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시스코 브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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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란시스코 브루는 스페인 축구 선수, 심판, 감독이다. 선수 시절에는 FC 인테르나시오날, FC 바르셀로나, RCD 에스파뇰 등에서 활약하며 코파 델 레이와 카탈루냐 선수권 대회 우승을 경험했다. 은퇴 후에는 심판으로 활동하며 코파 델 레이 결승전을 두 번 주관했고, 감독으로서 1920년 하계 올림픽에서 스페인 대표팀을 이끌고 은메달을 획득했으며, 레알 마드리드와 페루 대표팀 감독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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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코 브루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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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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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Francisco Bru Sanz |
출생일 | 1885년 4월 12일 |
출생지 | 마드리드, 스페인 |
사망일 | 1962년 6월 10일 (77세) |
사망지 | 말라가, 스페인 |
포지션 | 수비수 |
선수 경력 | |
유소년 클럽 | 해당 정보 없음 |
클럽 | 1902–1906: 인테르나시오날 1906–1911: 바르셀로나 1911–1915: 에스파뇰 1915–1917: 바르셀로나 |
클럽 출장 (골) | 인테르나시오날: 27 (0) 바르셀로나: 30 (1) 에스파뇰: 해당 정보 없음 바르셀로나: 해당 정보 없음 |
국가대표팀 | 1904–1915: 카탈루냐 |
국가대표팀 출장 (골) | 해당 정보 없음 |
감독 경력 | |
감독 | 1920: 스페인 1924–1926: 에스파뇰 1927–1928: 후벤투드 아스투리아나 1928–1929: 라싱 마드리드 1930: 페루 1934–1936: 마드리드 1937–1939: 지로나 1939–1941: 레알 마드리드 1941–1943: 그라나다 1948–1949: 사라고사 |
2. 선수 경력
프란시스코 "파코" 브루는 1902년 16세의 나이로 FC 인테르나시오날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했으며, 초기에는 주로 공격수로 뛰었으나 수비수로도 활동했다. 이후 FC 바르셀로나와 RCD 에스파뇰 등 카탈루냐의 주요 클럽을 거치며 여러 차례 카탈루냐 선수권 대회와 코파 델 레이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FC 바르셀로나에서는 1910년 구단 사상 첫 코파 델 레이 우승에 기여했고, RCD 에스파뇰 소속으로는 카탈루냐 선수권 대회 우승과 1915년 코파 델 레이 준우승을 기록했다. 선수 경력 후반에는 다시 FC 바르셀로나로 복귀했으며, 카탈루냐 대표팀 선수로도 활약했다.
2. 1. 초기 경력
프란시스코 브루는 1902년 봄, 16세의 나이로 FC 인테르나시오날에 입단하며 선수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스페인 체육 연맹 메달''(Medalla de la Federación Gimnástica Española)이라는 친선 대회에 참가했는데, 12경기 중 10경기에 스트라이커로 출전하여 3골을 기록했다. 그의 소속팀은 이 대회에서 7개 팀 중 6위를 차지했다. 1902년 11월 30일, 브루는 카탈루냐 선수권 대회에서 RCD 에스파뇰을 상대로 공식 데뷔전을 치렀으나, 팀은 0-6으로 패배했다. 이 경기에서는 수비수로 뛰었지만, 인테르나시오날 시절에는 주로 공격수로 활약했다.1904년, 브루는 소속팀과 함께 2부 리그 트로피인 코파 토리노에서 우승했다. 2년 후인 1906년, 그는 로마 폰스와 함께 FC 바르셀로나로 이적했다. 바르셀로나에서 그는 1909년부터 1911년까지 팀의 카탈루냐 선수권 대회 3연속 우승에 기여했으며, 1910년에는 구단 역사상 첫 코파 델 레이 우승컵을 들어 올리는 데도 힘을 보탰다.
1911년, 브루는 RCD 에스파뇰로 이적하여 카탈루냐 선수권 대회 우승을 두 번 더 경험했고, 1915년에는 코파 델 레이 결승전에 진출하기도 했다. 이후 그는 다시 FC 바르셀로나로 복귀하여 파울리노 알칸타라, 잭 그린웰 등과 함께 뛰며 카탈루냐 선수권 대회 우승을 한 번 더 추가했다.
