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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드 허친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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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레드 허친슨은 1919년 시애틀에서 태어난 미국의 야구 선수이자 감독이다. 선수 시절에는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에서 투수로 활약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참전으로 선수 경력이 중단되기도 했다. 전쟁 후 복귀하여 1951년 올스타에 선정되기도 했다. 감독으로서는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신시내티 레즈를 거치며 통산 830승을 기록했다. 특히 신시내티 레즈를 1961년 내셔널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으나, 암 투병 끝에 1964년 사망했다. 그의 업적을 기려 신시내티 레즈는 등번호 1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으며, 그의 이름을 딴 프레드 허친슨 암 연구 센터가 설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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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드 허친슨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53년 프레드 허친슨
1953년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시절의 프레드 허친슨
포지션투수 / 감독
출생일1919년 8월 12일
출생지미국워싱턴주시애틀
사망일1964년 11월 12일
사망지미국플로리다주브레이든턴
타석좌투
투구우투
데뷔 리그MLB
데뷔일1939년 5월 2일
최종 리그MLB
최종일1953년 9월 27일
선수 경력
선수디트로이트 타이거스 (1939–1940, 1946–1953)
감독디트로이트 타이거스 (1952–1954)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1956–1958)
신시내티 레즈 (1959–1964)
통계
리그MLB
승-패 기록95–71
평균 자책점3.73
탈삼진591
감독 통산 기록830–827
승률0.501
수상 및 업적
올스타올스타 (1951)
영구 결번신시내티 레즈 No. 1
명예의 전당신시내티 레즈 명예의 전당 헌액

2. 초기 생애

프레드 허친슨은 1919년 워싱턴주 시애틀에서 조셉 램버트 허친슨(1872–1951)과 노나 버크 허친슨(1879–1962) 부부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4] 아버지와 어머니는 모두 위스콘신 출신으로 1907년에 시애틀로 이주했다.[4] 허친슨의 아버지는 마켓 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4] 시애틀 남동부 레이니어 비치 지역에서 일반 개업 의사로 활동했다.[5][6][7]

허친슨에게는 세 명의 형제가 있었다. 큰 누나인 메리 조이(크로세토)는 1904년에 태어나 1989년에 사망했고,[4][8] 빌과 존은 각각 프레드보다 10살, 7살 많았다.[9] 빌과 존은 프랭클린 고등학교와 워싱턴 대학교에서 터비 그레이브스 감독의 지도를 받으며 야구를 했다. 빌은 1931년 허스키스 팀의 주장을 맡아 퍼시픽 코스트 컨퍼런스 우승을 이끌었고, 존(1912–1991)은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5][7]

허친슨의 형들은 그에게 야구를 가르치고 경쟁심을 길러주었다. 특히 1루에 더 빨리 도달할 수 있도록 왼손 타격을 가르치기도 했다.[5][7] 15세까지 포수로 활약한 허친슨은 프랭클린 고등학교에서 투수, 포수, 1루수, 외야수, 그리고 왼손 타자로 활약하며 뛰어난 실력을 보였다. 그는 퀘이커스를 4번의 도시 챔피언십으로 이끌었고, 여름에는 아메리칸 레지온에서 야구를 했다.[5][7]

3. 선수 경력

프레드 허친슨은 시애틀 출신으로, 어릴 때부터 형들에게 야구를 배우며 경쟁심을 길렀다. 15세까지 포수로 뛰었고, 프랭클린 고등학교에서는 투수, 포수, 1루수, 외야수, 왼손 타자로 활약하며 팀을 4번의 도시 챔피언십으로 이끌었다. 아메리칸 레지온에서도 야구를 했다.[5][7] 1937년 야키마에서 세미 프로 야구를 했고, 워싱턴 대학교에 잠깐 다녔다.[10]

