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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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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는 기원전 124년경에 태어난 고대 로마의 웅변가이자 정치가이다. 그는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의 개혁을 지지하고 가이우스 마리우스를 지지하며 민중파에 가담했으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와의 갈등으로 인해 살해당했다. 그는 기원전 91년 드루수스의 개혁을 지원하고, 기원전 89년에는 선거법 개정안을 통해 마리우스에게 미트리다테스 전쟁 지휘권을 부여하려 했다. 술라가 로마로 진군하자 도주했으나 라우렌툼에서 체포되어 처형되었고, 그의 법안은 무효화되었다. 키케로는 그를 유능한 웅변가로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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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
조각 흉상
이름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
로마자 표기Publius Sulpicius Rufus
출생기원전 124년
사망기원전 88년 (35–36세)
국적로마
직업정치인, 연설가, 거리 선동가
공직
직책평민 호민관 (기원전 88년)
군사 경력
직책레가투스
참전마르시 전쟁 (기원전 90–89년)
술라의 로마 공격 (기원전 88년)
참전 전쟁 제목전쟁

2. 생애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기원전 124년경 ~ 기원전 88년)는 로마 공화국 말기의 정치가이자 뛰어난 웅변가였다. 그는 초기에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와 같은 온건 개혁파 귀족들과 교류하며 정치 경력을 시작했으나, 동맹시 전쟁 이후 급진적인 민중파로 전향하여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손을 잡았다. 기원전 88년 민중의 호민관으로서 이탈리아 동맹 시민들의 로마 시민권 확대를 위한 선거법 개정을 추진했으나, 이는 술라와의 격렬한 정치적 대립으로 이어졌다. 결국 술라의 로마 진군 이후 도주하다 살해되었다. 그의 정치 활동은 공화정 말기 로마 사회의 갈등과 변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평가받는다.

2. 1. 초기 생애와 경력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는 기원전 124년경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정확한 가문 배경은 명확하지 않다. 동시대 법학자인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와의 친족 관계 여부는 알려지지 않았으며, 이름이 같음에도 불구하고 로마 귀족 출신이 아닐 가능성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당시 가장 중요한 귀족들과 개인적인 친분을 맺고 있었기에 유력 가문 출신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술피키우스의 절친한 친구이자 스승이었던 웅변가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포함된다. 술피키우스는 당대 최고의 웅변가 중 한 명으로 인정받았다. 그는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가이우스 그라쿠스의 정적인 동명의 인물의 아들)와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삼촌)와 함께 젊은 귀족 그룹을 형성했다. 이들은 재능과 활력을 갖춘 인물들로, 로마 원로원의 구세대와 젊은 세대 모두 로마의 미래에 대한 큰 기대를 걸게 했다.

기원전 95년, 술피키우스는 귀족들의 지지 속에 전 민중의 호민관이었던 가이우스 노르바누스를 고발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이는 그의 첫 주요 공개 활동이었으며, 이후 몇 년간 법정 변호사로 활동했다. 기원전 91년, 친구인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스가 민중의 호민관으로 재임하면서 술피키우스는 본격적으로 정치에 참여하게 되었다. 술피키우스와 그의 동료들은 지배 계급이 피지배 계층에게 통치를 더 용인하게 만들어 권력을 유지하고 강화하려는 온건한 개혁 노선을 지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위해 호민관 드루스는 기사 계급으로부터 원로원으로 법원 관할권을 이전하고, 이탈리아 전역의 로마 동맹시 주민들에게 완전한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며, 빈민들에게 토지와 곡물을 분배하는 등 여러 야심 찬 개혁안을 제안했다. 드루스의 개혁을 이어가기 위해 그의 친구들인 코타와 술피키우스는 각각 기원전 90년과 기원전 89년에 민중의 호민관직을 맡기로 합의했다.

2. 2. 정치 활동과 개혁 시도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의 개혁 시도는 다양한 이해관계를 동시에 만족시키려 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기사 계급은 법원에서 배제될 가능성에 강하게 반발했고, 드루수스는 이들과 원로원 귀족 모두를 만족시킬 타협점을 찾지 못했다.

기원전 91년 9월, 술피키우스가 참석했던 투스쿨룸 근처 크라수스의 별장에서 지지자 회의가 열린 직후, 크라수스가 사망하면서 드루수스는 원로원 내 주요 지지자를 잃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드루수스 자신도 불분명한 상황에서 암살되었다.

