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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보니파시오 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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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1294년부터 1303년까지 재위한 로마 가톨릭교회 교황이다. 그는 교회법을 정비하고 1300년 희년을 선포하는 등 교회 행정에 기여했으나, 교황권 지상주의를 내세우며 프랑스 왕 필리프 4세와 갈등을 겪었다. 이로 인해 아나니 사건을 겪고 사망했으며, 그의 재위 기간은 교황권의 쇠퇴를 초래한 중요한 시기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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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보니파시오 8세 - [인물]에 관한 문서
교황 정보
이름보니파시오 8세
본명베네데토 가에타니
지오토, 보니파시오 8세가 1300년 희년을 선포하는 모습, 조각 02
보니파시오 8세가 라테라노 대성전에서 조토의 프레스코화로 희년을 선포하는 모습
재임 기간 시작1294년 12월 24일
재임 기간 종료1303년 10월 11일
이전 교황첼레스티노 5세
다음 교황베네딕토 11세
축성일1295년 1월 23일
축성자위그 아이셀린
추기경 임명일1281년 4월 12일
추기경 임명자마르티노 4세
이전 직책산 니콜라 인 카르체레 성당의 추기경 부제 (1281년–1291년)
산티 실베스트로 에 마르티노 아이 몬티 성당의 추기경 사제 (1291년–1294년)
출생일1230년경
출생지아나니, 교황령
사망일1303년 10월 11일
사망지로마, 교황령
추가 정보
교회가톨릭 교회
로마자 표기Bonifatius PP. VIII

2. 이력

(내용 없음)

2. 1. 초기 생애

베네데토 가에타니는 1235년경 로마에서 남동쪽으로 약 50km 떨어진 아나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교황령남작 가문인 가에타니 가문의 로프레도 가에타니였고, 어머니는 교황 알렉산데르 4세의 조카딸인 에밀리아 파트라소 디 과르치노였다.[1][2] 베네데토는 외삼촌인 프라 레오나르도 파트라소의 보살핌 아래 벨레트리에 있는 작은형제회 수도원에 들어가면서 교회에 첫 발을 들였다.[3]

1252년, 그의 아버지 쪽 삼촌인 피에트로 가에타니가 움브리아주 토디의 주교가 되자, 베네데토는 그를 따라 토디로 가서 법학 공부를 시작했다.[5] 그는 교황 알렉산데르 4세의 허락을 받아 고향 아나니 대성당의 의전사제회 회원이 되었으며[4], 1260년에는 삼촌 피에트로에 의해 토디 대성당의 의전사제회 회원으로 임명되었다.[5] 또한 그는 21개의 화로(가구)가 있는 작은 시스마노 성을 소유하기도 했다.[5] 베네데토는 토디에서의 생활을 잊지 않았으며, 훗날 그 도시를 "어린 시절의 거주지"이자 자신을 "키워준 곳"으로 언급하며 애정을 나타냈다.

2. 2. 교황청 경력

1264년 베네데토 가에타니는 교회 법률가(아보카투스)로서 로마 교황청에 등용되었다.[6] 그는 훗날 교황 마르티노 4세가 되는 시몽 드 브리옹 추기경의 비서로서 프랑스로 파견되는 길에 동행하였다.[7] 시몽 추기경은 교황 우르바노 4세에 의해 나폴리시칠리아의 왕위를 둘러싸고 앙주의 샤를과 협상하는 임무를 맡았다.

1265년에는 훗날 교황 하드리아노 5세가 되는 오토보노 피에스키 추기경과 함께 잉글랜드로 파견되었다.[13] 오토보노 추기경은 교황 클레멘스 4세에 의해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아일랜드교황 특사로 임명되었으며,[11] 베네데토는 그를 수행했다. 이들은 제2차 남작 전쟁 이후 헨리 3세 국왕에 대항했던 시몽 드 몽포르의 잔존 세력을 처리하는 임무를 도왔다. 베네데토는 잉글랜드에 머무는 동안 노샘프턴셔주 토우스터에 있는 세인트 로렌스 성당의 주임 사제를 지내기도 했다.[15][16]

잉글랜드에서 돌아온 후 약 8년간 그의 행적은 명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시기는 교황 공석기(1268년-1271년)와 교황 그레고리오 10세의 재위 기간 일부와 겹친다. 1276년, 베네데토는 십일조 징수를 감독하기 위해 다시 프랑스로 파견되었으며,[17] 1270년대 후반에는 교황청 공증인으로 임명되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여러 성직록을 축적했다.

