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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키예프 루스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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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몽골의 키예프 루스 침공은 1237년부터 1240년까지 바투 칸이 이끄는 몽골군의 루스 지역 침략을 의미한다. 몽골은 동유럽 정복을 계획하고 있었으며, 1223년 칼카 강 전투에서 루스 연합군을 격파한 후 1230년대에 본격적인 침공을 시작했다. 몽골군은 랴잔, 블라디미르 등을 함락시키고 키예프를 파괴하는 등 루스 지역에 큰 피해를 입혔으며, 킵차크 칸국의 지배를 확립했다. 몽골의 지배는 루스 공국들의 정치적 분열을 심화시키고, 모스크바 대공국의 부상을 가져왔으며, 동슬라브 민족의 정체성 형성과 러시아 국가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몽골 침공은 루스 사회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으며, 동서양 관계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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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키예프 루스 침공 - [전쟁]에 관한 문서
개요
1236–1242년 몽골의 유럽 침공
분쟁몽골의 키예프 루스 침공
일부몽골의 유럽 침공
시기1223년, 1237년–1241년
장소키예프 루스
결과몽골의 승리, 키예프 루스 공국들이 몽골 금장 한국의 속국이 됨
교전 세력
교전 1몽골 제국
교전 2키예프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
갈리치아-볼히니아 공국
스몰렌스크
로스토프
투로프와 핀스크
체르니고프
랴잔
페레야슬라블
쿠만족 (1223년)
지휘관 및 지도자
지휘관 1바투 칸
몽케 칸
수부타이
제베
보롤다이
베르케
오르다
카단
시반
구유크 칸
지휘관 2용맹공 므스티슬라프
다닐로 로마노비치
키예프의 므스티슬라프 3세
체르니고프의 므스티슬라프 2세
병력 규모
병력 규모 1 (1236년)몽골 기병 35,000명
병력 규모 1 (1223년)기병 약 20,000명
병력 규모 2 (1236년)총 약 25,000–50,000명 (수비군 및 부족민 포함)
사상자 및 피해
사상자 1알 수 없음
사상자 2총 500,000명 (인구의 6–7%)
관련 전투 및 공성전
주요 전투시트 강 전투
레그니차 전투
모히 전투
주요 공성전랴잔
코젤스크
키예프

2. 역사적 배경

1237년의 키예프 루스


몽골은 1237년 바투의 원정 훨씬 전부터 동유럽 정복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1207년, 칭기즈 칸은 맏아들 조치를 보내 셀렌가 강 북쪽과 이르티쉬 강 계곡의 부족들을 정복하게 했는데, 여기에는 조치 울루스의 동유럽 영토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칭기즈 칸 생전에는 실행되지 않았다. 1222년부터 1224년까지, 수부타이제베는 3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트란스코카서스와 동남유럽에서 원정을 수행했는데, 이는 전통적으로 정찰로 여겨진다. 하지만, 몽골 비밀사와 라시드 알딘에 따르면, 이 원정의 목적은 조치의 병력 지원을 받는 것이었으며, 쿠만족, 알란족, 헝가리, 그리고 루스를 포함한 키예프가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6] 유럽 침공이 이루어진 1235년의 쿠릴타이는 이러한 목표를 반복했다. 수부타이와 그의 3만 군대의 카스피 해 초원으로의 원정은 동유럽 정복의 새로운 단계였으며, 1220년대 후반에 시작되었다.

1235년, 다른 울루스(부족 또는 씨족)의 군대가 참여하는 몽골의 일반적인 원정을 계획하기 위해 쿠릴타이가 소집되었다. 오고타이는 수부타이를 돕기 위해 바투, 부리, 몽케 및 다른 왕자들을 원정에 파견했고, 각 칭기스 왕가는 그와 함께 군대의 하나 이상의 투멘을 이끌었다. 몽골은 1235년과 1236년 초에 공격을 준비했고, 몽골군에 몇몇 분대를 할당해야 했던 바슈키르 부족을 복속시켰다. 몽골은 1236년 가을에 조치의 아들 바투의 지휘 하에 카스피 해 초원에 집결했다. 연합 칭기스 왕가의 첫 번째 공격은 볼가 불가리아에 가해졌다.[6]

몽골인(당시 기록에서는 "타타르"로 불림)은 이미 1223년 4월 1일 칼카 강 전투에서 므스티슬라프 대공과 므스티슬라프 로마노비치 스타리가 이끄는 연합 루스 군대를 격파했다. 1237년, 그들은 랴잔을 포위하여 점령했고, 블라디미르는 1238년 초에 함락되었다.[2] 한 연대기 작가는 "우리의 죄로 인해" "알 수 없는 민족이 도착했다. 그들의 기원은 아무도 알지 못했고, 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어떤 종교를 믿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것은 오직 신과 책에 정통한 현자만이 알 것이다"라고 기록했다.[7]

''몽골 비밀사''는 오고타이가 바투, 부리, 몽케 및 다른 많은 왕자들을 수부타이를 돕기 위해 파견했는데, 수부타이는 칭기즈 칸의 지휘 아래 여러 민족과 도시로부터 강력한 저항에 직면하고 있었다고 보고한다. 원정에 참여한 칭기스 왕가의 목록은 ''비밀 전설'', ''위안스'', 그리고 ''자미 알 타와리흐''와 같은 작품에 나타난다. 바투 외에도, 이 원정에 참여한 다른 칭기스 왕가로는 조치의 아들들인 오르다, 시반, 탕구트, 베르케, 차가타이의 아들인 바이다르, 차가타이의 손자 부리, 오고타이의 아들들인 구유크와 카단, 톨루이의 아들들인 몽케와 아리크 부케, 칭기즈 칸의 아들 쿨칸, 칭기즈 칸 형제의 손자 아르가순 등이 있다. 1235년과 1236년 초에, 소집된 군대는 공격을 준비했고, 그 후 몽골군에 몇 개의 분대를 할당해야 했던 바슈키르 부족을 복속시켰다. 1236년 가을, 몽골은 조치의 아들 바투의 지휘 하에 카스피 해 초원에 집결했다.[8]

연합 칭기스 왕가의 첫 번째 공격은 볼가 불가리아에 가해졌다. 1220년대 중반까지, 볼가 불가리아는 블라디미르-수즈달과 무롬-랴잔 공국과 끊임없이 갈등을 겪었다. 양측은 원정을 감행했고, 끊임없는 교전이 있었으며, 주로 루스 군대가 승리했다. 그러나 몽골이 그들의 국경에 나타나자, 불가르족은 평화를 모색하기 시작했고, 이는 루스 공국들의 이해와 지원을 받았다. 수년에 걸쳐, 루스와 불가르족은 관계를 정상화했고, 이는 볼가 불가리아가 몽골 침략을 격퇴하기 위한 준비에 모든 힘을 쏟을 수 있게 했다. 주요 도시를 덮고 있는 숲에 성벽이 건설되었고, 도시 자체가 요새화되었으며, 수비대가 증가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조치는 헛수고였다. 볼가 불가리아는 번개처럼 빠르게 패배했고 1237년 봄에 완전히 정복되었다.

원정의 다음 단계는 쿠만족과 알란족에 대한 공격이었다. 하 볼가 지역에서 몽골은 광범위한 전선으로 돈 강 어귀로 이동했고, 그곳에서 또 다른 군대가 집결했다. 공격은 1237년 가을까지 계속되었고, 쿠만족과 알란족의 패배로 끝났다. 그 후, 몽골은 부르타스족, 목샤족, 에르자족의 땅을 정복했다. 전략적인 수라 강의 도하 지점 근처에서 장대한 졸로타레프스코에 전투가 벌어졌다. 역사가 바딤 카르갈로프(1932-2009)에 따르면, 1237년의 전투는 루스에 대한 원정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수행되었다. 그해 말까지, 거대한 몽골군과 바투와 동맹을 맺은 부대가 러시아 국경에 있었다. 몽골의 동북 루스에 대한 겨울 원정 준비는 1237년 가을에 시작되었다. 그들의 군대는 보로네시 근처에 집결되었고, 이전에 쿠만족과 알란족과 싸웠던 분대가 그곳으로 이동했다.

키예프 루스를 지배했던 키예프 대공국은 11세기경부터 분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한때 통일을 되찾았던 므스티슬라프 1세1132년에 사망하자, 더욱 분열의 경향이 뚜렷해졌고, 수도 키예프도 파괴되어 국토의 중심이었던 드니프로강 유역은 황폐해졌다. 이러한 시대에, 동방에서 미지의 대군이 도래하여 매우 폭력적인 침략을 시작했다. 당시 루스의 연대기 작가는 이 비극을 "우리 죄 때문에"라고 여겼다.[34] 이어서 이렇게 썼다. "알 수 없는 민족이 나타났다. 그들의 고향도, 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도, 그들의 신이 무엇인지도 아는 자는 없었다. 신만이 아는 일이며, 혹시 현자는 책을 읽고 알지도 모른다."[34]

2. 1. 몽골 제국의 팽창

1220년대 초, 루스 공들은 킵차크 초원의 유목 민족 쿠만인 전사들로부터 몽골의 도래를 알게 되었다. 쿠만인은 루스의 변방 정착지를 약탈하기 위해 격렬하게 대립하던 시대도 있었지만, 당시에는 양자 관계는 평화로웠으며, 쿠만인은 이웃에게 경계해야 할 적의 도래를 알리고 있었다. "이 무서운 이방인은 이미 우리 나라를 빼앗으려 하고 있다. 만약 제군이 우리를 도우러 오지 않으면, 내일에는 제군들의 나라가 빼앗길 것이다." 이에 응하여, 루스 제후 중 므스티슬라프 므스티슬라비치와 므스티슬라프 3세가 연합군을 결성하여 쿠만인과 동쪽으로 향해 침략군을 맞이했다. 이것이 1223년의 칼카 강 전투이다. 수적으로 우세했던 루스 연합군은 몽골군 앞에서 대패했다. 이 전투는 지금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서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이 전투 후 몽골군은 루스 연합군을 추격하는 것을 멈추고 볼가 불가르로 향했고 (1223년 볼가 불가르 침공), Battle of Samara Bend영어 (케르네크 전투)에서 불가르에게 패배하여 마침내 동쪽으로 물러났다. 몽골의 위협은 잊혀지고, 루스의 제후들은 다시 전과 같이 서로 항쟁을 계속했다. 그로부터 13년 후, 다시 몽골군은 루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게다가 이번에는 전보다 더 대군으로, 전보다 더 용서가 없었다.

