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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니키다 돗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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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구니키다 돗포는 1871년 지바현에서 태어난 일본의 소설가, 시인, 언론인이다. 그는 '돗포'라는 필명으로 활동했으며, 70여 편의 단편 소설과 시, 수필, 평론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남겼다. 청일 전쟁 종군 기자로 활동했으며, 낭만주의에서 자연주의로 문학적 스타일을 변화시켰다. 대표작으로는 단편 소설 《무사시노》가 있으며, 1908년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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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니키다 돗포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구니키다 돗포
1890년대의 구니키다
본명구니키다 데쓰오
출생일1871년 8월 30일
출생지지바현 초시시
사망일1908년 6월 23일
사망지가나가와현 치가사키시
묘소아오야마 영원
국적일본
직업소설가, 편집자, 언론인
장르시, 단편 소설, 장편 소설, 일기
사조낭만주의, 자연주의 문학
배우자사사키 노부코 (1895년 - 1896년)
에노모토 하루코(구니키다 하루코) (1898년 - 1908년)
자녀5명
학력
출신 학교도쿄 전문학교 영어 정치과 중퇴 (현 와세다대학교)
작품 활동
활동 기간1894년 - 1908년
데뷔작애제 통신 (愛弟通信, 1894년)
대표 작품무사시노 (武蔵野, 1898년)
잊을 수 없는 사람들 (忘れえぬ人々, 1898년)
쇠고기와 감자 (牛肉と馬鈴薯, 1901년)
주중일기 (酒中日記, 1902년)
운명론자 (運命論者, 1903년)
봄의 새 (春の鳥, 1904년)
다케노키도 (竹の木戸, 1908년)

2. 생애

1871년 지바현에서 태어났다. ‘돗포(独歩)’는 필명으로, 혼자 걷기를 좋아했던 고독한 성향과 자유로움을 느끼게 한다. 70여 편의 단편 소설을 발표했고 , 고백론, 수필, 평론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썼다. 일본 근대 문학사에서는 ‘천부적인 단편 작가’로 불린다. 유일한 장편 소설인 ≪폭풍(暴風)≫을 연재하다 완성을 보지 못하고, 폐병이 악화되어 1908년 짧은 인생의 막을 내렸다.[1][2]

2. 1. 탄생과 유년기

1871년 지바현에서 구니키다 데쓰오(国木田 哲夫)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돗포(独歩)’는 필명으로, 혼자서 걷기를 좋아했던 고독한 성향과 자유로움을 느끼게 한다.[1][2] 아버지 구니키다 사다오미(전팔)와 어머니 아와지 만의 아들로 미야자키현카이조군 쵸시에서 출생하였다.[4] 아버지 전팔은 구 타츠노번의 무사로 에노모토 타케아키 토벌(보신 전쟁) 후에 쵸시 앞바다에서 피난하여, 요시노야라는 여관에서 잠시 요양하던 중, 그곳에서 일하던 만이라는 여성과 알게 되어 돗포가 태어났다.[4] 이때 전팔은 본가에 처자를 남겨두고 있었으며, 만 역시 이혼한 쌀 상인 마사하루와의 사이에 생긴 자식이 있었다고 한다.[4] 돗포는 호적상으로는 마사하루의 아들로 되어 있지만, 다른 자료에서 판단하여 아버지 전팔인 듯하다.[4]

돗포의 생물학적 아버지에 대한 의문이 있지만, 돗포는 그의 어머니와 사무라이 계급의 남편에 의해 길러졌다.[2] 1874년, 가족은 도쿄로 이사했지만, 야마구치현으로 이주했고, 돗포는 이와쿠니에서 성장했다.[2] 같은 해, 전팔은 만과 돗포를 데리고 상경하여, 도쿄 시타야 토시마치 와키사카 구 번저 안에 가정을 꾸렸다.[4] 1876년에는 본가의 아내와 정식으로 이혼이 성립되었다.[4] 이후, 전팔은 사법성의 관리가 되어, 주고쿠 지방 각지를 전임했기 때문에, 돗포는 5세부터 16세까지 야마구치, 하기, 히로시마, 이와쿠니 등에서 살았다.[4]

