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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필 델카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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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테오필 델카세는 프랑스의 정치인으로, 1852년 파미에에서 태어나 1923년 니스에서 사망했다. 그는 외교 기자로 활동하다 정치에 입문하여 여러 차례 장관직을 역임하며 프랑스의 외교 정책을 주도했다. 외무장관 재임 시절에는 영국과의 불영협상을 통해 식민지 문제를 해결하고, 독일과의 대립을 강화하여 삼국 협상 체제를 구축하는 데 기여했다. 또한, 식민지 확장과 해군력 강화에도 힘썼다. 델카세는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도 외무장관으로 활동했으나, 발칸 문제에 대한 실책으로 사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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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필 델카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테오필 델카세
원어 이름Théophile Delcassé
로마자 표기Teopil Delkase
출생일1852년 3월 1일
출생지파미에, 아리에주, 프랑스
사망일1923년 2월 22일
사망지니스, 알프마리팀, 프랑스
정치 경력
소속 정당급진당
국회의원1889년 11월 12일 – 1919년 12월 7일
선거구아리에주
이전 국회의원샤를 상르루아
다음 국회의원로제 라파제트
주요 직책
외무장관1898년 6월 28일 – 1905년 6월 6일
1914년 8월 26일 – 1915년 10월 13일
전쟁장관1914년 6월 9일 – 1914년 6월 13일
해군장관1911년 3월 2일 – 1913년 1월 21일
식민장관1894년 5월 30일 – 1895년 1월 26일
식민 차관1893년 1월 18일 – 1893년 11월 25일
외무장관 상세 정보 (1898-1905)
대통령펠릭스 포르
에밀 루베
총리앙리 브리송
샤를 뒤퓌
피에르 발데크루소
에밀 콩브
모리스 루비에
이전 외무장관가브리엘 아노토
다음 외무장관모리스 루비에
외무장관 상세 정보 (1914-1915)
대통령레몽 푸앵카레
총리르네 비비아니
이전 외무장관가스통 두메르그
다음 외무장관르네 비비아니
전쟁장관 상세 정보
대통령레몽 푸앵카레
총리알렉상드르 리보
이전 전쟁장관조제프 눌랭
다음 전쟁장관아돌프 메시미
해군장관 상세 정보
대통령아르망 팔리에르
총리에르네스트 모니
조제프 카요
레몽 푸앵카레
이전 해군장관오귀스트 부에 드 라페레르
다음 해군장관피에르 보댕
식민장관 상세 정보
대통령사디 카르노
장 카지미르페리에
펠릭스 포르
총리샤를 뒤퓌
이전 식민장관에르네스트 불랑제
다음 식민장관에밀 쇼탱
식민 차관 상세 정보
대통령사디 카르노
총리알렉상드르 리보
샤를 뒤퓌
이전 식민 차관에밀 자메
다음 식민 차관모리스 르봉

2. 생애

테오필 델카세는 1852년 3월 1일 아리에주 주 파미에에서 태어났다. 그는 「프랑스 공화국」과 「르 탱프」 등에서 외교 문제에 관한 기사를 작성하며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1888년 레옹 갬베타의 지지자로 출마하여 고향 주의 주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이듬해 푸아 지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893년 리보 내각에서 식민지 차관으로 임명되었고, 이후 뒤피 내각에서 식민지 장관을 역임하며 프랑스 식민지 사업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다호메이 식민지 조직과 상우방기 강 상류로의 원정대 파견을 주도했다. 야당 시절에는 해군 문제에 관심을 가지며, 프랑스 해군의 역할은 식민지 사업을 확보하고 개발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1898년 브리송 내각에서 외무부 장관으로 임명된 델카세는 파쇼다 사건을 원만하게 해결하고, 미국과 스페인 간의 평화 협상을 중재하는 등 외교적 능력을 발휘했다. 1899년 영국과 협정을 맺어 파쇼다 사건 문제를 해결하고 프랑스는 북서 아프리카에서 광대한 식민 제국을 강화했다. 같은 해 그는 미국과 스페인 간의 중재자(주요 중재자는 워싱턴 주재 프랑스 대사인 쥘 캉봉) 역할을 맡아 평화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또한, 러시아와의 동맹을 강화하고 영국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1904년 영불 협상을 체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00년에는 스페인과 협정을 맺어 서아프리카의 프랑스와 스페인령 경계를 확정했다. 1899년 8월과 1901년 4월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방문하여 러불 동맹을 강화했다.

