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팔로니아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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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케팔로니아섬은 그리스 이오니아 제도에 위치한 섬으로, 면적이 가장 넓다. 고대에는 4개의 도시 국가로 구성되었으며, 펠로폰네소스 전쟁과 헬레니즘 시대를 거치며 로마의 지배를 받았다. 중세 시대에는 비잔틴 제국의 테마로, 베네치아의 지배를 받다가 오스만 제국, 프랑스, 영국을 거쳐 1864년 그리스에 합병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이탈리아군이 독일군에 항복한 후 학살 사건이 발생했고, 1953년에는 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현재는 농업과 관광이 주요 경제 활동이며, 멜리사니 동굴, 미르토스 해변 등의 관광 명소와 와인 생산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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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팔로니아섬 - [지명]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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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일반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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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어 명칭 | Κεφαλληνίας |
유형 | 지역 단위 |
위치 | 이오니아 제도 |
소재지 | 아르고스톨리 |
면적 | 773 |
해발고도 | 1628 |
인구 | 36064 |
인구 조사 기준 | 2021년 |
우편 번호 | 280 xx |
지역 번호 | 267x0 |
차량 번호판 | ΚΕ |
웹사이트 | 케팔로니아 공식 웹사이트 |
지리 | |
군도 | 이오니아 제도 |
면적 | 781 |
최고봉 | 메가스 소로스 |
해발고도 (최고봉) | 1627 |
행정 구역 | |
국가 | 그리스 |
행정 구역 (주) | 이오니아 제도주 |
행정 구역 (현) | 케팔로니아 현 |
중심 도시 | 아르고스톨리 |
2. 역사
제2차 세계 대전 중이던 1943년, 케팔로니아섬에 주둔하던 이탈리아군이 독일 국방군에게 항복했을 때, 독일군이 이탈리아군 장병 117명을 학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루이스 드 베르니에르의 소설 《코렐리의 만돌린》에서 다뤄졌으며, 2001년에는 소설을 원작으로 한 동명의 영화가 제작되었다.[16]
2. 1. 고대
케팔로니아섬은 기원전 6세기부터 팔레(현대 리수리), 크라니이(현대 아르고스톨리), 사메(현대 사미), 프로노이의 4개 도시 국가(폴리스)에 의해 지배되었다.[4] 이 도시들은 각각 자체적인 주화를 만들고, 도시와 주변 지역에 사원과 요새를 건설했다.케팔로니아의 도시들은 그리스 세계의 여러 사건에 참여했다. 케팔로니아 출신 멜람푸스는 기원전 582년 델포이에서 열린 피티아 경기의 리라 및 노래 경연에서 우승했다.[5] 플라타이아 전투에서 팔레 출신 중장보병 200명이 페르시아에 맞서 싸웠고,[6] 펠로폰네소스 전쟁 동안 케팔로니아의 네 도시는 모두 아테네와 동맹을 맺었다.[7] 코린트 만 입구 근처에 위치한 이 섬은 아테네에 전략적으로 중요했다. 기원전 431년 코린트인들은 크라네를 공격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10년 후 아테네는 스파르타 탈영병들을 섬에 정착시켰다.[8] 케팔로니아 병사들은 기원전 415-413년에 아테네 장군 데모스테네스가 이끈 시칠리아 원정에 징집되기도 했다.[9]
2. 1. 1. 전설

기원담에 따르면 케팔로니아섬의 이름은 미케네의 암피트리온을 도와 타피아인 및 텔레보아인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신화 속 인물인 케팔루스에서 유래한다.[2] 그는 승리의 대가로 사메 섬을 받았고, 이 섬은 이후 케팔리니아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기원담은 케팔로니아섬과 아테네와의 문화적 연관성을 보여준다.
케팔로니아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우스의 고향인 호메로스식 이타카로 제시되기도 했는데, 이는 오늘날의 작은 이타카섬과는 다른 곳이다. 로버트 비틀스톤은 그의 저서 『오디세우스 언바운드』에서, 현재 케팔로니아의 반도인 팔리키가 늦은 청동기 시대에 별개의 섬이었으며, 호메로스가 이타카를 묘사할 때 바로 이 섬을 언급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이 가능성을 조사하기 위해 2007년 여름부터 3년 동안 프로젝트가 진행되었다.[3]
케팔로니아는 또한 여신 브리토마르티스가 '라프리아'라는 이름으로 주민들에게 신성한 존경을 받았던 장소로 언급된다.
