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드 라 투르 도베르뉴 (16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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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앙리 드 라 투르 도베르뉴(1611년)는 부용 공작 앙리와 엘리자베트 프랑드리카 드랑쥬 나소 사이에서 태어난 프랑스의 군인이자 튀렌 자작이다. 위그노로 성장하여 네덜란드 독립 전쟁에 참전하며 군 경력을 시작했고, 1640년 프랑스군에 입대하여 30년 전쟁과 프롱드의 난, 프랑스-스페인 전쟁에서 활약했다. 1643년 프랑스 원수로 임명되었으며, 네덜란드 전쟁에서도 공을 세웠으나 1675년 잘츠바흐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는 뛰어난 군사 전략가로 평가받으며, 나폴레옹을 비롯한 많은 이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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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드 라 투르 도베르뉴 (1611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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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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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명 | 튀렌 |
출생일 | 1611년 9월 11일 |
출생지 | 스당 성, 스당 공국 (현재의 프랑스) |
사망일 | 1675년 7월 27일 |
사망지 | 자스바흐, 뷔르템베르크 공국 (현재의 독일) |
군사 정보 | |
소속 | 네덜란드 공화국 (1625–1633) 프랑스 왕국 (1630–1675) |
군대 | 네덜란드 국가군 프랑스 육군 |
복무 기간 | 1625–1675 |
최종 계급 | 프랑스 대원수 |
주요 참전 전투/전쟁 | |
가문 | 라 투르 도베르뉴 가문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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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과 초기 경력
튀렌은 위그노로 자랐으며, 귀족 자제로서 교육을 받았으나 허약한 체질이었고, 특히 언어 장애(평생 고치지 못했다)가 있었다. 역사와 지리에 특별한 재능을 보여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업적에 관심을 가졌으나, 언어 장애가 걸림돌이 되었다.[1]
1623년 아버지 앙리가 사망하자, 튀렌은 신체 단련에 몰두하여 허약 체질을 극복하려 했다. 14세에 숙부인 네덜란드 총독 마우리츠의 야영지에서 군사학을 배우기 시작했고, 네덜란드 독립 전쟁에서 사병으로 군 경력을 시작했다.[1]
1625년 숙부 마우리츠가 사망하고, 프레데리크 헨드릭가 네덜란드 총독이 된 후 1626년 튀렌을 육군 대위로 승진시켰다. 튀렌은 포위전 임무를 수행하며, 1629년 스헤르토헨보스 포위전에서 용기를 보여 숙부에게 극찬을 받았다.[1]
1630년 튀렌은 네덜란드를 떠나 프랑스군에 입대했다. 군대 내 승진뿐 아니라, 프랑스 왕가에 대한 충성을 보여주기 원했던 모친의 바람이 동기였다.[1]
리슐리외 추기경은 곧 튀렌을 보병 연대 대령으로 임명했다. 튀렌은 1634년 로렌의 라 모트 포위전에서 전공을 세워 육군 소장으로 승진했다.
1635년 튀렌은 라 발렌트 추기경 휘하에서 마인츠에서 신성 로마 제국군을 포위했으나, 식량 부족으로 메스로 후퇴해야 했다. 퇴각 중 튀렌은 마티아스 가라스와 결투를 벌여 명성을 얻었다. 1636년 사베른 공략에서 중상을 입었으나, 1637년 랑드레시 점령에 참가했다. 1638년 베른하르트 폰 작센-바이마르와 함께 브라이자흐를 급습, 항복을 받아냈다. 튀렌은 프랑스의 젊은 장교들 중 가장 유망한 인물로 평가받았다.
토리노에서 튀렌의 상관
1639년 리슐리외는 튀렌을 하르크르 백작 앙리 드 로렌 휘하에 두고 이탈리아 원정에 투입했다. 11월 19일 튀렌은 키에르 가도 전투에서 승리했다. 1640년 하르크르 백작은 카자레 몬페라토를 구원하고, 토리노에 있던 카리냐노 공작 토마조 군을 포위했다.
육군 중장이 된 튀렌은 1641년 코니, 세바, 몬도비를 점령했다. 1642년 튀렌은 루시옹을 정복한 프랑스군의 부사령관을 맡았다.
2. 1. 가문과 출생
개신교인 부용 공작 앙리(스당의 영주)와 그의 두 번째 아내 엘리자베트 프랑드리카 드랑쥬 나소 사이에서 차남으로 세단 성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엘리자베트는 네덜란드 총독 빌렘 1세의 딸이었다.튀렌은 위그노로 자라 귀족 자녀로서의 교육을 받았지만, 허약한 체질이었고 특히 말더듬이 있어 평생 고쳐지지 않았다. 그는 역사와 지리에 특별한 재능을 보였고,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업적에 관심을 가졌지만, 위에서 언급한 장애가 걸림돌이 되었다.
아버지가 1623년에 사망하자, 튀렌은 신체 단련에 몰두하여 타고난 약점을 극복하려고 노력했다. 14세에 외가 숙부인 네덜란드 총독 마우리츠의 야영지로 전쟁을 배우러 가서, 80년 전쟁에서 마우리츠의 경호를 맡는 사병으로 군 경력을 시작했다.
1625년에 마우리츠의 뒤를 이은 숙부 프레데리크 헨드릭에게서, 네덜란드 총독 계승 후 다음 해인 1626년에 육군 대위직을 받았고, 이 시기의 포위전에서 임무를 수행했다. 1629년, 스헤르토헨보스(프랑스어: 보아-르-뒤크) 포위전 승리에서 보여준 튀렌의 기량과 용기는 당대 최고의 사령관 중 한 명이었던 프레데릭 헨드릭으로부터 특별한 칭찬을 받았다.
1630년, 튀렌은 네덜란드를 떠나 프랑스 군에 들어갔다. 군 내 승진의 가능성뿐만 아니라, 프랑스 왕실에 부용 공가의 충성심을 보여주라는 어머니의 바람이 동기였다.
2. 2. 어린 시절과 교육
개신교인 부용 공작 앙리와 그의 두 번째 부인 엘리자베트 프랑드리카 드랑쥬 나소 사이에서 차남으로 스당 성에서 태어났다.[1] 어머니 엘리자베트는 네덜란드 총독 빌렘 1세의 딸이었다.그는 위그노로 성장했고, 귀족 자제들이 일반적으로 받던 교육을 받았으나 허약체질로 인해 특히 언어장애가 있었다. 튀렌은 역사와 지리에 특별한 재능을 보여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업적에 관심을 기울였다.
