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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롱드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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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롱드의 난은 1648년부터 1653년까지 프랑스에서 일어난 일련의 반란을 의미하며, '프롱드'는 새총을 뜻하는 프랑스어에서 유래했다. 이 반란은 왕권의 강화에 대한 반발로 시작되었으며, 파리 고등법원의 권리 수호와 과도한 세금 부과에 대한 불만이 주요 원인이었다. 프롱드의 난은 법원 프롱드와 제후들의 프롱드로 나뉘어 전개되었으며, 쥘 마자랭 추기경을 중심으로 한 왕당파와 귀족 세력 간의 권력 다툼으로 변질되었다. 결국 프롱드의 난은 실패로 끝났지만, 프랑스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쳐 루이 14세의 절대주의 왕정 체제 확립에 기여했고, 베르사유 궁전 건설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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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롱드의 난 - [전쟁]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기본 정보
분쟁 이름프롱드의 난
일부프랑스-스페인 전쟁 (1635–1659)
일반적인 위기
날짜1648년–1653년
장소프랑스
결과반란 진압
전투 세력 1프랑스 왕국
전투 세력 2프랑스 고등법원 (1648–1649)
왕족 (1650–1653)
스페인 제국
지휘관
지휘관 1루이 14세
안 도트리슈
마자랭 추기경
튀렌 자작 (1651년부터)
지휘관 2오를레앙 공작 가스통
루이, 콩데 공 (1651년부터)
아르망 드 부르봉, 콩티 공 (1651년부터)
튀렌 자작 (1650년에서 1651년까지)
전투 목록
전투파리
르텔
자르조
블레노
에탕프
샤티용
포부르 생앙투안
부르
제1차 보르도
제2차 보르도
이미지
바스티유 성벽 아래, 파리의 포부르 생앙투안 전투 (1652)
기타 정보

2. 이름의 뜻

프롱드(fronde)는 프랑스어로 투석기, 새총을 뜻한다. 파리 시민들이 마자랭 추기경 지지자들의 창문을 깨기 위해 새총을 사용한 것에서 명칭이 유래했다. 레츠(Retz) 추기경 장 프랑수아 폴 드 곤디는 회상록 2권에서 다음과 같이 재치 있는 표현을 사용했다. "바쇼몽은 법원이 파리의 도랑에서 돌을 내던지고(‘프롱당'(frondent), 즉 새총을 사용해서 쏘는), 순경을 만나면 도망쳤다가 순경이 등을 돌리자마자 다시 만나는 남학생들처럼 행동했다고 농담으로 말한 적이 있다." 그는 이 별명을 바탕으로 한 엠블럼이 꽤 인기를 끌었으며 모자, 부채, 장갑 위에 새겨지기도 했고, 빵조차 이 엠블럼이 새겨진 채로 구워지기도 했다고 말한다.

3. 기원

프롱드의 난은 왕권 강화에 대한 반발 등 복합적인 요인으로 인해 발생했다. 30년 전쟁 (1618~1648)으로 인한 재정난으로,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마자랭 정부는 세금을 인상했고 이는 귀족과 부르주아층의 반발을 샀다.[7] 귀족들은 전통적인 자유와 특권을 지키기 위해 왕권에 저항했다.[7] 파리 고등법원은 왕의 권력을 제한하고 자신들의 권한을 강화하려 했다.[3]

섭정 앙느 도트리슈와 재상 마자랭은 각각 스페인과 이탈리아 출신이었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반감도 난의 한 원인이 되었다. 당시 영국에서 발생한 청교도 혁명은 프랑스의 반왕권 세력에게 영향을 주었다.[5]

1643년 루이 13세가 사망하고 루이 14세가 4세의 나이로 즉위하자, 앙느 도트리슈가 섭정을, 쥘 마자랭이 실질적인 수상 자리에 올랐다. 마자랭은 리슐리외의 정책을 계승하여 귀족 계급에 대항했고, 30년 전쟁을 계속하기 위한 중과세를 부과하여 귀족과 민중의 더 큰 반발을 샀다. 당시 매관매직으로 인해 부유층이 법복귀족으로 증가하고 있었고, 이들은 파리 고등법원에도 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민중과 귀족 세력이 결합하여 궁정과 대립하는 배경이 되었다.[5]

4. 제1차 프롱드의 난 (법원 프롱드, 1648~1649년)

1648년 5월, 파리 고등법원의 사법관에게 부과된 세금은 단순한 납세 거부를 넘어, 이전의 재정 명령에 대한 비난과 고등법원[7] (샹브레 생 루이)의 통합 위원회가 제시한 헌법 개혁 계획의 수용 요구로 이어졌다. 이 위원회는 파리의 모든 주권 법정의 구성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3]

콩데 공 루이 2세의 랑스 전투 승리(1648년 8월 20일) 소식에 힘입은 쥘 마자랭은 갑자기 고등법원 지도자들을 체포했고, 이에 파리는 봉기하여 거리를 바리케이드로 막았다.[7]

귀족 세력은 1615년 이후 처음으로 삼부회 소집을 요구했다. 귀족들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삼부회에서 부르주아 계급을 계속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다.