2. 2. 키예프 루스의 분열

키예프 루스를 지배했던 키예프 대공국은 11세기경부터 분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34] 한때 통일을 되찾았던 므스티슬라프 1세1132년에 사망하자, 더욱 분열의 경향이 뚜렷해졌고, 수도 키예프도 파괴되어 국토의 중심이었던 드니프로강 유역은 황폐해졌다.[34] 이러한 시대에, 동방에서 미지의 대군이 도래하여 매우 폭력적인 침략을 시작했다.[34] 당시 루스의 연대기 작가는 이 비극을 "우리 죄 때문에"라고 여겼다.[34] 이어서 이렇게 썼다. "알 수 없는 민족이 나타났다. 그들의 고향도, 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도, 그들의 신이 무엇인지도 아는 자는 없었다. 신만이 아는 일이며, 혹시 현자는 책을 읽고 알지도 모른다."[34]

2. 3. 몽골의 초기 침입 시도

1220년대 초, 루스 공국들은 킵차크 초원의 유목 민족 쿠만인 전사들로부터 몽골의 도래를 알게 되었다. 쿠만인은 루스의 변방 정착지를 약탈하기 위해 격렬하게 대립하던 시대도 있었지만, 당시에는 양자 관계는 평화로웠으며, 쿠만인은 이웃에게 경계해야 할 적의 도래를 알리고 있었다. "이 무서운 이방인은 이미 우리 나라를 빼앗으려 하고 있다. 만약 제군이 우리를 도우러 오지 않으면, 내일에는 제군들의 나라가 빼앗길 것이다." 이에 응하여, 루스 제후 중 므스티슬라프 므스티슬라비치와 므스티슬라프 3세가 연합군을 결성하여 쿠만인과 동쪽으로 향해 침략군을 맞이했다. 이것이 1223년의 칼카 강 전투이다. 수적으로 우세했던 루스 연합군은 몽골군 앞에서 대패했다. 이 전투는 지금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서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이 전투 후 몽골군은 루스 연합군을 추격하는 것을 멈추고 볼가 불가르로 향했고 (1223년 볼가 불가르 침공), 케르네크 전투/Battle of Samara Bend영어에서 불가르에게 패배하여 마침내 동쪽으로 물러났다. 몽골의 위협은 잊혀지고, 루스의 제후들은 다시 전과 같이 서로 항쟁을 계속했다.

3. 바투의 루스 침공 (1237-1241)

1238년 2월 바투 칸수즈달 약탈, ''이반 뇌제 연대기''의 삽화


1236년 2월, 바투는 오고타이의 명을 받아 서정군의 총사령관이 되어, 수부타이, 몽케, 구유크 등을 부사령관으로 출정했다.[35] 약 120,000명[9]의 기마 궁수로 구성된 몽골군은 볼가강을 건너 볼가 불가르를 침공했다. 이들은 볼가 불가르, 쿠만인-킵차크인과 알란족의 저항을 단 한 달 만에 진압했다.

1237년 11월, 바투는 블라디미르의 블라디미르-수즈달 대공국 대공 유리 2세에게 사절을 보내 항복을 요구했다. 유리 2세는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고자 몽골군에게 선물을 보내 돌려보냈다.[35] 그로부터 한 달 후, 몽골군은 랴잔 공국의 수도 랴잔을 공격, 6일간의 격전 끝에 함락시켰다.[35] 랴잔은 함락되어 완전히 파괴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유리 2세는 아들들을 몽골군 토벌에 보냈으나 완패를 당했다. 콜롬나와 모스크바를 불태운 몽골군은 1238년 2월 4일에 블라디미르를 포위, 3일 만에 함락시켰다.() 대공의 가족들은 불타는 성당 안에서 모두 살해되었고, 간신히 북쪽으로 도망친 대공은 볼가강 북쪽에서 새로 군대를 편성, 몽골군에 다시 맞섰지만, 3월 4일 시티 강 전투에서 완패하여 전사했다.

바투는 군대를 여러 부대로 나누어 루스 각지를 공격했다. 로스토프, 우글리치, 야로슬라블, 코스트로마, 카신, , 고로데츠, 할리치 (갈리치), 페레슬라블-잘레스키, 유리예프 폴스키, 드미트로프, 볼로콜람스크, 트베리, 토르조크 등 루스 북부의 14개 도시가 파괴와 약탈에 시달렸다. 코제리스크라는 작은 도시에서 바실리와 주민들은 7주 동안 격렬하게 저항했다. () 몽골군은 4,000명의 희생을 냈고, 바투는 코제리스크를 '혐오스러운 도시'라고 칭했다. 몽골의 파괴를 면한 곳은 스몰렌스크와, 노브고로드, 프스코프 뿐이었다.

1238년 여름, 바투는 크림 반도를 습격했고, 모르도비아 등을 파괴했다. 1239년 겨울에는 체르니히우 공국의 수도 체르니히우 (체르니고프 포위전)와 페레야슬라프 공국의 수도 페레야슬라프를 함락시켰다. 1240년 9월 5일부터 12월 6일까지 벌어진 키예프 전투에서 키예프를 포위하고, 이를 완전히 파괴하여 키예프 대공국을 명실상부하게 멸망시켰다. 성 소피아 대성당은 손상되지 않고 살아남았다.[2]

3. 1. 침공 경로 및 주요 전투



1236년 2월, 바투는 오고타이의 명을 받아 서정군의 총사령관이 되어, 수부타이, 몽케, 구유크 등을 부사령관으로 출정했다.[35] 약 120,000명[9]의 기마 궁수로 구성된 몽골군은 볼가강을 건너 볼가 불가르를 침공했다. 그들은 볼가 불가르, 쿠만인-킵차크인과 알란족의 저항을 단 한 달 만에 진압했다.

1237년 11월, 바투는 블라디미르의 블라디미르-수즈달 대공국 대공 유리 2세에게 사절을 보내 항복을 요구했다. 유리 2세는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고자 몽골군에게 선물을 보내 돌려보냈다.[35] 그로부터 한 달 후, 몽골군은 랴잔 공국의 수도 랴잔을 공격, 6일간의 격전 끝에 함락시켰다.[35] 랴잔은 함락되어 완전히 파괴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유리 2세는 아들들을 몽골군 토벌에 보냈으나 완패를 당했다. 콜롬나와 모스크바를 불태운 몽골군은, 1238년 2월 4일에 블라디미르를 포위, 3일 만에 함락시켰다.() 대공의 가족들은 불타는 성당 안에서 모두 살해되었고, 간신히 북쪽으로 도망친 대공은 볼가강 북쪽에서 새로 군대를 편성하여 몽골군에 다시 맞섰지만, 3월 4일 시티 강 전투에서 완패하여 전사했다.

바투는 군대를 여러 부대로 나누어 루스 각지를 공격했다. 로스토프, 우글리치, 야로슬라블, 코스트로마 등 루스 북부의 14개 도시가 파괴되었다. 코제리스크라는 작은 도시에서 바실리와 주민들은 7주 동안 격렬하게 저항했다. () 몽골군은 4,000명의 희생을 냈고, 바투는 코제리스크를 혐오스러운 도시라고 말했다. 몽골의 파괴를 면한 곳은 스몰렌스크와, 노브고로드, 프스코프 뿐이었다.

1238년 여름, 바투는 크림 반도를 습격했고, 모르도비아 등을 파괴했다. 1239년 겨울에는 체르니히우 공국의 수도 체르니히우 (체르니고프 포위전)와 페레야슬라프 공국의 수도 페레야슬라프를 함락시켰다. 1240년 9월 5일부터 12월 6일까지 벌어진 키예프 전투에서 키예프를 포위하고, 이를 완전히 파괴하여 키예프 대공국을 멸망시켰다. 성 소피아 대성당은 손상되지 않고 살아남았다.[2]

3. 2. 몽골군의 전략과 전술

3. 3. 루스 공국들의 저항과 패배

4. 킵차크 칸국의 지배 (타타르의 멍에)

=== 킵차크 칸국의 통치 방식 ===

몽골인들은 침략이 끝난 후에도 물러가지 않고, 볼가강 하류에 사라이를 건설하여 킵차크 초원 및 루스에 대한 지배를 계속했다.[36] 조치 울루스는 사라이에 황금 야영지(오르도)를 세우고, 몽골 고원의 오르혼 계곡에 있는 카라코룸에 거점을 둔 카안의 이름으로 지배를 펼쳤다. 1243년 야로슬라프 2세를 사라이로 불러들여 블라디미르 대공위를 인정하고 "루스 제후들의 장로"로 대우했다. 이후 3세기에 걸쳐 사라이의 칸들이 루스 제국의 공들을 신종시키고, 블라디미르 대공이나 각국의 공으로서의 지위를 승인하며 공물을 바치게 하는 관계가 지속되었다. 노브고로드 공화국, 스몰렌스크 공국, 할리치 공국, 프스코프 공국 등 루스 서부의 여러 나라를 포함하여, 루스의 모든 나라가 몽골 제국에 복종했다.[36]

몽골은 정복지의 토착 민족을 직접 지배하지 않고, 토착 민족의 장을 통한 간접 지배를 선호했다.[37] 충분한 공물이 계속 바쳐지는 한, 피지배 민족은 일상생활에 간섭받지 않고, 보통 지배자에게 공격받는 일도 없었으며, 이전과 같이 농경과 상업이 지속되었다. 몽골 제국에 의한 교역 보호로 인해 루스를 통한 동양과 서양 간의 무역이 기능하여 루스는 여기서도 이익을 얻었다.

