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로피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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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펠로피다스는 고대 테바이 출신의 정치가이자 장군으로, 기원전 4세기에 테바이를 스파르타의 지배에서 해방시키고 그리스의 패권을 테바이로 가져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에파메이논다스와 함께 테바이를 이끌며 테살리아 등 북쪽 지역에서 군사적 활동을 펼쳤으며, 특히 테기라 전투와 레욱트라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펠로폰네소스 원정을 통해 메세네를 독립시키는데 기여했으며, 페르시아 사절로 파견되어 테바이의 위상을 높였다. 그는 테살리아 원정 중 키노스케팔라이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알렉산드로스를 암살하려다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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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 테베의 장군 - 에파메이논다스
에파메이논다스는 고대 테베 출신의 정치가이자 군인으로, 스파르타에 대항하여 테베의 독립을 이끌고 레욱트라 전투에서 승리하여 그리스의 패권을 테베로 가져왔으며, 펠로폰네소스 원정을 통해 메세니아를 해방했으나 만티네이아 전투에서 전사했다. - 테바이 패권 - 필리포스 2세
필리포스 2세는 마케도니아 왕국의 왕으로, 군사적 재능과 외교적 수완으로 마케도니아를 그리스 최강의 국가로 만들고 그리스 대부분을 정복하여 패권을 장악했으며, 군사 개혁과 정복 활동, 코린토스 동맹 결성으로 그리스 패권을 확립하고 페르시아 원정을 계획했으나 암살당했다. - 테바이 패권 - 만티네이아 전투 (기원전 362년)
기원전 362년 만티네이아에서 테베와 스파르타-아테네 연합군 간에 벌어진 만티네이아 전투는 테베의 전술적 승리에도 불구하고 에파메이논다스의 전사로 테베 패권 쇠퇴를 가속화하며 그리스 세계의 혼란을 심화시킨 전투이다.
펠로피다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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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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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기원전 420년경 |
사망 | 기원전 364년 (향년 56세) |
사망 장소 | 키노스케팔라이 |
국적 | 테바이 |
직업 | 군인, 정치인 |
분야 | 군사, 정치 |
군사 경력 | |
복무 | 테바이 |
계급 | 장군 |
참전 | 레우크트라 전투 키노스케팔라이 전투 |
2. 생애
펠로피다스는 테바이의 부유한 명문 귀족 가문 출신이다. 기원전 385년 스파르타와 만티네이아 전투에 테바이 지원군으로 참전했다가 죽을 위기에 처했으나, 친구 에파메이논다스가 그를 구했다.[3] 플루타르코스는 이를 계기로 둘의 우정이 굳건해졌고, 이후 20년간 펠로피다스가 에파메이논다스의 정치적 동반자가 되었다고 전한다.[4]
펠로피다스는 부유했지만 재산을 친구와 공공 봉사에 쓰고 검소하게 생활했다.[2] 친구들이 재정 관리를 조언하자, 가난한 사람을 가리키며 "저 사람에게는 돈이 필요하지"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2]
기원전 382년 스파르타가 테베 요새를 점령하자, 펠로피다스는 아테네로 피신하여 테베 해방 계획을 주도했다.[5] 기원전 379년 펠로피다스 세력은 기습 반란으로 친스파르타 테베 귀족들을 제거하고 스파르타 수비대를 항복시켰다.[5]
이후 펠로피다스는 보이오타르크로 선출되었고,[6] 기원전 375년경 테기라 전투에서 성스러운 부대를 이끌고 스파르타군을 격파했다.[7] 레욱트라 전투(기원전 371년)에서는 성스러운 부대를 지휘, 에파메이논다스의 사선 대형 전술 성공에 기여했다.