허친슨은 맹렬한 경쟁자로 알려져 있었다.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는 1957년에 "그의 격노는 아메리칸 리그에서 전설이 되었다"고 썼다. 양키스 포수 요기 베라는 "우리가 디트로이트를 따라 마을에 가면 허치가 어떻게 했는지 항상 알 수 있었어요. 드레싱 룸에 의자가 있으면, 허치가 이긴 거야. 장작이 있으면, 진 거지."라고 말했다.[17]

그는 당대 최고의 타격 투수 중 한 명으로, 좌타자였던 그는 종종 대타로 출전했고, 메이저 리그 경력 동안 4번이나 타율 3할 이상을 기록했다. 통산 타율은 .263이었고, 171개의 안타, 4개의 홈런과 83개의 타점을 기록했는데, 이는 투수에게는 뛰어난 기록이다.

3. 1. 마이너 리그

허친슨은 1938년 AA 퍼시픽 코스트 리그 소속 시애틀 레이니어스와 계약하며 본격적인 야구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19세의 나이에 리그 최고인 25승을 거두며 ''더 스포팅 뉴스'' 마이너 리그 올해의 선수상을 받았다.[3] 피츠버그 파이리츠를 포함한 여러 팀들이 그에게 관심을 보였고,[11][12] 선수와 현금을 대가로 아메리칸 리그디트로이트 타이거스로 이적했다.[12][13] 1941년, AA 인터내셔널 리그의 버팔로에서 리그 최다승(26승)과 이닝 투구 (284이닝)를 기록하며 뛰어난 시즌을 보냈다.[10]

3. 2. 메이저 리그

허친슨은 1939년부터 1953년까지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에서 투수로 활약했다. (2차 세계대전 참전으로 인한 4시즌 공백) 1946년, 2차 세계대전 참전 이후 복귀하여 6시즌 연속 두 자릿수 승리를 기록하는 등 팀의 핵심 투수로 자리매김했다. 1951년에는 메이저 리그 올스타전에 선발되기도 했다.[14] 선수 시절 통산 95승 71패, 평균 자책점 3.73을 기록했다.

1939~1941 시즌 동안 초창기 메이저 리그 경력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의 부진으로 인해 매 시즌 마이너 리그로 돌아가야 했다. 1941년, AA 인터내셔널 리그의 버팔로에서 그는 리그 최다승(26승)과 이닝 투구 (284이닝)를 기록하며 또 한 번 뛰어난 시즌을 보냈다. 미국이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을 때, 22세의 허친슨은 성공적인 메이저 리그 경력을 기대하는 듯했다. 그는 미국 해군에서 현역으로 복무했고, 해군 중령으로 진급했으며, 4시즌 (1942~1945)을 군 복무로 인해 날렸다.

1946년, 27세가 되어가는 허친슨은 복귀하여 1945년 월드 시리즈 챔피언 타이거스의 선발 투수 로테이션에 자리를 잡았고, 10승 이상을 거둔 6시즌을 연속으로 기록했는데, 1947년에는 18승, 1950년에는 17승을 거두었다. 1951년 아메리칸 리그 올스타 팀에 선발되었고, 타이거스의 홈 구장인 브리그스 스타디움에서 열린 경기에서 3이닝을 던져 8-3으로 패했다.[14]

허친슨은 메이저 리그에서 11시즌 동안 95승 71패, 3.73의 평균 자책점을 기록했는데, 이는 그의 초창기 부진을 감안하면 뛰어난 기록이다. 242경기에 출전하여 169경기를 선발 투수로 뛰었고, 1,464 이닝 투구를 기록하며, 1,487개의 안타와 388개의 볼넷을 허용했다. 그는 591개의 삼진, 81개의 완투, 13개의 완봉, 그리고 7개의 세이브를 기록했다. 1949년에 WHIP에서 아메리칸 리그 1위를 기록했으며, 이 시즌에 허친슨의 2.96 ERA는 리그 4위였다.