몽골 제국의 지배층은 텡그리 신앙을 주로 하는 샤머니즘을 믿었지만, 정복 활동이나 지배에 있어서 종교적인 광신과는 무관했다.[38] 이슬람교나 정교회를 근절하려 하지 않았으며, 피정복 민족의 영향으로 이슬람교로 개종하더라도 다른 종교에 대한 관용을 완전히 버리지 않았다.[38] 조치 울루스는 루스인들에게 사라이에 정교회 주교를 두는 것을 허용했다. 조치 울루스의 유력자 노가이는 동로마 제국 황제 미카엘 8세 팔레올로고스의 딸 에우프로시네 팔레올로기나/Ευφροσύνη Παλαιολογίναgl와 결혼했고, 노가이도 딸을 루스의 공에게 시집보냈다.

루스 사람들은 고정된 액수의 공물, 즉 인두세를 지불했다. 처음에는 루스의 각지에 바스카크(대관, 징세관)가 살면서 사람들로부터 대략적인 액수의 공세(다니)를 징수했다.[40] 1259년경부터는 인구 조사에 기초하여 공물 액수가 정해졌고, 사람들의 반감을 산 바스카크 제도는 폐지되었으며, 최종적으로는 지방의 공들에게 공물의 권한이 일임되었다.

=== 루스 사회에 미친 영향 ===

==== 정치적 영향 ====

조반니 다 피안 델 카르피네는 1246년 2월 키예프를 여행하면서 몽골 침략의 참상을 기록했다. 키예프는 파괴되고 인구가 급감하여 거의 폐허가 되었으며, 주민들은 노예 상태로 전락했다.[15] 몽골 침략의 영향은 지역별로 달랐는데, 키예프와 같은 중심지는 회복에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노브고로드 공화국은 번영을 유지했고, 모스크바 대공국은 몽골의 지배 아래에서 성장하기 시작했다.[16]

몽골의 지배는 루스 공국들의 정치적 분열을 심화시켰다. 특히 모스크바 대공국은 몽골의 영향으로 북동부 루스에서 지배적인 세력으로 부상했다.[16] 1327년 트베리 봉기 이후, 모스크바의 이반 1세는 몽골과 협력하여 경쟁자 트베리 대공국을 제압하고 러시아 정교회를 모스크바로 이전시키면서 대공 칭호를 받았다.[18][19] 모스크바 대공은 몽골 지배자와 러시아 공작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하며 이점을 얻었고,[19] 14세기에는 "러시아 영토를 모으기" 시작하며 인구와 부를 늘렸다. 몽골은 다른 영토를 약탈했지만, 주요 협력자인 모스크바는 상대적으로 안전하게 보호하여 귀족과 하인들을 끌어들였다.[19]

쿨리코보 전투(1380년)에서 러시아 군대가 킵차크 칸국을 격파했지만, 몽골 지배는 우그라 강 대치(1480년)까지 계속되었다.[18][19] 역사학자들은 몽골 통치가 키예프 루스의 파괴와 "러시아" 민족의 분열, "오리엔트 전제주의" 도입에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한다.[16] 그러나 키예프 루스가 단일한 실체가 아니었고, 몽골 침략은 이미 진행 중이던 봉건적 분열을 가속화했을 뿐이라는 데 동의한다.[16]

몽골 정권은 모스크바 공국의 국가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몽골 점령 하에서 모스크바 공국은 문지 제도(계층), 우편 도로망 (''ortoo'' 시스템 기반), 인구 조사, 재정 시스템 및 군사 조직을 발전시켰다.[16][24]

==== 경제적 영향 ====

몽골의 침략은 루스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키예프, 노브고로드, 블라디미르와 같은 주요 도시들이 파괴되면서, 인구는 급감했고 경제는 쇠퇴했다. 교황 사절 조반니 다 피안 델 카르피네에 따르면, 침략 이전 약 5만 명의 인구를 가졌던 키예프는 침략 이후 약 200채의 집만 남았다고 한다.

도시의 쇠퇴는 문화, 공예, 무역의 쇠퇴를 동반했다. 몽골 침략 이전 시대는 고대 루스의 문화, 공예, 무역의 전성기였으나, 침략 이후 많은 도시가 쇠퇴하고 석조 건축은 오랫동안 중단되었다. 도시와 주변 마을 간의 경제적 유대 관계는 끊어졌고, 러시아 도시들이 바투 칸의 침략과 그 여파에서 회복하는 데 100년 이상이 걸렸다.[31]

도시 파괴와 경제 쇠퇴는 러시아에 장기적인 영향을 미쳤다. 러시아는 경제 발전에서 뒤처지게 되었다. 유리 장신구, 클로이존네 에나멜, 니엘로, 과립 세공, 다색 유약 도자기와 같은 복잡한 공예품 생산이 중단되었다. 그 결과 러시아 수공예 산업은 수 세기나 퇴보한 반면, 서구의 길드 산업은 원시적 축적 시대로 발전했다.

몽골 제국의 침략으로 인한 학살 규모에 대해서는 역사가들 사이에 의견 차이가 존재한다. 루스 민족의 희생자 수는 막대했으며, 몽골은 정복에 저항하는 도시들에 대해 전 인구의 말살로 대응했다. 『''세계 인구 역사 아틀라스, 1978''』의 저자인 콜린 맥에버디(Colin McEvedy)는 루스 인구가 몽골 침공 전 750만 명에서 700만 명으로 감소했다고 보았으며,[32] 이는 50만 명이 살해당했음을 의미한다. 다른 추정치는 더 커서, 루스 인구의 절반이 살해당했다는 견해도 있다.[31]

==== 사회적 영향 ====

침략은 인구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많은 도시와 요새가 파괴되었고, 극히 일부만 살아남았다. 한때 번성했던 키예프, 노브고로드, 블라디미르는 급격한 쇠퇴를 겪었고, 인구는 침략 이전의 극히 일부로 줄어들었다. 예를 들어, 교황 사절 조반니 다 피안 델 카르피네에 따르면, 약 5만 명의 인구를 가지고 있던 키예프는 침략 이후 약 200채의 집만 남았다.

도시의 쇠퇴는 문화, 공예, 무역의 쇠퇴와도 동반되었다. 몽골 이전 시대는 고대 루스의 문화, 공예, 무역의 전성기로 여겨졌지만, 침략 이후 많은 도시가 쇠퇴하고 석조 건축은 오랫동안 중단되었다. 도시와 주변 마을 간의 경제적 유대 관계는 끊어졌고, 러시아 도시가 바투 칸의 침략과 그 여파에서 회복하는 데 100년 이상이 걸렸다.

도시의 파괴와 문화 및 경제의 쇠퇴는 러시아에 장기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국가는 경제 발전 측면에서 뒤처졌다. 몽골-타타르 침략은 또한 러시아의 정치 발전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는데, 점차 다른 공국을 흡수하고 러시아의 지배 세력이 된 중앙 집권적인 모스크바 국가의 등장을 위한 길을 열었기 때문이다. 전반적으로 바투 칸의 침략은 러시아 역사에 심오하고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바투의 투멘이 진격해 오면서 침략의 결과로 많은 사람들이 도망쳐야 했고, 북동부 루스에서는 블라디미르-수즈달과 랴잔 공국 주민들이 볼가강 너머의 더 북쪽 땅으로 피난을 갔다. 다른 사람들은 인구 밀도가 낮은 지역으로 도망쳐 울창한 숲 속에 숨었다. 그러나 몽골-타타르족이 물러간 후 대부분은 예전 거주지로 돌아갔다.

실제로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이 함락된 지 1년 만에 귀환자의 수가 너무 많아 야로슬라프 야로슬라비치 공은 그들 중에서 리투아니아인을 상대로 한 원정을 위해 대규모 군대를 소집할 수 있었다. 한편 키예프 공국, 페레야슬라프 공국, 체르니고프 공국과 같은 남러시아 공국의 주민들은 침략 직후 북동부 러시아로 도망쳤다.[23]

그러나 인구 이동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블라디미르, 수즈달, 페레슬라블-잘레스키 및 북동부 루스의 다른 도시들은 13세기 후반에 몽골-타타르족의 반복적인 공격 대상이 되었다. 그 결과 많은 주민들이 점차적으로 모스크바트베리 인근으로 이동하거나 야로슬라블, 갈리치, 벨리키 노브고로드, 우스튜그와 같은 북쪽 지역으로 이동했다.

