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디리쿠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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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피디리쿠 2세는 1296년 시칠리아 왕으로 즉위하여 1337년 사망할 때까지 재위한 인물이다. 그는 아라곤 왕국의 차남으로 태어나 시칠리아 섭정을 거쳐 왕위에 올랐으며, 앙주 가문과의 시칠리아 소유권 분쟁(시칠리아 만종 전쟁)을 겪었다. 1302년 칼타벨로타 조약을 통해 일시적인 평화를 얻었지만, 이후에도 교황과의 갈등과 앙주 가문과의 전쟁을 지속했다. 그는 행정 개혁과 시칠리아 의회의 권한 확대를 추진했으며, 그의 사후에는 아들 피에트로 2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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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디리쿠 2세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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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치 | |
칭호 | 시칠리아 왕 |
재위 기간 | 1295년 12월 11일 – 1337년 6월 25일 |
대관식 | 1296년 3월 25일 (팔레르모) |
이전 통치자 | 하이메 1세 |
다음 통치자 | 페드로 2세 |
가문 | |
왕가 | 바르셀로나 가문 |
아버지 | 페드로 3세 |
어머니 | 콘스탄차 데 시칠리아 |
배우자 | 엘레오노르 당주 |
자녀 | 콘스탄차, 키프로스 여왕 페드로 2세 만프레디, 아테네 공작 엘리자베트, 바이에른 공작부인 구글리엘모 2세, 아테네 공작 조반니, 란다초 공작 |
생애 | |
출생일 | 1272년 12월 13일 |
출생지 | 바르셀로나, 아라곤 왕국 |
사망일 | 1337년 6월 25일 |
사망지 | 파테르노, 시칠리아 왕국 |
매장지 | 카타니아 대성당 |
2. 생애
1285년 페드로 3세가 사망하면서 아라곤 왕국은 장남 알폰소 3세에게, 시칠리아 왕국은 차남 하이메 2세에게 넘어갔다. 1291년 알폰소 3세가 사망하자 하이메 2세가 아라곤 왕위를 계승했고, 페데리코는 시칠리아의 섭정이 되었다. 1296년 하이메 2세가 시칠리아 왕위를 포기하면서 페데리코는 시칠리아 왕 페데리코 2세로 즉위했다.
시칠리아 소유권을 둘러싼 앙주 가문과 바르셀로나 가문의 다툼(시칠리아 만종 전쟁)은 계속되었다. 나폴리 왕 카를로 1세와의 평화 교섭은 두 교황의 잇따른 죽음으로 중단되었다. 카를로 2세의 책략으로 교황은 아라곤 본국에 시칠리아 공격 명령을 내렸고, 아라곤에서 페데리코 2세를 위해 파견되었던 고관과 군대가 페데리코 토벌군으로 공격해 오는 위기에 처했지만, 페데리코는 이들을 간신히 물리쳤다.
이후 카를로 2세와 평화가 성립되어, 1302년 카를로 2세의 딸 엘레오노라 당주와 결혼했다. 1321년 장남 피에트로 2세를 공동 통치자로 임명한 후 국가 정비를 추진하고 주변 여러 나라의 간섭을 막는 데 성공했다.
2. 1. 초기 생애
프리드리히는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났다.1285년 그의 아버지가 죽자, 그는 아라곤 왕국을 그의 장남인 알폰소에게 물려주었고, 시칠리아는 차남인 하이메에게 물려주었다. 1291년 알폰소가 죽자 하이메는 아라곤의 왕이 되었고 프리드리히를 시칠리아의 섭정으로 남겨두었다. 앙주 가문은 나폴리를 중심으로 반도 지역에 영토를 가지고 시칠리아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며, 시칠리아를 차지하기 위한 아라곤 왕관과의 전쟁이 여전히 진행 중이었고, 아라곤 왕관은 이탈리아에서 성공을 거두었지만, 하이메의 스페인 내 위치는 내부 문제와 프랑스의 공격으로 매우 불안정해졌다. 나폴리의 샤를 2세와 평화 협상이 시작되었지만, 두 교황의 잇따른 죽음으로 중단되었다. 마침내 교황 보니파시오 8세의 후원 아래, 하이메는 수치스러운 조약을 체결했는데, 그 조약에 따르면 아라곤 왕관에 속한 나머지 영토에서 방해받지 않는 대가로 사르데냐와 코르시카의 소유를 약속받고, 시칠리아를 교황령에 넘겨주었다. 시칠리아는 앙주 가문이 차지하게 되었다. (아나니 조약, 1295년 6월 10일). 시칠리아인들은 1282년 (시칠리아 만종)에 몰아냈던 프랑스인에게 다시 넘겨지는 것을 거부했고, 섭정 프리드리히에게서 민족 지도자를 찾았다. 교황은 그에게 약속과 존엄성을 뇌물로 주려 했지만, 그는 신하들을 지키기로 결심했고, 1296년 팔레르모에서 귀족들에게 왕으로 즉위했다.
