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체스코 페루치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프란체스코 페루치는 이탈리아의 군인으로, 코냐크 동맹 전쟁 중 피렌체 공화국을 위해 싸웠다. 그는 조반니 데 메디치 휘하의 부대에서 복무하며 용맹함을 떨쳤고, 피렌체 지휘관으로 임명되어 제국군을 상대로 기습 작전을 펼쳤다. 가비나나 전투에서 패배하여 포로로 잡힌 후 처형당했으며, 그의 죽음은 공화국의 몰락을 가져왔다. 사후, 그의 삶은 소설과 국가에 인용되었으며, 이탈리아 통일 운동과 파시즘 정부에서 영웅으로 숭배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530년 사망 - 정현왕후
정현왕후는 조선 성종의 계비로서 중종의 어머니이며, 1462년에 태어나 1480년 왕비가 되었고, 연산군 즉위 후에는 왕대비, 중종반정 이후에는 자순화혜왕대비로 불리다가 1530년에 사망하여 선정릉에 안장되었다. - 1530년 사망 - 바부르
바부르는 티무르 제국 후예이자 무굴 제국 창시자로, 페르시아어로 '호랑이'를 뜻하는 별칭을 가졌으며, 권력 다툼 끝에 카불을 정복하고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화약 무기를 지원받아 1526년 파니파트 전투에서 로디 왕조를 격파하고 무굴 제국을 건설한 군사 전략가이자 시인이다. - 1489년 출생 - 숙의 나씨 (중종)
조선 중종의 후궁인 숙의 나씨는 나주 나씨로, 중종의 총애를 받았으나 26세에 출산 중 사망하여 경빈 박씨와의 관계 속에서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으며, 그녀의 묘는 이천시의 향토유적으로 지정되었다. - 1489년 출생 - 미마르 시난
미마르 시난은 오스만 제국의 전성기를 이끈 건축가이자 토목 기사로, 쉴레이만 1세, 셀림 2세, 무라트 3세 세 명의 술탄을 섬기며 쉴레이마니예 모스크와 셀리미예 모스크를 포함한 300개가 넘는 건축물을 설계하여 오스만 건축 양식의 정점을 보여주었다. - 이탈리아 전쟁의 군사 지도자 - 헨리 8세
헨리 8세는 1509년부터 1547년까지 잉글랜드를 통치한 국왕으로, 여섯 번의 결혼, 잉글랜드 종교 개혁, 그리고 왕권 강화가 특징이며, 그의 통치 이후 세 명의 자녀가 왕위를 이었으나 튜더 왕조는 단절되었다. - 이탈리아 전쟁의 군사 지도자 - 프란체스코 2세 스포르차
프란체스코 2세 스포르차는 루도비코 스포르차와 베아트리체 데스테의 아들이자 프랑스 침공으로 망명 생활을 했으며 카를 5세에 의해 밀라노 공작에 임명, 코냑 동맹 전쟁에 가담 후 실패, 후계자 없이 사망하여 제4차 이탈리아 전쟁의 원인이 된 밀라노 공국의 공작이다.
프란체스코 페루치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출생일 | 1489년 8월 14일 |
출생지 | 피렌체, 피렌체 공화국 |
사망일 | 1530년 8월 3일 |
사망지 | 가비냐나, 피렌체 공화국 |
사망 원인 | 파브리치오 마람알도에 의한 처형 |
소속 | 피렌체 공화국 |
복무 기간 | 1527년–1530년 |
계급 | 총무관 |
참전 | |
전투 | 가비냐나 전투 피렌체 공성전 (1529–1530) 코냑 동맹 전쟁 |
2. 생애
프란체스코 페루치는 상인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상인의 점원으로 일하다가 군인의 길을 선택했다. 조반니 데 메디치 휘하의 검은 부대에서 복무하며 용맹한 군인으로 명성을 얻었다. 코냑 동맹 전쟁에서 피렌체 공화국을 위해 싸웠으며, 가비나나 전투에서 파브리치오 마르말도에게 포로로 잡혀 처형당했다. 그의 죽음은 피렌체 공화국의 몰락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2. 1. 코냑 동맹 전쟁 활약
조반니 데 메디치 휘하의 ''검은 부대''에서 복무하며 군인 경력을 시작한 페루치는 코냑 동맹 전쟁 기간 동안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교황 클레멘스 7세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가 메디치 가문의 피렌체 복위를 위해 피렌체 공화국을 침공하자, 페루치는 피렌체의 군사 위원으로 임명되어 제국군을 기습하는 등 뛰어난 용맹함과 지략을 보여주었다.1530년 초, 볼테라가 피렌체와의 동맹을 어기고 제국군에 점령되자, 페루치는 기습 공격으로 도시를 탈환하였다. 그러나 그 사이 제국군이 엠폴리를 점령하여 피렌체의 주요 보급로를 차단하였다. 페루치는 로마로 진격하여 교황을 압박, 피렌체에 유리한 평화 협상을 맺도록 하는 대담한 계획을 제안했지만, 피렌체 전쟁 위원회는 이 계획이 너무 위험하다는 이유로 거부하였다.
결국 페루치는 제국군을 배후에서 공격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수정하고 볼테라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피사에서 독감으로 인해 한 달간 발이 묶이면서, 제국군은 페루치의 계획을 눈치채고 대비할 수 있었다. 7월 말, 페루치는 4,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피사를 떠났다. 피렌체 포위군은 필리베르 드 샬롱 휘하의 제국군 상당수가 페루치를 막기 위해 이동했다는 것을 알고 협공을 시도했으나, 사령관 말라테스타 발리오니의 배신으로 인해 무산되었다.
