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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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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탁발여는 북위 태무제의 여섯 아들 중 한 명으로, 환관 종애의 옹립으로 황위에 올랐으나 종애에게 살해된 인물이다. 그는 442년 오왕에 봉해졌고, 452년 남안왕으로 작위가 변경되었으며, 같은 해 종애의 옹립으로 황제가 되었다. 탁발여는 종애에게 권력을 위임하고 정사에 소홀했으며, 결국 종애에게 살해당했다. 사후 문성제에 의해 왕의 예로 장례가 치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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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발여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탁발여
가족 이름퉈바(拓拔)
주어진 이름여(余)
통치 정보
계승북위 황제
재위 기간452년 3월 12일 - 452년 10월 29일
시호은왕(隱王)
연호승평(承平)
연호 기간452년
이전 통치자태무제
다음 통치자문성제
가문 정보
왕조북위
가문탁발
아버지태무제
어머니여좌소의
개인 정보
사망일452년 10월 29일

2. 생애

탁발여는 442년 오왕(吳王)으로 책봉되었고, 451년에 남안왕으로 다시 책봉되었다. 452년 2월, 탁발도가 환관 종애에게 살해되자, 난연(蘭延) 등은 이 사건을 덮고 탁발한을 옹립하려 했다. 그러나 종애는 탁발한을 미워하여 혁련황후의 명을 사칭해 난연 등을 살해했고, 탁발한도 영항에서 살해되었다.

종애는 남안왕 탁발여를 옹립했다. 종애는 대사마, 대장군, 태사가 되어 북위 조정을 장악했다. 탁발여는 신하들의 충성을 얻기 위해 상을 남발하여 국고를 고갈시켰다. 또한 음식, 노래, 사냥을 좋아하여 정치에 관심이 없었다. 종애의 전횡이 심해지자 그의 권력을 빼앗으려 하자, 종애를 분노하게 하였다. 같은 해 10월, 동묘에서 밤에 제사를 지내던 중 종애에게 살해되었다.[2] 종애도 문성제 탁발준이 즉위한 뒤에 숙위에서 체포되어 살해되었다.[2]

문성제는 삼촌인 탁발여를 왕의 예로 장례를 치렀다.[3]

2. 1. 즉위 전

442년 오왕(吳王)으로 책봉되었고, 451년에 남안왕으로 다시 책봉되었다. 452년 2월, 탁발도가 환관 종애에게 살해되자,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난연(蘭延)과 시중(侍中) 화필(和疋)과 설제(薛提)는 이 사건을 덮어버리고, 장례를 끝냈다. 태무제의 아들 중에서 나이가 많았던 동평왕(東平王) 탁발한을 옹립하려 했지만 종애는 탁발한을 미워하고 있었기 때문에, 혁련황후의 영을 꾸미고서는 난연과 그 신하들이 궁궐에 입궐을 하자, 매복하여 포박한 뒤 살해하였다. 탁발한도 영항에서 살해되었다.

종애는 남안왕 탁발여를 옹립하였다. 종애는 대사마, 대장군, 태사가 되어 북위의 조정을 장악하여 권력을 휘둘렀다.

탁발여가 언제 태어났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는 태무제의 여섯 아들 중 어린 시절을 살아남은 막내 아들이었다는 사실은 알려져 있다. 그의 어머니인 유귀비(劉貴妃)는 유연의 칙련 가한 유구려 오제의 여동생으로, 434년 평화 결혼의 일환으로 태무제의 후궁이 되었다. 그는 442년에 무왕(吳王)으로 책봉되었고, 450년에는 그의 부친이 유송의 대규모 공격에 반격하고, 황태자 황이 유연의 잠재적인 공격에 대비하여 북쪽 국경을 방어하고 있을 때, 유왕은 수도 평성(平城, 현재의 산시성 다퉁시)을 맡았는데, 이는 태무제가 그의 능력을 신뢰했음을 보여주는 징표였다. 452년에는 그의 작위가 남안왕(南安王)으로 변경되었다.

태무제 재위 말에 탁발여는 태무제의 환관 종애와 친하게 지냈는데, 종애는 451년에 황태자의 측근인 추니 도성(仇尼道盛)과 임평성(任平城)을 죄목으로 허위 고발하여 황태자의 많은 측근들이 처형당하고 황태자 황 자신이 두려움에 질려 병들어 죽게 만들었다. 452년 봄, 태무제가 자신을 처벌할 것을 두려워한 종애는 태무제를 시해했다. 대신들은 처음에는 태무제의 죽음을 발표하지 않고, 황태자 황의 맏아들인 탁발준 또는 태무제의 생존한 맏아들인 탁발한(拓拔翰)을 황제로 옹립할지를 놓고 논쟁을 벌였다. 종애는 또한 탁발한과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대신 탁발여를 궁으로 소환하여 태무제의 부인인 혁련황후의 조서를 위조하여 탁발준 또는 탁발한을 지지하는 대신들을 매복시켜 죽였다. 그는 또한 탁발한을 처형하고 탁발여를 황제로 옹립했다.

