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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베리 대공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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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트베리 대공국은 1230년대 또는 1240년대에 블라디미르 대공 야로슬라프 2세가 트베리 도시를 분리하여 아들 알렉산더 네프스키에게 주면서 시작되었다. 1246년 야로슬라프 야로슬라비치가 초대 트베리 공이 되었고, 1485년 모스크바에 합병될 때까지 그의 후손들이 통치했다. 트베리는 몽골의 지배 기간 동안 블라디미르 대공위를 놓고 모스크바와 경쟁하며 성장했지만, 1327년 반란 실패와 모스크바의 부상으로 쇠퇴했다. 1485년 이반 3세에 의해 정복당하며 모스크바 대공국에 병합되었다.

2. 역사

2. 1. 기원

1230년대 또는 1240년대에 블라디미르 대공인 야로슬라프 브세볼로도비치는 트베리 도시를 이전에 속해 있던 페레야슬라프-잘레스키 공국에서 분리하여 아들인 알렉산더 "네프스키" 야로슬라비치에게 주었다.[3] 1246년, 야로슬라프의 또 다른 아들인 야로슬라프 야로슬라비치가 최초의 트베리 공이 되었고,[4] 1485년 폐지될 때까지 그의 후손들에 의해 통치되었다.

몽골의 키예프 루스 침략(1237~1241)과 그 후 약 25년간 지속된 몽골의 습격은 북동부 루스의 많은 도시와 마을을 황폐화시켰다. 하지만 트베리, 모스크바, 야로슬라블 주변 지역에서는 인구 감소가 덜 심각했는데, 이 지역들은 때때로 더욱 전쟁으로 황폐된 지역에서 온 난민들을 받아들였다. 특히 트베리와 모스크바는 블라디미르에서 이주해 온 많은 주민들을 받아들였고, 초기 몽골 황금 호드의 지배 기간 동안 인구 증가를 경험했다.

1264년 알렉산더 "네프스키" 야로슬라비치가 사망한 후, 그의 형제인 트베리의 야로슬라프 야로슬라비치와 안드레이 야로슬라비치는 블라디미르 대공이라는 칭호를 놓고 계승 다툼을 벌였다. 황금 호드의 초대 칸인 바투가 1249년과 1252년에 두 번 한 것처럼, 그의 형제인 베르케 칸은 이 분쟁을 해결하고, ''자를리그''(칙령)를 통해 트베리의 야로슬라프를 다음 블라디미르 대공으로 확정했다.

야로슬라프 통치 기간 중, 1271년 사망하기 전 언젠가 트베리 주교구가 설립되었다. 야로슬라프와 그의 아들인 스비아토슬라프(1280년대 전반에 사망)의 통치 기간 동안 공국에서 다른 중요한 사건이 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베리는 먼 북쪽에서 상인들이 강을 따라 조치드의 수도인 사라이로 운반하는 고급 상품에 있어서 상류 볼가 강에 유리한 위치를 가지고 있었다. 13세기 후반 변형 교회 () 건설과 같이 침략 이후 주요 건설 공사를 시작한 북동부 루스 도시 중 하나였다.

《러시아 연대기》(《라트피시》)에 따르면 트베리의 첫 등장은 1135년이다.[9] 12세기부터 13세기 초까지 트베리는 페레야슬라블 자레스키 공국에 속한 도시였다. 공국(분할 공국)으로서의 분리는 아마도 블라디미르-수즈달 대공국의 대공 야로슬라프 2세(Ярослав)가 킵차크 칸국 영토 내에서 사망(1246년)하고, 블라디미르 대공위를 계승한 스뱌토슬라프가 사망한 야로슬라프의 아들 야로슬라프 3세에게 공위를 부여한 것이 시작이라고 여겨진다. 트베리 공위에 오른 야로슬라프는 블라디미르 대공위를 둘러싼 형 알렉산드르 네프스키와 안드레이의 다툼에 개입하여 자신도 일시적으로 블라디미르 대공위를 얻었다. 야로슬라프 이후 그의 아들 스뱌토슬라프 야로슬라비치와 미하일 야로슬라비치에게 트베리 공위 및 공국이 계승되었다. 미하일 통치 초기, 트베리 공국군은 침입한 리투아니아군을 격파했다.

