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로 2세 (나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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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를로 2세는 1254년 앙주 백작 샤를 1세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시칠리아 왕국 등을 통치하는 아버지의 광대한 영토를 물려받았다. 1284년 나폴리 만 해전에서 아라곤 해군에 포로로 잡혔고, 1289년 교황 니콜라오 4세로부터 시칠리아 왕으로 대관받았으나 실질적인 지배권을 확보하지 못했다. 그는 헝가리 왕위 계승 분쟁에 개입하여 아들 카를로 마르텔로를 헝가리 왕으로 임명하기도 했으며, 시칠리아 왕위 분쟁을 겪은 후 1302년 칼타벨로타 평화 조약을 통해 페데리코 2세와 평화 협정을 맺고 시칠리아 섬에 대한 권리를 포기했다. 그는 1270년 마리아와 결혼하여 14명의 자녀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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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 2세 (나폴리)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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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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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카를로 2세 |
통치 정보 | |
작위 | 나폴리 왕 프로방스 백작 및 포르칼키에 백작 |
통치 기간 | 1285년 1월 7일 – 1309년 5월 6일 |
대관식 | 1289년 5월 29일 |
이전 통치자 | 카를로 1세 |
다음 통치자 | 로베르토 |
작위 1 | 앙주 백작 및 멘 백작 |
통치 기간 1 | 1285년 1월 7일 – 1290년 8월 16일 |
이전 통치자 1 | 카를로 1세 |
다음 통치자 1 | 마르게리타 & 샤를 3세 |
작위 2 | 아카이아 공 |
통치 기간 2 | 1285년 1월 7일 – 1289년 9월 16일 |
이전 통치자 2 | 카를로 1세 |
다음 통치자 2 | 이사벨와 플로렝 |
작위 3 | 알바니아 왕 |
통치 기간 3 | 1285년 1월 7일 – 1294년 8월 13일 |
이전 통치자 3 | 카를로 1세 |
다음 통치자 3 | 필리포 1세 디 타란토 후작 |
가문 | |
왕가 | 앙주-나폴리 가문 |
아버지 | 카를로 1세 |
어머니 | 베아트리스 드 프로방스 |
개인 정보 | |
출생 | 1254년 |
사망 | 1309년 5월 5일 |
사망 장소 | 나폴리, 나폴리 왕국 |
배우자 | 마리아 둥게리아 |
자녀 | 카를로 마르텔로, 살레르노 공 마르게리타 성 루이 드 툴루즈 로베르토 1세 필리포 1세 디 타란토 블랑카, 아라곤 왕비 라이몬도 베렌가리오 엘레오노라, 시칠리아 왕비 마리아, 마요르카 왕비 피에트로 템페스타 조반니 디 두라초 |
2. 초기 생애
1254년 카를로는 앙주 백작 샤를 1세와 프로방스의 베아트리체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의 광대한 영토의 유일한 상속자였다. 카를로가 태어날 무렵, 그의 아버지는 프로방스 백국과 포르칼키에 백국(신성 로마 제국), 앙주 백국과 메인 백국(프랑스), 그리고 시칠리아 왕국(성좌의 봉토)을 점령했다. 1270년대에 그의 아버지는 알바니아 왕을 자칭했으며(이오니아해 동쪽 해안을 따라 정복한 것을 언급), 예루살렘 왕국에 대한 권리를 부분적으로 주장했고, 아카이아 공국(펠로폰네소스)을 상속받았다. 카를로의 어머니는 1267년에 사망했지만, 아버지의 제국을 유지하려는 결단력으로 인해 카를로는 아버지 생전에 어머니의 유산을 받지 못했다.
1279년 말, 카를로 2세는 아버지 샤를 1세에 의해 프로방스 관리자로 임명되었다. 1282년 시칠리아 만종 사건으로 아버지 샤를 1세가 시칠리아 섬에서 축출되자, 아버지와 함께 나폴리로 피신했다. 1283년 1월, 아버지 샤를 1세가 프랑스로 떠나면서 카를로 2세는 사촌 아르투아 백작 로베르 2세와 함께 공동 섭정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교황 대사 제라드와 협력하여 반란 확산을 막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1284년 나폴리 만 해전에서 아라곤 해군에게 패배하여 포로로 잡혔다. 메시나에서 콘라딘 처형에 대한 복수를 요구하는 군중에 의해 처형될 위기에 처했으나, 시칠리아의 콘스탄스 왕비의 도움으로 체팔루 요새에 감금되었다.
교황 니콜라우스 4세는 1289년 성령 강림 대축일에 리에티에서 카를로를 왕으로 즉위시켰다. 교황은 카를로가 시칠리아를 위한 전쟁을 계속하도록 설득하기 위해 남부 이탈리아에서 나오는 교회 수입의 10분의 1을 그에게 주었으며, 카를로가 석방을 위해 했던 약속 또한 면제했다.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는 교황의 결정에 항의했고, 카를로와 아라곤의 알폰소 3세 사이에서 중재를 계속했다. 에드워드의 요청에 따라 알폰소 3세는 카를로의 다섯째 아들인 라몽 베렝게르와 교환하여 카를로 마르텔을 석방했다.