1623년 아버지 부용 공작 앙리가 사망하자, 튀렌은 신체 단련에 몰두하여 허약 체질을 극복하려 했다. 14살 때 숙부인 네덜란드 총독 마우리츠의 야영지에서 군사학을 배우기 시작했고, 네덜란드 독립 전쟁에서 사병으로 군 경력을 시작했다.
1625년 숙부 마우리츠의 뒤를 이은 프레데리크 헨드리크는 1626년 튀렌을 육군 대위로 승진시켰다. 젊은 장교는 포위전 임무를 수행하며 많은 것을 배웠고, 1629년 스헤르토헨보스 포위전에서 보인 용기는 숙부 프레데리크 헨드리크에게 극찬을 받았다.[1] 1630년 튀렌은 프랑스군에 입대했다. 군대 내 승진뿐 아니라, 프랑스 왕가에 대한 충성을 보여주기 원했던 모친의 바람이 동기가 되었다.
리슐리외 추기경은 곧 튀렌을 보병 연대 대령으로 임명했다. 튀렌은 1634년 로렌의 라 모트 포위전에서 전공을 세워 육군 소장으로 승진했다.
1635년 튀렌은 라 발렌트 추기경 휘하에서 마인츠에서 신성 로마 제국군을 포위했으나, 식량 부족으로 메스로 후퇴해야 했다. 퇴각 중 튀렌은 마티아스 가라스와 결투를 벌여 명성을 얻었다. 1636년 사베른 공략에서 중상을 입었으나, 1637년 랑드레시 점령에 참가했다. 1638년 베른하르트 폰 작센-바이마르와 함께 브라이자흐를 급습, 항복을 받아냈다. 튀렌은 프랑스의 젊은 장교들 중 가장 유망한 인물로 평가받았다.
1639년 리슐리외는 튀렌을 하르크르 백작 앙리 드 로렌 휘하에 두고 이탈리아 원정에 투입했다. 11월 19일 튀렌은 루트 드 키에르 전투에서 승리했다. 1640년 하르크르 백작은 카자레 몬페라토를 구원하고, 토리노에 있던 카리냐노 공작 토마조 군을 포위했다.
육군 중장이 된 튀렌은 1641년 코니, 세바, 몬도비를 점령했다. 1642년 튀렌은 루시옹을 정복한 프랑스군의 부사령관을 맡았다.
2. 3. 네덜란드에서의 군사 경력 시작
개신교인 부용 공작 앙리(스당의 영주)와 그의 두 번째 아내 엘리자베트 프랑드리카 드랑쥬 나소 사이에서 차남으로 스당 성에서 태어난 튀렌은 위그노로 성장하여 귀족 자제들이 받는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허약한 체질과 특히 평생 고치지 못한 언어장애가 있었다. 튀렌은 역사와 지리에 특별한 재능을 보여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업적에 관심을 가졌으나, 언어장애가 걸림돌이 되었다.[1]1623년 아버지 앙리가 사망하자 튀렌은 신체 단련에 몰두하여 허약 체질을 극복하려 했다. 14세에 숙부인 네덜란드 총독 마우리츠의 야영지에서 군사학을 배우기 시작했고, 네덜란드 독립 전쟁에서 마우리츠의 경호를 맡는 사병으로 군 경력을 시작했다.[1]
1625년 마우리츠의 뒤를 이은 또 다른 숙부 프레데리크 헨드릭는 1626년 튀렌을 육군 대위로 승진시켰다. 젊은 하사관은 그 시기 포위전 임무를 수행하였다. 1629년 스헤르토헨보스 포위전에서 보인 튀렌의 수완과 용기는 프레데리크 헨드릭으로부터 극찬을 받았다.[1]
1630년 튀렌은 네덜란드를 떠나 프랑스군에 입대했다. 이는 군 내 승진뿐 아니라, 프랑스 왕가에 대한 부용 공작 가문의 충성을 보여주기 원했던 모친의 바람 때문이었다.[1]
3. 프랑스군 입대와 초기 활동
1623년 아버지 앙리가 사망하자, 튀렌은 신체 단련에 몰두하여 허약 체질을 극복하려 했다. 14세 때 숙부인 네덜란드 총독 마우리츠의 야영지에서 군사학을 배우기 시작했고, 네덜란드 독립 전쟁에 참전하여 군 경력을 쌓았다. 처음에는 숙부 마우리츠의 경호를 맡은 사병이었다.[9]
튀렌은 위그노로 성장하여 귀족 교육을 받았으나, 허약한 체질과 언어 장애로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역사와 지리에 특별한 재능을 보이며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업적에 관심을 가졌다.[9]
3. 1. 프랑스군 입대
1625년 숙부 마우리츠의 뒤를 이어 네덜란드 총독 및 오라녜 공이 된 또 다른 숙부 프레데리크 헨드리크는 1626년 조카인 튀렌을 육군 대위로 승진시켰다. 튀렌은 그 시기 포위전 임무를 수행하였다. 1629년 스헤르토헨보스 포위전에서 보인 튀렌의 수완과 용기는 당대 일류 사령관 중 한 명이었던 숙부 프레데리크 헨드리크로부터 극찬을 받았다. 1640년 튀렌은 네덜란드를 떠나 프랑스군에 입대했다. 군대 내에서의 승진 예상뿐 아니라, 프랑스 왕가에 대한 부용 공작 가문의 주권과 충성을 보여주기 원했던 모친의 바램이 동기가 되었다.[9]재상 리슐리외 추기경은 곧 튀렌을 보병 연대의 대령으로 임명했다. 튀렌은 오라녜 공과 단기간 거리를 좁혔다(당시 네덜란드와 프랑스는 동맹 관계였다). 튀렌이 프랑스군에 있으면서 벌인 최초의 실전은 1634년 포르스 공작이 지휘한 로렌의 라 몽드 앙 바시니 포위전이었다. 그는 이 돌격에서 보인 전공으로 육군 소장으로 단숨에 승진했다.[9]
1635년 튀렌은 라 발렌트 추기경의 휘하에 들어가 로렌과 라인강에서 전투를 벌였다. 1635년 8월 8일 프랑스군과 그 동맹군은 마인츠에서 신성 로마 제국군을 포위하기 위해 집결했으나, 프랑스군은 식량 부족으로 메스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9]
퇴각 때 튀렌은 유명한 신성 로마 제국군의 장군 마티아스 가라스와 결투를 벌였고, 그 용기와 수완으로 커다란 명성을 얻었다. 1636년 재편성된 군대는 다시 야전을 벌여 사베른을 공략했고, 이 공격에서 튀렌은 중상을 입었다. 1637년 튀렌은 랑드루시 점령(7월 26일)을 포함한 플랑드르 원정에 참가했다.[9]
1638년 후반 베른하르트 폰 작센-바이마르(1608년 - 1639년)의 곁에서 함께 싸웠고, 튀렌은 브라이자흐 급습을 지휘해 12월 17일 항복시켰다(브라이자흐는 라인강 상류의 강력한 요새였다). 튀렌은 어느덧 프랑스의 젊은 장교들 중에서 가장 장래가 촉망받는 인물이란 평판을 받게 되었다.[9]