블라디미르 대공위를 둘러싼 코스트로마 공 안드레이 알렉산드로비치와 페레야슬라블 자레스키 공 드미트리 알렉산드로비치 사이에서 벌어진 블라디미르 대공국의 내전(1281—1293)에 드미트리 진영에 서서 참전했던 트베리 공 미하일은 1293년 같은 진영의 로스토프 공 드미트리의 딸 안나와 결혼했고,[10] 카신이 트베리 공국 영토에 편입되었다.

또한 1295년, 트베리 공국은 노브고로드 공국과 타타르 및 다른 세력에 대한 방위 협정을 체결했다.[11] 이것은 루스 여러 공국이 타타르(킵차크 칸국)에 저항하기 위해 맺은 최초의 협정이었다.

2. 2. 발전과 쇠퇴

1285년, 야로슬라프 트베르스키의 아들 미하일 트베르스키가 트베리 공작이 되었고, 1305년에는 블라디미르 대공이 되었다. 그러나 골든 호드의 웃벡 칸은 트베리가 강해지는 것을 경계하여 모스크바를 지원했다. 1317년, 웃벡 칸의 지원을 받은 모스크바의 유리 다닐로비치는 미하일을 상대로 군사 원정을 벌였으나, 미하일은 보르테네보 전투에서 승리했다. 이 전투에서 웃벡의 누이이자 유리의 아내인 콘차카가 포로로 잡혔다가 트베리에서 사망하자, 유리는 미하일에게 책임을 돌렸다. 결국 미하일은 1318년 골든 호드에서 처형되었다. 1326년에는 미하일의 아들 드미트리가, 1339년에는 또 다른 아들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와 그의 아들 표도르가 골든 호드에서 처형되었다.

1327년 트베리에서 반타타르 봉기(1327년 트베리 봉기)가 일어났으나 진압되었고, 트베리는 큰 피해를 입었다.[3] 이후 모스크바가 러시아의 주요 공국으로 성장했으며, 타타르와의 관계를 유지하며 주변 공국들을 흡수했다.[3] 러시아 정교회의 수장도 모스크바로 이동하면서 모스크바는 정신적 중심지가 되었다.[5]

14세기 중반, 트베리 공국의 일부는 분할령으로 할양되어 여러 공국 체제가 만들어졌다.[3] 카신 공국, 홀름 공국, 클린 공국, 미쿨린 공국, 텔랴테보 공국, 주브초프 공국 등이 그 예시이다.[3] 이들 공국 중 일부는 트베리와 전쟁을 벌일 정도로 독립적이었다.[3] 1340년대와 1350년대에는 카신과 미쿨린을 중심으로 트베리의 분할령들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결국 미쿨린의 미하일 2세 알렉산드로비치가 승리하여 트베리 공국을 재통합했다.

《러시아 연대기》에 따르면 트베리는 1135년에 처음 등장한다.[9] 12세기부터 13세기 초까지 트베리는 페레야슬라블 자레스키 공국에 속했다. 1246년 야로슬라프 2세가 사망하고, 스뱌토슬라프가 야로슬라프 3세에게 트베리 공위를 부여하면서 공국으로 분리된 것으로 여겨진다. 야로슬라프 3세는 블라디미르 대공위를 둘러싼 분쟁에 개입하여 일시적으로 대공위를 얻기도 했다. 이후 그의 아들 스뱌토슬라프와 미하일에게 트베리 공위가 계승되었다. 미하일 통치 초기에 트베리 공국군은 리투아니아군을 격파했다.

1293년, 트베리 공 미하일은 블라디미르 대공국의 내전에 참전했고, 드미트리 진영의 로스토프 공 드미트리의 딸 안나와 결혼하면서 카신이 트베리 공국에 편입되었다.[10] 1295년, 트베리 공국은 노브고로드 공국과 타타르 및 다른 세력에 대한 방위 협정을 체결했는데, 이는 루스 공국들이 타타르에 저항하기 위해 맺은 최초의 협정이었다.[11]

1345년, 트베리 공 콘스탄틴과 그의 조카 홀름 공 세보로드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여 콘스탄틴이 골든 호드에서 처형되었다. 콘스탄틴의 영지였던 드로고부시 공국은 그의 아들 세묘온에게 계승되었다. 당시 계승법에 따라 트베리 공위는 카신 공 바실리가 계승해야 했지만, 세보로드는 이에 불복하고 골든 호드에 호소했다. 1347년 골든 호드는 세보로드를 지지했고, 세보로드는 모스크바 공 세묘온과의 관계를 통해 후원을 확보했다. 그러나 1348년 트베리 주교 표도르의 중재로 바실리에게 공위를 양보했다.[14][15] 바실리는 카신을 아들들에게 주고, 모스크바 및 리투아니아와의 결혼 동맹을 통해 세력을 강화했다. 1351년 골든 호드는 바실리의 공위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대주교 알렉세이(러시아 건국 천년 기념비)


1356년, 세보로드가 골든 호드로부터 칙서를 얻으려다 체포되어 바실리에게 넘겨졌다. 1357년 블라디미르 대주교 알렉세이가 중재했지만, 세보로드는 리투아니아로 망명했다. 1362년 바실리는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의 미크린을 포위했다.

