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드 햄프턴
1. 개요
프레드 햄프턴은 1948년에 태어나 1969년 사망한 미국의 흑인 인권 운동가이자 흑표당 일리노이 지부의 지도자였다. 그는 흑표당 활동을 통해 지역 사회 봉사, 무지개 연합 결성 등을 주도했으나, FBI의 감시와 코인텔프로를 통해 암살당했다. 햄프턴은 FBI의 표적이 되었고, 1969년 12월 경찰의 급습으로 사망했으며, 그의 죽음은 1970년 연방 대배심 조사를 통해 경찰의 과잉 진압이 밝혀졌다. 그의 삶은 여러 영화와 다큐멘터리를 통해 다뤄졌으며, 시카고와 메이우드 등지에서 기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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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 이름 | 프레드릭 앨런 햄프턴 |
|---|---|
| 다른 이름 | 의장 프레드 |
| 출생일 | 1948년 8월 30일 |
| 출생지 |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 |
| 사망일 | 1969년 12월 4일 |
| 사망지 |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 |
| 사망 원인 | 암살 (총상) |
| 직업 | 활동가, 혁명가 |
| 소속 정당 | 흑표범당 |
| 교육 | 트라이튼 칼리지 |
| 활동 기간 | 1966년–1969년 |
| 알려진 이유 | 흑표당 일리노이주 지부 의장 |
| 배우자 | 아쿠아 은제리 |
| 자녀 | 프레드 햄프턴 주니어 |
| 주요 활동 | 흑표당 일리노이주 지부 의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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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 관계 | 아들: 프레드 햄프턴 주니어 |
|---|---|
| 사망 원인 | 암살 (총상) |
| 주요 사건 | 1969년 암살 사건 |
| 관련 인물 | 아쿠아 은제리 (배우자) 프레드 햄프턴 주니어 (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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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된 미국의 활동가 -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마틴 루터 킹 주니어는 비폭력 저항으로 미국 시민권 운동을 이끈 미국의 목사이자 사회 운동가, 인권 운동가로,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워싱턴 대행진 등을 주도하며 인종차별 철폐를 위해 투쟁했고, 그의 업적과 비폭력 저항 사상은 미국 사회와 전 세계 인권 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
암살된 미국의 활동가 -
맬컴 엑스
맬컴 X는 미국의 인권 운동가이자 이슬람 지도자로, 초기에는 흑인 분리주의를 주장하며 급진적인 흑인 해방 운동을 이끌었지만 메카 순례 후 온건한 입장으로 변화했고, 네이션 오브 이슬람 탈퇴 후 암살당했으나 그의 삶과 사상은 흑인 인권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
흑표당 당원 -
휴이 뉴턴
휴이 뉴턴은 미국의 흑인 권리 운동가이자 보비 실과 함께 흑표당을 공동 창립하여 흑인 공동체의 자치권을 주장하고 흑인들의 주거, 고용, 교육 문제 개선을 추구했으나 경찰과의 충돌과 불법 활동으로 논란을 빚었으며, 존 프레이 경관 살해 혐의로 유죄 판결 후 석방, 암살당한 후 그의 유산은 지속적인 논의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
흑표당 당원 -
보비 실
보비 실은 텍사스 출신의 정치 운동가로, 흑표당을 공동 창당하여 흑인 인권 운동에 기여했으며 시카고 8인 재판에 연루되기도 했다. -
반자본주의자 -
김일성
김일성은 김성주라는 본명으로 1930년대 항일 무장 투쟁을 했고, 소련의 지원을 받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하여 통치했으며, 한국 전쟁을 일으키고 주체사상을 내세워 독재 체제를 강화하고 개인 숭배를 조장한 정치인이다. -
반자본주의자 -
피델 카스트로
피델 카스트로는 쿠바의 혁명가이자 정치가로서, 쿠바 혁명 이후 47년간 최고 지도자로 군림하며 사회주의 체제 구축과 미국과의 대립을 심화시키는 등 국제적 영향력을 행사했으나, 그의 통치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2. 어린 시절과 교육
프레드릭 앨런 햄프턴(Fredrick Allen Hampton Sr.)은 1948년 8월 30일 서밋 아르고에서 태어났다. 10세 때 가족과 함께 시카고 교외 지역인 메이우드로 이주했다. 그의 부모는 대이동의 일환으로 루이지애나주에서 이주해 왔으며, 옥수수 전분 가공업체인 아르고 녹말 회사(Argo Starch Company)에서 일했다. 햄프턴의 가족은 1955년 에밋 틸 피살 사건이 있기 전에 틸의 가족과 친분이 있었다.
어린 시절 햄프턴은 학업과 운동 모두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뉴욕 양키스의 중견수가 되기를 희망했다. 10세 때 이웃 아이들을 위해 주말 아침 식사를 직접 요리하여 대접했는데, 이는 훗날 흑표당의 무료 아침 식사 프로그램의 전조였다.