1905년 제1차 모로코 사건으로 독일과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델카세는 독일의 압력으로 사임해야 했다. 이후 1909년 프랑스 해군 조사 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해군 개혁을 추진했고, 1911년 에르네스트 모니스 내각에서 해군 장관으로 임명되어 영국과의 해군 협력을 강화했다. 그는 1911년 아가디르 위기를 겪었다. 1911년 전함 리베르테 폭발 사고 이후에는 화약 문제 해결에 힘썼다.

1913년부터 1914년까지 상트페테르부르크 주재 대사를 역임한 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직후 비비아니 내각에서 외무장관으로 복귀했다. 이탈리아연합국 측에 합류시키는 데 기여했지만, 불가리아동맹국에 합류하는 것을 막지 못한 책임과 건강 악화로 1915년 사임했다.[1]

2. 1. 유년기와 언론인 경력

테오필 델카세는 파미에에 자리 잡은 건물주 소부르주아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로랑 델카세(1826-1889)는 미술 교사였다. 로랑 델카세는 아내와 사별한 지 몇 년이 지나고 1857년에 마리 리비에르와 재혼했다.

테오필 델카세는 콜레주 드 파미에에서 중등교육을 받았고, 1870년 바칼로레아를 취득하여, 이후 툴루즈 대학교 문학부에 입학했다. 1874년 학사 학위를 받은 다음, 쉬드웨스트 지방의 여러 학교, 특히 타르브몽토방에서 복습 교사로 일하다가, 이후 파리로 상경했다.

파리에서 테오필 델카세는 공화주의 좌파의 주요 사상적 지도자 중 하나였던 레옹 강베타가 편집하는 <라 레퓌블리크 프랑세즈>에 처음으로 기고하면서 언론계에 투신했다. 1877년을 기점으로, 도덕적 질서(l'Ordre Moral)가 끝나고, 곧이어 마크 마옹이 프랑스 공화국 대통령직을 사임하자, 델카세는 <르 탕>, <르 마탱>이나 <르 주르>에서 몇몇 기사들을 기고하기도 했다. 파리에서의 사회 초년기 이후, 델카세에게 정치에 입문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2. 2. 정치 경력

델카세는 1852년 아리에주 주 파미에에서 태어났다. 그는 「프랑스 공화국」과 「르 탱프」에서 외교 문제에 관한 기사를 작성했으며, 1888년 레옹 갬베타의 지지자로 출마하여 고향 주의 주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다음 해에는 푸아 지역구의 국회의원으로 의회에 진출했다.

1893년, 델카세는 리보 내각에서 식민지 차관으로 임명되어 1893년 12월 뒤피 내각이 붕괴될 때까지 재직했다. 프랑스 식민지청이 장관급 독립 부처가 된 것은 그의 노력 덕분이었으며, 두 번째 듀피 내각(1894년 5월~1895년 1월)에서 식민지 장관을 역임했다. 그는 다호메이 식민지 조직, 상우방기 강 상류로 리오타르 원정대 파견 등 프랑스 식민지 사업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야당 시절 델카세는 해군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며, 프랑스 해군의 기능은 식민지 사업 확보 및 개발이며 영국 함대와의 경쟁은 비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영국에 대한 최선의 대응으로 상선 파괴함 건조를 옹호했다.

1898년 6월, 브리송 내각에서 가브리엘 아노토의 뒤를 이어 외무부 장관이 되었고, 이후 듀푸이, 발데크루소, 콤브, 루비에 내각에서도 외무장관직을 유지했다.