촌락 지역인 조슈는 돗포에게 자연에 대한 사랑을 남겼고, 이는 후에 그의 문학에 나타난 자연주의에 영향을 미쳤다.[2] 소년기에는 학교 성적이 우수하고 독서를 좋아했지만, 상당한 장난꾸러기였다.[4] 싸움을 할 때 상대방을 손톱으로 할퀴는 것으로부터 "갈리거북"이라는 별명을 얻었다.[4] 자신의 출생의 비밀에 대해 고뇌하며, 성격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여겨진다.[4] 킨미 초등학교 간이 학과, 야마구치 이마미치 초등학교를 거쳐, 야마구치 중학교(현: 야마구치현립 야마구치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동급생 이마이 타다하루와 친교를 맺었다.[4] 1888년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학교를 그만두었지만, 1889년 도쿄의 학교로 다시 진학했다.[2]

2. 2. 학창 시절과 기독교 입문

구니키다 돗포는 1871년 지바현 조시에서 구니키다 데쓰오(国木田 哲夫)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2] 돗포의 생물학적 아버지에 대한 의문이 있지만, 돗포는 그의 어머니와 사무라이 계급의 남편에 의해 길러졌다. 가족은 1874년 도쿄로 이사했지만, 야마구치현으로 이주했고, 돗포는 이와쿠니에서 성장했다. 촌락 지역인 조슈는 돗포에게 자연에 대한 사랑을 남겼고, 이는 후에 그의 문학에 나타난 자연주의에 영향을 미쳤다. 1888년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학교를 그만두었지만, 1889년 도쿄의 학교로 다시 진학했다.[2]

도쿄 전문학교(현재의 와세다 대학) 영어과에서 공부했다. 서양의 민주주의에 관심을 보였고, 학교 당국에 반항적인 태도를 보여 1891년 학교에서 퇴학당했다. 21세가 되던 해, 우에무라 마사히사에게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다.[2] 그의 종교와 윌리엄 워즈워스의 시는 그의 후기 문체에 영향을 미쳤다.

소년기 돗포는 학교 성적이 우수하고 독서를 좋아했지만, 상당한 장난꾸러기였다. 싸움을 할 때 상대방을 손톱으로 할퀴는 것에서 "갈리거북"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자신의 출생의 비밀에 대해 고뇌하며, 성격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여겨진다. 킨미 초등학교 간이 학과, 야마구치 이마미치 초등학교를 거쳐, 야마구치 중학교(현 야마구치현립 야마구치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동급생 이마이 타다하루와 친교를 맺었다.[2]

1887년, 학제 개혁으로 야마구치 중학교를 퇴학하고,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마이의 권유로 상경했다. 이듬해 도쿄 전문학교(현재의 와세다 대학) 영어 보통과에 입학했다. 요시다 쇼인메이지 유신에 강한 흥미를 가지고, 학생 운동에도 참여했다. 도쿠토미 소호와 알게 되어 큰 영향을 받았고, 그 후 문학의 길을 지향하게 되었다. 이 해에 처녀작 「앰비션(야망론)」을 『여학잡지』에 발표하고, 『청년사해』 등의 잡지에 글을 기고했다. 이 무렵부터 교회에 다니게 되었고, 일본 기독 교회의 지도자 우에무라 마사히사를 숭배했다. 1889년 7월 10일, "테츠오"로 개명했다. 1890년 9월에는 영어 정치과로 전과했다. 워즈워스, 투르게네프, 칼라일 등을 좋아했다. 1891년 1월 4일에 우에무라 마사히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2] 이 해, 학교 개혁과 교장 하토야마 가즈오에 대한 불신 때문에 동맹 휴교를 벌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퇴학했다.

