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세노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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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크세노폰은 기원전 430년경 아테네에서 태어난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군인, 작가이다. 소크라테스의 제자였으며, 펠로폰네소스 전쟁과 키루스의 페르시아 원정에 참여했다. 그의 주요 저작으로는 소크라테스에 대한 기록인 《소크라테스의 회상》, 《소크라테스의 변명》, 《향연》, 《가정경제론》, 페르시아 원정기를 담은 《아나바시스》, 그리스 역사를 다룬 《헬레니카》, 이상적인 지도자를 그린 《키루스의 교육》 등이 있다. 그는 스파르타를 지지하여 아테네에서 추방당했으며, 그의 작품은 리더십, 정치 철학, 역사 서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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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세노폰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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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이름 | 크세노폰 |
다른 이름 | 크세노폰테스 |
출생 | 기원전 430년경 |
출생지 | 아테네 |
사망 | 기원전 354년 또는 355년경 (74세 또는 75세) |
사망 장소 | 코린토스 추정 |
부모 | 그릴로스 |
배우자 | 필레시아 |
자녀 | 그릴로스, 디오도로스 |
직업 | 군사 지도자 용병 철학자 역사학자 작가 |
주요 작품 |
2. 생애
크세노폰은 기원전 430년경 고대 아테네의 에르키아 데메(지방 행정 구역)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그리루스였으며, 아테네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8]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크세노폰의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 동안 계속되었다. 플라톤과 동시대 인물이었던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와 교류했으며, 아마도 아테네 기병대에서 복무했을 것이다.[8] 그는 30인 참주에 의한 아테네 민주주의 전복 시기에 아테네에 머물렀으며, 기원전 403-404년의 내전에서 민주주의 반란군과 싸운 것으로 보인다. ''헬레니카''에 기록된 사건들은 크세노폰이 기원전 407년 알키비아데스의 귀환, 기원전 406년 아르기누사이 해전의 장군 재판, 기원전 403년 30인 참주의 전복과 같은 정치적 사건들을 직접 목격했음을 보여준다.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의 제자였으며,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관한 『변론』을 썼다.
키루스의 용병 군대의 지휘관 중 한 명이었던 보이오티아 출신의 프로세누스의 초청을 받은 크세노폰은 에페소스로 가서 키루스(소)의 티사페르네스에 대항하는 군사 원정에 참여했다. 크세노폰은 기원전 401년과 기원전 400년의 자신의 삶을 회고록 ''아나바시스''에 기록했다.
크세노폰은 코로네이아 전투에서 스파르타 왕 아게실라오스 2세 밑에서 아테네와 싸웠기 때문에 아테네에서 추방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페르시아를 위해 복무하고 소크라테스를 지지하는 등 다른 이유도 있었다.[8] 스파르타는 엘리스의 올륌피아 근처 스킬루스의 토지를 크세노폰에게 주었다.[8] 크세노폰은 스키루스에서 23년을 보냈다.[23] 기원전 371년 레욱트라 전투 이후, 엘리스인들이 크세노폰의 영지를 몰수했고,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우스에 따르면, 크세노폰은 코린토스로 이주했다.[23]
크세노폰의 저서 『아게실라오스』를 보면 그가 스파르타 왕 아게실라오스 2세에게 심취했음을 알 수 있다. 코린토스 전쟁이 발발하면서 크세노폰은 스파르타 군의 일원으로서 반 스파르타 진영과 싸우게 되었고, 코로네이아 전투에서 아테네 군을 적으로 상대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크세노폰은 스파르타에 가담하여 조국에 활을 겨눴다는 이유로 아테네에서 추방당했다. 안탈키다스의 강화 조약으로 코린토스 전쟁이 종결된 후, 크세노폰은 스파르타로부터 올림피아 근처의 스킬루스에 영지를 받아 거주하며 유유자적한 생활을 했다. 그 후 테베가 스파르타를 격파하고 스킬루스를 점령하자, 크세노폰은 스킬루스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아테나이와 스파르타가 동맹을 맺으면서 크세노폰은 아테네 추방에서 풀려났다.