햄프턴은 어빙 초등학교와 프로비소 이스트 고등학교(Proviso East High School)를 다녔다. 고등학교에서 그는 학교의 인종 간 위원회를 지도하였고, 흑인 학생들이 홈커밍 퀸 선발 대회에서 배제된 것에 항의하는 시위를 주도했으며, 더 많은 흑인 교사와 행정직원을 고용할 것을 학교 당국에 촉구했다. 1966년 프로비소 이스트 고등학교(Proviso East High School)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운동부 활동 우수상과 주니어 어치브먼트 어워드(Junior Achievement Award)를 수상했다.
졸업 후, 햄프턴은 트라이턴 주니어 칼리지에서 법학 입학 준비를 하였다. 그는 또한 시카고의 크레인 주니어 칼리지 (후에 맬컴 엑스 칼리지)와 일리노이 대학교에서 수학하였다.
햄프턴은 미국 유색인 지위 향상 협회(National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Colored People, NAACP) 서부 교외 지부 청년회의 지도자를 맡아, 2만 7천 명의 지역 사회에서 500명의 청년 회원으로 구성된 단체를 결성했다. 그는 메이우드의 빈곤한 흑인 공동체를 위해 더 많고 질 좋은 레크리에이션 시설을 설립하고 교육 자원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다.
3. 흑표당 활동
1968년 11월, 햄프턴은 흑표당 일리노이주 지부 창립을 주도했고, 시카고를 거점으로 하는 이 지부의 의장을 역임했다. 그는 겨우 20세였지만, 대중 연설 능력과 공동체 조직 경험을 바탕으로 당 내에서 존경받는 지도자로 부상했다. 햄프턴은 무료 아침 식사 프로그램, 무료 진료소 운영 등 지역 사회 봉사 활동을 조직하는 데 힘썼다.
그는 흑표당과 푸에르토리코계 영 로즈, 애팔래치아산맥에서 이주해 온 백인 청년 조직 영 패트리어츠 등 다양한 배경의 단체들을 규합하여 '무지개 연합'을 결성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이는 인종과 계층을 초월한 연대를 통해 사회 변혁을 추구하려는 그의 비전을 보여주는 중요한 업적이었다. 이후 무지개 연합에는 민주 사회를 위한 학생회(SDS), 브라운 베레, 미국 인디언 운동(AIM), 그리고 레드 가드당이 합류했다.
1969년 햄프턴은 흑표당 일리노이 지부 부의장이 되었고, 성차별을 규탄하는 회의를 주최했다. 1969년 이후, 흑표당은 성차별을 반혁명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햄프턴은 뛰어난 조직, 연설,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흑표당에서 빠르게 성장했다. 시카고 지부 지도자가 된 그는 매주 집회를 조직하고, 파업에 참여하고, 흑표당 지역 주민 클리닉과 협력하고, 매일 아침 6시 정치 교육 수업을 진행하고, 경찰 감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또한 흑표당의 무료 아침 식사 프로그램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콰메 투레와 함께 FBI가 조장한 SNCC/Panther 분열로 밥 브라운이 당을 떠났을 때, 햄프턴은 일리노이 주 흑표당 의장직을 맡아 자동적으로 전국 흑표당 부의장이 되었다.
그의 변호사였던 제프리 하스는 햄프턴의 정치적 신념과 운동 통합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3.1. FBI의 감시와 코인텔프로
J. 에드거 후버 FBI 국장은 흑표당을 "국가 내부 보안에 대한 거대한 위협"으로 간주하고, "호전적인 민족주의 운동을 통합하고 전기화할 메시아의 상승"을 경계했다. FBI는 코인텔프로(COINTELPRO)라는 비밀 공작을 통해 흑인 단체와 지도자들의 신뢰를 떨어뜨리고, 그들을 와해시키려 했다. 햄프턴은 사망 2주 전에 FBI의 '선동가 색인'에 추가되었는데, 이는 그가 국가 안보에 잠재적인 위협으로 간주되었음을 의미한다.
FBI는 1967년부터 햄프턴에 대한 파일을 개설하고 감시를 시작했으며, 1968년 2월에는 그의 어머니의 전화를 도청하고, 5월에는 그를 '핵심 급진적 지도자'로 분류했다. 1968년 말, FBI 시카고 지부의 인종 문제반은 윌리엄 오닐을 흑표당에 잠입시켜 햄프턴과 흑표당의 활동을 감시하고, 내부 정보를 수집하도록 했다. 오닐은 흑표당에 가입하여 조직 내에서 빠르게 승진하여 지부 보안 책임자이자 햄프턴의 경호원이 되었다.
