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타가키 다이스케
1. 개요
이타가키 다이스케는 1837년에 태어나 1919년에 사망한 일본의 정치가이자 사상가이다. 그는 자유민권 운동의 지도자로서 일본 근대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했으며, '헌정의 아버지'로 불린다. 막부 말기에는 존황양이 사상에 입각하여 개혁 운동을 주도했고,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정부의 요직을 맡아 폐번치현 등 개혁에 참여했다. 이후 자유민권 운동을 이끌며 국회 개설과 헌법 제정을 주장했고, 자유당을 창당하여 총리(당수)를 역임했다. 그는 서구의 자유주의 사상과 일본의 전통적인 무사도 정신을 결합한 독자적인 자유민권사상을 주창했으며, 반(反)서구주의와 반(反)기독교적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 그의 사상은 일본 정치와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이타가키는 죽을지라도 자유는 죽지 않는다!'라는 명언으로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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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명 | 이타가키 다이스케 (板垣 退助) |
|---|---|
| 출생일 | 1837년 5월 21일 |
| 출생지 | 도사 번, 일본 |
| 사망일 | 1919년 7월 16일 |
| 사망지 | 도쿄, 일본 제국 |
| 국적 | 일본 |
| 직업 | 정치인, 각료 |
| 작위 | 종1위, 백작 |
| 훈장 | 훈1등 욱일동화대수장 |
| 소속 정당 | 애국공당 애국사 국회기성동맹 자유당 애국공당(재건) 자유당 헌정당 |
|---|---|
| 내무대신 | 제2차 이토 내각 제2차 마쓰카타 내각 |
| 내무대신 임기 | 1896년 4월 14일 ~ 1896년 9월 20일 |
| 내무대신 | 제1차 오쿠마 내각 |
| 내무대신 임기 | 1898년 6월 30일 ~ 1898년 11월 8일 |
| 가문 | 도사 이타가키 씨 |
|---|---|
| 당주 | 제10대 당주 |
| 가문 당주 임기 | 1860년 ~ 1919년 |
| 선대 당주 | 이누이 마사시게 |
| 후대 당주 | 이타가키 모리마사 |
| 배우자 | 하야시 마사시게의 여동생 (정실) 나카야마 야헤이지 히데마사의 차녀 (계실) 이타가키 스즈 (계실) 이타가키 기누코 (계실) 이타가키 세이코 (계실) |
|---|---|
| 자녀 | 이타가키 호코타로 (장남) 이누이 세이시 (차남) 이타가키 손자부로 (삼남) 이타가키 마사미 (사남) 이누이 무이치 (오남) 가타오카 헤이코 (장녀) 미야지 군코 (차녀) 오가와 엔코 (삼녀) 아사노 치요코 (사녀) 고야마 료코 (오녀) |
| 친척 (정치인) | 이타가키 노부카타 (원조) 이타가키 노부노리 (원조) 이타가키 마사노부 (원조) 야마우치 교부 (원조) 이누이 마사키요 (5대 조부) 이누이 나오타케 (고조부) 이누이 마사토모 (증조부) 이누이 노부타케 (조부) 이누이 마사나리 (부친) 가타오카 미쓰후사 (사위) 미야지 시게하루 (사위) 오가와 가즈마 (사위) 아사노 야스지로 (사위) 고야마 도모에 (사위) 이타가키 모리마사 (손자) 이타가키 마사쓰라 (손자) 이누이 이치로 (손자) 미야지 시게아키 (손자) 가와세 도쿠타로 (손자 사위) 스기사키 미쓰요 (증손자) 가타오카 다카시 (증손자 사위) 다카오카 고타로 (현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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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타가키씨 -
이타가키 세이시로
이타가키 세이시로는 일본 제국의 군인이자 정치인으로, 만주사변과 중일 전쟁 등 일본 제국주의 침략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전쟁 범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
이타가키씨 -