외무 장관으로서 델카세는 파쇼다 사건을 원만하게 해결하고, 미국과 스페인 간의 평화 협상을 중재하는 등 외교적 역량을 발휘했다. 1899년 3월 영국과 협정을 맺어 파쇼다 사건문제를 해결하고 프랑스는 북서 아프리카에서 광대한 식민 제국을 강화했다. 같은 해 그는 미국과 스페인 간의 중재자(주요 중재자는 워싱턴 주재 프랑스 대사인 쥘 캉봉) 역할을 맡아 평화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델카세는 독일과의 관계 개선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이후 반독일적인 정책을 추진하며 영국, 러시아와의 관계 강화에 힘썼다. 1904년 영불 협상을 체결하여 모로코이집트에 대한 양국의 영향력을 확립하고, 1900년에는 스페인과 협정을 맺어 서아프리카의 프랑스와 스페인령 경계를 확정했다. 1899년 8월과 1901년 4월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방문하여 러불 동맹을 강화했다. 1902년에는 이탈리아와 비밀 협약을 체결하여 삼국 동맹에 압력을 가했다.

1905년 제1차 모로코 사건으로 독일과의 관계가 악화되자, 델카세는 독일의 압력으로 사임해야 했다. 그러나 1908년 영국 방문에서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1909년 델카세는 프랑스 해군 조사 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임명되어 프랑스 해군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개선을 촉구했다. 1911년에는 에르네스트 모니스 내각에서 해군 장관으로 임명되어 영국과의 해군 협력을 강화했다. 그는 1911년 아가디르 위기를 겪었다.

1911년 전함 리베르테 폭발 사고 이후, 델카세는 화약 문제 해결에 힘썼다. 그는 1907년 이전에 제조된 모든 탄약을 교체하라고 명령했으며, 안정제 디페닐아민을 함유한 새로운 폭약으로 점차 교체했다.

1913년부터 1914년까지 상트페테르부르크 주재 대사를 역임한 델카세는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직후 비비아니 내각에서 외무장관으로 복귀하여 이탈리아를 연합국 측에 합류시키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불가리아동맹국에 합류하는 것을 막지 못한 것에 대한 책임과 과로로 1915년 사임했다.[1]

2. 2. 1. 아리에주의 급진파 하원의원

테오필 델카세는 1885년 10월 푸아 아롱디스망의 총선 후보가 되었으나, 공화파의 단일화를 위해 2차 투표에서는 양보했다. 반교권주의적 신념을 지닌 델카세는 1886년 1월 푸아의 라틴 형제회 롯지에서 프리메이슨에 입교한다.

1887년 10월 26일, 델카세는 주느비에브 왈레와 결혼했다. 왈레는 하원의원 가스통 마십의 과부였다. 1888년 빅드소 캉통의 주의원으로 선출된 델카세는 다음 해 1889년 총선에서 당선되어 하원에 입성한다. 이후 1919년까지 30년간 푸아 하원의원직을 유지했다.

급진주의 성향을 가졌음에도, 델카세는 조르주 클레망소가스통 두메르그와는 다르게 국무회의 의장 쥘 페리의 식민주의 정책을 지지했다. 델카세는 또한 오랑 하원의원 외젠 에티엔이 이끌고 주로 중도층을 지지자로 삼은 식민주의 정권과 연결되어 있었다.

2. 2. 2. 장관으로서의 책임

델카세는 1893년 식민부 차관보를 맡아 1893년 1월 18일부터 11월 25일까지 재직했고, 이듬해 식민장관으로 임명되었다. 1898년 6월 28일, 앙리 브리송 2기 내각에서 외무장관이 되었으며, 이후 뒤퓌 4기, 뒤퓌 5기, 발데크루소, 콩브, 루비에 2기 내각까지 총 6개 내각에서 1905년 6월 17일까지 외무장관직을 연임하였다.

1893년 1월, 델카세는 알렉상드르 리보 2기 내각에서 식민지 차관으로 임명되어 같은 해 12월 샤를 뒤퓌 내각이 붕괴될 때까지 재직했다. 프랑스 식민지청이 장관급 독립 부처가 된 것은 주로 그의 노력 덕분이었으며, 1894년 5월부터 1895년 1월까지 존속한 뒤퓌 2기 내각에서 식민지 장관을 역임했다. 그는 특히 서아프리카의 다호메이(Dahomey) 식민지를 조직하고 우방기 강 상류로 리오타르 원정대를 파견하는 등 프랑스 식민지 사업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야당 시절 델카세는 해군 문제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고, 프랑스 해군의 기능은 식민지 사업 확보 및 개발이며 영국 함대와의 경쟁은 비난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영국에 대한 최선의 대응으로 상선 파괴함 건조를 옹호했다.