크세노폰은 기원전 394년 코로네이아 전투에서 스파르타 편에 서서 아테네와 맞서 싸웠고, 그 결과 아테네에서 추방되었다.[23] 이후 스키루스에 영지를 받고 23년간 그곳에서 생활했다.[23] 기원전 371년 레욱트라 전투 이후, 엘리스인들이 크세노폰의 영지를 몰수했고,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우스에 따르면, 크세노폰은 코린토스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여생을 보냈다.[23] 디오게네스는 크세노폰이 기원전 354년 74세 또는 7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23] 파우사니아스는 크세노폰의 무덤이 스키루스에 있다고 언급한다.[24]
2. 1. 소크라테스와의 만남
크세노폰은 부유한 젊은이들이 흔히 그랬듯이 소크라테스와 교류했다.[8]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의 저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에 따르면, 크세노폰이 소크라테스를 만난 경위는 다음과 같다. "소크라테스가 좁은 골목에서 크세노폰을 만나 막대기로 길을 막고 지나가지 못하게 한 다음, 온갖 필요한 물건들을 어디에서 파는지 물었다. 크세노폰이 대답하자, 그는 다시 사람들을 어떻게 선하고 덕 있는 존재로 만들 수 있는지 물었다. 크세노폰이 모르겠다고 하자, 소크라테스는 '그러면 나를 따라와서 배우게나'라고 말했다. 그때부터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의 제자가 되었다."[34]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의 제자였으며,[34]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관한 『변론』을 썼다. 크세노폰과 플라톤은 소크라테스가 자신을 변호하는 데 실패한 점에 대해 우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가 매우 오만한 태도로, 혹은 적어도 그렇게 비춰지도록 자신의 기소를 다루었다고 주장한다.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의 변론을 논쟁의 실패가 아닌, 설득력 없는 혐의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갈망하는 것으로 구성했다.[36]
크세노폰의 저술에는 소크라테스 대화 장르의 작품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플라톤의 대화편을 제외하면 현존하는 유일한 대표작이다. 이 작품들에는 크세노폰의 ''변론'', ''추억'', ''향연'', ''가정경제학''이 포함된다. ''향연''은 소크라테스와 그의 동료들이 어떤 자질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지 논하면서 소크라테스의 특징을 개략적으로 보여준다. ''가정경제학''에서 소크라테스는 가정을 어떻게 관리하는지 설명한다. ''변론''과 ''추억'' 모두 소크라테스의 인품과 가르침을 옹호한다. 전자는 소크라테스의 재판 중에 설정되었으며, 후자는 그의 도덕적 원칙과 그가 청소년을 타락시킨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한다.[36] 크세노폰은 자신이 ''향연''에 참석했다고 주장하지만, 그가 제시한 날짜에 그는 겨우 어린 소년이었다. 크세노폰은 아나톨리아와 메소포타미아에서 군사 작전을 수행 중이었기 때문에 소크라테스의 재판에 참석하지 못했다.[36]
2. 2. 페르시아 원정 (아나바시스)
크세노폰은 젊은 시절, 페르시아 왕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의 동생 키루스가 형을 타도하기 위해 고용한 그리스 용병에 참가했다(기원전 401년~기원전 399년).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에게 조언을 구했고, 소크라테스는 신탁에 문의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크세노폰은 신탁에 키루스의 초대를 받아들일지 여부가 아니라 "어떤 신에게 제물을 바쳐야 할지"를 물었고, 소크라테스는 "참가하기 전에"라고 물었어야 했다며 아쉬워했지만 결국 참가를 허락했다.[43] 이 때문에 크세노폰은 스승 소크라테스의 죽음(기원전 399년)을 지켜볼 수 없었다.
키루스는 팃사페르네스와 싸운다는 구실로 페르시아인과 그리스인으로 구성된 대규모 군대를 소집했다. 키루스는 피시디아인들을 공격한다고 했기에, 그리스인들은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와 싸우게 될 것을 알지 못했다. 타르소스에서 병사들은 키루스가 왕을 폐위시키려는 계획을 알게 되었고, 진군을 거부했다. 그러나 스파르타 장군 클레아르코스가 그리스인들을 설득하여 원정을 계속하게 했다. 키루스의 군대는 쿠낙사 전투에서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의 군대와 만났고, 키루스는 전투에서 사망했다.[43] 그 직후, 클레아르코스는 티사페르네스에 의해 연회에 초대받았으나, 배신을 당해 다른 장군들과 함께 처형되었다.[43]

만 명 (그리스 용병)으로 알려진 그리스 용병들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지도자를 잃고 고립되었다. 그들은 크세노폰을 포함한 새로운 지도자를 선출했다. 크세노폰은 적의 추격을 막기 위해 체계적으로 국가를 황폐화시키고 마을을 파괴하는 방법을 사용했으며,[13] 팔랑크스 후방에 예비군을 설치하여 약한 부분을 지원하게 했다.[13]
크세노폰과 그의 부대는 대 자브 강을 건너고, 카르두키족의 땅을 통과하고, 켄트리테스 강 북쪽 산기슭에서 페르시아군을 격파하는 등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15][16] 그들은 아르메니아에서 겨울을 나고,[17] 트라페주스의 흑해 해안에 도착했다.[44] 이후 크리소폴리스를 거쳐 서쪽으로 이동하여 그리스 영토로 돌아갔다.[44] 그곳에서 그들은 세우테스 2세가 트라키아의 왕이 되도록 도왔고, 이후 스파르타 장군 팀브론의 군대에 합류했다.
크세노폰의 이러한 페르시아 원정과 귀환 여정은 《아나바시스》에 기록되었으며,[44] 훗날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시아 원정을 떠날 때 지리서로 쓰였다.
2. 3. 스파르타와의 관계와 추방
크세노폰은 코로네이아 전투에서 스파르타 왕 아게실라오스 2세 밑에서 아테네와 싸웠기 때문에 아테네에서 추방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페르시아를 위해 복무하고 소크라테스를 지지하는 등 다른 이유도 있었다.[8] 스파르타는 엘리스의 올륌피아 근처 스킬루스의 토지를 크세노폰에게 주었다.[8]크세노폰은 스키루스에서 23년을 보냈다.[23] 기원전 371년 레욱트라 전투 이후, 엘리스인들이 크세노폰의 영지를 몰수했고,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우스에 따르면, 크세노폰은 코린토스로 이주했다.[23]
크세노폰의 저서 『아게실라오스』를 보면 그가 스파르타 왕 아게실라오스 2세에게 심취했음을 알 수 있다. 코린토스 전쟁이 발발하면서 크세노폰은 스파르타 군의 일원으로서 반 스파르타 진영과 싸우게 되었고, 코로네이아 전투에서 아테네 군을 적으로 상대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크세노폰은 스파르타에 가담하여 조국에 활을 겨눴다는 이유로 아테네에서 추방당했다. 안탈키다스의 강화 조약으로 코린토스 전쟁이 종결된 후, 크세노폰은 스파르타로부터 올림피아 근처의 스킬루스에 영지를 받아 거주하며 유유자적한 생활을 했다. 그 후 테베가 스파르타를 격파하고 스킬루스를 점령하자, 크세노폰은 스킬루스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아테나이와 스파르타가 동맹을 맺으면서 크세노폰은 아테네 추방에서 풀려났다.
