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이디온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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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클레이디온 전투는 1014년 비잔티움 제국과 불가리아 제국 간에 벌어진 전투로, 불가리아의 사무일 황제가 이끄는 군대가 바실리오스 2세 황제의 비잔티움 군대에 대패했다. 이 전투는 비잔티움-불가리아 전쟁의 중요한 분기점이었으며, 불가리아 제국의 쇠퇴를 가속화시켰다. 비잔티움군은 승리 후 스트루미차를 점령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이후 비잔티움 제국은 멜니크를 점령하고 불가리아군을 공격하여 많은 포로를 얻었다. 이 사건으로 사무일은 사망하고 불가리아는 1018년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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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이디온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
전투 정보 | |
일부 | 비잔틴-불가리아 전쟁의 일부 |
![]() | |
날짜 | 1014년 7월 29일 |
장소 | 불가리아 블라고에브그라드 주의 클류치 인근 벨라시차 산맥 |
결과 | 비잔티움 제국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비잔티움 제국 |
교전국 2 | 불가리아 제국 |
지휘관 및 지도자 | |
비잔티움 제국 | 바실리오스 2세 니케포로스 크시피아스 콘스탄티노스 디오예니스 테오필락토스 보타니아티스 |
불가리아 제국 | 사무일 가브릴 라도미르 |
병력 | |
비잔티움 제국 | 미상 |
불가리아 제국 | 미상 |
피해 규모 | |
비잔티움 제국 | 미상 |
불가리아 제국 | 거의 전멸, 약 15,000명 포로로 추정 |
2. 배경
클레이디온 전투는 불가리아 제1제국과 동로마 제국 사이의 오랜 갈등이 정점에 달했던 사건이다. 이 갈등은 7세기 불가르족이 다뉴브강 유역에 정착하여 국가를 세우면서 시작되었으며, 이후 양 제국은 존립을 걸고 끊임없는 전쟁을 벌여왔다.[1]
10세기 후반에 이르러, 과거 시메온 1세 치하에서 강력한 힘을 자랑했던 불가리아 제국은 키예프 대공 스뱌토슬라프 1세의 침공 등으로 인해 국력이 크게 약화된 상태였다.[2][3] 동로마 제국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공세를 강화하여 971년에는 수도 프레슬라프를 함락하고 불가리아 동부 지역을 장악했다.[4]
하지만 서부 불가리아 지역에서는 코미토풀리 가문의 사무일을 중심으로 독립을 지키기 위한 저항이 끈질기게 이어졌다.[5][6] 976년 동로마 제국의 황제로 즉위한 바실리오스 2세는 불가리아의 완전한 정복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 그의 첫 원정은 986년 트라야누스 관문 전투에서 사무일에게 참패하는 것으로 끝났으나,[7] 이후 15년간 내부 정비와 동방 전선 안정화에 힘쓴 바실리오스 2세는 1000년부터 다시 불가리아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를 재개했다.
바실리오스 2세는 모이시아, 비딘, 스코페 등 주요 지역을 차례로 점령하며 불가리아를 압박했다.[10] 사무일은 스페르케이오스 전투에서의 패배[7]에도 불구하고 게릴라전과 교란 작전으로 맞섰지만, 수십 년간 지속된 비잔티움의 체계적인 소모전 앞에 불가리아의 국력은 점차 소진되었다.[10][11] 비잔티움 역사가 요안니스 스킬리지스가 기록했듯, 바실리오스 2세는 매년 불가리아를 침공하여 황폐화시켰고, 사무일은 거듭된 패배로 힘을 잃어갔다.[11] 1014년, 바실리오스 2세의 군대가 또다시 불가리아 심장부로 진격해오자, 사무일은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다고 판단하고 클레이디온 협곡에서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게 되었다.
2. 1. 7세기 불가르족의 남하와 국가 건설
분쟁의 기원은 7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아스파루흐 칸이 이끄는 불가르족은 동로마 제국 영토였던 다뉴브강 유역에 나라를 세웠다. 이는 이후 불가리아가 생존을 위해 비잔티움 제국과 끊임없이 전쟁을 벌이는 배경이 되었다.[1]2. 2. 968년 키예프 공국의 침공과 불가리아의 약화
968년, 키예프 대공 스뱌토슬라프 1세가 북쪽에서 불가리아를 침공하였다.[2] 당시 불가리아 제국은 과거 시메온 1세 치세에 비잔티움 제국의 존립을 위협할 정도의 강성함을 보였으나, 이때는 이미 상당한 국력을 상실한 상태였다.[3] 키예프 루스의 침공은 불가리아와 전쟁 중이던 비잔티움 군대에 의해 여러 차례 격퇴되었으며, 이어진 분쟁 속에서 971년 불가리아의 수도 프레슬라프가 비잔티움에 함락되었다. 이 전쟁의 결과로 불가리아 황제 보리스 2세는 콘스탄티노플에서 제위를 포기해야 했고, 불가리아 동부 지역은 비잔티움 제국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되었다.[4] 비잔티움 측은 이를 통해 불가리아의 독립이 끝났다고 여겼으나, 서부 불가리아 지역은 독립을 유지하였다. 이곳에서는 코미토풀리 가문의 형제들인 다비트, 모이세이, 아론, 사무일 등을 중심으로 비잔티움에 대한 저항이 이어졌다.[5][6]2. 3. 971년 프레슬라프 함락과 불가리아 동부의 비잔티움 제국 편입
