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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레네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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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피레네 조약은 1659년 프랑스와 스페인 간에 체결된 조약으로, 30년 전쟁 이후 양국 간의 영토 분할과 혼인 동맹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프랑스는 루시용, 아르투아, 세르다냐 북부, 룩셈부르크 일부, 플랑드르의 여러 도시를 획득하여 유럽 내 지위를 강화했고, 스페인은 영토 손실과 함께 국제적 영향력이 감소했다. 조약은 프랑스 왕 루이 14세와 스페인 공주 마리아 테레사의 결혼을 성사시켰지만, 스페인의 재정난으로 지참금 지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향후 분쟁의 씨앗이 되었다. 이 조약은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의 번영과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쇠퇴를 가져왔으며, 카탈루냐 지역의 분할과 프랑스 문화의 영향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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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레네 조약
지도 정보
조약 정보
조약 명칭피레네 조약
프랑스어 명칭Traité des Pyrénées
스페인어 명칭Tratado de los Pirineos
카탈루냐어 명칭Tractat dels Pirineus
조약 유형분할 조약
주요 내용1635년~1659년 전쟁 종결; 스페인이 아르투아 백국북카탈루냐를 프랑스에 할양; 루이 14세가 마리아 테레사와 결혼
체결 날짜1659년 11월 7일
체결 장소페잔 섬
협상 대표
스페인 제국 대표루이스 멘데스 데 하로
프랑스 왕국 대표쥘 마자랭
서명 당사자
스페인 제국펠리페 4세
루이스 멘데스 데 하로
페드로 콜로마
프랑스 왕국루이 14세
쥘 마자랭
위그 드 리온
조약 당사국
국가프랑스 왕국
스페인 제국
관련 링크
위키문헌프랑스어 위키문헌
스페인어 위키문헌

2. 배경

프랑스는 1620년대 네덜란드에서 스페인이 승리하고, 1634년 네르틀링겐 전투에서 스웨덴에 승리한 후 30년 전쟁에 개입했다. 1640년, 프랑스는 카탈루냐에서 일어난 카탈루냐 농민 반란을 지원하며 스페인의 정치에 개입했고, 스페인은 1648년 프랑스에서 발생한 프롱드의 난을 지원하며 맞섰다.

피레네 조약에 따라 이루어진 영토 할양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협상 과정에서 프랑스는 알자스로렌을 얻어 네덜란드로 향하는 스페인의 통로(오스트리아 경유)를 차단했다. 이는 프랑스와 스페인 간의 적대감을 더욱 키웠다.

30년 전쟁이 끝난 후 10년 뒤, 잉글랜드-프랑스 연합군은 1658년 뒬륀 전투에서 승리했고, 1659년에 강화 조약이 성립되었다.

2. 1. 30년 전쟁과 베스트팔렌 조약

브라이텐펠트 전투에서 승리한 스웨덴 (1631년)


1517년 종교개혁 이후 독일 지역의 종교 갈등은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로 일단락되는 듯 했다. 그러나 이는 미봉책에 불과했으며,[5][6] 17세기 들어 독일 내 신교와 구교 영주들 간에 무력 충돌이 다시 발생했다.[7] 만약 독일 지역이 가톨릭 세력으로 통일될 경우, 스페인과 독일 사이에 위치한 프랑스는 합스부르크 가문에 의해 국가 안위가 위태로워질 수 있었다.[8][9][10] 1631년 이후 신교 제후들을 গোপনে 지원하던[11] 프랑스는 신교 세력의 전세가 계속 불리해지자, 1635년에 스페인과 합스부르크 가문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하고 본격적으로 전쟁에 참여했다.[12] 초기에는 프랑스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었으나,[13] 여러 실패를 통해 군사 조직을 개선한 후 전세를 역전시켰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유럽 지도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 기나긴 전쟁이 끝났다.[14] 독일 지역은 약 300여 개의 제후국으로 분리되었고, 30년간 지속된 전쟁으로 독일 인구 약 800만 명이 사망했다.[15] 종교는 개인의 자유 의지에 따라 선택하는 것으로 합의되었다. 스위스네덜란드는 독립국의 지위를 인정받았지만,[16] 네덜란드 남부 일부 지역(현재의 벨기에, 룩셈부르크)은 스페인령으로 남았다. 조약을 통해 프랑스는 순드가우를 차지하여 스페인이 오스트리아로부터 네덜란드로 가는 길을 막았다. 이로 인해 프랑스와 스페인 간의 갈등은 계속되었다.

