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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도라 (9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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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테오도라 (815년경 출생, 867년경 사망)는 9세기 비잔틴 제국의 황후이자 섭정이었다. 파플라고니아 출신으로, 황제 테오필로스의 아내이자 황제 미카엘 3세의 어머니였다. 남편의 사후 섭정으로 권력을 잡았으며, 비잔틴 제국의 성상 파괴 운동을 종식시키고 성상 숭배를 부활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섭정 시절에는 대외 정책에서도 능력을 발휘하여 제국의 안정을 유지했다. 이후 아들 미카엘 3세에 의해 폐위되어 수도원에 갇혔으며, 동방 정교회와 미국 성공회에서 성인으로 추대되었다.

2. 배경 및 초기 생애

테오도라는 파플라고니아 에비사 출신으로, 드롱가리오스이자 투르마르케스였던 마리노스와 테오크티스테 플로리나의 딸이었다. 테오도라의 가문은 일반적으로 아르메니아 혈통으로 여겨지지만, 동시대 자료에는 그녀가 아르메니아인이라고 명확하게 묘사되어 있지 않다. 마미코니안 가문과의 연관성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이를 뒷받침할 충분한 자료는 없다. 테오도라의 가족은 수도에서 특정 아르메니아 가문과 교류했으며, 비잔틴 장군 마누엘 (아르메니아인)의 조카였다. 또한 상업용 배를 소유하여 흑해 무역에 관여했을 가능성이 있다.

2. 1. 가문

테오도라는 815년경 파플라고니아의 에비사에서 태어났다.[1] 드롱가리오스이자 투르마르케스였던 마리노스와 테오크티스테 플로리나의 딸이었으며, 마리노스는 830년 이전에 사망했다.[2] 테오도라는 5명의 형제자매를 두었는데, 오빠는 바르다스와 페트로나스였고, 여동생은 소피아, 마리아, 이레네였다.[1] 이레네는 나중에 유력한 장군인 테오포보스와 결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1]

테오도라의 가족은 파플라고니아 출신으로,[2] 일반적으로 아르메니아 혈통으로 여겨지지만, 동시대 자료에는 그녀가 아르메니아인이라고 묘사되어 있지 않다. 과거에는 테오도라의 가족과 아르메니아 귀족 가문인 마미코니안 가문 사이의 연관성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이를 증명할 충분한 자료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오도라의 가족은 수도에서 특정 아르메니아 가문과 교류했으며, 그녀는 819/820년에 제국의 아시아 5개 주 전체를 잠시 지휘했던 유능한 비잔틴 장군 마누엘 (아르메니아인)의 조카였다. 테오도라의 가족은 상업용 배를 소유하여 흑해 무역에 관여했을 가능성이 있다. 마누엘을 제외하면 테오도라의 가족이 황후가 되기 전 사회적, 경제적으로 얼마나 성공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2]

2. 2. 출생 및 형제자매

테오도라는 815년경 파플라고니아의 에비사에서 태어났다.[1] 그녀는 드롱가리오스la이자 투르마르케스la였던 마리노스와 테오크티스테 플로리나의 딸이었다. 마리노스는 830년 이전에 사망했다. 테오도라는 5명의 형제자매를 두었는데, 오빠는 바르다스와 페트로나스였고, 여동생은 소피아, 마리아, 이레네였다.[1][2] 이레네는 나중에 유력한 장군인 테오포보스와 결혼했을 수도 있다.[1]

테오도라의 파플라고니아 출신 가족은 일반적으로 아르메니아 혈통으로 여겨지지만,[2] 그녀가 아르메니아인이라고 묘사하는 동시대 자료는 없다. 과거에는 테오도라의 가족과 아르메니아 귀족 가문인 마미코니안 가문 사이의 연관성이 제기되었지만, 이러한 연결을 증명할 충분한 자료는 없다. 어쨌든 테오도라의 가족은 수도에서 특정 아르메니아 가문과 교류했다. 그녀는 819/820년에 제국의 아시아 5개 주 전체를 잠시 지휘했던 유능한 비잔틴 장군인 마누엘 (아르메니아인)의 조카였다. 그녀의 가족은 상업에 사용되는 배를 소유했으므로 흑해 무역에 관여했을 가능성이 있다. 마누엘을 제외하고 테오도라의 가족이 황후가 되기 전에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얼마나 성공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3. 황후 시절

테오도라는 황후가 된 후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와 성직자들에게 금 약 6.80kg를, 비잔틴 원로원에 금 약 22.68kg를 기증했다. 테오도라는 황후로서 대부분의 시간을 아이를 낳고 돌보는 데 보냈다. 테오필로스와 테오도라는 콘스탄티노스와 미카엘(훗날 황제), 테클라, 안나, 아나스타시아, 풀케리아, 마리아 등 일곱 자녀를 두었다. 콘스탄티노스는 잠시 공동 황제였지만, 두 살 때 궁궐 저수조에서 익사했다. 테오필로스는 딸들을 매우 자랑스러워했으며, 830년대 후반에 테클라, 안나, 아나스타시아를 아우구스타la로 선포했다. 이를 기념하여 테오필로스, 테오도라, 테클라가 앞면에, 안나와 아나스타시아가 뒷면에 묘사된 매우 특이한 주화가 발행되었다.