로마의 이탈리아 동맹국들은 시민권 획득 희망이 좌절되자 반란을 일으켜 사회 전쟁을 시작했다.

사회 전쟁 발발 후, 기사 계급의 반발 속에 정치적 동기의 기소가 이어졌다. 호민관 퀸투스 바리우스 세베루스는 이탈리아 동맹국에 시민권을 약속하여 반란을 부추겼다는 명목으로 드루수스 지지자들을 기소하기 위한 위원회를 설립했다. 술피키우스의 친구인 코타는 드루수스의 뒤를 이어 호민관이 될 예정이었으나, 유죄 판결을 피해 망명해야 했다.

술피키우스는 이탈리아 반란군에 맞서 군 복무를 수행했기 때문에 기소를 피할 수 있었다. 그는 부관(legatus|레가투스la)으로 참전했으나, 구체적인 활동은 명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로마 기록에는 기원전 90년과 89년에 반란군에 맞서 활약한 술피키우스라는 이름의 레가투스가 언급되며, 기원전 89년에는 집정관 폼페이우스 스트라보 밑에서 복무했다고 한다. 일부 학자들은 이 인물을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와 동일 인물로 보지만,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일 가능성을 제기하는 학자도 있다.

2. 3. 사회 전쟁과 민중파 가담

얼마 지나지 않아 술피키우스는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민중파를 지지한다고 선언했는데, 이는 당시 사람들에게 놀라운 변화로 받아들여졌다. 키케로는 '훌륭한 지위에서 시작한 술피키우스가 민중의 바람에 휩쓸려 본인이 원했던 것보다 더 멀리 나아갔다'고 평가했다.[1] 술피키우스는 빚이 많았으며, 마리우스가 미트리다테스 전쟁의 지휘권을 얻도록 도와주면 재정적 지원을 약속했을 가능성이 있다. 당시 미트리다테스 전쟁의 지휘관으로는 이미 술라가 임명된 상태였다.

마리우스를 위해 지휘권을 확보하고자, 술피키우스는 새로운 시민권을 얻은 이탈리아 동맹 시민들과 해방 노예들이 기존의 투표자들보다 수적으로 우세해지도록 하는 선거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이 법안은 로마 원로원의 다수로부터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 집정관이었던 술라와 폼페이우스 루푸스는 공무 중단(Justitium)을 선포하며 개혁을 막으려 했지만, 마리우스와 술피키우스는 지지자들을 동원해 폭동을 일으켰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집정관들은 결국 공무 중단 선포를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술피키우스의 법안은 통과되었고, 새로운 유권자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당시 사사(private citizen) 신분이었던 마리우스에게 미트리다테스 전쟁 지휘권이 넘어갔다.[2]

이 소식을 들은 술라는 당시 놀라에 주둔 중이던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즉시 로마로 진군했다. 갑작스러운 군사 행동에 마리우스와 술피키우스는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고 로마에서 도망쳤다. 마리우스는 아프리카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지만, 술피키우스는 라우렌툼의 한 별장에 숨어있다가 발각되어 살해당했다. 그의 잘린 머리는 술라에게 보내져 로마의 포룸에 전시되었고, 그가 통과시킨 법들은 모두 무효화되었다.

술피키우스는 본래 온건한 개혁 성향을 가진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이나, 정치적 상황 변화 속에서 점차 급진적인 민중파 지도자로 변모하게 되었다. 기원전 95년에는 호민관 가이우스 노르바누스를 탄핵하기도 했고, 민중의 법령에 의한 사법 판결을 폐지하려는 시도에도 반대했다. 하지만 율리우스 가문의 반발을 무릅쓰고, 프라에토르 경력이 없어 자격 요건을 갖추지 못한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스트라보 보피스쿠스의 집정관 출마를 불법이라며 반대하는 등, 원칙을 중요시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가 추진했던 이탈리아 동맹 시민 관련 선거법 개정안은 정의로운 조치로 평가받을 수 있었으나, 폭력적인 방식으로 강행되었다는 비판도 받는다.