즉시 사용할 수 있는 군대가 없었던 왕당파는 죄수들을 석방하고 개혁을 약속해야 했다. 1648년 10월 22일 밤, 그들은 파리를 탈출했다. 그러나 프랑스가 베스트팔렌 조약(뮌스터 조약, 1648년 10월 24일)에 서명함에 따라 프랑스 군대가 국경에서 돌아올 수 있게 되었고, 1649년 1월까지 콩데는 파리를 포위했다. 두 당사자는 피해가 거의 없이 뤼이유 조약(1649년 3월 11일)에 서명했다. 파리 시민들은 여전히 반 마자랭 성향이었지만, 콩티 공 아르망 드 부르봉의 제안대로 스페인의 지원을 요청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러한 지원 없이는 군사적 성공의 전망이 없었기에, 귀족 세력은 정부에 복종하고 양보를 받았다.[3][7]

5. 제2차 프롱드의 난 (제후들의 프롱드, 1650~1653년)

1648년 8월, 쥘 마자랭이 고등법원 구성원들을 체포하면서 제1차 프롱드의 난이 시작되었다. 1649년 3월 콩데 공 루이 2세가 이끄는 왕군에 의해 진압되었으나, 1650년 1월 콩데 공이 마자랭과 대립하여 체포되자, 그의 일족들이 부르고뉴, 노르망디 등에서 봉기하면서 제2차 프롱드의 난, 즉 제후들의 프롱드가 시작되었다.

제2차 프롱드의 난은 권력과 후원권을 장악하기 위한 음모와 전투가 주를 이루었으며, 초기의 헌법적 성격은 사라졌다.[5] 주도 세력은 가스통 도를레앙 공작(국왕의 삼촌), 루이 2세 드 부르봉콩데와 그의 동생 아르망 콩티 공, 프레데릭 부이용 공작과 그의 동생 앙리 튀렌 자작 등 불만을 품은 제후와 귀족들이었다. 몽팡시에 공작부인(라 그랑 마드무아젤), 콩데의 누이 롱그빌 부인, 슈브뢰즈 부인, 장 프랑수아 폴 드 공디(후일 레츠 추기경)도 주요 인물이었다.[5] 군사 작전은 전쟁 경험이 풍부한 용병들이 담당했다.[5]

1651년 2월, 콩데 공이 석방되고 마자랭이 독일로 망명하면서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다. 콩데 공은 파리에서 권세를 휘둘렀고, 반란은 대귀족까지 가담하면서 확대되었다. 그러나 반란 세력은 내분에 휩싸였고, 콩데 공은 1652년 9월 보르도로 떠나 지방에서 반란을 호소하며 스페인의 원군과 합류했다. 1652년 1월, 마자랭이 귀국하고 튀렌이 왕군을 지휘하면서, 콩데 공과 튀렌의 대결이 본격화되었다.

콩데 공은 1652년 4월, 스페인 군과 함께 파리로 진격하여 튀렌과 교전하며 파리에 입성했다. 7월에는 포부르 생탕투안 전투에서 왕군과 격돌했으나,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고립되었다. 8월에 마자랭이 다시 망명하면서 파리에서 왕의 귀환을 바라는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10월에 콩데 공은 파리에서 탈출, 루이 14세 등이 귀환했다. 11월, 콩데 공은 스페인령 네덜란드로 망명했고, 1653년 2월 마자랭이 파리로 돌아왔다. 1653년 7월, 보르도가 왕군에 의해 진압되면서 프롱드의 난은 막을 내렸다.[6]

5. 1. 1650년 1월 ~ 1651년 12월

1650년 1월 14일, 쥘 마자랭 추기경은 콩데 공, 콩티 공, 롱그빌 공작을 갑작스럽게 체포했다. 이는 공디(후일 레츠 추기경)와 슈브뢰즈 부인과의 협의를 통해 이루어졌다.[7] 이번에는 평소 가장 충성스러운 군인이었던 튀렌이 무장 반란을 이끌게 되었다. 그는 롱그빌 부인의 부추김을 받아, 특히 프라이부르크 전투와 뇌르틀링겐 전투에서 함께 싸웠던 동지인 콩데 공을 구출하기로 결심했다.[7]