2. 2. 지속된 갈등과 전쟁

베스트팔렌 조약에도 불구하고 스페인과 프랑스는 접경 지역에서 전쟁을 이어갔다. 프랑스는 30년 전쟁을 통해 명장으로 인정받은 튀렌을 내세워 스페인을 상대했다. 30년 전쟁 중에도 스페인과 프랑스는 상대국의 내전이나 반란에 서로 개입하며 갈등과 대립을 이어갔다. 1640년 브라간자 공작 주앙 4세가 주도한 포르투갈 반란(독립 투쟁)이 발생하자 프랑스 재상 리슐리외는 포르투갈을 지원하였다.[17][18] 같은 해에 카탈루냐에서 반란이 발생했을 때도, 프랑스는 카탈루냐 반란군과 연합하여[19] 1641년 1월에 벌어진 몬주크 전투에서 스페인군을 격파하였다.

이후 프랑스는 1652년 바르셀로나에서 스페인군에게 패배할 때까지 카탈루냐 공국을 지배했다.[20][21] 스페인 군대가 카탈루냐의 대부분을 재정복했지만, 프랑스는 피레네 산맥 북쪽의 카탈루냐 영토를 유지했다. 스페인은 1648년에 프랑스에서 발생한 프롱드의 난을 지원하며 응수했다. 또한 프롱드의 난을 주도했던 콩데 공이 스페인으로 망명해오자 그를 프랑스 전선에 투입했다.

스페인은 크롬웰이 이끄는 잉글랜드와도 사이가 악화되었다. 잉글랜드에게 네덜란드의 케르크 항을 빼았겼으며[22] 1655년에는 중남미에 있던 식민지 자메이카도 빼았겼다.[23]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부터의 지원은 독일 제후들의 동맹 결성으로 좌절되었으며, 독일 동맹은 1657년, 1658년에 전격적으로 프랑스를 지원했다.[24] 여러 악재 속에 스페인은 큰 어려움에 처해갔다. 10년간 지속된 전쟁은 독일 제후와 잉글랜드 크롬웰의 지원을 받은 프랑스군이 1658년 6월에 됭케르크 전투에서 승리하며 막을 내린 가운데 종전 협상에 들어가게 되었다.[25]

3. 조약 체결

루시용의 위치.


프랑스는 루시옹(페르피냥 포함), 세르다냐의 북쪽 절반, 몽메디 및 룩셈부르크의 다른 지역, 아르투아와 플랑드르의 여러 도시들(아라스, 베튈느, 그라블린, 티옹빌 포함)을 얻었고, 피레네 산맥을 경계로 스페인과의 새로운 국경이 설정되었다.[2] 그러나 조약은 피레네 산맥 북쪽의 모든 "마을"만 프랑스의 일부가 되도록 규정했기 때문에, 리비아는 한때 세르다냐의 수도였으나 '도시'였던 이유로 의도치 않게 조약에서 제외되어 바하 세르다냐 지역의 일부인 지로나 주에 속한 스페인령 월경지가 되었다.

스페인은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프랑스의 모든 영토 확장을 인정해야 했다.[2] 프랑스는 스페인 영토를 할양받는 대가로 포르투갈 지원을 중단하고, 카탈루냐 반란 이후 프랑스가 주장해 온 카탈루냐 공국에 대한 권리를 포기했다.[2] 리슐리외 추기경은 포르투갈 반란을 재정적으로 지원했다. 프랑스는 1641년 몬주익 전투에서 스페인군을 물리친 이후 1651년 바르셀로나 공방전에서 패배할 때까지 카탈루냐 공국을 통제했다.

조약은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스페인의 필립 4세의 딸 스페인의 마리아 테레사의 결혼을 주선했다.[2] 마리아 테레사는 지참금의 일부로 금전적 합의를 받는 대신 스페인 왕위 계승권을 포기해야 했으나, 이 합의는 지켜지지 않았고 1667년 합장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 1660년 6월 꿩의 섬 회의에서 두 군주와 장관들이 만났고, 공주는 프랑스로 들어갔다.