2. 3. 교직 생활과 좌절

구니키다는 1893년에 사이키에서 영어, 수학, 역사를 가르치기 시작했다.[1] 1893년 10월, 오이타현사이키시의 쓰루야 학관에 영어와 수학 교사로 부임하여 열성적으로 교육을 했다.[3] 하지만, 크리스찬인 돗포를 싫어하는 학생이나 교사도 많아, 이듬해 1894년 7월 말에 퇴직했다.[3]

이듬해 구니키다는 부모와 함께 도쿄에 정착하여 잡지 ''코쿠민노 토모''(國民の友, 국민의 벗)를 편집했고, 미래의 아내인 사사키 노부코를 만났다. 아리시마 다케오는 그의 유명한 소설인 ''어떤 여자''의 모델이 노부코라고 생각했다. 노부코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노부코의 어머니는 돗포와 결혼하는 대신 자살을 권유했다), 두 사람은 1895년 11월에 결혼했다. 구니키다의 뒤이은 재정적 어려움으로 인해 임신한 노부코는 겨우 5개월 만에 그와 이혼했다. 실패한 결혼은 돗포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이혼에 대한 그의 우울증과 정신적 고통은 1908년부터 1909년까지 출판된 ''아자무카자루노 키''에서 볼 수 있다.

사사키 노부코 (1878년 7월 20일 – 1949년 9월 22일)

2. 4. 기자, 편집자, 그리고 작가

1894년, 구니키다는 ''국민신문''의 뉴스팀에 종군 기자로 합류했다.[1] 청일 전쟁 중 전선에서 보낸 그의 보고서는 사후에 ''아이테이 츠신''(愛弟通信, 사랑하는 형제에게 보내는 통신)으로 수집되어 재출판되었으며 독자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이듬해 구니키다는 부모와 함께 도쿄에 정착하여 잡지 ''코쿠민노 토모''(國民の友, 국민의 벗)를 편집했고, 그의 미래의 아내인 사사키 노부코를 만났다. 아리시마 다케오는 그의 유명한 소설인 ''어떤 여자''의 모델이 노부코라고 생각했다. 노부코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1895년 11월에 결혼했다. 구니키다의 뒤이은 재정적 어려움으로 인해 임신한 노부코는 겨우 5개월 만에 그와 이혼했다. 실패한 결혼은 돗포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이혼에 대한 그의 우울증과 정신적 고통은 1908년부터 1909년까지 출판된 ''아자무카자루노 키''에서 볼 수 있다.

이혼 직후 구니키다는 낭만주의 시 장르로 전환하여 1897년에 다야마 가타이, 야나기타 구니오(마쓰오카 구니오)와 함께 시집 ''조조시''(抒情詩, 서정시)를 공동 저술했다. 이 무렵 구니키다는 ''돗포 긴''에 수집될 여러 시와 단편 소설 ''겐 오지''(源叔父, 겐 삼촌)를 발표했다. 그의 시적 스타일을 통해 구니키다는 낭만적 서정 문학에 신선한 흐름을 불어넣었다.

러일 전쟁 이후인 1905년, 구니키다는 출판 사업을 시작했지만 2년 만에 파산했다.[1] 같은 해에 그는 잡지 ''후진 가호''를 창간했다.

2. 5. 투병과 죽음

1907년 결핵에 걸려 1908년 초 가나가와현 지가사키시의 요양원으로 옮겨졌다.[5] 난코인에서 요양 생활을 하며 「대나무 문」, 「궁사」, 「절조」 등을 발표했고, 1908년에는 다야마 가타이, 후타바테이 시메이, 이와노 호메이 등이 문병을 위한 앤솔로지 『28인집』을 간행하여 격려하려 했지만, 병세는 악화되었다.[5] 같은 해 6월 23일 38세(만 36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5] 절필은 「두 노인」이다.[6]

아오야마 영원에 있는 돗포의 묘


장례식은 당시 돗포의 명성을 반영하여 다수의 문단 관계자들이 참석했으며, 당시 내각총리대신 사이온지 긴모치도 대리인을 보낼 정도였다. 친구인 다야마 가타이는 돗포의 인생을 한 글자로 표현한다면 「궁」이라고 조사를 낭독했다. 돗포 사후 2개월 후에 차남이 태어났다.

유해는 지가사키에서 화장된 후, 도쿄 아오야마 묘지에 매장되었다. 묘석의 「돗포 구니키다 테츠오의 묘」라는 글씨는 다야마 가타이가 쓴 것이다.

