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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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평민주의는 도쿠토미 소호가 주창한 사상으로, '무비의 기관'보다 '생산의 기관'을 중시하며 자유로운 경제 생활을 기반으로 개인의 천부인권과 평등주의를 강조했다. 소호는 자유주의, 평등주의, 평화주의를 특징으로 하여, 당시 일본 정부의 정책과 민권론자들의 국권주의, 군비 확장주의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는 언론 단체 민우사를 설립하고 월간지 국민의 벗을 통해 평민적 급진주의를 주장하며 언론계를 양분했으나, 청일 전쟁 이후 국가주의적인 언론으로 변화했다. 니토베 이나조도 평민주의를 주창했으나, 크게 확산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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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민주의 | |
|---|---|
| 개요 | |
| 이름 | 평민주의 |
| 로마자 표기 | Pyeongminjuui |
| 영어 명칭 | Populism |
| 설명 | |
| 정의 | 대중의 염원을 내세우는 정치 이념 및 운동 사회의 엘리트 계층에 대한 비판을 주요 특징으로 함 |
| 특징 | 기존 정치 체제에 대한 불신과 반감을 표현 사회적 불평등 해소 및 소외된 계층의 권익 옹호 주장 단순하고 과격한 구호 및 정책 제시 경향 |
| 긍정적 측면 | |
| 의견 수렴 | 소외된 계층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정치 참여를 확대 기존 정치권의 변화와 개혁을 촉구 |
| 사회 변화 | 사회적 불평등 해소 및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 |
| 부정적 측면 | |
| 포퓰리즘 정책 | 비현실적인 공약 남발 및 재정 악화 초래 사회 갈등 심화 및 극단주의 확산 우려 |
| 민주주의 위협 | 대중의 지지를 이용하여 권력을 남용하고 민주주의 원칙을 훼손할 가능성 존재 소수의 의견을 무시하고 다수의 횡포를 정당화할 수 있음 |
| 관련 개념 | |
| 관련 개념 | 대중영합주의 |
2. 도쿠토미 소호의 평민주의 사상
오오에 의숙에서 청년들을 가르치던 도쿠토미 소호는 리처드 코브던, 존 브라이트 등 영국 빅토리아 시대 자유주의 사상가들과 바바 타츠이의 영향을 받아 평민주의 사상을 형성하였다.[1]
1886년 여름, 소호는 탈고한 『미래의 일본』 원고를 가지고 도지샤 영학교 시절 은사인 니이지마 조의 첨서를 지참하여 고치의 이타가키 다이스케를 방문했다. 소호는 자유당 당수인 이타가키에게 가장 먼저 원고를 보여주고 싶어했다.[3][4]
1887년 소호는 도쿄 아카사카 에노키자카에 언론 단체 민우사를 설립하고, 월간지 『국민의 벗』을 주재했다. 『국민의 벗』이라는 이름은 소호가 도지샤 영학교 시절에 애독했던 미국의 주간지 『네이션』 ''Nation'' 에서 채용한 것이다.[7] 민우사에는 동생인 도쿠토미 로카를 비롯해 야마지 아이잔, 타케코시 요사부로, 쿠니키다 돗포 등이 입사했다.
『국민의 벗』은 일본 근대화의 필연성을 설파하면서도 정부의 "구미화주의"를 "귀족적 구미화주의"라고 비판하고, 미야케 세츠레이, 시가 시게타카, 쿠니키타 야소난 등 세이쿄샤가 내건 국수주의에 대해서도 평민적 급진주의 주장을 전개하여 당시 언론계를 양분하는 세력이 되었다.
그러나 소호는 청일 전쟁 후 삼국 간섭에 충격을 받아 이후 국가주의, 국권주의적인 언론 활동을 주로 하였다.
니토베 이나조도 평민주의를 주창했지만, 실제로 크게 확산되지는 않았다.
2. 1. 평민주의의 핵심 내용
도쿠토미 소호는 '무비(武備)의 기관'보다 '생산의 기관'을 중시하고, 자유로운 경제 생활을 기반으로 개인의 천부인권과 평등주의를 강조했다.[1] 당시 일본 정부의 정책뿐만 아니라, 민권론자들 사이의 국권주의나 군비 확장주의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1] 자유주의, 평등주의, 평화주의를 주요 특징으로 한다.[1]소호는 1885년에 자비 출판한 『19세기 일본의 청년과 그 교육』(이후 『신일본의 청년』으로 개정 간행), 1886년에 간행된 『미래의 일본』에서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2] 이 책들은 부국강병, 록쿠메이칸, 징병제, 국회 개설로 떠들썩하던 당시 일본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것으로 세상의 주목을 받았다.
2. 2. 저서
1885년에 자비 출판한 『19세기 일본의 청년과 그 교육』(이후 『신일본의 청년』으로 개제)과 1886년에 간행된 『미래의 일본』은 소호가 구마모토 시대에 집필한 책이다.[2] 이 두 저서는 당시 일본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것으로 세상의 주목을 받았다. 특히, 『미래의 일본』은 타구치 우키치의 경제 잡지사에서 간행되었는데, 그 화려한 문체가 많은 젊은이들을 매료시켜 매우 호평을 받았으며, 이를 계기로 소호는 도쿄로 이주하여 논단에 데뷔했다.[5][6]3. 민우사와 '국민의 벗'
1887년(메이지 20년), 도쿠토미 소호는 도쿄 아카사카에 언론 단체 민우사를 설립하고, 월간지 『국민의 벗』을 창간했다. '국민의 벗'이라는 명칭은 소호가 도지샤 영학교 시절 애독했던 미국의 주간지 『네이션』(Nation)에서 따온 것이다.[7] 민우사에는 도쿠토미 로카(소호의 동생), 야마지 아이잔, 다케코시 요사부로, 구니키다 돗포 등이 참여했다.
3. 1. '국민의 벗'의 주장
1887년 도쿄 아카사카 에노키자카에 언론 단체 민우사를 설립하고, 월간지 『국민의 벗』을 주재했다. 『국민의 벗』이라는 이름은 도쿠토미 소호가 도지샤 영학교 시대에 애독했던 미국의 주간지 『네이션』(''Nation'')에서 채용한 것이라고 한다.[7] 민우사에는 동생인 도쿠토미 로카를 비롯해 야마지 아이잔, 다케코시 요사부로, 쿠니키다 돗포 등이 입사했다.『국민의 벗』은 일본 근대화의 필연성을 설파하면서도, 정부가 추진하는 "구미화주의"에 대해서는 "귀족적 구미화주의"라고 비판했다. 미야케 세츠레이, 시가 시게타카, 쿠니키타 야소난 등 세이쿄샤가 내건 국수주의(국수 보존주의)에 대해서도, 국민의 자유 확대와 생활 향상을 위해서는 위(정부·귀족)로부터가 아니라 아래(평민)로부터의 서양화(개화)가 필요하다는 평민적 급진주의 주장을 전개하여 당시 언론계를 양분하는 세력이 되었다.
참조
[1]
서적
松岡正剛の千夜千冊:徳富蘇峰『維新への胎動』
https://1000ya.isis.[...]
[2]
서적
田代(2004)
[3]
서적
高野静子『後藤新平と徳富蘇峰の交友』
http://fujiwara-shot[...]
[4]
서적
板垣は、原稿よりもむしろ蘇峰の人物そのものに興味をもち、政治家をやらせてみたいと述べたといわれる。高野(2005)
[5]
서적
遠山(1979)pp.231-232
[6]
서적
久恒(2011)p.27
[7]
웹사이트
人物探訪「徳富蘇峰」文章報国70余年
http://www2s.biglo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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