튀렌은 스페인의 지원을 받아 이를 이루고자 했다. 스페인령 네덜란드 총독인 레오폴트 빌헬름 대공의 지휘 아래 강력한 스페인군이 아르투아에 집결했으나, 시골 농민들이 침략자들에 맞서 봉기했다. 샹파뉴의 왕군은 52세의 나이에 36년간의 전쟁 경험을 가진 유능한 세자르 드 슈아죌 플레시프라슬랭 백작의 수중에 있었고, 작은 요새 귀즈는 대공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저지했다.[7]

이때 마자랭은 남부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플레시프라슬랭의 군대에서 증원군을 차출했고, 이로 인해 왕군 사령관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레오폴트 빌헬름 대공은 프랑스의 내분에 스페인 국왕 펠리페 4세의 돈과 병력을 더 이상 쓰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의 정규군은 동계 주둔지로 철수했고, 튀렌은 프롱드파와 로렌 출신 병사들로 이루어진 잡다한 군대만을 이끌고 제후들을 구출해야 했다. 플레시프라슬랭은 무력과 뇌물로 1650년 12월 13일 르텔의 항복을 받아냈고, 이곳을 구원하기 위해 전진했던 튀렌은 서둘러 후퇴했다. 하지만 그는 무서운 적수였고, 플레시프라슬랭과 군대를 동행한 마자랭 자신도 전투에서 패할 경우의 결과를 크게 우려했다. 그럼에도 원수는 튀렌을 결전으로 몰아넣기로 결정했고, 그 결과로 블랑샹 전투(솜피타위르 근처), 또는 르텔 전투가 벌어졌다.[7]

양측은 모두 견고한 진지에서 교착 상태에 빠져 있었다. 플레시프라슬랭은 자신의 기병대의 신뢰성을 의심했고, 튀렌은 공격하기에는 너무 약했다. 이때 프랑스 근위연대와 피카르디 연대 사이에서 서열 다툼이 일어났다. 왕군 보병대는 연대의 서열에 따라 재배치되어야 했고, 튀렌은 이에 따른 혼란을 목격하고 이를 이용하고자 하여 자신의 요새에서 나와 맹렬히 공격했다. 1650년 12월 15일의 전투는 치열했고 한동안 승패를 가늠할 수 없었으나, 결국 튀렌의 프롱드파가 무너졌고 그의 군대는 군대로서의 모습을 잃었다. 자신이 연극에서 맡은 역할에 대해 환멸을 느낀 튀렌 자신은 어린 국왕의 용서를 구했고 받아들여졌다. 한편 궁정은 국왕 직속군과 다른 충성스러운 군대와 함께 소규모 봉기들을 어렵지 않게 진압했다(1651년 3~4월).[7]

콩데, 콩티, 롱그빌이 석방되었고, 1651년 4월까지 반란은 모든 곳에서 붕괴되었다. 이후 몇 달간의 공허한 평화가 이어졌고 궁정은 파리로 돌아왔다. 모든 제후들의 증오의 대상이 된 마자랭은 이미 망명길에 올랐다. 그의 부재로 상호 질시가 활개를 칠 수 있게 되었고, 그해 남은 기간 동안 프랑스에는 무정부 상태가 계속되었다.[7]

5. 2. 1651년 12월 ~ 1653년 2월

1651년 12월, 쥘 마자랭 추기경은 소규모 군대를 이끌고 프랑스로 돌아왔다. 전쟁이 다시 시작되었고, 이번에는 앙리 드 라 투르 도베르뉴 튀렌과 콩데가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이 전역이 끝난 후 내전은 종식되었으나, 이어진 프랑스-스페인 전쟁의 여러 전역에서 두 위대한 군인은 서로 맞서게 되었다. 튀렌은 프랑스의 수호자로, 콩데는 스페인의 침략자로서였다.

