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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티네이아 전투 (기원전 36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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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만티네이아 전투 (기원전 362년)는 테게아와 만티네이아 사이의 분쟁으로 시작되어, 테베와 스파르타를 비롯한 여러 그리스 도시 국가들이 참여한 전투이다. 에파메이논다스가 이끄는 테베는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에파메이논다스의 전사로 인해 패권을 유지하지 못하고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전투 이후 스파르타 또한 군사력이 약화되었고, 이로 인해 그리스 세계는 혼란에 빠지면서 마케도니아의 부상을 위한 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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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티네이아 전투 (기원전 362년)
지도 정보
만티네이아 인근의 전투 위치
전투 개요
전투 이름만티네이아 전투
전투 관련 지역만티네이아, 아르카디아
전투 날짜기원전 362년 7월 4일
전투의 일부테바이-스파르타 전쟁
전투 결과테바이의 전술적 승리, 전략적 무승부, 이후 테베의 패권 상실
교전 세력
교전 세력 1테바이
보이오티아 동맹
테게아
아르카디아의 테게아 동맹
아르고스
테바이의 테살리아 동맹
메세네
에우보이아
시키온
테바이의 로크라이 동맹
아이니스
말리아스
교전 세력 2스파르타
아테나이
엘리스
만티네이아
아카이아
스파르타에 충성하는 아르카디아 동맹
지휘관
지휘관 1에파메이논다스
다이판투스
이올라이다스
지휘관 2아게실라오스 2세
병력 규모
병력 125,000–30,000명
병력 2보병 20,000명, 기병 2,000명
사상자
사상자 16,000명
사상자 212,000명

2. 배경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그리스 도시 국가들 사이에서는 갈등이 계속되었다. 특히 스파르타의 패권에 도전하며 테베가 새롭게 부상하였다.

기원전 362년, 테게아를 중심으로 한 아르카디아인들과 만티네이아인들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였다. 테게아인들은 보이오티아에, 만티네이아인들은 아테네와 스파르타에 도움을 요청했다.[40] 이에 테베의 장군 에파메이논다스는 네 번째 펠로폰네소스반도 원정을 시작했다.

아게실라오스 2세가 이끄는 스파르타 군도 아르카디아로 출격했고, 이를 알게 된 에파메이논다스는 비어있는 스파르타를 공격하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게실라오스가 이를 눈치채고 재빨리 군대를 돌려 스파르타를 방어했다.[42][40]

이후 에파메이논다스는 테게아로 돌아와 보병 부대를 쉬게 하면서 기병 부대를 만티네이아로 보냈다.[44] 헤게시레오스가 이끄는 아테네 군 6000명이 만티네이아 지원군으로 와서, 아테네 기병과 테베·테살리아 기병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고, 아테네 기병이 승리했다.[45]

만티네이아 전투 당시 테베의 패권

2. 1.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의 정세

기원전 431년부터 기원전 404년까지 벌어진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스파르타아테네를 상대로 승리하였으나, 테베의 요새에 군대를 주둔시키면서 테베와의 관계가 악화되었다.[40]

2. 2. 테베의 부상과 에파메이논다스의 역할

기원전 378년, 에파메이논다스는 보이오티아 지역에 주둔한 스파르타 군대에 대한 반란을 주도했다.[2] 기원전 371년 레우크트라 전투에서 에파메이논다스는 테베군을 이끌고 스파르타군을 격파하여 스파르타의 패권에 큰 타격을 입혔다. 그는 스파르타의 정예병들이 우익에 배치될 것이라는 예상 하에 좌익에 테베의 정예 병사들인 신성대를 펠로피다스 장군의 지휘 하에 50명씩 깊게 배치했다.[2] 이 전략은 테베에게 효과적이었고, 클레옴브로토스 왕을 포함한 많은 스파르타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레우크트라 전투는 "부인할 수 없이 완전히 다른 세계로 이어졌고, 스파르타는 심각하게 약화되었고 테베는 크게 기세등등해졌다."[3]