2. 1. 2. 고대 및 고전 시대
기원전 6세기부터 이 섬은 팔레(현대 리수리), 크라니이(현대 아르고스톨리), 사메(현대 사미), 프로노이의 4개 도시 국가(폴리스)에 의해 지배되었다.[4] 이 네 도시는 모두 자체적인 주화를 주조했고, 도시 자체와 주변 지역에 기념비적인 사원과 요새를 건설했다. 고대 작가들은 고대 시대에 이 섬에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지만, 주목할 만한 언급이 있으며, 케팔로니아의 도시들은 더 넓은 그리스 세계의 발전과 사건에 관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케팔로니아 출신의 멜람푸스(Melampous)는 기원전 582년 델포이에서 열린 피티아 경기의 리라 및 노래 경연에서 우승했다.[5] 팔레 출신 호플리테스 200명은 플라타이아 전투에서 페르시아인에 맞서 다른 그리스인들과 함께 싸웠고,[6] 케팔로니아의 네 도시는 모두 펠로폰네소스 전쟁 동안 아테네와 동맹을 맺었다.[7] 이 섬은 코린트 만 입구 근처에 위치해 있어 아테네인들에게 전략적 가치가 있었다. 코린트인들은 기원전 431년 크라네를 공격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10년 후 아테네는 스파르타 탈영병들을 섬에 정착시켰다.[8] 마지막으로, 케팔로니아 병사들은 아테네 장군 데모스테네스에 의해 기원전 415-413년에 실패로 돌아간 시칠리아 원정의 일부로 징집되었다.[9]2. 1. 3. 헬레니즘 및 로마 시대
케팔로니아의 도시들은 펠로폰네소스 전쟁 종전 이후 스파르타가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아테네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기원전 4세기에 이어진 직접적인 과세와 같은 아테네의 영향은 사메에 새로운 계획 도시와 요새 건설을 자극했을 수 있으며, 사메는 점차 프로노이의 작은 폴리스를 지배한 것으로 보인다.[4]케팔로니아의 도시들은 다시 한번 병력과 선박을 제공하여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페르시아 제국 침공 및 정복과 같은 더 광범위한 그리스 군사 활동에 참여했다. 이후 수 세기 동안, 이 섬은 아이톨리아 동맹과 더욱 가까워졌다.[4] 그 결과, 기원전 218년에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5세에게 침략당했고, 기원전 189년에는 로마 공화국에 의해 침략당해, 오랜 포위 끝에 사메를 정복했다.[11] 그 이후 케팔로니아는 전략적 중요성을 잃어 사회적, 경제적으로 쇠퇴했다. 고고학적으로 로마 시대는 해안가의 호화로운 별장들이 주를 이루며, 옛 도시에서는 활동이 미미하게 나타난다.[4] 아테네와의 고대 유대 관계는 강하게 유지된 것으로 보이며,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통치 기간 동안 이 섬을 아테네에 기증했다.[12]
2. 2. 중세
후기 로마 제국 시대에 케팔로니아는 아카이아 속주의 일부였으며, 교회적으로는 니코폴리스 대교구 (에피루스 I의 교구)의 관할 하에 있었다.[13] 섬의 네 개의 고대 도시들은 후기 고대까지 살아남았으며, 사미가 섬의 수도였을 가능성이 높다.[13]
이탈리아 대부분을 상실하고 무슬림이 서지중해로 확장되면서, 이 섬은 이 지역의 비잔틴 제국에게 전략적으로 중요한 작전 기지가 되어 아드리아해로의 무슬림 침략을 막고 이탈리아 원정의 교두보 역할을 했다.[13] 이미 8세기부터 케팔로니아는 동명의 테마인 케팔레니아의 중심지였다.[13] 동시에 수도는 섬 내부의 더 잘 보호된 지역인 세인트 조지 성으로 옮겨졌다.[13] 마르다이트는 해병으로 복무하기 위해 케팔로니아로 이주했으며, 정치범들이 때때로 그곳으로 추방되었다.[13]
1071년 비잔틴 이탈리아를 상실하면서 케팔로니아의 중요성은 감소했고, 그 행정은 군사적 ''스트라테고스''에서 민간 재판관(''크리테스'')으로 넘어갔다.[13] 주요 도시는 1085년 이탈로-노르만족에 의해 포위되었고, 베네치아인은 1126년에 이 섬을 약탈했다.[13] 케팔로니아는 1185년 제3차 발칸 노르만 침공 동안 점령되었고, 마지막 백작 레오나르도 3세 토코가 패배하고 1479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섬이 정복될 때까지 시칠리아 왕국과 베네치아 종주권 하의 케팔로니아 및 자킨토스 팔라틴 백작령의 일부가 되었다.[1][13]
2. 3. 베네치아 통치
튀르크 통치는 1500년에 스페인-베네치아 연합군이 케팔로니아를 점령하면서 끝났다.[1] 이는 제2차 오스만-베네치아 전쟁에서 베네치아가 거둔 드문 성공이었다. 베네치아 정복 이후, 섬은 모돈과 코론 등 베네치아 요새 상실로 인해 발생한 민간인 및 군인 (스트라디오티) 난민들의 유입을 겪었으며, 베네치아가 통치하는 크레타 섬에서 온 많은 식민지 주민들도 유입되었다.[14]그 후 케팔로니아와 이타카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해상 국가에 속해 이오니아 제도의 운명을 따랐으며, 1684년 튀르크로부터 레프카다를 점령함으로써 완료되었다. 캄포포르미오 조약으로 베네치아 공화국이 해체되면서 이오니아 제도는 프랑스에 할당되었고, 베네치아에서 나포된 배에 탑승한 프랑스 원정군은 1797년 6월에 섬을 장악했다.
섬의 자유로운 상황으로 인해, 베네치아 총독 마르크안토니오 주스티니아니(1516–1571)는 히브리어 책을 인쇄하여 동부 지중해 전체로 수출했다. 1596년, 베네치아인들은 오늘날 케팔로니아의 주요 관광 명소 중 하나인 아소스 성을 건설했다.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이 섬은 자킨토스와 함께 세계에서 가장 큰 자킨토스 건포도 수출국 중 하나였으며, 단치히 조선소에서 선박을 주문할 정도로 큰 해운 함대를 소유했다. 섬의 도시와 마을들은 1820년대에 이오니아 해를 항해하는 해적들의 습격을 막기 위해 대부분 언덕 꼭대기에 건설되었다.
2. 4. 프랑스, 이오니아 국가 시대 및 영국 통치
1797년 베네치아는 프랑스에 정복되었고, 케팔로니아는 다른 이오니아 제도와 함께 프랑스 부서인 이타키에 속하게 되었다.그 다음 해인 1798년, 프랑스는 이오니아 제도를 러시아-터키 연합 함대에 넘겨주어야 했다. 1799년부터 1807년까지 케팔로니아는 명목상 오스만 제국의 주권 아래 있었지만 러시아 제국의 보호를 받는 칠도 공화국의 일부였다.
1807년 틸지트 조약에 따라 이오니아 제도는 프랑스로 반환되었고, 프랑스는 1809년까지 케팔로니아를 지배했다. 1809년, 그레이트 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은 프랑스와의 갈등의 일환으로 이오니아 제도에 봉쇄를 설정했고, 그 해 9월에는 자킨토스 성 위에 유니언 플래그를 게양했다. 케팔로니아와 이타키는 곧 항복했고, 영국은 임시 정부를 수립했다. 1815년 파리 조약은 이오니아 제도 연합국을 인정하고 영국 보호령이 되도록 규정했다. 찰스 필립 드 보세 대령은 1810년부터 1814년까지 임시 총독이 되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드라파노 다리를 포함한 많은 공공 사업을 수행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 다리는 나중에 아르고스톨리 만 위에 있는 드 보세 다리로 알려지게 되었다.