키케로는 젊은 시절 호민관 술피키우스의 연설을 듣기 위해 거의 매일 포룸에 갔다고 회고하며(''브루투스'', 306), 그를 뛰어난 웅변가로 높이 평가했다. 키케로는 술피키우스의 웅변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브루투스'', 55): "내가 들어본 모든 웅변가 중 가장 위엄 있고, 말하자면 가장 비극적인 느낌을 주는 연설가였다. 그의 목소리는 크면서도 달콤하고 맑았으며, 몸짓은 우아함이 넘쳤고, 말은 빠르고 유창했지만 결코 장황하지 않았다. 그는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를 모방하려 했지만, 크라수스만큼의 매력은 부족했다." 술피키우스는 직접 쓴 연설문을 남기지 않았으며, 그의 이름으로 전해지는 연설문들은 푸블리우스 카누티우스가 작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술피키우스는 키케로의 저서 ''웅변가론''에 등장하는 대화자 중 한 명이기도 하다.

2. 4. 호민관 활동과 죽음

얼마 지나지 않아 술피키우스는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민중파를 지지한다고 선언했는데, 이는 동시대 사람들에게 놀라운 반전으로 여겨졌다. 키케로는 '훌륭한 지위에서 시작한 술피키우스는 민중의 바람에 실려 그가 원했던 것보다 더 멀리 갔다'고 평가했다.[1] 술피키우스는 상당한 빚을 지고 있었는데, 마리우스가 미트리다테스 전쟁의 지휘관으로 임명될 경우 재정적 지원을 약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전쟁 지휘권은 이미 술라에게 넘어간 상태였다.

마리우스를 위해 지휘권을 확보하고자 술피키우스는 새로운 선거법 개정안을 제출했다. 이 법안은 새로 시민권을 얻은 이탈리아 동맹시 주민들과 해방 노예들이 기존의 투표 방식을 바꿔 선거에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로마 원로원의 다수는 이 제안에 강력히 반대했다. 당시 집정관이었던 술라와 폼페이우스 루푸스는 공무 중단(Justitium)을 선포하며 법안 통과를 막으려 했다. 그러나 마리우스와 술피키우스는 지지자들을 동원하여 폭동을 일으켰고, 신변의 위협을 느낀 집정관들은 결국 공무 중단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술피키우스의 법안은 통과되었고, 새로운 유권자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당시 공직이 없던 마리우스에게 미트리다테스 전쟁 지휘권이 부여되었다.[2]

이 소식을 들은 술라는 당시 놀라에 주둔 중이던 군대를 이끌고 즉시 로마로 진군했다. 이는 로마 역사상 유례없는 일이었다. 갑작스러운 군사적 압박에 마리우스와 술피키우스는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고 로마에서 도망쳤다. 마리우스는 아프리카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지만, 술피키우스는 라우렌툼의 한 별장에 숨어있다가 발각되어 살해당했다. 그의 머리는 술라에게 보내져 로마 포룸에 효수되었고, 그가 통과시켰던 법들은 모두 무효화되었다.

술피키우스는 본래 온건한 개혁가였던 것으로 평가받지만, 급변하는 정치 상황 속에서 민중파의 주요 지도자 중 한 명이 되었다. 기원전 95년에는 소란을 일으킨 호민관 가이우스 노르바누스를 탄핵했으며, 민중의 법령에 의한 사법 판결을 폐지하려는 시도에 반대하기도 했다. 또한 율리우스 가문의 반발을 무릅쓰고, 프라에토르 직을 거치지 않아 자격 요건을 갖추지 못한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스트라보 보피스쿠스의 집정관 출마를 불법이라며 반대하는 등 원칙을 지키려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의 선거법 개정안은 이탈리아 동맹시 주민들에게 필요한 정의로운 조치였으나, 그 추진 과정에서 폭력적인 수단이 동원되었다는 비판도 받는다.

키케로는 젊은 시절 술피키우스의 연설을 듣기 위해 거의 매일 포룸에 갔다고 회고하며(브루투스, 306), 그를 뛰어난 웅변가로 높이 평가했다. 키케로는 술피키우스의 웅변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브루투스, 55): "내가 들어본 모든 웅변가 중 가장 위엄 있었고, 말하자면 가장 비극적인 느낌을 주었다. 그의 목소리는 크면서도 달콤하고 맑았으며, 몸짓은 우아함으로 가득 찼다. 그의 언어는 빠르고 유창했지만, 결코 과장되거나 장황하지 않았다. 그는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를 모방하려 했지만, 그만의 매력이 있었다." 술피키우스는 직접 쓴 연설문을 남기지 않았으며, 그의 이름으로 전해지는 연설문들은 푸블리우스 카누티우스가 작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술피키우스는 키케로의 저서 웅변가론에 등장하는 대화자 중 한 명이기도 하다.

참조

[1] 서적 Har. resp.
[2]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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