968년, 키예프의 대공 스뱌토슬라프 1세가 북쪽에서 불가리아를 침공하였다.[2] 당시 불가리아 제국은 과거 시메온 1세의 통치 아래 비잔티움의 존립을 위협했던 강력한 힘을 상당 부분 잃은 상태였다.[3]이 분쟁 과정에서 키예프 군대는 비잔티움에 의해 여러 차례 격퇴되었으며, 비잔티움은 971년 불가리아의 수도 프레슬라프를 함락시키며 불가리아와의 전쟁을 이어갔다. 이 전쟁의 결과로 불가리아 황제 보리스 2세는 콘스탄티노플에서 황제의 칭호를 공식적으로 포기해야 했고, 불가리아 동부 지역은 비잔티움 제국의 통치하에 놓이게 되었다.[4]
비잔티움 제국은 이를 독립 불가리아의 종말로 여겼으나, 서부 불가리아 지역은 여전히 자치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 지역에서는 코미토풀리가의 형제들인 다비트, 모이세이, 아론, 그리고 사무일을 중심으로 비잔티움에 대한 저항이 계속되었다.[5][6]
2. 4. 976년 바실리오스 2세 즉위와 불가리아 정복 의지
976년 비잔티움 황제 바실리오스 2세가 제위에 오르면서, 그의 첫 번째 목표는 독립된 불가리아를 완전히 정복하는 것이었다. 당시 그의 주요 상대는 사무일이 이끌던 서부 불가리아 세력이었다. 바실리오스 2세의 첫 군사 원정은 986년 트라얀 관문 전투에서 불가리아군에게 대패하며 재앙으로 끝났고, 황제 자신도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7]이후 약 15년간 바실리오스 2세는 제국 내부의 반란과 동쪽의 파티마 왕조의 위협에 대처해야 했고, 이 기간 동안 사무일은 과거 비잔티움에 빼앗겼던 영토 상당 부분을 되찾고 비잔티움 영토로 전쟁을 확대해 나갔다. 하지만 코린토스까지 남하했던 사무일의 그리스 남부 원정은 996년 스페르치오스 전투에서의 결정적인 패배로 끝나게 되었다.
1000년부터 내부 상황을 안정시킨 바실리오스 2세는 불가리아에 대한 본격적인 공세를 재개했다. 그는 모이시아를 확보하고 1003년에는 비딘을 점령했으며, 이듬해에는 스코페 전투에서 사무일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1005년경에는 테살리아와 마케도니아 남부 지역의 통제권을 회복했다. 이후 몇 년간 전쟁은 비잔티움군이 매년 불가리아로 원정하여 요새를 포위하고 주변 지역을 약탈하면, 수적으로 열세인 불가리아군은 직접적인 대결을 피하고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지역에서 교란 작전을 펼치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불가리아의 교란 작전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기도 했으나, 전쟁의 흐름을 바꾸거나 바실리오스 2세의 원정을 막지는 못했다. 비잔티움 역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이러한 체계적인 소모전을 통해 불가리아의 요새들을 하나씩 점령하고 국력을 점차 약화시켰다.[10] 1009년에 시도된 불가리아의 반격은 크레타 전투에서 실패로 돌아갔다.[8][9]
비잔티움 역사가 요한 스킬리체스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바실리오스 2세 황제는 매년 불가리아를 침공하여 그 과정에서 모든 것을 파괴하고 황폐화했다. 사무일은 야전에서 그를 막거나 결정적인 전투에서 황제와 맞설 수 없었고, 거듭된 패배로 그의 힘은 약해지기 시작했다."[11] 이러한 과정을 거쳐 전쟁은 1014년에 결정적인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고, 사무일은 비잔티움 군대가 불가리아의 심장부로 진격하는 것을 막기 위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맞서기로 결심했다.
2. 5. 986년 트라야누스 관문 전투와 바실리오스 2세의 패배
976년 비잔티움 황제로 즉위한 바실리오스 2세는 독립 상태를 유지하던 불가리아를 완전히 정복하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7] 당시 불가리아 서부 지역은 코미토풀리 형제들, 특히 사무일의 지도 아래 비잔티움에 저항하고 있었다.[5][6] 바실리오스 2세의 첫 군사 원정은 재앙적인 실패로 끝났는데, 986년 트라야누스 관문 전투에서 사무일이 이끄는 불가리아 군대가 비잔티움 군대를 전멸시키자 황제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져 탈출해야 했다.[7]2. 6. 사무일의 반격과 비잔티움 제국의 재정비
976년 비잔티움 황제 바실 2세가 왕위에 오르자, 그는 독립적인 불가리아를 완전히 정복하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6] 그의 주요 상대는 당시 사무일이 이끌던 서부 불가리아 세력이었다. 그러나 바실 2세의 첫 번째 군사 원정은 큰 실패로 끝났다. 986년 트라얀 패스 전투에서 불가리아군이 비잔티움 군대를 거의 전멸시켰고, 황제 자신도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7]이후 약 15년 동안, 바실 2세는 제국 내부의 반란을 진압하고 동쪽 국경에서 파티마 왕조의 위협에 대처하는 데 집중해야 했다. 이 시기를 틈타 사무일은 과거 비잔티움에 빼앗겼던 불가리아 영토 대부분을 되찾았고, 오히려 비잔티움 제국 영토로 여러 차례 원정을 감행하며 전쟁을 확대했다. 하지만 그의 공세도 한계에 부딪혔다. 코린토스까지 남하했던 그리스 남부 침공은 996년 스페르치오스 전투에서 불가리아군이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면서 막을 내렸다.