이타가키 노부카타
센고쿠 시대의 무장 이타가키 노부카타는 다케다 가문의 가신으로 다케다 노부토라와 다케다 신겐을 섬겼으며, 신겐을 보좌하며 스와 군다이로 스와 지역을 통치하다 우에다하라 전투에서 전사, 다케다 24장 중 한 명으로 꼽힌다. -
신충대 -
야마지 모토하루
야마지 모토하루는 도사번 출신의 육군 군인으로, 도바·후시미 전투, 보신 전쟁, 세이난 전쟁, 청일 전쟁 등 여러 전쟁에 참여했으며, 자유 민권 운동에도 관여하다가 자작 작위를 받고 사망했다. -
신충대 -
고슈·가시오 전투
고슈·가시오 전투는 1868년 보신 전쟁 중 신정부군과 구 막부군이 혼슈 중부에서 벌인 전투로, 신정부군의 승리로 끝나 에도 막부 지지자들의 사기를 저하시키고 에도성의 무혈 항복에 영향을 미쳤다. -
고치현의 역사 -
도사번
도사 번은 야마우치 가즈토요가 1600년에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20만 2,600석을 하사받아 설립되었으며, 에도 시대 동안 야마우치 가문이 다스리면서 여러 어려움과 개혁, 그리고 메이지 유신에 기여한 인물들을 배출하며 삿초도히의 일원으로 시대 전환에 기여했고, 1871년 폐번치현으로 고치현이 되었다. -
고치현의 역사 -
도사국
도사국은 율령제 개혁으로 설치되어 아스카 시대부터 유배지로 사용된 일본의 옛 구니로, 현재의 고치현 대부분에 해당하며, 가마쿠라 시대에는 이치조 가문, 센고쿠 시대에는 초소카베 씨, 에도 시대에는 야마우치 씨가 지배하며 고치현으로 이어졌다.
2. 생애
이타가키 다이스케는 덴포 8년(1837년) 도사번 상사 이누이 마사나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이노스케, 통칭은 퇴조(退助)였다. 고토 쇼지로와는 죽마고우로, 함께 카가미가와 등지에서 뛰어놀며 성장했다. 소년 시절 장난기가 많았고, 의협심이 강해 약자를 괴롭히는 자에게는 싸움으로 맞섰다. 안세이 3년(1856년)에는 분쟁에 가담한 죄로 근신 처분을 받고 유배되기도 했지만, 이곳에서 서민들과 교류하는 기회를 얻었다.
막말에는 도사번 내 무력 토벌파의 중진으로 활동하며 사쓰마번과 밀약을 맺고, 보신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다. 특히 아이즈 공략전에서 공을 세웠으며, 닛코 도쇼구를 전화로부터 보호했다. 그는 존황 사상을 바탕으로 자유민권운동을 주도하며 국회 개설과 불평등 조약 폐지를 요구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 1869년에 찬정관으로 임명되었고, 1871년 한 제도 폐지 등 여러 개혁에 참여했다. 이와쿠라 사절단이 미국과 유럽을 순방하는 동안 내정을 담당했다. 1871년, 조선에 대한 강경한 입장을 주장하며 정한론을 펼쳤으나, 이와쿠라 도모미 등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결국 1873년, 정한론을 둘러싼 갈등으로 사이고 다카모리 등과 함께 정부를 떠났다.
이후 고토 쇼지로 등과 애국공당(愛国公党)을 결성하고 민선의원설립건백서를 제출하며 자유민권운동을 시작했다. 립시샤(立志社)와 애국사(愛国社)를 결성하여 운동을 이끌었으며, 1881년에는 자유당을 창당하여 전국적으로 확산시켰다. 1882년 기후에서 암살 위협을 받았을 때 "이타가키는 죽을지라도 자유는 죽지 않는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1896년, 이토 히로부미 내각에 내무대신으로 합류하며 정계에 복귀했고, 1898년에는 오쿠마 시게노부와 헌정당을 결성, 제1차 오쿠마 내각의 내무대신을 역임했다. 1900년 은퇴 후에는 대만 동화회 설립에 참여하는 등 사회 개량 운동에 힘썼다. 1919년 8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1. 초기 생애
이타가키 헤이타로 동상 기념비 건설 동지회 건립
덴포 8년 4월 16일 (1837년5월 20일) 도사번 상사(300석) 이누이 마사나리의 장남으로, 고치성 아래 나카지마초 (현 고치현 고치시 혼마치 2-3-18 고노데라)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이노스케(猪之助)였고, 통칭은 퇴조(退助)였다. 휘는 처음에는 마사미(正躬), 나중에는 마사카타(正形)였다. 호는 무케이(無形)이다.
