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드로 나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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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페드로 나바로는 15-16세기 스페인 출신의 군인이자 군사 기술자였다. 그는 용병으로 경력을 시작하여 이탈리아 전쟁에 참여했으며, 지뢰, 야전 요새, 부유 포대 등 다양한 군사 기술을 개발했다. 그는 곤살로 페르난데스 데 코르도바 휘하에서 활약하며 체리뇰라 전투와 가릴리아노 강 전투에서 승리에 기여했고, 북아프리카 원정에 참여하여 해적 소탕에도 기여했다. 이후 프랑스군에 복무하다가 포로로 잡히는 등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으며, 1528년 나폴리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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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드로 나바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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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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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460년 경 |
사망일 | 1528년 8월 28일 |
출생지 | 가르데? (나바라 왕국) |
사망지 | 나폴리, 나폴리 왕국, 스페인 |
별칭 | (알려진 바 없음) |
군사 경력 | |
충성 | (1500년–1512년) (1515년–1528년) |
군 종류 | 공병, 보병, 포병, 해군 |
최종 계급 | 장군 |
주요 참전 전투/전쟁 | 이탈리아 전쟁 |
2. 생애
나바로는 아마도 나바라 지방 가르데의 론칼 – 에르론카리 계곡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1485년 이전 후안 데 아라곤 추기경 휘하에서 군 경력을 시작했으며, 콘도티에로로서 이탈리아에서 바르바리 해적과 싸웠다. 1499년 곤살로 페르난데스 데 코르도바에게 고용되어 1500년 케팔로니아 점령과 포위전에 참여했다. 그는 지뢰를 발명했고, 그의 숙련된 지뢰 사용은 터키 요새의 벽을 무너뜨리는 데 기여했다.
곤살로 페르난데스 데 코르도바의 휘하에 남아 나폴리로 갔으며, 1502년에는 카노사 디 풀리아에서, 1503년에는 타란토에서 프랑스군에 맞서 방어했다. 1503년 4월 28일 체리뇰라 전투에서 야전 요새 건설을 감독하여 곤살로 페르난데스 데 코르도바가 루이 다르마냐크, 네무르 공작과의 전투에서 승리하도록 도왔고, 12월 29일 가릴리아노 강 전투에서 스페인군의 승리에 중요한 역할을 하여 올리베토 백작으로 봉해졌다.
1507년 스페인으로 돌아온 후 시스네로스 추기경의 북아프리카 원정에 참여했다. 나바로는 1508년 전투 중 자신의 설계로 만든 부유 포대를 사용하여 베레스 데 라 고메라 암초 정복 (1508)을 도왔고, 1509년 마잘키비르(메르스엘케비르)와 오란 정복 (1509)에 참전했다. 1510년에는 부지(베자이아), 알제, 튀니스, 틀렘센, 트리폴리를 정복하는 동안 직접 스페인군을 이끌었다.[1]
나폴리의 부왕인 라몬 데 카르도나의 휘하에 들어가 1511년 프랑스에 대한 새로운 전쟁 소식을 듣고 이탈리아로 돌아갔다. 그는 1512년 적의 대형을 붕괴시키기 위해 설계된 경포를 장착한 여러 경마차를 제작했다.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스페인 교황 군대는 패배했고, 그는 1512년 4월 11일 라벤나에서 가스통 드 푸아, 네무르 공작의 지휘를 받는 프랑스군에게 포로로 잡혔다. 아라곤의 페르디난드 2세는 그의 몸값을 지불하는 것을 거부했고, 결국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의 휘하에 들어갔다. 나바로는 밀라노에 대한 프랑스군의 작전(1515~1516)에 동행했고, 1515년 9월 13~14일 마리냐노 전투에서 프랑스 왕과 함께 구 스위스 연방에 맞서 싸웠다. 프랑스군에서 계속 복무하며 비코카 전투 (1522년 4월 27일)에서 싸웠고, 이듬해 초(1523년) 스페인군이 제노바를 점령했을 때 포로로 잡혔다. 마드리드 조약 (1526)(1526년 1월 14일) 이후 석방된 그는 프랑스군으로 돌아가 이탈리아에서 프랑스 원정에 복무하던 중 다시 포로로 잡혔다(1527). 1528년 8월 말 나폴리의 카스텔 누오보 감옥에서 약 68세의 나이로 사망했는데, 베개로 질식사했을 가능성이 있다.