3. 2. 30년 전쟁 초기 참전
개신교인 부용 공작 앙리의 차남으로 스당에서 태어난 튀렌은, 1625년 숙부 프레데리크 헨드리크가 네덜란드 총독에 오른 후 1626년 튀렌을 육군 대위로 승진시켰다.[9] 1629년 스헤르토헨보스 포위전에서 보인 튀렌의 수완과 용기는 당대 일류 사령관 중 한 명이었던 숙부 프레데리크 헨드리크로부터 극찬을 받았다. 1640년 튀렌은 네덜란드를 떠나 프랑스군에 입대했다. 1634년 포르스 공작이 지휘한 로렌의 라 몽드 앙 바시니 포위전에 참전하였고, 이때의 전공으로 육군 소장으로 단숨에 승진했다.[9]1635년 튀렌은 라 발렌트 추기경의 휘하에 들어가 로렌과 라인강에서 전투를 벌였다. 1635년 8월 8일 마인츠에서 신성 로마 제국군을 포위하기 위해 집결했으나 프랑스군은 식량 부족으로 메스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9] 퇴각 때 튀렌은 마티아스 가라스와 결투를 벌여 명성을 얻었다. 1636년 다시 야전을 벌여, 사베른을 공략했고, 이 공격에서 튀렌은 중상을 입었다. 1637년 튀렌은 랑드루시 점령(7월 26일)을 포함한 플랑드르 원정에 참가했다.[9]
1638년 후반 베른하르트 폰 작센-바이마르의 곁에서 함께 싸웠고, 튀렌은 브라이자흐 급습을 지휘해 12월 17일 항복시켰다.[9] 1639년 11월 19일 튀렌은 루트 드 키에르 전투라고 불리는 유명한 후위작전에서 승리했다. 1640년 아르크르 백작 앙리 드 로렌은 카자레 몬페라토를 구원하고, 성채 안에 프랑스군 별동대가 들어가는 동안에 토리노에 있던 카리냐노 공작 토마조의 군대를 포위했다. 육군 중장이 된 튀렌은 1641년 원정에서 직접 싸워 크네오, 체바, 몬드비를 점령했다.
1642년 튀렌은 루지용을 정복한 프랑스군의 부사령관을 맡았다. 1643년 카리냐노 공작 지휘하의 이탈리아 전투에 튀렌을 보냈고, 튀렌은 그해 연말 프랑스로 돌아오기 수 주일 전에 토리노를 함락시켰다. 튀렌은 1643년 12월 19일 프랑스 원수에 임명되어 곧 알자스에서 바이마르군 재편성을 위해 출발했다. 1643년 11월 24일부터 25일에 걸쳐 벌어진 튀트린겐 전투에서 패배를 겪은 뒤였다.
1644년 튀렌 원수는 브라이자흐에서 라인강을 횡단하여 작전을 개시했고, 앙기앵 공작(훗날 대 콩데)이 지휘하는 군대가 튀렌의 군대와 합류했다. 30년 전쟁을 종결시킨 4개의 유명한 전투가 있었는데, 1644년 8월의 격렬했던 프라이부르크 전투는 프랑스가 필리프스부르크 포위전에서 승리를 거둔 후 벌인 최초 원정에서 일어난 첫 번째 전투였다. 앙기앵 공작은 철수하고 지휘를 튀렌에게 맡겼다.
1645년 원정을 전개하자 프란츠 폰 메르시는 5월 2일 마리엔탈 전투에서 튀렌군을 물리쳤다. 앙기앵 공작이 다시 프랑스군을 이끌고 전방으로 돌아왔고, 스웨덴군과 헨센-카셀 측 백작군에서 파견된 분견대의 증원 부대를 얻게 되었다. 프랑스군은 1645년 8월 3일 뇌르틀링겐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둬 바이에른군을 물리쳤다. 앙기앵 공작은 병치레가 심하여 프랑스군 사령관에 튀렌을 임명하고 자신은 전선에서 물러났다. 1646년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1세는 화평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서명한 것은 1647년 3월 14일). 1647년 튀렌은 플랑드르 전선으로 파견되었다.
1648년 바이에른이 다시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고 연합군을 조직하자, 튀렌은 휘하의 스웨덴군과 연합하여 5월 17일 시스마르샤우젠 전투에서 결정적인 행동으로 최후를 장식했다. 휴전 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화전과 백병전으로 바이에른을 황폐화시켰다.
3. 3. 이탈리아 원정과 루시용 정복
1639년 11월 19일, 튀렌은 루트 드 키에르 전투라고 불리는 유명한 후위작전에서 승리했다. 이 전투는 겨울철 토리노 요새에 대한 식량 재보급 기간에 프랑스군과 카리냐노 공작 토마조 사이에서 벌어졌다.[9] 1640년 아르크르 백작은 카자레 몬페라토를 구원하고, 성채 안에 프랑스군 별동대가 들어가는 동안 토리노에 있던 카리냐노 공작군을 포위했다.육군 중장이 된 튀렌은 이러한 복잡한 작전을 좋아했고, 결과를 달성하기 위해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1641년 원정에서 튀렌은 직접 크네오, 체바, 몬도비를 점령했다.
1642년, 튀렌은 루시용을 정복한 프랑스군의 부사령관을 역임했다.
4. 프랑스 원수 임명과 30년 전쟁 후반기 활약
1643년 12월 19일 튀렌은 프랑스 원수로 임명되어 알자스에서 바이마르군을 재편성하는 임무를 맡았다. 바이마르군은 1643년 11월 24일부터 25일에 걸쳐 벌어진 튀트린겐 전투에서 큰 패배를 겪은 후였다. 재편성을 마친 튀렌은 1644년 브라이자흐에서 라인강을 건너 작전을 개시했다. 그러나 곧 앙기앵 공작(훗날 대 콩데)이 이끄는 군대가 합류했고, 왕족 출신인 앙기앵 공작이 프랑스-바이마르 연합군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30년 전쟁을 종결시킨 4개의 유명한 전투 중 1644년 8월의 프라이부르크 전투는 프란츠 폰 메르시가 지휘하는 바이에른군을 상대로 프랑스가 필리프스부르크 포위전에서 승리한 후 벌인 첫 원정이었다. 앙기앵 공작은 항복 전에 철수하여 튀렌에게 지휘를 맡겼다. 튀렌은 1645년 원정을 전개했고, 메르시는 5월 2일 마리엔탈 전투에서 튀렌군을 기습하여 물리쳤다.