잉글랜드 연방은 덩케르크를 받았으나,[2] 1662년 프랑스에 매각했다.

3. 1. 영토 반환과 할양

프랑스루시용(페르피냥 포함), 세르다냐의 북쪽 절반, 몽메디 및 룩셈부르크의 다른 지역, 아르투아와 플랑드르의 여러 도시들(아라스, 베튈느, 그라블린, 티옹빌 포함)을 획득했다. 이로써 스페인과의 새로운 국경이 피레네 산맥으로 확정되었다.[24] 특히 전략적 요충지였던 루시용의 할양은 스페인에게 큰 타격이었다. 루시용은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스 평지와 연결되어 있어, 프랑스 침공의 거점으로 활용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26]

조약에는 피레네 산맥 북쪽의 모든 "마을"이 프랑스에 속한다는 규정이 있었다. 그러나 세르다냐의 수도였던 리비아는 '도시'로 간주되어 이 조항에서 제외, 의도치 않게 스페인 지로나 주에 속한 월경지가 되었다. 이 국경선은 1856년 바욘 조약이 체결되고 12년 후에야 최종 확정되었다.[2] 서부 피레네 산맥에서는 바스크 지방의 바스탄, 알두드, 발카를로스 등 국경 지역의 행정 구역이 결정되었다.[27]

스페인은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프랑스가 얻은 알자스-로렌을 포함한 모든 영토를 인정해야 했다.[28] 프랑스는 스페인 영토를 할양받는 대가로 포르투갈 지원 중단과 카탈루냐 공국에 대한 권리 포기를 약속했다.[28]

프랑스는 북쪽으로는 아르투아 백국신성 로마 제국과의 북동쪽 국경을 따라 작은 지역들을 얻었다. 남쪽으로는 카탈루냐 공국의 북부 지역(루시옹, 콩플랑, 발레스피르, 캅시르, 프랑스 세르다뉴 포함, 훗날 "북카탈루냐"로 불림)을 획득했다. 서쪽에서는 바스크 피레네 산맥을 따라 분쟁 중인 지역(사레타—주가라무르디, 아이뇨아 등—알뒤드, 발카를로스)의 국경 획정을 위한 현장 조사단 구성에 합의했다.

3. 2. 혼인 합의와 지참금 문제

루이 14세마리 테레즈의 결혼은 마자랭의 정치적 판단과 루이 14세의 모후 안 도트리슈의 희망에 따라 이루어졌다.[29][30] 이 결혼 조건 중 하나는 마리 테레즈가 스페인의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는 대신 50만 에퀴의 지참금을 프랑스에 지불하는 것이었다.[31]

하지만 스페인은 여러 전쟁으로 인해 심각한 재정난을 겪고 있었고, 지참금을 완납할 능력이 없었다.[32] 더욱이 합스부르크 왕가는 근친혼을 지속해왔기 때문에 유전적 장애 등의 부작용이 심각한 상황이었다.[33] 1659년 당시 스페인 국왕 펠리페 4세는 2명의 왕비를 통해 12명의 아이를 낳았으나 10명이 요절했고, 장성한 자녀는 딸 2명뿐이었다. (1661년에 카를로스 2세가 태어났다.)

스페인은 여성의 왕위 상속이 가능했기에, 마리 테레즈나 그 후손에게 왕관이 돌아갈 가능성이 높았다. 마자랭은 이 점을 노려 엄청난 액수의 지참금을 요구했고, 분할하여 받기로 했다. 예상대로 스페인은 훗날 지참금을 완납하지 못했다.[36][35]

마자랭의 외교 수완으로 프랑스는 유리한 조건을 얻어 부르봉 왕가 번영의 기초를 닦았다. 베스트팔렌 조약에 이어 피레네 조약 체결로 프랑스는 유럽 내 우월적 지위를 더욱 확고히 했고, 반면 스페인은 국제적 우위를 상실하고 몰락이 가속화되었다.