1000년부터 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내부 문제를 정리하고 제국력을 회복한 바실 2세는 불가리아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를 시작했다. 그는 먼저 모이시아 지역을 확보했고, 1003년에는 그의 군대가 비딘을 점령했다. 이듬해인 1004년에는 스코페 전투에서 사무일에게 큰 패배를 안겨주었다. 1005년까지 바실 2세는 테살리아와 마케도니아 남부 지역의 지배권을 되찾는 데 성공했다.
이후 몇 년 동안 전쟁은 일정한 양상을 보였다. 비잔티움 군대는 매년 불가리아 영토로 진격하여 요새를 포위하고 주변 지역을 약탈하며 점진적으로 압박해 들어갔다. 반면, 수적으로 열세였던 불가리아군은 비잔티움 군대와의 직접적인 대결을 피하면서, 대신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지역에서 기습적인 약탈과 교란 작전을 펼쳐 비잔티움의 주의를 분산시키려 했다. 불가리아의 이러한 저항은 일시적인 성공을 거두기도 했지만, 전쟁의 큰 흐름을 바꾸거나 바실 2세의 공세를 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1009년에 시도된 불가리아의 반격 역시 크레타 전투에서 실패로 돌아갔다.[8][9]
비록 비잔티움 제국 역시 단번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바실 2세의 체계적이고 집요한 소모전은 불가리아의 요새들을 하나씩 함락시키고 군사력을 점차 약화시켰다.[10] 비잔티움의 역사가 요한 스킬리체스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황제 바실 2세는 매년 불가리아를 침공하여 그의 길에 있는 모든 것을 파괴하고 황폐화했다. 사무일은 야전에서 그를 막거나 황제와 결정적인 전투를 벌일 수 없었고, 많은 패배를 겪으며 그의 힘을 잃기 시작했다."[11] 이러한 과정을 거쳐 전쟁은 1014년에 절정으로 치달았고, 마침내 사무일은 비잔티움 군대가 불가리아의 심장부로 더 깊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정면 대결을 벌이기로 결심했다.
2. 7. 소모전과 불가리아의 약화
코린토스까지 이르렀던 사무일의 남부 그리스 침공은 996년 스페르케이오스 전투에서 큰 패배를 겪으며 마무리되었다.[7] 이후 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1000년, 내부 반란을 진압하고 동쪽의 파티마 위협으로부터 안정된 바실리오스 2세 황제는 불가리아에 대한 본격적인 공세를 시작했다.[10]바실리오스 2세는 먼저 모이시아를 확보하였고, 1003년에는 그의 군대가 비딘을 점령했다. 이듬해인 1004년, 바실리오스 2세는 스코페 전투에서 사무일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10] 1005년까지 비잔티움 제국은 테살리아와 마케도니아 남부 지역의 지배권을 되찾았다.[10] 이 시기부터 몇 년간 전쟁은 일정한 양상을 띠었다. 비잔티움 군대는 매년 불가리아 영토로 진격하여 요새를 포위하고 주변 지역을 약탈하는 소모전을 펼쳤다. 반면, 수적으로 열세였던 불가리아 군대는 직접적인 대결을 피하고, 비잔티움 군대의 주의를 분산시키기 위해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지역에서 교란 작전을 벌이는 방식으로 대응했다.[10]
이러한 불가리아의 저항은 일부 성공을 거두기도 했지만, 전쟁의 흐름을 바꾸거나 바실리오스 2세의 공세를 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1009년에는 불가리아의 반격 시도가 크레타 전투에서 실패로 돌아갔다.[8][9] 비잔티움 역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체계적인 소모전을 통해 불가리아의 요새들을 하나씩 점령하고 군사력을 점차 약화시켰다.[10] 비잔티움의 역사가 요안니스 스킬리지스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황제 바실리오스 2세는 매년 불가리아를 침공하여 그의 길에 있는 모든 것을 파괴하고 황폐화했다. 사무일은 그를 야전에서 막거나 황제와 결정적인 전투를 벌일 수 없었고, 많은 패배를 겪으며 그의 힘을 잃기 시작했다."[11]
결국 오랜 소모전 끝에 불가리아의 국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1014년, 사무일은 더 이상 후퇴하지 않고 비잔티움 군대가 불가리아의 심장부로 진격하는 것을 막기 위해 직접 군대를 이끌고 결전을 준비하게 된다.[11]
3. 전조
불가리아 제1제국의 사무일은 비잔티움 제국의 침공이 임박했음을 인지하고 국경 지역, 특히 클레이디온과 스트루미차 일대를 중심으로 방어 태세를 강화했다.[63][64] 계속된 전쟁에서의 패배와 두러스 총독의 투항[67] 등으로 내부적인 어려움이 커지는 상황에서, 사무일은 비잔티움과의 결전을 위해 대규모 군대를 소집했다.[68] 한편, 비잔티움 황제 바실리오스 2세 역시 대규모 원정군을 동원하여[17] 불가리아 정복을 위한 준비를 마쳤다. 양측의 이러한 움직임은 피할 수 없는 대규모 충돌을 예고하고 있었다.