2. 4. 만년과 죽음
크세노폰은 기원전 394년 코로네이아 전투에서 스파르타 편에 서서 아테네와 맞서 싸웠고, 그 결과 아테네에서 추방되었다.[23] 이후 스키루스에 영지를 받고 23년간 그곳에서 생활했다.[23] 기원전 371년 레욱트라 전투 이후, 엘리스인들이 크세노폰의 영지를 몰수했고,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우스에 따르면, 크세노폰은 코린토스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여생을 보냈다.[23] 디오게네스는 크세노폰이 기원전 354년 74세 또는 7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23] 파우사니아스는 크세노폰의 무덤이 스키루스에 있다고 언급한다.[24]3. 주요 저작
크세노폰은 스승 소크라테스와 관련된 저작, 역사서, 그리고 기타 주제에 관한 다양한 저술을 남겼다. 그의 저작은 그리스어의 모범 텍스트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대부분 현대까지 전해지고 있다.
; 소크라테스 관련 저술
- 소크라테스의 회상(메모라빌리아): 소크라테스를 변호하는 대화들을 모은 책이다.
- 소크라테스의 변명: 법정에서 소크라테스가 자신을 변호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 향연: 소크라테스와 그의 동료들이 어떤 자질을 중시하는지 토론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 가정경제론(오이코노미코스): 가정 관리와 농업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생각을 담은 대화편이다.
; 기타 장편 저술
- 헬레니카: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이어 펠로폰네소스 전쟁 후반부와 스파르타의 패권, 테베의 부상 등을 다룬다.
- 아나바시스: 소(小) 키루스의 페르시아 원정에 참여했다가 철수한 경험을 기록한 책이다.
- 키루스의 교육: 키루스 대왕의 생애를 그린 소설로, 이상적인 통치자의 모습을 제시한다.
; 기타 단편/소품 저술
- 히에론――또는 참주적인 인물: 시라쿠사의 참주히에론 1세를 등장인물로 한 대화편이다.
- 아게실라오스: 크세노폰의 친구였던 스파르타 왕아게실라오스 2세의 전기이다.
- 라케다이몬인의 헌법: 스파르타의 제도와 관습을 설명한다.
- 수입에 관하여: 아테네의 재정 문제와 해결책을 제시한다.
- 기병대장에 관하여: 기병 장교의 임무를 설명한다.
- 기마술에 관하여: 말을 다루는 방법을 설명한다.
- 사냥에 관하여: 개를 이용한 사냥과 그 장점을 다룬다.
; 위작
- 아테나이인의 헌법: 크세노폰의 저작이 아닌 것으로 여겨진다.


3. 1. 역사 저술
크세노폰은 《아나바시스》, 《헬레니카》, 《키루스 교육》, 《아게실라오스》 등 역사와 관련된 다양한 저술을 남겼다.
《아나바시스》는 키루스가 페르시아 왕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의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고용한 그리스 용병에 참가했던 경험([기원전 401년]]~기원전 399년)을 기록한 책이다.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에게 조언을 구했고, 소크라테스는 피티아에게 문의하도록 했다. 크세노폰은 신탁에 "어떤 신에게 기도하고 희생을 바쳐야 여정을 무사히 마치고 행운을 가지고 돌아올 수 있는가"를 물었고, 신탁은 그에게 어떤 신에게 기도하고 희생해야 하는지 알려주었다. 소크라테스는 크세노폰이 정직하지 못한 질문을 했다고 꾸짖었다(《아나바시스》 3.1.5–7).
이오니아의 페르시아 사트라프인 티사페르네스와 싸운다는 구실로 키루스는 페르시아 병사와 그리스인으로 구성된 대규모 군대를 소집했다. 키루스는 적이 피시디아인이라고 제안했고, 그리스인들은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 왕의 더 큰 군대와 싸우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아나바시스》 1.1.8–11). 타르수스에서 군인들은 키루스가 왕을 폐위시키려는 계획을 알게 되었고, 계속 진군하는 것을 거부했다(《아나바시스》 1.3.1). 그러나 스파르타 장군인 클레아르코스는 그리스인들을 설득하여 원정을 계속하게 했다. 키루스의 군대는 쿠낙사 전투에서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의 군대와 만났고, 키루스는 전투에서 사망했다(《아나바시스》 1.8.27–1.9.1). 그 직후, 클레아르코스는 티사페르네스에 의해 연회에 초대받았고, 그곳에서 크세노폰의 친구인 프록세누스를 포함한 다른 네 명의 장군과 많은 대대장들과 함께 체포되어 처형되었다(《아나바시스》 2.5.31–32).
《아나바시스》는 기원전 399년 페르가몬에서 스파르타 사령관 팀브론의 도착으로 끝을 맺는다.[21]
《헬레니카》는 기원전 411년부터 362년까지의 그리스 사건에 대한 주요 1차 사료이며,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계승하여 "이 사건 이후..."라는 문구로 시작한다. 헬레니카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마지막 7년과 그 여파를 기록하며, 기원전 362년까지의 그리스 역사를 상세하게 설명한다(다만 스파르타에 편향되어 있다).
《키루스 교육》은 유럽 군주론 장르의 원형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크세노폰은 초대 페르시아 황제인 키루스 2세를 칭송하며, 페르시아 제국이 결속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위대함 덕분이라고 묘사한다.