조약을 기념하는 메달 (1660)

4. 조약의 영향

스페인과 프랑스 간 카탈루냐 공국의 분할


피레네 조약은 베스트팔렌 조약과 함께 루이 14세가 외교적 우위를 확보하는 데 기여했으며, 프랑스 국왕의 전략에서 중요한 요소였던 혼수금도 포함되었다.

1660년 스웨덴의 폴란드 점령이 끝날 무렵, 유럽 대륙 대부분은 평화를 누리고 있었고, 부르봉 왕가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를 종식시켰다.[2] 피레네 조약은 국경 세관을 설립하고 사람과 상품의 자유로운 국경 간 이동을 제한했다. 또한 1세기 반 동안 지속된 나바라 왕국에 대한 소송을 무기한으로 해결했지만, 알뒤드에 대한 분쟁은 18세기 내내 계속되었다.[2]

4. 1. 프랑스의 부상과 스페인의 쇠퇴

피레네 조약은 마자랭 추기경의 마지막 주요 외교적 성과였다. 이 조약은 베스트팔렌 조약과 함께, 루이 14세에게 약화된 콩데 공 루이와 약화된 스페인 왕국을 통해 괄목할 만한 안정과 외교적 우위를 제공했으며, 프랑스 국왕의 전략에서 중요한 요소였던 혼수금도 포함되었다.

전반적으로, 1660년 스웨덴의 폴란드 점령이 끝날 무렵, 유럽 대륙의 대부분은 평화를 누리고 있었고(비록 포르투갈 복고 전쟁의 세 번째 단계가 곧 시작될 것이지만), 부르봉 왕가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를 종식시켰다.[2] 피레네 조약은 국경 세관의 설립과 사람과 상품의 자유로운 국경 간 이동 제한을 가져왔다. 또한 이 조약은 1세기 반 동안 지속된 나바라 왕국에 대한 소송을 무기한으로 해결했지만, 알뒤드에 대한 분쟁은 18세기 내내 계속되었다.[2]

4. 2. 상속 전쟁과 엑스라샤펠 조약

루이 14세마리 테레즈의 결혼식


1660년 6월 9일 프랑스 루이 14세마리 테레즈와 결혼하였다. 그러나 스페인은 지참금을 완납하지 못해 갈등의 소지를 남겼다.[34][35][36] 1665년 스페인의 펠리페 4세 국왕이 사망하자,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지참금 미지급분을 근거로[37] 자신의 왕비 마리테레즈에게 남네덜란드에 대한 계승권이 있다고 주장했다.

1667년 5월, 프랑스 군대는 남네덜란드를 침공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네덜란드 공화국1667년 7월에 잉글랜드 왕국과의 전쟁(영국-네덜란드 전쟁)을 종식시켰고, 1668년 1월에는 잉글랜드, 스웨덴과 삼국 동맹을 구축하면서 프랑스와 대치하게 되었다. 프랑스 군대는 1668년 2월에 스페인의 영토였던 프랑슈콩테를 점령했다.

1668년 5월 아헨에서 엑스라샤펠 조약이 체결되면서 프랑스는 아르망티에르, 베르그, 샤를루아, 코르트레이크, 두에, 푀르너, , 아우데나르더, 투르네를 획득하는 대신 전쟁 중에 점령한 프랑슈콩테를 스페인에 반환하게 되었다.

4. 3.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루이 14세가 일으킨 대외 전쟁은 좌절되었지만, 이는 "태양왕" 루이 14세의 패권주의 시작이었다. 루이 14세는 프랑스 세력 확장에 방해가 되는 네덜란드를 고립시키기 위해 외교 정책을 전개했고, 잉글랜드 찰스 2세와 비밀 조약을 체결했다. 스웨덴은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신성 로마 제국 제후들과는 동맹 및 중립 관계를 수립했다. 이는 1672년 프랑스-네덜란드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카를로스 2세1700년 사망하면서 스페인 합스부르크 남성 직계가 단절되었다. 스페인 왕위계승전을 거쳐 스페인 왕위는 마리 테레즈의 손자인 펠리페 5세에게 이어졌고[38], 오늘날까지 프랑스 부르봉 왕가가 계승하고 있다.