프리드리히는 하이메가 자신과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1298년, 바론과 도시들을 하이메에 대항하도록 하기 위해 메신저, 마운티너 페레즈 데 소사를 카탈루냐로 보냈다.[1] 마운티너는 옥시탄 문학의 시, 'Ges per guerra no.m chal aver consir'를 가지고 갔는데, 이는 카탈루냐의 지지자들과의 소통을 위한 것이었다. 이 통신은 폰스 휴를 수신자로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이며, 그 이유는 백작이 ( 'con d'Empuria'라는 제목으로) 'A l'onrat rei Frederic terz vai dir'이라는 응답을 썼고, 그 안에서 프리드리히의 재치와 외교술을 칭찬했지만, 그에게 그의 주군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1] 이 시적 거래는 보통 1296년 1월~3월, 봄 또는 8월로 추정되지만, 헤로니모 수리타는 17세기에 마운티너의 사절 파견을 1298년으로 명시적으로 기록했다.
2. 2. 시칠리아 왕 즉위
1291년 알폰소 3세가 사망하고, 하이메 2세가 아라곤 왕이 되면서, 페데리코가 시칠리아 섭정이 되었다. 1296년에 하이메 2세가 시칠리아 왕위를 포기하자, 페데리코가 시칠리아 왕 피데리쿠 2세로 즉위했다.시칠리아의 소유권을 둘러싼 앙주 가문과 바르셀로나 가문의 다툼(시칠리아 만종 전쟁)은 계속되었다. 나폴리 왕 카를로 1세에 의한 평화 교섭이 이루어졌지만, 잇따라 일어난 두 교황의 죽음으로 중단되었다. 카를로 1세의 아들 카를로 2세의 책략으로, 교황으로부터 아라곤 본국에 시칠리아 공격 명령이 내려져, 아라곤에서 피데리쿠 2세를 위해 파견되었던 고관과 군대가 그대로 피데리쿠 토벌군으로서 공격을 시작하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였지만, 피데리쿠의 분투로 간신히 물리치는 데 성공했다.
피데리쿠는 행정을 개혁하고 시칠리아 의회의 권한을 확대했는데, 이 의회는 남작, 교회 고위 성직자, 그리고 도시의 대표들로 구성되었다.[1] 그는 교황의 명령을 따르기를 거부했고, 이는 전쟁의 재개를 야기했다. 피데리쿠는 칼라브리아에 상륙하여 여러 도시를 점령하고, 나폴리 왕국에서 반란을 부추겼으며, 토스카나와 롬바르디아의 기벨린들과 협상했고, 교황 보니파키우스를 상대로 콜론나 가문을 지원했다.[1] 한편, 교회로부터 많은 은혜를 받은 하이메는 그의 누이 욜란다를 카를로스 2세의 셋째 아들 로베르토와 결혼시켰다.[1] 불행하게도 피데리쿠에게는 시칠리아의 카탈루냐-아라곤 귀족들 중 일부가 하이메 왕을 지지했고, 시칠리아 만종의 전쟁의 영웅인 프로치다의 조반니와 라우리아의 로제르가 앙주 가문으로 넘어갔으며, 후자는 오를란도 곶 해전에서 시칠리아 함대를 완전히 격파했다.[1] 카를로스의 아들 로베르토와 필리포가 시칠리아에 상륙했지만, 카타니아를 점령한 후 피데리쿠에게 패배했으며, 필리포는 포로로 잡혔고 (1299년), 여러 칼라브리아 도시가 시칠리아인들에게 점령되었다.[1]
그 후 2년 동안 전투는 성공과 실패를 반복했고, 보니파키우스가 시칠리아를 침공하기 위해 보낸 발루아의 샤를이 질병으로 군대가 궤멸되어 평화를 구걸할 수밖에 없었다.[1] 1302년 8월, 칼타벨로타 조약이 체결되었는데, 이 조약에 따라 피데리쿠는 생존 기간 동안 트리나크리아 왕국(시칠리아라는 이름은 사용되지 않음)의 왕으로 인정받았으며, 나폴리의 카를로스 2세와 헝가리의 아르파드 마리아의 딸인 앙주의 엘레오노르와 결혼하게 되었다.[2] 피데리쿠가 죽으면 왕국은 앙주 가문에게 반환될 예정이었고 (이 조항은 주로 카를로스가 체면을 유지할 수 있도록 삽입되었다), 피데리쿠의 자녀들은 다른 곳에서 보상을 받게 되었다.[2] 보니파키우스는 카를로스 왕에게 조약을 깨도록 유도하려 했지만, 그는 평화를 간절히 원했다.[1] 마침내, 1303년 5월, 교황은 피데리쿠가 그에게 공물을 바치는 것에 동의하는 등 변경 사항과 추가 사항을 포함하여 조약을 비준했다.[1]
몇 년 동안 시칠리아는 평화를 누렸고, 왕국은 재조직되었다.[1] 1321년에 장남 피에트로 2세를 공동 통치자로 임명한 후, 국가 정비를 추진하고, 주변 여러 나라의 간섭을 막는 데 성공했다.