2. 2. 3. 외무장관, 불영협상의 주역

1898년 6월 두 번째 브리송 내각이 구성되면서 테오필 델카세는 케 도르세의 외무부 장관이 되었고, 이후 발데크루소, 콤브, 루비에 내각에서도 그 자리를 유지했다.

델카세는 외무장관으로서 독일 제국에 대해서는 일관되게 반독일 정책을 취하는 한편, 영국러시아 제국 등 다른 유럽 열강에 대해서는 유화적이거나 협조적인 방침을 채택했다.

1898년 델카세는 마르샹 대위가 수단의 파쇼다 마을을 점령한 사건(파쇼다 사건)으로 인해 발생한 난처한 상황을 처리해야 했다. 이 사건으로 영국과의 군사 충돌이 우려되었지만, 델카세는 대영 유화책을 통해 양국 관계 개선에 힘썼다. 그는 1899년 1월 23일 하원 연설에서 리오타르 원정대에서 직접 비롯된 일이라며 모든 책임을 인정했다. 그리고 1899년 3월 영국과 협정을 맺어 문제를 해결하고 프랑스는 북서 아프리카에서 광대한 식민 제국을 강화했다. 같은 해 그는 미국과 스페인 간의 중재자(주요 중재자는 워싱턴 주재 프랑스 대사인 쥘 캉봉) 역할을 맡아 평화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러시아 제국에 대해서는, 러불 동맹 강화를 위해 1899년 8월과 1901년 4월 두 차례에 걸쳐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방문했다. 또한, 비밀리에 이탈리아 왕국과 협상하여 1902년 양국 간에 비밀 협약(불이협정)을 체결, 삼국 동맹에 압력을 가했다.

1903년 7월에는 프랑스 공화국 대통령 에밀 루베와 함께 런던을 방문하여 영국과의 우호 관계 구축을 도모했다. 이듬해인 1904년에 체결된 영불협상은 그의 외교적 성공 중 하나로, 이를 통해 영국의 이집트에 대한 우선권을 인정하는 대가로 프랑스의 모로코에 대한 우선권을 확인받았다. 또한, 영국의 러시아에 대한 긴장 완화를 도모하고, 양국의 접근을 진전시켰다(이러한 노력은 1907년 영러협상을 이끌어내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델카세는 비스마르크 체제라 불리는 독일 중심의 프랑스 포위망을 해체하고, 반대로 대독 포위망을 형성해 나갔다.

델카세는 원래 온건파로 독일 제국과 타협점을 찾으려 했으나, 베를린은 그의 제안을 무시했다. 그러자 그는 매우 반독일적인 인물이 되었고, 심지어 빌헬름 2세는 그를 "프랑스에서 독일에게 가장 위험한 인물"이라고 불렀다.

1905년 3월 31일,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프랑스의 세력권인 모로코 북단 도시 탕제르를 갑작스럽게 방문했다. 이를 계기로 독일-프랑스 관계가 긴장되었고, 전면전쟁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왔다(제1차 모로코 사건). 당시 델카세는 독일을 향해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며 평화 협상을 거부하여 루비에 총리와의 갈등을 초래했고, 결국 해임되었다. 그러나 다음 해 1월부터 개최된 알헤시라스 회의에서 모로코 문제의 중재를 시도하여 독일의 외교적 고립이 드러나는 등 그의 외교 정책은 프랑스에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2. 2. 4. 해군장관

1911년 1월, 델카세는 아리에주 하원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이후 해군장관직을 맡게 되었다. 해군장관 재임 중, 델카세는 아가디르 위기를 겪었다. 1911년 7월 1일, 독일 군함 SMS 판터가 프랑스의 실력행사에 반대한다는 명분으로 모로코 해안에 파견되었다. 같은 해 11월 4일, 독일과 프랑스 간의 교환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협정은 국무회의 의장 조제프 카요의 주도로, 외무장관 쥐스탱 드 셀브와 식민장관 알베르 르브룅이 협상하였다. 협정 내용은 독일이 북아프리카에 대한 이해관계를 포기하는 대신, 카메룬과 벨기에 영토 사이에 있는 콩고의 주요 부분을 양도받는 것이었다.[1]