테오필로스 황제 치세에 발행된 주화: 황제가 앞면에, 테오도라(오른쪽)와 딸 테클라(왼쪽)가 그 옆에, 뒷면에는 어린 딸 안나(왼쪽)와 아나스타시아(오른쪽)가 묘사되어 있다.


테오필로스 치세 동안, 테오도라는 남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비밀리에 성상 숭배를 계속했다. 테오도라는 남편을 설득하여 투옥된 성상 숭배 화가 라자루스 조그라포스를 석방시키기도 했다.

황제와 황후의 관계가 항상 원만했던 것은 아니다. 839년, 테오필로스는 테오도라의 시녀 중 한 명과 불륜을 저지른 것이 발각되었고, 테오도라는 이를 불쾌하게 여겨 공론화했다. 테오필로스는 불륜을 끝내고 아내에게 사과했으며, 사과의 의미로 딸들을 위해 카리아노스 궁전을 새로 지었다. 또한 테오필로스가 항구에서 멋진 상선을 발견하고 그것이 아내의 소유라는 것을 알게 되어 다툼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상업 활동이 황실 생활과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한 테오필로스는 배와 화물을 불태워 버렸다.

테오도라의 성상 숭배는 때때로 남편과의 갈등을 야기했다. 테오도라는 종종 딸들을 에우프로시네가 은퇴한 수도원으로 보냈는데, 그곳에서 딸들은 테오필로스 몰래 성상 숭배를 배웠다. 언니들은 이 사실을 숨겼지만, 막내딸 풀케리아는 아버지에게 수도원에 보관된 "예쁜 인형"에 대해 말했고, 그들이 인형에 입을 맞춘다고 말했다. 격분한 테오필로스는 딸들이 다시 에우프로시네를 만나는 것을 금지했고, 에우프로시네를 수도원에서 쫓아냈을 수도 있다. 어쨌든 테오도라와 에우프로시네의 비밀 성상 숭배 교육은 이미 성공적이었다. 테오필로스와 테오도라의 자녀 중 누구도 성상 파괴론자가 되지 않았다.

테오도라의 딸들이 할머니 테옥티스테로부터 성상 숭배에 대한 가르침을 받고 있다, ''마드리드 스카일릿세스''에서.


테오도라는 남편과 함께 다양한 공개 행사에 참여했다. 황후가 되기 전에는 그러한 행사를 거의 보지 못했지만, 실수했다는 증거는 없으며, 아마도 에우프로시네의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테오도라는 831년과 837년 개선식에 테오필로스와 함께 출연했고, 그의 첫 번째 군사적 승리 후 히에리아에서 황제와 장군들을 위한 특별한 연회를 주최하는 등 남편의 군사적 업적을 기념하는 데에도 참여했다. 약 12년 동안 왕위에 오른 후, 테오필로스는 842년 1월 20일, 아마도 30세가 되기 전에 이질로 사망했다. 테오필로스는 죽기 직전, 측근과 관리들에게 웅변적인 연설을 하여 아내와 두 살 된 아들 미카엘 3세의 권리를 옹호하도록 간청했다.

테오필로스가 임박한 죽음 전에 성상에 입을 맞추고 있다. 14세기 마나세스 연대기의 장면.

3. 1. 황후 간택과 결혼

20세기 초 테오필로스 황제가 그의 계모 에우프로시네의 신부 선택회에서 테오도라를 아내로 선택하는 모습


830년, 황제 테오필로스의 계모 에우프로시네는 젊은 황제를 위해 신부 선택회를 열었다. 에우프로시네는 지방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문이 좋은 여성들을 모으도록 관리들을 파견했고, 테오필로스는 이 행사를 성대한 볼거리로 만들어 새로 지은 화려한 황궁의 홀에 여성들을 모았다. 결국 테오필로스는 테오도라를 선택했고, 그녀에게 황금 사과를 줌으로써 자신의 선택을 나타냈다.[1]

후대의 연대기 작가인 시메온 로고테테스에 따르면, 테오필로스는 처음에는 카시아 (나중에 저명한 시인이자 작곡가)의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겨 "여자를 통해 인간에게 악이 왔다"고 냉소적으로 말했다(이는 이브를 언급한 것이다).[2] 주디스 헤린은 이 발언을 "미래의 아내의 애정을 얻는 불행한 방식"이라고 평가했다. 이에 카시아는 "여자를 통해 더 나은 일이 시작되었다"고 대답했다(이는 성모 마리아를 언급한 것이다).[2] 카시아의 대담한 반박에 당황한 테오필로스는 그녀를 지나쳐 테오도라에게 사과를 주었다.[2] 워렌 트레드골드에 따르면, 테오도라는 "아름답고, 분별력 있고 적응력이 뛰어나 그와 잘 어울렸지만, 테오필로스는 처음에는 그의 신부가 에우프로시네처럼 성상 숭배자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것 같다."[1]

테오도라는 830년 6월 5일 다프네의 성 스테판 교회에서 황후로 즉위했고,[2] 그 후 부부는 하기아 소피아에서 결혼했다.[2]

3. 2. 황후로서의 활동

테오도라는 황후로서 대관식 이후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와 성직자들에게 금 약 6.80kg를, 비잔틴 원로원에 금 약 22.68kg를 기증했다. 그녀는 황후로서의 시간 대부분을 아이를 낳고 돌보는 데 사용했다. 테오필로스와 테오도라는 아들 콘스탄티노스와 미카엘 (후일 황제), 딸 테클라, 안나, 아나스타시아, 풀케리아, 마리아 등 일곱 명의 자녀를 두었다. 콘스탄티노스는 잠시 공동 황제였지만, 두 살 때 궁궐 저수조에서 익사했다. 테오필로스는 딸들을 매우 자랑스러워했으며, 장녀들인 테클라, 안나, 아나스타시아는 830년대 후반에 모두 아우구스타la로 선포되었다. 이를 기념하여 테오필로스, 테오도라, 테클라가 앞면에, 안나와 아나스타시아가 뒷면에 묘사된 매우 특이한 주화가 발행되었다.

