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로호 전투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파로호 전투는 1951년 5월, 한국 전쟁 중 대한민국 육군 제6사단이 중공군 제63군을 상대로 거둔 전투이다. 용문산 전투와 연계되어 '용문산-파로호 전투'로 불리기도 한다. 중공군의 5월 공세 이후 후퇴하는 병력을 추격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으며, 이승만 대통령은 화천댐을 '파로호'로 명명했다. 이 전투에서 한국군은 중공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고, 중공군의 춘계 공세를 좌절시키는 데 기여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화천군의 역사 - 금성 전투
금성 전투는 한국 전쟁 휴전 협상 막바지에 금성 지역에서 대한민국군과 중국인민지원군이 벌인 대규모 전투로,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 후 중국인민지원군의 공세로 한국군이 일부 영토를 상실하고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정전 협정에도 영향을 주었다. - 1951년 한국 전쟁의 전투와 작전 - 지평리 전투
지평리 전투는 한국 전쟁 중 미 제23연대 전투단이 중공군의 대규모 공격을 격퇴하고 미 제1기병사단의 지원으로 승리하여 UN군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전황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전투이다. - 1951년 한국 전쟁의 전투와 작전 - 율동 전투
율동 전투는 한국 전쟁 중 필리핀 제10대대 전투단이 율동 지역에서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중공군에 맞서 싸워 미 제3사단의 후퇴를 지원한 전투로, 필리핀군의 용맹함을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지고 한국과 필리핀 간의 우호 관계를 상징하는 사건이다.
| 파로호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 |
| 분쟁 정보 | |
| 분쟁 | 6.25 전쟁 |
| 날짜 | 1951년 5월 26일 ~ 5월 28일/5월 30일 |
| 장소 | 강원도 화천군 화천호 |
| 결과 | 대한민국 국군의 승리 |
| 결과 상세 | 중국인민지원군 제63군 궤멸 중공군 춘계 공세 사실상 중단 |
| 교전 세력 | |
| 교전국 1 | |
| 지휘관 | |
| 지휘관 1 | 장도영 준장 |
| 지휘관 2 | 푸충비 |
| 군대 정보 | |
| 군대 1 | 제6보병사단 |
| 군대 2 | 63군 |
| 병력 규모 | |
| 병력 1 | 20,000명 |
| 병력 2 | 100,000명 |
| 사상자 규모 | |
| 사상자 1 | 사망 698명 |
| 사상자 2 | 한국 측 자료: 사망 21,550명 중국 측 자료: 3,000명 (축소 주장) |
| 기타 정보 | |
| 관련 전투 | 온정리 운산 박천 청천강 군우리 장진호 흥남 1·4 후퇴 의정부 제1, 2차 원주 선더볼트 작전 수리산 모락산 금양장리 제2차 인천 지평리 횡성 제3차 원주 킬러 작전 리퍼 작전 매화산 용기 작전 토마호크 작전 러그드 작전 불굴 작전 춘계공세 설마리 율동 사창리 가평 현리 용문산 파로호 |
2. 명칭
이 전투는 용문산 전투와 연계되어 "용문산-파로호 전투"라고 불리기도 하며,[13] 용문산 전투의 예하 전투로 간주되기도 한다.[14] 육군 본부 보고서에는 "지암리·파로호 전투"로 기록되었으나,[1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네이버 지식백과 등에서는 "파로호 전투"로 표기하고 있다.
1951년 5월 20일, 유엔군은 제3차 반격작전 계획에 따라 미 제9군단에 화천 탈환 임무를 부여했다. 미 제9군단은 중공군의 5월 공세로 속사리까지 진출한 적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화천 점령을 목표로 설정했다.[16]
1951년 용문산 전투에서 패배한 중국 인민지원군 제63군은 화천을 향해 후퇴했고, 장도영 장군이 이끄는 대한민국 육군6사단은 중국군을 추격했다. 용문산 전투에서 한국군 제6사단은 중부 전선에 형성될 가능성이 있었던 중공군의 대규모 돌파구를 저지하여 전선의 분단을 막고 수도권에 미칠 위험성을 제거했다.[9] 특히 6사단 제2연대는 3일간 전면 방어 태세로 버티며 중공군에게 지속적인 타격을 가하여 주 저항선을 오인하게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3. 배경
5월 25일, 미 제9군단은 춘천 방면과 속사리 방면에서 후퇴하는 중공군이 화천 일대에 집결하고 있다는 항공관측 보고를 받았다. 미 제9군단장은 화천저수지 서쪽의 도로 교차점을 조기에 점령하여 적의 퇴로를 차단하고자 미 제24사단 제21연대, 미 제7사단 제17연대, 국군 제6사단 제19연대를 투입했다.[16]
1951년 용문산 전투에서 패배한 중국 인민지원군 제63군은 화천으로 후퇴했고, 장도영 장군이 이끄는 국군 6사단이 중국군을 추격했다. 용문산 전투에서 국군 6사단은 중부 전선에 형성될 뻔했던 중공군의 대규모 돌파구를 저지하여 전선이 분단되고 수도권이 위협받는 상황을 막았다. 특히 6사단 제2연대는 3일간 전면 방어 태세를 유지하며 중공군에게 지속적인 타격을 가해 주 저항선을 오인하게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4. 전투 과정

한국군 제6사단은 미군 제9군단의 화천 진격에 참가하여, 북한강 서쪽의 닭갈산-북배산-가덕산-지암리를 공격하게 되었다. 5월 25일 오전, 제6사단은 제2, 제7연대가 중공군 방어 거점인 닭갈산-북배산 고지군을 공격하는 동안 제19연대를 북배산 후방으로 우회시켜 퇴로를 차단하도록 명령했다.