기원전 367년 펠로피다스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에게 사절로 파견되어 페르시아가 테베 중심으로 그리스 문제를 해결하도록 유도했다.[10]
기원전 369년 고대 테살리아인 요청으로 페라이의 알렉산드로스에 맞서 파견되었다. 마케도니아로 진군, 왕위 계승자들을 중재하고 필리포스 등 인질을 테베로 데려왔다.[11] 그러나 이듬해 알렉산드로스에게 붙잡혀 테베의 두 차례 원정 끝에 풀려났다.[13]
기원전 364년 펠로피다스는 테살리아 요청으로 재출정, 키노스케팔라이에서 적을 격파했으나 알렉산드로스를 직접 처치하려다 전사했다.[14] 플루타르코스는 이를 부주의와 분노로 삶을 망친 사례로 평가했다.[15]
2. 1. 출생과 가문
펠로피다스는 테바이의 부유한 명문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명문가의 일원이었고 막대한 부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친구들과 공공 봉사에 돈을 썼고, 자신은 운동선수처럼 고된 삶을 사는 것에 만족했다.[2]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에 따르면, 그는 테베의 가난한 사람들을 끊임없이 돌보고, 소박한 옷차림과 간소한 식단, 끊임없는 군대 생활의 어려움 속에서 기쁨을 느끼면서, 물려받은 재산을 줄였다. 사람들은 그가 자신보다 테베의 최하층민에게 더 많은 돈을 쓰는 것을 부끄러워했다고 말했다. 한번은 친구들이 그에게 아내와 자녀가 있으니 재정을 관리해야 하고, 돈은 필요한 것이라고 주장했을 때, 펠로피다스는 눈이 멀고 다리가 불편한 빈민 니코데모스를 가리키며 "그래, 니코데모스에게는 필요한 것이지"라고 말했다.[2]기원전 385년, 스파르타와 만티네이아에서 전투를 벌이자 테바이가 지원군을 보냈는데, 펠로피다스와 에파메이논다스도 그 지원군에 속해 있었다. 이 전투에서 펠로피다스는 죽을 위기에 빠졌으나, 친구인 에파미논다스가 상처를 입고서도 몸을 던져 그를 구했다.[3] 펠로피다스는 앞쪽에서 일곱 번의 상처를 입고, 죽은 친구들과 적들이 쌓인 큰 더미 위로 쓰러졌다. 그러나 에파미논다스는 그가 생명이 없다고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몸과 무기를 지키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 펠로피다스를 그 자리에 남겨두느니 차라리 죽겠다는 결심으로 많은 적들을 상대로 필사적으로 싸웠다. 에파메이논다스 역시 창에 가슴을 찔리고 칼에 팔을 베여 비참한 지경에 이르렀을 때, 스파르타 왕 아게시폴리스 1세가 다른 날개에서 그를 돕기 위해 왔고, 희망이 모두 사라졌을 때 그들 둘을 구했다.[4] 플루타르코스는 이 사건으로 인해 그들의 우정이 굳건해졌으며, 펠로피다스는 이후 20년 동안 에파미논다스의 정치적 동반자가 되었다고 말한다.[4]
2. 2. 초기 군사 활동과 에파메이논다스와의 우정
기원전 385년, 스파르타와 만티네이아 간의 전투에 테바이가 지원군을 보냈을 때, 펠로피다스는 에파메이논다스와 함께 참전했다. 이 전투에서 펠로피다스는 죽을 위기에 처했으나, 친구인 에파메이논다스가 상처를 입고도 몸을 던져 펠로피다스를 구했다.[2] 플루타르코스는 이 사건을 계기로 둘의 우정이 굳건해졌으며, 이후 20년 동안 펠로피다스는 에파메이논다스의 정치적 동반자가 되었다고 전한다.[4]펠로피다스는 부유한 명문 귀족 출신이었지만, 재산을 친구와 공공 봉사에 사용하고 자신은 검소한 생활을 했다.[2] 한번은 친구들이 재정 관리를 해야 한다고 조언하자, 펠로피다스는 가난한 사람을 가리키며 "그래, 저 사람에게는 돈이 필요하지"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있다.[2]
기원전 382년, 스파르타가 테베의 요새를 점령하자, 펠로피다스는 아테네로 피신하여 테베 해방을 위한 계획을 주도했다.[5] 기원전 379년, 펠로피다스의 민주파는 기습 반란을 일으켜 스파르타를 지지하던 테베 귀족들을 제거하고, 스파르타 수비대를 항복시켰다.[5]
2. 3. 테바이 해방 (기원전 379년)