선수 시절 동안 브루는 최소 5번 이상 카탈루냐 대표팀 경기에 출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당시 기록이 완전하지 않아 실제 출전 횟수는 더 많을 수도 있다.
2. 2. FC 바르셀로나
1906년, 브루는 로마 포른스와 함께 FC 바르셀로나에 합류했다. 그는 1909년부터 1911년까지 3년 연속 카탈루냐 선수권 대회 우승에 기여했으며, 1910년에는 구단 역사상 첫 코파 델 레이 우승을 도왔다. 1911년 RCD 에스파뇰로 이적하여 활동하다가, 이후 다시 FC 바르셀로나로 복귀했다. 복귀 후에는 파울리노 알칸타라, 잭 그린웰과 함께 뛰며 구단에 카탈루냐 선수권 대회 우승을 한 번 더 추가했다.2. 3. RCD 에스파뇰
1911년, FC 바르셀로나를 떠나 RCD 에스파뇰로 이적했다. 에스파뇰 소속으로 카탈루냐 선수권 대회에서 두 차례 우승을 경험했으며, 1915년에는 코파 델 레이 결승전에 진출하기도 했다. 에스파뇰에서 활동한 후, 그는 다시 FC 바르셀로나로 복귀했다.2. 4. 카탈루냐 대표팀
선수 시절 동안 그는 최소 5번 카탈루냐 대표팀 경기에 출전했다. 그러나 당시 기록에는 정확한 통계가 항상 포함되지 않아 그가 더 많은 경기에 출전했을 수도 있다.3. 심판 경력
선수 생활을 마친 브루는 심판 활동을 시작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가 처음으로 주심을 맡은 경기 전에 탈의실로 들어가 가방에서 콜트 권총을 꺼냈다고 한다. 그는 모두가 볼 수 있도록 방 한가운데 테이블 위에 총을 올려놓고 옷을 갈아입은 후, 반바지 안에 권총을 집어넣었다. 선수들이 무슨 일이냐고 묻자, 브루는 자신이 주관하는 첫 경기인 만큼 조용한 경기를 보장하고 싶어서라고 설명했다.
브루는 두 차례 코파 델 레이 결승전을 주관했다.
또한 1917년에는 카탈루냐 대표팀과 카스티야 대표팀 간의 경기의 심판을 맡기도 했다.
4. 감독 경력
프란시스코 브루는 선수 생활을 마감한 후 감독으로 활동 영역을 넓혔다. 그는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의 초대 감독으로 임명되어 1920년 안트베르펜 올림픽에 참가하였고, 이 대회에서 스페인의 은메달 획득을 이끌었다.
이후 클럽 감독으로서는 레알 마드리드의 지휘봉을 두 차례 잡았다. 첫 번째 임기(1934년, 1936년)에는 팀을 코파 델 레이 결승에 두 번 진출시켜 모두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스페인 내전 기간에는 카탈루냐로 돌아가 지로나를 지도하기도 했으며, 1939년에 다시 레알 마드리드 감독으로 복귀하여 두 번째 임기를 시작했다.
또한 브루는 국제 무대에서도 감독 경력을 쌓았는데, 페루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아 1930년 FIFA 월드컵에 참가하기도 했다.[2][1]
4. 1.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

1920년, 스페인 왕립 축구 연맹은 1920년 하계 올림픽에 참가할 축구 국가대표팀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프란시스코 브루는 대표팀 감독을 선발하기 위한 세 명의 위원 중 한 명이었으나, 첫 훈련 이후 단독으로 감독직을 맡게 되었다. 그는 초기에 소집된 선수 다수를 제외하고 바스크 출신 선수들을 더 많이 포함시키고자 했다. 리카르도 사모라, 펠릭스 세수마가, 피치치, 호세 마리아 벨라우스테, 주제프 사미티에르 등이 포함된 선수단을 이끌고 브루와 스페인은 이 대회에서 은메달을 획득했다.