2. 3. 앙주 가문과의 전쟁
프리드리히 2세는 시칠리아 만종 전쟁 이후 앙주 가문과의 분쟁 속에서 시칠리아의 통치권을 두고 지속적인 전쟁을 벌였다. 초기에는 교황의 명령을 거부하며 칼라브리아를 점령하고 나폴리 왕국 내 반란을 선동하는 등 군사적 우위를 점하기도 했다.프로치다의 조반니와 라우리아의 로제르 등 주요 인물들이 앙주 가문으로 전향하고, 오를란도 곶 해전에서 시칠리아 함대가 패배하면서 상황이 불리해졌다. 프리드리히 2세는 카타니아를 점령한 후 로베르토와 필리포를 상대로 승리하며 필리포를 포로로 잡는 등 반격에 성공했다.
1302년, 칼타벨로타 조약이 체결되어 프리드리히 2세는 트리나크리아 왕국(시칠리아)의 왕으로 인정받고, 앙주의 엘레오노르와 결혼하게 되었다. 이 조약에는 프리드리히 2세 사후 왕국이 앙주 가문에 반환된다는 내용이 포함되었으나, 이는 카를로스 2세의 체면을 위한 조항이었다. 1303년 교황은 프리드리히 2세가 공물을 바치는 조건으로 조약을 비준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7세가 이탈리아로 오자 프리드리히 2세는 그와 동맹을 맺고 다시 앙주 가문과 전쟁을 벌였다. 1313년 레조 칼라브리아를 점령하는 등 성과를 거두었으나, 황제의 사망으로 상황이 바뀌었다. 1321년에 장남 피에트로 2세를 공동 통치자로 임명하였다.
이후 교황 요한 22세의 파문과 교황령 금지령 선포, 앙주 가문의 지속적인 공격 등 어려움 속에서도 프리드리히 2세는 시칠리아를 방어했다. 1337년 프리드리히 2세 사후, 칼타벨로타 평화 조약에도 불구하고 아들 시칠리아의 피터 2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2. 4. 칼타벨로타 조약
1302년 8월, 칼타벨로타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에 따라 프리드리히는 생존 기간 동안 트리나크리아 왕국(시칠리아라는 이름은 사용되지 않음)의 왕으로 인정받았으며, 나폴리의 카를로스 2세와 헝가리의 아르파드 마리아의 딸인 앙주의 엘레오노르와 결혼하게 되었다. 프리드리히가 죽으면 왕국은 앙주 가문에게 반환될 예정이었고(이 조항은 주로 카를로스가 체면을 유지할 수 있도록 삽입되었다), 프리드리히의 자녀들은 다른 곳에서 보상을 받게 되었다. 보니파키우스는 카를로스 왕에게 조약을 깨도록 유도하려 했지만, 그는 평화를 간절히 원했다. 마침내, 1303년 5월, 교황은 프리드리히가 그에게 공물을 바치는 것에 동의하는 등 변경 사항과 추가 사항을 포함하여 조약을 비준했다.2. 5. 조약 이후의 갈등
프리드리히 2세는 교황의 명령을 따르기를 거부했고, 이는 전쟁의 재개를 야기했다. 프리드리히는 칼라브리아에 상륙하여 여러 도시를 점령하고, 나폴리 왕국에서 반란을 부추겼으며, 토스카나와 롬바르디아의 기벨린들과 협상했고, 교황 보니파키우스를 상대로 콜론나 가문을 지원했다. 교회로부터 많은 은혜를 받은 자코모는 그의 누이 욜란다를 카를로스 2세의 셋째 아들 로베르토와 결혼시켰다. 불행하게도 프리드리히에게는 시칠리아의 카탈루냐-아라곤 귀족들 중 일부가 자코모 왕을 지지했고, 시칠리아 만종의 전쟁의 영웅인 프로치다의 조반니와 라우리아의 로제르가 앙주 가문으로 넘어갔으며, 후자는 오를란도 곶 해전에서 시칠리아 함대를 완전히 격파했다. 카를로스의 아들 로베르토와 필리포가 시칠리아에 상륙했지만, 카타니아를 점령한 후 프리드리히에게 패배했으며, 필리포는 포로로 잡혔고 (1299년), 여러 칼라브리아 도시가 시칠리아인들에게 점령되었다.