3. 1. 불가리아의 방어 준비

사무일은 비잔티움 군대가 여러 산길을 통해 불가리아를 침입할 것을 예상하고 방어 준비에 나섰다. 불가리아인들은 국경을 따라 해자를 파고, 계곡과 산길 곳곳에 성벽과 성탑을 쌓아 요새화했다. 특히 바실리오스 2세가 불가리아 중심부로 진격하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스트루마강의 클레이디온(Kleidion) 관문을 집중적으로 강화했다. 사무일은 스트루미차 성의 남동쪽에 위치한 벨라시차 산맥의 북쪽 능선에도 강력한 방어 시설을 구축했다.[63] 스트루미차강의 넓은 계곡은 과거에도 비잔티움 군대가 침공로로 자주 이용했던 곳으로, 불가리아 군대는 이곳을 지키기 위해 견고한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또한 사무일은 동쪽의 트라키아와 서쪽의 오흐리드를 잇는 길목에 위치한 스트루미차를 방어 거점으로 선택했다.[64] 스트루미차 남쪽의 바위가 많은 험준한 지형에는 불가리아 군대가 지키는 토루와 성벽들이 흩어져 있었다.[65][66]
사무일이 클레이디온에서 바실리오스 2세의 주력군과 맞서기로 결정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계속되는 패배와 비잔티움의 침공으로 국가가 황폐화된 상황이었을 뿐만 아니라, 바실리오스 2세의 군사 활동으로 인해 귀족들 사이에서 사무일의 권위가 약화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1005년에는 아드리아해의 주요 항구 도시인 두러스(디라키움)의 총독이 바실리오스 2세에게 항복하는 일도 있었다.[67] 이러한 위협에 맞서 사무일은 대규모 군대를 소집했는데, 일부 기록에 따르면 병력이 최대 45,000명에 달했다고 한다.[68] 바실리오스 2세 역시 철저히 준비하여 대군을 이끌고 왔다. 여기에는 1001년에 사무일로부터 옛 불가리아의 수도였던 플리스카와 프레슬라프를 탈환했던 플로프디프(필리포폴리스) 총독 니케포로스 크시피아스를 비롯한 경험 많은 지휘관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3. 2. 사무일의 결전 의지와 배경
사무일은 비잔티움 군대가 여러 산길을 통해 불가리아를 침공할 것을 예상하고 이에 대비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불가리아인들은 국경을 따라 참호를 건설하고 많은 계곡과 고개를 성벽과 성탑으로 요새화했다. 특히 스트루마강에 위치한 클레이디온 관문은 바실리오스 2세가 불가리아 중심부로 진격하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전략적 요충지였기에 더욱 중점적으로 요새화되었다. 사무일은 스트루미차 성 남동쪽에 있는 벨라시차산맥의 북쪽 사면을 강력하게 요새화했다.[12] 스트루미차강의 넓은 계곡은 과거에도 비잔티움 군대가 침공로로 사용했던 곳으로, 불가리아군은 강력한 방어 시설을 구축하여 이곳을 지켰다. 또한 사무일은 동쪽의 트라키아와 서쪽의 오흐리드로 이어지는 길목에 위치한 스트루미차를 방어 기지로 선택했다.[13] 남쪽의 험준한 지형에는 불가리아 부대가 지키는 토루와 성벽들이 흩어져 있었다.[14][15]
사무일이 클레이디온에서 바실리오스 2세의 주력 군대와 맞서기로 결정한 것은 계속된 패배와 침략으로 국가가 황폐화된 상황 때문만이 아니었다. 바실리오스 2세의 계속된 군사 작전으로 인해 귀족들 사이에서 사무일의 권위가 약화되는 것에 대한 우려도 크게 작용했다. 실제로 1005년에는 아드리아해의 중요한 항구 도시인 디라키움의 총독이 바실리오스 2세에게 도시를 넘기며 항복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16] 이러한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사무일은 비잔티움군에 맞서기 위해 대규모 군대를 소집했으며, 일부 기록에 따르면 그 병력은 최대 45,000명에 달했다고 한다.[17]
바실리오스 2세 역시 신중하게 전쟁을 준비하여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고, 경험 많은 지휘관들을 소집했다. 여기에는 1001년에 사무일로부터 옛 불가리아 수도였던 플리스카와 프레슬라프를 탈환했던 필리포폴리스(현 플로프디프) 총독 니케포로스 크시피아스도 포함되어 있었다.
4. 전투
비잔티움 군대는 스트루마강 유역의 클류치(현대 불가리아 클류치) 인근에서 불가리아군이 구축한 견고한 목조 방벽에 가로막혔다.[69][70] 바실리오스 2세 황제가 이끄는 비잔티움 군대의 초기 정면 공격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 실패했다.[71][72]
이에 불가리아의 사무일 황제는 비잔티움 군대의 주의를 분산시키고자 네스토리차가 이끄는 군대를 남쪽의 테살로니키로 보냈지만, 이 공격은 현지 비잔티움 지휘관 테오필락토스 보타니아티스에게 격퇴되었다.[73][74][75]
정면 돌파가 어렵다고 판단한 바실리오스 2세는 장군 니케포로스 크시피아스에게 벨라시차산을 우회하여 불가리아군의 후방을 공격하도록 명령하는 한편, 자신은 정면 공격을 계속했다.[77][78] 1014년 7월 29일, 크시피아스가 이끄는 군대가 험준한 산길을 넘어 성공적으로 불가리아군의 후방을 급습하자,[77][78] 불가리아 방어군은 혼란에 빠져 방어선을 포기했다. 이 틈을 타 바실리오스 2세의 본대 역시 방벽을 돌파하는 데 성공했다.[79][80]
