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에블라 전투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푸에블라 전투는 1862년 5월 5일, 멕시코 푸에블라에서 멕시코군이 프랑스군을 상대로 거둔 승리를 말한다. 멕시코는 1861년 채무 지불을 연기했고, 영국, 스페인, 프랑스가 멕시코에 출병했다. 영국과 스페인이 철수한 후, 프랑스는 멕시코를 침공했으나 이 전투에서 패배했다. 이 전투는 멕시코에 희망을 주었으며, 이그나시오 사라고사 장군과 포르피리오 디아스가 두각을 나타냈다. 이 전투를 기념하는 싱코 데 마요는 멕시코의 국경일은 아니지만, 미국에서 멕시코계 미국인들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중요한 기념일로 자리 잡았다. 프랑스는 이후 재침공하여 멕시코시티를 점령하고 제2 멕시코 제국을 수립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862년 멕시코 - 멕시코 출병
멕시코 출병은 1861년부터 1867년까지 프랑스, 영국, 스페인 등이 베니토 후아레스 대통령의 외채 지불 유예 선언을 계기로 멕시코에 군사 개입한 사건으로, 프랑스는 이를 이용하여 멕시코를 점령하고 제2 멕시코 제국을 세우려 했으나 실패했다. - 1862년 5월 - 홈스테드 법
홈스테드 법은 1862년 미국에서 제정되어 서부 공유지를 개척자들에게 무상으로 제공, 자영농 육성 및 서부 개척을 가속화했으나, 원주민 토지 강탈, 환경 파괴, 법 악용 등의 문제점을 야기했으며, 1976년에 폐지되었으나 알래스카에서는 1986년까지 적용되었다. - 1862년 전투 - 자계 전투
1862년 상해 공격 당시, 영국과 프랑스 해군이 청나라 군대와 협력하여 태평천국군을 공격한 자계 전투에서 미국인 용병 워드가 이끄는 상승군이 활약했으나, 워드 전사 후 상승군은 쇠퇴하며 태평천국군 진압 전략에 영향을 주었다. - 1862년 전투 - 상해 전투 (1861년)
상해 전투 (1861년)는 태평천국의 난 당시 이수성이 이끄는 태평천국 군이 상하이를 점령하려 했으나, 청나라 군과 영국, 프랑스 군의 연합에 패배하여 청나라가 승리하고 서구 열강의 영향력이 강화된 일련의 군사적 충돌이다.
푸에블라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
전투 정보 | |
전투 | 푸에블라 전투 |
일부 | 멕시코 출병의 일부 |
![]() | |
날짜 | 1862년 5월 5일 |
장소 | 푸에블라, 푸에블라 주, 멕시코 |
결과 | 멕시코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 1 | 멕시코 |
교전 2 | 프랑스 |
지휘관 및 지도자 | |
멕시코 | 이그나시오 사라고사 포르피리오 디아스 미겔 네그레테 펠리페 베리오사발 |
프랑스 | 샤를 드 로렌세 |
병력 규모 | |
멕시코 | 3,791명 |
프랑스 | 5,730명 |
사상자 및 피해 | |
멕시코 | 사망: 87명 부상: 252명 실종: 12명 총합: 351명 |
프랑스 | 사망: 131명 부상: 345명 총합: 476명 |
2. 배경
1861년 멕시코의 베니토 후아레스 대통령은 재정난을 이유로 외채 상환 유예를 선언했다. 이에 프랑스, 영국, 스페인은 채권 회수를 명분으로 멕시코를 침공했다. 이를 삼국 동맹이라 한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멕시코를 발판 삼아 아메리카 대륙에 가톨릭 제국을 건설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1861년 7월 17일, 베니토 후아레스 대통령은 국회를 통해 2년간 대외 채무 지불 연기를 결정했다. 이에 영국, 스페인, 프랑스는 12월에 멕시코에 출병하여 세관 관리를 통해 채무 회수를 시도했다. 그러나 프랑스가 멕시코에 영토적 야심을 품고 있다는 것이 밝혀지자, 1862년 4월까지 영국과 스페인은 철병했고, 프랑스만이 멕시코 침공을 계속했다.