1364년, 흑사병으로 세보로드와 세묘온이 사망하고, 벨리 고로독을 둘러싸고 미크린 공 미하일, 예레메이, 트베리 공 바실리 사이에 갈등이 발생했다. 알렉세이가 중재하려 했으나, 미하일이 도시를 점령하고, 예레메이와 바실리가 미크린을 포위했다. 미하일은 리투아니아의 지원을 받아 트베리를 함락시켰다. 1368년 바실리가 사망하고 미하일이 트베리 공위에 오르면서 갈등은 끝났지만, 곧 모스크바 공국과의 전쟁(모스크바-리투아니아 전쟁 (1368년-1372년))이 시작되었다.

1368년과 1370년, 모스크바 공 드미트리는 트베리를 포위 공격했다. 1371년, 미하일은 골든 호드로부터 블라디미르 대공 지위를 양도받았으나, 드미트리는 이를 무시하고 다시 트베리를 공격했다. 리투아니아의 알기르다스가 모스크바를 공격했으나, 모스크바와 평화를 맺었다.

2. 3. 모스크바와의 경쟁

킵차크 칸국이 왕위 계승 전쟁으로 약화된 틈을 타, 트베리 대공국은 1368~1372년 리투아니아-모스크바 전쟁에서 리투아니아 대공국 편에 서서 모스크바 대공국에 맞섰다. 1371년, 미하일 2세블라디미르 대공으로 임명된 마지막 트베르 공이 되었으며, 그의 통치는 트베르가 모스크바와 경쟁하고 킵차크 칸국에 맞설 수 있었던 마지막 시기로 여겨진다. 류부츠크 조약으로 리투아니아가 모스크바와 평화를 맺자, 트베르는 마마이에게 충성을 돌렸다. 1375년, 마마이는 미하일 2세에게 다시 블라디미르 대공의 ''야르릐크''를 수여했다. 그러나 같은 해, 모스크바가 이끄는 원정대가 트베르를 포위하여 미하일 2세가 드미트리 돈스코이를 자신의 "형"이자 정당한 블라디미르 대공으로 인정하고 군사적 지원을 약속하는 조약을 맺게 하였다.



1380년 쿨리코보 전투에서 트베르 군대는 드미트리 돈스코이의 연합군에 합류하지 않았다. 토크타미시가 1381년 칼카 강 전투에서 마마이를 패배시키고, 1382년 모스크바 포위전에서 모스크바를 함락시키자, 트베르, 니즈니 노브고로드 등의 공들은 토크타미시에게 항복했다. 모스크바의 드미트리도 항복했으며, 1382년 이후 주조된 동전에는 "대공 드미트리 이바노비치"와 "술탄 토크타미시: 오래 살으시오"라는 문구가 새겨졌다. 모스크바는 쿨리코보 전투와 모스크바 함락 이후에도 트베르 등을 지휘할 수 없었다.

미하일
(D・플레하노프(ru), 1686년)


1304년 블라디미르 대공 안드레이가 사망한 후, 트베리 공 미하일은 모스크바 공유리와 블라디미르 대공 지위를 둘러싸고 다툼을 시작했다. 이 다툼에는 교회 세력과 킵차크 칸국도 개입했다.

알렉산드르
(B・초리코프(ru), 19세기)


1317년, 트베리 공국군은 볼테네보 전투((ru))에서 모스크바-킵차크 칸국 연합군을 물리쳤지만, 이듬해 미하일은 사라이에서 살해되었다. 미하일 사후, 트베리 공국의 영토는 네 아들에게 분할 상속되었다. 1326년, 미하일의 아들 알렉산드르는 블라디미르 대공 지위를 얻었다.