앙기앵 공작이 다시 프랑스군을 이끌고 돌아왔고, 튀렌군은 스웨덴군과 헨센-카셀측 백작군 분견대의 지원을 받아 증원되었다. 스웨덴군은 곧 돌아갔지만, 앙기앵 공작은 2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바이에른군과 격돌했다. 1645년 8월 3일 뇌르틀링겐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메르시를 전사시키고 바이에른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했다. 병약한 앙기앵 공작은 곧 튀렌을 프랑스군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전선에서 물러났다. 튀렌은 트리어를 공략하여 빛나는 전공을 세웠다.
1646년 튀렌은 바이에른군에서 오스트리아군을 분리시키는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1세는 1647년 3월 14일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1647년 튀렌은 약화된 신성 로마 제국군을 공격하려 했으나, 플랑드르 전선으로 파견되었다.
프랑스가 신성 로마 제국군을 제압할 기회를 놓친 사이, 급료를 받지 못한 바이마르군 사이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튀렌은 이를 훌륭하게 처리하고 바이마르 군을 복구했다. 곧이어 룩센부르크로 진군했으나, 라인 전선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1648년 바이에른이 다시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자, 튀렌은 스웨덴군과 연합하여 5월 17일 추스마르스하우젠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휴전 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바이에른은 화전과 백병전으로 황폐화되었다. 이러한 파괴는 당시 전시 상황을 고려할 때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으나, 현대 작가들에게 비난받기도 한다.[10]
4. 1. 프랑스 원수 임명
프랑스 왕가와 스당 공작가의 관계는 튀렌의 초기 경력에 큰 영향을 미쳤다. 때로는 부용 공작가를 회유하기 위해 튀렌을 승진시켜야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리슐리외와 마자랭에 대항하는 공작가의 움직임 때문에 왕의 측근들은 전장에 보낸 장군을 완전히 신뢰할 수 없었다. 게다가 튀렌의 개신교 신앙에 대한 확고한 고집은 대신과 튀렌의 관계에 여러 가지 어려움을 야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슐리외는 1643년 카리냐노 공작(프랑스 측으로 돌아섰다.) 지휘하의 이탈리아 전투에 튀렌을 보냈고, 튀렌은 그해 연말 프랑스로 돌아오기 몇 주 전에 토리노를 함락시켰다.[2]1643년 12월 19일 튀렌은 프랑스 원수로 임명되었고, 곧 알자스에서 바이마르군(베른하르트 폰 작센-바이마르군의 연대) 재편성을 위해 출발했다. 바이마르군은 1643년 11월 24일부터 25일에 걸쳐 벌어진 튀트린겐 전투에서 큰 패배를 겪은 뒤였다. 그때 32살이었던 튀렌은 이때까지 4명의 저명한 지휘관 밑에서 전투를 경험했다. 조직적인 오라녜 공, 격렬한 성격의 베른하르트, 용감한 라 발렌트 추기경, 완고하지만 기민한 하르크르 백작 등 이들 모두 튀렌의 훈련 완성에 공헌했다. 튀렌은 1644년 천성과 고위 군인의 직책을 위해 교육을 받았고, 전투도 경험했다.[3]

재편성 임무를 마치고, 튀렌 원수는 브라이자흐에서 라인강을 건너 1644년 작전을 개시했다. 그러나 거의 동시에 앙기앵 공작(훗날 대 콩데, 콩데 공작 루이 2세 드 부르봉)이 지휘하는 군대가 튀렌의 군대와 합류했다. 왕가와 인연이 있는 앙기앵 공작은 프랑스-바이마르 연합군의 총사령관이 되었다.[2]
30년 전쟁을 종결시킨 4개의 유명한 전투가 있었다. 1644년 8월의 격렬했던 프라이부르크 전투(상대는 프란츠 폰 메르시가 지휘하는 바이에른군)는 프랑스가 필리프스부르크 포위전에서 승리를 거둔 후 벌인 최초 원정에서 일어난 첫 번째 전투였다. 항복시키기 전 앙기앵 공작은 철수하고 지휘를 튀렌에게 맡겼다. 튀렌 원수는 확고하게 전방으로 이동하여 1645년 원정을 전개하자 메르시는 이에 놀라 5월 2일 마리엔탈 전투에서 튀렌군을 물리쳤다.[2]
앙기앵 공작이 다시 프랑스군을 이끌고 전방으로 돌아왔다. 튀렌군은 스웨덴군과 헨센-카셀측 백작군에서 파견된 분견대의 도착에 힘입어 상당한 증원 부대를 얻게 되었다. 스웨덴군은 곧 돌아갔으나 프라이부르크보다 더 강력한 전투에서 바이에른군과 상대할 때 앙기앵 공작은 2만의 병사를 지휘했다.[2]
프랑스군은 메르시를 전사시키고, 1645년 8월 3일 뇌르틀링겐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둬 바이에른군을 물리쳤다.[2]

병치레가 심한 앙기앵 공작은 그 후 곧 프랑스군 사령관에 튀렌을 임명하고 자신은 전선에서 물러났다. 다시 대규모 군대를 모은 황제군에 대해 쐐기를 박지 않았다. 그러나 원정은 튀렌이 토리아 공략에 이르러 전승이란 빛나는 전공을 얻는 것으로 종결되었다.[2]