테오필로스 치세 동안, 테오도라는 남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비밀리에 성상 숭배를 계속한 것으로 보인다. 그녀가 이러한 믿음을 어느 정도나 실천했는지, 테오필로스가 그 사실을 얼마나 알고 있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대부분의 경우 테오도라는 황궁 여성들의 사생활을 고려할 때 성상 숭배를 비밀로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테오도라는 남편을 설득하여 투옥된 성상 숭배 화가 라자루스 조그라포스를 석방시키기도 했다.

테오도라 황후가 궁정에서 성상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황제와 황후 사이의 관계가 항상 좋았던 것은 아니다. 839년, 테오필로스는 테오도라의 시녀 중 한 명과 불륜을 시작한 것이 발각되었고, 황후는 이를 좋지 않게 여겨 공론화했다. 테오필로스는 불륜을 끝내고 아내에게 사과했으며, 사과의 일환으로 딸들을 위해 새로운 궁전, 카리아노스를 건설했다. 또한, 테오필로스가 항구에서 멋진 상선을 발견하고 그것이 아내의 소유라는 말을 듣고 다툼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상업 활동이 황실 생활과 양립할 수 없다고 여긴 테오필로스는 배와 화물을 불태워 버렸다.

테오도라의 성상 숭배는 때때로 남편과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그녀는 종종 딸들을 830년 이후 유프로시네가 은퇴한 수도원으로 보냈다. 그곳에서 딸들은 테오필로스가 모르게 성상 숭배를 배웠다. 언니들은 이 사실을 숨겼지만, 막내딸 풀케리아는 아버지에게 수도원에 보관된 "예쁜 인형"에 대해 말했고, 그들이 인형에 입을 맞춘다고 말했다. 격분한 테오필로스는 딸들이 다시 유프로시네를 만나는 것을 금지했고, 유프로시네를 수도원에서 나가도록 강요했을 수도 있다. 어쨌든, 테오도라와 유프로시네의 비밀 성상 숭배 가르침은 이미 성공적이었다. 테오필로스와 테오도라의 자녀 중 그 누구도 성상 파괴자가 되지 않았다.

테오도라는 남편과 함께 다양한 공개 행사를 기념했다. 황후가 되기 전에는 그러한 행사를 거의 목격하지 못했지만, 그녀가 실수했다는 증거는 없으며, 아마도 유프로시네의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테오도라는 또한 남편의 군사적 업적을 기념하는 데 참여하여, 831년과 837년의 개선식에 테오필로스와 함께 출연했으며, 그의 첫 번째 군사적 승리 후 히에리아에서 황제와 그의 장군들을 위한 특별한 리셉션을 주최했다. 약 12년 동안 왕위에 오른 후, 테오필로스는 842년 1월 20일, 아마도 30세가 되기 전에 이질로 사망했다. 죽기 직전, 테오필로스는 그의 측근과 관리들에게 웅변적인 연설을 하여 그의 아내와 두 살 된 아들 미카엘 3세의 권리를 옹호하도록 간청했다.

3. 3. 테오필로스와의 갈등

테오필로스 황제 치세 동안, 테오도라는 남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비밀리에 성상 숭배를 계속한 것으로 보인다.[1][2] 그녀가 이러한 믿음을 어느 정도나 실천했는지, 테오필로스가 그 사실을 얼마나 알고 있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2] 대부분의 경우 테오도라는 황궁 여성들의 사생활을 고려할 때 성상 숭배를 비밀로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가 알고 있었다면, 서로 다른 종교적 신념이 개인적인 수준에서 어느 정도나 그들을 갈라놓았는지 또한 명확하지 않다. 한때 테오도라는 남편을 설득하여 투옥된 성상 숭배 화가 라자루스 조그라포스를 석방시키기도 했다.[1]

황제와 황후 사이의 관계가 항상 좋았던 것은 아니다. 839년, 테오필로스는 테오도라의 시녀 중 한 명과 불륜을 시작한 것이 발각되었고, 황후는 이를 좋지 않게 여겨 공론화했다. 테오필로스는 불륜을 끝내고 아내에게 사과했으며, 사과의 일환으로 딸들을 위해 새로운 궁전인 카리아노스를 건설했다.[2] 아마도 지어낸 이야기일 수 있지만, 부부는 테오필로스가 항구에서 멋진 상선을 발견하고, 그것이 누구의 소유인지 물었다가 아내의 소유라는 말을 듣고 다투기도 했다. 상업 활동이 황실 생활과 양립할 수 없다고 여긴 테오필로스는 "뭐라고! 내 아내가 나, 황제를 상인으로 만들었단 말인가?"라고 외치며 즉시 배와 화물을 불태워 버렸다.