《아게실라오스》는 스파르타의 왕이자 크세노폰의 동료인 아게실라오스 2세의 전기이다. 크세노폰은 기원전 396년-394년 이오니아 그리스 독립을 위한 아게실라오스의 원정에 합류했다.[23]
3. 1. 1. 아나바시스
크세노폰의 《아나바시스》는 키루스가 자신의 형인 아케메네스 제국의 대왕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에 대항하여 원정을 떠났다가 고국으로 돌아온 여정을 담은 기록이다.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에게 키루스의 원정에 참가해야 할지를 물었는데, 소크라테스는 델포이 신탁에서 신과 의논해 볼 것을 권하였다. 크세노폰은 델포이 신탁에서 아폴론 신에게 성공적인 원정과 무사 귀환을 위해 어떤 신에게 제물을 바쳐야 하는지 물었고, 아폴론은 그에게 어떤 신들에게 제물을 바쳐야 하는지 알려주었다.[43] 크세노폰은 아테네로 돌아와 소크라테스에게 예언을 말해주었고, 소크라테스는 여행을 결정하고 어떻게 여행하는 것이 가장 좋겠는지 물었다고 그를 나무랐다.[43]키루스는 팃사페르네스와 싸운다는 핑계로 페르시아인 병사와 헬라스인(그리스인) 병사로 구성된 군대를 모았다. 키루스는 피시디아 사람들이 전쟁 상대라고 공언하였으며, 헬라스 사람들은 자신들이 페르시아 대왕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의 군대와 싸우게 될 것임을 알지 못하였다. 타르소스에서 헬라스 병사들은 키루스가 대왕을 몰아내려고 원정을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키루스를 따르는 데 거부하였다. 그러나 스파르타 출신의 클레아르코스가 헬라스 사람들을 설득하여 계속 원정대에 남았다. 키루스의 군대는 쿠낙사 전투에서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의 군대와 전투를 벌였고, 헬라스 군대는 선전하였으나 키루스는 전사하였다. 얼마 후 클레아르코스 장군과 네 명의 다른 헬라스 장군들은 휴전 회의에 초대받았으나, 페르시아인들은 이들을 배신하고 장군들을 참수하였다. 일만 인으로 알려진 헬라스 용병들은 메소포타미아의 심장부와 가까운 적대적인 내륙 한가운데서 지휘자도 없이 버려졌음을 알게 되었다. 이들은 크세노폰을 비롯한 새로운 지휘관을 뽑았으며, 페르시아, 아르메니아, 쿠르드를 지나 북쪽으로 흑해 연안의 트라페주스로 진군하였다. 용병대는 서쪽으로 가 고국 그리스로 귀환하였고, 스파르타의 티브론 장군의 군대에 들어가 세우테스 2세가 트라키아의 임금이 되는데 도왔다.


《아나바시스》는 후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시아 원정을 떠날 때 지리서로 쓰였다.
3. 1. 2. 헬레니카
크세노폰의 저서 《헬레니카》는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계승하여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그리스 세계의 정세 변화를 다룬다.[3] 이 책에서 크세노폰은 스파르타의 패권, 테베의 부상 등을 서술하고 있다.[3]3. 1. 3. 키루스의 교육

크세노폰은 자신의 정치적, 도덕적 철학을 설명하기 위해 ''키루스의 교육(키로파에디아)''을 저술했다. 그는 최초의 페르시아 제국을 건국한 키루스 2세의 소년 시절을 소설화하여 자신이 이상적인 통치자라고 생각했던 자질을 부여했다. 역사가들은 크세노폰이 묘사한 키루스가 정확한지, 아니면 자신의 삶의 사건들을 키루스에게 투영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해 왔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키루스의 경력이 가장 잘 묘사되어 있다는 데 의견이 일치한다.[27]
헤로도토스는 여러 지점에서 크세노폰과 상반되는 주장을 한다. 헤로도토스는 키루스가 외할아버지인 아스티아게스 메디아 왕에 반란을 일으켜 그를 물리쳤고, 이후 아스티아게스를 평생 자신의 궁정에 머물게 했다고 말한다(''역사'' 1.130). 그리하여 메디아는 "정복당하여"(1.130) 페르시아의 "노예"가 되었고(1.129), 이는 기원전 539년 바빌론 점령 20년 전의 일이었다.
''키루스의 교육''은 아스티아게스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인 키악사레스 2세(키루스의 외삼촌)가 왕위를 계승했다고 말한다(1.5.2). 리디아, 바빌론, 그 동맹국을 상대로 한 초기 원정에서 메디아는 키악사레스가 이끌었고, 페르시아는 키루스가 이끌었는데, 그의 아버지가 여전히 살아 있었으므로 그는 페르시아의 왕세자였다(4.5.17). 크세노폰은 이 당시 메디아가 바빌론에 대항하는 왕국들 중 가장 강력했다고 말한다(1.5.2). 나보니두스 궁정에서 나온 하란 비문에도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28] 나보니두스는 통치 14년 또는 15년(기원전 542–540년)의 기록에서 자신의 적들을 이집트 왕, 메디아인, 아랍인이라고 언급한다. 페르시아에 대한 언급은 없다. 헤로도토스와 현재의 합의에 따르면 메디아는 몇 년 전에 페르시아의 "노예"가 되었다. 페르세폴리스 계단에 있는 고고학적 부조물은 페르시아인과 메디아인의 공식적인 지위에 차이가 없음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올름스테드는 "메디아인들은 페르시아인들과 동등하게 존경받았고, 고위직에 임명되었으며, 페르시아 군대를 이끌도록 선택되었다"고 적었다.[29]
헤로도토스(1.123,214)와 크세노폰(1.5.1,2,4, 8.5.20) 모두 키루스가 바빌론을 점령했을 때 40세 정도였다고 묘사한다. 나보니두스 연대기에는 바빌론 점령 후 한 달 안에 왕의 아내(이름 미상)가 사망했다는 언급이 있다.[30] 이 아내가 키루스의 첫 번째 아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키루스의 교육''은(8.5.19) 키악사레스 2세가 도시 함락 직후 자신의 딸을 키루스에게 시집보냈고, 메디아 왕국을 지참금으로 주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키루스의 교육》은 초대 페르시아 황제인 키루스 2세를 칭송하며, 페르시아 제국이 결속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위대함 덕분이라고 묘사한다. 그러나 레오 스트라우스를 따라 데이비드 존슨은 크세노폰이 이 책을 통해 페르시아인, 스파르타인, 아테네인에 대한 비판을 은밀하게 전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31] 《키루스의 교육》 4.3절에서 키루스는 기병대를 창설하려는 자신의 열망을 썼다. 그는 어떤 페르시아인도 kalokagathos(고귀하고 훌륭한 사람) 발로 다니는 것을 보이지 않기를 바라며, 항상 말을 탈 수 있도록 하여, 페르시아인들이 실제로 켄타우로스처럼 보이게 되기를 원했다(4.3.22–23).