1646년 그는 결국 결정적인 전승을 얻었고, 이것으로 바이에른군에서 오스트리아군이 떨어져 나가는 것으로 인해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1세는 화평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서명한 것은 1647년 3월 14일). 1647년 튀렌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약체화된 군대를 공격하는 것에 대해 의견을 제시했으나, 튀렌은 플랑드르 전선으로 파견되었다.[2]
프랑스가 신성 로마 제국군을 굴복시킬 기회를 놓친 것뿐만 아니라 몇 개월 동안 급료를 받지 못한 바이마르군 사이에서 심각한 반항이 일어났다. 튀렌은 훌륭하게 일을 처리하여 불만을 품은 연대를 처리하고 약간의 유혈 사건이 있었지만, 바이마르 군을 복구하고 사건을 종결시켰다.[2]
튀렌은 곧이어 룩센부르크로 진군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라인 전선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1648년 바이에른이 다시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고 연합군을 조직한 것이었다. 튀렌은 휘하의 스웨덴군과 연합하여 눈부신 전적을 거두었고, 5월 17일 추스마르스하우젠 전투에서 결정적인 행동으로 최후를 장식했다. 군대는 그 결과로써 더 확고해졌다. 휴전 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화전과 백병전으로 바이에른을 황폐화시켰다. 이 파괴는 많은 현대 작가들이 비난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으나, 당시 전시의 정신과 전투 행위에서 허용한 상황보다 가혹한 방법이 채택된 것은 아니다.[2]
4. 2. 30년 전쟁 후반기 전투
1643년 12월 19일 프랑스 원수로 임명된 튀렌은 곧 알자스에서 바이마르군(베른하르트 폰 작센-바이마르군의 연대) 재편성을 위해 출발했다. 바이마르군은 1643년 11월 24일부터 25일에 걸쳐 벌어진 튀트린겐 전투에서 뼈아픈 패배를 겪은 뒤였다.[2] 재편성을 마친 튀렌 원수는 1644년 브라이자흐에서 라인강을 건너 작전을 개시했다. 그러나 곧 앙기앵 공작(훗날 대 콩데, 콩데 공작 루이 2세 드 부르봉)이 지휘하는 군대가 합류했고, 왕가와 인연이 있는 앙기앵 공작이 프랑스-바이마르 연합군의 총사령관이 되었다.30년 전쟁을 종결시킨 4개의 유명한 전투 중 1644년 8월의 격렬했던 프라이부르크 전투(상대는 프란츠 폰 메르시가 지휘하는 바이에른군)는 프랑스가 필리프스부르크 포위전에서 승리한 후 벌인 첫 원정에서 일어난 첫 번째 전투였다.[2] 항복 전 앙기앵 공작은 철수하고 지휘를 튀렌에게 맡겼다.[2] 튀렌은 1645년 원정을 전개했고, 메르시는 이에 놀라 5월 2일 마리엔탈 전투에서 튀렌군을 물리쳤다.
앙기앵 공작이 다시 프랑스군을 이끌고 전방으로 돌아왔고, 튀렌군은 스웨덴군과 헨센-카셀측 백작군에서 파견된 분견대의 도착에 힘입어 증원부대를 얻게 되었다. 스웨덴군은 곧 돌아갔으나, 앙기앵 공작은 2만의 병사를 지휘하여 프라이부르크보다 더 강력한 전투에서 바이에른군과 상대했다.
프랑스군은 1645년 8월 3일 뇌르틀링겐 전투에서 메르시를 전사시키고 바이에른군을 결정적으로 물리쳤다.[2] 병치레가 심한 앙기앵 공작은 곧 튀렌을 프랑스군 사령관에 임명하고 자신은 전선에서 물러났다. 다시 대규모 군대를 모은 황제군에 대해 쐐기를 박지 않았으나, 원정은 튀렌이 트리어 공략에 이르러 전승이란 빛나는 전공을 얻는 것으로 종결되었다.
1646년 튀렌은 결정적인 전승을 얻었고, 바이에른군에서 오스트리아군이 떨어져 나가는 것으로 인해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1세는 1647년 3월 14일 화평을 수용(서명)할 수밖에 없었다. 1647년 튀렌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약체화된 군대를 공격하는 것에 대해 의견을 제시했으나, 플랑드르 전선으로 파견되었다.
프랑스가 신성 로마 제국군을 굴복시킬 기회를 놓친 것뿐만 아니라, 몇 개월 동안 급료를 받지 못한 바이마르군 사이에서 심각한 반항이 일어났다. 튀렌은 훌륭하게 일을 처리하여 불만을 품은 연대를 처리하고 약간의 유혈 사건이 있었지만, 바이마르 군을 복구하고 사건을 종결시켰다.
튀렌은 곧이어 룩센부르크로 진군했다. 그러나 얼마안가 라인 전선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1648년 바이에른이 다시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고 연합군을 조직한 것이었다. 튀렌은 휘하의 스웨덴군과 연합하여 눈부신 전적을 거두었고, 5월 17일 추스마르스하우젠 전투에서 결정적인 행동으로 최후를 장식했다. 군대는 그 결과로써 더 확고해졌다. 휴전조약이 체결될때까지 화전과 백병전으로 바이에른을 황폐화 시켰다. 이 파괴는 많은 현대작가들이 비난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으나, 당시 전시의 정신과 전투행위에서 허용한 상황보다 가혹한 방법이 채택된 것은 아니다.[10]
5. 프롱드의 난과 스페인과의 전쟁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30년 전쟁은 종결되었으나, 프랑스 국내에서는 프롱드의 난(1648년~1653년)이 발발했다. 튀렌은 처음에는 반란 세력에 가담했으나, 곧 왕당파로 돌아섰다.