허친슨은 맹렬한 경쟁자로 알려져 있었다.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는 1957년에 "그의 격노는 아메리칸 리그에서 전설이 되었다"고 썼다. 양키스 포수 요기 베라는 "우리가 디트로이트를 따라 마을에 가면 허치가 어떻게 했는지 항상 알 수 있었어요. 드레싱 룸에 의자가 있으면, 허치가 이긴 거야. 장작이 있으면, 진 거지."라고 말했다.[17]

그는 또한 당대 최고의 타격 투수 중 한 명이었다. 좌타자인 그는 종종 대타로 출전했고, 메이저 리그 경력 동안 4번이나 타율 3할 이상을 기록했다. 그의 통산 타율은 .263이었고, 171개의 안타, 4개의 홈런과 83개의 타점을 기록했는데, 이는 투수에게는 뛰어난 기록이다.

불명예스러운 점으로는, 그는 테드 윌리엄스의 커리어에서 가장 긴 홈런을 허용한 투수로 기억되는데, 1946년 6월 9일, 펜웨이 파크 우중간 스탠드에 앉아 있던 놀란 팬의 밀짚모자를 깨뜨린 약 153.01m짜리 홈런이었다. 홈런이 떨어진 좌석은 이 홈런을 기념하기 위해 빨간색으로 칠해졌다.[16] 허친슨은 1948년 시즌에 32개의 홈런을 허용하며 AL 홈런 허용 부문 1위를 기록했다.

1939년에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에서 메이저 데뷔를 했다. 1941년에는 대타로 2경기에 출전했을 뿐이며, 이듬해 1942년부터 4년간 미국 해군에 종군했다. 1946년 타이거스로 복귀한 후, 실질적으로 10년간 통산 242경기에 등판하여 96승 75패의 성적을 기록했다. 스피드는 없었지만, 두뇌적인 투구로 복귀한 1946년부터 1951년까지 6년 연속 두 자릿수 승리를 거두었다.

1952년에도 투수로 등판했지만, 도중에 감독을 겸임하게 되었고, 선수로는 1953년에 은퇴했다.

메이저 리그 통산 투수 성적은 다음과 같다.

연도소속팀경기선발완투완봉무4구승리패배세이브홀드승률타자투구 이닝피안타피홈런볼넷고의4구사구탈삼진폭투보크실점자책점평균자책점WHIP
1939DET1312300360--.33339184.295951--0221056495.211.72
19401710101370--.30033576.085626--2320152485.681.46
19462826163214112--.560853207.01841466--01380178713.091.21
19473325183418102--.643911219.22111461--21132084743.031.24
19483328150213110--.542925221.02233248--192201191064.321.23
194933219411571--.682762188.21671852--1545070622.961.16
1950392610131780--.680989231.22691848--571201191023.961.37
1951312092410102--.500782188.12041227--2534084773.681.23
1952121000210--.66715737.14049--1120016143.381.31
195330000000------379.2900--0400332.790.93
MLB: 10년24216981131795717--.57261421464.01487127388--145911626816063.731.28


  • 각 연도의 '''굵은 글씨'''는 리그 최고
  • 「-」는 기록 없음
  • MLB 올스타전 선출: 1회 (1951년)

3. 3.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1941년, 버팔로에서 뛰던 허친슨은 미국이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면서, 성공적인 메이저 리그 경력을 눈앞에 두고 미국 해군에 입대했다.[10] 그는 해군에서 중령으로 진급했으며, 1942년부터 1945년까지 4시즌 동안 군 복무로 인해 메이저 리그에서 활동하지 못했다.[3]

1941년 미국 해군 입대를 축하받고 있는 22세의 허친슨

4. 감독 경력

허친슨은 1952년 시즌 중반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감독으로 임명되어 1954년까지 팀을 이끌었다. 1955년에는 고향 팀인 시애틀 레이니어스의 감독을 맡아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25] 1956년부터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감독을 맡아 1958년 말까지 팀을 지휘했다.

