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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스페인 전쟁 (1635년~165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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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스페인 전쟁 (1635년~1659년)은 프랑스 왕국과 스페인 제국 간의 갈등으로, 1635년에 시작되어 1659년 피레네 조약으로 종결되었다. 이 전쟁은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가 합스부르크 가문과의 오랜 경쟁 관계 속에서 벌어졌으며, 30년 전쟁과 겹쳐 진행되었다. 프랑스는 스페인령 네덜란드, 프랑슈콩테, 스페인 등 세 곳의 국경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을 견제하며, 네덜란드 공화국, 스웨덴 등 개신교 세력을 지원했다. 전쟁은 프랑스의 승리로 마무리되었으며, 루시용과 스페인령 네덜란드 일부 영토를 확보하고, 프랑스의 절대 왕정을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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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스페인 전쟁 (1635년~1659년) - [전쟁]에 관한 문서
전쟁 개요
분쟁 명칭프랑스-스페인 전쟁
다른 명칭스페인어: Guerra franco-española
프랑스어: Guerre franco-espagnole
일부30년 전쟁의 일부
기간1635년 5월 19일 – 1659년 11월 7일
장소프랑스, 북부 스페인, 스페인령 네덜란드, 이탈리아, 대서양, 지중해
결과피레네 조약 체결, 프랑스 우세
영토 변경아르투아, 루시용, 페르피냥프랑스 왕국에 합병됨
교전 세력 (1635년~1648년)
교전국 1프랑스 왕국
네덜란드 공화국
파르마 공국 (1635년~1637년)
포르투갈 왕국 (1640년 이후)
카탈루냐 공국 (1640년~1641년)
모데나 공국 (1647년~1649년)
스위스 서약맹방
교전국 2스페인 제국
신성 로마 제국
포르투갈 왕국 (1640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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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 세력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교전국 1프랑스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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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프랑스 왕국 및 동맹국 지휘관루이 1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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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발루아, 부르봉 왕조가 통치하던 프랑스 왕국에게 있어서 합스부르크 가문은 수 세기 동안 경쟁 상대였다. 16세기와 17세기에는 특히, 프랑스는 북쪽으로는 스페인령 네덜란드, 동쪽으로는 프랑슈콩테, 남쪽으로는 스페인등 모두 세 곳의 국경에서 합스부르크를 맞이 했다. 합스부르크는 프랑스의 영토 확장의 길에 서 있었고, 전쟁이 발발할 경우엔, 프랑스는 여러 곳으로부터 침입을 당할 수가 있었다. 그리하여 프랑스는 국경 지역들에 합스부르크의 통치력이 약해지기를 시도하였다.

30년 전쟁 기간, 프랑스는 신성 로마 제국의 적들에게 보조금을 제공했다. 프랑스는 1630년 이후로부터 아낌없이 제국군에게 침공당한 스웨덴을 지원하였다. 하지만 1634년에 뇌르틀링겐 전투에서 스웨덴 주도하의 군대는 스페인-신성 로마 제국 연합군에게 결정적 패배를 당하였고, 스웨덴의 동맹들은 스웨덴을 배반하고 제국편에 붙었다. 그럼에도 스웨덴은 계속해서 전쟁을 수행하였지만, 너무나도 쇠약해지고 말았다. 스웨덴은 전쟁에서 같이 참여할 주요 동맹을 찾았고, 그 결과는 사이가 좋았던 프랑스였다. 제1대 프랑스 재상 리슐리외 추기경은 1635년에 전쟁에 참여하기로 결정하였고 스페인에게 전쟁을 선포하였다.

루이 13세


30년 전쟁은 1618년, 보헤미아 봉기로 시작되었는데, 이는 개신교가 지배하는 보헤미아 신분 의회가 가톨릭 황제 페르디난트 2세 대신에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에게 보헤미아 왕국의 왕관을 제안하면서 비롯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의 대부분은 중립을 유지했고 이를 상속 분쟁으로 간주했으며, 봉기는 빠르게 진압되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가 패배를 인정하기를 거부하자, 제국군은 팔츠 원정을 감행하여 그를 망명으로 몰아냈다. 세습 군주의 제거는 전쟁의 성격과 범위를 변화시켰다. 이는 갱신된 반종교개혁과 함께 제국 개신교 국가와 제국 영토를 소유한 외부 세력 모두에게 직접적인 위협이 되었다. 여기에는 네덜란드의 오렌지 공이자 나사우-딜렌부르크의 세습 군주인 오라녜 공과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이기도 한 덴마크-노르웨이의 크리스티안 4세가 포함되었다. 이는 리슐리외에게 스페인과 제국에서 그의 합스부르크 가문의 반대자들을 약화시키면서도 직접적인 충돌을 피할 수 있는 추가적인 기회를 제공했다.

그 결과, 가톨릭 프랑스는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개신교 네덜란드 공화국을 지원했고, 먼저 덴마크-노르웨이에게, 그리고 스웨덴에게 제국 개입 자금을 지원했다. 1630년, 스웨덴의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자신의 개신교 신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포메라니아를 침공했지만, 스웨덴 수입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발트해 해상 무역에 대한 통제권을 얻으려고도 했다. 스웨덴의 개입은 1632년 뤼첸 전투에서 그의 죽음 이후에도 계속되었지만, 전쟁과 함께 발생한 역병과 기근으로 인해 자국 영토가 황폐화된 작센 선제후국과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과의 긴장을 야기했다. 1634년 9월 뇌르틀링겐 전투에서 제국-스페인 연합군의 결정적인 승리로 인해 스웨덴은 남부 독일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대부분의 독일 동맹국들은 1635년 4월 프라하 조약을 통해 페르디난트 2세와 평화 조약을 맺을 기회를 활용했다.

이 시대의 또 다른 주요 유럽 분쟁은 1609년 12년 휴전으로 중단된 스페인과 네덜란드 공화국 간의 80년 전쟁 (1568-1648)이었다. 스페인은 이 조약의 상업적 조항에 강력히 반대했고, 펠리페 4세가 1621년에 왕이 되자 전쟁을 재개했다. 그 비용은 매우 높았고, 1628년 이후 만토바 계승을 놓고 프랑스와의 대리 전쟁으로 인해 더욱 증가했다. 스페인 제국은 펠리페 통치 하에 명목상 최대 규모에 도달했지만, 그 규모와 복잡성으로 인해 통치하거나 필수적인 개혁을 시행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졌다. 그러나 그 자원의 깊이는 일관되게 다른 강국을 붕괴시켰을 패배로부터 회복할 수 있게 해주었고, 1631년과 1632년에 통과된 새로운 규정은 전쟁 초반에 스페인 군의 역량을 향상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1628년, 네덜란드는 스페인 보물 함대를 나포했고, 이를 다음 해에 헤르토헨보스 포위전을 지원하는 데 사용했다. 강력한 암스테르담 상인 로비는 이를 전쟁을 끝낼 기회로 보았다. 1633년 협상은 아무런 결과 없이 끝났지만 평화 당을 강화했다. 프라하 조약은 네덜란드에서 오스트리아-스페인 연합군의 공세가 있을 것이라는 소문을 낳았고, 프랑스의 루이 13세와 리슐리외가 직접 개입하기로 결정하게 했다. 1635년 초, 그들은 작센-바이마르의 베르나르와 알자스와 라인란트에서 16,000명의 병력을 제공하는 계약을 체결하고, 네덜란드와 스페인 반대 동맹을 형성했으며, 스웨덴과 콩피에뉴 조약을 체결했다.