2. 3. 펠로폰네소스 지역의 갈등 심화

기원전 362년, 테게아를 중심으로 한 아르카디아인들과 만티네이아인들 사이에 분쟁이 발생했다. 테게아인들은 보이오티아에, 만티네이아인들은 아테네스파르타에 도움을 요청했다.[40]

레우크트라 전투 이후, 스파르타의 패권이 무너지자 테베의 주요 정치가이자 장군인 에파메이논다스는 테베를 중심으로 새로운 패권을 구축하려 했다.[4] 테베는 펠로폰네소스반도에서 스파르타의 영향력을 억제하고 테베의 통제를 유지하기 위해 아르카디아 동맹을 결성했다.

만티네이아는 아르카디아 동맹과 테베에 대한 불만을 품고 엘리스인들과 연합하여 동맹을 약화시키려 했다. 외교적으로 고립된 만티네이아인들은 아테네와 스파르타에 사절을 보냈고, 이로 인해 그들은 만티네이아에서 집결하여 아르카디아 동맹에 대한 군사 공격에 참여하게 되었다.[13][14]

3. 만티네이아 전투의 전개

기원전 362년, 테게아를 중심으로 한 아르카디아인과 만티네이아인 사이에 분쟁이 발생했다. 테게아인은 보이오티아에, 만티네이아인은 아테네스파르타에 원조를 요청했다.[40] 이에 따라 테베의 장군 에파메이논다스는 네 번째 펠로폰네소스반도 원정을 시작했다. 그는 아테네 군을 네메아에서 기다렸지만, 아테네 군은 해로를 통해 아르카디아로 향했기 때문에 그들을 포착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테게아로 향했다.[41]

(에파메이논다스의 스파르타 공격 시도와 만티네이아에서의 전투 준비에 대한 내용은 하위 섹션에서 자세히 다루어진다.)

이후 에파메이논다스는 보병 부대를 이끌고 만티네이아로 향했고, 스파르타 군도 만티네이아로 도착하면서 전투가 벌어졌다.[46]

3. 1. 에파메이논다스의 스파르타 공격 시도

기원전 362년 아게실라오스 2세가 이끄는 스파르타 군이 아르카디아로 출정했다.[42][40] 이를 알게 된 에파메이논다스는 텅 빈 스파르타를 공격하려 했다. 그러나 아게실라오스는 이 사실을 알고 원정지에서 본국으로 전령을 보내 곧바로 원군을 보내겠다고 알리고 군을 돌렸다.[42][40]

에파메이논다스는 밤새 스파르타로 진군해 포위했지만, 재빨리 도착한 아게실라오스는 이들과 맞서 싸워 스파르타를 지켜냈다.[43]

3. 2. 만티네이아에서의 전투 준비

에파메이논다스는 테게아에서 보병 부대를 쉬게 하고, 기병대를 만티네이아로 보내 농촌 지역을 파괴하고 약탈하라는 임무를 부여했다.[17][18][19] 그러나 만티네이아인들은 인근 클레오나이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아테네 기병대에게 테베 기병대를 공격해 달라고 요청했다. 아테네 기병대는 피곤하고 배고팠지만 만티네이아로 진격하여 테베 기병대와 격렬한 소규모 전투를 벌였고, 크세노폰의 아들 그뤼로스를 포함한 많은 아테네인들이 전사한 후 테베 기병대를 격퇴시켰다.[18][19][20]

그날 밤, 에파메이논다스는 테게아로 돌아와 보병 부대를 쉬게 하면서 다시 만티네이아로 기병 부대를 보냈다.[44] 헤게시레오스가 이끄는 아테네 군 6000명이 만티네이아 지원군으로 와서, 아테네 기병과 테베·테살리아 기병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고, 아테네 기병이 승리했다.[45]