1327년, 트베리는 킵차크 칸국의 첼칸(ru) 지배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다.[12] 트베리군은 패배했고, 알렉산드르는 프스코프로 도망쳤다. 블라디미르 대공 지위는 수즈달 공 알렉산드르(ru)에게 넘어갔고, 노브고로드와 트베리는 모스크바의 손에 들어갔다. 트베리 공 지위는 콘스탄틴에게 주어졌다. 1337년 알렉산드르는 트베리로 돌아왔지만, 1339년 이반 칼리타의 모함으로 사라이에서 살해되었다.

이 기간에 알렉산드르의 아들 브세볼로드(ru)가 홀름 공국을, 미하일이 미클린 공국을[13] 성립했다. 이들 분할 공국의 공들은 트베리 공 지위를 둘러싼 계승 전쟁을 벌였다.

2. 4. 모스크바에 합병

1470년대에 트베리의 미하일 3세는 모스크바와 여러 조약을 체결해야 했는데, 이 조약들은 트베리에 불리했다.[3] 미하일 3세가 리투아니아와의 동맹을 통해 조약을 만회하려고 시도했을 때, 이반 3세의 군대는 1485년에 트베리를 정복했다.[3] 그 후 공국은 모스크바에 병합되었고, 트베리는 이반 3세의 아들인 젊은 이반에게 분할 공국으로 주어졌다.[7][3]

1425년부터 1533년까지 모스크바의 통치자들은 경제적, 군사적 우위를 점하고, 혼란스러운 수평적 계승 순서를 수직적 상속으로 바꾸었으며, 모든 수즈달의 분할 공국들을 재통합했다.[3] 또한, 리투아니아와의 전쟁 중에 랴잔, 노브고로드, 프스코프, 스몰렌스크를 모스크바 대공국에 병합했다.[3]

1425년 트베리 대공이 된 보리스(ru)는 리투아니아, 모스크바와 협조하여 트베리의 국력을 회복했으나, 뒤를 이은 미하일 3세는 폴란드 왕 카지미에시 4세와 동맹을 맺고 모스크바의 간섭에서 벗어나려 했다.[16] 그러나 1485년 모스크바 대공 이반 3세에 의해 트베리가 함락되었고,[16] 미하일 3세는 리투아니아로 망명했다. 이후 트베리는 이반 3세의 아들 이반 몰로도이에게 주어졌고, 이반의 사후에는 남작이 파견되어 통치하면서 독립성을 상실했다. 1492년까지 트베리 대공국의 영토는 모스크바 대공국의 세수 제도에 편입되었다.[16]

모스크바 대공국의 확장


마지막 트베리 대공 미하일의 화폐

3. 지리

트베리 공국은 동쪽의 카신에서 서쪽의 주브초프까지 뻗어 있었다. 남쪽에는 볼가강의 지류인 쇼샤 강 전체와, 노브고로드의 전초기지인 볼로콜람스크에서 발원하여 쇼샤 강으로 흘러드는 라마 강이 포함되었다.

독립 공국으로서 트베리 공국의 경계는 13세기부터 15세기까지 거의 변함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공국은 카스피해발트해를 잇는 볼가 무역로에 접해 있었으나, 무역로 자체는 트베리 공국 성립 시기에는 이미 쇠퇴하고 있었다. 여러 도시(고로드)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그중 카신, 미클린, 홀름, 드로그부지 등은 트베리 공국에 속한 분령 공국(카신 공국, 미클린 공국, 홀름 공국, 드로그부지 공국)의 수도였다.

공국의 북부는 노브고로드 공화국과 접하고 있었으며(노브고로드에서 본 최전방 도시는 톨조크), 서부에는 스몰렌스크 공국(그 분령 공국인 루제프 공국 영토를 15세기 일시적으로 병합하고 있었다), 그리고 남부와 동부에는 페레야슬라블 찰레스키 공국, 로스토프 공국, 모스크바 공국이 위치하고 있었다.

4. 분할 공국

5. 역대 공작

로고주스크 연대기(로고주스크 연대기/Рогожский летописецru)에는 트베리 공 알렉산드르가 1339년 킵차크 한국으로부터 대공(великий князь)의 칭호를 반환받았다는 기록이 있다.[8] 하지만 트베리 공이 대공 칭호를 사용한 것은 그보다 후대의 일이라는 설도 있다.[8]

14세기 말부터 15세기에 걸친 모스크바와 트베리의 조약에서는 알렉산드르는 대공으로 불리지만, 그의 계승자인 콘스탄틴과 바실리는 단순히 공(князь)으로 기록되어 있다.[8] 알렉산드르의 아들 미하일 이후로 대공이 된다.[8] 그렇지만 트베리의 오트로치 수도원(오트로치 수도원/Отроч монастырьru)에 남아 있는 자료에서는 1363년부터 1365년의 기록에서 바실리도 역시 대공으로 기록되어 있다.[8]

6. 관련 전쟁



1372년, 드로고부지 공 엘레메이가 사망하자 그의 영지는 아들에게 상속되었다. 1373년에는 카신 공위가 미하일의 아들인 바실리에게 양위되었다.