1282년 아버지 카를로 1세가 시칠리아 만종 사건으로 시칠리아에서 쫓겨난 후, 아버지와 함께 나폴리로 도망쳐 아라곤 왕 페드로 3세와 맞서 싸웠다. 그러나 1284년 아라곤 해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포로로 잡혔다.
카를로 2세는 왕비 마리아가 헝가리 왕 이슈트반 5세의 딸이라는 점을 이용하여 헝가리 왕위 계승 분쟁에 개입했다. 1290년 매형 헝가리의 라슬로 4세가 살해당하자, 아내 마리아를 헝가리의 합법적인 상속인으로 내세웠다. 헝가리가 교황청의 봉토라고 주장하면서, 교황 니콜라오 4세는 1292년에 헝가리를 그의 아들 카를로 마르텔로에게 주었다. 헝가리와 연합한 크로아티아와 슬라보니아(헝가리 왕이 통치하는 두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귀족들이 교황의 결정을 받아들였다. 카를로는 그들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그들에게 기부했지만, 카를로 마르텔로는 결코 자신의 주장을 주장할 수 없었다. 카를로 마르텔로는 1295년에 사망했지만, 후에 그의 아들 카로이 1세가 헝가리 왕이 된다.
카를로 2세는 아버지로부터 아카이아 공국을 계승했지만, 1289년 동생 필리포 (1277년 사망)의 미망인 이자벨 드 빌아르두앵이 라틴 제국 계승자의 친족 플로랑 드 에노와 재혼하자, 아카이아 공국을 양도했다. 그러나 1297년 플로랑이 사망한 후, 1301년에 이자벨이 필리포 드 사부아와 세 번째 결혼하여 공동 통치를 시작한 것에 반대하며, 1306년6월 5일 아들 타란토 공작 필리포 1세를 아카이아 공작으로 임명했다.
1309년 5월 나폴리에서 사망했으며, 삼남 현명왕 로베르토가 나폴리 왕위를 계승했다. 장손 카를 1세는 나폴리 왕위 계승에서 제외되었다.
카를로 2세는 1270년 헝가리의 마리아(이슈트반 5세의 딸)와 결혼하여 14명의 자녀를 두었다.
1269년 샤를 1세는 헝가리의 이슈트반 5세와 이중 결혼 동맹을 맺었다. 이슈트반의 딸인 마리아는 카를로와 약혼했고, 카를로의 여동생인 이자벨은 마리아의 오빠인 헝가리의 라슬로 4세와 약혼했다. 1271년 말 카를로는 심각한 병에 걸렸다. 그의 회복을 위한 기도를 장려하기 위해 그의 아버지는 카를로의 밀랍 조각상을 왕국 전체의 순례자들이 자주 찾는 교회에 기증했다. 카를로가 회복된 후, 그의 아버지는 바리에 있는 성 니콜라스의 성지 순례를 했고, 로카마두르에 있는 성모 마리아의 성소에 선물을 보냈다.
1272년 성령 강림절에 카를로는 형제 시칠리아의 필리프와 함께 100명의 이탈리아 및 프랑스 젊은 귀족들과 함께 기사 작위를 받았다. 이 때 아버지 샤를 1세는 그에게 살레르노 공국을 하사했는데, 이는 시칠리아 노르만 왕조 통치 기간 동안 상속자가 관습적으로 보유했던 곳이었다. 국왕은 카를로가 다른 영토, 아마도 프로방스를 언급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영토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고 규정했다.
3. 섭정
카를로 2세는 산 마르티노 디 타우리 아노바에서 남작, 성직자, 도시 사절을 위한 회의를 열어 왕국의 개혁을 추진했다. 이 회의에서 소금의 왕실 독점과 소액 동전의 정기적 교환 관행이 폐지되었다. 또한, 군주가 가장 인기 없는 세금인 ''서브벤티오 제네랄리스''를 신민의 대표와 협의한 후에만 부과할 수 있도록 결정했다. 귀족과 성직자의 자유가 확인되었고, 왕실 요새와 함대 유지를 위해 기여해야 하는 평민의 의무가 감소했다.
카를로 2세는 나폴리 만 해전에서 아라곤 해군에 패배하여 포로로 잡혔다. 그는 메시나로 끌려갔으나, 시칠리아의 콘스탄스 (아라곤의 페드로 3세의 아내)의 도움으로 체팔루 요새에 갇혀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4. 포로 생활
1285년 아버지 샤를 1세가 사망하자, 교황 마르티노 4세는 카를로 2세의 왕위 계승권을 인정하지 않고 왕국을 공석으로 선언했다. 1286년 7월,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의 중재로 14개월간의 휴전이 체결되었다. 1288년 캉프랑 조약을 통해 석방 조건에 합의했으나, 프랑스의 필리프 4세와 교황 니콜라 4세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같은 해 10월, 캉프랑 조약이 체결되어 석방되었으나, 프랑스와의 협상을 위해 다시 프랑스로 돌아갔다.