기원전 382년 스파르타가 테베의 요새를 점령하자, 펠로피다스는 아테네로 도망쳐 테베를 해방시키기 위한 음모를 주도했다.[5] 스파르타는 자국에서는 왕당파였지만, 스파르타의 헤게모니를 추구하면서 정복한 도시 국가에 과두정치 정부를 세웠다. 기원전 379년, 펠로피다스의 민주파는 기습 반란을 일으켜 스파르타 통치를 지지하는 타락한 테베 귀족들을 많이 죽였다. 스파르타 수비대는 펠로피다스가 소집한 군대에 항복했다.[5]2. 4. 보이오타르크 선출과 테기라 전투 (기원전 375년)
기원전 385년 스파르타와 만티네이아의 전투에 테바이 지원군으로 참전했던 펠로피다스는 죽을 위기에 처했지만, 친구 에파메이논다스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다.[6] 이후 펠로피다스는 스파르타의 위협을 경계하여 기원전 383년 테바이를 떠나 아테나이에 잠입, 테바이 독립 운동을 주도했다. 기원전 379년 에파메이논다스와 함께 친 스파르타 세력을 몰아내고 테바이를 해방시켜 그리스의 새로운 패권국으로 부상시켰다.그는 이 시기 및 이후 12년 동안 전쟁 지도자인 보이오타르크로 선출되었으며,[6] 기원전 375년경 테기라 전투 (오르코메노스 근처)에서 훨씬 더 많은 수의 스파르타군을 격파했다.[7] 이 승리는 300명의 정예 병사로 구성된 성스러운 부대의 용맹 덕분이었다. 레욱트라 전투 (기원전 371년)에서 펠로피다스는 성스러운 부대를 이끌고 스파르타군에 빠르게 접근하여 에파메이논다스의 새로운 전술(사선 대형)이 성공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2. 5. 레욱트라 전투 (기원전 371년)와 테바이 패권
기원전 379년, 에파미논다스와 함께 친(親) 스파르타 정적들을 물리치고 테바이를 스파르타의 멍에로부터 해방시켜 그리스의 패권국으로 끌어 올렸다.[6] 이 시기 및 이후 12년 동안, 전쟁 지도자인 ''보이오타르크''로 선출되었으며,[6] 기원전 375년경 테기라 전투 (오르코메노스 근처)에서 훨씬 더 많은 수의 스파르타군을 격파했다.[7] 이 승리는 주로 300명의 정예 병사로 구성된 성스러운 부대의 용맹 덕분이었다. 레욱트라 전투 (기원전 371년)에서 그는 성스러운 부대로 하여금 스파르타군에게 신속하게 접근하게 함으로써 에파미논다스의 새로운 전술의 성공에 크게 기여했다. 레욱트라 전투에서 뛰어나고 직관적인 장군인 에파미논다스는 처음으로 사선 대형을 사용했다. 레욱트라 전투 이후, 테바이는 스파르타를 대신하여 그리스의 주요 도시가 되기 시작했다.기원전 370년, 그는 절친한 친구 에파미논다스와 함께 보이오타르크로서 펠로폰네소스반도로 가서, 스파르타의 이전 속국인 메세네를 독립 도시로 재건함으로써 그들의 성공을 공고히 하고 스파르타가 패권을 영구적으로 잃도록 했다.[8] 귀환 후, 두 장군은 법적 임기를 초과하여 지휘권을 유지한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실패했다. 테베의 민주주의자들과 일부 귀족들은 펠로피다스와 에파미논다스가 그들의 도시에서 가장 유능하고 중요한 인물이라고 인정했다. 두 사람은 그리스를 테베의 패권 아래 통일할 국가를 건설하려 노력했으며, 크세노폰은 이를 "그리스에서 패권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끊임없이 향하는" 정책이라고 불렀다.[9]
2. 6. 펠로폰네소스 원정과 메세네 재건 (기원전 370년)
기원전 370년, 펠로피다스는 절친한 친구 에파미논다스와 함께 보이오타르크로서 펠로폰네소스반도로 갔다. 그곳에서 스파르타의 이전 속국이었던 메세네를 독립 도시로 재건하여 스파르타가 패권을 영구적으로 잃도록 했다.[8] 귀국 후, 두 장군은 법적 임기를 초과하여 지휘권을 유지했다는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무죄 판결을 받았다. 사실, 테바이의 민주주의자들과 일부 귀족들은 펠로피다스와 에파미논다스가 테바이에서 가장 유능하고 중요한 인물임을 인정했다. 두 사람은 그리스를 테베의 패권 아래 통일하는 국가를 건설하려 노력했으며, 크세노폰은 이를 "그리스에서 패권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끊임없이 향하는" 정책이라고 묘사했다.[9]2. 7. 페르시아 사절 (기원전 367년)