1959년 7월 9일, 허친슨은 신시내티 레즈의 감독으로 부임했다.[25] 1961년, 레즈는 프랭크 로빈슨을 필두로 여러 선수들의 활약에 힘입어 1940년 이후 처음으로 내셔널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1961년 월드 시리즈에서 뉴욕 양키스에게 패하며 준우승에 머물렀다.

1964년 시즌 도중까지 레즈의 감독직을 수행했지만, 암 투병으로 인해 그해 11월에 4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레즈는 그의 업적을 기려 등번호 1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고, 1965년에는 해치상을 제정했다.

4. 1.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1952년 시즌 중반, 허친슨은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감독으로 임명되었다.[17][18] 당시 디트로이트는 아메리칸 리그 8개 팀 중 최하위에 머물고 있었고, 구단은 레드 롤프 감독을 해고하고 허친슨에게 감독직을 맡겼다. 허친슨은 1947년부터 아메리칸 리그 선수 대표를 맡을 정도로 리더십이 뛰어났다고 한다.

허친슨은 1953년까지 선수 겸 감독으로 활동했으며, 1952년 8위였던 팀을 1953년과 1954년에는 각각 6위와 5위로 이끌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알 칼라인이 데뷔하여 미래의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외야수가 되었다.

1954년 말, 허친슨은 2년 계약을 원했지만 구단은 1년 계약만 제안했고 결국 그는 16년간 몸담았던 타이거스를 떠났다.[17][18] 그는 1952년에 투수로 등판했지만, 시즌 도중에 감독을 겸임하게 되었고, 1953년에 선수 은퇴 후 1954년까지 감독직을 수행했다.

4. 2. 시애틀 레이니어스

1955년, Hutchinson영어은 고향 팀인 시애틀 레이니어스의 감독으로 부임하여 팀을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다.[25]

4. 3.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허친슨은 1955년 시즌 직후 해리 워커를 대신하여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감독직을 맡았다.[19] 1956년부터 1958년 말까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감독을 역임했다.

4. 4. 신시내티 레즈

1959년 7월 9일, 시즌 중 메이요 스미스를 대신하여 신시내티 레즈의 감독으로 임명되었다.[25] 허친슨 감독 아래서 신시내티는 39승 35패를 기록하며 순위에서 두 계단 상승했지만, 다음 시즌에는 67승 87패로 6위에 그쳤다.

1961년은 허친슨에게 결정적인 시즌이었다. 레즈는 MVP프랭크 로빈슨을 필두로, 외야수 바다 핀슨, 투수 짐 오툴, 켄 헌트, 짐 맬로니와 같은 젊은 선수들의 성장, 투수 조이 제이와 3루수 진 프리즈와 같은 핵심 선수들의 영입, 1루수 고디 콜먼, 제리 린치, 베테랑 월리 포스트의 활약에 힘입어 93승을 거두며 1940년 이후 처음으로 내셔널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19] 그러나 1961년 월드 시리즈에서 로저 매리스, 미키 맨틀, 화이티 포드 등이 활약한 뉴욕 양키스에게 5경기 만에 패했다.

1964년 시즌 도중까지 지휘를 맡았지만, 허친슨은 전년도 12월에 암 진단을 받았고, 고통을 참아가며 지휘를 했다고 한다. 시즌 종료 후 10월 19일에 다음 해 이후에도 감독으로 재계약을 맺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11월 12일플로리다주의 병원에서 45세로 사망했다.

허친슨의 레즈 재직 당시의 등번호 "1".
신시내티 레즈의 영구 결번으로 1964년 지정.


레즈는 허친슨이 착용했던 등번호 '1'을 신시내티 레즈 최초의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는데, 지정일은 재계약을 맺은 1964년 10월 19일이다. 또한 이듬해 1965년, 허친슨의 공적과 그의 파이팅 스피릿을 기려, 파이팅 스피릿과 경쟁 의식을 가지고, 역경을 이겨내고 팬들에게 용기를 준 선수에게 수여되는 "해치상"이 제정되었다.