테오도라의 성상 숭배는 때때로 남편과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테오도라는 종종 딸들을 830년 이후 유프로시네가 은퇴한 수도원으로 보냈는데, 그곳에서 딸들은 테오필로스 몰래 성상 숭배를 배웠다. 언니들은 영리하게 이 사실을 숨겼지만, 두 살 정도의 막내딸 풀케리아는 839년 중반에 아버지에게 수도원에 보관된 "예쁜 인형"에 대해 말했고, 그들이 인형을 얼굴에 대고 입을 맞춘다고 말했다. 격분한 테오필로스는 딸들이 다시 유프로시네를 만나는 것을 금지했고, 유프로시네를 수도원에서 나가도록 강요했을 수도 있다.[2] 어쨌든, 테오도라와 유프로시네의 비밀 성상 숭배 가르침은 이미 성공적이었다. 테오필로스와 테오도라의 자녀 중 그 누구도 성상 파괴자가 되지 않았다.

4. 섭정 통치

842년 남편 테오필로스가 죽자 테오도라는 아들 미카엘 3세의 섭정이 되었다. 테오도라는 20대 후반이었지만, 여러 유능하고 충성스러운 조언자들의 도움을 받아 통치했다. 그녀는 재혼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독립성과 권위를 유지했다.[2] 테오도라의 주요 조언자로는 형제 바르다스와 페트로나스, 친척 세르기오스 니케티아테스, 로고테테스이자 환관인 테옥티스토스가 있었다. 테오필로스는 아테네의 이레네의 섭정 통치를 고려하여 경험 많은 관리들을 임명했을 수 있다.

마드리드 스킬리체스에는 테오도라가 최고 통치자가 된 직후 금욕주의자 성직자 시므온에게 "내가 배우자와 남편에게서 받았고 배운 대로, 나는 확고한 손으로 통치할 것이오."라고 대답했다는 기록이 있다.

테오도라의 권력 정도는 학계에서 논쟁의 여지가 있다. 옥스퍼드 비잔틴 사전은 그녀를 여제로 인정하면서도, 테옥티스토스가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했다고 본다. J. B. Bury는 테오도라와 미카엘 3세가 공동 통치했고, 실제 권력은 테오도라에게 있었다고 주장했다. 찰스 에이브러햄 엘턴은 테오도라를 비잔틴 제국의 군주 중 한 명으로 꼽았다. 최근 학자들은 테오도라가 섭정이 아닌 여제로서 통치했다고 주장한다. 린다 갈랜드는 테오도라와 테옥티스토스 모두 "정부 운영에 있어서 놀라울 정도로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한다. 테오도라는 국사 처리, 장관 임명, 외교 관계 등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테오도라 치세 초기에 발행된 동전에는 테오도라가 단독으로 묘사되어 있고, 미카엘 3세와 딸 테클라는 뒷면에 나타난다. 테오도라는 데스포이나la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이는 그녀가 최고 통치자임을 보여준다. 이 동전은 테오도라의 권위를 확립하고, 테클라를 공동 여제로 임명했음을 보여준다. 이후 동전에는 판토크라토르 그리스도와 테오도라, 미카엘이 함께 묘사되기도 했다.

4. 1. 권력 기반

842년 테오필로스가 사망하면서, 그의 성상 숭배주의 아내 테오도라와 미성년 아들 미카엘 3세가 제위를 계승받았다. 이는 780년 황제 레오 4세가 죽은 후 성상 파괴주의 황제가 그의 성상 숭배주의 아내와 미성년 아들에게 계승된 상황과 유사했다. 레오 4세의 아내 아테네의 이레네는 아들 콘스탄티노스 6세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여제로 통치했지만, 테오도라는 그만큼 가혹하지 않았고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그렇게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 20대 후반이었던 테오도라는 유능하고 충성스러운 조언자들을 여럿 두고 있었고 충성심을 불러일으키는 유능한 지도자였다.[1] 테오도라는 재혼하지 않아 자신의 독립성과 권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2]

테오도라의 가장 저명한 조언자이자 지지자로는 그녀의 형제 바르다스와 페트로나스, 그녀의 친척 세르기오스 니케티아테스, 그리고 로고테테스이자 환관인 테옥티스토스가 있었다. 그녀의 조언자 대부분은 그녀처럼 성상 숭배주의자였지만[1] 테옥티스토스를 포함한 일부는 최근까지 성상 파괴주의자였다. 테옥티스토스와 바르다스는 테오필로스가 죽기 직전에 테오도라를 돕도록 임명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테오필로스는 또한 테오도라의 삼촌인 마누엘을 그녀를 돕도록 임명했지만, 그는 이미 이때 사망했을 수도 있다. 테오필로스는 이레네의 이전 치세를 고려하여 테오도라를 돕기 위해 그러한 경험이 풍부한 관리를 임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꼈을 수 있다. 그가 테오도라의 종교적 신념 때문에 그렇게 했다는 증거는 없다. 테오도라는 최고 통치자가 된 직후, 시므온이라는 금욕주의자 성직자로부터 비판을 받았고, "당신이 이 결론에 도달했으니, 나를 떠나시오. 내가 배우자와 남편에게서 받았고 배운 대로, 나는 확고한 손으로 통치할 것이오. 당신은 보게 될 것이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마드리드 스킬리체스에서 미카엘 3세와 테오도라, 그리고 테옥티스토스(흰색 모자를 쓴 모습)를 포함한 여러 궁정 신하들의 모습