기원전 367년, 펠로피다스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에게 사절로 파견되었다. 레욱트라 전투에서 승리하여 얻은 명성을 바탕으로[9], 펠로피다스는 페르시아 왕이 테베인들의 뜻에 따라 그리스 문제를 해결하도록 유도했으며, 특히 메세네의 지속적인 독립을 언급했다.[10]2. 8. 테살리아 원정과 죽음 (기원전 364년)
기원전 369년, 고대 테살리아인들의 요청에 따라 펠로피다스는 군대를 이끌고 페라이의 알렉산드로스에 대항하여 파견되었다. 알렉산드로스를 몰아낸 후, 그는 마케도니아로 진군하여 왕위 계승자 두 명 사이에서 중재했다. 테베가 마케도니아에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어린 왕자 필리포스를 포함한 인질들을 데려왔는데, 필리포스는 훗날 스스로 왕이 될 젊은이였다. 테베에서 필리포스는 그리스인들의 군사 전술과 정치에 대해 배웠다.[11]그 다음 해, 펠로피다스는 다시 마케도니아에 개입하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용병들의 이탈로 인해 알로로스의 프톨레마이오스와 협정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테살리아를 거쳐 돌아오는 길에 그는 페라이의 알렉산드로스에게 붙잡혔고, 그의 석방을 위해 테베에서 두 차례 원정(두 번째 원정은 그의 친구 에파메이논다스가 이끌었다[12])이 필요했다.[13]
기원전 364년, 펠로피다스는 페라이의 알렉산드로스에 대항하는 테살리아 도시들로부터 다시 도움을 요청받았다. 일식으로 인해 소수의 병력만을 이끌고 갔음에도 불구하고, 키노스케팔라이 능선에서 폭군의 훨씬 우세한 병력을 격파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를 직접 처치하려는 욕심에 너무 앞서 달려들어, 폭군의 경호병들에게 죽임을 당했다.[14] 플루타르코스는 그를 부주의함과 분노로 자신의 삶을 망친 지도자의 전형적인 예로 여겼다.[15]
3. 평가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의 대비 열전에서는 펠로피다스를 맹장이면서, 물정에 어둡고 욱하는 성격으로 알려진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와 서로 비교하고 있다.[1]
참조
[1]
서적
Greek Warfare
2012
[2]
서적
Plutarch: The Age Of Alexander
Penguin
2011
[3]
서적
Plutarch: The Age Of Alexander
Penguin
2011
[4]
서적
Life of Pelopidas
[5]
서적
Plutarch: The Age Of Alexander
Penguin
2011
[6]
서적
Greek Warfare
2012
[7]
서적
Plutarch: The Age Of Alexander
Penguin
2011
[8]
서적
The Oxford History of the Classical World
Oxford
1986
[9]
서적
A History of my Times: Hellenica
Penguin
1966
[10]
서적
A History of my Times: Hellenica
Penguin
1966
[11]
서적
Homosexualities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2]
서적
Pelopidas
[13]
서적
Plutarch: The Age of Alexander
Penguin
2011
[14]
서적
Plutarch: The Age of Alexander
Penguin
2011
[15]
서적
Plutarch: The Age of Alexander
Penguin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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