2. 1. 어린 시절과 초기 경력
나바라의 롱칼 계곡에 있는 가르데에서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출생이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1485년 이전에 후안 데 아라곤 추기경을 위해 일하며 군인으로서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이탈리아에서는 용병대장(콘도티에로)이 되어 북아프리카 해적들과 싸웠다. 1499년에는 곤살로 페르난데스 데 코르도바에게 고용되었고, 1500년 케팔로니아 점령과 공성전에 참여했다. 그는 트루크의 성벽 파괴에 유용한 지뢰와 폭탄을 발명하여 터키 요새의 벽을 무너뜨리는 데 기여했다.2. 2. 올리베토 백작
그는 곤살로 페르난데스 데 코르도바 휘하에서 계속 근무했고 나폴리로 가, 프랑스의 공격으로부터 1502년 카노사, 1503년 타란토를 지켜냈다. 체리뇰라 전투에서 야전 요새 건설 감독을 맡았고, 그것이 4월 28일에 느무르 공작 루이 다르마냐크와의 전투에서 코르도바가 승리하게끔 하였다. 1503년 12월 29일 가릴리아노강 전투에서 스페인의 승리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그 공로로 올리베토 백작에 임명되었다.2. 3. 북아프리카 원정과 해적 소탕
1507년 스페인으로 돌아온 나바로는 국왕 페르난도 2세의 명에 따라 시스네로스 추기경과 함께 북아프리카 원정에 참여했다.[1] 당시 남미에서 금은을 실은 스페인 수송선들이 지중해에서 북아프리카 해적들에게 약탈당하는 일이 자주 발생하자, 페르난도 2세는 해적들의 거점인 북아프리카 정벌을 추진하였다.[1]나바로는 1508년에 자신이 고안한 부유 포대를 사용하여 페뇽데벨레스데라고메라 점령을 도왔으며, 1509년에는 메르스엘케비르, 오랑 점령전에도 참전하였다. 1510년과 1512년에는 알제, 튀니스, 틀렘센, 트리폴리 정복에 직접 스페인군을 이끌었다.[1] 그는 콘도티에로로서 이탈리아에서 바르바리 해적과 싸우기도 했다.
2. 4. 캉브레 동맹 전쟁과 포로 생활
1511년, 나폴리 부왕 라몬 데 카르도나에게 고용된 나바로는 프랑스와의 새로운 전쟁 소식을 듣고 이탈리아로 돌아갔다. 1512년, 그는 적군의 진형을 파괴하기 위해 고안한, 작은 대포가 달린 많은 수의 수레를 만들었다.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스페인-교황령 연합군은 1512년 4월 11일 라벤나 전투에서 가스통 드 푸아가 이끄는 프랑스군에게 패배했고, 나바로는 포로로 붙잡혔다.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가 그의 몸값 지불을 거부하자, 그는 결국 프랑수아 1세를 섬기기로 결심했다. 그는 프랑스군의 밀라노 원정(1515년–1516년)에 동행했다. 마리냐노 전투(1515년 9월 13일-14일)에서 프랑수아 1세와 함께 교황이 고용한 스위스군을 상대로 싸워 승리한 후 밀라노를 점령했고, 결국 원정은 프랑스의 승리로 끝났다.프랑스 측에서 복무를 계속한 나바로는 비코카 전투 (1522년 4월 27일)에 참전했고, 다음 해 초(1523년) 스페인군이 제노바를 점령할 때 포로로 잡혔다. 마드리드 조약(1526년 1월 14일) 이후 석방되어 프랑스로 돌아갔다.
2. 5. 코냑 동맹 전쟁과 죽음
코냑 동맹 전쟁 중 1528년 나폴리 공성전에 참전했다. 프랑스 진영에 전염병이 퍼지며[2] 큰 전투력 손실이 발생했고, 프랑스는 공성전을 포기했다. 아브레사로 후퇴하려 했으나 황제군의 습격을 받아 샤를 드 나바르와 함께 생포되었다.[3] 이후 누오보성에 투옥되어 사형당했다.[4]3. 군사 기술 혁신
페드로 나바로는 군사 기술 분야에서 여러 혁신적인 업적을 남겼다. 지뢰를 발명하고 활용하여 공성전에서 큰 효과를 보았으며, 야전 요새를 구축하여 전투에서 승리하는 데 기여했다. 또한 부유 포대를 개발하여 해상 전투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512년에는 적의 대형을 붕괴시키기 위해 설계된 경포를 장착한 경마차를 제작하기도 했다.
3. 1. 지뢰 개발
나바로는 지뢰를 발명했으며, 그의 숙련된 지뢰 사용은 케팔로니아 공방전에서 터키 요새의 벽을 무너뜨리는 데 기여했다.3. 2. 야전 요새 구축
그는 1503년 4월 28일 체리뇰라 전투에서 야전 요새 건설을 감독하여 곤살로 페르난데스 데 코르도바가 루이 다르마냐크, 네무르 공작과의 전투에서 승리하도록 도왔고, 1503년 12월 29일 가릴리아노 강 전투에서 스페인군의 승리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3. 3. 부유 포대 개발
나바로는 1508년 전투 중 자신이 설계한 부유 포대를 사용하여 베레스 데 라 고메라 암초 정복 (1508)을 도왔다.참조
[1]
서적
해적의 세계사
AK커뮤니케이션즈
[2]
웹사이트
La peste del 1528
http://www.solofrast[...]
[3]
서적
Storia d'Italia
[4]
서적
Cronaca di Antonio Grumello, pavese: dal MCCCCLXVII al MDXXIX sul testo a penna esistente nella ...
https://archive.org/[...]
F. Colombo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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