테오도라의 권력 정도는 현대 학계에서 다소 논쟁의 여지가 있다. 옥스퍼드 비잔틴 사전(1991)은 그녀를 842년부터 856년까지 여제로 인정하지만, 테옥티스토스가 테오도라의 치세 동안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했다고도 명시한다. J. B. Bury는 저서 《동로마 제국사》(1912)에서 테오도라의 지위는 콘스탄티노스 6세의 섭정 기간 동안 이레네의 지위와 매우 유사했으며, 제국 정부는 테오도라와 미성년 미카엘 3세가 공동으로 행사했고, 실제 제국 권력은 "임시적으로 어머니에게 귀속되었다"고 말했다. 1825년, 찰스 에이브러햄 엘턴은 저서 《로마 황제 역사》에서 테오도라를 비잔틴 제국의 군주 중 한 명으로 꼽았다. 여러 최근 학자들 또한 테오도라가 단순히 섭정으로서가 아니라 여제로서 제국을 통치했다고 주장한다. 린다 갈랜드에 따르면, 미카엘의 미성년 기간 동안 테오도라와 테옥티스토스 중 누가 제국을 운영하는 데 주로 책임이 있었는지 결정하기는 어렵지만, 한 명 또는 둘 다 "정부 운영에 있어서 놀라울 정도로 성공적"이었다고 간주해야 한다. 테옥티스토스가 왕위 뒤에 있는 실질적인 권력이었든 단순한 조언자였든, 오랜 기간 충성스럽게 봉사해 온 고위 정부 관료였던 테옥티스토스가 테오도라의 치세 동안 제국 정책에 기여하고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분명하다. 테오도라는 국사를 처리하고, 장관과 관리를 임명하며, 제1차 불가리아 제국, 아바스 왕조 칼리파국 및 교황청에 대사를 파견하는 등 외교 관계를 처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테오도라 치세 첫 해에 발행된 동전은 테오도라(미카엘 3세가 아닌)가 앞면에 단독으로 등장하고 다른 섭정들을 생략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미카엘 3세와 장녀 테클라는 뒷면에 묘사되어 있다. 테오도라는 이 동전에서 유일하게 칭호가 부여된다(그녀는 테오도라 데스포이나la로 불린다). 따라서 그녀는 분명히 최고 통치자로 묘사된다. 이 동전은 테오도라 자신의 통치자로서의 권위를 확립하고 어린 상속인들을 연관시키는 역할을 했다. 동전은 또한 그녀의 장녀(미카엘보다 더 두드러지게 묘사됨)를 제국 권력과 연관시키고, 테클라가 미카엘과 함께 공동 여제로 임명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녀의 치세 초기부터 발행된 제국 인장 또한 미카엘뿐만 아니라 테오도라와 테클라에게 "로마 황제"라는 칭호를 부여한다. 이후 동전들은 한 면에는 판토크라토르 그리스도의 이미지를, 다른 면에는 테오도라와 미카엘을 함께 묘사하는 경향이 있다.

4. 2. 성상 숭배 복원

테오도라는 84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를 열어 성상 숭배를 복원하였다. 성상 파괴주의자였던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요한 7세를 폐위하고, 성상 옹호론자 메토디오스 1세를 새 총대주교로 임명하였다. 또한, 파울리키아 이단자들을 강제 개종시키거나 처형하는 등 탄압하였다.

4. 2. 1. 성상 파괴 논쟁 종식

좌측 상단에 테오도라와 미카일 3세, 우측 상단에 총대주교 메토디오스 1세가 묘사된, 성상 파괴에 맞서 테오도라가 승리한 것을 그린 14세기 말 또는 15세기 초의 "정통성의 승리" 성화.


테오도라는 상당한 지지를 얻어 843년 3월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성상 숭배를 회복시켰다.[1] 이는 테오필로스 황제가 사망한 지 불과 14개월 만에 일어난 일이며,[2] 제2차 비잔틴 성상 파괴 운동(814–843)을 종식시켰다. 테오도라는 반대를 무마하고 남편의 유산을 지키기 위해, 테오필로스가 죽기 직전에 성상 파괴를 뉘우쳤다고 주장했다. 이 이야기는 또한 테오필로스의 성상 파괴가 미래에 미카일의 통치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보장했다.

종교 정책은 일반적으로 종교 지도자들과 함께 결정되었어야 했지만, 제국의 거의 모든 주교들이 성상 파괴를 옹호하도록 강요받았다. 따라서 테오도라는 대신 관리, 궁정인, 성직자 그룹을 소집했다. 이 회의의 가장 두드러진 구성원은 테오도라 자신, 테옥티스토스, 니케티아테스, 그리고 테오도라의 두 형제였다. 이는 대규모 공의회라기보다는 가족 행사와 더 유사했다. 이 그룹은 테옥티스토스의 집에서 만나 제2차 니케아 공의회(787년에 성상 파괴에 반대하는 결정을 내림)를 수용함으로써 성상 파괴를 규탄했다.