야마우치 카즈토요가 가케가와 번주였던 시절 등용된 도사 번의 상사 가문이었지만, 이누이 가문(이타가키 가문)은 검소하고 강인함을 가풍으로 삼았다.
고토 쇼지로와는 죽마고우로, 함께 카가미가와와 시오에 덴만궁 등지에서 뛰어놀며 성장했다. 소년 시절 장난기가 많아 뱀을 싫어하는 고토 쇼지로를 놀리기도 했다.
소년 시절 “두꺼비 기름을 바르면 강에 잠수해도 숨을 쉴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고토 쇼지로와 함께 두꺼비 기름을 만들었으나, 심한 악취 때문에 발각되었다. 카가미가와에서 헤엄치다 귀에 물이 들어가 중이염을 앓았고, 수 년에 걸쳐 청력(돌발성 난청)을 잃어 취학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이후 우연한 계기로 고름이 터져 나오면서 청력이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
이타가키는 고쿠츄(고치 성 아래의 무사 거주지)에서 인기가 많았고, 의협심이 강해 약자를 괴롭히는 자에게는 싸움으로 맞섰다.
안세이 3년 8월 8일(1856년9월 6일) 분쟁에 가담한 죄로 고치 성 아래의 네 마을(고다카사카·시오에·시모치·에노구치)에서 근신 처분을 받고 가미다무라(こうだむら)에 유배되었다. 이곳에서 마을 사람들의 벼 수확과 탈곡을 돕는 등, 신분에 관계없이 서민과 교류하는 기회를 얻었다.
2.2. 막말 활동
이타가키 다이스케는 막말 “전쟁의 결과에 의해 형성된 사회 질서는 전쟁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뒤엎을 수 없다”고 주장하며, 도사번 내 무력 토벌파의 중진으로 활동했다. 사쓰마번과 사쓰마 토사 토벌의 밀약을 맺고, 도사번의 병제를 개혁하여 근대식 훈련을 실시했다. 독단으로 도사번 저택에 덴구토 낭사를 은닉하고 사쓰마번에 신병을 위탁했는데, 이들이 막부를 도발하여 에도 사쓰마번 저택의 소각 사건을 일으키면서 보신전쟁의 선봉전을 치르게 된다.
도바·후시미 전투 개전 후, 이타가키는 천황 어친정 동산도 선봉 총독군 참모 및 진충대 총독(도사번 육군 총독)이 되어 보신전쟁에서 활약한다. 특히 고슈 가쓰누마 전투와 아이즈 공략전에서 큰 공을 세웠으며, 아이즈 및 쇼나이 양번의 에조지 매각 계획을 저지하고 닛코 도쇼구를 전화로부터 보호했다.
이타가키는 절대 존황주의자이자 군민일체에 기반한 자유민권운동 주도자로, “군주는 민을 근본으로 하므로 군주주의와 민본주의는 대립하지 않고 불가분의 관계”라고 주장했다. 자유민권운동은 억조안무국위선양의 어신한의 뜻을 받들어 존황을 기초로 오개조의 어서문의 “널리 회의를 일으켜 만기를 공론으로 결정해야 한다”는 조항을 중시하며, 국내적으로는 국회 개설, 국외적으로는 불평등 조약 폐지를 요구했다.
2.3. 메이지 정부 활동
이타가키 다이스케는 1869년에 찬정관으로 임명되었으며, 1871년 한 제도 폐지 등 여러 주요 개혁에 참여했다. 그는 이와쿠라 사절단이 미국과 유럽을 순방하는 동안 다이조다이진 산조 사네토미, 사이고 다카모리 등과 함께 참의로서 내정을 담당했다.