5. 암 투병과 죽음

Fred Hutchinson영어은 1963년 12월 말, 플로리다의 자택 안나 마리아 섬에서 목에 덩어리를 발견했다. 시애틀에서의 진찰 결과, 폐, 가슴, 목에 악성 종양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28] 당시 이용 가능한 암 치료법을 고려할 때, 예후는 암울했다. 그의 형제에 따르면, 허친슨은 하루에 4갑에 달하는 담배를 연속 흡연하는 흡연자였다.[9][29] 1964년 1월 3일, 신시내티 레즈는 감독의 질병을 공개했다.[30] 2월 초에 방사선 치료를 받은 후에도, 그는 스프링 트레이닝 중인 3월에도 비교적 건강한 상태였다.[31][32] ''스포팅 뉴스''는 팀이 허친슨이 "아마 죽음의 문턱에 와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 1964년 시즌을 치렀다고 언급했다.

그의 건강이 악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33] 허친슨은 7월 27일까지 레즈를 이끌었고, 그날 신시내티에서 입원했다.[34] 8월 4일에 더그아웃으로 돌아왔지만,[35] 45번째 생일 다음 날, 수석 코치인 딕 시슬러에게 팀을 넘기기 전까지 9일밖에 버티지 못했다.[36] 8월 12일 크로슬리 필드에서 그의 생일이 기념되었고,[37][38] 이틀 뒤 2주 동안 재입원했다.[39][40] 감독이 위독한 상황에서, 영감을 받은 레즈는 맹렬하게 질주하여 마지막 47경기 중 29경기를 승리했고, 1위를 달리던 필라델피아 필리스가 무너지면서, 팀은 필리스와 공동 2위로 시즌을 마쳤으며, 1964년 월드 시리즈에서 우승한 카디널스에 1경기 뒤졌다.

허친슨은 1964년 10월 19일에 감독직에서 공식적으로 사임했고,[41] 3주 후 플로리다주 브레이든턴에 있는 매너티 메모리얼 병원에서 사망했다.[1][2][3] 그는 워싱턴주 렌턴 근처의 마운트 올리벳 묘지에 있는 가족 묘지에 부모님 옆에 묻혔으며, 워싱턴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곳이었다.[42]

''SPORT'' 잡지는 그의 마지막 질병과의 투쟁과 레즈가 그의 등번호(1)를 영구 결번으로 지정한 것에 대한 경의를 표하며, 1964년 "올해의 인물"로 그를 선정했다. 허치 상 또한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서 매년 수여한다.[43]

6. 유산

SPORT영어 잡지는 허친슨이 마지막 질병과 투병하는 동안 신시내티 레즈가 그의 등번호(1)를 영구 결번으로 지정한 것에 대한 경의를 표하며, 1964년 "올해의 인물"로 그를 선정했다.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서는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해치상을 매년 수여하고 있다.[43]

허친슨은 1965년 신시내티 레즈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메이저 리그 감독으로 12시즌 전체 또는 일부를 보내며 통산 830승 827패, 9번의 무승부를 기록했다. 그는 승리하는 야구팀을 이끈 것으로 기억되었으며, 신시내티를 역사적인 승리의 시대로 이끌었다(그의 사후 수년 뒤 1970년대의 "빅 레드 머신"으로 절정에 달했다).

레즈는 허친슨이 사용했던 등번호 '1'을 신시내티 레즈 최초의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는데, 지정일은 재계약을 맺은 1964년 10월 19일이다. 또한 이듬해 1965년, 허친슨의 공적과 그의 파이팅 스피릿을 기려, 역경을 이겨내고 팬들에게 용기를 준 선수에게 수여되는 "해치상"이 제정되었다.

1975년에는 허친슨의 고향인 시애틀에 프레드 허친슨 암 연구 센터(Fred Hutchinson Cancer Research Center)가 설립되었다.