성상 파괴자였던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 요한 7세는 폐위되고 성상 옹호자인 메토디오스 1세로 교체되었다. 이 모든 과정은 비교적 평화롭게 진행되었지만, 요한은 처음에는 총대주교의 관저를 떠나기를 거부했고, 황실 근위병에게서 입었다고 주장하며 자신의 배에 난 상처를 보여주었지만, 이는 자해일 가능성이 더 높았다. 요한은 또한 보스포러스 해협에 있는 수도원에서 망명 생활을 하면서 성상 숭배를 훼손하는 문제를 일으켜, 그곳의 하인에게 성상의 눈을 찌르라고 명령했고, 이에 테오도라는 그에게 200대의 채찍질을 가하라고 명령했다(하지만 처음에는 그를 실명시키고 싶어 했다). 메토디오스는 총대주교가 된 직후 제2차 니케아 공의회에 반대했기 때문에 제국의 거의 모든 주교를 폐위시켰다. 843년 3월 11일, 성상 복원은 아야 소피아에서 대대적인 행렬로 기념되었다. 테오도라의 회의와 성상 복원 날은 그 이후로 정교 축제로 기념되었다.

성상 복원을 기념하기 위해 취해진 상징적인 행동 중 하나는 성상 파괴의 옹호자였던 콘스탄티누스 5세(재위 741–775) 황제의 무덤을 훼손한 것이다. 그의 유해는 성 사도 교회에 있는 그의 무덤에서 옮겨져 불태워졌고, 그 재는 흩뿌려져 그의 매장과 관련된 장소가 영원히 사라지게 되었다. 성 사도 교회에 있는 그의 무덤은 이레네 황후의 무덤으로 대체되었으며, 그녀의 유해는 뷔위카다 섬에 있는 이전 안식처에서 옮겨져 마침내 그녀의 유해를 남편의 유해와 재회시키고 제국의 다른 통치자들과 함께 안장되었다. 테오도라는 이전의 여성 통치자이자 성상의 이전 복원자였던 이레네를 존경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레네의 무덤은 나중에 성상 숭배 영웅의 안식처로 기념되곤 했다.

콘스탄티누스 5세의 무덤을 지키는 병사들.


성상 파괴는 빠르게 사라졌지만, 더 큰 종교적 위협은 동부 아나톨리아에 집중된 파울리키아 이단자들이었다. 파울리키아는 이원론자였으며, 물질 세계 전체를 거부했기 때문에 성상 파괴자이기도 했다. 성상을 복원한 직후, 테오도라는 군대에 파울리키아인들을 강제로 개종시키거나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일부는 개종했지만 수천 명이 살해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제국 국경을 넘어 우마르 알-아크타가 보호하는 멜리테네의 아바스 왕조 칼리프국과 제국 사이의 빈 국경 지대에 정착했다.

테오도라의 명령에 따라 학살되는 파울리키아인들.

4. 2. 2. 정통 신앙의 승리 축제



테오도라는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843년 3월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를 열어 성상 숭배를 회복시켰다.[1] 이는 테오필로스 황제가 사망한 지 불과 14개월 만에 일어난 일로, 제2차 비잔틴 성상 파괴 운동(814–843)을 종식시켰다.[2] 테오도라는 반대 의견을 잠재우고 남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테오필로스가 죽기 직전에 성상 파괴를 뉘우쳤다고 주장했다. 또한 테오필로스의 성상 파괴가 훗날 미카일의 통치에 나쁜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대비했다.

종교 정책은 보통 종교 지도자들과 함께 결정해야 했지만, 제국의 거의 모든 주교들은 성상 파괴를 지지하도록 강요받았다. 그래서 테오도라는 대신 관리, 궁정인, 성직자 그룹을 소집했다. 이 회의에는 테오도라 자신, 테옥티스토스, 니케티아테스, 그리고 테오도라의 두 형제가 참석했다. 이는 대규모 공의회라기보다는 가족 행사와 비슷했다. 이들은 테옥티스토스의 집에서 만나 제2차 니케아 공의회를 수용하여 성상 파괴를 비판했다.

성상 파괴론자였던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 요한 7세는 물러나고 성상 옹호론자인 메토디오스 1세로 교체되었다. 이 과정은 비교적 평화로웠지만, 요한은 처음에 총대주교 관저를 떠나기를 거부했고, 황실 근위병에게서 입었다고 주장하며 자신의 배에 난 상처를 보여주기도 했는데, 이는 스스로 낸 상처일 가능성이 높았다. 요한은 또한 보스포러스 해협에 있는 수도원에서 망명 생활을 하면서 성상 숭배를 훼손하는 문제를 일으켜, 그곳의 하인에게 성상의 눈을 찌르라고 명령했고, 이에 테오도라는 그에게 200대의 채찍질을 가하라고 명령했다. 메토디오스는 총대주교가 된 직후 제2차 니케아 공의회에 반대했기 때문에 제국의 거의 모든 주교를 내쫓았다. 843년 3월 11일, 아야 소피아에서 성상 복원을 기념하는 대규모 행렬이 열렸다. 테오도라의 회의와 성상 복원 날은 그 이후로 정교 축제로 기념되었다.

성상 복원을 기념하기 위한 상징적인 행동 중 하나는 성상 파괴를 지지했던 콘스탄티누스 5세 황제(재위 741–775)의 무덤을 훼손한 것이다. 그의 유해는 성 사도 교회에 있는 그의 무덤에서 옮겨져 불태워졌고, 그 재는 흩뿌려져 그의 매장과 관련된 장소가 영원히 사라지게 되었다. 성 사도 교회에 있는 그의 무덤은 이레네 황후의 무덤으로 대체되었으며, 그녀의 유해는 뷔위카다 섬에 있는 이전 안식처에서 옮겨져 마침내 그녀의 유해를 남편의 유해와 재회시키고 제국의 다른 통치자들과 함께 안장되었다. 테오도라는 이전의 여성 통치자이자 성상의 이전 복원자였던 이레네를 존경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레네의 무덤은 나중에 성상 숭배 영웅의 안식처로 기념되곤 했다.