1909년, 델카세는 프랑스 해군 조사 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위원회는 1909년 5월 24일 보고서를 통해 프랑스 해군의 준비 부족과 해군 행정 및 조직의 혼란을 지적했다.[2] 델카세는 에르네스트 모니스 내각에서 1911년 3월 2일 해군 장관으로 임명되었으며,[3] 영국과 프랑스 함대 간의 긴밀한 협력을 발표했다. 이 협정은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시 영국이 프랑스 편에 서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4]

1911년 9월 25일, 툴롱 항구에 정박 중이던 전함 리베르테(Liberté)(French battleship Liberté)의 앞쪽 보조포탄 탄약고에서 폭발 사고가 발생하여 210명이 사망하고 136명이 중상을 입었다.[5] 당시 함장 루이 조레스는 휴가 중이었으며,[6] 폭발 이후 하원에서는 조레스의 명예와 해군의 불안정한 화약 사용에 대한 책임 문제가 제기되었다. 조레스는 군사 재판을 받았으나 1911년 12월 21일 무죄 판결을 받았다. 해군 위원회 위원장 폴 팽르베는 전함 이에나(Iéna)(French battleship Iéna) 폭발 사건에 이어 조사 위원회를 임명했다. 앙투안 슈베레 함장은 조사 위원회의 일원이었으며, "해군 화약에 관한 보고서"(1912)를 작성했다. 델카세는 1907년 이전에 제조된 모든 탄약을 교체하라고 명령했다. 오래된 탄약은 함선에서 제거되었고, 나머지는 안정제 디페닐아민을 함유한 새로운 폭약으로 점차 교체되었다. 화약 개선 노력은 지속되었고, 이후 대형 사고는 발생하지 않았다. "화약 위기"는 1914년에야 완전히 해결되었다.

델카세는 1912년 1월 14일 내각이 붕괴될 때까지 조제프 카이요 내각에서 해군 장관직을 유지했다. 레이몽 푸앵카레는 델카세에게 총리 겸 외무장관직을 제안했지만, 델카세는 거절했다. 그러나 그는 푸앵카레 내각에서 해군 장관으로 남는 데는 동의했다.

2. 2. 5. 케도르세로의 복귀

1913년 2월부터 1914년 1월까지 테오필 델카세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주재 대사였다. 1914년 8월 26일, 유럽 전역이 전쟁의 화염에 휩싸였음에도 불구하고, 삼국협상의 주역이었던 델카세는 르네 비비아니 내각에서 외무장관으로 복귀했다. 델카세는 외무장관으로서 이탈리아독일 편에서 떼어놓기 위해 노력했고, 이탈리아는 1915년 5월 23일 연합국 측에 가담하여 참전했다. 그러나 델카세는 불가리아동맹국 세력에 합류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이러한 실패에 낙담하고 대중의 비난을 받으며 과로한 델카세는 1915년 10월 13일 사임했다.[1]

1909년 델카세는 프랑스 해군 조사 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1909년 5월 24일 발표된 보고서는 프랑스 해군이 전쟁 준비가 부족하고 해군 행정 및 조직이 혼란스럽다고 결론지었다.[2] 델카세는 에르네스트 모니스 내각에서 1911년 3월 2일 해군 장관으로 임명되었다.[3] 그는 영국과 프랑스 함대 간의 긴밀한 협력을 선언했는데, 이는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시 영국이 독일을 상대로 프랑스 편에 서는 데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1911년 9월 25일, 전함 리베르테(Liberté)(French battleship Liberté)가 툴롱 항구에 정박 중이던 중, 함선 앞쪽 보조 포탄 탄약고에서 우발적인 폭발이 발생하여 함선이 파괴되었다.[4] 이 사고로 210명이 사망하고 136명이 중상을 입었다.[5] 당시 함장 루이 조레스는 휴가 중이었다.[6] 폭발 이후, 하원에서는 조레스의 명예와 해군의 불안정한 화약 사용에 대한 책임 문제가 제기되었다. 조레스는 군사 재판을 받았지만, 1911년 12월 21일 만장일치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6] 해군 위원회 위원장 폴 팽르베는 전함 이에나(Iéna)(French battleship Iéna) 폭발 사건에 이어 조사 위원회를 임명했다. 앙투안 슈베레 함장은 조사 위원회의 일원이었으며, "해군 화약에 관한 보고서"(1912)를 작성했다. 델카세는 1907년 이전에 제조된 모든 탄약을 교체하라고 명령했다.[5] 오래된 탄약은 함선에서 제거되었고, 나머지는 안정제 디페닐아민을 함유한 새로운 폭약으로 점차 교체되었다. 화약 개선을 위한 지속적인 노력이 이루어졌고, 더 이상의 대형 사고는 발생하지 않았다. "화약 위기"는 1914년에야 완전히 해결되었다.[5]