2. 1. 유럽 정세

발루아, 부르봉 왕조가 통치하던 프랑스 왕국에게 합스부르크 가문은 수 세기 동안 경쟁 상대였다. 16세기와 17세기에는 특히, 프랑스는 북쪽으로는 스페인령 네덜란드, 동쪽으로는 프랑슈콩테, 남쪽으로는 스페인등 모두 세 곳의 국경에서 합스부르크를 맞이 했다. 합스부르크는 프랑스의 영토 확장의 길에 서 있었고, 전쟁이 발발할 경우엔, 프랑스는 여러 곳으로부터 침입을 당할 수가 있었다. 그리하여 프랑스는 국경 지역들에 합스부르크의 통치력이 약해지기를 시도하였다.

30년 전쟁 기간, 프랑스는 신성 로마 제국의 적들에게 보조금을 제공했다. 프랑스는 1630년 이후로부터 아낌없이 제국군에게 침공당한 스웨덴을 지원하였다. 하지만 1634년에 뇌르틀링겐 전투에서 스웨덴 주도하의 군대는 스페인-신성 로마 제국 연합군에게 결정적 패배를 당하였고, 스웨덴의 동맹들은 스웨덴을 배반하고 제국편에 붙었다. 그럼에도 스웨덴은 계속해서 전쟁을 수행하였지만, 너무나도 쇠약해지고 말았다. 스웨덴은 전쟁에서 같이 참여할 주요 동맹을 찾았고, 그 결과는 사이가 좋았던 프랑스였다. 제1대 프랑스 재상 리슐리외 추기경은 1635년에 전쟁에 참여하기로 결정하였고 스페인에게 전쟁을 선포하였다.

30년 전쟁은 1618년, 보헤미아 봉기로 시작되었는데, 이는 개신교가 지배하는 보헤미아 신분 의회가 가톨릭 황제 페르디난트 2세 대신에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에게 보헤미아 왕국의 왕관을 제안하면서 비롯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의 대부분은 중립을 유지했고 이를 상속 분쟁으로 간주했으며, 봉기는 빠르게 진압되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가 패배를 인정하기를 거부하자, 제국군은 팔츠 원정을 감행하여 그를 망명으로 몰아냈다. 세습 군주의 제거는 전쟁의 성격과 범위를 변화시켰다. 이는 갱신된 반종교개혁과 함께 제국 개신교 국가와 제국 영토를 소유한 외부 세력 모두에게 직접적인 위협이 되었다. 여기에는 네덜란드의 오렌지 공이자 나사우-딜렌부르크의 세습 군주인 오라녜 공과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이기도 한 덴마크-노르웨이의 크리스티안 4세가 포함되었다. 이는 리슐리외에게 스페인과 제국에서 그의 합스부르크 가문의 반대자들을 약화시키면서도 직접적인 충돌을 피할 수 있는 추가적인 기회를 제공했다.

그 결과, 가톨릭 프랑스는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개신교 네덜란드 공화국을 지원했고, 먼저 덴마크-노르웨이에게, 그리고 스웨덴에게 제국 개입 자금을 지원했다. 1630년, 스웨덴의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자신의 개신교 신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포메라니아를 침공했지만, 스웨덴 수입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발트해 해상 무역에 대한 통제권을 얻으려고도 했다. 스웨덴의 개입은 1632년 뤼첸 전투에서 그의 죽음 이후에도 계속되었지만, 전쟁과 함께 발생한 역병과 기근으로 인해 자국 영토가 황폐화된 작센 선제후국과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과의 긴장을 야기했다. 1634년 9월 뇌르틀링겐 전투에서 제국-스페인 연합군의 결정적인 승리로 인해 스웨덴은 남부 독일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대부분의 독일 동맹국들은 1635년 4월 프라하 조약을 통해 페르디난트 2세와 평화 조약을 맺을 기회를 활용했다.

이 시대의 또 다른 주요 유럽 분쟁은 1609년 12년 휴전으로 중단된 스페인과 네덜란드 공화국 간의 80년 전쟁 (1568-1648)이었다. 스페인은 이 조약의 상업적 조항에 강력히 반대했고, 펠리페 4세가 1621년에 왕이 되자 전쟁을 재개했다. 그 비용은 매우 높았고, 1628년 이후 만토바 계승을 놓고 프랑스와의 대리 전쟁으로 인해 더욱 증가했다. 스페인 제국은 펠리페 통치 하에 명목상 최대 규모에 도달했지만, 그 규모와 복잡성으로 인해 통치하거나 필수적인 개혁을 시행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졌다. 그러나 그 자원의 깊이는 일관되게 다른 강국을 붕괴시켰을 패배로부터 회복할 수 있게 해주었고, 1631년과 1632년에 통과된 새로운 규정은 전쟁 초반에 스페인 군의 역량을 향상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1628년, 네덜란드는 스페인 보물 함대를 나포했고, 이를 다음 해에 헤르토헨보스 포위전을 지원하는 데 사용했다. 강력한 암스테르담 상인 로비는 이를 전쟁을 끝낼 기회로 보았다. 1633년 협상은 아무런 결과 없이 끝났지만 평화 당을 강화했다. 프라하 조약은 네덜란드에서 오스트리아-스페인 연합군의 공세가 있을 것이라는 소문을 낳았고, 프랑스의 루이 13세와 리슐리외가 직접 개입하기로 결정하게 했다. 1635년 초, 그들은 작센-바이마르의 베르나르와 알자스와 라인란트에서 16,000명의 병력을 제공하는 계약을 체결하고, 네덜란드와 스페인 반대 동맹을 형성했으며, 스웨덴과 콩피에뉴 조약을 체결했다.

2. 2. 30년 전쟁 (1618~1648)

발루아, 부르봉 왕조가 통치하던 프랑스 왕국에게 합스부르크 가문은 수 세기 동안 경쟁 상대였다. 16세기와 17세기에 프랑스는 북쪽의 스페인령 네덜란드, 동쪽의 프랑슈콩테, 남쪽의 스페인 등 세 곳의 국경에서 합스부르크 가문과 마주했다. 합스부르크는 프랑스의 영토 확장을 막았고, 전쟁 발발 시 프랑스는 여러 곳으로부터 침입당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프랑스는 국경 지역에서 합스부르크의 통치력이 약해지기를 시도하였다.