3. 작품 세계와 평가

돗포 문학은 일본 근대문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문예평론가 나카지마 겐조는 돗포의 문학이 존재의 자각을 일깨워 삶에 영향을 준다고 평가했다. 히라노 겐은 돗포의 작품을 읽으면 잊고 있던 원초적인 무언가가 다시 살아나는 느낌을 받는다고 말했다. ‘육욕 소설의 선조’, ‘메이지 시대의 진정한 작가’라는 평가도 있다.[2]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돗포를 스트린드베리, 니체, 톨스토이 등과 견주었다.

돗포는 흔히 자연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불리지만, 스스로는 자신을 자연주의에 묶으려 하지 않고 독자적인 문학관에 근거해 작품을 썼다.

3. 1. 초기: 낭만주의

1896년 도쿄부 도요타마군 시부야촌(현 도쿄도 시부야구)에 거처를 마련하고, 작가 활동을 재개했다. 같은 해 11월, 타야마 가타이, 마쓰오카 구니오(야나기타 구니오) 등을 알게 되어, 1897년 "돗포 음객"을 『국민지우』에 발표했다. 더 나아가, 가타이, 구니오 등의 시가 수록된 『서정시』가 간행되었는데, 여기에도 돗포의 시가 수록되었다. 5월에는 소설 "겐 아저씨"를 썼다. 『기만하지 않는 기록』은 이 무렵까지 쓰였다.

1898년, 하숙집 주인 딸인 에노모토 하루와 결혼했다. 하루는 후에 구니키다 하루코라는 이름으로 소설을 발표하고, 돗포사의 해체까지를 그린 "파산"을 『만조보』에 기고했으며, 『푸른 버선』 창간에도 참가했다.

돗포의 대표작으로는 무사시노의 자연미를 시정이 가득한 필치로 그려낸 武蔵野|무사시노일본어가 있다. 이와이 슌지 감독의 영화 4月物語|4월 이야기일본어의 배경이 된 지역이며, 영화에서 여주인공이 돗포의 武蔵野|무사시노일본어를 읽는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 武蔵野|무사시노일본어가 일본 근대문학사에 이름을 남기게 된 이유는 이전과는 다른 관점과 방식으로 무사시노를 표현했기 때문이다. 돗포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시적 정취’가 무사시노에 어울린다고 말했으며, 추상적 개념의 아름다움에서 벗어나 무사시노를 직접 경험하고 받은 감동을 시적 언어로 표현하겠다는 열망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이외에도 스스로 동맥을 끊은 친구의 죽음 앞에서 죽음의 문제를 돌아보는 死|죽음일본어, 저회취미(低徊趣味)라는 관점에서 한 인간을 가장 잘 드러낸 완벽에 가까운 사생문이라고 나쓰메 소세키가 극찬한 巡査|순사일본어, 시대적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운명의 톱니바퀴에 끼여 세상과 불협화음을 내며 살아간 한 인간을 그린 富岡先生|도미오카 선생님일본어, 나약하기에 불행한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남자의 비극을 그린 취중일기일본어, 교육의 본질이 삶의 지혜와 맞닿아 있음을 보여주면서 돗포가 추구하는 교육자와 영웅은 어떠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소설 해돋이일본어 등 열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3. 2. 중기 ~ 후기: 자연주의

구니키다 돗포는 1901년에 첫 단편 소설집 《무사시노》(武蔵野)를 출판했는데, 이 작품은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들을 그렸다.[1] 1904년에 쓰여진 《봄의 새》(春の鳥)는 낭만주의의 최고 수준에 도달했다고 평가받지만, 이후 작품인 《가난한 사람의 죽음》(窮死)과 《대나무 문》(竹の木戸)에서는 자연주의로의 전환을 보여주었다.[1]

러일 전쟁 이후인 1905년, 돗포는 출판 사업을 시작했지만 2년 만에 파산했다.[1] 같은 해, 그는 잡지 《후진 가호》를 창간했다.[1]