1871년 11월 9일, 이타가키는 조선에 공식 사절을 보내 국교를 요청하고, 응하지 않으면 즉시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고 주장(정한론)했으나, 이는 부결되어 사절단 귀국 시까지 동결되었다.
1873년 5월 31일, 조선 부산의 대일본공관 대표 히로쓰 히로노부는 조선 정부가 일본인 밀무역 단속 포고에서 일본을 모욕하는 문구가 있었다고 보고하며, 거류민 보호를 위해 군함 파견을 요청했다. 이타가키는 1개 대대 파견을 주장했으나, 사이고 다카모리는 자신을 사절로 파견할 것을 제안했다. 사이고는 이타가키에게 보낸 서한에서 조선이 일본의 요구를 거부하면 전쟁으로 이끌 것이라며 협력을 요청했고, 8월 17일, 사이고의 사절 파견은 각의에서 결정되어 천황의 재가를 얻었다.
그러나 이와쿠라 도모미, 기도 다카요시, 오쿠보 도시미치 등은 사이고의 즉시 파견에 의한 개전이 러시아 제국 등 외국의 개입을 초래할 것이라며 반대하고, 내정을 우선하기 위해 사절 파견 연기를 요구했다. 사이고는 즉시 파견을 고집했고, 이타가키, 에토 신페이, 후쿠시마 다네오미, 고토 쇼지로도 이에 동조하며 특히 이타가키와 후쿠시마는 사이고를 강력히 지지했다. 결국 10월 24일, 천황은 이와쿠라의 사절 파견 연기 상주를 재가했고, 사이고와 이타가키 등은 사직하여 정부를 떠났다.
2.4. 자유민권운동
이타가키 다이스케는 메이지 유신 이후 정한론에 대한 반대와 장주번-사쓰마 번 중심의 정부에 대한 불만으로 1873년 정부에서 물러났다. 1874년, 고토 쇼지로, 에토 신페이, 소에지마 다네오미 등과 함께 애국공당(愛国公党)을 결성하여 민선의원설립건백서를 제출, 국민의 권리와 자유를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사무라이, 지방 귀족, 농민 등에게 호응을 얻었다.
이타가키는 자유주의를 바탕으로 국회와 헌법 제정을 위한 여러 조직을 만들었다. 1875년에는 립시샤(立志社)와 애국사(愛国社)를 결성하여 자유민권운동을 이끌었다. 이 운동은 정부의 탄압을 받았지만, 1875년 오사카 회의를 통해 이타가키는 잠시 정계에 복귀하기도 했다. 그러나 원로원의 권력 집중을 비판하며 다시 사임했다.
1881년, 누마 모리카즈와 함께 자유당을 창당하여 자유민권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켰다. 그러나 자유당은 내부 분열과 정부의 탄압으로 1884년에 해산되었다.
1882년, 기후에서 암살 위협을 받았을 때 "이타가키는 죽을지라도 자유는 죽지 않는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 발언은 여러 기록에서 확인되며, 이타가키가 평소 자유주의에 대한 굳은 신념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분류:자유민권운동가
2.5. 정계 복귀와 말년
1896년 4월, 이타가키는 이토 히로부미의 제2차 이토 내각에 내무대신으로 합류하여 정계에 복귀했다. 1898년에는 오쿠마 시게노부와 함께 헌정당을 결성하여 일본 최초의 정당 내각인 제1차 오쿠마 내각을 구성했고, 총리가 된 오쿠마 밑에서 내무대신을 역임했다. 그러나 이 내각은 당파 간의 다툼으로 4개월 만에 붕괴되었다.