30년 전쟁은 1618년 보헤미아 봉기로 시작되었는데, 개신교가 지배하는 보헤미아 신분 의회가 가톨릭 황제 페르디난트 2세 대신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에게 보헤미아 왕국의 왕관을 제안하면서 비롯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의 대부분은 중립을 유지했고, 봉기는 빠르게 진압되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가 패배를 인정하지 않자, 제국군은 팔츠 원정을 감행하여 그를 망명으로 몰아냈다. 세습 군주의 제거는 전쟁의 성격과 범위를 변화시켰다. 이는 반종교개혁과 함께 제국 개신교 국가와 제국 영토를 소유한 외부 세력 모두에게 직접적인 위협이 되었다. 여기에는 네덜란드의 오라녜 공과 덴마크-노르웨이의 크리스티안 4세가 포함되었다. 이는 리슐리외에게 스페인과 제국에서 그의 합스부르크 가문의 반대자들을 약화시키면서도 직접적인 충돌을 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가톨릭 프랑스는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개신교 네덜란드 공화국을 지원했고, 스웨덴에게 제국 개입 자금을 지원했다. 1630년, 스웨덴의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포메라니아를 침공했지만, 발트해 해상 무역에 대한 통제권을 얻으려고도 했다. 스웨덴의 개입은 1632년 뤼첸 전투에서 그의 죽음 이후에도 계속되었지만, 작센 선제후국과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과의 긴장을 야기했다. 1634년 9월 뇌르틀링겐 전투에서 제국-스페인 연합군의 결정적인 승리로 인해 스웨덴은 남부 독일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대부분의 독일 동맹국들은 1635년 4월 프라하 조약을 통해 페르디난트 2세와 평화 조약을 맺었다.

1628년, 네덜란드는 스페인 보물 함대를 나포했고, 이를 다음 해에 헤르토헨보스 포위전을 지원하는 데 사용했다. 1633년 협상은 아무런 결과 없이 끝났지만 평화 당을 강화했다. 프라하 조약은 네덜란드에서 오스트리아-스페인 연합군의 공세가 있을 것이라는 소문을 낳았고, 프랑스의 루이 13세와 리슐리외가 직접 개입하기로 결정하게 했다. 1635년 초, 그들은 작센-바이마르의 베르나르와 알자스와 라인란트에서 16,000명의 병력을 제공하는 계약을 체결하고, 네덜란드와 스페인 반대 동맹을 형성했으며, 스웨덴과 콩피에뉴 조약을 체결했다. 프랑스는 신성 로마 제국의 적들에게 보조금을 제공했고, 1630년부터 스웨덴을 지원하였다. 하지만 스웨덴 주도하의 군대는 1634년에 뇌르틀링겐 전투에서 스페인-신성 로마 제국 연합군에게 결정적 패배를 당하였고, 스웨덴의 동맹들은 스웨덴을 배반하고 제국편에 붙었다. 스웨덴은 전쟁에서 같이 참여할 주요 동맹을 찾았고, 그 결과는 사이가 좋았던 프랑스였다. 제1대 프랑스 재상 리슐리외 추기경은 1635년에 전쟁에 참여하기로 결정하였고 스페인에게 전쟁을 선포하였다.

3. 전개 과정

1635년 프랑스군은 레자방에서 승리했지만, 이듬해 남네덜란드의 스페인 군대는 프랑스 북부를 공격하여 프랑스군을 크게 동요시키고 경제를 파괴했다. 스페인군은 파리로 진격할 수도 있었지만, 자금 문제로 진군을 멈춰야 했다. 프랑스군은 재집결하여 스페인군을 남네덜란드로 밀어냈고, 알자스에도 군대를 파견하여 지중해 연안의 제노바를 경유, 스페인 본토와 스페인령 네덜란드를 잇는 보급로인 스페인 길/스페인 가도es를 차단하려 했다.

1640년, 스페인 내부의 정치적 긴장으로 카탈루냐와 포르투갈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1641년, 카탈루냐 의회는 프랑스의 루이 13세를 바르셀로나 백작이자 카탈루냐 공국의 통치자로 인정했다. 그러나 카탈루냐인들은 곧 새로운 프랑스 행정이 이전 스페인 행정과 거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는 전쟁을 프랑코-카탈루냐 엘리트, 농촌 농민, 스페인 간의 복잡한 양상으로 만들었다. 1643년, 프랑스군은 로크루아 전투에서 스페인군에 승리하여 스페인군의 명성에 큰 타격을 주었다.

30년 전쟁의 마지막 10년 동안, 스페인령 네덜란드에 주둔한 스페인군은 프랑스와 네덜란드군에게 포위되어 랑스 전투에서 프랑스군에게 크게 패했다. 그러나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연합군은 여전히 플랑드르군을 완전히 격파하지는 못했다.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프랑스는 알자스 지방에서 영토를 획득하여 스페인 길을 막는 데 성공했다. 스페인은 네덜란드 연방 공화국의 독립을 인정했다.

이탈리아에서 프랑스는 사보이 공국과 함께 밀라노 공국을 공격했지만, 1639년부터 1642년까지의 피에몬테 내전/피에몬테 내전영어이 더해져 상황이 매우 복잡해졌다. 1646년, 프랑스 함대는 오르베텔로 해전/오르베텔로 해전영어에서 패배했고, 육군도 이탈리아에서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밀라노는 스페인의 지배하에 남게 되었다.

3. 1. 30년 전쟁 시기 (1635년 ~ 1648년)

1635년 프랑스군은 레아뱅에서 좋은 결과를 얻었지만, 이듬해 남네덜란드의 스페인 군대는 프랑스 북부를 공격하여 프랑스군을 크게 동요시키고 경제를 파괴했다. 스페인군은 파리로 진격할 수도 있었지만, 자금 문제로 진군을 멈춰야 했다. 프랑스군은 재집결하여 스페인군을 남네덜란드로 밀어냈고, 알자스에도 군대를 파견하여 지중해 연안의 제노바를 경유, 스페인 본토와 스페인령 네덜란드를 잇는 보급로인 스페인 길/스페인 가도es를 차단하려 했다.

1640년, 스페인 내부의 정치적 긴장으로 카탈루냐와 포르투갈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1641년, 카탈루냐 의회는 프랑스의 루이 13세를 바르셀로나 백작이자 카탈루냐 공국의 통치자로 인정했다. 그러나 카탈루냐인들은 곧 새로운 프랑스 행정이 이전 스페인 행정과 거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는 전쟁을 프랑코-카탈루냐 엘리트, 농촌 농민, 스페인 간의 복잡한 양상으로 만들었다. 1643년, 프랑스군은 로크루아 전투에서 스페인군에 승리하여 스페인군의 명성에 큰 타격을 주었다.

30년 전쟁의 마지막 10년 동안, 스페인령 네덜란드에 주둔한 스페인군은 프랑스와 네덜란드군에게 포위되어 랑스 전투에서 프랑스군에게 크게 패했다. 그러나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연합군은 여전히 플랑드르군을 완전히 격파하지는 못했다.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프랑스는 알자스 지방에서 영토를 획득하여 스페인 길을 막는 데 성공했다. 스페인은 네덜란드 연방 공화국의 독립을 인정했지만, 라인강 유역에서 점령한 땅을 포기하는 대신 배상금을 받았다.

이탈리아에서 프랑스는 사보이 공국과 함께 밀라노 공국을 공격했지만, 1639년부터 1642년까지의 피에몬테 내전/피에몬테 내전영어이 더해져 상황이 매우 복잡해졌다. 1640년의 토리노 포위전/토리노 포위전 (1640년)영어은 이 분쟁에서 가장 유명한 전투 중 하나였다.[6] 1646년, 프랑스 함대는 오르베텔로 해전/오르베텔로 해전영어에서 패배했고, 육군도 이탈리아에서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밀라노는 스페인의 지배하에 남게 되었다.