결과적으로 불가리아군은 완전히 포위되어 대패하였고, 수천 명의 병사가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혔다. 스트루미차에서 전황을 지켜보던 사무일 황제는 아들 가브릴 라도미르와 함께 구원에 나섰으나 모크리에보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패배했다.[81][82] 사무일 황제는 아들 가브릴 라도미르의 용맹 덕분에 간신히 전장을 벗어나 프릴레프를 거쳐 프레스파로 탈출할 수 있었다.[83][84]
4. 1. 비잔티움 군대의 진격과 초기 전투
비잔티움 군대는 콘스탄티노플에서 출발해 코모티니, 드라마, 세레스를 거쳐 스트루마강이 있는 루펠 관문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군대는 스트루미차 계곡으로 진입하여 클류치 마을 인근에 도달했는데, 이곳은 스트루마강이 굽이치며 벨라시차산맥과 오그라즈덴산맥과 만나는 지점이었다. 비잔티움 군대는 이 지점에서 불가리아 군대가 지키고 있던 두터운 목조 방벽에 가로막혔다.[69][70] 비잔티움 군대는 즉시 방벽을 공격했으나, 상당한 피해를 입고 격퇴되었다.[71][72]이에 대응하여, 불가리아의 사무일 황제는 가장 유능한 귀족 중 하나인 네스토리차에게 군대를 주어 남쪽의 테살로니키를 공격하게 했다. 이는 클류치에 집중된 바실리오스 황제의 주의를 분산시키려는 목적이었다.[73] 네스토리차의 군대는 테살로니키에 도달했으나, 그곳의 '스트라테고스'(총독 겸 군사령관) 테오필락토스 보타니아티스와 그의 아들 미하일이 이끄는 비잔티움 군대에게 성벽 밖에서 벌어진 격렬한 전투 끝에 패배했다. 테오필락토스는 많은 불가리아군을 포로로 잡고 다량의 군 장비를 노획한 후, 북쪽으로 이동하여 클류치에 있는 바실리오스 황제와 합류했다.[74][75]
바실리오스 황제가 처음 관문의 수비 병력을 제압하려던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으며, 그의 군대는 15,000명에서 20,000명[76]으로 추정되는 불가리아군이 지키는 계곡을 통과할 수 없었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비잔티움 황제는 공격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휘하 사령관인 니케포로스 크시피아스에게 벨라시차산 주변으로 군대를 우회시켜 불가리아군의 후방을 공격하도록 명령하는 한편, 자신은 정면에서 방벽에 대한 공격을 계속했다.[77][78] 크시피아스는 군대를 이끌고 가파른 산길을 따라 이동하여 불가리아군의 후방으로 진입했다.[77] 7월 29일, 크시피아스는 불가리아 방어군을 공격하여 계곡에 가두었다.[78] 갑작스러운 후방 공격에 불가리아군은 방어탑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이 틈을 타 바실리오스 황제는 정면 방어선을 돌파하여 방벽을 파괴할 수 있었다.[79][80]
대패 속에 수천 명의 불가리아 병사들이 전사했고, 살아남은 병사들은 필사적으로 서쪽으로 도주하려 했다. 당시 스트루미차 요새의 작전 기지에 있던 사무일 황제와 그의 아들 가브릴 라도미르는 전황을 돕기 위해 즉시 동쪽으로 향했으나, 모크리에보(오늘날 북마케도니아) 마을 인근에서 벌어진 격렬한 전투에서 빠르게 진격해 온 비잔티움 군대에게 압도당했다.[81] 이 전투에서 많은 불가리아 병사들이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혔다.[82] 사무일 황제는 아들 가브릴 라도미르가 자신의 말에 아버지를 태워 프릴레프까지 안전하게 탈출시킨 덕분에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83] 프릴레프에서 사무일은 프레스파로 돌아갔고, 가브릴 라도미르는 전투를 계속하기 위해 스트루미차로 향했다.[84]
4. 2. 네스토리차의 테살로니키 공격과 실패
클레이디온 전투 초기에 바실리우스 2세가 이끄는 비잔티움 군대가 클류치(클류흐)의 불가리아 방어선 돌파에 어려움을 겪자, 불가리아의 사무일 황제는 비잔티움 군대의 주의를 분산시키기 위한 작전을 계획했다.[22] 그는 가장 유능한 불가리아 귀족 중 한 명인 네스토리차에게 군대를 주어 남쪽의 테살로니키를 공격하도록 보냈다.[22]네스토리차의 군대는 테살로니키에 도달했지만, 도시의 ''스트라테고스''(총독 겸 군사령관)인 테오필락토스 보타네이테스와 그의 아들 미하일이 이끄는 비잔티움 수비군과 마주쳤다. 성벽 밖에서 벌어진 격렬한 전투 끝에 비잔티움 군대는 불가리아 군대를 격파하는 데 성공했다.[23][24] 테오필락토스는 이 전투에서 많은 불가리아 병사들을 포로로 잡고 다량의 군사 장비를 노획했으며, 이후 북쪽으로 진군하여 클류치에 주둔하고 있던 바실리우스 2세의 본대와 합류했다.[23][24] 결과적으로 사무일 황제의 양동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4. 3. 니케포로스 크시피아스의 우회 기동과 불가리아군의 포위