1985년, 허친슨은 버팔로에서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버팔로 야구 명예의 전당의 창립 멤버가 되었다.[46]

1999년 12월 24일, ''시애틀 포스트 인텔리젠서''는 허친슨을 시애틀의 20세기 최고의 운동선수로 선정했다.[29]

프레드 허친슨 암 연구 센터는 의료 및 야구계에서 암 치료 허브로 계속해서 뉴스에 오르고 있다. 보스턴 레드삭스 신인 좌완 투수 존 레스터는 워싱턴 주 출신으로 2006년 시즌 동안 역형성 대세포 림프종 진단을 받아 시애틀의 이 시설에서 화학 요법을 받기로 결정했다. 2008년 11월 11일, 16승 투수이자 포스트시즌 투구 스타였던 레스터는 2008년 허치상을 수상했다.[47]

시애틀의 T-Mobile 파크 좌석 열의 모든 엔드 플레이트에는 허친슨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7. 감독 통산 성적

허친슨은 메이저 리그 감독으로 12시즌 동안 활동했다. 통산 830승 827패, 승률 .501을 기록했다.

연도정규 시즌포스트시즌
경기승률최종 순위승률결과
DET1952822755.329임시 감독
DET19531546094.390아메리칸 리그 6위
DET19541546886.442아메리칸 리그 5위
DET 합계390155235.39700
STL19561547678.494내셔널 리그 4위
STL19571548767.565내셔널 리그 2위
STL19581446975.479해고
STL 합계452232220.51300
CIN1959743935.527내셔널 리그 5위
CIN19601546787.435내셔널 리그 6위
style="background:#fdd"CIN19611549361.604내셔널 리그 1위14.200월드 시리즈 패배 (NYY)
CIN19621629864.605내셔널 리그 3위
CIN19631628676.531내셔널 리그 5위
CIN19641096049.550질병
CIN 합계815443372.54414.200
총계1657830827.50114.200