3. 2.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1648년 ~ 1659년)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30년 전쟁이 종결되었지만, 프랑스와 스페인의 전쟁은 계속되었다. 프랑스에서는 프롱드의 난이 발발하여 1653년 국왕군이 승리할 때까지 이어졌다. 이 반란으로 프랑스 귀족 세력이 약화되었고, 이후 루이 14세의 절대 왕정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프랑스 귀족들이 시작한 프랑스-스페인 전쟁은 플랑드르, 카탈루냐, 이탈리아 등 각지에서 계속되었다. 1652년에 콩데 공의 반란군이 스페인과 합류했지만, 스페인 또한 포르투갈 왕정복고 전쟁과 카탈루냐에서의 수확자 전쟁에 몰두하고 있었다. 전략적인 이유로 스페인은 플랑드르와 카탈루냐에서의 전투에 집중하여 포르투갈에게 발판을 마련할 기회를 주었다.

펠리페 4세는 1647년에 파산을 선언한 후, 카탈루냐 재탈환을 우선시하고 다른 지역에서는 방어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의 최정예 부대 중 다수가 로크루아 전투에서 손실되었고, 덩케르크를 포함하여 플랑드르 지역 일부가 점령당했는데, 덩케르크는 네덜란드와 프랑스 선박에 대한 스페인 사략선의 공격 중심지였다. 그러나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네덜란드와의 전쟁이 종식되고, 프랑스의 정치적, 경제적 혼란이 프롱드 내전으로 이어지면서 스페인의 입장은 개선되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사보이아 공국과 스페인령 밀라노 공국의 경계에서 전투가 이어졌다. 프랑스는 모데나 공작프란체스코 1세의 도움을 받아 두 차례에 걸쳐 제2의 전선을 열었지만, 두 번 모두 스페인군을 격파하는 데 실패했다. 남부 이탈리아에서도 1647년의 나폴리 반란이 실패하고, 프랑스군은 이듬해 스페인 육군과 해군에 의해 나폴리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프랑스-포르투갈 연합 함대가 피옴비노와 포르토 롱고네를 점령하여 모데나 공국을 아군으로 끌어들여 이탈리아에서의 보급 기지로 삼는 데 성공했다.

스페인에서는 포르투갈 왕정복고 전쟁과 수확자 전쟁 모두 프랑스의 지원을 받았지만, 프랑스가 프롱드의 난으로 일시적으로 약화되어 카탈루냐에서 패배를 거듭했다. 게다가 프랑스인이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보다 더욱 압제적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스페인 지지로 돌아선 카탈루냐인이 속출했다. 프랑스의 내부 분열을 호기로 여긴 레오폴트 빌헬름 대공은 1652년 스페인군을 이끌고 네덜란드에서 프랑스로 침공하여 북부 프랑스의 요새 몇 곳을 함락시켰다. 카탈루냐의 반란군과 남은 프랑스 원군은 1652년 10월에 항복했다. 스페인군은 루시용으로 침입했지만, 포르투갈 왕정복고 전쟁이 계속되어 전선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1653년이 되자 양국 모두 지쳐가기 시작했고, 7월까지 보급이 이루어지지 않아 전투를 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1654년 아라스 전투에서 프랑스가 승리했다. 1655년, 프랑스가 이탈리아 파비아에서 다시 패배하면서 스페인은 모데나 전역을 점령했다. 플랑드르에서는 튀렌이 랑드르시/Landrecies프랑스어와 생기슬랭/Saint-Ghislain프랑스어을 점령했다. 1656년에는 발랑시엔 전투에서 스페인이 승리했다.

모래 언덕 전투


잉글랜드 공화국이 영-스페인 전쟁 (1654년-1660년)/Anglo-Spanish War (1654–1660)영어으로 스페인과 싸우자, 프랑스는 1657년 3월 파리 조약을 통해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고, 잉글랜드에 됭케르크를 넘겨주기로 약속했다. 1657년 올리버 크롬웰이 잉글랜드군 3천 명을 대륙 유럽에 파견했다. 1658년 모래 언덕 전투와 됭케르크 포위전 (1658년)/Siege of Dunkirk (1658)영어에서 영-불 동맹군이 대승을 거두었다.

프랑스군은 카탈루냐와 이탈리아에 다시 침공했지만 또다시 스페인에게 패배했고, 강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4. 피레네 조약 (1659년)

페셍 섬에서 루이 14세펠리페 4세간의 면담.


펠리페 4세(Philip IV of Spain), 1621년부터 1665년까지 통치


피레네 조약은 1659년 11월 5일에 체결되었다. 프랑스는 루시용과 프랑스와 국경이 맞닿던 스페인령 네덜란드 영토를 획득했다. 이에 대한 보상으로, 포르투갈 독립 전쟁에서 포르투갈 왕국의 지원을 탈퇴하였다. 1660년 1월 27일, 콩데 공 루이 2세는 루이 14세의 용서를 받고 엑상프로방스 지역을 수여받았다. 뛰어난 장군들이였던 튀렌과 콩데 가문은 그들의 군주에게 충성스러운 대상이였다.

1659년 5월 8일, 프랑스와 스페인은 협상 조건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1658년 9월 올리버 크롬웰의 사망으로 잉글랜드는 약화되었고, 참관은 허용되었지만 회담에서 배제되었다. 1660년 찰스 2세의 왕정복고 이후 잉글랜드-스페인 전쟁은 중단되었지만, 공식적으로는 마드리드 조약 (1667년)까지 종결되지 않았다.

피레네 조약에 따라 프랑스는 스페인령 네덜란드와의 국경 지역인 아르투아 백작령과 프랑스령 에노, 그리고 루시용을 획득했다. 이는 종종 과소평가되지만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과 결합하여 프랑스는 동쪽과 남서쪽의 국경을 강화했으며, 1662년에는 찰스 2세가 덩케르크 판매를 프랑스에 매각했다. 루시용의 획득으로 프랑스-스페인 국경은 피레네 산맥을 따라 확정되었지만, 역사적인 카탈루냐 공국을 분할했으며, 이는 오늘날에도 페르피냥에 거주하는 프랑스 카탈루냐어 사용자들이 매년 기념하고 있다. 이러한 영토 손실 외에도 스페인은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프랑스가 얻은 모든 영토적 이득을 인정하고 확인해야 했다.

프랑스는 아폰수 6세에 대한 지원을 철회했으며, 루이 14세는 바르셀로나 백작이자 카탈루냐 왕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포기했다. 콩데는 그의 재산과 작위를 되찾았고, 샤를 드 몽소랭, 몽탈 백작과 같은 그의 추종자들도 마찬가지였지만, 그의 정치적 권력은 꺾였고, 그는 1667년까지 다시 군사 지휘를 맡지 못했다.

평화 협상의 중요한 부분은 루이와 마리아 테레사 간의 결혼 계약이었으며, 그는 이를 1666년부터 1667년까지의 반환 전쟁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했고, 이후 50년 동안 프랑스의 주장의 근거가 되었다. 이 결혼은 펠리페의 두 번째 부인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나가 두 번째 아들을 낳은 직후에 체결되었기 때문에, 의도했던 것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이 두 아들 모두 어려서 사망했다. 펠리페는 1665년에 사망했고, 그의 네 살 된 아들 스페인의 카를로스 2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그는 한때 "항상 죽음의 문턱에 있었지만, 계속 살아남으로써 기독교 세계를 여러 번 당황하게 했다"라고 묘사되었다.