역사가들 사이에서는 몽골 제국의 침략으로 인해 발생한 학살 규모에 대해 의견 차이가 있다. 루스 민족의 희생자 수는 의심할 여지 없이 막대했다. 특히 몽골은 정복에 저항하는 도시들에 대해 전 인구의 말살로 대응했으며, 루스의 도시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세계 인구 역사 아틀라스, 1978''』의 저자인 콜린 맥에버디(Colin McEvedy)는 루스 인구가 몽골 침공 전 750만 명에서 700만 명으로 감소했다고 보았으며,[32] 이에 따르면 50만 명이 살해당했다는 것이다. 다른 희생자 수 추정치는 더 커서, 루스 인구의 절반이 살해당했다는 견해도 있다.[31]

==== 문화적 영향 ====

몽골의 루스 지배 시기, 루스와 몽골의 지배 계급 사이에서는 인적·문화적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1450년경, 모스크바 대공 바실리 2세의 궁정에서는 대공의 타타르인과 그들의 언어에 대한 애호로 인해 타타르어의 유행이 일어났고, 귀족들 중에는 타타르식 성을 쓰는 자도 나타났다.[25][46] 또한, 러시아의 보야르 (대귀족) 중에는 그 조상이 몽골인이나 타타르인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가문도 많고, 그 가문에 몽골어나 타타르어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고두노프 가문, 아르세니예프 가문, 차다예프 가문, 불가코프 가문, 바흐메테프 가문). 17세기 러시아 귀족에 관한 조사에서는 15% 이상이 타타르를 비롯한 동양의 혈통이었다.[26][47] 그 외, 역대 러시아 정교회의 인물 중에도 기독교로 개종한 몽골계·타타르계 인물이 많다.[27][48]

도널드 오스트로프스키는 모스크바 공국이 몽골의 제도와 관행을 채택한 것은 모스크바 지도자들의 실용성을 보여주는 것이며, 이는 결국 그들이 "북동부 루스에서 경쟁자들을 이길" 수 있게 했다고 주장한다.[29] 역사학자들은 몽골의 지배가 루스 사회에 미친 장기적인 영향에 대해 다양하게 논의해 왔다. 몽골이 키예프 루스를 멸망시키고 루스의 민족적 일체성을 붕괴시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등을 분립시킨 것, 동양적 전제주의의 개념을 루스에 가져온 것 등이 특히 비난받아 왔다.[16] 그러나 키예프 루스는 이미 분열을 시작했으며, 몽골의 키예프 루스 타도는 이미 진행되던 분열을 단순히 가속화했을 뿐이라는 시각도 있다. 또한, 몽골에 의한 지배가 모스크바 대공국의 발흥뿐만 아니라 국가 체제의 정비에도 강한 영향을 주었다는 연구도 있다. 모스크바 대공국은 귀족의 봉건적 계층 제도인 문지 제도(Местничествоru), 넓은 국토에 명령과 통신을 전달하는 역참제, 인구 조사 제도, 재정 제도, 군사 조직 등을 몽골 제국의 지배 시스템에서 물려받았다.[16][24][44]

많은 역사학자들이 몽골에 의한 루스 억압이 소위 '서양과 동양의 틈새' 문제의 큰 원인이 되었다고 본다. 몽골의 지배 영향으로 루스에서는 동로마와 서유럽으로부터의 격리가 이어졌고, 서양에서 일어난 큰 정치적·사회적·경제적 개혁이나 과학의 발전을 도입하는 것이 늦어져 러시아는 서유럽보다 200년 늦어진 나라가 되었다는 의식이 생겼다. 서양과의 격절로 인해 러시아는 르네상스종교 개혁의 영향을 받지 못했고, 더 나아가 그 후의 중산 계급의 형성에 실패했다.[45]

법 분야에서는 몽골의 영향으로 키예프 루스 시대에는 노예에게만 적용되던 사형이 널리 행해지게 되었으며, 수사에서도 고문의 사용이 광범위해졌다. 몽골에 의해 모스크바 대공국에 도입된 형벌에는 반역자에 대한 참수, 도둑에 대한 낙인 등이 있다.[28]

러시아어타타르어 등의 튀르크어족몽골어에서 많은 단어, 특히 재정 및 금융과 관련된 단어를 도입했다.[50] 뎬기/Деньгиru (돈), 카즈나/Казнаru (국고), 타모줴늬예/Таможенныеru (세관), 바릐쉬/Барышru (이익), 바쉬마크/Башмакru (신발) 등이 이에 해당한다.[51]

4. 1. 킵차크 칸국의 통치 방식



몽골인들은 침략이 끝난 후에도 물러가지 않고, 볼가강 하류에 사라이를 건설하여 킵차크 초원 및 루스에 대한 지배를 계속했다.[36] 조치 울루스는 사라이에 황금 야영지(오르도)를 세우고, 몽골 고원의 오르혼 계곡에 있는 카라코룸에 거점을 둔 카안의 이름으로 지배를 펼쳤다. 1243년 야로슬라프 2세를 사라이로 불러들여 블라디미르 대공위를 인정하고 "루스 제후들의 장로"로 대우했다. 이후 3세기에 걸쳐 사라이의 칸들이 루스 제국의 공들을 신종시키고, 블라디미르 대공이나 각국의 공으로서의 지위를 승인하며 공물을 바치게 하는 관계가 지속되었다. 노브고로드 공화국, 스몰렌스크 공국, 할리치 공국, 프스코프 공국 등 루스 서부의 여러 나라를 포함하여, 루스의 모든 나라가 몽골 제국에 복종했다.[36]

몽골은 정복지의 토착 민족을 직접 지배하지 않고, 토착 민족의 장을 통한 간접 지배를 선호했다.[37] 충분한 공물이 계속 바쳐지는 한, 피지배 민족은 일상생활에 간섭받지 않고, 보통 지배자에게 공격받는 일도 없었으며, 이전과 같이 농경과 상업이 지속되었다. 몽골 제국에 의한 교역 보호로 인해 루스를 통한 동양과 서양 간의 무역이 기능하여 루스는 여기서도 이익을 얻었다.

몽골 제국의 지배층은 텡그리 신앙을 주로 하는 샤머니즘을 믿었지만, 정복 활동이나 지배에 있어서 종교적인 광신과는 무관했다.[38] 이슬람교나 정교회를 근절하려 하지 않았으며, 피정복 민족의 영향으로 이슬람교로 개종하더라도 다른 종교에 대한 관용을 완전히 버리지 않았다.[38] 조치 울루스는 루스인들에게 사라이에 정교회 주교를 두는 것을 허용했다. 조치 울루스의 유력자 노가이는 동로마 제국 황제 미카엘 8세 팔레올로고스의 딸 에우프로시네 팔레올로기나/Ευφροσύνη Παλαιολογίναgl와 결혼했고, 노가이도 딸을 루스의 공에게 시집보냈다.

루스 사람들은 고정된 액수의 공물, 즉 인두세를 지불했다. 처음에는 루스의 각지에 바스카크(대관, 징세관)가 살면서 사람들로부터 대략적인 액수의 공세(다니)를 징수했다.[40] 1259년경부터는 인구 조사에 기초하여 공물 액수가 정해졌고, 사람들의 반감을 산 바스카크 제도는 폐지되었으며, 최종적으로는 지방의 공들에게 공물의 권한이 일임되었다.

4. 2. 루스 사회에 미친 영향

조반니 다 피안 델 카르피네는 1246년 2월 키예프를 여행하면서 몽골 침략으로 키예프가 파괴되고 인구가 급감하여 거의 폐허가 되었으며, 주민들은 노예 상태로 전락했다고 기록했다.[15] 몽골 침략의 영향은 지역별로 달랐는데, 키예프와 같은 중심지는 회복에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노브고로드 공화국은 번영을 유지했고, 모스크바 대공국은 몽골의 지배 아래에서 성장하기 시작했다.[16]

몽골의 지배는 루스 공국들의 정치적 분열을 심화시켰다. 특히 모스크바 대공국은 몽골의 영향으로 북동부 루스에서 지배적인 세력으로 부상했다.[16] 1327년 트베리 봉기 이후, 모스크바의 이반 1세는 몽골과 협력하여 경쟁자 트베리 대공국을 제압하고 러시아 정교회를 모스크바로 이전시키면서 대공 칭호를 받았다.[18][19] 모스크바 대공은 몽골 지배자와 러시아 공작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하며 이점을 얻었고,[19] 14세기에는 "러시아 영토를 모으기" 시작하며 인구와 부를 늘렸다. 몽골은 다른 영토를 약탈했지만, 주요 협력자인 모스크바는 상대적으로 안전하게 보호하여 귀족과 하인들을 끌어들였다.[19]

쿨리코보 전투(1380년)에서 러시아 군대가 킵차크 칸국을 격파했지만, 몽골 지배는 우그라 강 대치(1480년)까지 계속되었다.[18][19] 역사학자들은 몽골 통치가 키예프 루스의 파괴와 "러시아" 민족의 분열, "오리엔트 전제주의" 도입에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한다.[16] 그러나 키예프 루스가 단일한 실체가 아니었고, 몽골 침략은 이미 진행 중이던 봉건적 분열을 가속화했을 뿐이라는 데 동의한다.[16]

몽골 정권은 모스크바 공국의 국가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몽골 점령 하에서 모스크바 공국은 문지 제도 (계층), 우편 도로망 (''ortoo'' 시스템 기반), 인구 조사, 재정 시스템 및 군사 조직을 발전시켰다.[16][24]

몽골 통치 기간 동안 슬라브족과 몽골 지배 계급 사이에 상당한 문화적, 개인적 교류가 있었다. 바실리 2세 궁정에서는 타타르어가 유행했고, 많은 러시아 귀족들이 타타르 성을 채택했다.[25] 17세기 조사에 따르면 러시아 귀족 가문의 15% 이상이 타타르 또는 동양 기원을 가지고 있었다.[26]

몽골의 영향으로 키예프 루스 시대에 노예에게만 적용되던 사형이 널리 퍼졌고, 고문이 형사 절차의 일부가 되었다. 모스크바에서는 반역자에 대한 참수형, 도둑에 대한 낙인 찍기 등의 처벌이 도입되었다.[28]

도널드 오스트로프스키는 모스크바 공국이 몽골의 제도와 관행을 채택한 것은 실용적인 선택이었으며, 이를 통해 경쟁자들을 이길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29] 많은 역사학자들은 몽골 지배가 루스 사회에 '서양과 동양의 틈새' 문제를 야기하여 르네상스종교 개혁, 중산 계급의 형성 등 서유럽의 발전에서 뒤처지게 만들었다고 본다.[45]

러시아어타타르어튀르크어족몽골어에서 뎬기/Деньгиru (돈), 카즈나/Казнаru (국고) 등 많은 단어를 도입했다.[50][51]

몽골의 침략은 루스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키예프, 노브고로드, 블라디미르와 같은 주요 도시들이 파괴되면서, 인구는 급감했고 경제는 쇠퇴했다. 교황 사절 조반니 다 피안 델 카르피네에 따르면, 침략 이전 약 5만 명의 인구를 가졌던 키예프는 침략 이후 약 200채의 집만 남았다고 한다.