프롱드의 난이 진압된 후, 튀렌은 1635년부터 계속된 프랑스-스페인 전쟁에서 프랑스군을 지휘했다. 그는 1654년 아라스 전투에서 스페인군을 격파하고, 1658년 듄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 승리의 결과로 1659년 피레네 조약이 체결되어 프랑스는 스페인에 대해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11]
5. 1. 프롱드의 난 참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30년 전쟁은 끝났지만, 전쟁을 위한 과도한 세금과 루이 14세의 재상 쥘 마자랭에 대한 불만으로 프롱드의 난이 일어났다. 튀렌은 반란 세력에 가담했지만, 30년 전쟁 중 유혈 사건 때문에 바이마르 군의 복종을 받지 못하고 네덜란드로 피신했다. 그는 1649년 3월 루이유 화의가 체결될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으며, 이로써 프롱드의 난 제1기가 끝났다.[11]1650년 1월, 콩데 공 등이 체포되면서 제2기 전투가 시작되었다. 튀렌은 콩데 공과 함께 체포될 뻔했으나, 탈출하여 콩데 공의 누이이자 롱빌 공 앙리 2세의 부인인 앙느와 협력하여 콩데 공, 그의 동생 콩티 공 알망, 롱빌 공을 위해 스타네를 확보했다. 튀렌의 행동은 프롱드의 난 제1기와 제2기 모두 앙느에 대한 애정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며, 콩데 공 등을 위해 스페인의 지원을 얻으려 했고, 12월 15일 르텔에서 왕당파와 싸우다 패하여 외삼촌뻘 되는 필리프 폰 데어 프팔츠를 잃었다.[11]
1651년 2월, 마자랭의 망명과 콩데 공 등의 석방으로 프롱드의 난 제2기가 종결되자, 튀렌은 왕당파와 화해하고 5월 파리로 돌아왔다. 그의 형제 프레드릭도 제2기 반란에 참여하여 1651년 정부로부터 보상을 받고 화해했으며, 1652년 8월 9일 사망하자 조카 고드프루아 모리스가 부용 공국을 상속받았고, 후에 마자랭의 조카 마리아 안나와 결혼했다.[11]
그러나 석방된 콩데 공이 프랑스 남부에서 반란을 일으키면서 튀렌과 대립하게 되었다. 튀렌은 왕군을 지휘하고 콩데 공은 반란군과 스페인 연합군을 이끌었다. 1652년 3월 28일 자르조에서 반란군과 싸웠고, 4월 7일 브레뇌에서 콩데 공의 군대에 큰 타격을 입힌 후 북상하여 파리 남동쪽 센 강 북쪽 기슭의 무랭에 도착하여 파리를 위협했다. 이때 망명 중이던 잉글랜드 왕족 제임스(후의 제임스 2세)가 무랭 북쪽 샤토로 이동한 튀렌 군에 합류했다.[11]
반란군은 스페인군과 함께 무랭 서쪽 에탕프에 주둔했지만, 튀렌은 5월 3일 에탕프 교외에서 이들에게 큰 타격을 입히고 북상하여 반란군에 호응했던 로렌 공 샤를 4세도 제압하여 퇴각시켰다. 7월 2일 파리 교외에서 에탕프의 반란군과 합류한 콩데 공과 교전했으나, 파리에서 포격한 앙느 마리 루이즈 돌레앙 등이 콩데 공을 파리로 들여보냈기 때문에 무승부로 끝났다. 그러나 콩데 공은 내부 갈등을 수습하지 못하고 파리를 탈출했다. 튀렌은 이 전투에서 사실상 내전을 종식시키고, 10월 21일 루이 14세를 파리로 맞이했다. 11월, 튀렌은 앵 강에서 동계 주둔 중이던 콩데 공의 군대를 공격하여 콩데 공을 네덜란드로 망명하게 만들었고, 앵 강변을 평정한 후 1653년 망명지에서 귀국한 마자랭과 함께 파리로 돌아왔다. 프롱드의 난은 종결되었지만, 배후의 스페인을 치기 위해 1635년부터 계속된 프랑스-스페인 전쟁의 지휘를 맡게 되었다.[11]
파리 귀환 후, 튀렌은 네덜란드에서 스페인군에 가담한 콩데 공, 네덜란드 총독 후안 호세 데 아우스트리아와 교전하여, 콩데 공이 록루아를 탈취하는 동안 르텔, 생트므누, 무송을 공략했다. 1654년 원정에서는 8월 25일 아라스 포위 중인 콩데 공에게 승리했다. 1655년에도 네덜란드에서 영토를 빼앗았지만, 1656년 발랑시엔에서 패배했다. 1657년, 마자랭과 동맹을 맺은 잉글랜드 보호령 올리버 크롬웰이 보낸 부대와 함께 네덜란드 여러 도시를 제압했고, 1658년 덩케르크 포위 중이던 스페인군을 공격하여 6월 14일 덩케르크 근교 듄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이로 인해 1659년 피레네 조약이 체결되어 프랑스-스페인 전쟁은 프랑스의 승리로 끝났고, 튀렌이 점령한 대부분의 땅이 프랑스에 넘어갔으며, 스페인은 강대국 지위에서 추락하고 프랑스가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11]
5. 2. 스페인과의 전쟁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프랑스에 짧은 평화가 찾아왔으나, 과중한 세금과 국왕 루이 14세의 재상 마자랭에 대한 불만으로 곧 프롱드의 난(1648년 - 1653년)이 발발했다. 튀렌은 반란 세력에 동조했으나, 30년 전쟁 중의 유혈 사건이 문제가 되어 지휘하던 바이마르 군으로부터 복종을 거부당하고 네덜란드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곳에서 1649년 3월 루이유의 화의가 체결될 때까지 머물렀다. 이 화의로 프롱드의 난 제1기가 끝났다.[11]제2차 전투는 콩데 공 등이 1650년 1월에 체포되면서 시작되었다. 콩데 공과 함께 체포될 계획이었던 튀렌은 다시 도망쳐 콩데 공의 누이이자 롱빌 공 앙리 2세의 부인인 앙느와 손을 잡고, 콩데 공과 그의 동생인 콩티 공 알망, 롱빌 공을 위해 스타네를 획득했다. 프롱드의 난 제1기와 제2기 모두 앙느에 대한 애정이 튀렌의 행동을 지배했던 것으로 보이며, 콩데 공 등을 위해 스페인의 지원을 얻으려고 하기도 했고, 12월 15일 르텔에서 왕당파와 싸워 패배하여 외삼촌뻘 되는 필리프 폰 데어 프팔츠를 잃기도 했다.[11]
프롱드의 난 제2기는 이듬해 1651년 2월 마자랭의 망명과 콩데 공 등의 석방으로 종결되었고, 튀렌도 왕당파와 화해하여 5월 파리로 돌아왔다. 그의 형제 프레드릭도 제2기 반란에 참여하여 1651년 정부로부터 보상을 받고 화해했고, 1652년 8월 9일 사망하자 조카 고드프루아 모리스가 부용 공국을 상속받았으며, 후에 마자랭의 조카 마리아 안나와 결혼했다.[11]