연합군에 점령되었던 덩케르크는 잉글랜드령이 되었고, 1662년 찰스 2세가 이곳을 루이 14세에게 매각할 때까지 유지되었다.

5. 전쟁의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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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의 영향 ==

=== 유럽의 세력 균형 변화 ===

피레네 조약은 1659년 11월 5일에 체결되었다. 프랑스는 루시옹과 프랑스와 국경이 맞닿던 스페인령 네덜란드 영토를 획득했다. 이에 대한 보상으로, 포르투갈 독립 전쟁에서 포르투갈 왕국의 지원을 탈퇴하였다. 1660년 1월 27일, 콩데 공 루이 2세는 루이 14세의 용서를 받고 엑상프로방스 지역을 수여받았다. 뛰어난 장군들이였던 튀렌과 콩데 가문은 그들의 군주에게 충성스러운 대상이었다.

전통적인 학문은 이 전쟁을 프랑스의 승리로 간주하여 프랑스의 부상을 알리고 스페인을 유럽의 지배적인 강대국으로 대체하는 시작점으로 보았다. 보다 최근의 평가에서는 이는 사후적인 판단에 의존한다고 주장하며, 프랑스가 국경 주변에서 중요한 전략적 이득을 얻었지만 그 결과는 훨씬 더 균형 잡혔다고 주장한다. 한 가지 견해는 양측이 효과적으로 무승부로 합의했고, 1659년에 프랑스가 요구를 완화하지 않았다면 스페인은 계속 싸웠을 것이라는 것이다.

" (1659년 조약)은 동등한 자들의 평화였다. 스페인의 손실은 크지 않았고 프랑스는 일부 영토와 요새를 반환했다. 사후적으로 역사가들은 이 조약을 '스페인의 쇠퇴'와 '프랑스의 부상'의 상징으로 간주했지만, 당시에는 (그것)이 국제적인 위계 질서에 대한 결정적인 판결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스페인은 1659년까지 유럽에서 자신의 지위를 유지했으며, 그 이후 수년 동안 가장 강력한 제국이었다. (1659년) 이후 반세기 동안 (그) 경제력과 군사력이 급격히 쇠퇴했지만, (그것)은 루이 14세에 대항하는 유럽 연합의 주요 참여자였으며, 네이메헌 (Nijmegen) (1678년)과 뤼스윅 (Ryswick) (1697년)의 평화 회의에도 참여했다."

옥스퍼드 뉴 칼리지(New College, Oxford)의 근대 초기 역사 교수인 데이비드 패럿은 베스트팔렌 조약피레네 조약 모두 상호 소모와 교착 상태를 반영하며 "승리한 강대국이 강요한 군사적 칙령"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다른 곳에서 그는 프랑스-스페인 전쟁을 "25년간의 우유부단하고 지나치게 야심차고, 때로는 정말 재앙적인 갈등"으로 묘사한다.

연합군에 점령되었던 됭케르크는 잉글랜드령이 되었고, 1662년 찰스 2세가 이곳을 루이 14세에게 매각할 때까지 유지되었다.

=== 프랑스의 절대 왕정 강화 ===

피레네 조약은 1659년 11월 5일에 체결되었다. 프랑스는 루시용과 프랑스와 국경이 맞닿던 스페인령 네덜란드 영토를 획득했다. 이에 대한 보상으로, 포르투갈 독립 전쟁에서 포르투갈 왕국의 지원을 탈퇴하였다. 1660년 1월 27일, 콩데 공 루이 2세는 루이 14세의 용서를 받고 엑상프로방스 지역을 수여받았다. 뛰어난 장군들이였던 튀렌과 콩데 가문은 그들의 군주에게 충성스러운 대상이었다.

전통적인 학문은 이 전쟁을 프랑스의 승리로 간주하여 프랑스의 부상을 알리고 스페인을 유럽의 지배적인 강대국으로 대체하는 시작점으로 보았다. 보다 최근의 평가에서는 이는 사후적인 판단에 의존한다고 주장하며, 프랑스가 국경 주변에서 중요한 전략적 이득을 얻었지만 그 결과는 훨씬 더 균형 잡혔다고 주장한다. 한 가지 견해는 양측이 효과적으로 무승부로 합의했고, 1659년에 프랑스가 요구를 완화하지 않았다면 스페인은 계속 싸웠을 것이라는 것이다.

" (1659년 조약)은 동등한 자들의 평화였다. 스페인의 손실은 크지 않았고 프랑스는 일부 영토와 요새를 반환했다. 사후적으로 역사가들은 이 조약을 '스페인의 쇠퇴'와 '프랑스의 부상'의 상징으로 간주했지만, 당시에는 (그것)이 국제적인 위계 질서에 대한 결정적인 판결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스페인은 1659년까지 유럽에서 자신의 지위를 유지했으며, 그 이후 수년 동안 가장 강력한 제국이었다. (1659년) 이후 반세기 동안 (그) 경제력과 군사력이 급격히 쇠퇴했지만, (그것)은 루이 14세에 대항하는 유럽 연합의 주요 참여자였으며, 네이메헌 (Nijmegen) (1678년)과 뤼스윅 (Ryswick) (1697년)의 평화 회의에도 참여했다."

옥스퍼드 뉴 칼리지(New College, Oxford)의 근대 초기 역사 교수인 데이비드 패럿은 베스트팔렌 조약피레네 조약 모두 상호 소모와 교착 상태를 반영하며 "승리한 강대국이 강요한 군사적 칙령"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다른 곳에서 그는 프랑스-스페인 전쟁을 "25년간의 우유부단하고 지나치게 야심차고, 때로는 정말 재앙적인 갈등"으로 묘사한다.

=== 군사 기술 및 전술 발전 ===

프랑스-스페인 전쟁은 양국 군대에 큰 부담을 주었으며, 이는 군사 기술 및 전술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스페인은 유럽 최강의 군사 강국이었지만,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보급 문제와 재정난에 시달렸다.[1] 프랑스는 스페인 제국에 대항하기 위해 군대 규모를 1630년 39,000명에서 1635년 150,000명으로 크게 늘렸지만, 병력 유지에 어려움을 겪었다. 1636년 프랑스 북부로의 스페인 침공은 보급 부족으로 실패했다.

로크루아 전투 (1643)는 종종 테르시오의 전장 우위가 끝난 것으로 여겨진다.


베르나르트 폰 작센-바이마르가 공급하고 프랑스가 지불한 병력을 포함하여, 1635년부터 1642년까지 프랑스 군의 공식적인 병력 수준은 평균 150,000명에서 160,000명이었고, 1639년에는 211,000명으로 정점을 찍었다. 그러나 실제 병력은 보고된 병력보다 훨씬 적었는데, 장교들이 실제 병력이 아닌 보고된 병력 수에 따라 급여를 받았기 때문이다. 패럿은 프랑스군의 "보고된" 병력과 "실제" 병력 간의 차이가 평균 35%, 스페인군의 경우 50%에 달한다고 추정한다.