성상 파괴는 빠르게 사라졌지만, 더 큰 종교적 위협은 동부 아나톨리아에 집중된 파울리키아 이단자들이었다. 파울리키아는 이원론자였으며, 물질 세계 전체를 거부했기 때문에 성상 파괴론자이기도 했다. 성상을 복원한 직후, 테오도라는 군대에 파울리키아인들을 강제로 개종시키거나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일부는 개종했지만 수천 명이 살해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제국 국경을 넘어 우마르 알-아크타가 보호하는 멜리테네의 아바스 왕조 칼리프국과 제국 사이의 빈 국경 지대에 정착했다.

4. 3. 대외 정책

테오도라 섭정 시기 비잔틴 제국은 대체로 평화로웠다. 동쪽에서는 몇 차례 소규모 충돌과 시칠리아에서의 전투가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아랍의 위협은 크지 않았다.

846년, 불가리아의 프레시안 1세가 마케도니아트라키아를 공격했지만 격퇴되었고, 새로운 조약이 체결되었다. 848년에는 시칠리아 탈환을 위한 원정이 실패했다. 851년부터 854년 사이에는 타르수스의 알리 이븐 야히야 알-아르마니가 제국 영토를 습격했지만 큰 피해는 없었다.

테오도라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853년과 854년에 이집트 해안을 공격했다. 853년 비잔틴군은 다미에타를 불태웠고, 855년에는 아나자르부스를 약탈하고 2만 명의 포로를 잡았다. 이들 중 일부는 테옥티스토스의 명령에 따라 처형되었다. 이러한 군사적 성공은 아랍인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고 한다.

4. 3. 1. 아바스 왕조와의 관계

테오도라 치세 초기 비잔틴 제국 지도


테오도라는 정교회가 성상 파괴주의와 마찬가지로 제국에 승리를 가져다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853년 아랍에게 빼앗긴 크레타 섬을 되찾기 위한 원정을 조직했다. 니케티아테스와 테옥티스토스가 이끄는 원정대는 성공적으로 상륙하여 아랍 요새를 포위하고 크레타 테마를 세웠다. 그러나 테오도라가 새 황제를 임명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자 테옥티스토스는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가기 위해 원정을 포기했다. 소문은 거짓이었지만, 소아시아에서 말라티아의 우마르 알-악타가 침략했다는 소식이 전해져 테옥티스토스는 크레타로 돌아갈 수 없었다. 테옥티스토스는 군대를 이끌고 파견되었지만, 마우로포타모스 전투에서 비잔틴군은 패배했다.[1] 854년, 크레타의 아랍인들은 반격하여 비잔틴 침략군을 파괴하고 니케티아테스를 죽였다. 테옥티스토스는 바르다스를 비난하며 테오도라가 그의 형제를 궁정에서 추방하도록 설득했다.[1] 테오도라는 바르다스의 야망을 걱정하여 그를 추방했다.[2] 테옥티스토스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황실 궁정에서 영향력을 유지했다.[1] 성상 파괴주의자들은 군사적 실패를 선전으로 이용하지 않았고, 성상 숭배는 계속되었다.

동쪽의 몇몇 공격과 습격, 시칠리아에서의 교전을 제외하고 제국은 테오도라의 치세 동안 아랍의 위협으로부터 대부분 안전했다. 846년, 불가리아의 칸 프레시안 1세는 마케도니아트라키아를 습격했지만 격퇴당하고 새 조약을 체결했다. 테오도라는 848년 시칠리아 탈환 원정을 조직했지만 패배했다. 851년부터 854년 여름, 타르수스의 알리 이븐 야히야 알-아르마니는 제국 영토를 습격했다. 알리의 습격은 피해가 거의 없었지만, 테오도라는 보복하기 위해 853년과 854년에 이집트 해안을 습격했다. 853년, 비잔틴 습격군은 이집트 도시 다미에타를 불태웠고, 855년에는 비잔틴 군대가 알리의 토후국을 침공하여 아나자르부스 도시를 약탈하고 2만 명의 포로를 잡았다. 테옥티스토스의 명령에 따라 기독교로 개종을 거부한 포로 중 일부는 처형되었다. 후대 연대기 작가들은 이러한 성공이 아랍인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주었다고 한다.

마드리드 스카일리체스에 묘사된 테오도라와 보리스 1세 사이의 사절 파견


아나자르부스 약탈 직후, 불가리아의 보리스 1세는 제국에 위협을 가했지만, 군사적 행동 없이 조약을 갱신하도록 설득되었다. 후대 연대기에는 테오도라가 보리스에게 직접 비잔틴 군대를 이끌고 맞서 싸우겠다고 위협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테오도라의 통치 말에 제국은 불가리아와 아바스 왕조 칼리프조 모두에 대해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슬라브 부족들은 펠로폰네소스에 정착하여 조공을 바치도록 강요되었다. 테오도라는 제국의 예산에 흑자를 유지했고, 제국의 금 보유량도 증가시켰다.