1887년 학제 개혁을 위해 야마구치 중학교를 퇴학하고, 도쿄 전문학교(현재의 와세다 대학)에 입학하여 학생 운동에 참여했다.[2] 도쿠토미 소호에게 큰 영향을 받아 문학의 길을 지향하게 되었고, 우에무라 마사히사를 숭배했다.[2] 1891년 세례를 받고 동맹 휴교를 벌이다 퇴학당했다.[2]

아사고 촌(현 야마구치현 구마게군다부세정)에서 가족과 함께 지내며 월금을 연주하고, 아사고 초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기도 했다.[2] 도미나가 유린에게 자극을 받고 나미노 영학숙을 개설하여 아이들을 가르쳤다.[2] 후에 도미나가 유린을 모델로 한 「도미오카 선생님」을 저술했다.[2]

마리후 촌에서 가정교사로 일하며 이시자키 토미와 연애했으나, 그녀의 부모 반대로 결혼에 실패했다.[2] 그 후 「주중일기」, 「귀거래」 등 다부세를 배경으로 한 작품을 다수 발표했다.[2]

1892년부터 1894년까지 야나이에 거주했고, 1893년에는 도쿠토미 소호의 소개로 오이타현사이키시의 쓰루야 학관에서 영어와 수학 교사로 부임했다.[3] 하지만 돗포를 싫어하는 학생과 교사도 많아 1894년에 퇴직했다.[3]

후타바테이 시메이의 번역 "아히비키"에 영향을 받아 "지금의 무사시노"(후에 "무사시노"로 개제) 등을 발표하며 낭만파 작가로서 활동을 시작했다.[4] 1901년에 첫 작품집 『무사시노』를 간행했지만, 당시 문단에서는 평가받지 못했다.[4] "쇠고기와 감자", "가마쿠라 부인", "술중일기"를 썼고, 1903년에 발표한 "운명론자", "정직자"로 자연주의의 선구자가 되었다.[4]

이러한 작품들은 1905년에 『돗포집』, 1906년에 『운명』으로 묶여 간행되어 높이 평가받았지만, 당시 문단은 오자키 코요와 코다 로한이 주류였기에 돗포의 작품은 이해받지 못했고, 문학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었다.[4]

1899년 『호치 신문』 기자, 1901년 『민성신보』 편집장으로 일했지만, 호시 토루 암살과 생활고로 어려움을 겪었다.[4] 사이온지 긴모치에게 의탁했고, 가마쿠라에서 작가 동료들과 공동 생활을 했다.[4]

1903년 야노 류케이의 제안으로 월간 그래프 잡지 『동양화보』 편집장이 되었고, 『근사화보』로 변경했다.[4] 1904년 러일 전쟁 개전 후 『전시화보』로 변경, 리얼한 사진과 대형화로 인기를 얻었다.[4] 히비야 방화 사건 특별호 『도쿄 소요화보』를 출판했다.[4]

1905년 일본해 해전 승리 후, 1906년 초에 걸쳐 『소년지식화보』, 『소녀지식화보』, 『미관화보』, 『실업화보』, 『부인화보』, 『서양 근세 명화집』, 『유락화보』 등 다수의 잡지를 기획·창간했다.[4] 12종의 잡지 편집장을 겸임했지만, 『근사화보』 부수 격감과 회사 적자로 1906년 야노 류케이는 근사화보사 해산을 결의했다.[4]

돗포는 돗포사를 창립하여 5종의 발행을 계속했다.[4] 코스기 미세이, 쿠보다 쿠보, 사카모토 코렌도, 타케바야시 무소안 등과 협력했고, 일본 최초의 여성 보도 사진 작가도 합류했다.[4] 『상등 퐁치』, 사와다 붓쇼 편집의 『옥중의 수기』 등을 발매했다.[4]

3. 3. 문학적 영향과 평가

돗포 문학은 일본 근대문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문예평론가 나카지마 겐조는 돗포의 문학이 존재의 자각을 일깨워 삶에 영향을 준다고 평가했다. 히라노 겐은 돗포의 작품을 읽으면 잊고 있던 원초적인 무언가가 다시 살아나는 느낌을 받는다고 말했다. ‘육욕 소설의 선조’, ‘메이지 시대의 진정한 작가’라는 평가도 있다.[2]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돗포를 스트린드베리, 니체, 톨스토이 등과 견주었다.