델카세는 1912년 1월 14일 내각이 붕괴될 때까지 조제프 카이요 내각에서 해군 장관직을 유지했다. 레이몽 푸앵카레는 델카세에게 총리 겸 외무장관직을 제안했지만, 델카세는 거절했다. 그러나 그는 이후 푸앵카레 내각에서 해군 장관으로 남는 데는 동의했다.

2. 3. 말년

1916년 6월 20일, 아리에주 하원의원으로 재선된 테오필 델카세는 하원에서 테살로니키 군사 원정 계획을 맹렬히 반대했다.[1] 얼마 지나지 않아 델카세는 독일군에 포로로 잡힌 아들 자크(1891-1918)의 죽음에 동요하여 정계에서 은퇴했다.[1] 1921년 6월, 델카세는 자기 딸 "수잔" 로랑스 델카세(1889-1965)를 이후 모로코에 거주하게 되는 샤를 노게 중령과 엑슬레테름에서 결혼시켰다.[1]

델카세는 1915년 10월 14일, 의견 차이와 건강 악화로 인해 내각에서 사임했다.[1] 파면된 이후 정계에서 은퇴했지만, 국제 관계의 긴장과 함께 국정에 복귀했다.[1] 해군대신(1911년 - 1913년), 러시아 대사(1913년 - 1914년)를 역임하고,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에는 외무대신에 복귀했으나, 발칸 문제에서 거듭된 실책으로 구심력이 저하되어 같은 해 10월에 다시 사퇴했다.[1]

1923년 2월 22일, 71세 생일을 앞두고 니스에서 사망했다.[1]

3. 사망

테오필 델카세는 1923년 2월 22일 니스에서 사망했다. 델카세는 파리 몽마르트르 묘지에 묻혔다. 그의 무덤에는 "이 몇 단어들이 내 인생 전체를 요약한다: 프랑스를 위해서'pour la France', 모든'tout', 항상'toujours' "이라는 명구가 쓰여 있다.[4]

4. 업적 및 평가

테오필 델카세는 외교 및 식민지 정책에서 중요한 업적을 남겼으며, 프랑스 제3공화국 시기 주요 정치인으로 평가받는다.

델카세는 1898년부터 1905년까지 외무장관으로 재직하며 파쇼다 사건을 해결하고, 앙탕트 코르디알을 체결하는 등 프랑스 외교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독일과의 관계에서 강경한 입장을 취했지만, 영국, 이탈리아, 러시아와의 관계를 개선하며 비스마르크 체제를 해체하고 대독 포위망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이러한 그의 외교 정책은 "델카세 체제"라고 불린다.[6]

식민지 정책에서도 델카세는 프랑스 식민지청을 독립 부처로 승격시키고, 서아프리카 다오메이 식민지를 조직하는 등 식민지 확장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또한 해군 조사 위원회 위원장 및 해군 장관을 역임하며 프랑스 해군력 강화에도 힘썼다.[1][2]

그러나 델카세는 독일과의 관계에서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여 갈등을 유발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1905년 제1차 모로코 사건 당시 독일을 향해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며 평화 협상을 거부하여 루비에 총리와 갈등을 빚었고, 결국 해임되었다.[3] 하지만 알헤시라스 회의에서 모로코 문제 중재를 통해 독일의 외교적 고립을 드러내는 등 그의 외교 정책이 프랑스에 이익을 가져다주었다는 평가도 있다.[3]

델카세가 수여받은 훈장은 다음과 같다.