몇 년 후 그리스 민족주의 단체가 결성되기 시작했다. 초창기에는 오스만 제국에 맞선 독립 전쟁에서 그리스인을 지원하는 데 에너지를 쏟았지만, 곧 영국을 향하기 시작했다. 1848년에는 그리스와의 ''에노시스''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아르고스톨리와 리수리에서 영국 통치에 반대하는 반란이 일어나 법률이 다소 완화되고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었다. 그리스와의 통합이 이제 공공연한 목표가 되었고, 1849년 유럽 전역에 혁명이 일어나면서 영국에 대한 또 다른 반란이 일어났지만, 섬의 총독인 헨리 조지 워드 경은 21명을 교수형에 처하고, 여러 명을 총살하고, 수백 명을 채찍으로 처벌하여 진압했다.[15]
케팔로니아는 다른 섬들과 함께 1864년 영국이 지지한 덴마크의 윌리엄 왕자가 헬레네스의 조지 1세가 되면서 호의의 표시로 그리스로 양도되었다.
2. 5. 그리스와의 통합
1864년, 이오니아 제도의 다른 모든 섬들과 함께 케팔로니아는 그리스에 정식으로 합병되었다.2. 6. 제2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이 섬은 추축국에 의해 점령되었다. 1943년 말까지 점령군은 주로 이탈리아군으로, 제33 보병 사단 '아퀴'와 해군 인원을 합쳐 총 12,000명이었지만, 나치 독일에서도 약 2,000명의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 섬은 1943년 9월 연합국과의 이탈리아 휴전까지는 전투를 거의 겪지 않았다. 이탈리아군은 귀국을 희망했지만, 독일군은 이탈리아군의 탄약이 결국 자신들을 상대로 사용되는 것을 원치 않아 섬에는 혼란이 발생했다. 이탈리아군도 같은 이유로 무기를 넘겨주기를 꺼렸다. 독일 증원군이 섬으로 향하자 이탈리아군은 참호를 파고, 결국 항복할지 전투를 벌일지에 대한 병사들의 투표를 거쳐 새로운 독일의 침략에 맞서 싸웠다. 전투는 이탈리아군이 저항했던 아르고스톨리 포위전에서 절정에 달했다. 결국 독일군이 승리하여 섬을 완전히 장악했다.
아퀴 사단 학살에서 생존한 약 9천 명의 이탈리아 군인 중 약 5천 명이 독일군에 의해 보복 처형되었다.[16] 이 사건은 루이스 드 베르니에르의 소설 ''코렐리의 만돌린''(Captain Corelli's Mandolin)의 바탕이 되었으며, 후에 영화로 제작되었다. 1945년 중앙 유럽에서 전쟁이 끝났지만, 케팔로니아는 그리스 내전으로 인해 분쟁 상태로 남았다. 1949년에 그리스와 이 섬에 평화가 돌아왔다.
2. 7. 1953년 지진

케팔로니아섬은 유라시아 판이 에게해 판과 변환 단층 경계에서 만나는 주요 활성 단층 지대의 바로 남동쪽에 위치한다. 섬 자체는 지속적인 융기를 일으키는 일련의 활성 충상 단층의 영향을 받는다.
1953년 8월, 섬은 네 차례의 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었으며, 거의 모든 집이 파괴되었다. 가장 파괴적이었던 세 번째 지진은 1953년 8월 12일 09:24 UTC (현지 시간 11:24 시간대)에 발생했으며, 모멘트 규모는 6.8이었다. 진앙은 케팔로니아섬 남쪽 끝 바로 남쪽에 있었고, 섬 전체를 60cm 높이 들어 올렸다. 해안 주변 바위의 물 자국을 통해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1953년 이오니아 지진으로 인한 피해는 막대했으며, 북부 지역만이 가장 심한 진동을 피했고 그곳의 집들은 온전하게 남아있었다. 피해액은 수천만 달러, 즉 수십억 현대 드라크마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었지만, 실제 경제적 피해는 주민들이 섬을 떠나면서 발생했다. 인구 대다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섬을 떠나 다른 곳에서 새로운 삶을 찾았다.
2. 8. 현대
기원담은 케팔로니아섬의 이름을 설명하고, 아테네와의 문화적 연관성을 강화하며, 미케네의 암피트리온을 도와 타피아인 및 텔레보아인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신화 속 인물인 케팔루스와 섬을 연결한다.[2] 그는 그 보상으로 사메 섬을 받았고, 이후 이 섬은 케팔리니아로 알려지게 되었다.케팔로니아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우스의 고향인 호메로스식 이타카로 제안되기도 했는데, 오늘날의 작은 이타카섬이 아닌 현재 케팔로니아의 반도인 팔리키가 늦은 청동기 시대에 별개의 섬이었으며, 호메로스가 이타카를 묘사할 때 바로 이 섬을 언급했을 수 있다고 로버트 비틀스톤은 그의 저서 『오디세우스 언바운드』에서 제안했다. 이 가능성은 2007년 여름에 시작되어 3년 동안 지속된 프로젝트를 통해 조사되었다.[3]
케팔로니아는 또한 여신 브리토마르티스와 관련하여, 그녀가 '라프리아'라는 이름으로 주민들로부터 신성한 존경을 받았다는 장소로 언급된다.
튀르크 통치는 1500년까지 지속되었으며, 이 해에 케팔로니아는 스페인-베네치아 연합군에 의해 점령되었다.[1] 이는 제2차 오스만-베네치아 전쟁에서 베네치아의 드문 성공이었다. 베네치아 정복 이후, 이 섬은 모돈과 코론과 같은 베네치아 요새의 상실로 인해 발생한 민간인 및 군인 (스트라디오티) 난민들의 유입을 겪었으며, 베네치아가 통치하는 크레타 섬에서 온 많은 식민지 주민들도 유입되었다.[14]
그 이후로 케팔로니아와 이타카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해상 국가에 속해 이오니아 제도의 운명을 따랐으며, 1684년 튀르크로부터 레프카다를 점령함으로써 완료되었다. 캄포포르미오 조약은 베네치아 공화국을 해체하여 이오니아 제도를 프랑스에 할당했으며, 베네치아에서 나포된 배에 탑승한 프랑스 원정군은 1797년 6월에 섬을 장악했다.
