아테네인과 동맹군에게 전투를 강요하기 위해 남쪽으로 진격했다. 아테네인들은 흩어진 병력을 소집하여 크라논 근처 테살리아에서 마케도니아군과 마주쳤다.[11]

테살리아 기병대의 명성에 의존한 아테네 장군 안티필로스레온나토스와의 이전 전투에서처럼 기병대를 사용하여 전투에서 승리하려고 했다. 전투는 아테네군 기병대와 마케도니아 기병대 간의 충돌로 시작되었다. 양측 기병대가 교전하는 동안, 안티파트로스는 보병에게 적의 전열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아테네 보병대는 마케도니아군에게 밀려 고지대로 물러났고, 그곳에서 마케도니아의 공격을 격퇴할 수 있었다. 아테네 기병대는 보병이 후퇴하는 것을 보고 전투에서 이탈하여 전장을 떠났고, 마케도니아군에게 승리를 안겨주었다.[11]

3. 1. 기병전

전투는 보병 부대 전면에 배치된 메논이 이끄는 그리스 기병이 마케도니아 기병에게 돌격하면서 시작되었다. 수적으로는 밀렸지만, 정예로 구성된 그리스 테살리아 기병은 마케도니아 기병을 압도하여 깊숙이 추격했다. 양측 기병이 전투에 몰두하는 것을 본 안티파트로스는 보병 팔랑크스에게 그리스 보병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안티필로스가 이끄는 그리스 보병은 마케도니아군에 밀려 방어에 유리한 뒤쪽 언덕으로 후퇴하여 태세를 재정비했다. 그러나 후퇴하는 보병을 보고 사기가 떨어진 그리스 기병은 말머리를 돌렸고, 안티파트로스도 군사를 이끌고 추격했다. 이 전투에서 그리스 연합군은 500명, 마케도니아군은 130명의 희생자를 냈다.[11]

3. 2. 보병전

전투는 보병 부대 전면에 배치된 메논이 이끄는 그리스 기병이 마케도니아 기병에게 돌격하면서 시작되었다. 숫적으로는 밀렸지만, 정예 부대로 구성된 그리스 테살리아 기병은 마케도니아 기병을 압도하고 깊숙이 추격했다. 양측 기병이 전투에 몰두하는 것을 본 안티파트로스는 보병 팔랑크스에게 그리스 보병을 향해 돌격하라고 명령했다. 안티필로스가 이끄는 그리스 보병은 이에 밀려 방어에 유리한 뒤쪽 언덕으로 후퇴하여 간신히 태세를 정비했다. 그러나 후퇴하는 보병을 보고 사기가 떨어진 그리스 기병은 말머리를 돌렸고, 안티파트로스도 군사를 이끌고 추격해 들어갔다. 이 전투에서 그리스 연합군은 500명, 마케도니아 군은 130명의 희생자를 냈다.[11]

3. 3. 그리스 군의 패배

전투는 보병 부대의 전면에 배치된 메논이 이끄는 그리스 기병이 마케도니아 기병에 돌격하면서 시작되었다. 수적으로는 열세였지만, 정예 부대로 구성된 그리스의 테살리아 기병은 마케도니아 기병을 압도하며 깊숙이 추격해 들어갔다. 양측 기병이 전투에 몰두하는 것을 본 안티파트로스는 보병 팔랑크스에게 그리스 보병에 돌격할 것을 명령했다. 안티필로스가 이끄는 그리스 보병은 이에 밀려 방어에 적합한 후방의 언덕으로 후퇴했고, 간신히 태세를 정비했다. 그러나 후퇴하는 보병을 보고 사기가 떨어진 그리스 기병은 말머리를 돌렸고, 안티파트로스도 병력을 철수시켰다. 이 전투에서 그리스 연합군은 500명, 마케도니아군은 130명의 사상자를 냈다.[11]

4. 결과

안티파트로스는 그리스 연합군과의 강화 협상에서 각 도시 국가와 개별적으로 조약을 맺는 전략을 사용했다. 이는 적을 분열시키려는 의도였다.[12] 처음에는 이 조건이 거부되었지만, 마케도니아 군이 테살리아의 여러 도시를 점령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결국, 각 도시는 개별적으로 평화 조약을 맺기 시작했고, 반 마케도니아 동맹은 무너졌다. 아테네는 무조건 항복해야 했으며, 마케도니아 수비대를 받아들이고 포키온의 지도 아래 과두정치로 전환해야 했다.[12]