국가훈장날짜주석
레오폴드 훈장 그랑 크ordon1900년[2]
성 알렉산더 훈장 그랜드 크로스1902년[3]
찰스 3세 훈장 그랜드 크로스 (훈장 목걸이 포함)1900년 7월 9일[4]
로열 빅토리아 훈장 명예 그랜드 크로스1903년 5월 4일[5]


4. 1. 델카세 체제 구축

1898년 6월, 테오필 델카세는 가브리엘 아노토의 뒤를 이어 두 번째 브리송 내각의 외무부 장관이 되었고, 이후 듀푸이, 발데크루소, 콤브, 루비에 내각에서도 외무부 장관직을 유지했다. 1898년, 델카세는 파쇼다 사건으로 인한 어려운 상황을 처리해야 했다. 그는 1899년 1월 23일 하원 연설에서 모든 책임을 인정했고, 1899년 3월 영국과 협정을 맺어 문제를 해결하고 프랑스는 북서 아프리카에서 광대한 식민 제국을 강화했다. 같은 해, 그는 미국과 스페인 간의 중재자 역할을 맡아 평화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6]

델카세는 초기에는 독일과 타협점을 찾으려 했으나, 베를린이 그의 제안을 무시하면서 반독일적인 인물이 되었다. 빌헬름 황제는 그를 "프랑스에서 독일에게 가장 위험한 인물"이라고 불렀다. 델카세는 프랑스와 이탈리아 간의 관계를 개선하고, 러시아와의 동맹을 강화했다. 1899년 8월과 1901년 4월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방문했다. 1900년 6월 스페인과 협정을 맺어 서아프리카의 프랑스와 스페인령 경계를 확정했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영국과 앙탕트 코르디알을 체결한 것으로, 오랫동안 분쟁의 대상이었던 식민지 문제와 기타 문제(특히 이집트, 뉴펀들랜드, 모로코)에 대해 합의를 이루었다. 프랑스와 영국의 협력 강화에 대한 의심이 독일에서 제기되었고, 1905년 독일의 단호함은 사건으로 나타났다. 상황이 악화되자 독일은 1906년 6월 델카세의 사임을 강요했다.[6] 그는 은퇴했지만, 1908년 영국 방문에서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6]

델카세는 외무장관으로서 반독일 정책을 취하는 한편, 영국과 러시아 제국에는 유화적이거나 협조적인 정책을 채택했다. 파쇼다 사건으로 영국과의 군사 충돌이 우려되었지만, 델카세는 대영 유화책을 통해 양국 관계 개선에 힘썼다. 러불 동맹 강화를 위해 1899년과 1901년 두 차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방문했다. 또한, 이탈리아와 비밀리에 협상하여 1902년 양국 간 비밀 협약을 체결, 삼국 동맹에 압력을 가했다. 1903년 7월, 에밀 루베 대통령과 함께 런던을 방문하여 영국과의 우호 관계를 구축했다. 1904년에 체결된 영불협상은 그의 외교적 성공 중 하나로, 영국의 이집트에 대한 우선권을 인정하는 대가로 프랑스의 모로코에 대한 우선권을 확인받았다. 또한, 영국의 러시아에 대한 긴장 완화를 도모하고, 양국의 접근을 진전시켰다(이는 1907년 영러협상을 이끌어내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델카세는 비스마르크 체제를 해체하고, 반대로 대독 포위망을 형성해 나갔다. 그와 그의 계승자에 의해 형성된 대독 포위망은 프랑스의 국제 정치사학자 르네 지로에 의해 "델카세 체제"라고 불린다.[6]