섬의 자유로운 상황으로 인해, 베네치아 총독 마르크안토니오 주스티니아니(1516–1571)는 히브리어 책을 인쇄하여 동부 지중해 전체로 수출했다. 1596년, 베네치아인들은 오늘날 케팔로니아의 주요 관광 명소 중 하나인 아소스 성을 건설했다.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이 섬은 자킨토스와 함께 세계에서 가장 큰 자킨토스 건포도 수출국 중 하나였으며, 단치히 조선소에서 선박을 주문할 정도로 큰 해운 함대를 소유했다. 섬의 도시와 마을들은 1820년대에 이오니아 해를 항해하는 해적들의 습격을 막기 위해 대부분 언덕 꼭대기에 건설되었다.


베네치아는 1797년 프랑스에 정복되었고, 케팔로니아는 다른 이오니아 제도와 함께 프랑스 부서인 이타키에 속하게 되었다.
그 다음 해인 1798년, 프랑스는 이오니아 제도를 러시아-터키 연합 함대에 넘겨주어야 했다. 1799년부터 1807년까지 케팔로니아는 명목상 오스만 제국의 주권 아래 있었지만 러시아 제국의 보호를 받는 칠도 공화국의 일부였다.
1807년 틸지트 조약에 따라 이오니아 제도는 프랑스로 반환되었고, 프랑스는 1809년까지 케팔로니아를 지배했다. 1809년, 그레이트 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은 프랑스와의 갈등의 일환으로 이오니아 제도에 봉쇄를 설정했고, 그 해 9월에는 자킨토스 성 위에 유니언 플래그를 게양했다. 케팔로니아와 이타키는 곧 항복했고, 영국은 임시 정부를 수립했다. 1815년 파리 조약은 이오니아 제도 연합국을 인정하고 영국 보호령이 되도록 규정했다. 찰스 필립 드 보세 대령은 1810년부터 1814년까지 임시 총독이 되었으며, 이 기간 동안 드라파노 다리(나중에 아르고스톨리 만 위에 있는 드 보세 다리로 알려짐)를 포함한 많은 공공 사업을 수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몇 년 후 그리스 민족주의 단체가 결성되기 시작했다. 초창기에는 오스만 제국에 맞선 독립 전쟁에서 그리스인을 지원하는 데 에너지를 쏟았지만, 곧 영국을 향하기 시작했다. 1848년에는 그리스와의 ''에노시스''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아르고스톨리와 리수리에서 영국 통치에 반대하는 반란이 일어나 법률이 다소 완화되고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었다. 그리스와의 통합이 이제 공공연한 목표가 되었고, 1849년 유럽 전역에 혁명이 일어나면서 영국에 대한 또 다른 반란이 일어났지만, 섬의 총독인 헨리 조지 워드 경은 21명을 교수형에 처하고, 여러 명을 총살하고, 수백 명을 채찍으로 처벌하여 진압했다.[15]
케팔로니아는 1864년 영국이 지지한 덴마크의 윌리엄 왕자가 헬레네스의 조지 1세가 되면서 호의의 표시로 다른 섬들과 함께 그리스로 양도되었다. 1864년, 이오니아 제도의 다른 모든 섬들과 함께 케팔로니아는 그리스에 정식으로 합병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이 섬은 추축국에 의해 점령되었다. 1943년 말까지 점령군은 주로 이탈리아군으로, 제33 보병 사단 ''아퀴''와 해군 인원을 합쳐 총 12,000명이었지만, 나치 독일에서도 약 2,000명의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 섬은 1943년 9월 연합국과의 이탈리아 휴전까지는 전투를 거의 겪지 않았다. 이탈리아군은 귀국을 희망했지만, 독일군은 이탈리아군의 탄약이 결국 자신들을 상대로 사용되는 것을 원치 않아 섬에는 혼란이 발생했다. 이탈리아군도 같은 이유로 무기를 넘겨주기를 꺼렸다. 독일 증원군이 섬으로 향하자 이탈리아군은 참호를 파고, 결국 항복할지 전투를 벌일지에 대한 병사들의 투표를 거쳐 새로운 독일의 침략에 맞서 싸웠다. 전투는 이탈리아군이 저항했던 아르고스톨리 포위전에서 절정에 달했다. 결국 독일군이 승리하여 섬을 완전히 장악했다.
아퀴 사단 학살에서 생존한 약 9천 명의 이탈리아 군인 중 약 5천 명이 독일군에 의해 보복 처형되었다.[16] 루이스 드 베르니에르의 소설 ''코렐리의 만돌린''(Captain Corelli's Mandolin)은 후에 영화로 제작되었는데, 이 사건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1945년 중앙 유럽에서 전쟁이 끝났지만, 케팔로니아는 그리스 내전으로 인해 분쟁 상태로 남았다. 1949년에 그리스와 이 섬에 평화가 돌아왔다.
케팔로니아섬은 주요 활성 단층 지대의 바로 남동쪽에 위치하며, 이곳에서 유라시아 판이 에게해 판과 변환 단층 경계에서 만난다. 섬 자체는 일련의 활성 충상 단층의 영향을 받으며, 이는 지속적인 융기를 일으킨다.
1953년 8월에 일련의 네 차례의 지진이 섬을 강타하여 주요 피해를 입혔으며, 섬의 거의 모든 집이 파괴되었다. 가장 파괴적인 세 번째 지진은 1953년 8월 12일 09:24 UTC (현지 시간 11:24 시간대)에 발생했으며, 모멘트 규모 6.8의 규모였다. 그 진앙은 케팔로니아섬 남쪽 끝의 바로 남쪽에 있었고, 섬 전체를 60cm 더 높게 들어 올렸으며, 해안 주변의 바위에서 물 자국을 통해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1953년 이오니아 지진 재해는 막대한 피해를 입혔으며, 북부 지역만이 가장 심한 진동을 피했고 그곳의 집들은 온전하게 남아있었다. 피해는 수천만 달러, 즉 수십억 현대 드라크마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었지만, 실제 경제적 피해는 주민들이 섬을 떠났을 때 발생했다. 인구의 대다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섬을 떠나 다른 곳에서 새로운 삶을 찾았다.