그러나 석방된 콩데 공이 프랑스 남부에서 반란을 일으켜 튀렌과 대립하게 되었고, 튀렌은 왕군을 지휘하고 콩데 공은 반란군과 스페인 연합군을 이끌어 충돌했다. 튀렌은 1652년 3월 28일, 자르조에서 반란군과 싸웠고, 4월 7일 브레뇌에서 콩데 공의 군대에 큰 타격을 입히고 북상하여 파리 남동쪽에 위치한 센 강 북쪽 기슭의 무랭에 도착하여 파리를 위협했다. 이 무렵, 망명 중이던 잉글랜드 왕족 제임스(후의 제임스 2세)가 무랭에서 북쪽의 샤토로 이동한 튀렌 군에 합류했다.[11]
반란군은 스페인군과 함께 무랭에서 서쪽의 에탕프에 주둔하고 있었지만, 튀렌은 5월 3일 에탕프 교외에서 이 군세에 큰 타격을 입히고 북상하여 반란군에 호응했던 로렌 공 샤를 4세도 제압하여 물러나게 했다. 다음으로 7월 2일 파리 교외의 포브르 생토노레에서 에탕프의 반란군과 합류한 콩데 공과 교전했고, 파리에서 포격한 앙느 마리 루이즈 돌레앙 등이 콩데 공을 파리로 들여보냈기 때문에 무승부로 끝났지만, 콩데 공은 내부 갈등을 수습하지 못하고 파리를 탈출했다. 튀렌은 포브르 생토노레 전투에서 사실상 내전을 분쇄했고, 10월 21일 루이 14세를 파리로 맞이했다. 11월 앵 강에서 동계 주둔하고 있던 콩데 공의 군대를 공격하여 콩데 공을 네덜란드로 망명하게 했고, 앵 강변을 평정한 후 이듬해 1653년 망명지에서 귀국한 마자랭과 함께 파리로 돌아왔다. 프롱드의 난은 종결되었지만, 배후의 스페인을 치기 위해 1635년부터 계속된 프랑스-스페인 전쟁의 지휘를 맡게 되었다.[11]
파리 귀환 후에는 네덜란드에서 스페인군에 가담한 콩데 공과 네덜란드 총독 후안 호세 데 아우스트리아와 교전하여, 콩데 공이 록루아를 탈취하는 동안 르텔, 생트므누, 무송을 공략했고, 이듬해 1654년 원정에서 8월 25일, 아라스 포위 중인 콩데 공에게 승리했다. 1655년에도 네덜란드에서 영토를 빼앗았지만, 1656년 발랑시엔에서 패배를 당했다. 이듬해 1657년, 마자랭과 동맹을 맺은 잉글랜드 보호령 올리버 크롬웰이 보낸 부대와 함께 네덜란드 여러 도시를 제압했고, 1658년 덩케르크 포위 중으로 향하던 스페인군을 공격하여 6월 14일 덩케르크 근교의 듄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기에, 1659년의 피레네 조약으로 이어져 프랑스-스페인 전쟁은 프랑스의 승리로 끝났다. 이 조약으로 튀렌이 점령한 땅의 대부분이 프랑스에 넘어갔고, 강대국 자리에서 추락한 스페인에 대해 프랑스가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11]
6. 루이 14세 시대와 네덜란드 전쟁
1672년 루이 14세가 네덜란드 전쟁을 일으키자, 튀렌은 프랑스군을 이끌고 네덜란드의 여러 주를 황폐화시키며 암스테르담을 항복시키려 했다. 그러나 오라녜 공작 빌렘 3세는 제방을 무너뜨려 암스테르담 주변을 침수시키는 영웅적인 방법으로 튀렌을 저지했고, 루이 14세는 지휘를 포기하고 현장을 떠났다. 이 사건은 유럽 전역으로 퍼졌고, 전투는 독일까지 확대되었다. 튀렌은 콩데 공작이 알자스를 제압하는 동안 라인강 중류 지역에서 책략을 꾸며 승리를 거두었다.
1673년 1월, 튀렌은 공세에 나서 독일 영내 깊숙이 진입하여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과 화평을 맺었다. 그러나 그해 말, 신성 로마 제국의 장군 라이몬드 몬테쿠롤리가 튀렌을 속이고 네덜란드군과 연합하여 본을 전략 요충지로 만들었다. 1674년 6월, 튀렌은 자츠하임 전투에서 승리하고 라인 궁중백의 궁내관이 되었으나, 프랑스군의 약탈 행위는 튀렌의 명성에 오점을 남겼다.
가을쯤 대 프랑스 동맹이 다시 진격했고, 중립도시 스트라스부르가 적에게 라인강을 건널 수 있도록 허락하여 튀렌은 실패했다. 이어서 벌어진 엔츠하임 전투는 전술적 승리였으나 완전한 승리는 아니었다. 12월 초 연합군은 알자스에 도달했고, 튀렌은 겨울에 보슈를 지나가는 은밀한 행군으로 1675년 1월 5일 투르크하임 전투에서 적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그는 도시 주민의 저항에 대한 보복으로 도시를 약탈하고 2주간 주민들을 학살했다. 수 주일 만에 그는 알자스를 완전히 손에 넣었다.
여름 원정에서 튀렌은 다시 몬테쿠롤리와 대치했다. 1675년 7월 27일, 콘제르 부르케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손실을 입은 후 튀렌은 전사했다.
6. 1. 루이 14세의 친정과 가톨릭 개종
1661년 마자랭이 사망하고 루이 14세가 친정을 선언했다. 튀렌은 1660년 4월 4일 프랑스 왕군의 대원수가 되었는데, 이때 가톨릭으로 개종하면 1627년 폐지되었던 '프랑스 궁내장관'직을 부활시켜 주겠다는 제안을 받았으나 거절했다. 그는 부모 모두 칼뱅파 신자였고, 자신도 프로테스탄트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1639년 리슐리외 추기경의 조카와 결혼하라는 제안과 마자랭의 친척과 결혼하라는 제안도 같은 이유로 거절했었다. 프롱드의 난 중이던 1652년에는 과거 상관이자 존경하던 프로테스탄트 원수인 폴스 공의 딸 샤를롯 드 코몽과 결혼했다.하지만 튀렌은 기독교의 불화를 진심으로 슬퍼했다. 그는 청교도 혁명 이후 잉글랜드의 장로교회가 왕정복고로 돌아선 혼란을 보고 가톨릭으로 기울었다. 1666년 아내 샤를롯이 사망한 후, 자크 베니뉴 보슈에 주교와 조카 에마뉘엘 테오도르 드 라 투르 도베르뉴 추기경의 설득으로 1668년 10월 가톨릭으로 개종했다.[12]
1667년 튀렌은 네덜란드 계승 전쟁에서 프랑스군을 지휘하여 샤를루아, 튀르네, 두에 등 네덜란드 여러 도시를 단기간에 함락시켰다. 1668년에는 삼국 동맹의 간섭으로 전쟁이 종결되었다.[12]
6. 2. 네덜란드 전쟁 참전
1672년 루이 14세가 일으킨 네덜란드 전쟁에서 튀렌은 프랑스군을 이끌고 네덜란드의 여러 주를 황폐화시키며 암스테르담을 함락시키려 했다. 그러나 빌렘 3세는 제방을 무너뜨려 암스테르담 주변을 침수시키는 방법으로 튀렌을 저지했고, 루이 14세는 지휘를 포기하고 현장을 떠났다. 이 사건은 유럽 전역으로 퍼져 전투는 독일까지 확대되었다. 튀렌은 콩데 공작이 알자스를 제압하는 동안 라인강 중류 지역에서 승리를 거두었다.1673년 1월, 튀렌은 독일 영내 깊숙이 진입하여 프리드리히 빌헬름과 화평을 맺었다. 그러나 그해 말, 라이몬드 몬테쿠롤리가 튀렌을 속이고 네덜란드군과 연합하여 본을 점령했다. 1674년 6월, 튀렌은 자츠하임 전투에서 승리하고 라인 궁중백의 궁내관이 되었으나, 프랑스군의 약탈 행위는 튀렌의 명성에 오점을 남겼다.