4. 1. 안티파트로스의 분열 정책

안티파트로스는 강화를 신청한 그리스 연합군 장군들에게 각 도시 국가와 개별적으로만 강화 조약을 맺겠다고 대답했다. 이것은 적들을 분열시키기 위한 계책이었다.[12] 처음에는 안티파트로스의 강화 조건을 거절했지만, 마케도니아 군이 테살리아의 일부 도시들을 함락시키자 많은 도시가 안티파트로스의 요구에 응했다. 이렇게 반 마케도니아 동맹은 붕괴되었다.[12] 무조건 항복을 강요당한 아테네는 안티파트로스가 제시한 강화 조약을 수용했다. 그 내용은 과두제로의 교체와 주전론을 펼치던 시민을 트라키아로 강제 이주, 그리고 마케도니아의 수비대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었다.[12]

아테네 군대는 아직 온전했지만, 마케도니아군이 전쟁에서 우위를 점했다는 것이 분명했다. 안티필루스는 기병 사령관 파르살로스의 메논과 협의한 후 다음 날 안티파테르에게 사절단을 보내 조건에 대해 문의했다. 안티파테르는 아테네가 이끄는 동맹 전체와 일반적인 평화 조약을 맺는 것을 거부하고, 대신 각 도시가 자체 대사를 파견할 것을 주장했다. 이러한 조건은 처음에는 거부되었지만, 그 후 마케도니아군이 테살리아 도시 몇 곳을 점령하면서 각 도시가 별도의 평화를 맺기 위해 경쟁하면서 탈주가 잇따랐다.

동맹국들에게 버려진 아테네는 마침내 무조건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안티파테르가 강요한 평화 조약에서 아테네인들은 마케도니아 수비대를 받아들여야 했으며, 민주주의포키온의 지도 하에 과두정치로 대체되었다.

4. 2. 동맹의 붕괴와 아테네의 항복

안티파트로스는 강화를 신청한 그리스 연합군 장군들에게 각각의 도시 국가와 개별적으로만 강화 조약을 맺겠다고 대답했다. 이것은 적들을 분열시키기 위한 계책이었다. 처음에는 안티파트로스의 강화 조건을 거절했지만, 마케도니아 군이 테살리아의 일부 도시들을 함락시키자 많은 도시가 안티파트로스의 요구에 응했다. 이렇게 반 마케도니아 동맹은 붕괴되었다.[12]

동맹국들에게 버려진 아테네는 결국 무조건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안티파트로스가 강요한 평화 조약에서 아테네인들은 마케도니아 수비대를 받아들여야 했으며, 민주주의포키온의 지도 하에 과두정치로 대체되었다.[12]

4. 3. 아테네 민주정의 종말

안티파트로스는 강화를 신청한 그리스 연합군 장군들에게 각각의 도시 국가와 개별적으로만 강화 조약을 맺겠다고 대답했다. 이것은 적들을 분열시키기 위한 계책이었다. 처음에는 안티파트로스의 강화 조건을 거절했지만, 마케도니아 군이 테살리아의 일부 도시들을 함락시키자 많은 도시가 안티파트로스의 요구에 응했다. 이렇게 반 마케도니아 동맹은 붕괴되었다.[12]

동맹국들에게 버려진 아테네는 결국 무조건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안티파트로스가 강요한 평화 조약에서 아테네인들은 마케도니아 수비대를 받아들여야 했으며, 민주주의포키온의 지도 하에 과두정치로 대체되었다.[12] 또한, 주전론을 펼치던 시민들은 트라키아로 강제 이주를 당해야 했다.[12]

참조

[1] 서적 ディオドロス, XVIII. 9-12
[2] 서적 プルタルコス, 「フォキオン」, 24
[3] 서적 ibid, 25
[4] 서적 ディオドロス, XVIII. 13-17
[5] 서적 ibid, XVIII. 17
[6] 서적 ibid, XVIII. 17-18
[7] 서적 디오도로스, XVIII. 9-12
[8] 서적 플루타르코스, "포키온" 24
[9] 서적 ibid 25
[10] 서적 디오도로스, XVIII. 13-17
[11] 서적 ibid, XVIII 17
[12] 서적 ibid, XVIII.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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