1281년 4월 12일, 교황 마르티노 4세오르비에토에서 베네데토 가에타니를 산 니콜라 인 카르체레 성당의 부제급 추기경으로 서임하였다.[19] 1288년에는 교황 특사로서 움브리아에 파견되어 구엘프와 기벨린으로 나뉘어 분쟁하던 페루자폴리뇨 사이를 중재했다.[20] 1289년 겨울에는 포르투갈의 주교 서임권 분쟁과 관련하여 교황 니콜라오 4세의 고문 중 한 명으로 활동했으며, 다른 추기경들과 함께 교황의 최종 결정문에 서명하고 날인하였다.[21]

1291년 9월 22일, 교황 니콜라오 4세는 그를 산 마르티노 인 산 실베스트로 성당(SS. Silvestro e Martino)의 사제급 추기경으로 승품시켰다.[23] 추기경단 규모가 작았기 때문에 그는 기존의 부제급 추기경직인 산 니콜라 인 카르체레 성당의 명의 사제직(in commendam)도 계속 유지했다.[24] 추기경이 된 후 그는 교황 특사로서 프랑스, 나폴리, 시칠리아, 아라곤 등과의 외교 교섭에 참여하며 활동했다.[80]

3. 교황 선출

보니파시오 8세의 인장


1294년 12월 13일 교황 첼레스티노 5세나폴리에서 교황직 사임을 공식 발표하였다. 당시 나폴리에 있었던 루카의 바르톨로메오는 베네데토 가에타니(훗날의 보니파시오 8세)가 첼레스티노 5세에게 사임을 종용한 여러 추기경 중 한 명이었다고 증언했다.[98][25] 일각에서는 가에타니가 부하를 시켜 교황의 침실까지 전성관을 연결하고 밤마다 "즉시 교황직을 사임하고 은자의 생활로 돌아가라"고 속삭여 첼레스티노 5세를 압박하고 신경쇠약으로 몰아넣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80] 그러나 첼레스티노 5세가 전문가들과 상의 후 자신의 자유 의사에 따라 사임했으며, 가에타니는 단지 교황의 사임이 교회법상 가능하다는 점을 조언했을 뿐이라는 기록도 있다.[98][79]

첼레스티노 5세가 물러난 지 10일 후인 1294년 12월 23일, 나폴리의 카스텔 누오보에서 콘클라베가 시작되었다. 당시 교황 선출 규정(우비 페리쿨룸)에는 교황 사임에 대한 명확한 조항이 없었으나, 추기경단은 교황 선종 시의 규례에 따라 10일을 기다려 22명 전원이 모였다. 1294년 교황 선거에서 베네데토 가에타니는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에 교황으로 선출되어 '''보니파시오 8세'''라는 이름을 선택했다. 그는 첫 투표에서 과반수 표를 얻었으며, 이후 '악체시오'(accessio) 절차를 통해 선출에 필요한 3분의 2 이상 득표를 확보했다.[99]

보니파시오 8세는 즉시 교황청을 로마로 옮겼으며, 1295년 1월 23일 로마에서 주교로 서품되었다.[100][28] 같은 날 바티칸 대성당에서 교황 대관식을 가졌다. 교황 즉위 후 첫 조치 중 하나는 전임자 첼레스티노 5세를 페렌티노 인근의 푸모네 성에 머물도록 한 것이었다. 첼레스티노 5세는 그곳에서 사실상 감금 생활을 하다가 1296년 5월 19일 81세의 나이로 선종했다.[29][30]