3. 3. 양측 군대의 포진

보이오티아 동맹군은 좌익에 에파메이논다스가 이끄는 보이오티아 군, 우익에 아르고스 군, 중앙에 에우보이아 군, 로크리스 군, 시키온 군, 메세니아 군, 마리아 군, 아이니아니아 군, 테살리아 군 등 다른 동맹군을 배치했다.[47] 반면, 아테나이, 스파르타, 만티네이아 연합군은 만티네이아 군과 아카디아 군이 스파르타 군과 함께 우익을, 아테네 군이 좌익을, 다른 동맹군이 중앙을 차지했다. 양측 모두 기병을 양 날개에 배치했다.[47]

4. 전투의 경과

기원전 362년, 만티네이아 전투테베의 지도자 에파메이논다스가 이끄는 보이오티아 동맹군과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한 펠로폰네소스 동맹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양측은 만티네이아 근처의 평야에서 격돌했다.[22]

에파메이논다스는 전투에 앞서, 적에게 전투를 하지 않을 것이라는 인상을 주기 위해 군대를 서쪽 산 근처로 이동시킨 후, 비밀리에 진형을 재편성했다. 그는 최정예 보이오티아 병력을 왼쪽에 깊이 50열에 달하는 대형 팔랑크스로 집중시키고, 아르카디아인, 아르고스인, 그리고 나머지 동맹군을 배치하여 스파르타 우익을 돌파하는 사선 공격을 준비했다. 기병대는 양쪽 측면에 배치되었다.[25][27][28][29][30]

전투는 보이오티아 연합군과 스파르타-아테네 연합군 간의 격돌로 시작되었다. 기병전에서는 초반 테베 기병대가 아테네 기병대를 격파하였으나, 엘리스 기병대의 지원으로 전세가 역전되었다. 보병전에서는 에파메이논다스가 직접 선두에 서서 스파르타군을 밀어붙였으나, 스파르타군의 집중 공격을 받고 치명상을 입었다. 에파메이논다스는 후계자로 지명한 지휘관들이 모두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테베에 남은 지휘관이 없다며 강화 협상을 지시하고 숨을 거두었다.[57]

4. 1. 기병전

전투가 시작되면서 보이오티아 연합군 우익에 배치된 테베 기병대와 경장보병은 아테네 기병과 맞붙어 패주시켰다. 그러나 후위에 있던 엘리스 기병의 지원을 받은 아테네 기병은 역습을 시작했고, 테베 기병을 이탈시켜 대부분을 죽였다.[48] 그러나 좌익의 기병전에서는 보이오티아 연합군이 우세를 보이며, 테살리아 기병이 만티네이아 군을 압박하고 있었다.[49]

4. 2. 보병전

보이오티아군과 스파르타군은 격렬하게 보병 전투를 벌였다. 에파메이논다스는 직접 선두에서 병사들을 지휘하며 사기를 높이고 적에게 공격을 가했다. 그는 창을 던져 스파르타군 지휘관 중 한 명을 죽이고 적을 밀어붙였다.[50]

그러나 스파르타군은 에파메이논다스가 최전선에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 조국의 운명이 그의 죽음에 달려있다고 판단하여 그에게 공격을 집중시켰다. 많은 손실이 있었지만 에파메이논다스는 쏟아지는 화살을 피하고 적에게 되던지기도 했지만, 결국 적이 던진 창에 가슴을 맞고 쓰러졌다.[51][52] 플루타르코스는 에파메이논다스에게 치명상을 입힌 자가 안티크라테스라는 스파르타인이라고 했지만,[53] 파우사니아스크세노폰의 아들 그륄로스라고 기록했다.[54]

에파메이논다스의 죽음

4. 3. 에파메이논다스의 죽음

진영으로 옮겨진 에파메이논다스는 군 지휘권을 물려주기 위해 지휘관 중 한 명인 다이판토스를 부르려고 했지만, 그도 전사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이올라이다스를 불러달라고 말했지만, 그 역시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테베에는 지휘관이 남아 있지 않다. 적과 강화를 하도록 해라”고 지시했다.[57] 그리고 “만족스러운 삶이었다. 패배를 모르고 죽을 수 있으니까”라는 말을 남기고 목숨을 잃었다.[58] 또는 그의 마지막 말이 “나는 나의 승리, 즉 레욱트라와 만티네이아라는 두 딸을 남기는 것이다”였다고 전해지기도 한다.[59]