도시의 쇠퇴는 문화, 공예, 무역의 쇠퇴를 동반했다. 몽골 침략 이전 시대는 고대 루스의 문화, 공예, 무역의 전성기였으나, 침략 이후 많은 도시가 쇠퇴하고 석조 건축은 오랫동안 중단되었다. 도시와 주변 마을 간의 경제적 유대 관계는 끊어졌고, 러시아 도시들이 바투 칸의 침략과 그 여파에서 회복하는 데 100년 이상이 걸렸다.[31]

도시 파괴와 경제 쇠퇴는 러시아에 장기적인 영향을 미쳤다. 러시아는 경제 발전에서 뒤처지게 되었다. 유리 장신구, 클로이존네 에나멜, 니엘로, 과립 세공, 다색 유약 도자기와 같은 복잡한 공예품 생산이 중단되었다. 그 결과 러시아 수공예 산업은 수 세기나 퇴보한 반면, 서구의 길드 산업은 원시적 축적 시대로 발전했다.

몽골 제국의 침략으로 인한 학살 규모에 대해서는 역사가들 사이에 의견 차이가 존재한다. 루스 민족의 희생자 수는 막대했으며, 몽골은 정복에 저항하는 도시들에 대해 전 인구의 말살로 대응했다. 『''세계 인구 역사 아틀라스, 1978''』의 저자인 콜린 맥에버디(Colin McEvedy)는 루스 인구가 몽골 침공 전 750만 명에서 700만 명으로 감소했다고 보았으며,[32] 이는 50만 명이 살해당했음을 의미한다. 다른 추정치는 더 커서, 루스 인구의 절반이 살해당했다는 견해도 있다.[31]

침략은 인구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많은 도시와 요새가 파괴되었고, 극히 일부만 살아남았다. 한때 번성했던 키예프, 노브고로드, 블라디미르는 급격한 쇠퇴를 겪었고, 인구는 침략 이전의 극히 일부로 줄어들었다. 예를 들어, 교황 사절 조반니 다 피안 델 카르피네에 따르면, 약 5만 명의 인구를 가지고 있던 키예프는 침략 이후 약 200채의 집만 남았다.

도시의 쇠퇴는 문화, 공예, 무역의 쇠퇴와도 동반되었다. 몽골 이전 시대는 고대 루스의 문화, 공예, 무역의 전성기로 여겨졌지만, 침략 이후 많은 도시가 쇠퇴하고 석조 건축은 오랫동안 중단되었다. 도시와 주변 마을 간의 경제적 유대 관계는 끊어졌고, 러시아 도시가 바투 칸의 침략과 그 여파에서 회복하는 데 100년 이상이 걸렸다.

도시의 파괴와 문화 및 경제의 쇠퇴는 러시아에 장기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국가는 경제 발전 측면에서 뒤처졌다. 몽골-타타르 침략은 또한 러시아의 정치 발전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는데, 점차 다른 공국을 흡수하고 러시아의 지배 세력이 된 중앙 집권적인 모스크바 국가의 등장을 위한 길을 열었기 때문이다. 전반적으로 바투 칸의 침략은 러시아 역사에 심오하고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바투의 투멘이 진격해 오면서 침략의 결과로 많은 사람들이 도망쳐야 했고, 북동부 루스에서는 블라디미르-수즈달과 랴잔 공국 주민들이 볼가강 너머의 더 북쪽 땅으로 피난을 갔다. 다른 사람들은 인구 밀도가 낮은 지역으로 도망쳐 울창한 숲 속에 숨었다. 그러나 몽골-타타르족이 물러간 후 대부분은 예전 거주지로 돌아갔다.

실제로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이 함락된 지 1년 만에 귀환자의 수가 너무 많아 야로슬라프 야로슬라비치 공은 그들 중에서 리투아니아인을 상대로 한 원정을 위해 대규모 군대를 소집할 수 있었다. 한편 키예프 공국, 페레야슬라프 공국, 체르니고프 공국과 같은 남러시아 공국의 주민들은 침략 직후 북동부 러시아로 도망쳤다.[23]

그러나 인구 이동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블라디미르, 수즈달, 페레슬라블-잘레스키 및 북동부 루스의 다른 도시들은 13세기 후반에 몽골-타타르족의 반복적인 공격 대상이 되었다. 그 결과 많은 주민들이 점차적으로 모스크바트베리 인근으로 이동하거나 야로슬라블, 갈리치, 벨리키 노브고로드, 우스튜그와 같은 북쪽 지역으로 이동했다.

역사가들 사이에서는 몽골 제국의 침략으로 인해 발생한 학살 규모에 대해 의견 차이가 있다. 루스 민족의 희생자 수는 의심할 여지 없이 막대했다. 특히 몽골은 정복에 저항하는 도시들에 대해 전 인구의 말살로 대응했으며, 루스의 도시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세계 인구 역사 아틀라스, 1978''』의 저자인 콜린 맥에버디(Colin McEvedy)는 루스 인구가 몽골 침공 전 750만 명에서 700만 명으로 감소했다고 보았으며,[32] 이에 따르면 50만 명이 살해당했다는 것이다. 다른 희생자 수 추정치는 더 커서, 루스 인구의 절반이 살해당했다는 견해도 있다.[31]

몽골의 루스 지배 시기, 루스와 몽골의 지배 계급 사이에서는 인적·문화적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1450년경, 모스크바 대공 바실리 2세의 궁정에서는 대공의 타타르인과 그들의 언어에 대한 애호로 인해 타타르어의 유행이 일어났고, 귀족들 중에는 타타르식 성을 쓰는 자도 나타났다.[25][46] 또한, 러시아의 보야르 (대귀족) 중에는 그 조상이 몽골인이나 타타르인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가문도 많고, 그 가문에 몽골어나 타타르어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고두노프 가문, 아르세니예프 가문, 차다예프 가문, 불가코프 가문, 바흐메테프 가문). 17세기 러시아 귀족에 관한 조사에서는 15% 이상이 타타르를 비롯한 동양의 혈통이었다.[26][47] 그 외, 역대 러시아 정교회의 인물 중에도 기독교로 개종한 몽골계·타타르계 인물이 많다.[27][48]

도널드 오스트로프스키는 모스크바 공국이 몽골의 제도와 관행을 채택한 것은 모스크바 지도자들의 실용성을 보여주는 것이며, 이는 결국 그들이 "북동부 루스에서 경쟁자들을 이길" 수 있게 했다고 주장한다.[29] 역사학자들은 몽골의 지배가 루스 사회에 미친 장기적인 영향에 대해 다양하게 논의해 왔다. 몽골이 키예프 루스를 멸망시키고 루스의 민족적 일체성을 붕괴시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등을 분립시킨 것, 동양적 전제주의의 개념을 루스에 가져온 것 등이 특히 비난받아 왔다.[16] 그러나 키예프 루스는 이미 분열을 시작했으며, 몽골의 키예프 루스 타도는 이미 진행되던 분열을 단순히 가속화했을 뿐이라는 시각도 있다. 또한, 몽골에 의한 지배가 모스크바 대공국의 발흥뿐만 아니라 국가 체제의 정비에도 강한 영향을 주었다는 연구도 있다. 모스크바 대공국은 귀족의 봉건적 계층 제도인 문지 제도(Местничествоru), 넓은 국토에 명령과 통신을 전달하는 역참제, 인구 조사 제도, 재정 제도, 군사 조직 등을 몽골 제국의 지배 시스템에서 물려받았다.[16][24][44]

많은 역사학자들이 몽골에 의한 루스 억압이 소위 '서양과 동양의 틈새' 문제의 큰 원인이 되었다고 본다. 몽골의 지배 영향으로 루스에서는 동로마와 서유럽으로부터의 격리가 이어졌고, 서양에서 일어난 큰 정치적·사회적·경제적 개혁이나 과학의 발전을 도입하는 것이 늦어져 러시아는 서유럽보다 200년 늦어진 나라가 되었다는 의식이 생겼다. 서양과의 격절로 인해 러시아는 르네상스종교 개혁의 영향을 받지 못했고, 더 나아가 그 후의 중산 계급의 형성에 실패했다.[45]

법 분야에서는 몽골의 영향으로 키예프 루스 시대에는 노예에게만 적용되던 사형이 널리 행해지게 되었으며, 수사에서도 고문의 사용이 광범위해졌다. 몽골에 의해 모스크바 대공국에 도입된 형벌에는 반역자에 대한 참수, 도둑에 대한 낙인 등이 있다.[28]

러시아어타타르어 등의 튀르크어족몽골어에서 많은 단어, 특히 재정 및 금융과 관련된 단어를 도입했다.[50] 뎬기/Деньгиru (돈), 카즈나/Казнаru (국고), 타모줴늬예/Таможенныеru (세관), 바릐쉬/Барышru (이익), 바쉬마크/Башмакru (신발) 등이 이에 해당한다.[51]

4. 2. 1. 정치적 영향

조반니 다 피안 델 카르피네는 1246년 2월 키예프를 여행하면서 몽골 침략의 참상을 기록했다. 키예프는 파괴되고 인구가 급감하여 거의 폐허가 되었으며, 주민들은 노예 상태로 전락했다.[15] 몽골 침략의 영향은 지역별로 달랐는데, 키예프와 같은 중심지는 회복에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노브고로드 공화국은 번영을 유지했고, 모스크바 대공국은 몽골의 지배 아래에서 성장하기 시작했다.[16]

