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혁명당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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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통일혁명당 사건은 1968년 김종태가 북한의 지령과 자금을 받아 통일혁명당을 결성하고 서울대학교를 중심으로 조직을 구축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김종태, 이문규, 김질락 등이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신영복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중앙정보부는 관련자 158명을 검거하고 무장공작선, 무전기 등을 압수했다. 북한은 김종태에게 영웅 칭호를 수여하고 해주사범학교를 김종태사범학교로 개칭했다. 이 사건은 남북 관계를 경색시키고 박정희 정권의 독재를 강화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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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혁명당 사건 | |
---|---|
사건 개요 | |
사건명 | 통일혁명당 사건 |
한자 표기 | 統一革命黨 事件 |
로마자 표기 | Tong-il Hyeokmyeongdang Sageon |
가타카나 표기 | トンギルヒョンミョンダンサゴン |
관련 인물 | |
주요 인물 | 김종태 |
사건 내용 | |
배경 | 대한민국의 반공주의 시기에 발생 북한의 대남 공작 시도 |
조직 | 지하 조직 통일혁명당 김종태를 중심으로 조직 |
활동 | 북한의 지령을 받아 대한민국 사회 혼란 시도 노동자, 학생, 지식인 등 포섭 시도 |
결과 | 조직 발각 및 관련자 대거 검거 반공법 위반 혐의로 처벌 |
기타 | |
영향 | 대한민국 사회에 반공주의 강화 남북 관계 경색 국가보안법 적용 강화 논란 |
2. 사건 배경
김종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으로부터 지령과 자금을 지원받아 혁명조직인 통일혁명당을 결성하였다. 1968년 8월 24일, 한국 중앙정보부(KCIA)는 통일혁명당 결성에 가담한 인물들을 체포했다고 발표했다.
중앙정보부는 암호를 해독하여, 이문규를 구출하러 온 북한 공작선을 격침시키고 2명을 생포하였다.[9] 이 사건으로 검거된 사람은 모두 158명이었으며, 이들 중 73명이 송치되었고, 23명은 불구속되었다. 압수된 물품은 다음과 같다.
2. 1. 통일혁명당 결성
김종태는 월북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의 지령과 자금을 받고 통일혁명당을 결성했다.[2] 통혁당은 중앙당인 조선로동당의 지시를 받는 지하당이었다. 김종태는 주로 서울대학교에 침투하여 “경제복지회”를 중심으로 운동조직을 구성했다.[2] 주범 김종태·김질락·이문규는 월북해 조선로동당에 입당했고, 당원 이진영·오병헌은 1968년 4월 22일 월북해 교육을 받던 중 1968년 8월 말 통혁당 사건이 터지자 북한에 머물렀다.2. 2. 관련 인물
김종태, 김질락, 이문규는 월북해 조선로동당에 입당했다.[7] 이진영, 오병헌은 1968년 4월 22일 월북해 교육을 받던 중 1968년 8월 말 통혁당 사건이 터지자 북한에 머물렀다.신영복은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육군사관학교 교관으로 근무하다 구속되어 1심과 2심에서 사형,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8] 박성준은 자신의 처 한명숙을 포섭하는 등의 혐의로 체포되어 15년 형을 선고받았다. 유낙진은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으나 이후 20년 형으로 감형되었다.
3. 사건 전개
통일혁명당은 김종태가 북한의 지령과 자금을 받아 만든 혁명 조직으로, 조선로동당의 지시를 받는 지하당이었다. 김종태·김질락·이문규는 북한으로 넘어가 조선로동당에 입당했고, 이진영·오병헌은 1968년 4월 22일 월북해 교육을 받던 중 그해 8월 말 통혁당 사건이 터지자 북한에 머물렀다.
김일성은 김종태에게 영웅 칭호를 수여하고, 해주사범학교를 김종태사범학교로 개칭하였다. 신영복은 사상 전향을 하여 1988년 출소하였다.
3. 1. 중앙정보부 발표
1968년 8월 24일, 중앙정보부는 통일혁명당 사건을 발표하면서, 체포 과정에서 압수한 물품들을 공개했다. 압수 물품에는 무장 공작선 1척, 고무보트 1척, 무전기 7대, 기관단총 12정, 수류탄 7개, 무반동총 1정과 권총 7정 및 실탄 140발, 12.7mm 고사총 1정, 중기관총 1정, 레이다 1대, 라디오 수신기 6대, 미화 3만달러와 한화 73만원 등이 포함되었다.[10][3]3. 2. 수사 및 재판
이 사건으로 검거된 인원은 모두 158명이었으며, 이 중 73명이 송치되었고 23명은 불구속되었다.[10] 중앙정보부는 암호 해독을 통해 북한이 이문규를 구출하려 파견한 공작선을 격침시키고 2명을 생포하였으며,[9] 이들도 통혁당 관련자로 사형을 선고받았다.김종태, 이문규, 김질락은 사형을 선고받았다.[7] 신영복은 1심과 2심에서 사형,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8] 유낙진은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으나 이후 20년형으로 감형되었다. 박성준은 자신의 처 한명숙을 포섭하는 등의 혐의로 체포되어 15년 형을 선고받았다.