돗포는 흔히 자연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불리지만, 스스로는 자신을 자연주의에 묶으려 하지 않고 독자적인 문학관에 근거해 작품을 썼다. 1907년 돗포사가 파산한 후 돗포는 폐결핵에 걸렸지만, 전년도에 간행한 작품집 『운명』이 높은 평가를 받으며 자연주의 운동의 중심적 존재로 주목받았다.[5] 1908년에는 타야마 가타이, 후타바테이 시메이, 이와노 호메이 등이 앤솔로지 『28인집』을 간행하여 돗포를 격려하기도 했다.[5]

4. 작품 목록

돗포의 대표작으로는 무사시노의 자연미를 담아낸 武蔵野|무사시노일본어가 있다. 이 작품은 이와이 슌지 감독의 영화 4月物語|4월 이야기일본어의 배경이 되었으며, 영화 속에서 여주인공이 이 책을 읽는 장면이 나온다. 武蔵野|무사시노일본어는 돗포가 직접 경험한 무사시노의 감동을 시적 언어로 표현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그 외에도 친구의 죽음을 다룬 死|죽음일본어, 나쓰메 소세키가 극찬한 巡査|순사일본어, 시대에 뒤떨어진 한 인간을 그린 富岡先生|도미오카 선생님일본어, 불행한 운명의 남자를 그린 酒中日記|취중일기일본어, 교육의 본질을 다룬 日の出|해돋이일본어 등 다양한 단편 소설들이 있다.

돗포의 작품은 주로 『무사시노』(1901년 3월, 민우사), 『돗포집』(1905년 7월, 근사화보사), 『운명』(1906년 3월, 사쿠라 서방), 『심성』(1907년 5월, 채운각), 『돗포집 제2』(1908년 7월, 채운각), 『너울』(1908년 11월, 채운각)의 6개 단편집에 수록되어 있다.

작품 목록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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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가족 관계

관계이름출생년도비고
첫 번째 부인사사키 노부코1878년
딸: 우라코1897년돗포와 이혼 후 출생. 얼마 되지 않아 입양되었고, 기노시타 나오에의 양녀가 됨[7]
두 번째 부인에노모토 치지
(국목전 치코)
1879년
장녀: 사다코1899년
장남: 국목전 토라오1902년
차녀: 시바타 미도리1904년
차남: 사토 테츠지1908년돗포가 사망한 지 3개월 후에 출생. 조각가. 미타카역 북쪽 출구에 있는 돗포의 비석에 있는 반신 릴리프는 테츠지의 작품[8]
손자미타 타카시1924년영화배우. 토라오의 아들.
증손국목전 고코미타 타카시의 딸[9] 이자, 전직 여배우[10](당시 예명은 국목전 아코). 하니 스스무 작품에 출연 후, 30세에 영국으로 건너감. 그 후 프랑스파리 거주[11]
외증손나카지마 아유무1988년배우. 돗포의 차녀 미도리의 증손[12]
외증손국목전 사라1994년모델. 국목전 고코와 이탈리아 남성과의 딸[11]