참조

[1] 뉴스 Cancer fatal to ex-Red pilot Hutchinson https://news.google.[...] 1964-11-13
[2] 뉴스 Fred Hutchinson dies at Bradenton Memorial Hospital https://news.google.[...] 1964-11-12
[3] 뉴스 Former Redleg manager Fred Hutchinson dead at 45 https://news.google.[...] 1964-11-12
[4] 뉴스 Rites set for Dr. Joseph L. Hutchinson https://www.donquigl[...] 1951-03-21
[5] 웹사이트 Hutchinson, Dr. William B. (1909–1997) http://www.historyli[...] HistoryLink: the free, online encyclopedia of Washington state history 2004-12-30
[6] 뉴스 Dr. William Hutchinson, founder of research centers, dies in Seattle https://news.google.[...] 1997-10-28
[7] 웹사이트 Hutchinson, Fred (1919–1964); Baseball legend http://www.historyli[...] HistoryLink: the free, online encyclopedia of Washington state history 2007-11-12
[8] 뉴스 Albert Crosetto marries Snoqualmie teacher https://news.google.[...] 1941-06-05
[9] 뉴스 Brother recalls Hutch https://news.google.[...] 1982-08-10
[10] 뉴스 New Detroit Tiger tries out cage game https://news.google.[...] 1938-12-13
[11] 뉴스 Bucs hope to close Hutchinson deal at majors' meeting https://news.google.[...] 1938-12-11
[12] 뉴스 Detroit outbids Buccaneers for Hutchinson https://news.google.[...] 1938-12-13
[13] 뉴스 Hutchinson goes to Detroit team https://news.google.[...] 1938-12-13
[14] 웹사이트 All-Star Game: Tuesday https://www.baseball[...] 1951-07-10
[15] 뉴스 Coaches Tee Up https://www.newspape[...] 1963-08-15
[16] 웹사이트 Ted Williams, Fenway Park https://web.archive.[...] 1946-06-09
[17] 잡지 In Sunshine or In Shadow https://archive.toda[...] 1957-08-26
[18] 뉴스 Fred Hutchinson quits as manager of Tigers https://news.google.[...] 1954-09-30
[19] 뉴스 Fred Hutchinson named manager of Cardinals https://news.google.[...] 1955-10-13
[20] 뉴스 He lived, died like a man – Mauch https://news.google.[...] 1964-11-13
[21] 뉴스 Hutch gets 1958 contract with Cardinals https://news.google.[...] 1957-09-29
[22] 뉴스 Fred Hutchinson will be dropped as Cardinals' manager in 1959 https://news.google.[...] 1958-09-11
[23] 뉴스 Fred Hutchinson fired as Cardinals' manager https://news.google.[...] 1958-09-18
[24] 웹사이트 Why Bing Devine was forced to fire Fred Hutchinson https://retrosimba.c[...] 2013-09-16
[25] 뉴스 Hutchinson Reds' new manager https://web.archive.[...] 1959-07-09
[26] 뉴스 Hutchinson inks 2-year Reds' pact https://news.google.[...] 1963-07-13
[27] 뉴스 Hutchinson calls Reds 'improved' https://news.google.[...] 1964-01-30
[28] 뉴스 Red's Fred Hutchinson has lung cancer https://news.google.[...] 1964-01-03
[29] 웹사이트 Wayback Machine: Hutch — A Man And An Award http://sportspressnw[...] Sports Press Northwest 2012-01-24
[30] 뉴스 Hutchinson's illness diagnosed as malignancy https://news.google.[...] 1964-01-03
[31] 뉴스 Hutchinson doing what doctor orders https://news.google.[...] 1964-03-20
[32] 뉴스 Hutchinson's cancer top spring baseball story https://news.google.[...] 1964-03-21
[33] 뉴스 Hutchinson has another exam by hospital https://news.google.[...] 1964-06-09
[34] 뉴스 Hutchinson returns to hospital for tests https://news.google.[...] 1964-07-28
[35] 뉴스 Fred Hutchinson gets real gift from his team https://news.google.[...] 1964-08-05
[36] 뉴스 Red pilot to stay at home https://news.google.[...] 1964-08-13
[37] 뉴스 'Happy Birthday' 'shakes' Hutch https://web.archive.[...] 2015-12-10
[38] 뉴스 Ailing Hutch is honored on birthday https://news.google.[...] 1964-08-13
[39] 뉴스 Fred Hutchinson back in hospital https://news.google.[...] 1964-08-15
[40] 뉴스 Fred Hutchinson leaves hospital https://news.google.[...] 1964-08-27
[41] 뉴스 Sisler named Reds' pilot as Hutchinson resigns https://news.google.[...] 1964-10-20
[42] 뉴스 Fred Hutchinson goes to final resting place https://news.google.[...] 1964-11-17
[43] 뉴스 Writers to perpetuate memory of Hutchinson https://news.google.[...] 1965-06-20
[44] 뉴스 Jim Brosnan in ''The Long Season'', quoted by Jonathan Yardly in https://www.washingt[...] 2004-04-07
[45] 웹사이트 Jim Delsing https://sabr.org/bio[...] 2020-04-28
[46] 웹사이트 Buffalo Baseball Hall of Fame https://web.archive.[...] 2012-08-29
[47] 웹사이트 missing title http://www.courant.c[...] 2019-12
[48] 간행물 球団別永久欠番物語 第8回 シンシナティ・レッズ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2001-03
[49] 웹사이트 Hutchinson, Dr. William B. (1909-1997) http://www.historyli[...] 2004-12-30
[50] 뉴스 Cancer fatal to ex-Red pilot Hutchinson https://news.google.[...] 1964-11-13
[51] 뉴스 Fred Hutchinson dies at Bradenton Memorial Hospital https://news.google.[...] 1964-11-12
[52] 뉴스 Former Redleg manager Fred Hutchinson dead at 45 https://news.google.[...] 1964-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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