크세노폰은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이후의 선전적 패러다임을 이용하여 신화적 이미지를 그리스-페르시아 분쟁을 나타내는 데 활용한다. 이에 대한 예로는 라피테스족의 결혼, 기가토마키아, 트로이 전쟁, 그리고 아마조노마키아가 파르테논 신전 프리즈에 묘사된 것을 들 수 있다. 존슨은 켄타우로스에서 발견되는 인간과 말의 불안정한 이분법이 키루스에 의해 형성된 페르시아와 메디아의 불안정한 동맹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믿는다.[31] 그는 키루스 사후 곧바로 페르시아의 퇴보를 이 불안정성의 결과로 언급하며, 이 동맹은 오직 키루스를 통해서만 가능했다고 본다.[31]
크세노폰에 따르면 키루스가 제국을 유지하는 능력은 칭찬할 만하다. 그러나 키루스가 죽자 제국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크세노폰은 이 사례를 통해 제국은 불안정하며 키루스와 같은 뛰어난 능력의 인물에 의해서만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31]
크세노폰은 키루스를 고결하고 절제된 인물로 묘사한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약점에 굴하지 않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는 페르시아의 사례를 들어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시도한 제국 건설을 비판했다.[32]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네가 몰락한 후 ''키루스의 교육''을 저술하면서 그는 그리스의 제국주의 시도와 "군주제"를 비판했다.
존슨은 군주제와 제국에 대한 비판으로 인용하는 또 다른 구절은 "동등한", 즉 "동일한 명예"를 뜻하는 ''호모티모이''(동료)의 가치 절하에 관한 것이다. ''호모티모이''는 고도로 교육받았으며 중장 보병으로서 병력의 핵심이 되었다. 그들의 집단(키루스가 아시리아와 싸울 때 1,000명)은 전쟁 전리품을 동등하게 분배받았다.[31] 그러나 아시리아에 맞서 압도적인 수의 적을 마주했을 때, 키루스는 일반 시민들에게 평소의 경무장 대신 유사한 무기를 지급했다(''키로파에디아'' 2.1.9).
이제 전리품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고, 키루스는 실력주의를 시행했다. 많은 ''호모티모이''는 이것이 불공정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들의 군사 훈련은 일반 시민보다 나을 것이 없었고, 오직 교육만이 달랐으며, 백병전은 기술보다는 힘과 용기의 문제였다. 존슨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이 구절은 제국적 실력주의와 부패를 비난하는데, 이제 ''호모티모이''는 지위와 명예를 얻기 위해 황제에게 아첨해야 했기 때문이다.[31] 이때부터 그들은 더 이상 "동일한 명예"를 갖는 것이 아니라 명예를 얻기 위해 "안에" 있어야 하는 ''엔티모이''라고 불렸다.
3. 1. 4. 아게실라오스
아나바시스는 그리스 용병들이 소아시아를 침공한 스파르타에 고용되는 것으로 끝난다. 크세노폰은 스파르타 군의 일원으로서 활약한 듯하며, 그의 저서 《아게실라오스》를 보면 스파르타 왕 아게실라오스 2세에게 심취했음을 알 수 있다. 처음에는 스파르타 군과 소아시아를 지배하는 페르시아 제국과의 싸움이었지만, 그리스 본토에서 반 스파르타 진영의 반란이 일어나 코린토스 전쟁이 발발하면서 스파르타 군의 일원인 크세노폰도 반 스파르타 진영과의 싸움에 돌입하게 된다. 아테네도 반 스파르타 진영에 있었으므로 코로네이아 전투에서 결국 아테네 군을 적으로 돌려 싸우게 되었다.기원전 396년, 새로 임명된 스파르타 왕 아게실라오스 2세가 에페소스에 도착하여 데르킬리다스로부터 군대 지휘권을 인계받았다. 크세노폰은 기원전 396년부터 394년까지 이오니아 그리스 독립을 위한 아게실라오스의 원정에 합류했다.[23] 기원전 394년, 아게실라오스의 군대는 80년 전에 있었던 페르시아 침공 경로를 따라 그리스로 돌아와 코로네이아 전투에서 싸웠다. 아테네는 스파르타 편에서 싸운 크세노폰을 추방했다. 크세노폰은 기원전 394년에 아게실라오스가 스파르타로 행군하는 것을 따라갔을 것이고 7년 만에 그의 군사 여정을 마쳤다.[23]
3. 2. 소크라테스 관련 저술
크세노폰은 스승 소크라테스의 언행을 담은 저작들을 남겼다. 주요 저서로는 《소크라테스의 회상》, 《소크라테스의 변명》, 《향연》, 《가정경제학》 등이 있다. 이 저술들은 플라톤의 대화편과 함께 소크라테스 대화 장르를 대표하는 유일한 작품들이다.[36]- 《소크라테스의 회상》: 법정 밖에서 소크라테스를 변호하는 대화들을 모은 책이다.