몽골의 지배는 루스 공국들의 정치적 분열을 심화시켰다. 특히 모스크바 대공국은 몽골의 영향으로 북동부 루스에서 지배적인 세력으로 부상했다.[16] 1327년 트베리 봉기 이후, 모스크바의 이반 1세는 몽골과 협력하여 경쟁자 트베리 대공국을 제압하고 러시아 정교회를 모스크바로 이전시키면서 대공 칭호를 받았다.[18][19] 모스크바 대공은 몽골 지배자와 러시아 공작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하며 이점을 얻었고,[19] 14세기에는 "러시아 영토를 모으기" 시작하며 인구와 부를 늘렸다. 몽골은 다른 영토를 약탈했지만, 주요 협력자인 모스크바는 상대적으로 안전하게 보호하여 귀족과 하인들을 끌어들였다.[19]

쿨리코보 전투(1380년)에서 러시아 군대가 킵차크 칸국을 격파했지만, 몽골 지배는 우그라 강 대치(1480년)까지 계속되었다.[18][19] 역사학자들은 몽골 통치가 키예프 루스의 파괴와 "러시아" 민족의 분열, "오리엔트 전제주의" 도입에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한다.[16] 그러나 키예프 루스가 단일한 실체가 아니었고, 몽골 침략은 이미 진행 중이던 봉건적 분열을 가속화했을 뿐이라는 데 동의한다.[16]

몽골 정권은 모스크바 공국의 국가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몽골 점령 하에서 모스크바 공국은 문지 제도(계층), 우편 도로망 (''ortoo'' 시스템 기반), 인구 조사, 재정 시스템 및 군사 조직을 발전시켰다.[16][24]

몽골 통치 기간 동안 슬라브족과 몽골 지배 계급 사이에 상당한 문화적, 개인적 교류가 있었다. 바실리 2세 궁정에서는 타타르어가 유행했고, 많은 러시아 귀족들이 타타르 성을 채택했다.[25] 17세기 조사에 따르면 러시아 귀족 가문의 15% 이상이 타타르 또는 동양 기원을 가지고 있었다.[26]

몽골의 영향으로 키예프 루스 시대에 노예에게만 적용되던 사형이 널리 퍼졌고, 고문이 형사 절차의 일부가 되었다. 모스크바에서는 반역자에 대한 참수형, 도둑에 대한 낙인 찍기 등의 처벌이 도입되었다.[28]

도널드 오스트로프스키는 모스크바 공국이 몽골의 제도와 관행을 채택한 것은 실용적인 선택이었으며, 이를 통해 경쟁자들을 이길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29] 많은 역사학자들은 몽골 지배가 루스 사회에 '서양과 동양의 틈새' 문제를 야기하여 르네상스종교 개혁, 중산 계급의 형성 등 서유럽의 발전에서 뒤처지게 만들었다고 본다.[45]

러시아어타타르어튀르크어족몽골어에서 ''Деньгиru''(돈), ''Казнаru''(국고) 등 많은 단어를 도입했다.[50][51]

4. 2. 2. 경제적 영향

몽골의 침략은 루스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키예프, 노브고로드, 블라디미르와 같은 주요 도시들이 파괴되면서, 인구는 급감했고 경제는 쇠퇴했다. 교황 사절 조반니 다 피안 델 카르피네에 따르면, 침략 이전 약 5만 명의 인구를 가졌던 키예프는 침략 이후 약 200채의 집만 남았다고 한다.

도시의 쇠퇴는 문화, 공예, 무역의 쇠퇴를 동반했다. 몽골 침략 이전 시대는 고대 루스의 문화, 공예, 무역의 전성기였으나, 침략 이후 많은 도시가 쇠퇴하고 석조 건축은 오랫동안 중단되었다. 도시와 주변 마을 간의 경제적 유대 관계는 끊어졌고, 러시아 도시들이 바투 칸의 침략과 그 여파에서 회복하는 데 100년 이상이 걸렸다.[31]

도시 파괴와 경제 쇠퇴는 러시아에 장기적인 영향을 미쳤다. 러시아는 경제 발전에서 뒤처지게 되었다. 유리 장신구, 클로이존네 에나멜, 니엘로, 과립 세공, 다색 유약 도자기와 같은 복잡한 공예품 생산이 중단되었다. 그 결과 러시아 수공예 산업은 수 세기나 퇴보한 반면, 서구의 길드 산업은 원시적 축적 시대로 발전했다.

몽골 제국의 침략으로 인한 학살 규모에 대해서는 역사가들 사이에 의견 차이가 존재한다. 루스 민족의 희생자 수는 막대했으며, 몽골은 정복에 저항하는 도시들에 대해 전 인구의 말살로 대응했다. 『''세계 인구 역사 아틀라스, 1978''』의 저자인 콜린 맥에버디(Colin McEvedy)는 루스 인구가 몽골 침공 전 750만 명에서 700만 명으로 감소했다고 보았으며[32], 이는 50만 명이 살해당했음을 의미한다. 다른 추정치는 더 커서, 루스 인구의 절반이 살해당했다는 견해도 있다.[31]

4. 2. 3. 사회적 영향

침략은 인구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많은 도시와 요새가 파괴되었고, 극히 일부만 살아남았다. 한때 번성했던 키예프, 노브고로드, 블라디미르는 급격한 쇠퇴를 겪었고, 인구는 침략 이전의 극히 일부로 줄어들었다. 예를 들어, 교황 사절 조반니 다 피안 델 카르피네에 따르면, 약 5만 명의 인구를 가지고 있던 키예프는 침략 이후 약 200채의 집만 남았다.

도시의 쇠퇴는 문화, 공예, 무역의 쇠퇴와도 동반되었다. 몽골 이전 시대는 고대 루스의 문화, 공예, 무역의 전성기로 여겨졌지만, 침략 이후 많은 도시가 쇠퇴하고 석조 건축은 오랫동안 중단되었다. 도시와 주변 마을 간의 경제적 유대 관계는 끊어졌고, 러시아 도시가 바투 칸의 침략과 그 여파에서 회복하는 데 100년 이상이 걸렸다.

도시의 파괴와 문화 및 경제의 쇠퇴는 러시아에 장기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국가는 경제 발전 측면에서 뒤처졌다. 몽골-타타르 침략은 또한 러시아의 정치 발전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는데, 점차 다른 공국을 흡수하고 러시아의 지배 세력이 된 중앙 집권적인 모스크바 국가의 등장을 위한 길을 열었기 때문이다. 전반적으로 바투 칸의 침략은 러시아 역사에 심오하고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바투의 투멘이 진격해 오면서 침략의 결과로 많은 사람들이 도망쳐야 했고, 북동부 루스에서는 블라디미르-수즈달과 랴잔 공국 주민들이 볼가강 너머의 더 북쪽 땅으로 피난을 갔다. 다른 사람들은 인구 밀도가 낮은 지역으로 도망쳐 울창한 숲 속에 숨었다. 그러나 몽골-타타르족이 물러간 후 대부분은 예전 거주지로 돌아갔다.

실제로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이 함락된 지 1년 만에 귀환자의 수가 너무 많아 야로슬라프 야로슬라비치 공은 그들 중에서 리투아니아인을 상대로 한 원정을 위해 대규모 군대를 소집할 수 있었다. 한편 키예프 공국, 페레야슬라프 공국, 체르니고프 공국과 같은 남러시아 공국의 주민들은 침략 직후 북동부 러시아로 도망쳤다.[23]

그러나 인구 이동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블라디미르, 수즈달, 페레슬라블-잘레스키 및 북동부 루스의 다른 도시들은 13세기 후반에 몽골-타타르족의 반복적인 공격 대상이 되었다. 그 결과 많은 주민들이 점차적으로 모스크바트베리 인근으로 이동하거나 야로슬라블, 갈리치, 벨리키 노브고로드, 우스튜그와 같은 북쪽 지역으로 이동했다.

역사가들 사이에서는 몽골 제국의 침략으로 인해 발생한 학살 규모에 대해 의견 차이가 있다. 루스 민족의 희생자 수는 의심할 여지 없이 막대했다. 특히 몽골은 정복에 저항하는 도시들에 대해 전 인구의 말살로 대응했으며, 루스의 도시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세계 인구 역사 아틀라스, 1978''』의 저자인 콜린 맥에버디(Colin McEvedy)는 루스 인구가 몽골 침공 전 750만 명에서 700만 명으로 감소했다고 보았으며[32], 이에 따르면 50만 명이 살해당했다는 것이다. 다른 희생자 수 추정치는 더 커서, 루스 인구의 절반이 살해당했다는 견해도 있다[31]

4. 2. 4. 문화적 영향

몽골의 루스 지배 시기, 루스와 몽골의 지배 계급 사이에서는 인적·문화적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1450년경, 모스크바 대공 바실리 2세의 궁정에서는 대공의 타타르인과 그들의 언어에 대한 애호로 인해 타타르어의 유행이 일어났고, 귀족들 중에는 타타르식 성을 쓰는 자도 나타났다.[25][46] 또한, 러시아의 보야르 (대귀족) 중에는 그 조상이 몽골인이나 타타르인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가문도 많고, 그 가문에 몽골어나 타타르어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고두노프 가문, 아르세니예프 가문, 차다예프 가문, 불가코프 가문, 바흐메테프 가문). 17세기 러시아 귀족에 관한 조사에서는 15% 이상이 타타르를 비롯한 동양의 혈통이었다.[26][47] 그 외, 역대 러시아 정교회의 인물 중에도 기독교로 개종한 몽골계·타타르계 인물이 많다.[27][48]