프랑스군은 철수 도중에 협정을 파기하고 멕시코군을 공격했으며, 이에 맞서 멕시코군은 이그나시오 사라고사 장군과 포르피리오 디아스 여단장의 지휘 아래 방어를 시도했다.
2. 1. 삼국 동맹의 멕시코 침공
1861년 12월, 스페인 함대가 베라크루스를 점령하고, 이어 프랑스군과 영국군이 합류했다.[12][13] 이는 멕시코 대통령 베니토 후아레스가 1861년 7월부터 프랑스, 영국, 스페인 채권자에게 2년간의 대출 이자 지불 유예를 부과한 결과였다. 나폴레옹 3세는 이전 멕시코 정부의 부채를 징수할 목적으로 군대를 파견했고, 베니토 후아레스 대통령은 이 부채의 무효를 선언하며 유럽 열강들에게 아무것도 지불할 게 없다고 단언했다.1862년 1월 10일, 스페인 장군 후안 프림은 동맹국이 정복이나 새로운 정부를 세우려 한다는 소문을 부인하고, 세 강국이 단지 손해 배상 청구 관련 협상을 원한다고 강조했다.[13] 멕시코 정부는 협상을 요청했고,[14] 1862년 1월 23일, 군대가 내륙으로 이동하고 오리사바에서 회담을 열기로 합의했다. 이 합의는 또한 후아레스 정부와 멕시코의 주권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15]
그러나 1862년 4월 9일, 오리사바 협정이 결렬되었다. 프랑스가 이전 조약을 위반하고 멕시코를 침공하여 정부에 간섭할 의사를 명확히 했기 때문이다. 영국은 멕시코 정부에 철수 의사를 밝혔고, 영국 정부와 합의를 이루었다.[16] 4월 11일, 마누엘 도블라도 장관은 프랑스 정부에 그들의 의도가 전쟁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알렸다.
결국 1862년 4월, 영국과 스페인은 멕시코에서 철수하고, 프랑스 단독으로 침공을 계속했다.[19] 프랑스는 미국에 대항하기 위해 아메리카 대륙에 "가톨릭 제국"을 건설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2. 2. 프랑스의 멕시코 침공
1861년 후반,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 3세는 이전 멕시코 정부의 부채를 징수하기 위해 스페인 군대와 함께 프랑스 군대를 멕시코에 보냈다. 베니토 후아레스 대통령은 이 부채가 무효이며 유럽 열강들에게 지불할 것이 없다고 선언했다. 나폴레옹의 군대는 1861년 12월 8일 베라크루스 항구를 점령했다. 이후 멕시코와 휴전하면서 영국과 스페인 군대는 고국으로 돌아갔다.[16]1862년 4월 9일, 오리사바 협정이 결렬되었다. 프랑스가 이전 조약을 위반하고 멕시코를 침공하여 정부에 간섭하려는 의도를 분명히 했기 때문이다. 영국은 멕시코 정부에 철수 의사를 밝혔고, 영국 정부와 합의를 통해 청구를 해결했다.[16] 4월 11일, 도블라도 장관은 프랑스 정부에 그들의 의도가 전쟁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알렸다.
일부 멕시코 장교들은 개입 초기부터 프랑스에 동정적이었다. 1862년 4월 16일, 프랑스는 멕시코인들에게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는 데 함께 참여할 것을 요청하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1862년 4월 17일, 개혁 전쟁 중 보수 정부의 외무 장관이었고 프랑스에 의해 멕시코로 소환된 멕시코 장군 후안 알몬테는 멕시코 국민에게 프랑스의 선의를 확신시키는 자신의 선언문을 발표했다.[17]
프랑스는 에스카멜라에서 소규모 멕시코 군대를 격파한 후 오리사바를 점령했다. 멕시코 장군 포르피리오 디아스와 이그나시오 사라고사는 "엘 인헤니오"로 후퇴한 다음, 푸에블라로 향했다.[18]
1861년 7월 17일, 베니토 후아레스 대통령은 2년간의 대외 채무 지불 연기를 국회를 통해 결정했다. 이 때문에 영국, 스페인, 프랑스는 세관 관리를 통한 채무 회수를 목적으로 12월에 멕시코에 출병했다. 그러나 프랑스가 멕시코에 영토적 야심을 품고 있다는 것이 밝혀지자, 1862년 4월까지 영국과 스페인은 철병했고, 프랑스만이 멕시코를 침공하게 되었다. 베라크루스를 확보한 프랑스군은 결국 멕시코에서 철병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철수 도중에 협정을 파기하고 멕시코군을 공격했으며, 이에 맞서 멕시코군은 이그나시오 사라고사 장군과 포르피리오 디아스 여단장의 지휘 아래 방어를 시도했다.