바실리오스 2세 황제가 이끄는 비잔티움 군대는 클류치(현대 불가리아 클류치) 마을 근처에서 불가리아군이 구축한 견고한 목조 방벽에 가로막혔다.[69][70] 비잔티움 군대는 즉시 방벽을 공격했지만, 많은 사상자를 내고 격퇴되었다.[71][72]이에 불가리아 황제 사무일은 비잔티움 군대의 주의를 분산시키기 위해, 가장 유능한 귀족 중 한 명인 네스토리차에게 군대를 주어 남쪽의 테살로니키를 공격하도록 했다.[73] 네스토리차의 군대는 테살로니키에 도착했으나, 도시의 스트라테고스 테오필락토스 보타니아티스와 그의 아들 미하일이 이끄는 비잔티움 수비군에게 성벽 밖에서 벌어진 격렬한 전투 끝에 패배했다. 테오필락토스는 많은 불가리아군 포로와 군 장비를 노획하고 북쪽으로 이동하여 클류치에 있는 바실리오스 2세와 합류했다.[74][75]
한편, 바실리오스 2세는 정면 공격만으로는 15,000명에서 20,000명[76]으로 추정되는 불가리아군이 지키는 계곡을 돌파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는 정면 공격을 계속하여 불가리아군의 시선을 끄는 동시에, 장군 니케포로스 크시피아스에게 벨라시차산을 우회하여 불가리아군의 후방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77][78] 크시피아스는 험준한 산길을 따라 군대를 이끌고 성공적으로 불가리아군의 배후로 이동했다.[77]
7월 29일, 크시피아스는 불가리아 방어군의 후방을 급습했다.[78] 예상치 못한 후방 공격에 불가리아군은 혼란에 빠져 방어탑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바실리오스 2세는 정면의 방어선을 돌파하여 방벽을 무너뜨렸다.[79][80]
완전히 포위된 불가리아군은 큰 혼란 속에서 수천 명이 전사했으며, 살아남은 병사들은 필사적으로 서쪽으로 달아나려 했다. 스트루미차 요새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사무일 황제와 그의 아들 가브릴 라도미르는 병력을 돕기 위해 즉시 동쪽으로 향했으나, 모크리에보(오늘날 북마케도니아) 마을 근처에서 빠르게 진격해 온 비잔티움 군대와 마주쳐 격전을 벌이다 압도당했다.[81] 이 전투에서 많은 불가리아 병사들이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혔다.[82] 사무일 황제는 아들 가브릴 라도미르가 자신의 말을 내어주며 용감하게 싸운 덕분에 간신히 전장을 벗어나 프릴레프로 탈출할 수 있었다.[83] 프릴레프에 도착한 사무일은 프레스파로 돌아갔고, 가브릴 라도미르는 항전을 계속하기 위해 스트루미차로 향했다.[84]
4. 4. 불가리아군의 패배와 사무일의 탈출
비잔티움 군대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출발하여 코모티니, 드라마, 세레스를 거쳐 스트루마강의 루펠 협곡에 도착했다. 군대는 스트루미차 계곡으로 들어가 클류흐 마을 근처에 이르렀는데, 이곳은 강이 굽이치며 벨라시차산과 오그라즈덴산과 만나는 지점이었다. 비잔티움 군대는 불가리아군이 지키는 두꺼운 목조 방벽에 가로막혔다.[18][19] 비잔티움 군대는 즉시 방벽을 공격했으나, 많은 사상자를 내고 격퇴되었다.[20][21]이에 사무일은 가장 유능한 불가리아 귀족 중 하나인 네스토리차 휘하의 군대를 남쪽으로 보내 바실리우스의 주의를 클류흐에서 돌리려 했다.[22] 네스토리차의 군대는 테살로니키에 도달했지만, 도시의 '스트라테고스'(총독)인 테오필락투스 보타네이테스와 그의 아들 미하일이 이끄는 비잔티움 군에게 성벽 밖에서 벌어진 격렬한 전투 끝에 패배했다. 테오필락투스는 많은 불가리아군 포로와 군 장비를 확보하고 북쪽으로 진군하여 클류흐에 있는 바실리우스와 합류했다.[23][24]
협곡의 방어선을 돌파하려던 바실리우스의 첫 시도는 실패했고, 그의 군대는 15,000명에서 20,000명의 불가리아군이 지키는 계곡을 통과할 수 없었다.[25] 이러한 어려움에도 비잔티움 황제는 공격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장군 니케포루스 시피아스에게 벨라시차산 주변으로 군대를 기동시켜 불가리아군의 후방을 공격하도록 명령하는 한편, 자신은 방벽에 대한 공격을 계속했다.[26][27] 시피아스는 험준한 산길을 따라 군대를 이끌고 불가리아군의 후방으로 이동했다.[26] 7월 29일, 시피아스는 불가리아 방어군을 공격하여 계곡에 가두었다.[27] 불가리아군은 이 새로운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방어탑을 포기했고, 바실리우스는 방어선을 돌파하여 성벽을 파괴할 수 있었다.[28][29]
패배 후 혼란 속에서 수천 명의 불가리아 병사들이 전사했고, 살아남은 자들은 필사적으로 서쪽으로 도주하려 했다. 사무일과 그의 아들 가브릴 라도미르는 스트루미차 요새의 사령부에서 군대를 돕기 위해 즉시 동쪽으로 향했으나, 모크리에보 마을(현재의 북마케도니아) 근처에서 벌어진 필사적인 전투에서 빠르게 진격하는 비잔티움 군에게 압도당했다.[30] 모크리에보에서 많은 불가리아 병사들이 전사했으며, 더 많은 병사들이 포로로 잡혔다.[31] 사무일 황제 자신은 아들 가브릴 라도미르의 용맹 덕분에 간신히 탈출할 수 있었는데, 가브릴 라도미르는 자신의 말에 아버지를 태워 프릴레프로 안전하게 이동시켰다.[32] 프릴레프에서 사무일은 프레스파로 돌아갔고, 가브릴 라도미르는 전투를 계속하기 위해 스트루미차로 향했다.[33]