1374년 트베리와 모스크바는 다시 전쟁 상태에 돌입했다. 트베리 공 미하일은 칙서를 얻어 트르조크와 우글리치를 자신의 지배하에 두려고 획책하자, 모스크바 공 드미트리는 브랸스크 공국, 스몰렌스크 공국, 리투아니아 대공국 등 주변 국가들의 군대와 함께 트베리를 포위했다(ru). 미하일은 이에 굴복하여 자신이 모스크바의 “아우”의 입장에 있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1382년 카신 공 바실리가 죽자 카신 공국의 영토는 트베리 공국에 재흡수되었다. 미하일은 톡타미시로부터 트베리 대공으로 봉해지는 칙서를 얻었다. 1399년 미하일 사후, 트베리 대공위는 그의 아들인 이반에게 계승되었으나, 다른 형제들과의 영토 분쟁이 자주 발생했다. 또한, 이반의 통치 시대에 트베리는 여러 차례 기근을 겪었다. 1423년 이반이 사망하고, 뒤를 이은 아들 알렉산드르, 그리고 그의 아들 유리도 전염병에 걸려 연이어 사망했다.

|thumb|100px|마지막 트베리 대공 미하일의 화폐

1425년에 트베리 대공이 된 보리스(ru)는 리투아니아, 모스크바와 협조 노선을 취하여 트베리의 국력 회복에 성공했으나, 뒤를 이은 미하일은 초기의 협조 노선에서 벗어나 폴란드 왕 카지미에시 4세와 동맹을 맺고 모스크바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1485년, 모스크바 대공 이반 3세에 의해 트베리가 함락되었다.[16] 미하일은 리투아니아로 망명했고, 트베리는 이반 3세의 아들 이반 몰로도이에게 주어졌다. 이반의 사후에는 남작이 파견되어 통치했다. 이렇게 트베리의 독립성은 상실되었다. 1492년까지 트베리 대공국의 영토는 모스크바 대공국의 세수 제도에 편입되었다.

후대에 카시모프 칸국의 시메온 베크불라토비치가 1585년에 트베리 대공의 칭호를 사용한 적이 있다.

참조

[1] 서적 The Story of Russia Bloomsbury Publishing 2022
[2] 서적 An Atlas of Russian History: Eleven Centuries of Changing Borders https://books.google[...] Yale University Press 1970-01-01
[3] 서적 Тверское_княжество http://dic.academic.[...] Great Soviet Encyclopedia
[4] 웹사이트 Tver http://www.britannic[...] Encyclopædia Britannica 2015-04-19
[5] 서적 Russia: A Reference Guide from the Renaissance to the Present https://books.google[...] Infobase Publishing 2009
[6] 학술지 Tverian Political Thought in the Fifteenth Century http://www.jstor.org[...] EHESS 2024-03-17
[7] 서적 Succession to the Throne in Early Modern Russia: The Transfer of Power 1450–1725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21-03-18
[8] 서적 Клюг Э. Княжество Тверское (1247—1485). — Тверь, 1994. — С. 218—219.
[9] 서적 Милонов Н. П. Археологические раскопки в тверском кремле//Проблемы истории докапиталистического общества. 1935. 5. № 9-10. с. 145—155; Салимов А. М., Салимова М. А. Тверской кремль и история его северо-западной части//Михаил Тверской: личность, эпоха, наследие. Тверь, 1997. с. 149
[10] 서적 Анна (имя жен и дочерей русских князей и государей) Малый энциклопедический словарь Брокгауза и Ефрона
[11] 웹사이트 Тверское http://dic.academic.[...] Энциклопедия Брокгауза и Ефрона
[12] 서적 モスクワ大公国の成立と発展 世界歴史大系 ロシア史 1 -9世紀~17世紀-
[13] 서적 Тверские (великие и удельные князья) Русский биографический словарь
[14] 서적
[15] 서적
[16] 서적 Тверь Энциклопедический словарь Брокгауза и Ефрон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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