당국은 무장 공작선 1척, 고무보트 1척, 무전기 7대, 기관단총 12정, 수류탄 7개, 무반동총 1정과 권총 7정 및 실탄 140발, 12.7mm 고사총 1정, 중기관총 1정, 레이다 1대와 라디오 수신기 6대, 미화 3만달러와 73만원 등을 압수하였다.[10]
4. 사건의 영향
이 사건으로 김종태를 비롯한 여러 명이 사형을 선고받았고,[7] 관련자 158명이 검거되었다.[10] 중앙정보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파견한 공작선을 격침시키고 관련자들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다량의 무기와 자금을 압수했다.
압수된 물품은 다음과 같다.[10]
4. 1. 박정희 정권의 독재 강화
이 사건으로 김종태 등 주범 4명에게 1969년 9월 23일까지 사형이 선고되었다.[4]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서클 “경제복지회”를 중심적으로 지도했던 전 한국육군사관학교 교관 신영복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사상 전향 후 1989년에 출소했다.[5] 이 사건의 영향으로 한국에서는 좌파 정당에 대한 시각이 엄격해졌고, 박정희 정권의 독재 강화(제4공화국 수립)와 맞물려 사회 보수화가 진행되었다. 또한, 통일혁명당은 대법원 판결로 “반국가단체”로 인정되었기에, 한국 내에서 통일혁명당을 재결성하려는 행위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단속되고 있다.4. 2. 관련자들의 삶
이 사건으로 김종태, 이문규, 김질락이 사형을 선고받았다.[7] 신영복은 1심과 2심에서 사형,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며,[8]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육군사관학교 교관으로 복무하다 구속되었다. 박성준은 자신의 처 한명숙을 포섭하는 등의 혐의로 체포되어 15년 형을 선고받았다. 유낙진은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으나 이후 20년 형으로 감형되었다.김종태가 사형 집행된 후, 김일성은 그에게 영웅 칭호를 수여하고 해주사범학교를 김종태사범학교로 개칭하였다. 신영복은 사상 전향을 조건으로 1988년 출소하였다.
4. 3. 남북 관계에 미친 영향
통일혁명당 사건은 김종태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의 지령과 자금을 받아 결성한 혁명 조직 때문에 발생했으며, 이는 남북 관계를 더욱 경색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김종태를 비롯한 주범들은 월북하여 조선로동당에 입당하고 지시를 받았으며, 이 사건으로 여러 명이 사형을 선고받았다.[7] 중앙정보부는 북한이 파견한 공작선을 격침시키고 관련자들을 체포했다.[9] 이 사건으로 158명이 검거되었고, 많은 무기와 자금이 압수되었다.[10]5. 사건 이후
본 사건 이후, KCIA(중앙정보부)는 한국 국내에서 통일혁명당 관계자의 활동을 확인하지 못했다. 그러나 북한은 대남공작의 일환으로 통일혁명당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행동하였다.
5. 1. 북한의 주장
조선로동당 통일전선부는 대남공작의 일환으로 통일혁명당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으며, 한국을 대상으로 하는 지하방송인 구국의 소리 방송의 명칭을 한때 "통일혁명당의 소리 방송"(1970년 6월~1985년 8월)으로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2000년대 이후로는 인터넷 상에서 "통일혁명당의 후신 조직"이라고 주장하는 반제민족민주전선의 웹페이지를 운영하고 있다.[3] 북한 정부는 본 사건에서 목숨을 잃은 김종태의 "공적"을 평가하여, 평양의 철도차량제작소에 그의 이름을 따서 "김종태 전기기관차연합기업소"라고 명명하였다.[3]5. 2. 한국 사회의 평가
통일혁명당은 대법원 판결로 반국가단체로 규정되었기 때문에, 한국 내에서 통일혁명당을 재건하려는 행위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단속 대상이 되고 있다.[3] 이 사건으로 한국에서는 좌파 정당에 대한 시각이 엄격해졌고, 박정희 정권의 독재 강화(제4공화국 수립)와 맞물려 사회 보수화가 진행되었다.[5] 진보 진영에서는 이 사건을 권위주의 정권의 용공 조작 사건으로 규정하고, 진실 규명과 명예 회복을 요구하고 있다.참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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