올림픽 축구 토너먼트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결승전에서 체코슬로바키아가 심판 판정에 항의하며 경기를 포기하면서 벨기에가 자동으로 금메달을 차지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실격 처리되었고, 은메달과 동메달의 주인을 가리기 위한 별도의 토너먼트가 열리게 되었다. 준결승에서 패배했던 프랑스는 이미 귀국한 상태였기 때문에, 8강 탈락 팀들이 패자부활전을 치러 승리한 팀이 다른 준결승 패배 팀인 네덜란드와 메달 결정전을 치르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스페인은 패자부활전에서 스웨덴을 2–1, 이탈리아를 2–0으로 꺾었고, 이어진 은메달 결정전에서 네덜란드를 3–1로 이기며 최종적으로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4. 2. 레알 마드리드
브루는 레알 마드리드 감독직을 두 번 맡았다. 첫 번째 임기 동안 그는 팀을 이끌고 코파 델 레이 결승전에 두 번 진출하여 모두 우승했다.
1934년 결승전에서는 리카르도 사모라, 주제프 사미티에르, 그리고 하신토 킹코세스 등이 포함된 선수단을 이끌고 잭 그린웰 감독의 발렌시아를 2-1로 이겼다. 1936년 결승전에서는 마드리드가 컵대회 결승전에서 처음으로 바르셀로나와 맞붙었다. 마드리드는 발렌시아의 메스타야에서 열린 이 경기에서 바르셀로나를 2-1로 꺾었는데, 이 결승전은 특히 골키퍼 사모라가 보여준 여러 차례의 선방으로 유명하다.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자, 브루는 카탈루냐로 돌아가 지로나의 감독을 맡아 지중해 리그에 참가했다. 1939년, 그는 다시 레알 마드리드로 돌아와 두 번째 감독 임기를 시작했다.
4. 3. 기타 경력
그는 페루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1930년 FIFA 월드컵에 참가했다.[2][1]
5. 수상 내역
(내용 없음)
5. 1. 선수
프란시스코 브루는 1902년 봄, 16세에 FC 인테르나시오날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Medalla de la Federación Gimnástica Española|메달라 데 라 페데라시온 힘나스티카 에스파뇰라es(스페인 체조 연맹 메달)라는 친선 토너먼트에 참가하여 12경기 중 10경기에 공격수로 출전해 3골을 넣었다. 그의 팀은 7개 팀 중 6위를 차지했다. 1902년 11월 30일, 브루는 카탈루냐 축구 선수권 대회에서 클럽 에스파뇰에게 0-6으로 패하며 공식 데뷔전을 치렀다. 이 경기에서는 수비수로 뛰었지만, 인테르나시오날에서는 주로 공격수로 활약했다.브루는 1904년 인테르나시오날 소속으로 2부 리그 트로피인 코파 토리노에서 우승했다. 2년 후인 1906년에는 FC 바르셀로나에 합류하여 로마 포른스와 함께 1909년부터 1911년까지 3년 연속 카탈루냐 축구 선수권 대회 우승에 기여했다. 또한 1910년에는 구단의 첫 코파 델 레이 우승을 도왔다.
1911년에는 RCD 에스파뇰로 이적하여 카탈루냐 선수권 대회 우승을 두 차례(1911-12, 1914-15) 추가했고, 1915년에는 코파 델 레이 결승전에 진출했다. 이후 다시 FC 바르셀로나로 복귀하여 파울리노 알칸타라, 잭 그린웰과 함께 뛰며 1915-16 시즌 카탈루냐 선수권 대회 우승을 보탰다.
선수 시절 동안 그는 최소 5번 카탈루냐 XI 경기에 출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당시 기록의 부정확성으로 인해 실제 출전 횟수는 더 많을 수도 있다.
'''주요 성과'''
클럽 | 대회 | 우승 연도/시즌 |
---|---|---|
FC 인테르나시오날 | 코파 토리노 | 1904 |
FC 바르셀로나 | 코파 델 레이 | 1910 |
카탈루냐 선수권 대회 | 1908-09 | |
1909-10 | ||
1910-11, 1915-16 | ||
RCD 에스파뇰 | 카탈루냐 선수권 대회 | 1911-12 |
1914-15 |
5. 2. 감독
참조
[1]
블로그
http://cronicasdefut[...]
2022-08-01
[2]
블로그
Peru en el mundial del 30
http://cronicasdef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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