- 《소크라테스의 변명》: 법정에서 소크라테스가 자신을 변호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 《향연》: 소크라테스와 그의 동료들이 어떤 자질을 중시하는지 토론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 《가정경제학》: 가정 관리와 농업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생각을 담은 대화편이다.
3. 2. 1. 소크라테스의 회상
크세노폰의 저술에는 여러 소크라테스 대화편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 저술들은 보존되어 있다. 플라톤의 대화편을 제외하면, 이들은 소크라테스 대화 장르의 현존하는 유일한 대표작이다. 이 작품들에는 크세노폰의 ''변론'', ''추억'', ''향연'', 그리고 ''가정경제학''이 포함된다. ''향연''은 소크라테스와 그의 동료들이 어떤 자질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지 논하면서 소크라테스의 특징을 개략적으로 보여준다. ''가정경제학''에서 소크라테스는 가정을 어떻게 관리하는지 설명한다. ''변론''과 ''추억'' 모두 소크라테스의 인품과 가르침을 옹호한다. 전자는 소크라테스의 재판 중에 설정되었으며, 후자는 그의 도덕적 원칙과 그가 청소년을 타락시킨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한다.[36]크세노폰은 자신이 ''향연''에 참석했다고 주장하지만, 그가 제시한 날짜에 그는 겨우 어린 소년이었다. 크세노폰은 아나톨리아와 메소포타미아에서 군사 작전을 수행 중이었기 때문에 소크라테스의 재판에 참석하지 못했다.[36]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다. 그리스 전기 작가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는 그의 저서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에서 크세노폰이 소크라테스를 어떻게 만났는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소크라테스가 좁은 골목에서 크세노폰을 만나 막대기로 길을 막고 지나가지 못하게 한 다음, 온갖 필요한 물건들을 어디에서 파는지 물었다고 한다. 크세노폰이 대답하자, 그는 다시 사람들을 어떻게 선하고 덕 있는 존재로 만들 수 있는지 물었다. 크세노폰이 모르겠다고 하자, 소크라테스는 '그러면 나를 따라와서 배우게나'라고 말했다. 그때부터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의 제자가 되었다."[34]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는 또한 "크세노폰이 델리움 전투에서 말에서 떨어졌을 때" 소크라테스가 나타나 그의 생명을 구했다고 전한다.[35]
플라톤과 크세노폰은 모두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관한 『변론』을 썼다. 크세노폰과 플라톤은 소크라테스가 자신을 변호하는 데 실패한 점에 대해 우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가 매우 오만한 태도로, 혹은 적어도 그렇게 비춰지도록 자신의 기소를 다루었다고 주장한다. 반대로 플라톤은 자신의 『변론』에서 그 오만함을 완전히 생략하지는 않으면서도 누그러뜨리려 노력했다.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의 변론을, 두 사람 모두 전혀 준비되지 않았음을 인정하면서, 논쟁의 실패가 아닌, 설득력 없는 혐의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갈망하는 것으로 구성했다.[36]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의 저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제2권 제6장)에는 크세노폰이 소크라테스의 제자가 된 경위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크세노폰이 청년 시절 아테네 시내를 걷고 있는데 소크라테스가 다가와 지팡이로 그의 앞길을 막았다. 소크라테스는 청년 크세노폰에게 "○○을 얻으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아는가?"라고 물었다. 크세노폰이 대답하자, 소크라테스는 여러 가지 식료품에 대해 이 질문을 반복했다. 크세노폰이 일일이 대답하자, 마지막으로 소크라테스는 "그럼, 훌륭한 사람이 되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아는가?"라고 물었다. 크세노폰이 대답하지 못하자, 소크라테스는 "그렇다면 내게 와서 배우도록 해라"라고 말했고, 크세노폰은 이때부터 소크라테스의 제자가 되었다고 한다.
3. 2. 2. 소크라테스의 변명
크세노폰의 저술에는 여러 소크라테스 대화편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 저술들은 보존되어 있다. 플라톤의 대화편을 제외하면, 이들은 소크라테스 대화 장르의 현존하는 유일한 대표작이다. 이 작품들에는 크세노폰의 ''변론'', ''추억'', ''향연'', 그리고 ''가정경제학''이 포함된다. ''변론''과 ''추억'' 모두 소크라테스의 인품과 가르침을 옹호한다. ''변론''은 소크라테스의 재판 중에 설정되었으며, ''추억''은 그의 도덕적 원칙과 그가 청소년을 타락시킨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한다.[36]크세노폰은 아나톨리아와 메소포타미아에서 군사 작전을 수행 중이었기 때문에 소크라테스의 재판에 참석하지 못했다. 크세노폰은 자신의 스승을 옹호하고 철학적 프로젝트를 발전시키기 위해, 소크라테스가 역사적 혐의에 대한 답변을 문자 그대로 기록하기보다는 그의 ''변론''과 ''추억''을 저술한 것으로 보인다.[36]
플라톤과 크세노폰은 모두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관한 『변론』을 썼다. 크세노폰과 플라톤은 소크라테스가 자신을 변호하는 데 실패한 점에 대해 우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가 매우 오만한 태도로, 혹은 적어도 그렇게 비춰지도록 자신의 기소를 다루었다고 주장한다. 반대로 플라톤은 자신의 『변론』에서 그 오만함을 완전히 생략하지는 않으면서도 누그러뜨리려 노력했다.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의 변론을, 두 사람 모두 전혀 준비되지 않았음을 인정하면서, 논쟁의 실패가 아닌, 설득력 없는 혐의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갈망하는 것으로 구성했다. 단지히는 이를 소크라테스가 설득력 없는 혐의로 배심원들을 유죄로 선고하도록 설득하는 것이 위대한 설득자에게 걸맞은 수사학적 도전이라고 해석한다.[36] 반대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가 더 높은 도덕적 기준을 보여주고 교훈을 가르치려 했다고 주장했다.[36]
3. 2. 3. 향연
크세노폰의 《향연》은 소크라테스와 그의 동료들이 어떤 자질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지 논하면서 소크라테스의 특징을 개략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향연》의 주요 줄거리 중 하나는 부유한 귀족이 (자신의 아버지와 함께 연회에 참석한) 어린 소년과 어떤 종류의 사랑 관계('고귀한' 혹은 '비열한')를 맺을 수 있는지에 관한 것이다.[36] 크세노폰은 자신이 《향연》에 참석했다고 주장하지만, 그가 제시한 날짜에는 겨우 어린 소년이었다.[36]3. 2. 4. 가정경제학
《오이코노미쿠스》는 가정 경영과 농업에 관한 소크라테스의 견해를 담고 있는 대화편이다.[25]3. 3. 기타 저술
- Ἱέρων ἢ Τυραννικός|히에론 또는 튀란니코스grc: 시라쿠사의 참주히에론 1세를 등장인물로 한 대화편이다.