도널드 오스트로프스키는 모스크바 공국이 몽골의 제도와 관행을 채택한 것은 모스크바 지도자들의 실용성을 보여주는 것이며, 이는 결국 그들이 "북동부 루스에서 경쟁자들을 이길" 수 있게 했다고 주장한다.[29] 역사학자들은 몽골의 지배가 루스 사회에 미친 장기적인 영향에 대해 다양하게 논의해 왔다. 몽골이 키예프 루스를 멸망시키고 루스의 민족적 일체성을 붕괴시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등을 분립시킨 것, 동양적 전제주의의 개념을 루스에 가져온 것 등이 특히 비난받아 왔다.[16] 그러나 키예프 루스는 이미 분열을 시작했으며, 몽골의 키예프 루스 타도는 이미 진행되던 분열을 단순히 가속화했을 뿐이라는 시각도 있다. 또한, 몽골에 의한 지배가 모스크바 대공국의 발흥뿐만 아니라 국가 체제의 정비에도 강한 영향을 주었다는 연구도 있다. 모스크바 대공국은 귀족의 봉건적 계층 제도인 문지 제도(Местничествоru), 넓은 국토에 명령과 통신을 전달하는 역참제, 인구 조사 제도, 재정 제도, 군사 조직 등을 몽골 제국의 지배 시스템에서 물려받았다.[16][24][44]

많은 역사학자들이 몽골에 의한 루스 억압이 소위 '서양과 동양의 틈새' 문제의 큰 원인이 되었다고 본다. 몽골의 지배 영향으로 루스에서는 동로마와 서유럽으로부터의 격리가 이어졌고, 서양에서 일어난 큰 정치적·사회적·경제적 개혁이나 과학의 발전을 도입하는 것이 늦어져 러시아는 서유럽보다 200년 늦어진 나라가 되었다는 의식이 생겼다. 서양과의 격절로 인해 러시아는 르네상스종교 개혁의 영향을 받지 못했고, 더 나아가 그 후의 중산 계급의 형성에 실패했다.[45]

법 분야에서는 몽골의 영향으로 키예프 루스 시대에는 노예에게만 적용되던 사형이 널리 행해지게 되었으며, 수사에서도 고문의 사용이 광범위해졌다. 몽골에 의해 모스크바 대공국에 도입된 형벌에는 반역자에 대한 참수, 도둑에 대한 낙인 등이 있다.[28]

러시아어타타르어 등의 튀르크어족몽골어에서 많은 단어, 특히 재정 및 금융과 관련된 단어를 도입했다.[50] 뎬기/Деньгиru (돈), 카즈나/Казнаru (국고), 타모줴늬예/Таможенныеru (세관), 바릐쉬/Барышru (이익), 바쉬마크/Башмакru (신발) 등이 이에 해당한다.[51]

5. 루스 공국들의 독립 투쟁과 모스크바 대공국의 부상

키예프 루스를 명목상 지배하는 키예프 대공국과 루스에 할거하는 여러 공국에 대한 몽골 침략의 영향은 균등하지 않았다.[43] 키예프나 블라디미르와 같은 기존의 중심 도시는 몽골에 의한 파괴에서 재기할 수 없었다.[43] 북쪽으로 멀리 떨어진 노브고로드는 침략을 면했지만, 몽골 침략으로 인한 대국 붕괴 후의 공백에서 생긴 트베리, 모스크바와 같은 새로운 세력이 노브고로드를 압박했다.[43]

루스의 다수 국가 중에서도, 모스크바가 북부 루시 및 동부 루시에서 권력을 강화할 수 있었던 데에는, 남부 루시의 큰 국가들이 몽골에 의해 멸망하고 재기하지 못한 것이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43] 1327년, 조치 울루스의 우즈베크 칸이 의도한 바스카크(대관) 제도 부활에 대해, 트베리에서 민중의 폭동이 일어나, 트베리 대공 알렉산드르가 조치 울루스에 대한 반란에 가담하자, 트베리의 최대 라이벌이었던 모스크바 공 이반 1세는 몽골 측에 서서, 우즈베크 칸과 함께 트베리를 격파하고, 이를 철저히 파괴했다.[43] 이렇게 모스크바 공국은 라이벌을 물리치고, 이반 1세는 1328년, 블라디미르에서 모스크바로 "키예프 및 전 루스의 대주교"를 천도시키는 데 성공한다.[43] 우즈베크 칸으로부터도 트베리 토벌의 공적으로 대공위를 인정받아, 모스크바 공국은 모스크바 대공국이 되었다.[43] 모스크바 대공은, 루스 제후국을 대표하여 그 뜻을 조치 울루스에 전달하고, 루스 제후국에 대해서는 조치 울루스의 의향을 전달하는 입장이 되어, 모스크바의 권력은 더욱 높아졌다.[43] 몽골의 유목민은 종종 루스의 각 지방을 습격하여 약탈을 자행했지만, 모스크바 대공이 지배하는 땅에 대해서는 일정한 경의를 표했다.[43] 이렇게, 귀족과 그 부하들은 비교적 평화로운 모스크바 대공국으로 이주하려 했고, 루스 제후국도 모스크바의 보호 하에 들어가려 했다.[43]

1380년쿨리코보 전투에서, 드미트리 돈스코이가 이끄는 모스크바 대공국군은, 마마이가 이끄는 조치 울루스계 정권(마마이 오르다) 및 리투아니아 대공국 등의 연합군을 격파하여, 타타르의 멍에로부터의 탈피의 첫걸음을 내디뎠다.[43] 이 전투에서 모스크바의 권위는 높아졌지만, 조치 울루스를 재통일한 토흐타미쉬의 공격으로 드미트리 돈스코이는 다시 조치 울루스에 신종하게 되었다.[43] 모스크바 대공국이 조치 울루스에 대한 공납을 중단하는 것은, 1480년의 우그라 강변 대치에서 이반 3세가 아흐마드 칸의 군세를 우그라 강에서 철수시킨 이후의 일이다.[43]

조치 울루스는 분열되었지만, 그 후예가 된 국가에는 카잔 칸국, 아스트라한 칸국, 크림 칸국, 시비르 칸국, 노가이 오르다 등이 있다. 그러나 모두, 모스크바 대공국에서 발전한 러시아 차르국, 또는 그 후의 러시아 제국에 의해 멸망했다.[43]

몽골이 키예프 루스를 멸망시키지 않았다면, 모스크바 대공국은, 더 나아가 러시아 제국은 융성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논의가 종종 제기되고 있다. 또한, 몽골의 침입은 대규모 살육을 초기에 가져왔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그 후의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각 민족의 융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43]

5. 1. 쿨리코보 전투 (1380)

키예프 루스에 대한 몽골 침략의 영향은 지역별로 차이가 있었다. 키예프, 블라디미르와 같은 기존 중심 도시는 파괴에서 회복하지 못했지만, 북쪽의 노브고로드는 침략을 피했다. 몽골 침략으로 인한 권력 공백기에 트베리, 모스크바와 같은 새로운 세력이 성장했다.[43]

1327년 트베리에서 몽골의 바스카크(대관) 제도 부활에 반대하는 민중 봉기가 일어났고, 트베리 대공 알렉산드르가 반란에 가담했다. 이때 모스크바 공 이반 1세는 몽골 편에 서서 우즈베크 칸과 함께 트베리를 진압하고 파괴했다. 이반 1세는 1328년 "키예프 및 전 루스의 대주교"를 모스크바로 옮기고, 우즈베크 칸에게 대공 지위를 인정받아 모스크바 대공국을 세웠다. 모스크바 대공은 루스 제후국과 조치 울루스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하며 권력을 강화했다. 몽골 유목민들은 루스 지방을 약탈했지만, 모스크바 대공의 영토는 존중했다. 이로 인해 귀족과 백성들이 모스크바 대공국으로 이주했고, 루스 제후국들도 모스크바의 보호를 받으려 했다.[43]

1380년 쿨리코보 전투에서 드미트리 돈스코이가 이끄는 모스크바 대공국군은 마마이의 조치 울루스계 정권(마마이 오르다)과 리투아니아 대공국 연합군을 격파하여 타타르의 멍에에서 벗어나는 첫걸음을 내디뎠다. 이 승리로 모스크바의 권위는 높아졌지만, 토흐타미쉬의 공격으로 드미트리 돈스코이는 다시 조치 울루스에 복종하게 되었다. 모스크바 대공국이 조치 울루스에 대한 공납을 중단한 것은 1480년 우그라 강변 대치에서 이반 3세가 아흐마드 칸의 군대를 물리친 이후였다.[43]

조치 울루스는 분열되었고, 카잔 칸국, 아스트라한 칸국, 크림 칸국, 시비르 칸국, 노가이 오르다 등으로 계승되었다. 이들은 모두 러시아 차르국러시아 제국에 의해 멸망했다. 몽골의 키예프 루스 침공은 초기에는 대규모 살육을 초래했지만, 장기적으로는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민족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는다.[43]

5. 2. 우그라 강 대치 (1480)

키예프 루스에 대한 몽골 침략의 영향은 지역별로 달랐다.[43] 키예프나 블라디미르 같은 기존 중심 도시는 파괴에서 회복하지 못했다. 북쪽의 노브고로드는 침략을 피했지만, 트베리, 모스크바 같은 새로운 세력이 성장했다.[43]

모스크바가 북부 및 동부 루시에서 권력을 강화한 것은 남부 루시의 주요 국가들이 몽골에 의해 멸망하고 재기하지 못한 것이 큰 요인이었다.[43] 1327년 트베리에서 민중 봉기가 일어나자, 모스크바 공 이반 1세는 몽골 편에 서서 트베리를 격파하고 1328년 "키예프 및 전 루스의 대주교"를 모스크바로 천도했다.[43] 모스크바 공국은 모스크바 대공국이 되었고, 모스크바 대공은 루스 제후국을 대표하여 조치 울루스와 소통하는 역할을 맡아 권력이 강화되었다.[43]

1380년 쿨리코보 전투에서 드미트리 돈스코이가 이끄는 모스크바 대공국군은 마마이 군대를 격파했지만, 토흐타미쉬의 공격으로 다시 조치 울루스에 신종하게 되었다.[43] 모스크바 대공국이 조치 울루스에 대한 공납을 중단한 것은 1480년 우그라 강변 대치에서 이반 3세가 아흐마드 칸의 군세를 우그라 강에서 철수시킨 이후이다.[43]