6. 기념관 및 기념비

구니키다 돗포 주거지

  • 조카마치 사에키 구니키다 돗포관오이타현 사이키시에서 돗포가 하숙했던 사카모토 나가토시(돗포가 교사로 근무했던 쓰루야 학관의 관장)의 옛 저택이다. 돗포는 1893년(메이지 26년) 10월부터 쓰루야 학관 교사로 동생과 함께 약 1년간 사이키에 머물렀다.[3]
  • 사에키성 산 정상에는 "돗포의 비"가 세워져 있다. 돗포는 사이키 체류 중 샤쿠마산, 히코산, 모토고시산, 쓰가무레산 등 여러 산에 올랐는데, 그중에서도 사에키성 터의 성산을 가장 사랑하여 여러 번 올랐다. 그 모습은 「속이지 않는 기록」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3]
  • 구니키다 돗포의 비는 돗포 탄생지인 지바현 초시시에 있으며, 히나쓰 코노스케의 휘호로 쓰여진 시비이다.[18]
  • 구니키다 돗포 주거지는 1896년부터 돗포가 살았던 도쿄도 시부야구 우다가와정에 세워졌다.[19]
  • 국목전독보의 비미타카역 북쪽에 무사시노시가 세운 시비로, 돗포의 작품 무사시노와 관련이 있다. 다마가와 상수도에 걸린 벚꽃 다리 기슭에는 무사시노 보존회 등이 세운 비가 있다.[14]
  • 국민의 집 독보 구저야나이시에 있는 돗포의 옛집으로, 돗포가 20세에서 22세까지 지낸 곳이다.[15]
  • 국민의 집 독보의 비는 요양을 위해 온천에 방문했던 가나가와현 유가와라정의 만요 공원 내에 설치되었다.[16] 같은 공원 내에 있던 독보의 탕이라는 구니키다 돗포의 이름을 딴 족탕 시설은 2020년 3월 말에 폐쇄되었다.[17]

7. 한국어 번역

國木田 獨歩|구니키다 돗포일본어의 작품은 김영식이 번역하여 을유문화사에서 2011년 8월 10일에 출간된 《무사시노 외》에 수록되어 있다. 이 책에는 겐 노인, 무사시노, 잊을 수 없는 사람들, 쇠고기와 감자, 소년의 비애, 그림의 슬픔, 가마쿠라 부인, 비범한 범인, 운명론자, 정직자, 여난, 봄 새, 궁사, 대나무 쪽문, 거짓 없는 기록이 실려 있다.

참조

[1] 웹사이트 History of Magazines in Japan: 1867-1988 http://www.kanzaki.c[...] Kanzaki 2016-09-26
[2] 웹사이트 国木田独歩の紹介 - 田布施町役場 https://www.town.tab[...]
[3] 웹사이트 公共施設ガイド 城下町佐伯国木田独歩館 http://www.city.saik[...] 佐伯市 2012-03-16
[4] 웹사이트 戦時画報 https://iss.ndl.go.j[...]
[5] 뉴스 <書物の身の上>スペイン風邪の義援出版 小川未明、危機脱し童話執筆 https://www.nikkei.c[...] 日本経済新聞 2021-01-03
[6] 서적 作家の臨終・墓碑事典 東京堂出版 1997
[7] 서적 美人の戸籍しらべ : 現代評判 {{NDLDC|913485/36}} 1920
[8] 웹사이트 市内の各スポット解説(三鷹駅前エリア) https://www.city.mit[...] 三鷹市役所
[9] 간행물 キネマ旬報 黒甕社 1976
[10] 서적 日本映画名作完全ガイド: 昭和のアウトロー編ベスト400 1960‐1980 ウルトラヴァイヴ 2008
[11] 간행물 《112年史》子孫とともに今、新たに見つめる初代編集長・国木田独歩の創刊メッセージ http://www.fujingaho[...] 婦人画報 2017-01-10
[12] 간행물 婦人画報 2024-07
[13] 뉴스 【明治の50冊】(24)国木田独歩『武蔵野』郷愁誘う自然美の描写 https://www.sankei.c[...] 産経新聞 2018-09-23
[14] 웹사이트 国木田独歩の碑 http://musashino-kan[...] 武蔵野市観光機構 2018-09-23
[15] 웹사이트 国木田独歩旧宅 http://www.yanaicci.[...] 柳井商工会議所
[16] 웹사이트 湯河原の歴史と文学/国木田独歩(1871〜1908) http://www.yugawara.[...] 湯河原温泉観光協会 2018-09-23
[17] 웹사이트 万葉公園リニューアル工事について https://www.town.yug[...] 湯河原町
[18] 웹사이트 銚子文学碑めぐり 国木田独歩 詩碑 https://www.city.cho[...] 銚子市
[19] 웹사이트 文化人の碑 https://www.city.shi[...] 渋谷区 2024-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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