5. 전투의 결과 및 영향

이 전투 이후 양측은 서로 승리를 주장했지만[60], 교전국 사이에 평화 조약이 맺어졌다.[61] 보이오티아 동맹군은 승리했지만, 에파메이논다스를 비롯한 유능한 장군들을 잃었다. 테베의 패권은 에파메이논다스 개인의 역량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후 테바이는 그리스의 패권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고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에파미논다스 묘사


테베는 전투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에파메이논다스가 전사하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 그의 지도력과 군사력이 사라지면서 테베의 패권 유지에 대한 희망도 사라졌다. 스파르타는 이 전투에서 다시 한번 패배하여 병력 손실을 메울 수 없었다.

크세노폰에포로스 같은 당대 역사가들은 그리스 최대 도시들이 이 전투에 모였음에도 불구하고, 전투의 결과가 결정적이지 못한 것에 실망했다. 이 전투에서 단일 패권 세력이 등장하지 못하자, 크세노폰과 같은 필자들은 그리스가 본질적으로 무질서한 상태에 있으며 명확한 패권 세력은 결코 등장하지 않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39]

이 전투의 궁극적인 결과는 마케도니아테베스파르타의 약점을 이용하여 그리스의 나머지 지역을 정복하는 주요 세력으로 부상하는 길을 열어준 것이었다. 기원전 368~365년 필리포스 2세는 테베에서 포로 생활을 하며 에파메이논다스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기원전 364년 필리포스는 마케도니아로 돌아갔고, 이후 자신의 군사 기술을 이용하여 그리스를 지배했다.

5. 1. 양측의 피해

이 전투가 벌어진 이후 양측은 서로 승리를 주장했지만[60], 교전국 사이에 평화 조약이 맺어졌다.[61] 보이오티아 동맹군은 승리했지만, 에파메이논다스를 비롯한 유능한 장군들을 잃었다. 테바이의 패권은 에파메이논다스 개인의 역량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후 테바이는 그리스의 패권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고,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테베는 전투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에파미논다스가 전사하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 에파미논다스는 죽음을 앞두고 동료 지도자들의 죽음 소식을 듣고, 전투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테베인들에게 평화를 맺으라고 지시했다.[15] 그의 지도력과 군사력 없이 테베의 패권에 대한 희망은 사라졌다. 스파르타는 다시 한번 전투에서 패배하여 손실을 메울 수 없었다. 많은 엘리트 스파르타 전사들이 전투 중에 전사했기 때문에 스파르타의 군사력은 이 전투로 크게 약화되었다.

5. 2. 테베 패권의 종식

이 전투 이후 양측은 서로 승리를 주장했지만[60], 교전국 사이에 평화 조약이 맺어졌다.[61] 이 전투에서 보이오티아 동맹군은 승리를 얻었지만, 에파메이논다스를 비롯한 많은 유능한 장군을 잃었다. 테바이의 패권은 에파메이논다스 개인의 역량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후 테바이는 그리스의 패권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고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테베는 전투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에파미논다스가 전사하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 에파미논다스는 죽음을 앞두고 동료 지도자들의 죽음 소식을 듣고, 전투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테베인들에게 평화를 맺으라고 지시했다.[15] 그의 지도력과 군사력이 사라지면서 테베의 패권 유지에 대한 희망도 사라졌다. 스파르타는 이 전투에서 다시 한번 패배하여 병력 손실을 메울 수 없었다. 많은 엘리트 스파르타 전사들이 전사하여 스파르타의 군사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숙련된 베테랑들을 대체하려면 수년간의 훈련, 경험, 자원이 필요했고, 군대의 잔여 병력은 경험이 부족한 자들에게 맡겨졌다.