4. 3. 2. 불가리아와의 관계

테오도라는 853년 아랍에게 빼앗긴 크레타 섬을 되찾기 위한 원정을 조직했다. 이 원정은 니케티아테스와 테옥티스토스가 이끌었으며, 성공적으로 상륙하여 아랍 요새를 포위하고 크레타 테마를 세웠다. 그러나 테오도라가 새 황제를 임명하려 한다는 소문 때문에 테옥티스토스는 원정을 포기하고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갔다. 이후 소아시아에 말라티아의 우마르 알-악타가 침략하여 테옥티스토스는 크레타로 돌아갈 수 없었고, 마우로포타모스 전투에서 비잔틴군은 패배했다.[1] 854년, 크레타의 아랍인들은 반격하여 비잔틴 침략군을 파괴하고 니케티아테스를 죽였다.[2] 테옥티스토스는 이 책임을 바르다스에게 돌리고 테오도라가 그를 추방하도록 설득했다.[1]

846년, 불가리아의 칸 프레시안 1세는 제국과의 조약이 만료되면서 마케도니아트라키아를 습격했지만 격퇴당하고 새로운 조약을 체결해야 했다. 아나자르부스의 약탈 직후, 불가리아의 보리스 1세는 제국에 위협을 가했지만, 군사적 행동 없이 조약을 갱신하도록 설득되었다. 후대의 연대기에는 테오도라가 보리스에게 직접 군대를 이끌고 맞서 싸우겠다고 위협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테오도라의 통치 말에 제국은 불가리아와 아바스 칼리프조 모두에 대해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4. 3. 3. 슬라브족 반란 진압

테오도라 통치 말, 비잔틴 제국은 불가리아와 아바스 왕조에 대해 우위를 점했다.[1] 펠로폰네소스에 정착한 슬라브족 부족들은 조공을 바치게 되었다.[2] 테오필로스가 시행한 군인 고임금 정책에도 불구, 테오도라는 제국 예산에 약간의 흑자를 유지했고, 제국의 금 보유량도 약간 증가했다.[2][1]

5. 권력 상실과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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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이후 생애와 유산

테오도라는 미카엘 3세 치하에서 고위직에 오른 바르다스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866년경, 테오도라는 바르다스에게 일부러 너무 짧은 튜닉을 보냈는데, 튜닉에는 황금 뇌조가 그려져 있었다. 바르다스는 이를 속임수의 징조로 받아들였다.

6. 1. 수도원 생활과 죽음

테오도라는 857년 또는 858년[1]까지 황궁에서 살다가, 미카엘 3세의 자매들과 함께 가스트리아의 수도원에 갇혔다.[1] 총대주교 이그나티우스는 이들이 자발적으로 수녀가 되려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머리 깎는 것을 거부했지만, 결국 수도원에 갇히게 되었다.[1] 후대 기록에 따르면, 테오도라는 망명 생활 중 자신을 보호해 달라고 찾아온 많은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 도왔다고 한다. 863년경 석방되어 미카엘에 의해 공식적인 역할을 수행하도록 허락받았을 가능성이 있으며,[1] 아우구스타la로 복귀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말년에 테오도라와 미카엘은 화해했다. 867년 가을, 테오도라는 9월 25일에 미카엘을 저녁 식사에 초대했고, 둘 다 이 자리를 즐거운 자리가 되도록 조치를 취하는 듯했다. 그러나 미카엘은 전날 저녁 식사 후 친구이자 공동 황제인 바실 1세에게 살해당하면서 저녁 식사는 열리지 못했다. 테오도라는 오랫동안 바실을 불신했지만 그에 대항할 힘이 없었다. 미카엘이 살해된 후인 867년에 사망했으며,[1] 마지막으로 확인된 것은 미카엘의 장례식 때였다. 그녀와 딸들은 장례식에 참석하여 미카엘의 시신 앞에서 울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테오도라는 가스트리아 수도원에 묻혔다.

테오도라는 후대에 성상 파괴를 종식시키고 외세와의 성공적인 관계를 맺은 강력한 지도자로 높이 평가받았다. 동방 정교회에서 성인으로 인정받아, 성상 복원에 기여한 공로를 기려 2월 11일에 기념한다.[1] 린다 갈란드는 테오도라를 "성품이 훌륭하고, 어려움 없이 그녀의 형제를 권력에서 배제할 수 있었으며, 필요할 때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제국을 통치할 능력이 충분한 여성"으로 평가했다.

2022년, 미국 성공회는 4년간의 예비 시험 사용 후 테오도라를 자신의 전례력에 공식적으로 추가했다.[2]

6. 2. 성인 추대와 유산

테오도라는 후대에 의해 높이 평가받았으며, 성상 파괴를 종식시키고 외세와의 성공적인 관계를 맺은 것으로 인해 강력한 지도자로 기억되었다.[2] 동방 정교회에서 성인으로 인정받아, 성상 복원에 기여한 공로를 기려 2월 11일에 기념된다.[2] 린다 갈란드는 테오도라를 "성품이 훌륭하고, 어려움 없이 그녀의 형제를 권력에서 배제할 수 있었으며, 필요할 때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제국을 통치할 능력이 충분한 여성"으로 평가했다.[2]

2022년, 미국 성공회는 4년간의 예비 시험 사용 후 테오도라를 자신의 전례력에 공식적으로 추가했다.[2]

참조

[1] 간행물 Theodora https://www.britanni[...]
[2] 웹사이트 General Convention Virtual Binder https://web.archive.[...] 2022-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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