이후 전투 과정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파로호 전투는 한국 전쟁 당시 한국군이 거둔 가장 큰 승리 중 하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 작전의 승리를 칭찬하기 위해 화천댐을 야만적인 외적을 대파시킨 호수라는 의미로 파로호라고 명명했다. 현재도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휘호한 "파로호" 기념비가 남아 있다.[9][10]
4. 1. 한국군 제6사단의 진격
5월 20일, 한국군 제6사단(2연대, 7연대, 19연대)은 양평에서 출발해 가평, 춘천을 거쳐 화천발전소에 이르는 약 60km를 진격하며 인민지원군을 몰아냈다. 이 과정에서 인민지원군은 큰 피해를 보았고, 화천호에 도달했을 때 퇴로가 차단됐다.[17][18]
한국군 제6사단은 미군 제9군단의 화천 진격 작전에 참여하여 북한강 서쪽의 계관산-북배산-가덕산-지암리를 공격하기로 결정되었다. 5월 25일, 제6사단은 제2연대와 제7연대가 중공군의 방어 거점인 계관산-북배산 고지대를 공격하는 동안 제19연대를 북배산 후방으로 우회시켜 퇴로를 차단하도록 명령했다.
4. 2. 미 제9군단의 지원과 중공군의 상황
미 제9군단은 항공 정찰을 통해 중공군 약 1만 명과 다수의 차량 및 야포가 긴 행렬을 이루며 화천댐(파로호) 남쪽을 지나 화천으로 향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에 미 제9군단은 제19연대에게 지암리를 서쪽에서 공격하도록 지시하고, 한국군 제6사단 주력 부대를 춘천에 집결시켜 한국군 제7사단과 함께 화천댐을 공격하게 했다.[17][18]
4. 3. 주요 전투 및 결과
5월 27일, 미군의 포격과 공습 지원 아래 한국군 제6사단 주력은 공격을 개시하여 중공군 제63군의 저항을 격퇴하고 구만리 발전소-병봉산을 연결하는 캔자스 라인으로 진출했다.[17] 한국군 제6사단은 도주하는 중공군을 계속 추격했고, 장도영이 이끈 제6사단은 중공군에 큰 타격을 입혀 2만 명 이상의 사망자와 2,617명의 포로가 발생했다.[18]
당시 상황에 대해 장도영 준장은 "후퇴하는 중공군을 추격하는 동안 길가에 웅크리고 있던 중공군 병사들을 쓰레기를 줍는 것처럼 트럭에 실었다. 우리 군 소대 규모 부대가 적 대대 규모 부대를 포로로 잡는 진풍경이 벌어졌다"고 증언했다.[17]
4. 4. 화천 점령 지연과 중공군 포위 실패
5월 28일, 한국군 제6사단은 화천댐 서쪽으로 진출하여 중공군 주력이 후퇴한 것을 확인했다.[17] 그러나 화천 점령 목표 달성이 크게 지연되면서, 중공군을 완전히 포위하는 데에는 실패했다.[18]
5. 결과 및 영향
파로호 전투는 한국 전쟁 중 한국군이 거둔 가장 큰 승리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이 전투에서 한국군 제6사단은 장도영 준장의 지휘 아래 중공군에게 2만 명이 넘는 전사자와 2,617명의 포로를 발생시키는 큰 피해를 입혔다.[9] 한국군은 중공군 병사의 시체를 댐 호수에 수장했기 때문에 호수의 물이 붉게 물들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상황에 대해 장도영 준장은 "후퇴하는 중공군을 추격하는 동안 길가에 웅크린 중공군 병사를 쓰레기를 줍듯이 트럭에 태웠는데, 아군 소대 규모의 부대가 적 대대 규모의 부대를 포로로 잡는 진풍경이 연출되었다"고 회고했다.[9]
이 승리로 중공군의 춘계 공세는 완전히 좌절되었으며, 한국 전쟁의 전황을 유리하게 이끄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다만, 목표였던 화천 점령이 지연되면서 중공군 주력을 완전히 포위하는 데는 실패했다.[9]
5. 1. 파로호 명명
1955년 11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은 화천호 근방에서 조선인민군 및 중국인민지원군 24,000여 명을 사살하고 전사자 시체를 화천호에 수장시킨 대승을 기념하기 위해 화천호를 "오랑캐를 무찌른 호수"라는 뜻의 파로호(破虜湖)로 명명하고 성대한 명명기념비 제막식을 거행하였다.[19][20][21][22] 이승만 대통령은 이 작전의 승리를 칭찬하기 위해 화천댐을 '파로호'라고 부르기로 했으며, 직접 휘호한 "파로호" 기념비가 현재도 남아있다.[9][10]6. 참전 부대
이 부분은 상위 문서의 다른 부분에서 자세히 다루어질 예정이므로, 여기서는 간략하게 참전 부대 목록만 제시한다.