5. 나폴리 국왕 즉위
바르톨로메오 다 카푸아 등의 조언자들의 영향으로 카를로는 순수한 기독교 왕국 건설에 대한 개념을 채택했다. 그는 유대인과 롬바르드인들을 앙주와 메인에서 추방하라고 명령했고, 그들을 고리대금업 혐의로 비난했으며, 유대인들이 기독교인들과 "무작위로 거주"하고 기독교 여성과 동거했다고 비난했다. 그는 유대인의 추방을 잃어버린 수입에 대한 "보상"으로 일반적인 인구 과세와 연결시켰으며, 혈통 비방을 남부 이탈리아의 유대인들에게 적용하여 그들 중 많은 사람들에게 기독교로 개종하도록 강요했다. 또한 종교 재판을 레그노에 도입했다.
1288년, 시칠리아를 완전히 포기한다는 조건으로 석방되어, 이미 사망한 아버지의 뒤를 이어 나폴리 왕으로 즉위했다. 그러나 아버지 이래의 숙원인 시칠리아 탈환을 포기하지 않고, 1289년에는 교묘한 정치 공작으로 로마 교황니콜라오 4세로부터 시칠리아 왕으로 대관을 받았다.
6. 시칠리아 왕위 분쟁
1288년 시칠리아를 완전히 포기한다는 조건으로 석방되어 이미 사망한 아버지의 뒤를 이어 나폴리 왕으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아버지 때부터의 숙원이었던 시칠리아 탈환을 포기하지 않고, 1289년에는 교묘한 정치 공작으로 로마 교황 니콜라오 4세로부터 시칠리아 왕으로 대관을 받았다. 1289년 성령 강림 대축일에 리에티에서 카를로를 왕으로 즉위시킨 교황은 카를로가 시칠리아를 위한 전쟁을 계속하도록 설득하기 위해 남부 이탈리아에서 나오는 교회 수입의 10분의 1을 그에게 주었으며, 석방을 위해 했던 약속을 면제했다.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는 교황의 결정에 항의했고, 카를로와 아라곤의 알폰소 3세 사이에서 중재를 계속했다. 에드워드의 요청에 따라 알폰소 3세는 카를로의 다섯째 아들인 라몽 베렝게르와 교환하여 카를로 마르텔을 석방했다.
또한, 왕비인 헝가리 왕 이슈트반 5세의 딸 마리아와의 사이에서 얻은 장남 카를로 마르텔로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돌프 1세의 딸 클레멘치아와 결혼시킨 다음, 헝가리 섭정을 칭하며 동국의 왕위 계승 분쟁에 개입했다. (카를로 마르텔로는 1295년에 23세로 사망했지만, 후에 그의 아들 카를로 로베르토가 헝가리 왕 카로이 1세가 된다).
이러한 정세를 배경으로, 페드로 3세의 삼남인 시칠리아 왕 페데리코 2세와 싸웠지만, 시칠리아를 탈환할 수 없었다. 1295년에 차녀 비앙카를 아라곤 왕 하이메 2세 (페드로 3세의 차남으로 페데리코 2세의 형, 당시 시칠리아 왕을 겸임)와, 1297년에 삼남 로베르토를 페데리코 2세의 여동생 욜란다와, 1302년에 삼녀 엘레오노라를 페데리코 2세와 각각 결혼시켜, 아라곤 가문과의 평화를 도모했다.
7. 헝가리 왕위 계승 분쟁 개입
8. 아카이아 공국 통치
9. 사망
10. 가족 관계
이름 출생 사망 비고 카를로 마르텔로 1271년 1295년 명목상 헝가리 왕, 24세 사망 마르게리타 1273년 1299년 앙주와 메인 백작부인, 1290년 발루아의 샤를과 결혼 생 루이 1274년 1298년 툴루즈 주교 로베르토 1세 1276년 1343년 나폴리 왕 타란토의 필리프 1세 1278년 1331년/1332년 아카이아와 타란토의 왕자, 루마니아의 데스팟, 두라초의 영주,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명목 황제 앙주의 블랑슈 1280년 1310년 1295년 아라곤의 차이메 2세와 결혼 레이몬드 베렝가르 1281년 1307년 프로방스 백작, 피에몬테와 안드리아의 군주 존 1283년 1308년 신부 트리스탄 1284년 1288년 앙주의 엘리노르 1289년 1341년 1302년 시칠리아의 프레드릭 3세와 결혼 나폴리의 마리아 1290년 1346년경 1304년 마요르카의 산초 1세와 결혼, 1326년 자이메 데 에제리카와 결혼 피터 1291년 1315년 몬테카티니 전투에서 사망, 그라비나 백작 그라비나의 요한 1294년 1336년 두라초 공작, 아카이아의 왕자, 그라비나 백작, 1318년 에노의 마틸다와 결혼(1321년 이혼), 1321년 페리고르드의 아그네스와 결혼 베아트리체 1295년 1321년경 1305년 페라라의 마르체스 아조 8세와 결혼, 1309년 보의 베르트랑 3세와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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