새로운 프롱드파의 데뷔는 기옌 지방에서 이루어졌고(1652년 2~3월), 그들의 동맹군인 레오폴트 빌헬름 대공은 북부의 여러 요새를 점령했다. 전쟁의 중심지가 곧 루아르강으로 옮겨갔는데, 콩데가 기옌에서 도착하기 전까지 음모가와 다투기 좋아하는 영주들이 프롱드군을 지휘했다. 그의 대담한 지휘는 블레노 전투(1652년 4월 7일)에서 빛을 발했는데, 이 전투에서 왕군의 일부가 궤멸되었으나 새로운 군대가 그에 맞서기 위해 도착했다. 콩데는 적군의 능숙한 배치를 보고 튀렌의 존재를 감지했으며 전투를 중단했다. 왕군도 마찬가지로 전투를 중단했다. 콩데는 튀렌의 후위대 지휘관을 저녁 식사에 초대해 아침에 자신의 부하들에게 기습당한 것을 무자비하게 조롱했고, 작별 인사로 "우리 같은 훌륭한 사람들이 한 건달을 위해 서로의 목을 치고 있다니 안타깝군"(Quel dommage que de braves gens comme nous se coupent la gorge pour un faquin프랑스어)이라고 말했다. 이 사건과 발언은 역설적이게도 루이 14세의 철권통치로 이어진 봉건적 오만을 잘 보여준다.

블레노 전투 이후 양군은 파리로 행군하여 의회, 레츠, 몽팡시에 공작부인과 협상을 벌였다. 한편 대공은 플랑드르에서 더 많은 요새를 점령했고, 샤를 로렌 공작은 약탈을 일삼는 용병 군대를 이끌고 샹파뉴를 거쳐 콩데와 합류하기 위해 진군했다. 이에 대해 튀렌은 콩데를 우회하여 용병들 앞에 진을 쳤고, 그들의 지도자는 자신의 부하들을 프랑스의 노련한 연대들과 맞서 손실시키고 싶지 않아 금전을 받고 로렌의 아주 작은 요새 두 곳을 약속받는 대가로 철수하는 데 동의했다.

몇 차례의 기동 작전이 더 있은 후, 왕군은 생탕투안 구역 전투(1652년 7월 2일)에서 프롱드파를 파리의 닫힌 성문을 등지게 하여 포위할 수 있었다. 왕당파는 전선 전체에 걸쳐 공격을 감행했고, 공과 그의 위대한 귀족들의 기사다운 용맹에도 불구하고 큰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오를레앙 공작 가스통의 딸이 파리 시민들을 설득하여 성문을 열고 콩데의 군대를 받아들이게 했다. 그는 직접 바스티유의 대포를 추격자들에게 발포했다. 반란 정부가 파리에 출현하여 공작을 왕국의 부총독으로 선포했다. 마자랭은 여론이 확고하게 자신을 반대한다고 느끼고 다시 프랑스를 떠났으며, 제후들과 다투던 파리의 부르주아들은 1652년 10월 21일 국왕이 도시에 입성하는 것을 허락했다. 마자랭은 1653년 2월 아무런 저항 없이 귀환했다.

6. 결과 및 영향

프롱드의 난은 실패로 끝났지만, 프랑스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 왕권 강화: 난은 귀족 세력의 약화를 가져왔고, 루이 14세의 절대 군주제 체제 확립에 기여했다. 프롱드의 난은 혼란이 봉건적 자유 개념을 신뢰할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에 왕당파 절대주의의 확립에 대한 동기를 제공했다.[3]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루이 14세가 나중에 절대 군주제를 고집하며 귀족의 실질적인 권력을 박탈한 것은 어린 시절 이 사건들의 결과라고 추측하고 있다.[4]
  • 베르사유 천도: 루이 14세는 어린 시절 프롱드의 난을 경험하면서 파리에 대한 불신을 갖게 되었고, 이는 베르사유 궁전으로의 천도로 이어졌다.[5] 1649년 1월, 루이 14세는 파리를 일시적으로 떠나 생제르맹앙레로 피신해야만 했다.
  • 프랑스-스페인 전쟁: 프롱드의 난 이후에도 프랑스와 스페인 간의 전쟁은 계속되었고, 1659년 피레네 조약으로 종결되었다.[6]


세네프 전투 승리 후 베르사유 궁전에서의 콩데 대공의 환영식. 콩데 대공은 존경하는 태도로 루이 14세에게 다가가고, 그의 길에는 월계관이 놓여 있으며, 계단 양쪽에는 빼앗은 적기가 전시되어 있다. 이는 프롱드에 참여한 후 콩데 대공의 망명이 끝났음을 알린다.


프롱드로 인한 내전은 이제 끝났다. 혼란에 지치고 왕족들에게 혐오감을 느낀 나라는 질서를 대표하는 왕과 그의 당파를 바라보게 되었다. 따라서 프롱드는 루이 14세의 절대주의를 위한 길을 열었다. 한편, 프랑스-스페인 전쟁은 플랑드르, 카탈루냐, 이탈리아 등 스페인과 프랑스의 수비대가 마주한 모든 곳에서 계속되었다. 콩데 대공은 그의 잔여 군대와 함께 스페인 왕의 봉사에 과감하게 들어갔다.