1900년, 이타가키는 공직에서 은퇴하고 이후 대만 동화회 설립에 참여하는 등 사회 개량 운동에 힘썼다. 1914년에는 린셴탕과 함께 대만 동화회를 설립했는데, 이 단체는 대만인의 권리와 처우가 일본인과 동등해야 하며 차별이 없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19년, 이타가키는 8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3. 사상과 업적
이타가키 다이스케는 자유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일본의 전통적인 무사도 정신과 애국주의를 결합한 독자적인 자유민권사상을 주창했다. 고토 쇼지로 등과 함께 애국공당을 결성하고 국민의 기본권 보장을 주장했으며, 자유당을 창당하여 자유민권운동을 이끌면서 국민개병과 사민평등 실현을 위해 노력했다. 국회 개설과 헌법 제정을 통해 국민의 정치 참여를 확대하고, 입헌주의에 기반한 근대 국가 건설을 목표로 했다.
그는 철저한 존황주의자였으며, 군주제와 민주주의가 양립 가능하다는 '군민일체' 사상을 견지했다. 국민 중심의 국가 건설을 주장하며, 메이지 유신의 정신을 계승하여 천황 중심의 근대 국가 체제를 확립하고자 했다.
서구 열강의 침략에 대한 위기의식을 느껴 일본의 독자적인 발전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메이지 정부가 유럽과 미국의 사상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졌으며, 특히 유럽 문화의 근간을 이루는 기독교 사상에 대해 경계하며, 그 영향으로 일본의 전통적인 가치관이 훼손될 것을 우려했다. 가족 중심의 윤리관과 조상 숭배 사상을 강조했다.
정계에서 은퇴한 후에는 사회개혁 운동에 힘썼다. 장애인 복지, 빈민 구제, 여성 인권 향상 등 소외된 계층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다. 1908년에는 차별받는 부락민들의 해방을 위해 일본 최초의 전국 조직인 제국공도회를 창설하여 차별 철폐 운동을 이끌었다.
3.1. 자유민권사상
이타가키 다이스케는 서구의 자유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일본의 전통적인 무사도 정신과 애국주의를 결합한 독자적인 자유민권사상을 주창했다. 1874년 고토 쇼지로, 에토 신페이, 소에지마 다네오미 등과 함께 애국공당을 결성하고, "우리 일본 삼천만 국민은 모두 평등하게 특정한 권리를 부여받았다"라고 선언하며, 국민의 기본권 보장을 주장했다.
1881년 누마 모리카즈와 함께 자유당을 창당하여 자유민권운동을 이끌면서, '인민 평균의 이치'를 주장하며 국민개병과 사민평등 실현을 위해 노력했다. 1870년 고치 번의 대참사로서 "인민 평균의 이치"를 포고하고, 사민평등에 기반한 국방의 의무를 강조했다.
이러한 이타가키의 주장은 사쓰마 반란으로 정부가 위협받던 시기에도 정부를 비판하고 언론과 결사의 자유를 억압하는 법률에 저항하는 동력이 되었다.
이타가키는 국회 개설과 헌법 제정을 통해 국민의 정치 참여를 확대하고, 입헌주의에 기반한 근대 국가 건설을 목표로 했다. 그는 1882년 『자유당의 존왕론』을 통해 자유주의가 존황주의와 동일하다는 것을 역설하며 자유민권의 의미를 설명했다.
3.2. 존황사상
이타가키 다이스케는 철저한 존황주의자였으며, 군주제와 민주주의가 양립 가능하다는 '군민일체' 사상을 견지했다. 그는 국민 중심의 국가 건설을 주장하며, 메이지 유신의 정신을 계승하여 천황 중심의 근대 국가 체제를 확립하고자 노력했다.
3.3. 반(反)서구주의, 반(反)기독교
이타가키 다이스케는 서구 열강의 침략에 대한 위기의식을 느껴, 일본의 독자적인 발전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메이지 정부가 유럽과 미국의 사상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졌다. 특히, 유럽 문화의 근간을 이루는 기독교 사상에 대해 경계하며, 그 영향으로 일본의 전통적인 가치관이 훼손될 것을 우려했다.