- Ἀγησίλαος|아게실라오스grc: 크세노폰과 동시대인이자 친구였던 스파르타 왕아게실라오스 2세의 전기이다.
- Λακεδαιμονίων Πολιτεία|라케다이몬인의 폴리테이아grc: 라코니아의 주요 제도와 관습을 설명한다.
- Πόροι ἢ περὶ προσόδων|포로이 또는 페리 프로소돈grc: 아테네가 재정 및 경제 위기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설명한다.
- Ἱππαρχικός|히파르키코스grc: 기병 장교의 임무를 설명한다.
- Περὶ Ἱππικῆς|페리 히피케스grc: 말을 다루는 방법에 대한 논문이다.
- Κυνηγετικός|퀴네게티코스grc: 개와 함께 사냥하는 방법과 사냥의 장점을 다룬 논문이다.
- 아테나이인의 헌법: 크세노폰의 저작이 아닌 것으로 여겨지는 위작(僞作)이다.
3. 3. 1. 히에론
히에론은 시라쿠사의 참주 히에론과 서정 시인 시모니데스가 행복에 관해 나눈 대화를 다룬 작품이다.[24]3. 3. 2. 라케다이몬인의 정체(국가)
크세노폰은 라코니아의 주요 측면을 상세히 설명한다.[33]3. 3. 3. 수입에 관하여
크세노폰의 저작 중 하나인 《수입에 관하여》는 아테네의 재정 문제와 그 해결책을 다룬다. 이 책은 아테네의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여러 방안을 제시하며, 특히 아테네의 경제적 잠재력을 최대한 활용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3. 3. 4. 기병대장에 관하여
크세노폰은 《기병장관》에서 기병 장교의 임무를 개략적으로 설명한다.[1]Ἱππαρχικός|히파르키코스grc는 영어로 "The Cavalry General"(기병대장) 또는 "On the Cavalry Commander"(기병대장에 관하여)로 번역되는 논문으로, 기병대 지휘관이 알아야 할 내용을 담고 있다.
3. 3. 5. 기마술에 관하여
크세노폰은 《기병술》에서 말을 길들이고 훈련시키며 돌보는 방법에 대한 논문을 썼다.[1]3. 3. 6. 사냥에 관하여
크세노폰은 스키루스에서 비교적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면서 여러 저술 활동을 했다. 그중 하나는 ''개 사냥법''으로, 개와 함께 사냥하는 적절한 방법과 사냥의 장점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1]3. 3. 7. 아테나이인의 헌법 (위(僞) 크세노폰)
아테네의 크세노폰이 저술했다고 한때 여겨졌던 짧은 논문인 '''아테네 헌법'''은 크세노폰이 약 5세였을 때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 영어로 "올드 올리가크(Old Oligarch)" 또는 가짜 크세노폰이라고 불리는 이 저자는 아테네의 민주주의와 가난한 계층을 혐오하지만, 페리클레스 시대의 제도가 그들의 비참한 목적에 맞게 잘 설계되었다고 주장한다.4. 정치 철학
크세노폰은 정치 철학에 깊은 관심을 보였으며[25], 그의 작품은 종종 지도력에 대해 탐구한다.
4. 1. 스파르타 체제에 대한 긍정적 평가
크세노폰은 《라케다이몬인의 정체》에서 스파르타가 인구가 적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에서 가장 강력하고 유명한 도시가 된 이유를 스파르타인들의 제도에서 찾았다.[33] 그는 스파르타의 제도를 살펴본 후 더 이상 궁금하지 않았다고 기록했다.[33]크세노폰은 《아나바시스》, 《아게실라오스》 등의 저작을 통해 스파르타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애정을 드러냈다. 그는 그리스 용병으로 스파르타에 고용된 후 스파르타 군의 일원으로 활약했으며, 스파르타 왕 아게실라오스 2세에게 심취했다. 코린토스 전쟁에서 스파르타 편에 서서 코로네이아 전투에서 아테네 군과 싸웠고, 이 때문에 아테네에서 추방당하기도 했다.