1653년, 프랑스는 너무나도 지쳐서 침입자도 방어자도 7월까지 작전을 펼칠 수 있는 보급품을 모을 수 없었다. 페론느 근처에서 콩데 대공은 튀렌을 심각하게 불리하게 만들었지만, 프랑스 왕의 궁정 대신을 콩데 대공으로 세우는 것보다 자신의 주군의 병사들을 보존하는 데 더 신경 쓴 스페인 장군 후엔살다냐 백작을 고무시킬 수 없었고, 군대는 다시 싸우지 않고 흩어졌다. 1654년 주요 사건은 아라스의 포위 공격과 구원이었다. 8월 24일/25일 밤, 그곳을 둘러싼 콩데 대공의 포위선은 튀렌의 군대에 의해 훌륭하게 돌파되었고, 콩데 대공은 평소처럼 검을 들고 이끄는 일련의 대담한 기병 돌격으로 포위군을 안전하게 철수시킨 공로를 인정받았다.

1655년, 튀렌은 랑드르시, 콩데, 생길랭의 요새를 점령했다. 1656년, 콩데 대공은 발랑시엔 주변의 튀렌의 포위선을 돌파(7월 16일)하여 아라스 패배를 복수했지만, 튀렌은 그의 군대를 질서 정연하게 철수시켰다. 1657년의 전투는 별다른 사건이 없었으며, 쥘 마자랭과의 동맹 조약에 따라 올리버 크롬웰이 파병한 6,000명의 영국 보병이 참여했다는 점만 기억할 만하다. 영국 부대의 존재와 됭케르크를 새로운 칼레로 만들어 영국이 영원히 점령한다는 목적은 다음 전투에 이전 전쟁에는 전혀 없었던 확실성과 결단력을 부여했다.

됭케르크는 곧바로 대규모로 포위되었고, 오스트리아의 돈 후안과 콩데 대공이 푸메스에서 구원군과 함께 나타나자, 튀렌은 과감하게 그들을 만나러 진격했다. 1658년 6월 14일에 벌어진 뒬뇌프 전투는 팡부르 생탕투안 전투 이후 최초의 진정한 힘의 시험이었다. 한쪽 날개의 성공은 다른 쪽 날개의 실패로 인해 위태로워졌지만, 결국 콩데 대공은 많은 손실을 입고 철수했고, 그의 기병 돌격의 성공은 사구 사이에서 스페인 우익의 패배로 인해 무산되었다.

여기서 "레드코트"가 대륙 전장에 처음 등장했는데, 크롬웰의 파리 주재 대사인 윌리엄 록하트 경의 지휘 아래 있었다. 그들은 그들의 완강한 공격에 의해 양군을 놀라게 했다. 됭케르크는 함락되었고 약속대로 영국 보호령에 넘겨졌으며, 1662년 찰스 2세가 루이 14세에게 팔 때까지 세인트 조지 십자가를 휘날렸다.

1659년, 30년 전쟁 중에 시작된 프랑스와 스페인 간의 갈등 25년째에 마지못해 마지막 전투가 이어진 후, 11월 5일에 피레네 조약이 체결되었다. 1660년 1월 27일, 콩데 대공은 엑상프로방스에서 루이 14세의 용서를 구하고 받았다. 튀렌과 콩데 대공의 이후 경력은 그들의 군주에게 복종하는 신하로서였다.

7. 같이 보기

참조

[1] 서적 The Oxford-Hachette French Dictionary 2007
[2] 서적 Magill's History of Europe Grolier Educational Corporation 1993
[3] 서적 The revolt of the judges: the Parlement of Paris and the Fronde, 1643–1652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72
[4] 논문 'Frondeur' Journalism in the 1770s: Theater Criticism and Radical Politics in the Prerevolutionary French Press https://www.jstor.or[...] 1984
[5] 서적 ヴォルテール、P43 - P54、長谷川、P107 - P112、友清、P9 - P11。
[6] 서적 ヴォルテール、P54 - P77、長谷川、P112 - P114、友清、P15 - P21。
[7] 서적 The revolt of the judges: the Parlement of Paris and the Fronde, 1643–1652 https://archive.org/[...]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72
[8] 논문 'Frondeur' Journalism in the 1770s: Theater Criticism and Radical Politics in the Prerevolutionary French Press https://www.jstor.or[...]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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