그 후 2년 동안 전투는 성공과 실패를 반복했고, 보니파키우스가 시칠리아를 침공하기 위해 보낸 발루아의 샤를은 질병으로 군대가 궤멸되어 평화를 구걸할 수밖에 없었다. 1302년 8월, 칼타벨로타 조약이 체결되었는데, 이 조약에 따라 프리드리히는 생존 기간 동안 트리나크리아 왕국 (시칠리아라는 이름은 사용되지 않음)의 왕으로 인정받았으며, 나폴리의 카를로스 2세와 헝가리의 아르파드 마리아의 딸인 앙주의 엘레오노르와 결혼하게 되었다. 프리드리히가 죽으면 왕국은 앙주 가문에게 반환될 예정이었고 (이 조항은 주로 카를로스가 체면을 유지할 수 있도록 삽입되었다), 프리드리히의 자녀들은 다른 곳에서 보상을 받게 되었다. 보니파키우스는 카를로스 왕에게 조약을 깨도록 유도하려 했지만, 그는 평화를 간절히 원했다. 마침내, 1303년 5월, 교황은 프리드리히가 그에게 공물을 바치는 것에 동의하는 등 변경 사항과 추가 사항을 포함하여 조약을 비준했다.,
몇 년 동안 시칠리아는 평화를 누렸고, 왕국은 재조직되었다. 그러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7세가 이탈리아로 내려오자 프리드리히는 그와 동맹을 맺고, 칼타벨로타 조약을 위반하여 다시 앙주 가문과 전쟁을 벌여 (1313년) 레조 칼라브리아를 점령했다. 그는 황제와 협력하기 위해 토스카나로 항해했지만, 황제가 사망하자 시칠리아로 돌아왔다. 1309년에 카를로스 2세를 계승한 로베르토는 섬을 여러 차례 습격하여 물질적인 피해를 입혔다. 1317년에 휴전이 체결되었지만, 시칠리아인들이 북부 이탈리아 기벨린들의 제노바 공격을 도왔고, 프리드리히가 군사적 목적으로 교회의 수입을 압류했기 때문에 교황 요한 22세는 그를 파문하고 섬에 교황령 금지령을 내렸으며 (1321년) 이 금지령은 1335년까지 지속되었다. 로베르토의 아들 칼라브리아 공작 카를 휘하의 앙주 함대와 군대는 1325년 팔레르모에서 조반니 다 키아라몬테에게 패배했으며, 1326년과 1327년에는 앙주 가문의 추가적인 섬 습격이 있었지만, 다음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바이에른의 루이가 이탈리아로 내려오면서 그들의 관심은 분산되었다. 프리드리히에게 우호적인 교황 베네딕토 12세의 선출 (1334년)은 휴식을 약속했지만, 결실 없는 협상 끝에 전쟁이 다시 발발했고, 키아라몬테는 개인적인 불화로 인해 로베르토에게 넘어갔다.
3. 가족
앙주의 엘레오노르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는 다음과 같다.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페트로 | 1304년 | 1342년 | 시칠리아 왕, 계승자 |
로제 | 1305년 | 요절 | |
만프레드 | 1306년 | 1317년 | 아테네 공작, 네오파트라 공작 |
콘스탄체 | 1307년 이후 | 1344년 6월 19일 | 키프로스의 앙리 2세, 아르메니아의 레오 4세, 루지냥의 존과 결혼 |
엘리자베트 | 1310년 | 1349년 | 바이에른의 슈테판 2세와 결혼 |
윌리엄 | 1312년 | 1338년 | 타란토 공, 아테네 공작, 네오파트라 공작 |
존 | 1317년 | 1348년 | 란다초 공작, 아테네 공작, 네오파트라 공작, 시칠리아 섭정(1338년부터) |
카테리나 | 1320년 | 1342년 | 메시나의 산타 키아라 수도원장 |
마르가레테 | 1331년 | 1377년 | 팔라티네의 루돌프 2세와 결혼 |
참조
[1]
서적
Riquer
1687-1688
[2]
서적
北原、p. 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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