4. 교황 재위 기간의 주요 사건 및 정책

추기경들 앞에서 갈바노 다 레반토로부터 의학 서적을 받는 보니파시오 8세. 실제 헌정본의 세밀화


보니파시오 8세는 교황으로서 영적 권위뿐만 아니라 세속적 권위에 대한 강력한 주장을 펼쳤다. 그는 외교 문제에 자주 관여했으며, 특히 1302년 교황 칙서인 ''우남 상탐''을 통해 교회의 단일성과 구원을 위한 필수성을 강조하며 "모든 인간은 로마 교황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선언했다.[36] 이는 교황의 절대적인 우위를 주장한 것으로, 당시 유럽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러한 교황권 강화 시도와 세속 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은 독일알브레히트 1세, 프랑스필리프 4세 등 여러 군주와의 격렬한 갈등으로 이어졌다. 또한, 시인 단테 알리기에리는 교황의 강력한 권력 주장에 반발하여 그의 정치 논문 ''군주론''을 저술하기도 했다.

보니파시오 8세의 재위 기간은 여러 주요 갈등으로 점철되었다. 로마의 유력 귀족 가문인 콜론나 가문과의 갈등은 가문 내 상속 분쟁에서 시작하여 교황 선출의 정통성 문제로까지 비화되었고, 결국 무력 충돌과 콜론나 가문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상세 내용은 #콜론나 가문과의 갈등 참조)

또한, 시칠리아 왕국의 왕위 계승 문제에 깊이 관여하여 아라곤 연합 왕국 및 시칠리아의 프리드리히 3세와 대립했으며,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에서는 잉글랜드에드워드 1세에 맞서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지지하는 입장을 취하기도 했다. (상세 내용은 #시칠리아 및 이탈리아 문제,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 개입 참조)

가장 첨예했던 갈등은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와의 충돌이었다. 전쟁 비용 마련을 위한 프랑스 교회의 과세 문제로 촉발된 이 갈등은 교황권과 성장하는 왕권 사이의 정면 대결 양상으로 발전했다. 이 과정에서 ''클레리키스 라이코스'', ''아우스쿨타 필리'', ''우남 상탐'' 등 중요한 교황 칙서들이 반포되었고, 프랑스에서는 최초의 삼부회가 소집되는 등 중세 유럽 정치사에 중요한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했다. (상세 내용은 #필리프 4세와의 갈등 참조)

한편, 보니파시오 8세는 1300년 로마에서 가톨릭 역사상 첫 번째 희년을 선포하였다. 이 행사는 유럽 전역에서 수많은 순례자를 로마로 불러 모았고, 교황청의 재정을 크게 확충하는 데 기여했다. (상세 내용은 #희년 선포 참조)

교황은 재임 기간 동안 총 다섯 차례에 걸쳐 추기경을 임명했는데, 주로 자신의 친척이나 이탈리아 출신 인물들을 중용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는 프랑스 세력의 영향력을 견제하고 교황청 내 권력 기반을 다지려는 의도로 해석된다.[38]

4. 1. 교회법 정비

교회법 분야에서 보니파시오 8세는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1234년 교황 그레고리오 9세가 교황의 권위로 《그레고리오 9세 칙령집》(Decretales Gregorii IX)을 반포했으나, 이후 60년 동안 후임 교황들에 의해 많은 칙령이 추가로 반포되었다. 이에 보니파시오 8세 시대에 이르러 새로운 칙령집 편찬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102]

1298년, 보니파시오 8세는 이러한 필요에 부응하여 새로운 법령집 편찬을 지시했다. 이 법령집은 이전 교황들의 칙령과 보니파시오 8세 자신이 반포한 88개 칙령, 그리고 '법률 규칙'(Regulæ Iuris|레굴라이 유리스la)으로 알려진 주요 법률 원칙 모음집을 포함하여 총 여섯 권으로 구성되었다.[32][102] 이렇게 편찬된 법령집이 바로 《교회 법령집 제6서》(Liber Sextus)이다.[33][103]