5. 카탈루냐에 미친 영향



루시옹, Conflent|콩플랑영어, Vallespir|발레스피르영어, Capcir|캅시르영어, 세르다냐의 절반은 현재 살다냐 또는 프랑스령 카탈루냐로 알려져 있으며, 프랑스령으로 남아 있다. 매년 11월 7일 카탈루냐에서는 이를 기념하는 행사를 페르피냥(Perpignan)에서 개최하고 있다.

조약에는 카탈루냐의 사회 제도 유지에 관한 몇 가지 조항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루이 14세는 이 부분을 존중하지 않았다. 조약이 체결된 1년 후, 북카탈루냐의 사회 제도는 크게 바뀌었다. 1700년 4월 2일(5월 1일부터 시행) 프랑스 국왕의 칙령으로 카탈루냐어의 공적인 사용을 금지했다. 그 이후 프랑스어가 유일한 공용어가 되었다.

6. 현대적 의의

피레네 조약은 마자랭 추기경의 마지막 주요 외교적 성과였다. 이 조약은 베스트팔렌 조약과 함께 루이 14세에게 약화된 콩데 공 루이와 약화된 스페인 왕국을 통해 괄목할 만한 안정과 외교적 우위를 제공했으며, 프랑스 국왕의 전략에서 중요한 요소였던 혼수금도 포함되었다.

전반적으로, 1660년 스웨덴의 폴란드 점령이 끝날 무렵, 유럽 대륙의 대부분은 평화를 누리고 있었고(포르투갈 복고 전쟁의 세 번째 단계가 곧 시작될 것이지만), 부르봉 왕가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를 종식시켰다.[2] 피레네 조약은 국경 세관의 설립과 사람과 상품의 자유로운 국경 간 이동 제한을 가져왔다. 또한 이 조약은 1세기 반 동안 지속된 나바라 왕국에 대한 소송을 무기한으로 해결했지만, 알뒤드에 대한 분쟁은 18세기 내내 계속되었다.[2]

참조

[1] 문서 Traité des Pyrénées; Tratado de los Pirineos; Tractat dels Pirineus
[2] 논문 2012
[3] 서적 The New Cambridge Modern History: Volume 4, The Decline of Spain and the Thirty Years War, 1609-48/49 CUP 1970
[4] 서적 Boundaries: The Making of France and Spain in the Pyrenees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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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서적 유럽의 첫 번째 태양 스페인 을류문화사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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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웹사이트 펠리페 4세 https://terms.naver.[...]
[9] 서적 이야기 프랑스사 청아출판사 2005-12-10
[10] 문서
[11] 웹사이트 30년전쟁 https://terms.naver.[...]
[12] 웹사이트 드디어 프랑스가 움직이다 - 30년 전쟁
[13] 서적 프랑스의 역사 까치글방 2013-03-11
[14] 서적 이야기 프랑스사 청아출판사 2005-12-10
[15] 서적 이야기 독일사 청아출판사 2006
[16] 서적 이야기 독일사 청아출판사 2006
[17] 서적 스페인 역사 100장면 가람기획 2003-05-14
[18] 문서
[19] 서적 스페인 역사 100장면 가람기획 2003-05-14
[20] 서적 유럽의 첫 번째 태양 스페인 을류문화사 2015
[21] 서적 Spain 1474 - 1700 Heinemann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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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웹사이트 식민 시대 https://terms.na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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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서적 유럽의 첫 번째 태양 스페인 을류문화사 2015
[27] 서적 Conquista e Incorporación de Navarra a Castilla Pamiela 2012
[28] 서적 Europe in the Seventeenth Century Macmillan 1966
[29] 서적 Europe in the Seventeenth Century Macmillan 1966
[30] 웹사이트 피레네조약 https://terms.naver.[...]
[31] 서적 프랑스인의 역사 소나무 1991
[32] 서적 프랑스의 역사 까치글방 2013-03-11
[33] 서적 유럽의 첫 번째 태양 스페인 을류문화사 2015
[34] 서적 Louis XIV W.W. Norton & Company, Inc. 1968
[35] 서적 프랑스의 역사 까치글방 2013-03-11
[36] 웹사이트 루이 14세와 마리-테레즈의 결혼식 https://terms.naver.[...] 김복래 2006-08-10
[37] 서적 프랑스의 역사 까치글방 2013-03-11
[38] 서적 이야기 프랑스사 청아출판사 2005-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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