전쟁 기간 동안 물류는 병력 수에 대한 주요 제약으로 작용했으며, 전략은 종종 보급품 확보에 따라 결정되었다. 1660년대에 루부아가 200,000명에 가까운 군대를 장기간 유지하고, 다양한 전선 간의 조정된 전략을 보장할 수 있는 지원 시스템을 구축했다. 스페인군은 경험이 많았지만, 프랑스는 스페인의 통신망을 공격하고 여러 전선에서 전투를 벌이는 전술을 사용했다. 1648년 이후 네덜란드 해군의 지원 상실은 1657년 영국과의 동맹으로 대체될 때까지 해상에서 스페인에 도전하는 프랑스의 능력에 영향을 미쳤다.

스페인군은 1632년 정점에 달했을 때 약 300,000명의 정규군을 보유했으며, 이탈리아 영토에 징집과 자금 조달을 의존했다. 밀라노 공국은 연간 600만 스쿠디와 평균 4,000명의 징집병을 제공했고, 토스카나 대공국은 한 달에 17,000 스쿠디를 제공했다. 1631년부터 1636년까지 나폴리는 350만 스쿠디, 상당한 해군 자원, 그리고 53,500명의 징집병을 스페인군에 제공했다.

1648년 4월 스페인이 나폴리를 재정복; 전쟁 비용을 지불하기 위해 부과된 높은 세금은 1647년 10월에 반란을 일으켰다


1630년부터 1643년까지 나폴리는 자체 군대 및 해군을 지원하는 것 외에도, 매년 평균 10,000명의 병사를 스페인군에 제공하고, 연간 100만 두캇의 보조금을 제공했다. 그 결과 공공 부채가 증가했고, 1648년에는 이자 지급이 왕국 수입의 57%를 차지했다. 나폴리와 시칠리아 모두에서 세금이 크게 증가했다.

스페인군은 강력했지만, 보급 부족에 시달렸다. 분쟁이 끝날 무렵, 양국 모두 지쳐 있었다. 1659년 포르투갈 원정을 위해 화약이 요청되었을 때, 스페인의 중앙 전쟁 위원회는 프랑스와의 전투에서 너무 많은 화약이 소모되어 반도 방어를 위한 총 보급량이 부족하다고 밝혔다. 민병대와 예비군에서 부족 현상이 두드러졌다. 1632년 카스티야 민병대 44,000명 중 70%가 아르케부스 부족으로 인해 "비무장" 상태였다. 전쟁 발발과 함께 상황이 개선되었지만, 분쟁이 끝날 무렵에는 다시 악화되었다.[1] 1647년 시칠리아와 나폴리에서 반란이 일어났지만, 신속하게 진압되었다. 1650년, 밀라노 총독은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이탈리아 국가는 파르마 공국뿐이라고 썼다.

=== 전비와 병력 ===

프랑스-스페인 전쟁은 당시 유럽 최강의 군사 강국이었던 스페인 제국에 대항하기 위해 전례 없는 규모의 프랑스군과 재정 지원을 필요로 했다.[1] 1630년 39,000명이었던 프랑스군은 1635년 5월 전쟁 선포 직전 약 150,000명으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프랑스 정부는 이 병력을 제대로 지원할 수 없었고, 같은 해 5월 스페인령 네덜란드 침공에 참여한 27,000명의 병사 중 한 달 후에는 15,000명 미만이 남았다. 1636년 프랑스 북부로의 스페인 침공은 보급 부족으로 실패했다.

베르나르트 폰 작센-바이마르가 공급하고 프랑스가 지불한 병력을 포함하여, 1635년부터 1642년까지 공식적인 병력 수준은 평균 150,000명에서 160,000명이었고, 1639년에는 211,000명으로 정점을 찍었다. 그러나 장교들이 실제 병력이 아닌 보고된 병력 수에 따라 급여를 받았기 때문에 실제 병력은 보고된 병력보다 적었다. 패럿은 프랑스군의 "보고된" 병력과 "실제" 병력 간의 차이가 평균 35%, 스페인군의 경우 50%에 달한다고 추정한다.

전쟁 기간 동안 물류는 병력 수에 대한 주요 제약이었고, 전략은 종종 적절한 보급품을 찾는 필요성에 따라 결정되었다. 1660년대에 루부아가 200,000명에 가까운 군대를 장기간 유지하고, 다양한 전선 간의 조정된 전략을 보장할 수 있는 지원 시스템을 구축했다. 스페인군은 자원을 통해 인적 및 물적 손실을 쉽게 대체할 수 있었다. 프랑스는 스페인군의 통신망을 공격하는 동시에 여러 전선에서 그들을 상대함으로써 이러한 이점을 상쇄했다.

1632년 스페인군은 정점에 달했을 때 약 300,000명의 정규군을 보유했으며, 지역 민병대는 제외되었다.[1] 스페인 제국은 징집과 자금 조달을 위해 이탈리아 영토에 점점 더 의존했다.[1] 밀라노 공국은 연간 600만 스쿠디와 평균 4,000명의 징집병을 제공했고, 토스카나 대공국은 한 달에 17,000 스쿠디를 제공해야 했으며, 함대와 플랑드르 군대를 위한 선박과 병사도 제공해야 했다.[1] 1631년부터 1636년까지 나폴리는 350만 스쿠디, 상당한 해군 자원, 그리고 인구가 절반밖에 되지 않는 카스티야보다 더 많은 53,500명의 징집병을 스페인군에 제공했다.[1]

1630년부터 1643년까지 나폴리는 자체 군대 및 해군을 지원하는 것 외에도, 매년 평균 10,000명의 병사를 스페인군에 제공하고, 스페인 제국의 다른 지역을 지원하기 위해 연간 100만 두캇의 보조금을 제공했으며, 밀라노 정부 지출의 3분의 1을 지불했다.[1] 그 결과, 공공 부채는 5배로 증가했고, 1648년에는 이자 지급이 왕국의 수입의 57%를 차지했다.[1] 나폴리와 시칠리아 모두에서 세금은 1618년과 1688년 사이에 3배로 증가했다.[1]

스페인군은 강력했음에도 불구하고, 25년의 분쟁 기간 동안 끊임없이 보급 부족에 시달렸다.[1] 분쟁이 끝날 무렵, 양국 모두 지쳐 있었다.[1] 1659년 포르투갈 원정을 위해 3,000 킨탈(138톤)의 화약이 필요했지만, 스페인의 중앙 전쟁 위원회는 프랑스와의 전투로 인해 반도 방어를 위한 총 보급량이 1427 킨탈(66톤)에 불과하다고 밝혔다.[1] 1632년 카스티야 민병대 44,000명 중 70%가 아르케부스 부족으로 "비무장" 상태였으나, 전쟁 발발과 함께 상황이 개선되어 1636년에는 카스티야 민병대의 25%만이 손으로 하는 무기를 소지했다.[1] 그러나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상황이 다시 악화되어, 카스티야 등록부에 등재된 465,000명의 민병대원 중 87% 이상이 "비무장"으로 분류되었다.[1]

1647년 10월, 불만이 시칠리아와 나폴리에서 반란으로 이어졌지만 신속하게 진압되었다.[1] 1650년, 밀라노 총독은 남부의 광범위한 불만 외에도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이탈리아 국가는 파르마 공국뿐이라고 썼다.