3. 푸에블라 전투의 전개
5월 2일, 프랑스군과 안토니오 타보아다가 지휘하는 멕시코군은 아모소크에 도착했고, 4일에는 푸에블라가 보이는 곳에 야영지를 설치했다. 후안 알몬테와 안토니오 데 아로 이 타마리즈는 샤를 드 로렌세 장군에게 과달루페와 로레토의 요새화된 고지 맞은편에 있는 카르멘 수도원의 과수원을 공격하라고 조언했지만, 실행되지 않았다.[21]
멕시코 공화군은 5월 3일 푸에블라에 도착했다. 4일, 아르테아가 사단은 미겔 네그레테 장군의 지휘하에 과달루페 요새와 로레토 요새를 점령했다. 나머지 병력은 도시에 주둔했다.[23]
로렌세 장군은 멕시코 군대를 과소평가하고 즉시 로레토와 과달루페 요새를 점령하여 도시를 장악하려 했다. 이그나시오 사라고사 장군은 과달루페 요새와 로레토 요새를 중심으로 방어 체제를 구축했다.
프랑스군은 세 번 공격했지만 모두 실패했고, 결국 푸에블라에서 퇴각했다. 멕시코군은 기병 부대를 보내 퇴각하는 프랑스군을 추격했다. 오후 3시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 속에서 멕시코 기병에게 추격당한 프랑스군은 오리사바로 패주했다.
3. 1. 전투의 경과
샤를 드 로랑세가 이끄는 프랑스군은 11시 30분에 공격을 시작했다. 2개 대대의 주아브병, 베르나르 대위의 포대, 말라트 대위의 해군 포병 4문으로 구성된 공격 부대가 과달루페 요새를 향해 진격했다.[24] 이그나시오 사라고사 장군은 정오에 전투가 시작되었다고 보고했다.[27] 그는 프랑스군의 공격 전략이 의외라고 생각하며, 로레토 요새와 과달루페 요새를 강화했다.[28]프랑스군은 멕시코군보다 우수한 장총으로 무장하고 있었지만, 멕시코군의 방어 능력을 과소평가했다.[19] 프랑스군은 세 차례에 걸쳐 공격을 시도했으나, 멕시코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모두 실패했다.
첫 번째 공격에서 프랑스군은 과달루페 요새를 향해 진격했지만, 멕시코 보병과 기병대의 공격을 받고 후퇴했다.[31] 두 번째 공격은 도시의 동쪽과 북쪽에서 더 격렬하게 진행되었으나, 펠리페 베리오사발과 포르피리오 디아스가 이끄는 멕시코군에 의해 격퇴되었다.[32],[33] 세 번째 공격 역시 실패했고, 멕시코 기병대는 퇴각하는 프랑스군을 추격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34]
프랑스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 오리사바로 퇴각했다.[35] 멕시코군은 프랑스군이 협정을 파기한 것에 격분하여 즉시 선제 공격에 나섰지만, 해안가 도시인 오리사바에 구축된 견고한 진지를 돌파하지 못했다.
4. 전투의 결과 및 영향
푸에블라 전투는 멕시코에 큰 영감을 주었으며, 프랑스군의 신속한 승리를 예상했던 세계에 놀라움을 안겨주었다.[36] 이 승리로 베니토 후아레스 정부는 큰 희망을 얻었다. 사라고사 장군은 의회로부터 감사를 받고 검을 수여받았으며, 푸에블라 시는 그의 이름을 따 '푸에블라 데 사라고사'로 개칭되었다. 참전 장교와 사병들에게는 명예와 보상이 주어졌다. 사라고사 장군은 전장에서 획득한 메달과 훈장을 정부에 보냈지만, 후아레스 대통령은 이를 프랑스 전쟁 포로들과 함께 돌려보냈다.[37] 사라고사 장군은 승리 후 4개월 뒤 장티푸스로 사망했다. 이후 싱코 데 마요가 주요 연례 행사로 제정되었다.