4. 2. 식민지 확장

테오필 델카세는 알렉상드르 리보 내각(1893년 1월~4월)에서 식민지 차관으로 임명되었고, 1893년 12월 샤를 알렉상드르 뒤피 내각이 붕괴될 때까지 그 직책을 유지했다. 프랑스 식민지청이 장관을 수장으로 하는 독립 부처가 된 것은 주로 그의 노력 덕분이었으며, 그는 두 번째 뒤피 내각(1894년 5월~1895년 1월)에서 이 직책에 임명되었다. 그는 특히 서아프리카에서 새로 획득한 다오메이 식민지를 조직하고 상우방기 강 상류로 리오타르 원정대를 파견하는 등 프랑스 식민지 사업에 큰 활력을 불어넣었다. 야당에 있던 동안 델카세는 해군 문제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고, 주목할 만한 연설에서 그는 프랑스 해군의 기능은 식민지 사업을 확보하고 개발하는 것이라고 선언하고, 영국 함대와 경쟁하려는 모든 시도를 비난하며, 프랑스가 영국에 대한 최선의 대응으로 상선 파괴함 건조를 옹호했다.

4. 3. 해군력 강화

1909년 델카세는 프랑스 해군 조사 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위원회는 1909년 5월 24일 보고서를 통해 프랑스 해군이 준비되지 않았고 해군 행정 및 조직이 혼란스럽다고 결론 내렸다.[1] 1911년 3월 2일, 델카세는 에르네스트 모니스 내각에서 해군 장관으로 임명되었다.[2] 그는 영국과 프랑스 함대 간의 긴밀한 협력을 공표했는데, 이는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시 영국이 독일을 상대로 프랑스 편에 서는 데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1911년 9월 25일, 툴롱 항구에 정박해 있던 전함 리베르테의 앞쪽 보조포탄 탄약고에서 우발적인 폭발이 발생하여 함선이 파괴되었다.[3] 이 사고로 210명이 사망하고 136명이 중상을 입었다.[4] 당시 함장인 루이 조레스는 휴가 중이었다.[5] 폭발 이후 하원에서는 조레스의 명예와 해군의 불안정한 화약 사용에 대한 책임 문제가 제기되었다. 조레스는 군사 재판을 받았지만, 1911년 12월 21일 만장일치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5]

해군 위원회 위원장인 폴 팽르베는 전함 이에나 폭발 사건에 이어 조사 위원회를 임명했다. 앙투안 슈베레 함장은 조사 위원회의 일원이었으며, 통렬한 "해군 화약에 관한 보고서"(1912)를 작성했다.[6] 델카세는 1907년 이전에 제조된 모든 탄약을 교체하라고 명령했다.[4] 오래된 탄약은 함선에서 제거되었고, 나머지는 안정제인 디페닐아민을 함유한 새로운 폭약으로 점차 교체되었다. 화약 개선을 위한 지속적인 노력이 이루어졌고, 이후 더 이상의 대형 사고는 발생하지 않았다. "화약 위기"는 1914년에야 완전히 해결되었다.[4]

1912년 1월 14일, 조제프 카이요 내각이 붕괴될 때까지 델카세는 해군 장관직을 유지했다. 레이몽 푸앵카레는 델카세에게 총리 겸 외무장관직을 제안했지만, 델카세는 거절했다. 그러나 그는 이후 푸앵카레 내각에서 해군 장관으로 남는 데 동의했다.

4. 4. 비판

테오필 델카세는 독일과의 관계에서 강경한 입장을 취하여 갈등을 유발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1905년 제1차 모로코 사건 당시 독일을 향해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며 평화 협상을 거부하여 루비에 총리와 갈등을 빚었고, 결국 해임되었다.[3] 그러나 알헤시라스 회의에서 모로코 문제 중재를 통해 독일의 외교적 고립을 드러내는 등 그의 외교 정책이 프랑스에 이익을 가져다주었다는 평가도 있다.[3]

5. 한국과의 관계

(참조할 원본 소스가 제공되지 않았으므로, '한국과의 관계' 섹션 내용을 작성할 수 없습니다.)

참조

[1] 백과사전 Delcassé, Théophile https://archive.org/[...]
[2] 뉴스 Handelsblad 1900-11-03
[3] 신문 Court Circular The Times 1902-07-04
[4] 간행물 Guía Oficial de España http://hemerotecadig[...] 1901
[5] 웹사이트 Page 3526 Issue 27560, 2 June 1903 London Gazette The Gazette https://www.thegazet[...] 2023-04-11
[6] 서적 近代ヨーロッパ国際政治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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