5. 이후 상황
클레이디온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바실리오스 2세는 바르다르강 유역 장악에 중요한 스트루미차로 진격했다. 그러나 스트루미차 근방에서 벌어진 스트루미차 전투에서 부하 장수 테오필락토스 보타네이아테스가 전사하는 등 손실을 입고 공성을 포기하고 퇴각해야 했다.[86][87] 퇴각하는 길에 멜니크를 항복시키는 성과를 거두었지만,[88] 전쟁은 이후로도 4년 이상 더 지속되었다.[94]
요안니스 스킬리지스와 같은 기록에 따르면, 바실리오스 2세는 붙잡은 수많은 불가리아군 포로들의 눈을 멀게 하는 잔혹한 처벌을 명령했다고 한다. 이는 총애하던 장수 보타네이아테스의 죽음에 대한 보복이자 불가리아군의 사기를 꺾기 위한 조치였으며, 당시 비잔티움 제국에서 반란군에게 가해지던 일반적인 형벌이기도 했다.[89][90][91] 이 사건으로 바실리오스 2세는 '불가록토노스'(Βουλγαροκτόνοςel, Българоубиецbg), "불가르족의 학살자"라는 별칭을 얻었다. 불가리아의 사무일 황제는 눈이 먼 병사들의 참혹한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아 1014년 10월 6일 심장 마비로 사망했다고 전해진다.[92][93]
일부 현대 역사가들은 클레이디온 전투의 패배 자체보다 이후 사무일 황제의 죽음이 불가리아에 더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한다.[96] 사무일의 뒤를 이은 가브리일 라도미르와 이반 블라디슬라프는 바실리오스 2세의 지속적인 공세를 효과적으로 막아내지 못했다.[97] 클레이디온 전투는 불가리아군에 회복하기 어려운 손실을 입혔고, 제국 중앙 정부의 통제력 약화를 가져와 많은 지역 총독들이 자발적으로 바실리오스 2세에게 투항하는 결과를 낳았다.[99]
결국 1018년, 마지막 황제 이반 블라디슬라프가 디라키움 전투에서 전사하면서 불가리아 제1제국은 멸망하였다.[98] 이후 불가리아는 1185년 아센 형제가 이끈 아센과 페터르의 난이 성공할 때까지 비잔티움 제국의 속주로 남게 되었다.
클레이디온 전투의 결과는 세르비아인과 크로아티아인에게도 영향을 미쳐, 이들도 1018년 이후 비잔티움 황제의 우위를 인정하게 되었다.[100][101] 비잔티움 제국은 7세기 이래 처음으로 국경을 다뉴브강까지 회복하였고, 다뉴브강에서 펠로폰네소스반도, 아드리아해에서 흑해에 이르는 발칸반도 전역에 대한 지배력을 확립하게 되었다.[102]
5. 1. 스트루미차 전투와 보타니아티스의 죽음

클레이디온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바실리오스 2세는 바르다르강 유역 전체를 장악하는 데 필수적인 스트루미차로 진격하였다. 그곳으로 향하던 중, 비잔티움 군대는 진격로 동쪽에 있던 마츠키온 요새를 점령하였다.[85] 또한 비잔티움 황제는 보타네이아테스가 이끄는 병력을 파견하여 스트루미차를 포위하고 남쪽의 모든 불가리아 잔당을 소탕하며 테살로니카로 향하는 길을 확보하도록 지시했다. 바실리오스 2세는 나머지 병력으로 스트루미차 도시 자체를 포위하였다. 불가리아 측은 보타네이아테스가 요새들을 파괴하도록 내버려두었으나, 그와 그의 병력이 임무를 마치고 돌아가던 중 좁은 계곡에서 불가리아군의 기습 공격을 받았다. 이어진 스트루미차 전투에서 보타네이아테스는 완전히 패배했고, 불가리아의 가브리일 라도미르는 직접 창으로 보타네이아테스를 찔러 죽였다.[86][87] 그 결과, 바실리오스 2세는 스트루미차 공성을 포기하고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돌아가는 길에, ''쿠비쿨라리오스'' 세르기오스의 설득으로 멜니크가 항복하였다.[88] 멜니크는 남쪽에서 소피아로 이어지는 주요 도로를 지키는 전략적 요충지였기에, 이곳의 항복은 불가리아 측에 또 다른 큰 타격이었다.
5. 2. 멜니크의 항복
승리를 거둔 바실리오스 2세는 바르다르강 유역 전체를 장악하는 데 필수적이었던 스트루미차로 진격하였다. 그곳으로 향하던 중에, 비잔티움 측은 진격로 동쪽에 있던 마츠키온 요새를 점령하였다.[85][34] 또한 비잔티움 황제는 스트루미차를 포위하고 남쪽의 모든 불가리아 잔당을 소탕하여 테살로니카로 향하는 진로를 확보하기 위해 보타네이아테스가 이끄는 병력을 파견시켰다. 나머지 병력으로 바실리오스는 스트루미차의 공성전을 실시하였다.
불가리아 측은 보타네이아테스가 요새들을 파괴하도록 내버려두었으나, 임무를 마친 그와 그의 병력은 좁은 계곡에서 불가리아군의 기습 공격을 받았다. 이어진 스트루미차 전투에서 보타네이아테스는 완패하였고, 불가리아군 지휘관 가브리일 라도미르는 직접 창으로 보타네이아테스를 찔러 죽였다.[86][87][35][36] 이 결과로, 바실리오스 2세는 스트루미차 공성을 포기하고 퇴각해야 했다. 복귀하는 길에, 쿠비쿨라리오스 세르기오스의 설득으로 멜니크 수비대가 항복하였다.[88][37] 멜니크는 남쪽에서 소피아로 이어지는 주요 도로를 지키는 요충지였기 때문에, 이곳의 항복은 불가리아 측에 큰 타격이었다.