조치 울루스는 분열되었지만, 그 후예 국가들은 러시아 차르국이나 러시아 제국에 의해 멸망했다. 몽골의 키예프 루스 멸망은 러시아 제국 융성에 영향을 주었으며,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민족 융성에도 영향을 주었다.[43]

5. 3. 모스크바 대공국의 중앙집권화

키예프 루스를 명목상 지배하는 키예프 대공국과 루스에 할거하는 여러 공국에 대한 몽골 침략의 영향은 평등하지 않았다.[43] 키예프나 블라디미르와 같은 기존의 중심 도시는 몽골에 의한 파괴에서 재기할 수 없었다.[43] 북쪽으로 멀리 떨어진 노브고로드는 침략을 면했지만, 몽골 침략으로 인한 대국 붕괴 후의 공백에서 생긴 트베리, 모스크바와 같은 새로운 세력이 노브고로드를 압박했다.[43]

루스의 다수 국가 중에서도, 모스크바가 북부 루시 및 동부 루시에서 권력을 강화할 수 있었던 데에는, 남부 루시의 큰 국가들이 몽골에 의해 멸망하고 재기하지 못한 것이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43] 1327년 트베리에서 민중 봉기가 일어나 트베리 대공 알렉산드르가 조치 울루스에 대한 반란에 가담하자, 모스크바 공 이반 1세는 몽골 측에 서서 우즈베크 칸과 함께 트베리를 격파하고 철저히 파괴했다.[43] 이반 1세는 1328년 블라디미르에서 모스크바로 "키예프 및 전 루스의 대주교"를 천도시키는 데 성공한다.[43] 모스크바 공국은 모스크바 대공국이 되었고, 모스크바 대공은 루스 제후국을 대표하여 조치 울루스에 뜻을 전달하고, 루스 제후국에는 조치 울루스의 의향을 전달하는 입장이 되어 권력이 더욱 높아졌다.[43] 몽골 유목민은 종종 루스의 각 지방을 습격하여 약탈을 자행했지만, 모스크바 대공이 지배하는 땅에 대해서는 일정한 경의를 표했다.[43]

1380년 쿨리코보 전투에서 드미트리 돈스코이가 이끄는 모스크바 대공국군은 마마이가 이끄는 조치 울루스계 정권(마마이 오르다) 및 리투아니아 대공국 등의 연합군을 격파하여 타타르의 멍에로부터 탈피의 첫걸음을 내디뎠다.[43] 하지만, 토흐타미쉬의 공격으로 드미트리 돈스코이는 다시 조치 울루스에 신종하게 되었다.[43] 모스크바 대공국이 조치 울루스에 대한 공납을 중단하는 것은 1480년 우그라 강변 대치에서 이반 3세가 아흐마드 칸의 군세를 우그라 강에서 철수시킨 이후의 일이다.[43]

조치 울루스는 분열되었지만, 그 후예가 된 국가에는 카잔 칸국, 아스트라한 칸국, 크림 칸국, 시비르 칸국, 노가이 오르다 등이 있다. 그러나 모두, 모스크바 대공국에서 발전한 러시아 차르국, 또는 그 후의 러시아 제국에 의해 멸망했다.[43]

몽골이 키예프 루스를 멸망시키지 않았다면 모스크바 대공국과 러시아 제국은 융성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논의가 종종 제기되고 있다. 몽골의 침입은 대규모 살육을 초기에 가져왔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그 후의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각 민족의 융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43]

6. 몽골 침공의 역사적 의의와 영향

6. 1. 동슬라브 민족 정체성 형성에 미친 영향

몽골의 키예프 루스 침공은 동슬라브 민족의 정체성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역사학자들은 몽골 지배가 루스 사회에 미친 장기적인 영향에 대해 다양한 논의를 진행해 왔다.[44]

일부 학자들은 몽골 지배의 악영향을 강조하며, 몽골이 키예프 루스를 멸망시키고 루스의 민족적 일체성을 붕괴시켜 러시아, 우크라이나 등을 분립시켰다고 주장한다. 또한 몽골이 동양적 전제주의 개념을 루스에 도입한 것을 비판한다.[44] 그러나 키예프 루스는 이미 정치적, 문화적, 민족적으로 분열을 시작했으며, 몽골의 침공은 이러한 분열을 가속화했을 뿐이라는 반론도 존재한다.[44]

몽골 지배는 모스크바 대공국의 발흥과 국가 체제 정비에 강한 영향을 주었다는 연구도 있다. 모스크바 대공국은 귀족의 봉건적 계층 제도인 문지 제도(Местничествоru), 역참제, 인구 조사 제도, 재정 제도, 군사 조직 등을 몽골 제국의 지배 시스템에서 물려받았다.[44]

많은 역사학자들은 몽골의 루스 억압이 '서양과 동양의 틈새' 문제의 큰 원인이 되었다고 본다. 몽골의 지배 영향으로 루스는 동로마와 서유럽으로부터 격리되었고, 서양의 정치, 사회, 경제적 개혁과 과학 발전을 늦게 도입하여 러시아가 서유럽보다 200년 늦어진 나라가 되었다는 의식이 생겼다. 이러한 격절은 러시아가 르네상스종교 개혁의 영향을 받지 못하고, 중산 계급 형성에 실패하는 결과를 초래했다.[45]

몽골의 루스 지배 시기, 루스와 몽골 지배 계급 사이에서는 인적, 문화적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1450년경 모스크바 대공 바실리 2세 궁정에서는 타타르어 유행이 일어났고, 귀족들 중에는 타타르식 성을 쓰는 자도 나타났다.[46] 러시아의 보야르(대귀족) 중에는 몽골인이나 타타르인을 조상으로 하는 가문도 많았으며, 17세기 러시아 귀족의 15% 이상이 동양 혈통이었다.[47] 러시아 정교회 인물 중에도 몽골계·타타르계 인물이 많았다.[48]

법 분야에서는 몽골의 영향으로 사형고문이 널리 행해지게 되었다. 몽골은 모스크바 대공국에 반역자에 대한 참수, 도둑에 대한 낙인 등의 형벌을 도입했다. 하지만 동시대 서유럽의 형벌은 몽골이나 러시아보다 가혹했다.[49]

러시아어타타르어튀르크어족몽골어에서 많은 단어, 특히 재정 및 금융 관련 단어를 도입했다.[50] ''Деньги''ru(돈), ''Казна''ru(국고), ''Таможенные''ru(세관) 등이 그 예이다.[51]

6. 2. 러시아 국가 형성에 미친 영향

몽골의 지배는 루스 사회에 장기적으로 다양한 영향을 미쳤다는 논의가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이루어져 왔다. 몽골이 키예프 루스를 멸망시키고 루스의 민족적 일체성을 붕괴시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등을 분립시켰으며, 동양적 전제주의 개념을 도입했다는 비판이 오랫동안 제기되어 왔다.[44] 그러나 키예프 루스는 이미 정치적, 문화적, 민족적으로 분열이 시작되었고, 몽골의 침공은 이러한 분열을 가속화했을 뿐이라는 시각도 존재한다.[44]

몽골 지배는 모스크바 대공국의 발흥과 국가 체제 정비에 큰 영향을 주었다.[44] 모스크바 대공국은 귀족의 봉건적 계층 제도인 문지 제도(메스트니체스트보/Местничествоru), 넓은 국토에 명령과 통신을 전달하는 역참제, 인구 조사 제도, 재정 제도, 군사 조직 등을 몽골 제국의 지배 시스템에서 물려받았다.[44]

많은 역사학자들은 몽골에 의한 루스 억압이 '서양과 동양의 틈새' 문제의 큰 원인이 되었다고 본다. 몽골의 지배 영향으로 루스는 동로마와 서유럽으로부터 격리되었고, 서양에서 일어난 정치적·사회적·경제적 개혁이나 과학 발전을 도입하는 것이 늦어져 러시아는 서유럽보다 200년 늦어진 나라가 되었다는 의식이 생겼다.[45] 서양과의 격절로 인해 러시아는 르네상스종교 개혁의 영향을 받지 못했고, 중산 계급의 형성에도 실패했다.[45]

몽골의 루스 지배 시기, 루스와 몽골의 지배 계급 사이에서는 인적·문화적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1450년경, 모스크바 대공 바실리 2세의 궁정에서는 타타르어 유행이 일어났고, 귀족들 중에는 타타르식 성을 쓰는 자도 나타났다.[46] 러시아의 보야르(대귀족) 중에는 그 조상이 몽골인이나 타타르인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가문도 많으며, 17세기 러시아 귀족에 관한 조사에서는 15% 이상이 타타르를 비롯한 동양의 혈통이었다.[47] 러시아 정교회의 인물 중에도 기독교로 개종한 몽골계·타타르계 인물이 많다.[48]

법 분야에서는 몽골의 영향으로 키예프 루스 시대에는 노예에게만 적용되던 사형이 널리 행해지게 되었으며, 수사에서도 고문의 사용이 광범위해졌다. 몽골에 의해 모스크바 대공국에 도입된 형벌에는 반역자에 대한 참수, 도둑에 대한 낙인 등이 있다. 하지만, 동시대 서유럽에서의 형벌은 몽골이나 러시아보다 가혹했다.[49]

러시아어타타르어 등의 튀르크어족몽골어에서 많은 단어, 특히 재정 및 금융과 관련된 단어를 도입했다.[50] 뎅기/''Деньги''ru(돈), ''카즈나/Казнаru''(국고), 타모줴늬예/''Таможенные''ru(세관), 바릐쉬/''Барыш''ru(이익), 바쉬막/''Башмак''ru(신발) 등이 이에 해당한다.[51]

6. 3. 동서양 관계에 미친 영향

6. 4. 한국사와의 비교사적 관점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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