가을에 대 프랑스 동맹이 다시 진격했고, 중립도시 스트라스부르가 적에게 라인강을 건널 수 있도록 허락하여 튀렌은 실패했다. 엔츠하임 전투는 전술적 승리였으나 완전한 승리는 아니었다. 12월 초, 연합군은 알자스에 도달했고, 튀렌은 겨울에 보슈를 지나가는 은밀한 행군으로 투르크하임 전투에서 적을 쫓아내고 1675년 1월 5일 큰 피해를 입혔다. 그는 도시 주민의 저항에 대한 보복으로 도시를 약탈하고 2주간 주민들을 학살했다. 수 주일 만에 그는 알자스를 완전히 손에 넣었다.
여름 원정에서 튀렌은 다시 몬테쿠롤리와 대치했다. 콘제르 부르케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손실을 입은 후, 1675년 7월 27일 튀렌은 전사했다.
7. 튀렌의 죽음
1672년 루이 14세가 일으킨 네덜란드 전쟁에서 튀렌은 네덜란드 여러 주를 황폐화시키고 암스테르담을 항복시키려 했다. 그러나 오라녜 공작 빌렘 3세가 제방을 무너뜨려 암스테르담 주위 국토를 침수시키는 저항을 하자, 튀렌은 견제를 당했고, 루이 14세는 지휘를 포기하고 현장을 떠났다.[13]
1673년 튀렌은 독일 영내 깊숙이 들어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과 화평을 맺었다. 그러나 신성 로마 제국의 장군 라이몬드 몬테쿠롤리에게 속아 네덜란드군과 연합한 몬테쿠롤리가 본을 전략 요충지로 만드는 것을 막지 못했다. 1674년 6월 튀렌은 자츠하임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파리에서 내려온 명령으로 프랑스군이 저지른 약탈 행위는 튀렌의 명성에 오점을 남겼다.[13]
1675년 여름, 튀렌은 다시 몬테쿠롤리와 대치했다. 양측의 치열한 전략 싸움 끝에 튀렌은 콘제르 부르케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손실을 입은 후, 7월 27일 사스바흐 전투에서 적군의 군세를 시찰하던 중 포격을 받고 전사했다. 튀렌의 전사 소식은 프랑스 전역을 슬픔에 잠기게 했다.[13] 튀렌의 죽음은 프랑스군에게 큰 손실이었고, 프랑스군이 철수하는 동안 제국군이 알자스에 재진출할 위기가 발생했다. 이에 네덜란드에 있던 콩데 공이 알자스로 파견되어 몬테쿠롤리를 저지했고, 양자 모두 1675년을 끝으로 군무에서 은퇴했다.[13]
8. 유산
II est mort aujourd'hui un homme qui faisait honneur à l'homme !프랑스어
튀렌의 전사 소식을 들은 라이몬도 몬테쿠콜리는 "존경했던 한 남자가 오늘 죽었다!"라고 절규했다.
튀렌의 시신은 생드니 대성당으로 옮겨져 역대 프랑스 왕과 더불어 매장되었다. 1793년 과격한 혁명 지지자들조차 그의 시신에 경의를 표했고, 1800년 9월 22일까지 튀렌의 시신은 파리 식물원에 보관되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이 대원수의 시신을 파리 시내의 앵발리드로 옮겼고, 현재도 이곳에 안장되어 있다.
나폴레옹은 전군의 병사들에게 위대한 사령관 중 한 명인 튀렌의 원정을 들려주며 공부할 것을 권했다. 장군으로서 그의 명예는 당시 유럽의 다른 장군들에게 뒤지지 않았고, 그 군사적 특징이 당시 전술의 예술을 집약했기 때문에 "전례없는 수준으로 대중은 전쟁을 정밀하게 배웠다"(리뉴 공의 담화에서). 전략상의 신중함과 병참술의 정확도가 작은 전투에서 빛나는 돌격과 함께 결합되었고, 모든 조건에서 성공하더라도 실패할지라도 불변이었다.
튀렌은 전쟁에 대한 천재만의 두드러진 특징을 보였다. 그는 대규모 전투를 피했다. '2, 3개의 포위전과 많은 전투'는 튀렌 자신의 격언이었다. 그의 위대한 라이벌 대 콩데가 첫 전투에서도, 마지막 전투에서도 찬란한 광채를 가지고 등장했던 것과는 달리 튀렌은 나날이 발전했다. 나폴레옹은 "튀렌의 천재의 모습은 연도를 거듭될 때마다 대담해져 갔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후세 작가 오마르 공은 저작 콩데공가의 공작사에서 같은 견해를 썼다.
튀렌은 화려함이 느껴지지 않는 성격을 보일 정도로 고결한 군인이었고, 여러 가지에 밝았다. 그러나 정치와 지식의 세계에서는 교묘한 음모가 및 궤변가의 수중에 빠져 거의 무력했다. 만일 그의 도덕관이 비난에서 이기려면 그가 살아있을 시기는 도덕이 우세하다기보다는, 적어도 더 금욕적이어야 했다. 그는 상비군의 사령관으로써 본질적으로 행동했고, 평생 군대와 더불어 보냈다.
그는 병사들의 신뢰를 받을 줄 알았다. 그는 희한하게 볼 정도로 관대하면서 엄격한 훈련을 적당히 유화시켜, 그의 부하들은 사령관으로서 튀렌을 숭배할 뿐만 아니라 동료로서 그를 사랑했다. 대 콩데의 천성이 다방면에 다재다능하였다면, 튀렌의 천성은 17세기 전술의 예술을 최고 걸작에 올려 놓았다.
작은 희생이 많고, 매우 많은 훈련을 쌓은 상비군과 루이 14세 시대의 왕조 전쟁을 위해 튀렌은 이상적인 군사 지도자로서 임무를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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