프랑스군은 푸에블라에서의 패배를 보수당의 지원 부족 탓으로 돌렸다.[38] 전투 이틀 후, 프랑스와 협력했던 멕시코 장군 타보아다는 토마스 오호란에게 프랑스에 합류하여 안정적인 정부를 수립하고 국가에 질서를 가져올 것을 제안했다.[39] 오호란은 이 제안을 거절하고 푸에블라 포위전에서 끝까지 싸웠지만, 결국 제2 멕시코 제국군에 합류하기 위해 탈주했다.
미국에서는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의 선린 정책에 따라 "싱코 데 마요"가 대중화되었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인기를 얻어 공인된 국경일이 되었으며, 초기에는 푸에블라 출신 멕시코 이민자들이 전투를 기념하는 행사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멕시코 문화를 기념하는 일반적인 행사로 발전했다.[41]
4. 1. 프랑스의 재침공과 멕시코 제2제국
프랑스군은 푸에블라 전투에서 패배했지만, 나폴레옹 3세는 멕시코 침공을 포기하지 않고 추가 병력을 파견하여 샤를 드 로렌세 장군을 해임했다. 결국 프랑스군은 1863년 5월 17일 제2차 푸에블라 전투에서 승리하고 멕시코 시티를 함락시켰다.[36] 수도가 함락되자 베니토 후아레스 정부는 멕시코 북부 외딴 지역으로 망명해야 했다.나폴레옹 3세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막시밀리안을 멕시코 황제로 옹립하고, 괴뢰 국가인 제2 멕시코 제국을 수립했다.[40]
포르피리오 디아스 장군은 푸에블라 전투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으며, 이후 프랑스군에 맞서 싸운 주요 지휘관 중 한 명으로 성장했다. 그는 프랑스군에 포로로 잡혔다가 탈출하기도 했다. 프랑스 간섭이 끝나고 제국이 몰락한 후, 1876년 멕시코 대통령이 되었다.
5. 싱코 데 마요 (Cinco de Mayo)
1862년 5월 9일, 후아레스 대통령은 푸에블라 전투 기념일을 국경일로 선포했으며,[42][43][44][45][46] "푸에블라 전투의 날" 또는 "싱코 데 마요 전투"로 불렸다.[47] 싱코 데 마요는 멕시코가 이그나시오 사라고사 장군(텍사스 출신)의 지휘 아래 푸에블라 전투에서 제2차 프랑스 제국을 물리친 날을 기념하기 위해 5월 5일에 열리는 히스패닉계 축제이다.
싱코 데 마요는 미국에서 흔히 주장하는 것처럼 멕시코의 국경일이 아니다.[48] 멕시코에서 가장 중요한 국립 애국 기념일은 1810년 "돌로레스의 외침"을 기념하는 9월 16일의 독립 기념일이다.[49]
싱코 데 마요는 멕시코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기념하는데, 1960년대 치카노 운동의 영향을 받아 미국에서 인기를 얻었다. 현재 가장 큰 싱코 데 마요 축제는 로스앤젤레스, 휴스턴, 샌안토니오와 같이 히스패닉 인구가 많은 미국 도시에서 열린다.
참조
[1]
웹사이트
Latin American history: Cinco de Mayo/The Battle of Puebla
http://latinamerican[...]
About.com
2017-11-17
[2]
뉴스
In Mexico, Cinco de Mayo a more sober affair
https://www.washingt[...]
2011-11-17
[3]
서적
Warfare and Armed Conflicts: A Statistical Encyclopedia of Casualty and Other Figures, 1492–2015
McFarland
[4]
문서
The Cinco de Mayo and French Imperialism
[5]
웹사이트
Cinco de Mayo
http://www.mexonline[...]
[6]
웹사이트
Cinco de Mayo, From Mexican Fiesta to Popular U.S. Holiday
http://news.national[...]
2006-05-05
[7]
문서
List of Public and Bank Holidays in Mexico
http://www.qppstudio[...]
2008-04-14
[8]
문서
Cinco de Mayo is not a federal holiday in México
http://www.boston.co[...]
2009-05-05
[9]
문서
Día de la Batalla de Puebla
http://www.colegiore[...]