크세노폰에포로스 같은 당대 역사가들은 그리스 최대 도시들이 이 전투에 모였음에도 불구하고, 전투의 결과가 결정적이지 못한 것에 실망했다. 고대 그리스 역사 서술은 역사를 시대로 구분하는 전통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이 전투로 인한 정치적, 영토적 변화가 없어 역사적 중요성을 이해하기 어려웠다.[38] 이 전투에서 단일 패권 세력이 등장하지 못하자, 크세노폰과 같은 필자들은 그리스가 본질적으로 무질서한 상태에 있으며 명확한 패권 세력은 결코 등장하지 않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39]

이 전투의 궁극적인 결과는 마케도니아가 테베와 스파르타의 약점을 이용하여 그리스의 나머지 지역을 정복하는 주요 세력으로 부상하는 길을 열어준 것이었다. 기원전 368~365년 필리포스 2세는 테베에서 포로 생활을 하며 에파미논다스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필리포스는 에파미논다스의 지도 아래, 당시 기준으로 비정규적인 성공적인 전쟁 방식에 대한 군사 교육을 받았다. 기원전 364년 필리포스는 마케도니아로 돌아갔고, 이후 자신의 군사 기술을 이용하여 그리스를 지배했다.

5. 3. 그리스 세계의 혼란

이 전투 이후 양측은 서로 승리를 주장했지만[60], 교전국 사이에 평화 조약이 맺어졌다.[61] 테베는 전투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에파메이논다스가 전사하면서 그들의 패권에 큰 타격을 입었다. 에파미논다스는 죽음을 앞두고 동료 지도자들의 죽음 소식을 듣고, 전투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테베인들에게 평화를 맺으라고 지시했다.[15] 그의 지도력과 군사력 없이 테베의 패권에 대한 희망은 사라졌다. 그러나 스파르타는 다시 한번 전투에서 패배하여 손실을 메울 수 없었다. 많은 엘리트 스파르타 전사들이 전투 중에 전사했기 때문에 스파르타의 군사력은 이 전투로 크게 약화되었다.

크세노폰에포로스와 같은 당대의 역사가들은 그리스 최대 도시들이 하나의 전투에 모였음에도 불구하고 전투의 결정적이지 못한 성격에 실망했다. 고대 그리스 역사 서술은 역사를 시대로 구분하는 오랜 전통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이 전투가 가져온 정치적 또는 영토적 변화의 부재로 인해 만티네아이 전투의 역사적 중요성을 이해할 수 없었다.[38] 이 전투에서 단일 패권 세력이 등장하지 못한 것은 크세노폰과 같은 필자들이 그리스가 본질적으로 무질서 상태에 있으며 명확한 패권 세력은 결코 등장하지 않을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했다.[39]

전투의 궁극적인 결과는 테베스파르타 모두의 약점을 이용하여 그리스의 나머지 지역을 정복한 주요 세력으로 마케도니아의 부상을 위한 길을 열어준 것이었다. 기원전 368~365년 필리포스 2세가 테베에서 포로 생활을 했는데, 그곳에서 에파미논다스에게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다.

5. 4. 마케도니아의 부상

테베스파르타의 약화는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가 그리스를 정복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39] 필리포스 2세는 기원전 368년부터 365년까지 테베에서 포로 생활을 하며 에파메이논다스에게 군사 교육을 받았다.[38] 에파미논다스의 지도 아래 필리포스는 당시 기준으로 비정규적인 전쟁 방식에 대한 군사 교육을 받았다. 기원전 364년 필리포스는 마케도니아로 돌아간 후, 자신의 군사 기술을 이용하여 그리스를 지배했다.

6. 한국적 관점에서의 재해석

만티네이아 전투(기원전 362년)는 한국적 관점에서 직접적으로 재해석할 만한 사료나 연관성이 부족하다. 따라서 이 전투에 대한 한국적 관점에서의 재해석은 어렵다.