2003년 11월 중순, 리히터 규모 5.3의 지진으로 아르고스톨리 및 인근 지역의 상업 시설, 주거 시설 및 기타 건물에 경미한 피해가 발생했다. 피해액은 약 €1,000,000였다.
2005년 9월 20일 아침, 이른 아침 지진이 섬 남서부를 강타했으며, 특히 릭수리 및 인근 마을에 피해를 입혔다. 지진은 리히터 규모 4.9였으며 진앙지는 섬에서 떨어진 바다에 위치해 있었다. 서비스 차량이 해당 지역을 관리했으며 피해는 보고되지 않았다. 2006년 1월 24일부터 26일까지 대규모 폭설이 섬 전체를 뒤덮어 광범위한 정전을 일으켰다. 섬은 최근 2007년 7월 18일 시작된 이례적인 폭염 동안 섬 남부에서 또 다른 산불로 피해를 입었고, 천천히 번져나갔다. 소방관들은 헬리콥터와 비행기를 동원하여 며칠 동안 화재와 싸웠으며, 이 광경은 섬의 해당 지역 주민들을 두렵게 했다.
2011년, 섬의 8개 이전 자치구는 독립성을 잃고 하나의 통합 자치구를 형성했다. 19세기에 섬의 수도 역할을 잃은 릭수리는 또한 500년 만에 자치구의 자리도 잃었다. 이오니아 제도 기술 교육 연구소는 릭수리와 아르고스톨리에 있는 한 학부를 폐쇄했다.
2014년 1월, 리히터 규모 5.9의 지진으로 최소 7명이 부상당했다. "경미한 부상과 재산 피해가 있다는 보고가 있다"고 외무부는 웹사이트에 밝혔다. "공항은 계속 운영되지만 항만 서비스에 약간의 차질이 있을 수 있다."
3. 지리
고대사 시대에 케팔로니아 섬에는 크라니이, 사미, 팔레, 프로노이의 네 도시가 있었고, 이들은 "테트라폴리스"라는 연맹을 형성했다.[19]
1896년에는 인구가 7만 명에 달했지만, 20세기 들어 점차 감소했다. 1953년 이오니아 지진으로 많은 사람들이 섬을 떠나 파트라, 아테네,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등으로 이주하거나 이민을 갔다. 같은 시기에 에피루스와 트라케 등 그리스의 빈곤한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섬으로 이주해 오기도 했다. 이후 인구는 35,000명에서 42,000명 사이를 오갔으며, 2011년 인구 조사에서는 35,801명으로 나타났다.[21]
케팔로니아 원주민의 성씨는 대부분 알렉사토스(Αλεξάτος) 가족과 같이 "-atos"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섬의 거의 모든 정착지는 메탁사타, 차브리아타, 프랑가타, 루르다타, 파바타, 델라포르타타 등과 같이 "-ata"로 끝나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주요 섬인 케팔로니아는 면적이 773km2이며, 인구 밀도는 55/km2이다. 아르고스톨리에는 섬 인구의 3분의 1이 거주하고 있으며, 릭수리는 두 번째로 큰 정착지이다. 이 두 마을을 합하면 케팔로니아 현 인구의 거의 3분의 2를 차지한다. 페탈라스 섬과 아스테리스 섬은 주요 섬에 속하지만,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이다.
케팔로니아는 지진대의 중심부에 위치하여 매년 수십 건의 작고 기록되지 않은 지진이 발생한다. 1953년에는 대규모 지진으로 섬의 거의 모든 정착지가 파괴되었고, 북부의 피스카르도만이 유일하게 피해를 입지 않았다.
섬의 주요 자연 지형으로는 멜리사니 호수, 드로가라티 동굴, 아르고스톨리의 쿠타보스 석호 등이 있다.
임업은 섬에서 드물지만, 목재 생산량은 이오니아 제도에서 가장 높으며, 펠로폰네소스의 엘리아보다는 낮다. 산불은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에 자주 발생했으며, 여전히 주민들에게 큰 위협이 되고 있다.
섬의 주요 곶으로는 아기오스 게오르기오스 곶, 쿠노페트라 곶, 아테라스 곶(섬의 북서쪽 모서리)이 있다. 아기오스 게오르기오스 곶의 대략적인 좌표는 38.1667, 20.43333 이다.
케팔로니아섬은 그리스 공화국 서부, 행정 구역상 이오니아 제도 지방 남부에 위치하며, 이오니아 제도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가진 섬이다. 중심지 아르고스톨리는 코르푸에서 남남동쪽으로 약 170km, 레프카다에서 남남서쪽으로 약 75km, 파트라에서 서쪽으로 약 110km, 자킨토스에서 북서쪽으로 약 57km 거리에 있다.