[10]
문서
Día de la Batalla de Puebla (5 de Mayo).
http://www.sanmiguel[...]
[11]
문서
Happy “Battle of Puebla” Day.
https://web.archive.[...]
[12]
서적
History of Mexico VI: 1861–1887
The Bancroft Company
[13]
서적
History of Mexico VI: 1861–1887
The Bancroft Company
[14]
서적
History of Mexico VI: 1861–1887
The Bancroft Company
[15]
서적
History of Mexico VI: 1861–1887
The Bancroft Company
[16]
서적
History of Mexico VI: 1861–1887
The Bancroft Company
[17]
서적
History of Mexico VI: 1861–1887
The Bancroft Company
[18]
서적
History of Mexico VI: 1861–1887
The Bancroft Company
[19]
웹사이트
Outnumbered Mexican army defeats French at Battle of Puebla
https://www.history.[...]
2022-11-10
[20]
서적
History of Mexico VI: 1861–1887
The Bancroft Company
[21]
서적
History of Mexico volume VI: 1861–1867
1888
[22]
서적
El Verdadero Juarez y la Verdad Sobre La Intervencion Y El Imperio
1904
[23]
서적
History of Mexico volume VI: 1861–1867
1888
[24]
서적
Historia de Mexico Tomo XI
JF Parres
1880
[25]
서적
Historia de Mexico Tomo XVI
JF Parres
1880
[26]
서적
Historia de Mexico Tomo XI
JF Parres
1880
[27]
서적
Historia de Mexico Tomo XVI
JF Parres
1880
[28]
서적
Historia de Mexico Tomo XI
JF Parres
1880
[29]
서적
History of Mexico volume VI: 1861–1867
1888
[30]
서적
History of Mexico volume VI: 1861–1867
1888
[31]
서적
History of Mexico volume VI: 1861–1867
1888
[32]
서적
History of Mexico volume VI: 1861–1867
1888
[33]
서적
History of Mexico volume VI: 1861–1867
1888
[34]
서적
History of Mexico volume VI: 1861–1867
1888
[35]
서적
History of Mexico volume VI: 1861–1867
1888
[36]
서적
Mexico in World History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2011-11-17
[37]
서적
History of Mexico volume VI: 1861–1867
1888
[38]
서적
History of Mexico volume VI: 1861–1867
1888
[39]
서적
France, Mexico and Informal Empire in Latin America, 1820–1867
[40]
간행물
https://www.memoriap[...]
1862-05-08
[41]
뉴스
A brief history of Cinco de Mayo, from the Battle of Puebla to growing celebrations in California
https://www.abc10.co[...]
2021-05-05
[42]
뉴스
Cinco de Mayo is more widely celebrated in USA than Mexico
https://www.mexconne[...]
2020-07-16
[43]
뉴스
Cultural adaptation: the Cinco de Mayo holiday is far more widely celebrated in the USA than in Mexico
https://geo-mexico.c[...]
2011-05-02
[44]
서적
25 Latino Craft Projects: Celebrating Culture in Your Library Series
American Library Association
2003
[45]
뉴스
7 Things You May Not Know About Cinco de Mayo
https://www.history.[...]
2023-05-03
[46]
문서
Congressional Record – House.
https://books.google[...]
2001-05-09
[47]
웹사이트
Statement by Mexican Consular official
http://www.deseretne[...]
2007-09-30
[48]
뉴스
Is Cinco de Mayo Mexico's Independence Day?
https://www.britanni[...]
2022-05-04
[49]
웹사이트
May 5, 1862: a day to remember in Mexico and the United States
http://www.alpineava[...]
[50]
웹사이트
The World Factbook: Mexico
https://www.cia.gov/[...]
CIA
2011-11-17
[51]
웹사이트
History of Cinco de Mayo and Tejanos role in the battle of Puebla
https://www.ktsm.com[...]
2023-05-05
[52]
웹사이트
The Battle of Puebla is re-enacted each year on Cinco de Mayo (May 5), but in Mexico City
http://geo-mexico.co[...]
2011-05-05
[53]
웹사이트
Why is Cinco de Mayo more popular in the U.S. than Mexico?
https://kfoxtv.com/c[...]
2017-05-04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