이타가키는 기독교의 핵심 교리인 하느님의 존재는 인정했지만, 그 외의 내용은 대부분 인간의 상상력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하느님이 인간의 일에 직접 관여하거나, 인간이 기도한다고 해서 그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대신, 이타가키는 일본의 전통적인 가족 중심의 윤리관과 조상 숭배 사상을 강조했다. 그는 서구의 개인주의적 가치관보다, 가족과 조상을 중시하는 동양적 가르침이 일본 사회에 더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도덕 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인간 스스로 양심에 따라 행동하고, 사회에 공헌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당시 자유민권운동을 이끌던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3.4. 사회개혁 운동
이타가키 다이스케는 정계에서 은퇴한 후, 사회개혁 운동에 힘썼다. 그는 장애인 복지, 빈민 구제, 여성 인권 향상 등 소외된 계층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다. 1908년에는 차별받는 부락민들의 해방을 위해 일본 최초의 전국 조직인 제국공도회를 창설하여 차별 철폐 운동을 이끌었다.
4. 한국과의 관계
이타가키 다이스케는 대만 의회 설립 청원 운동에 참여했는데, 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 이승만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이타가키는 대만의 식민 정책에 대해 대만인에 대한 동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대만인의 권리와 처우가 일본인과 동등해야 하고 차별이 없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윤치호 등 한국의 개화파 지식인들은 이타가키 다이스케의 자유민권사상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한국의 독립운동과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하고자 노력했다.
5. 평가
이타가키 다이스케는 일본 근대 민주주의 발전에 큰 공헌을 한 정치가이자 사상가로 평가받는다. '헌정의 아버지', '자유민권운동의 지도자'로 불리며, 일본 국민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의 사상과 업적은 오늘날까지도 일본 정치와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 헌정의 아버지: 이타가키는 메이지 유신 이후 국회 개설과 헌법 제정을 주도하여 일본 헌정의 기초를 닦았다. 이토 히로부미는 "당신(이타가키 다이스케)은 국회 개설의 주창자이다. 나(이토)는 헌법의 입안자이다. 그러나 입헌 정치의 책임은 당신과 나에게 있다."라고 평가했다. 호즈미 츠네시게는 "제국 헌법 제정은 물론이고, 혁신의 시작인 오개조의 맹서에 의해 확립된 국시에 근거하지만, ... 일본에서 헌정 확립의 유래를 말하는 사람으로서 (이타가키) 백작을 제외하고 다른 최적의 사람을 구할 수 없다."라고 평가했다.
* 자유민권운동의 지도자: 자유민권운동을 이끌며 국민의 자유와 권리 신장을 위해 노력했다. 1874년 고토 쇼지로, 에토 신페이, 소에지마 다네오미와 함께 애국공당(Aikoku Kōtō)을 결성하여 "우리 일본 삼천만 국민은 모두 평등하게 특정한 권리를 부여받았으며, ... 이러한 권리는 본래 모든 인간에게 부여된 것이므로, 어떤 사람의 권력으로도 빼앗을 수 없다."라고 선언했다. 미야케 세츠레이는 "이타가키가 민권 운동을 한 것은, 원수가 되는 것보다 일본 역사 속에서 훨씬 가치 있는 것이었다"고 평가했다.
* 청렴결백한 정치가: 평생 청렴결백한 삶을 살았으며, 사리사욕을 추구하지 않았다. 나카에 초민은 "이타가키는 (다른 정치가와 달리) 금전에 집착하지 않고, 무욕전담이다. 옛 무사의 풍격을 가지고, 교활한 데는 조금도 없었다."라고 평가했다.
* 군인으로서의 능력: 보신 전쟁에서 뛰어난 군사적 능력을 발휘하여 메이지 유신 성공에 기여했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지금, 20만 군대를 이끌고 해외와 승부할 수 있는 자는 이타가키 외에는 없다"고 평가했다. 가와카미 소로쿠는 "만약 이타가키 백작이 군인의 길을 걸었다면 반드시 원수가 되었을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 존황 사상: 존황 사상이 투철했으며, 황실에 대한 충성심이 깊었다. 오사다케 타케시는 "백작(이타가키)은 정당의 총리가 되어서도 황실 관련 이야기가 나오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하오리하카마로 복장을 바꾸었으며, 폐하가 손수 심은 소나무 앞을 지날 때에는 공손히 경례하는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라고 평가했다.