섬은 산악 지형이 많으며, 평지는 전체의 15%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연도 | 인구 |
---|---|
1879 | 68,321[22] |
1896 | 70,077[23] |
1920 | 55,030[24] |
1940 | 58,437[25] |
1961 | 39,793[26] |
1981 | 41,319[27] |
2001 | 34,544[28] |
2011 | 35,801[21] |
3. 1. 산
케팔로니아섬에서 가장 높은 산은 1628m인 아이노스 산이며, 서북쪽에는 리수리가 있는 팔리키 산맥이 있고, 게라니아 산과 아기아 디나티 산을 포함한 다른 산들도 있다. 노르만 전나무로 덮여 있는 아이노스 산 정상은 자연 공원이다.아이노스 산맥의 대부분은 국립공원[29]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희귀종인 그리스 가문비나무(Abies cephalonica)와 흑송(Pinus nigra)으로 덮여 있다.[30] --
3. 2. 기후
케팔로니아섬은 덥고 햇볕이 잘 드는 여름과 온화하고 비가 많이 오는 겨울을 가진다. 쾨펜 기후 구분에 따르면, 덥고 건조한 여름의 지중해성 기후(''Csa'')를 보인다. 겨울에는 섬 산봉우리에 가끔 눈이 내릴 수 있다. 겨울철 강수량은 최대 156mm에 달해 섬의 습도가 높다. 케팔로니아의 겨울 기온은 낮에는 평균 14°C~15°C, 밤에는 8°C~9°C이다. 여름철에는 강수량이 거의 없거나 전혀 없다. 기온은 낮에는 30°C에 가깝고 밤에는 21°C 정도이다.[60]1981년부터 2010년까지 아르고스톨리의 기후는 다음과 같다.[60]
월 | 1월 | 2월 | 3월 | 4월 | 5월 | 6월 | 7월 | 8월 | 9월 | 10월 | 11월 | 12월 | 연평균 |
---|---|---|---|---|---|---|---|---|---|---|---|---|---|
평균 최고 기온 (℃) | 14.3°C | 14.1°C | 15.7°C | 18.5°C | 22.9°C | 27°C | 29.5°C | 29.9°C | 26.9°C | 23.5°C | 19°C | 15.5°C | 21.5°C |
평균 기온 (℃) | 11.3°C | 11.1°C | 12.3°C | 14.9°C | 19.7°C | 22.6°C | 25.1°C | 25.7°C | 23°C | 19.9°C | 15.9°C | 12.6°C | 17.8°C |
평균 최저 기온 (℃) | 8.3°C | 8°C | 9°C | 11.2°C | 14.5°C | 18.2°C | 20.6°C | 21.6°C | 19.1°C | 16.3°C | 12.8°C | 9.7°C | 14.2°C |
강수량 (mm) | 93.1mm | 100mm | 66.6mm | 49.7mm | 20.4mm | 10.5mm | 1.3mm | 5.6mm | 31.3mm | 94.7mm | 155.9mm | 150mm | |
비 오는 날 (≥ 1mm) | 9 | 9 | 9 | 5 | 3 | 1 | 0 | 1 | 3 | 7 | 11 | 12 |
3. 3. 동식물
섬은 풍부한 생물 다양성을 자랑하며, 상당수의 고유종과 희귀종이 서식한다. 일부 지역은 유럽 연합의 나투라 2000 네트워크에 등재되었다. 아이노스 산의 대부분은 국립공원[29]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희귀종인 그리스 가문비나무(Abies cephalonica)와 흑송(Pinus nigra)으로 덮여 있다.[30]케팔로니아섬은 멸종 위기에 처한 붉은바다거북 개체군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이 거북은 섬 남쪽 해안을 따라 많은 해변에서 서식한다. 거북은 아르고스톨리 항구, 쿠타보스 석호에서도 볼 수 있으며, 드 보세 다리를 걸을 때도 볼 수 있다. 멸종 위기에 처한 지중해몽크바다표범('Monachus monachus')의 작은 개체군도 섬 해안, 특히 지형 때문에 사람이 접근할 수 없는 해안 지역에 서식한다. 해안의 동굴은 바다표범이 새끼를 낳고 생애 첫 달 동안 젖을 먹이기에 이상적인 장소를 제공한다. 케팔로니아섬에서 가장 유명한 번식지는 피스카르도 근처 북동부 해안에 위치한 포키 해변의 동굴이다.
유럽담비 또한 섬에 서식한다. 200종 이상의 새가 섬에서 관찰되었다.[31]
4. 행정 구역
케팔로니아는 그리스 이오니아 제도 지역에 속하는 지방 자치 단체 중 하나이다. 2019년부터 아르고스톨리, 릭수리, 사미의 3개 지방 자치체로 구성되어 있다.[44] 2011년 칼리크라티스 계획에 따른 정부 개혁으로 케팔로니아 현의 일부에서 케팔로니아 지방 자치 단체가 만들어졌으며,[45] 섬에는 8개의 이전 지방 자치체를 통합한 단일 지방 자치체가 존재했다. 행정 중심지는 섬의 주요 도시인 아르고스톨리이다.
- 아르고스톨리 지방 자치체는 아르고스톨리, 엘레이오스-프로니, 레이바토, 오말라 지방 자치구로 구성된다.
- 사미 지방 자치체는 에리소스, 필라로스, 사미 지방 자치구로 구성된다.
- 릭수리 지방 자치체는 이전 지방 자치체인 팔리키와 같다.
케팔로니아 지방 자치 단체의 면적은 786.575km2이다.[46] 케팔로니아 지방 자치 단체에는 에키나데스 제도에 속하는 많은 무인도도 포함되며, 이 섬들은 필라로스 지방 자치구에서 관리한다. 주요 섬들은 다음과 같다.
1,000명 이상의 도시 및 집락은 다음과 같다(2001년 인구 조사 기준).
- 아르고스톨리 (아르고스톨리 지구) - 9,037명
- 릭수리 (팔리키 지구) - 3,610명
- 사미 (사미 지구) - 1,223명
5. 경제
와인과 건포도는 20세기까지 케팔로니아섬의 주요 수출품이었으나, 오늘날에는 양식과 탄산 칼슘이 가장 중요하다.
5. 1. 농업
주요 농업은 가축 개량 및 올리브 재배이며, 나머지는 곡물과 채소로 구성되어 있다. 대부분의 채소 생산은 섬 면적의 15% 미만을 차지하는 평원에서 이루어지며, 대부분이 험준하고 산악 지형이라 염소 사육에 적합하다. 섬 토지의 1/4 미만이 경작지이다.[34]1970년대까지 대부분의 케팔로니아인들은 농촌 지역에 거주했지만, 오늘날에는 인구의 2/3가 도시 지역에 거주하며, 나머지 1/3은 농지에 인접한 농촌 마을에 거주한다.[34]
이 섬은 오랜 와인 제조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로볼라 포도로 만든 드라이, 흰색 레몬 향의 와인의 고향이다.[34] 케팔로니아 경제의 주요 구성 요소는 올리브 오일 생산이다. 18세기까지 이 섬에서 생산된 올리브 오일의 양은 주민들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정도였다. 그러나 펠로폰네소스와 크레타를 잃은 후, 특히 베네치아 정복자들이 올리브 농장을 조성하라는 압력으로 인해 생산량이 증가하여 베네치아로의 첫 수출이 시작되었다. 1953년 이오니아 지진 이전에는 섬에 200개의 압착기가 가동되었지만, 오늘날에는 13개만 남아있다. 케팔로니아에는 100만 그루가 넘는 올리브 나무가 있으며, 이는 섬 면적의 거의 55%를 차지한다. 올리브 오일은 섬의 지역 농업 경제에 매우 중요하다. "코로네이키"와 "테이아코"는 섬에서 재배되는 두 가지 주요 품종이며, 그 뒤를 이어 소수의 "노피아"와 "마톨리아"가 재배된다. 케팔로니아 올리브 오일은 녹색을 띠고, 풍부하고 기름진 촉감과 낮은 산도를 가지고 있다.[34]
5. 2. 관광
케팔로니아섬으로의 관광은 19세기 초에 시작되었다. 그리스 왕족은 20세기 초 여름에 그들의 자녀들을 릭수리로 보냈지만, 1980년대까지 대부분의 관광객들에게 이 섬은 발견되지 않았다. 케팔로니아섬은 이탈리아와 가깝기 때문에 많은 이탈리아인들에게 인기 있는 휴가지이다.피스카르도와 아소스의 어촌, 멜리사니 지하 호수, 드로가라티 동굴, 미르토스 해변을 포함한 두 개의 문화적 명소와 기타 자연 명소들이 케팔로니아섬을 대중화하는 데 기여했다. 섬에서 촬영된 영화 ''코렐리의 만돌린(2001)''은 케팔로니아섬을 더 널리 알렸다.[59] 이 영화는 주로 아르고스톨리, 사미, 안티사모스 해변에서 촬영되었다. 관광객의 60% 이상이 영국에서 온다.