FBI는 익명의 편지를 이용하여 불신을 조장하고 결국 흑표당과 블랙스톤 레인저스 사이의 분열을 유발했다. 오닐은 1969년 4월 2일 양측 간의 무장 충돌을 선동했다. 흑표당은 시카고 빈민가의 권력 기반으로부터 고립되었고, FBI는 다른 급진적 조직과의 유대 관계를 약화시키려 했다. 오닐은 흑표당과 민주 사회를 위한 학생회(Students for a Democratic Society) 사이에 "균열을 만들라"는 지시를 받았다.
FBI는 흑표당의 이름으로 일련의 인종차별적인 만화를 공개하여 백인 활동가들을 소외시키려 했다. 또한 무지개 연합 결성을 막기 위한 허위 정보 활동을 벌였지만, 흑표당은 젊은 애국자 조직(Young Patriots Organization)과 젊은 영주(Young Lords)와 연합을 맺었다. 후버는 반복적인 지시를 통해 COINTELPRO 요원들에게 무지개 연합을 조사하고, "[흑표당]이 주장하는 것을 파괴"하며, "'국민을 위한 봉사' 프로그램을 근절"하라고 요구했다.
1970년대 초 상원 조사관들이 확보한 문서들은 FBI가 흑표당과 다른 급진적 단체들 사이의 폭력을 적극적으로 부추겼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로 인해 전국 여러 도시에서 여러 건의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4. 암살
1969년 12월 4일 새벽, 햄프턴은 시카고 웨스트 사이드의 아파트에서 경찰의 무장 급습으로 살해당했다. 당시 21세였던 햄프턴은 임신 중인 약혼녀 아쿠아 은제리(당시 데보라 존슨)와 함께 있었다. 경찰은 불법 무기 수색 영장을 집행한다며 아파트를 급습했고, 이 과정에서 햄프턴과 흑표당원 마크 클라크가 사망했다.
경찰은 흑표당원들이 먼저 발포했다고 주장했지만, 이후 조사 결과 경찰이 82~99발을 발포한 반면, 흑표당 측에서는 단 한 발의 총알만이 발사된 것으로 밝혀졌다. FBI 정보원 윌리엄 오닐은 햄프턴의 아파트 배치도를 경찰에 제공하고, 급습 당일 밤 햄프턴에게 수면제를 먹인 것으로 알려졌다.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경찰은 햄프턴을 침대에서 사살한 후, "이제 완전히 죽었군."이라고 말했다.
4.1. 암살 이후
1969년 12월 9일 멜로즈 파크의 퍼스트 침례교회에서 열린 햄프턴의 장례식에는 5,0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참석했다. 제시 잭슨 목사 등이 추도사를 했다.
1970년 연방 대배심 조사는 아파트에서 발포된 총알의 대부분이 경찰의 총에서 발사되었음을 밝혀냈다. 경찰은 82번에서 99번이나 발포했지만, 흑표당원이 발사한 총알은 단 한 발뿐이었다.
1972년 쿡 카운티 지방 검사 에드워드 핸러한은 사법 방해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는 이 사건으로 인해 정치적 기반을 잃었고, 1983년 시카고 최초의 흑인 시장 해럴드 워싱턴의 당선에 기여하게 되었다.
햄프턴과 클라크의 유족, 그리고 급습 생존자들은 시카고 시, 쿡 카운티, 연방 정부를 상대로 민사 소송을 제기했다. 1982년 185만 달러(1.85)의 합의금을 받았다. 이는 당시 시민권 소송 사상 최대 규모였다. 원고 측 변호사 G. 플린트 테일러는 "이 합의는 FBI와 한라한의 부하들이 프레드 햄프턴을 살해하기 위해 공모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5. 유산
햄프턴의 이야기는 1971년 다큐멘터리 《프레드 햄프턴의 살해》와 샤카 킹 감독, 대니얼 컬루야 주연의 2021년 영화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 등 여러 영화와 다큐멘터리에서 다뤄졌다. 그는 또한 2020년 영화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7》에서 켈빈 해리슨 주니어가 연기했다.
1990년과 2004년, 시카고 시의회는 12월 4일을 '프레드 햄프턴의 날'로 지정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의 고향인 일리노이주 메이우드에는 그를 기리는 공공 수영장이 세워졌으며, 2007년에는 그의 흉상이 설치되었다. 2022년 4월, 메이우드 마을 이사회는 햄프턴의 어린 시절 집을 역사적 랜드마크로 지정했다.
햄프턴은 생전에 언어학자이자 사상가인 노엄 촘스키로부터 "흑표당에서 가장 재능 있고 장래가 촉망되는 지도자 중 한 명"이라고 평가받았다. 햄프턴의 암살은 미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FBI의 코인텔프로 작전의 실체가 드러나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미국 내 인권 운동과 정치 개혁에 대한 요구를 더욱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