참조

[1] 서적 Creating a common polity: Religion, economy, and politics in the making of the Greek Koinon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 논문 The Theban Supremacy in Fourth-Century Literature Classical Association of Canada
[3] 서적 Creating a common polity: Religion, economy, and politics in the making of the Greek Koinon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4] 웹사이트 To Philip http://www.perseus.t[...]
[5] 웹사이트 Library http://www.perseus.t[...]
[6] 서적 Great Battles of the Classical Greek World Pen & Sword Military
[7] 서적 Battles and Battlefields of Ancient Greece Pen & Sword Military
[8] 서적 Great Battles of the Classical Greek World Pen & Sword Military
[9] 서적 Great Battles of the Classical Greek World Pen & Sword Military
[10] 웹사이트 Xenophon, Hellenica https://www.perseus.[...]
[11] 서적 Great Battles of the Classical Greek World Pen & Sword Military
[12] 웹사이트 Xenophon, Hellenica https://www.perseus.[...]
[13] 웹사이트 Xenophon, Hellenica https://www.perseus.[...]
[14] 서적 Great Battles of the Classical Greek World Pen & Sword Military
[15] 웹사이트 Xenophon, Hellenica http://www.perseus.t[...]
[16] 웹사이트 Xenophon, Hellenica https://www.perseus.[...]
[17] 웹사이트 Xenophon, Hellenica https://www.perseus.[...]
[18] 서적 Great Battles of the Classical Greek World Pen & Sword Military
[19] 서적 Battles and Battlefields of Ancient Greece Pen & Sword Military
[20] 웹사이트 Xenophon, Hellenica https://www.perseus.[...]
[21] 웹사이트 Xenophon, Hellenica https://www.perseus.[...]
[22] 서적 Battles and Battlefields of Ancient Greece Pen & Sword Military
[23] 서적 Great Battles of the Classical Greek World Pen & Sword Military
[24] 서적 Battles and Battlefields of Ancient Greece Pen & Sword Military
[25] 웹사이트 Xenophon, Hellenica https://www.perseus.[...]
[26] 서적 Great Battles of the Classical Greek World Pen & Sword Military
[27] 서적 Great Battles of the Classical Greek World Pen & Sword Military
[28] 서적 Battles and Battlefields of Ancient Greece Pen & Sword Military
[29] 웹사이트 Xenophon, Hellenica https://www.perseus.[...]
[30] 서적 Great Battles of the Classical Greek World Pen & Sword Military
[31] 웹사이트 Xenophon, Hellenica http://www.perseus.t[...]
[32] 웹사이트 Xenophon, Hellenica http://www.perseus.t[...]
[33] 서적 Great Battles of the Classical Greek World Pen & Sword Military
[34] 웹사이트 Xenophon, Hellenica https://www.perseus.[...]
[35] 서적 Battles and Battlefields of Ancient Greece Pen & Sword Military
[36] 서적 Great Battles of the Classical Greek World Pen & Sword Military
[37] 웹사이트 Polyaenus, Stratagems, 2.32.1 http://cts.perseids.[...]
[38] 서적 Xenophon and the History of His Times Routledge
[39] 서적 Xenophon and the History of His Times Routledge
[40] 문서 디오도로스, XV. 82
[41] 문서 크세노폰, VII. 5. 6, 7
[42] 문서 ibid, VII. 5. 9, 10
[43] 문서 크세노폰, VII. 5. 11-13
[44] 문서 ibid, VII. 5. 14
[45] 문서 ibid, VII. 5. 16, 17
[46] 문서 디오도로스, XV. 83-84
[47] 문서 ibid, XV. 85
[48] 문서 크세노폰, VII. 5. 25
[49] 문서 디오도로스, XV. 85
[50] 문서 ibid, XV. 86
[51] 문서 네포스, 「에파메이논다스」, 9
[52] 문서 디오도로스, XV. 87
[53] 문서 플루타르코스, 「아게시라오스」, 35
[54] 문서 파우사니아스, VIII. 11. 6; IX. 15. 5
[55] 문서 아이리아노스, XII. 3
[56] 문서 크세노폰, VII. 5. 26
[57] 문서 아이리아노스, XII 3
[58] 문서 네포스, "에파메이논다스" 9
[59] 문서 디오도로스, XV 87
[60] 문서 크세노폰, VII 5. 26
[61] 문서 플루타르코스, "아게실라오스"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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