《교회 법령집 제6서》는 오늘날까지도 교회법 전문가들이 교회법을 정확하게 해석하고 분석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활용된다. 특히 제6서 말미에 포함된 '법률 규칙'(Regulæ Iuris|레굴라이 유리스la)[104][34]은 '아무도 불가능한 일에 대해 의무를 질 수 없다'(Nemo potest ad impossibile obligari|네모 포테스트 아드 임포시빌레 오블리가리la)와 같은 간결한 법 격언 형태로 제시되며, 현재 《옛 교회 법전》(Corpus Juris Canonici) 제5권 말미에도 실려 있다.[104] 이러한 법률 규칙은 다른 법 체계에서도 유사한 형태로 발견된다.

4. 2. 콜론나 가문과의 갈등

로마의 유력 귀족 가문인 콜론나 가문은 신임 교황 보니파시오 8세에게 여러 이유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보니파시오 8세의 오만한 태도가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했지만, 아라곤 파에 속했던 콜론나 가문은 교황의 시칠리아 정책에도 반대했다.[79] 또한, 그들은 전임 교황 첼레스티노 5세의 사임 과정에 주목하여, 그 사임이 전례가 없고 교회법에 위배될 수 있다고 주장하며 보니파시오 8세의 교황 선출 정통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만약 첼레스티노 5세의 퇴임이 불법이라면, 보니파시오 8세의 지위 역시 흔들릴 수 있었다.[81] 보니파시오 8세는 이러한 도전에 맞서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고자 전임 교황 첼레스티노 5세를 로마 남동쪽 푸모네 성의 감옥에 가두었다.[79][82]

갈등은 1297년 콜론나 가문 내부의 상속 문제로 인해 본격화되었다. 자코포 콜론나 추기경이 자신의 형제들(오토네, 마테오, 란돌포)의 영지 상속권을 박탈하자, 세 형제는 보니파시오 8세에게 도움을 요청하며 가문의 근거지인 콜론나와 팔레스트리나 등을 교황에게 바치겠다고 제안했다. 보니파시오 8세는 자코포에게 영지를 형제들에게 돌려주라고 명령했으나, 자코포는 이를 거부했다. 오히려 자코포와 그의 조카 피에트로 콜론나는 교황의 정치적 경쟁자인 아라곤의 하이메 2세와 시칠리아의 프리드리히 3세와 손을 잡았다. 같은 해, 콜론나 가문은 아나니에서 로마로 옮겨지던 교황의 개인 재산을 강탈하는 사건을 일으켰다.[79] 물품은 나중에 돌려받았지만, 교황은 단호하게 대응했다. 1297년 5월, 보니파시오 8세는 자코포 콜론나와 그를 따르는 이들을 추기경단에서 쫓아내고 파문했다. 콜론나 가문이 계속해서 "보니파시오 8세는 진정한 교황이 아니다"라는 주장을 펴자, 교황은 가문 전체를 파문하고 이들을 토벌하기 위한 십자군을 소집했다.[79]

이에 콜론나 가문(교황 편에 선 세 형제 제외)은 보니파시오 8세가 불법적으로 선출되었다고 공공연히 주장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1297년 9월, 보니파시오 8세는 아이러니하게도 콜론나 가문 출신인 란돌포 콜론나를 교황군 지휘관으로 임명하여 가문의 반란을 진압하도록 했다. 1298년 말, 란돌포는 콜론나와 팔레스트리나 등 반란의 중심지를 점령했다. 이때 보니파시오 8세는 순순히 항복하면 해를 입히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평화롭게 항복한 이들은 철저히 파괴되었다. 특히 팔레스트리나는 주교좌 성당을 제외한 모든 것이 폐허가 되었고, 그 자리에 '시타파팔레'라는 새로운 도시가 세워졌다.[105] 시인 단테는 이를 신의를 저버린 배신 행위라고 비판했다.[105] 1298년, 콜론나 가문은 교황군에게 일단 굴복했으나, 그 해 안에 다시 반란을 일으켰고 결국 실패하여 프랑스로 망명했다.[79]