2022년에는 동굴, 싱크홀, 지하 하천 등 카르스트 지형의 보고로서 이웃한 이타키 섬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 지질 공원에 등록되었다.[59]
6. 문화
케팔로니아섬은 종교, 음악, 문학, 영화 등 다양한 문화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
- '''박물관'''
이름 | 위치 | 설명 |
---|---|---|
코르기알레네이오스 박물관[1] | 아르고스톨리 | 코르기알레네이오스 도서관 소속 |
코스메타토스 재단 | 아르고스톨리 | |
아르고스톨리 고고학 박물관 | 아르고스톨리 | |
이아코바티오스 도서관 (및 박물관) | 리크수리 | |
피스카르도 박물관 | 피스카르도 | |
케팔로니아 자연사 박물관 | ||
사미 해양 박물관 | 사미 |
6. 1. 종교
1222년에 프랑크 십자군은 케팔로니아-자킨토스 교구(이탈리아어 큐리아에서 체팔로니아-잔테)를 설립했으며, 이는 그들의 통치와 심지어 튀르크의 지배에서도 살아남았다. 1919년에는 주교좌가 폐지되었지만 즉시 케팔로니아의 명목 교구로 전환되었다(이탈리아어 체팔로니아). 영토와 명칭은 코르푸-자킨토스-케팔로니아 대교구에 병합되었다. 1921년에는 이 교구 역시 폐지되었으며, 주교가 임명된 적은 없었다.[1]섬 전역에는 두 개의 큰 수도원이 있다. 첫 번째는 남동쪽의 마르코풀로에 있는 하기아 파나기아 수도원이고, 다른 하나는 아르고스톨리와 미차타 사이의 길, 산으로 둘러싸인 작은 평원에 있다. 이 두 번째 수도원은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정렬된 약 200그루의 나무가 늘어선 길과 중앙에 원이 있으며, 이 섬의 수호성인인 케팔로니아의 성 게라시모스 수도원이다. 그의 유물은 수도원의 옛 교회에서 볼 수 있으며 존경받고 있다. "시시아" 수도원은 아마도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에 의해 세워졌으며, 1953년에 파괴되었지만 폐허는 여전히 남아 있다. 섬의 많은 부분이 지진으로 파괴되었지만, 르네상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몇몇을 포함하여 섬 전역의 많은 주목할 만한 교회들이 살아남았다. 교회의 장식은 베네치아 매너리즘의 영향을 받았다.[1]
6. 2. 음악
이오니아 제도는 이오니아 악파라고 불리는 음악적 전통을 가지고 있다.[1] 리크수리에는 1836년부터 활동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있고,[1] 아르고스톨리에는 로코스 베르고티스 음악원이 있다.[1]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피아니스트 도라 비한(Dora Wihan, 본명 바이스)과의 불륜을 위해 여러 번 리크수리를 방문했다.[1]이오니아 제도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지 않고 베네치아와 관계를 맺으면서 독특한 문화를 발전시켰으며, 음악적으로는 이탈리아의 영향과 서양 화성을 차용했다.[1] 이는 그리스인들 사이에서 독특한 음악 스타일로 발전했는데, 라틴/스페인/이탈리아 칸타르(노래하다)와 매우 유사한 칸타다(세레나데)였다.[1] 칸타다는 이오니아 음악의 한 예로, 여전히 매우 인기가 있으며 오늘날에도 들을 수 있다.[1]
6. 3. 문학 및 영화
소설가 니코스 카바디아스(1910–1975)와 스위스 출신 Georges Haldas|조르주 알다de(1917–2010)는 섬에서 삶의 일부를 보냈다. 안드레아스 라스카라토스는 풍자 시인이었으며 리수리의 사회에 대해 글을 썼다. 바이런 경은 리바토에서 "전주곡"과 "돈 주앙"의 일부를 썼다.그리스 연구원 리비에리스 리베라토스는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의 섬 배경이 케팔로니아였다는 이론을 제안했다.[37]
케팔로니아가 대중문화에 가장 잘 알려진 모습은 영국 작가 루이스 데 베르니에르의 소설 ''코렐리의 만돌린''에 등장하는 것이다. 이 책은 아르고스톨리 외곽에 있는 파르사 마을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책의 주제를 이루는 러브 스토리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아퀴 사단 학살[38] 전후를 배경으로 한다. 2001년에는 영화 각색이 개봉되었다. 촬영 기간 동안 섬의 복잡한 역사적 세부 사항, 특히 섬의 반파시즘 저항에 관해 제작진, 지방 당국뿐만 아니라 시민 단체들 사이에서 활발한 논쟁이 벌어졌다. 그 결과, 영화에서 정치적 언급은 생략되었고, 섬의 역사에 대한 복잡한 논쟁에 들어가지 않고 책의 낭만적인 핵심이 보존되었다. 2005년, 리카르도 밀라니는 엔니오 모리코네가 음악을 맡은 학살에 관한 TV 영화 ''케팔로니아''를 제작했다.