5. 1. 유럽의 세력 균형 변화

피레네 조약은 1659년 11월 5일에 체결되었다. 프랑스는 루시옹과 프랑스와 국경이 맞닿던 스페인령 네덜란드 영토를 획득했다. 이에 대한 보상으로, 포르투갈 독립 전쟁에서 포르투갈 왕국의 지원을 탈퇴하였다. 1660년 1월 27일, 콩데 공 루이 2세는 루이 14세의 용서를 받고 엑상프로방스 지역을 수여받았다. 뛰어난 장군들이였던 튀렌과 콩데 가문은 그들의 군주에게 충성스러운 대상이었다.

전통적인 학문은 이 전쟁을 프랑스의 승리로 간주하여 프랑스의 부상을 알리고 스페인을 유럽의 지배적인 강대국으로 대체하는 시작점으로 보았다. 보다 최근의 평가에서는 이는 사후적인 판단에 의존한다고 주장하며, 프랑스가 국경 주변에서 중요한 전략적 이득을 얻었지만 그 결과는 훨씬 더 균형 잡혔다고 주장한다. 한 가지 견해는 양측이 효과적으로 무승부로 합의했고, 1659년에 프랑스가 요구를 완화하지 않았다면 스페인은 계속 싸웠을 것이라는 것이다.

" (1659년 조약)은 동등한 자들의 평화였다. 스페인의 손실은 크지 않았고 프랑스는 일부 영토와 요새를 반환했다. 사후적으로 역사가들은 이 조약을 '스페인의 쇠퇴'와 '프랑스의 부상'의 상징으로 간주했지만, 당시에는 (그것)이 국제적인 위계 질서에 대한 결정적인 판결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스페인은 1659년까지 유럽에서 자신의 지위를 유지했으며, 그 이후 수년 동안 가장 강력한 제국이었다. (1659년) 이후 반세기 동안 (그) 경제력과 군사력이 급격히 쇠퇴했지만, (그것)은 루이 14세에 대항하는 유럽 연합의 주요 참여자였으며, 네이메헌 (Nijmegen) (1678년)과 뤼스윅 (Ryswick) (1697년)의 평화 회의에도 참여했다."

옥스퍼드 뉴 칼리지(New College, Oxford)의 근대 초기 역사 교수인 데이비드 패럿은 베스트팔렌 조약피레네 조약 모두 상호 소모와 교착 상태를 반영하며 "승리한 강대국이 강요한 군사적 칙령"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다른 곳에서 그는 프랑스-스페인 전쟁을 "25년간의 우유부단하고 지나치게 야심차고, 때로는 정말 재앙적인 갈등"으로 묘사한다.

연합군에 점령되었던 됭케르크는 잉글랜드령이 되었고, 1662년 찰스 2세가 이곳을 루이 14세에게 매각할 때까지 유지되었다.

5. 2. 프랑스의 절대 왕정 강화

피레네 조약은 1659년 11월 5일에 체결되었다. 프랑스는 루시용과 프랑스와 국경이 맞닿던 스페인령 네덜란드 영토를 획득했다. 이에 대한 보상으로, 포르투갈 독립 전쟁에서 포르투갈 왕국의 지원을 탈퇴하였다. 1660년 1월 27일, 콩데 공 루이 2세는 루이 14세의 용서를 받고 엑상프로방스 지역을 수여받았다. 뛰어난 장군들이였던 튀렌과 콩데 가문은 그들의 군주에게 충성스러운 대상이었다.

전통적인 학문은 이 전쟁을 프랑스의 승리로 간주하여 프랑스의 부상을 알리고 스페인을 유럽의 지배적인 강대국으로 대체하는 시작점으로 보았다. 보다 최근의 평가에서는 이는 사후적인 판단에 의존한다고 주장하며, 프랑스가 국경 주변에서 중요한 전략적 이득을 얻었지만 그 결과는 훨씬 더 균형 잡혔다고 주장한다. 한 가지 견해는 양측이 효과적으로 무승부로 합의했고, 1659년에 프랑스가 요구를 완화하지 않았다면 스페인은 계속 싸웠을 것이라는 것이다.

" (1659년 조약)은 동등한 자들의 평화였다. 스페인의 손실은 크지 않았고 프랑스는 일부 영토와 요새를 반환했다. 사후적으로 역사가들은 이 조약을 '스페인의 쇠퇴'와 '프랑스의 부상'의 상징으로 간주했지만, 당시에는 (그것)이 국제적인 위계 질서에 대한 결정적인 판결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스페인은 1659년까지 유럽에서 자신의 지위를 유지했으며, 그 이후 수년 동안 가장 강력한 제국이었다. (1659년) 이후 반세기 동안 (그) 경제력과 군사력이 급격히 쇠퇴했지만, (그것)은 루이 14세에 대항하는 유럽 연합의 주요 참여자였으며, 네이메헌 (Nijmegen) (1678년)과 뤼스윅 (Ryswick) (1697년)의 평화 회의에도 참여했다."

옥스퍼드 뉴 칼리지(New College, Oxford)의 근대 초기 역사 교수인 데이비드 패럿은 베스트팔렌 조약피레네 조약 모두 상호 소모와 교착 상태를 반영하며 "승리한 강대국이 강요한 군사적 칙령"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다른 곳에서 그는 프랑스-스페인 전쟁을 "25년간의 우유부단하고 지나치게 야심차고, 때로는 정말 재앙적인 갈등"으로 묘사한다.

5. 3. 군사 기술 및 전술 발전

프랑스-스페인 전쟁은 양국 군대에 큰 부담을 주었으며, 이는 군사 기술 및 전술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스페인은 유럽 최강의 군사 강국이었지만,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보급 문제와 재정난에 시달렸다.[1] 프랑스는 스페인 제국에 대항하기 위해 군대 규모를 1630년 39,000명에서 1635년 150,000명으로 크게 늘렸지만, 병력 유지에 어려움을 겪었다. 1636년 프랑스 북부로의 스페인 침공은 보급 부족으로 실패했다.

베르나르트 폰 작센-바이마르가 공급하고 프랑스가 지불한 병력을 포함하여, 1635년부터 1642년까지 프랑스 군의 공식적인 병력 수준은 평균 150,000명에서 160,000명이었고, 1639년에는 211,000명으로 정점을 찍었다. 그러나 실제 병력은 보고된 병력보다 훨씬 적었는데, 장교들이 실제 병력이 아닌 보고된 병력 수에 따라 급여를 받았기 때문이다. 패럿은 프랑스군의 "보고된" 병력과 "실제" 병력 간의 차이가 평균 35%, 스페인군의 경우 50%에 달한다고 추정한다.

전쟁 기간 동안 물류는 병력 수에 대한 주요 제약으로 작용했으며, 전략은 종종 보급품 확보에 따라 결정되었다. 1660년대에 루부아가 200,000명에 가까운 군대를 장기간 유지하고, 다양한 전선 간의 조정된 전략을 보장할 수 있는 지원 시스템을 구축했다. 스페인군은 경험이 많았지만, 프랑스는 스페인의 통신망을 공격하고 여러 전선에서 전투를 벌이는 전술을 사용했다. 1648년 이후 네덜란드 해군의 지원 상실은 1657년 영국과의 동맹으로 대체될 때까지 해상에서 스페인에 도전하는 프랑스의 능력에 영향을 미쳤다.