1530년 8월 3일, 가비나나 전투에서 페루치는 홀로 압도적인 적군과 맞서 싸웠다. 격렬한 전투 끝에 제국군은 초반에 페루치의 맹공에 밀려 후퇴했고, 필리베르 드 샬롱도 전사했다. 그러나 파브리치오 마르말도가 이끄는 2,000여 명의 란츠크네히트 지원군이 도착하면서, 피렌체군은 대부분 전멸당했고, 페루치는 부상을 입고 포로로 붙잡혔다. 마르말도는 개인적인 원한으로 페루치를 직접 처형했는데, 페루치는 죽기 전 마르말도에게 "Vile, tu uccidi un uomo morto!"(

2. 2. 가비나나 전투와 죽음
상인의 직원으로 몇 년을 보낸 후, 그는 어린 나이에 군인이 되었고, 조반니 데 메디치 휘하의 '검은 부대'(조반니의 휘장에 있는 검은색 줄무늬에서 이름 붙여짐)에서 여러 이탈리아 전장을 돌며 견습 생활을 하며 대담한 전투가이자 무모한 자라는 평판을 얻었다. 교황 클레멘스 7세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는 코냐크 동맹 전쟁 기간에 메디치 가의 피렌체 복위를 결정했고, 피렌체 공화국을 침공했으며, 페루치는 피렌체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어 대단한 용감함과 빠른 진군으로 제국군을 기습하는 등의 지략을 보여주었다.1530년 초 볼테라가 피렌체와의 동맹을 저버리고 제국군 수비대가 점거하자, 페루치는 기습하여 탈환하였다. 그러나 그의 부재 동안에 제국은 배신을 통해 엠폴리를 점령했고 피렌체로 향하는 주요 도로를 차단시켜버렸다. 페루치는 피렌체 정부에 로마로 진군하여 교황에게 침공 위협을 가하여 피렌체에 우호적인 평화 협상을 해야한다고 제안했지만, 피렌체 전쟁 위원회는 그를 피렌체 외부 작전 사령관으로 임명했음에도 그의 너무나도 위험한 계획을 거부했다.
페루치는 배후에서 제국군을 공격하는쪽으로 방향을 바꾸기로 결정했고 볼테라에서 시작하였다. 그러나 피사에서 그가 독감에 걸리며 한달을 보내면서, 적은 그의 계획에 대한 풍문을 듣게 되었고 그의 공격에 대한 대비를 할 수 있었다. 7월 말 페루치는 피사에 4,000명을 남기고 떠났다. 피렌체의 포위된 사람들은 오랑주 공작 필리베르 드 샬롱의 휘하에 황제파의 상당수가 있다는 것을 알고있었기 때문에 페루치를 만나러 갔고, 후자와 협공하길 기대했지만, 그들의 사령관 말라테스타 발리오니의 배신으로 무산되었다.
홀로 남겨진 페루치는 8월 3일 가비나나 전투에서 홀로 적의 대군을 맞이하게 되었다. 필사적인 전투에서 제국군은 처음으로 페루치의 맹공에 후퇴했고 오랑주 공작 또한 전사했다. 파브리치오 마르말도 휘하 2,000여명의 란츠크네히트 지원군이 도착하자, 피렌체군은 대부분 몰살당했으며, 페루치도 부상을 당한후 붙잡혔다. 마르말도는 개인적인 앙심으로 직접 그를 처형하였다: 대중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페루치는 마르말도에게 마지막 말로 "Vile, tu uccidi un uomo morto!"("비겁한 놈, 넌 시체를 죽인 것이다!" )를 내뱉었다고 전해진다.[4] 이 패배로 공화국의 운명이 결정되었으며, 9일 뒤 피렌체는 항복하였다. 마르말도의 행위는 그에게 불멸의 악명을 얻게 했으며, 심지어 그의 이름은 이탈리아어로 "악랄한"을 뜻하는 maramaldeggiare의 동의어로 변하기도 했다.
3. 사후 신화
프란체스코 도메니코 구에라치의 가장 유명한 소설 L'Assedio di Firenze(피렌체 공방전)는 미화된 그의 생애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1847년에 고프레도 마멜리가 작곡한 Il Canto degli Italiani (이탈리아인의 노래)에도 인용됐다. 1849년 리보르노에서 연설한 가리발디는 "나는 페루치의 재를 칼로 만졌고 페루치 같이 죽는 법을 알게 될 것입니다."라고 그를 자신에 비유했다.[5]
파시즘 정부 하에서, 그의 생애와 죽음은 상당하게 기려졌고, 그의 이름을 딴 축제가 그의 모범적인 삶을 사람들에게 심어주기 위해 피렌체에서 열리기도 했다. 그 당시 토스카나에서 태어난 남자 아이들이 '페루치'(Ferrucci) 또는 페루초(Ferruccio)라는 이름이 유행한 것이 부분적으로 설명된다.[6]
참조
[1]
문서
Fabrizio Maramaldo
[2]
서적
Garibaldi: Invention of a Hero
London
2007
[3]
서적
The Renaissance Perfected: Architecture, Spectacle, and Tourism in Fascist Italy
https://books.google[...]
Penn State Press
2004
[4]
문서
Fabrizio Maramaldo
[5]
서적
Garibaldi: Invention of a Hero
London
2007
[6]
서적
The Renaissance Perfected: Architecture, Spectacle, and Tourism in Fascist Italy
https://books.google[...]
Penn State Press
2004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