알렉시오스와 카산드라(어쌔신 크리드 오디세이의 주요 등장인물)의 고향은 케팔로니아(게임에서는 ''케팔로니아''로 표기)이다.[55]
제2차 세계 대전 중 1943년, 섬에 주둔하던 이탈리아군이 항복했을 때, 독일 국방군에 의해 장병 117명이 학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후에 루이스 드 베르니에르의 1994년 소설 ''코렐리의 만돌린''으로 묘사되었고,[56] 2001년에는 동명의 영화의 무대가 되었다.
7. 교통
19세기 영국인들이 섬에 대규모 도로를 건설했다. 20세기에는 아스팔트 도로가 건설되었고, 1995년 이후 마을과 해변을 연결하는 거의 모든 도로가 아스팔트로 포장되었다. 2000년경부터는 리수리 우회도로가 건설되었고, 아르고스톨리 남쪽에는 4차선 도로가 건설되었다.
주요 도로는 다음과 같다.
- 그리스 국도 50번 (아르고스톨리-사미 도로)
- 아르고스톨리-포로스 도로
- 아르고스톨리-피스카르도 도로 (리수리 연결)
- 포로스와 사미를 연결하는 도로

아르고스톨리와 리수리를 오가는 페리는 성수기에는 매 시간 정각과 30분마다 운행한다. 케팔로니아의 외곽 지역을 운행하는 버스 노선은 몇 개 있지만, 하루에 두 번만 운행하는 경우가 많다. KTEL 버스 협동조합은 리수리, 포로스, 아르고스톨리에서 본토로 가는 버스 서비스를 제공한다.
7. 1. 항구
케팔로니아현에는 5개의 항구와 항만이 있다. 섬에는 4개의 주요 항구가 있는데, 사미는 파트라와 이타키 섬으로 연결되는 주요 항구이다. 남쪽에 있는 포로스는 킬리니 항구로 가는 페리 노선이 있으며, 서쪽에 있는 아르고스톨리는 가장 큰 항구로 현지 보트와 자킨토스행 페리, 그리고 리수리로 정기적으로 운항하는 페리가 있다. 북쪽에 있는 피스카르도는 레프카다 및 이타키와 연결된다. 아르고스톨리에는 약 100척의 소형 보트가 정박할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며, 항구는 만을 따라 1km 뻗어있다. 리수리는 아르고스톨리에서 만 건너 4km 떨어진 리수리 반도에 위치해 있다. 섬의 다른 지역으로 연결되는 도로가 있지만, 리수리에서 아르고스톨리까지 차로 이동하려면 30km를 우회해야 한다.7. 2. 공항
케팔로니아섬 국제공항은 케팔로니아섬에 있는 유일한 공항으로, 안나 폴라투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으며(IATA: '''EFL''', ICAO: '''LGKF''') 활주로는 약 2.4km 길이이다. 아르고스톨리에서 남쪽으로 약 10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43] 거의 모든 정기 항공편은 올림픽 항공 노선으로, 주로 아테네를 오가며 운항하지만, 케팔로니아, 자킨토스 섬, 레프카스 섬를 경유하는 이오니아 제도 호퍼 서비스가 주 3회 운행된다.[43] 여름에는 유럽 전역에서 오는 다수의 전세 항공편을 처리한다.2015년 12월, 케팔로니아 공항 및 그리스의 다른 13개 지역 공항의 민영화가 프라포트 AG/코펠루조스 그룹 합작 회사와 국영 민영화 기금 간의 계약 체결로 마무리되었다. 그리스 민영화 기관 HRADF의 수장인 스테르기오스 피치오를라스는 로이터 통신에 "오늘 계약을 체결했다"고 말했다. 이 계약에 따라 합작 회사는 2016년 가을부터 40년 동안 14개 공항(케팔로니아 국제공항 포함)을 운영하게 된다.
8. 교육
- 이오니아 대학교 아르고스톨리 캠퍼스에는 식품과학기술학과[39] 및 디지털 미디어 및 커뮤니케이션학과[40]가 있다.
- 이오니아 대학교 릭수리 캠퍼스에는 국악학과[41]가 있다.
- 아르고스톨리에는 국립 상선 사관학교가 있다.
- 아르고스톨리에는 케팔로니아 음악학교인 로코스 베르고티스 음악원이 있다.
9. 스포츠
케팔로니아-이타카 축구 클럽 협회에는 다음과 같은 축구 클럽들이 있다.
이름 |
---|
아이노스 케팔로니아 |
아노기 FC |
아르고스톨리 AU |
아스테라스 릭수리 |
아스테라스 Z |
딜리나타 AU |
에프게로스 파라클라데스 아르고스톨리 |
이코시미아스 AU |
케팔리니코스 |
케팔로니아-이타카 |
레이바토 AU |
릭수리 AU |
올림피아키 플로가 |
올림피아코스 아르고스톨리 FC |
파게팔리니코스 |
팔릭수리아코스 FC |
파파브르기아코스 |
PAO 케팔로스 |
필리아리아코스 |
프로오도스 이타키 |
사미 AU |
AINOS 케팔로니아 사이클링 클럽과 케팔로니아 및 이타카 해상 레이싱 클럽이 있다.
참조
[1]
EB1911
[2]
논문
'The myth of Kephalos as aition of rain-magic'
1993
[3]
뉴스
Engineers to Help Find Homer's Ithaca
https://www.usatoday[...]
USA Today, Associated Press
2007-03-27
[4]
학술지
Kephallenia Archaeology and History: The Ancient Greek Cities
https://onlinelibrar[...]
2002
[5]
웹사이트
Pausanias 10.7.4.
https://www.perseus.[...]
[6]
웹사이트
Herodotus 9.28
http://www.perseus.t[...]
[7]
웹사이트
Thucydides 2.30
https://www.perseus.[...]
[8]
웹사이트
Thucydides 2.33, 5.35
https://www.perseus.[...]
[9]
웹사이트
Thucydides 7.31
https://www.perseus.[...]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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