안탈키다스의 강화 조약으로 코린토스 전쟁이 끝난 후, 크세노폰은 스파르타로부터 올림피아 근처 스킬루스에 영지를 받아 저술 활동에 힘썼다. 이후 스킬루스를 잃고 코린토스로 이주하여 생을 마감했다.
4. 2. 민주정에 대한 비판적 시각
'''아테네 헌법'''은 아테네의 크세노폰이 저술했다고 한때 여겨졌던 짧은 논문이다. 영어로 "올드 올리가크(Old Oligarch)" 또는 가짜 크세노폰이라고 불리는 이 저자는[1] 아테네의 민주주의와 가난한 계층을 혐오하지만, 페리클레스 시대의 제도가 그들의 비참한 목적에 맞게 잘 설계되었다고 주장한다. 이 논문은 크세노폰이 약 5세였을 때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5. 현대적 평가와 영향
크세노폰의 리더십에 대한 가르침은 현대적 가치에 대한 재평가를 받고 있다.[37] 『키로파에디아』는 키루스를 이상적인 지도자로 묘사하며, 오플래너리는 이 작품을 지도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을 위한 지침이나 본보기로 사용할 것을 제안한다. 도덕률과 교육의 연관성은 오플래너리가 생각하기에 현대 리더십에 대한 인식과 일치하는 키루스에게 부여된 자질이다.[37]
크세노폰의 주요 저작들은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다.
저서 | 한국어 번역 |
---|---|
아나바시스(페르시아 원정기) | 천병희 역, 도서출판 숲, 2011 |
키로파에디아(키루스의 교육) | 이은종 역, 주영사, 2012 |
헬레니카(그리스 역사) | 최자영, 아카넷, 2012 |
소크라테스 회상 | 최혁순 역, 종합출판범우, 2015 |
5. 1. 역사 서술에 대한 영향
크세노폰의 역사 서술 방식은 후대의 역사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그의 저작들은 역사적 사건을 기록하고 분석하는 데 있어 중요한 모델이 되었다.- '''아나바시스'''(페르시아 원정기): 크세노폰이 직접 경험한 사건을 바탕으로 쓰여졌으며, 생생한 묘사와 객관적인 서술로 유명하다. 이는 후대 역사가들이 사건을 기록할 때 현장감과 사실성을 중시하는 계기가 되었다.[1]
- '''키로파에디아'''(키루스의 교육): 역사적 사실과 허구를 결합한 작품으로, 이상적인 지도자의 모습을 제시한다. 이는 후대 역사가들이 인물의 성격과 업적을 평가하고, 역사적 교훈을 도출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2]
- '''헬레니카'''(그리스 역사):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의 그리스 역사를 다루며, 투키디데스의 역사 서술 방식을 계승하면서도 자신만의 독자적인 관점을 보여준다. 이는 후대 역사가들이 사건의 인과 관계를 분석하고, 다양한 관점에서 역사를 해석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3]
- '''소크라테스 회상''': 소크라테스의 생애와 사상을 다룬 작품으로, 대화 형식을 통해 철학적 논쟁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이는 후대 역사가들이 인물의 사상을 분석하고, 역사적 맥락에서 그 의미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4]
종합하면, 크세노폰은 역사적 사건을 기록하고, 인물을 묘사하며, 철학적 사상을 전달하는 다양한 방식을 통해 후대 역사 서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저작들은 역사 기록의 중요성과 역사 서술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5. 2. 군사 전략 및 리더십 연구에 대한 기여
크세노폰은 젊은 시절 페르시아 왕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의 동생 키루스가 형을 타도하기 위해 고용한 그리스 용병에 참가했다(기원전 401년~기원전 399년). 크세노폰은 이 일에 대해 소크라테스에게 상담했는데, 소크라테스는 "신에게 여쭈어 보라"고 말했다. 그러나 크세노폰은 "참가하기 전에 어떤 신에게 제물을 바쳐야 할지"를 여쭈어 그 답을 들었다. 크세노폰은 참가하고 싶어 안달했던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어쩔 수 없이 "'참가하기 전에'라고 여쭈었으니, 신에게 거짓말을 할 수는 없다"며 참가를 허락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때문에 크세노폰은 스승의 죽음(기원전 399년)을 지켜볼 수 없었다.[37]키루스의 전사로 인해 용병으로 참가한 동방 원정은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고용주와 지휘관의 죽음으로 페르시아 제국의 한가운데에 던져진 용병 부대를 이끌고, 격렬한 공격과 자연의 위협을 막아내며 적진에서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은 크세노폰의 뛰어난 지휘 덕분이었다. 『키로파에디아』는 키루스를 이상적인 지도자로 묘사하며, 오플래너리는 이 작품을 지도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을 위한 지침이나 본보기로 사용할 것을 제안한다. 오플래너리는 도덕률과 교육의 연관성이 현대 리더십에 대한 인식과 일치하는 키루스에게 부여된 자질이라고 생각한다.[37]
5. 3. 정치 철학 및 교육론에 대한 영향
크세노폰은 정치 철학에 깊은 관심을 보였으며[25], 그의 작품은 종종 지도력에 대해 탐구한다.크세노폰의 리더십에 대한 가르침은 현대적 가치에 대한 재평가를 받고 있다.[37] 『키로파에디아』은 키루스를 이상적인 지도자로 묘사하며, 오플래너리는 이 작품을 지도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을 위한 지침이나 본보기로 사용할 것을 제안한다. 도덕률과 교육의 연관성은 오플래너리가 생각하기에 현대 리더십에 대한 인식과 일치하는 키루스에게 부여된 자질이다.[37]
5. 4. 한국어 번역 및 연구 현황
크세노폰의 저작들은 다음과 같이 한국어로 번역되었다.[1]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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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of Xenoph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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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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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아나바시스
단국대학교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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