스페인군은 1632년 정점에 달했을 때 약 300,000명의 정규군을 보유했으며, 이탈리아 영토에 징집과 자금 조달을 의존했다. 밀라노 공국은 연간 600만 스쿠디와 평균 4,000명의 징집병을 제공했고, 토스카나 대공국은 한 달에 17,000 스쿠디를 제공했다. 1631년부터 1636년까지 나폴리는 350만 스쿠디, 상당한 해군 자원, 그리고 53,500명의 징집병을 스페인군에 제공했다.

1630년부터 1643년까지 나폴리는 자체 군대 및 해군을 지원하는 것 외에도, 매년 평균 10,000명의 병사를 스페인군에 제공하고, 연간 100만 두캇의 보조금을 제공했다. 그 결과 공공 부채가 증가했고, 1648년에는 이자 지급이 왕국 수입의 57%를 차지했다. 나폴리와 시칠리아 모두에서 세금이 크게 증가했다.

스페인군은 강력했지만, 보급 부족에 시달렸다. 분쟁이 끝날 무렵, 양국 모두 지쳐 있었다. 1659년 포르투갈 원정을 위해 화약이 요청되었을 때, 스페인의 중앙 전쟁 위원회는 프랑스와의 전투에서 너무 많은 화약이 소모되어 반도 방어를 위한 총 보급량이 부족하다고 밝혔다. 민병대와 예비군에서 부족 현상이 두드러졌다. 1632년 카스티야 민병대 44,000명 중 70%가 아르케부스 부족으로 인해 "비무장" 상태였다. 전쟁 발발과 함께 상황이 개선되었지만, 분쟁이 끝날 무렵에는 다시 악화되었다.[1] 1647년 시칠리아와 나폴리에서 반란이 일어났지만, 신속하게 진압되었다. 1650년, 밀라노 총독은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이탈리아 국가는 파르마 공국뿐이라고 썼다.

5. 4. 전비와 병력

프랑스-스페인 전쟁은 당시 유럽 최강의 군사 강국이었던 스페인 제국에 대항하기 위해 전례 없는 규모의 프랑스군과 재정 지원을 필요로 했다.[1] 1630년 39,000명이었던 프랑스군은 1635년 5월 전쟁 선포 직전 약 150,000명으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프랑스 정부는 이 병력을 제대로 지원할 수 없었고, 같은 해 5월 스페인령 네덜란드 침공에 참여한 27,000명의 병사 중 한 달 후에는 15,000명 미만이 남았다. 1636년 프랑스 북부로의 스페인 침공은 보급 부족으로 실패했다.

베르나르트 폰 작센-바이마르가 공급하고 프랑스가 지불한 병력을 포함하여, 1635년부터 1642년까지 공식적인 병력 수준은 평균 150,000명에서 160,000명이었고, 1639년에는 211,000명으로 정점을 찍었다. 그러나 장교들이 실제 병력이 아닌 보고된 병력 수에 따라 급여를 받았기 때문에 실제 병력은 보고된 병력보다 적었다. 패럿은 프랑스군의 "보고된" 병력과 "실제" 병력 간의 차이가 평균 35%, 스페인군의 경우 50%에 달한다고 추정한다.

전쟁 기간 동안 물류는 병력 수에 대한 주요 제약이었고, 전략은 종종 적절한 보급품을 찾는 필요성에 따라 결정되었다. 1660년대에 루부아가 200,000명에 가까운 군대를 장기간 유지하고, 다양한 전선 간의 조정된 전략을 보장할 수 있는 지원 시스템을 구축했다. 스페인군은 자원을 통해 인적 및 물적 손실을 쉽게 대체할 수 있었다. 프랑스는 스페인군의 통신망을 공격하는 동시에 여러 전선에서 그들을 상대함으로써 이러한 이점을 상쇄했다.

1632년 스페인군은 정점에 달했을 때 약 300,000명의 정규군을 보유했으며, 지역 민병대는 제외되었다.[1] 스페인 제국은 징집과 자금 조달을 위해 이탈리아 영토에 점점 더 의존했다.[1] 밀라노 공국은 연간 600만 스쿠디와 평균 4,000명의 징집병을 제공했고, 토스카나 대공국은 한 달에 17,000 스쿠디를 제공해야 했으며, 함대와 플랑드르 군대를 위한 선박과 병사도 제공해야 했다.[1] 1631년부터 1636년까지 나폴리는 350만 스쿠디, 상당한 해군 자원, 그리고 인구가 절반밖에 되지 않는 카스티야보다 더 많은 53,500명의 징집병을 스페인군에 제공했다.[1]

1630년부터 1643년까지 나폴리는 자체 군대 및 해군을 지원하는 것 외에도, 매년 평균 10,000명의 병사를 스페인군에 제공하고, 스페인 제국의 다른 지역을 지원하기 위해 연간 100만 두캇의 보조금을 제공했으며, 밀라노 정부 지출의 3분의 1을 지불했다.[1] 그 결과, 공공 부채는 5배로 증가했고, 1648년에는 이자 지급이 왕국의 수입의 57%를 차지했다.[1] 나폴리와 시칠리아 모두에서 세금은 1618년과 1688년 사이에 3배로 증가했다.[1]

스페인군은 강력했음에도 불구하고, 25년의 분쟁 기간 동안 끊임없이 보급 부족에 시달렸다.[1] 분쟁이 끝날 무렵, 양국 모두 지쳐 있었다.[1] 1659년 포르투갈 원정을 위해 3,000 킨탈(138톤)의 화약이 필요했지만, 스페인의 중앙 전쟁 위원회는 프랑스와의 전투로 인해 반도 방어를 위한 총 보급량이 1427 킨탈(66톤)에 불과하다고 밝혔다.[1] 1632년 카스티야 민병대 44,000명 중 70%가 아르케부스 부족으로 "비무장" 상태였으나, 전쟁 발발과 함께 상황이 개선되어 1636년에는 카스티야 민병대의 25%만이 손으로 하는 무기를 소지했다.[1] 그러나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상황이 다시 악화되어, 카스티야 등록부에 등재된 465,000명의 민병대원 중 87% 이상이 "비무장"으로 분류되었다.[1]

1647년 10월, 불만이 시칠리아와 나폴리에서 반란으로 이어졌지만 신속하게 진압되었다.[1] 1650년, 밀라노 총독은 남부의 광범위한 불만 외에도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이탈리아 국가는 파르마 공국뿐이라고 썼다.

6. 한국사와의 연관성 (추가)

7. 주요 인물

참조

[1] 논문 The Experience of Spain's Early Modern Soldiers: Combat, Welfare and Violence 2002-01
[2] 서적 Richelieu's Army: War, Government and Society in France, 1624–1642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3] 서적 Spain in the Seventeenth Century Longman 1995
[4] 서적 Spain's Struggle For Europe, 1598-1668 The Hambledon Press 1994
[5] 서적 War in the Modern Great Power System: 1495-1975 The University Press of Kentucky 2015
[6] 서적 Histoire militaire du Piémont
[7] 서적 The Projection and Limitations of Imperial Powers, 1618-1850 Brill 2012
[8] 간행물 Fronde, The EB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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