4. 3. 시칠리아 및 이탈리아 문제

교황 보니파시오 8세가 즉위한 후 처음 한 일 중 하나는 나폴리 왕 카를로 2세가 파견한 인물을 면직하고, 교황청을 나폴리에서 로마로 옮기는 것이었다.[79] 그는 선대 교황들과 달리 카를로 2세를 전면에 내세우지는 않았지만, 즉위 후 7년 동안 시칠리아 탈환에 힘을 쏟았다.[79] 당시 카를로 2세는 명목상 "시칠리아 왕"이었을 뿐 시칠리아의 실질적인 지배권은 아라곤 연합 왕국의 하이메 2세에게 있었다.[79]

아라곤 연합 왕국의 차이메 2세가 자신의 동생 피디리쿠 2세에게 시칠리아 왕위(트리나크리아 왕국)를 물려주어 피디리쿠 2세가 시칠리아의 프리드리히 2세로 즉위하였다. 보니파시오 8세는 그의 즉위를 만류했으나, 피디리쿠 2세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1296년 그를 파문하고 시칠리아 섬 전체에 성무금지령을 내렸다. 하지만 피디리쿠 2세와 시칠리아 백성들은 이에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106] 이 성무금지령은 1302년 피디리쿠 2세카를로 2세가 각각 시칠리아와 나폴리를 통치하기로 합의한 칼타벨로타 평화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유지되었다. 한편, 보니파시오 8세는 십자군 원정을 준비하기 위해 베네치아제노바에게 휴전을 종용했으나, 그들은 이를 거절하고 3년간 전쟁을 지속했다.

보니파시오 8세는 피렌체에서 구엘프 내 흑색당과 백색당 사이의 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피렌체에도 성무금지령을 내렸다. 또한 1300년에는 야심이 큰 프랑스의 샤를 드 발루아 백작을 이탈리아로 불러들였다. 샤를의 개입은 결과적으로 흑색당이 백색당 지도부를 몰아내고 영구 추방하는 결과를 낳았다.

로마의 유력 귀족 가문인 콜론나 가문은 보니파시오 8세에게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보니파시오 8세의 오만한 태도 때문이기도 했지만, 아라곤 연합 왕국 파에 속했던 콜론나 가문은 교황의 시칠리아 정책에도 반대했다.[79] 그들은 전임 교황 첼레스티노 5세의 퇴위 과정에 의문을 제기하며 보니파시오 8세의 정통성을 문제 삼았다.[81] 만약 전임 교황의 퇴위가 교회법에 어긋난다면, 보니파시오 8세의 교황 즉위 자체의 정당성이 흔들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보니파시오 8세는 자신의 지위를 보호하기 위해 전임 교황 첼레스티노 5세를 로마 남동쪽 36km 떨어진 푸모네 성의 감옥에 유폐했다.[79][82]

1297년, 콜론나 가문은 아나니에서 로마로 이송 중이던 교황의 개인 재산을 강탈하는 실력 행사에 나섰다. 재산은 나중에 반환되었지만, 콜론나 가문은 이후에도 "보니파시오 8세는 진정한 교황이 아니다"라는 성명을 계속 발표했다. 이에 교황은 콜론나 가문의 당주와 그 일족을 파문하고, 이들을 토벌하기 위한 "십자군"을 소집했다. 1298년, 콜론나 가문은 교황군에게 굴복했지만, 그 해 안에 다시 반란을 일으켰고 결국 프랑스 왕국으로 망명했다.[79]

4. 4. 희년 선포

보니파시오 8세는 1300년 2월 22일 교서 《Antiquorum habet》를 반포하여 희년을 선포하고, 이 행사에 보편적인 성격을 부여했다. 이는 로마에서 열린 많은 희년 중 첫 번째였다.[45] 그는 사도 베드로의 무덤과 사도 바오로의 성전을 순례하도록 장려했다. 당시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와의 갈등으로 프랑스로부터의 자금 유입이 원활하지 않자, 이를 대체하기 위해 로마 순례자들로부터 재정을 확보하려는 목적[46] 또는 프랑스 왕의 적대적인 행동에 맞서 도덕적, 정치적 지원을 얻으려는 목적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교황의 희년 선포는 교회 안팎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 로마 시민 외에도 수많은 순례자들이 로마를 찾았는데, 역사가 조반니 빌라니는 약 20만 명 이상의 순례객이 로마를 방문했다고 추정했다.[48][107] 특정일에는 약 3만 명의 인파가 몰리기도 했다.[47] 순례객 가운데 《신곡》의 저자 단테 알리기에리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단테 자신이 작품 속에서 희년 참여를 묘사하기도 했지만, 실제 참여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108]