5. 3. 잔혹한 보복과 사무일의 죽음
요안니스 스킬리지스는 바실리오스 2세가 불가리아군을 완전히 궤멸시키고 포로 15,000명을 붙잡았다고 기록했다. 카타칼론 케카우메노스는 포로 수를 14,000명으로 보았다.[89] 하지만 바실 즐라타르스키와 같은 근대의 역사가들은 이 수치가 과장된 것이라 주장한다. 마나세스 연대기의 14세기 불가리아어 번역본은 포로 수를 8,000명으로 기록했다.바실리오스 2세는 포로들을 100명씩 무리 지어, 각 무리마다 99명은 양쪽 눈을 멀게 하고 나머지 한 명은 한쪽 눈만 남겨 나머지를 고향으로 인도하게 했다.[89] 이는 바실리오스가 총애하던 장군이자 조언가였던 보타네이아테스의 죽음에 대한 보복이자, 불가리아군의 사기를 꺾기 위한 목적이었다.[90] 또한, 비잔티움의 관점에서 불가리아인들은 자신들의 통치에 대항하는 반란군이었으며, 눈을 멀게 하는 형벌은 반란자에게 일반적으로 가해지던 처벌이기도 했다.[91]
이 명령으로 바실리오스 2세는 '불가록토노스'(Βουλγαροκτόνοςel, Българоубиецbg), 즉 "불가르족의 학살자"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 사무일은 눈이 멀게 된 병사들의 참혹한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아, 1014년 10월 6일 심장 마비로 사망했다고 전해진다.[92][93]
5. 4. 불가리아 제국의 멸망
보타니아테스의 죽음과 클레이디온 전투 이후에도 전쟁이 4년 이상 지속되었다는 점은 비잔티움 제국의 성공이 완전하지는 않았음을 보여준다.[43] 일부 현대 역사가들은 불가리아의 패배가 당대 기록가인 스킬리체스와 케카우메노스가 묘사한 것처럼 완전한 것이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44] 다른 역사가들은 전투 두 달 뒤에 일어난 사무일 황제의 죽음이 불가리아에 훨씬 더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강조한다.[45] 사무일의 뒤를 이은 가브리일 라도미르와 이반 블라디슬라프는 바실리오스 2세 황제의 계속되는 공격에 효과적으로 맞서지 못했고, 결국 불가리아는 1018년에 완전히 패배하였다.[46] 그해 불가리아의 마지막 황제 이반 블라디슬라프는 드라치 전투에서 전사하였고,[47] 불가리아는 1185년 아센 형제가 이끈 아센과 페터르의 봉기가 성공할 때까지 비잔티움 제국의 속주(테마)로 남게 되었다.
역사학적으로 클레이디온 전투의 중요성을 다른 측면에서 강조하기도 한다. 이 전투의 결과로 불가리아군은 회복하기 어려운 큰 손실을 입었다. 불가리아 제국 중앙 정부가 제국의 변방과 내륙 지역을 통제하는 능력이 약화되었으며, 각 지역 총독들의 행동이 전쟁의 결과에 더욱 중요해졌다. 실제로 많은 총독들이 자발적으로 바실리오스 2세에게 항복했다.[48]
이 전투는 또한 세르비아인과 크로아티아인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이들은 1018년 이후 비잔티움 황제의 우위를 인정해야만 했다.[49][50] 비잔티움 제국의 국경은 7세기 이후 처음으로 다뉴브강까지 회복되었으며, 이를 통해 비잔티움 제국은 다뉴브강에서 펠로폰네소스반도까지, 그리고 아드리아해에서 흑해에 이르는 발칸반도 전역을 지배하게 되었다.[51]
6. 역사적 의의
보타니아테스의 죽음과 이후 4년간 이어진 전쟁은 비잔틴 제국의 승리가 완전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43] 일부 현대 역사가들은 불가리아의 패배가 스킬리체스와 케카우메노스의 기록만큼 결정적이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44] 다른 역사가들은 전투 두 달 후 사무일 황제의 죽음이 불가리아에 훨씬 더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고 강조한다.[45] 사무일의 뒤를 이은 가브릴 라도미르와 이반 블라디슬라프는 바실리오스 2세의 공세를 효과적으로 막아내지 못했고, 결국 불가리아는 1018년에 완전히 정복당했다.[46] 그해 황제 이반 블라디슬라프가 드라치 전투에서 전사하면서,[47] 불가리아는 1185년 아센 형제가 이끈 성공적인 봉기가 일어나 독립을 되찾을 때까지 비잔틴 제국의 테마(지방 행정 구역)로 편입되었다.
이 전투의 역사적 중요성을 강조하는 다른 견해도 있다. 클레이디온 전투(벨라시차 전투)의 결과로 불가리아군은 회복하기 어려운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이는 불가리아 중앙 정부가 제국의 변방과 내부 지역을 통제하는 능력을 약화시켰고, 지역 및 지방 총독들의 독자적인 행동이 전쟁의 결과에 더 큰 영향을 미치게 만들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자발적으로 바실리오스 2세에게 항복했다.[48]
이 전투는 또한 세르비아인과 크로아티아인에게도 영향을 미쳐, 1018년 이후 이들도 비잔틴 황제의 지배를 인정하게 되었다.[49][50] 비잔틴 제국의 국경은 7세기 이후 처음으로 다뉴브강까지 확장되었으며, 이를 통해 비잔틴 제국은 다뉴브강에서 펠로폰네소스 반도까지, 그리고 아드리아해에서 흑해에 이르는 발칸 반도 전체를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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