2. 2. 즉위와 최후

452년 2월, 탁발도가 환관 종애에게 살해되자, 난연(蘭延) 등은 이 사건을 덮고 탁발한을 옹립하려 했다. 그러나 종애는 탁발한을 미워하여 혁련황후의 명을 사칭해 난연 등을 살해했다. 탁발한도 영항에서 살해되었다.[1]

종애는 남안왕 탁발여를 옹립했다. 종애는 대사마, 대장군, 태사가 되어 북위 조정을 장악했다. 탁발여는 신하들의 충성을 얻기 위해 상을 남발하여 국고를 고갈시켰다. 또한 음식, 노래, 사냥을 좋아하여 정치에 관심이 없었다. 종애의 전횡이 심해지자 그의 권력을 빼앗으려 하자, 종애를 분노하게 하였다. 같은 해 10월, 동묘에서 밤에 제사를 지내던 중 종애에게 살해되었다.[2] 종애도 문성제 탁발준이 즉위한 뒤에 숙위에서 체포되어 살해되었다.[2]

문성제는 삼촌인 탁발여를 왕의 예로 장례를 치렀다.[3] 탁발여는 황후 헬련을 황태후로 존경했으며, 종에게 재상을 포함한 여러 고위직을 수여하여 종이 실제로 정권을 장악했음을 분명히 했고, 그를 풍익왕으로 봉했다. 탁발여의 즉위는 뚜렷한 반대 없이 이루어진 듯했으나, 자신의 형들과 유교의 계승 원칙에 따라 황제가 되었어야 할 조카를 제쳐두고 즉위했기에, 관료들에게 막대한 보상을 제공하여 그들의 지지를 얻으려 했으며, 그 결과 재정이 고갈되었다.

또한 탁발여는 술을 자주 마시고 유흥과 사냥에 많은 시간을 보내며 중요한 국사에 시간을 거의 할애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종은 재상으로서 황실 경비병도 관할하게 되었고, 극도로 오만해졌다. 결국 탁발여는 종의 기행에 싫증을 느껴 그의 권한을 박탈하려 했다. 종은 이 소식을 듣고 452년 겨울, 탁발여가 밤에 그의 증조부인 도무 황제에게 제사를 지낼 때, 그의 조수 가주(賈周)를 보내 그를 암살했다. 그는 즉위한 지 겨우 7개월 남짓이었다. 이후 여러 관료들이 종을 몰아내고 탁발준을 황제(문성 황제)로 옹립했다. 문성 황제는 탁발여를 황태자 예우로 장례를 치렀지만 황제의 예우는 아니었고, 그에게 시호를 내렸다.

3. 연호

연호원년
승평452년


4. 가계

탁발여가 언제 태어났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태무제의 여섯 아들 중 어린 시절을 살아남은 막내 아들이었다는 사실은 알려져 있다. 그의 어머니인 유귀비(劉貴妃)는 유연의 칙련 가한 유구려 오제의 여동생이었다.[1] 434년 평화 결혼의 일환으로 태무제의 후궁이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그는 유귀비와 결혼했고, 그의 여동생 또는 사촌인 서해 공주를 유구려 오제에게 시집보냈다.[1]

拓跋余|탁발여중국어 (452년 사망) 가계도
아버지북위 태무제(408–452)
어머니육조씨
조부북위 명원제(392–423)
조모미황후 (420년 사망)
외조부우구려 대단(429년 사망)
증조부북위 도무제(371–409)
증조모선무황후 (409년 사망)
증조부두보
증조모위씨 부인
외증조부우구려 복혼
6대조탁발사 (371년 사망)
6대조선명황후(351–396)
6대조유권 (385년 사망)
7대조우구려 체수원


5. 대중문화

2016년 중국 드라마 금수미앙에서 오건호가 연기하였다.[1]

6. 평가

탁발여는 여러 신하들의 마음을 얻으려고 상을 남발하여 국가 재정을 고갈시켰다.[1] 또한 음식, 음악, 수렵을 좋아하여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다.[1] 종애의 전횡이 심했기에 그 직권을 빼앗으려다 종애를 노하게 했다.[1]

참조

[1] 문서 The day after Emperor Taiwu's death
[2] 서적 bingwu (1st) day of the 10th month of the 2nd year of the Zhengping era, per volume 4 (part 2) of Book of Wei
[3] 논문 蒙古國新發現六世紀婆羅米文原始蒙古語碑文跟柔然鮮卑語考證──兼論土族語 (Monguor) 跟吐谷渾語的關係 https://www.academia[...] 2022-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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