6. 1. 유엔군
미 제9군단은 화천으로 진격하면서 화천댐(파로호) 남쪽을 지나 화천으로 향하고 있다는 항공 정찰 보고를 받았다.[9] 5월 27일, 미군의 포격과 공습 지원 아래 한국군 제6사단은 공격을 시작하여 구만리 발전소-병풍산을 잇는 캔자스 라인에 진출했다.[9]6. 2. 중공군
중국인민지원군 제63군은 5월 27일 미군의 포격과 공습 지원을 받은 한국군 제6사단의 공격에 저항했지만, 결국 구만리 발전소-병풍산을 잇는 캔자스 라인까지 후퇴했다.[9] 이 과정에서 장도영이 이끈 한국군 제6사단에 의해 2만 명이 넘는 전사자와 2,617명의 포로가 발생하는 큰 피해를 입었다.[10] 당시 상황에 대해 장도영 준장은 "후퇴하는 중공군을 추격하는 동안 길가에 웅크린 중공군 병사를 쓰레기를 줍듯이 트럭에 태웠는데, 아군 소대 규모의 부대가 적 대대 규모의 부대를 포로로 잡는 진풍경이 연출되었다"고 회고했다.[9] 한국군은 중국군 병사의 시체를 댐 호수에 수장하여 호수의 물이 붉게 물들었다고 전해진다. 한국군 제6사단은 5월 28일 화천댐 서쪽으로 진출하여 중공군 주력의 후퇴를 확인했지만, 화천 점령 지연으로 인해 완전히 포위하지는 못했다.[9]참조
[1]
웹사이트
용문산전투(龍門山戰鬪)
http://encykorea.aks[...]
[2]
웹사이트
그러나 중국 측은 파로호 전투 전사자를 우리측보다 10분의 1 규모인 3천 명이라고 축소한 것으로 알려졌다.
https://www.yna.co.k[...]
[3]
웹사이트
파로호전투(破虜湖戰鬪)
https://encykorea.ak[...]
[4]
웹사이트
파로호(破虜湖)
https://encykorea.ak[...]
[5]
웹사이트
"67년 전 중공군 수만 명 파로호에 수장…현대판 살수대첩"
https://www.yna.co.k[...]
2018-06-26
[6]
웹사이트
오랑캐무찌른歷史(역사)자랑 「破虜湖(파로호)」命名記念碑除幕式盛大(명명기념비제막식성대)
https://newslibrary.[...]
[7]
웹사이트
파로호
http://encykorea.aks[...]
Chosun Online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韩国民族百科全书)
2019-05-28
[8]
웹사이트
오랑캐무찌른歷史(역사)자랑 「破虜湖(파로호)」命名記念碑除幕式盛大(명명기념비제막식성대)
https://newslibrary.[...]
1955-11-20
[9]
웹사이트
파로호전투(破虜湖戰鬪)
http://encykorea.aks[...]
2024-01-13
[10]
웹사이트
오랑캐무찌른歷史(역사)자랑 「破虜湖(파로호)」命名記念碑除幕式盛大(명명기념비제막식성대)
https://newslibrary.[...]
1955-11-20
[11]
서적
『夹岩里-破虏湖战役』
2011
[12]
서적
2001
[13]
Youtube
https://www.youtube.[...]
[14]
뉴스
용문산 전투와 파로호
http://kor.theasian.[...]
아시아기자협회
2023-06-01
[15]
뉴스
"67년 전 중공군 수만 명 파로호에 수장…현대판 살수대첩"
https://www.yna.co.k[...]
연합뉴스
2018-06-28
[16]
웹인용
파로호전투 (破虜湖戰鬪)
https://encykorea.ak[...]
2024-04-18
[17]
서적
被遗忘的战争:美国在朝鲜 1950-1953
2003
[18]
서적
朝鲜战争
1996
[19]
뉴스
오랑캐무찌른歷史(역사)자랑 「破虜湖(파로호)」命名記念碑除幕式盛大(명명기념비제막식성대
https://newslibrary.[...]
[20]
뉴스
(사진) 파로호와 안보전시관
http://www.ohmynews.[...]
2007-01-22
[21]
서적
"오늘 우리는 이곳으로 떠난다"
경향신문사
2004-06-15
[22]
뉴스
“호국 영령 희생정신 기려 조국 수호”
http://www.kado.net/[...]
2009-05-30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