이타가키 다이스케는 1882년 우익 급진주의자의 암살 시도에 "이타가키는 죽을지라도 자유는 죽지 않는다!"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초상화는 일본은행이 발행한 50센과 100엔 지폐에 등장했다.
6. 저서
板垣政法論일본어, 板垣退助일본어 저, 植木枝盛일본어 기, 五古周二일본어 편, 자유루, 1881년
通俗無上政法論일본어, 板垣退助일본어 입안, 植木枝盛일본어 기, 和田稲積일본어 편, 에이리 자유출판사, 1883년
板垣伯意見書일본어, 板垣退助일본어 저, 헌정당 당보국, 1899년
板垣南海翁之意見일본어, 板垣退助일본어 저, 郷敏儒일본어, 1890년
愛国論일본어 板垣伯일본어 입안, 出射吾三郎일본어 편, 요시다 서방, 1890년
自由党史일본어 (상하권), 板垣退助일본어 감수, 宇田友猪일본어, 和田三郎일본어 공편, 오차루, 1910년/岩波文庫일본어 상중하권 초판 1958년, 복간 1997년 외
一代華族論일본어, 伯爵일본어 板垣退助일본어 저, 사회정책사, 1912년
選挙法改正意見일본어, 板垣退助일본어 저
板垣退助先生武士道観일본어, 板垣退助일본어 저, 高知일본어 板垣會일본어, 1942년
憲政と土佐일본어, 板垣會일본어 편, 1941년
7. 가족 관계
이타가키 다이스케의 가족 관계는 다음과 같다.
| 관계 | 이름 | 비고 |
|---|---|---|
| 증조부 | 이누이 마사아키(일본어: 乾正明일본어) | |
| 조부 | 이누이 노부타케(일본어: 乾信武일본어) | |
| 부 | 이누이 마사시게(일본어: 乾正成일본어) | |
| 모 | 야마우치씨(일본어: 山内氏일본어) | |
| 부인 | 스즈 | |
| 기누코(일본어: 絹子일본어) | 후쿠오카 다카치카(福岡孝弟)의 양녀 | |
| (이름 미상) | 도사 번(土佐藩) 사무라이 하야시 마스노죠 마사모리(林益之丞正盛)의 여동생 | |
| (이름 미상) | 도사 번 사무라이 나카야마 야헤이지 히데마사(中山弥平次秀昌)의 차녀 | |
| 아들 | 이타가키 호코타로(일본어: 板垣鉾太郎일본어) | |
| 이누이 세이시(일본어: 犬養清史일본어) | ||
| 아라키 마고자부로(일본어: 荒木孫三郎일본어) | ||
| 이타가키 마사미(일본어: 板垣正巳일본어) | ||
| 이누이 무이치(일본어: 犬養武市일본어) | ||
| 손자 | 이타가키 모리마사(일본어: 板垣守正일본어) | |
| 이타가키 마사쓰라(일본어: 板垣正圀일본어) | ||
| 딸 | 효(일본어: ヒヨ일본어) | 카타오카 쿠마노스케(片岡熊之助)와 결혼 |
| 군(일본어: グン일본어) | 미야지 시게하루(宮地繁治)와 결혼 | |
| 엔(일본어: エン일본어) | 첫 번째 남편 야스카와 진이치(安川甚市)와 이혼 후 사진작가 오가와 카즈마(小川一眞)와 재혼 | |
| 치요코(일본어: チヨコ일본어) | 아사노 타이지로(아사노 소이치로(浅野総一郎) 2세)와 결혼 | |
| 료코(일본어: リヨコ일본어) | 오야마 토모에(大山巴)와 결혼 |
8. 관련 자료
이 섹션에는 이타가키 다이스케와 관련된 자료들이 제시되어 있다.
* 기후 사건
* 자유민권운동
* 애국공당
* 자유당
* 대일본제국 헌법
* 민선의원설립건백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