희년 행사는 성공적으로 관리되었다. 로마는 이전까지 경험하지 못한 인파를 맞이했지만, 음식은 풍족하게 공급되었고 적당한 가격에 판매되었다.[47] 당시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 가는 유일한 통로였던 테베레강산탄젤로 다리는 수많은 순례객으로 혼잡했다. 로마 당국은 순례객들의 원활한 이동을 위해 다리를 절반으로 나누어 일방통행제를 시행하기도 했다.[109] 희년을 통해 모인 막대한 자금은 교황청의 재정을 크게 회복시켰으며, 보니파시오 8세는 이를 자신의 판단에 따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46] 또한 조토 디 본도네를 비롯한 예술가들이 로마에 모여들었고, 성 베드로 대성당이나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 등이 개수되는 등 문화 예술적인 부흥에도 영향을 미쳤다.

4. 5.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 개입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가 스코틀랜드를 침략하여 스코틀랜드 왕 존 발리올을 폐위시켰다. 폐위된 존 발리올은 교황 보니파시오 8세의 보호 아래 교황 관저에 머무르는 조건으로 석방되었다.[49]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 초기에 어려움을 겪던 스코틀랜드 의회는 교황에게 스코틀랜드에 대한 봉건적 종주권을 주장하며 보호해 줄 것을 호소했다.[49]

보니파시오 8세는 스코틀랜드의 요청을 받아들여 1299년 6월 27일 교황 칙서 Scimus, Fili|스키무스 필리la(나는 안다, 아들아)를 발표했다.[50] 이 칙서를 통해 교황은 에드워드 1세의 스코틀랜드 침략과 점령을 비판하고, 즉시 공격을 중단하며 스코틀랜드인들과 협상에 나설 것을 명령했다.[50] 하지만 에드워드 1세는 교황의 요구를 무시했다. 1301년 잉글랜드 남작들은 교황에게 보내는 서한(1301년의 남작 서한)을 작성하여 스코틀랜드에 대한 교황의 종주권을 부인하고 잉글랜드의 소유권을 주장했으나, 이 서한은 실제로 발송되지는 않았다.[49]

4. 6. 필리프 4세와의 갈등

국가가 형성되고 군주들이 권력을 중앙으로 모으려는 욕구가 강해지던 시기에 보니파시오 8세와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 사이에 충돌이 발생했다. 특히 1285년 필리프 4세가 권력을 잡으면서 강화되는 왕권과 교회 사이의 갈등은 더욱 깊어졌다. 프랑스에서 왕을 중심으로 한 국가 발전은 카페 왕조 때부터 시작되었는데, 필리프 4세는 유능한 시민 법률가들을 등용하고 법 집행 과정에서 성직자들의 참여를 금지했다.

프랑스와 잉글랜드가 전쟁을 치르기 위한 자금을 마련하고자 성직자들에게도 세금을 부과하자, 보니파시오 8세는 이를 성직자의 전통적인 권리를 침해하는 것으로 보고 강경하게 대응했다. 1296년 2월, 그는 교황의 승인 없이 평신도가 성직자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것을 금지하는 교황 칙서 Clericis laicos를 발표했다. 이 칙서에서 보니파시오 8세는 "그들은 성직자들의 수입이나 재산의 절반, 십일조, 또는 다른 어떤 비율이라도 징수하고 요구하며, 여러 방식으로 그들을 노예 상태로 만들고 자신들의 권위에 복종시키려 한다. 황제, 왕, 공작, 백작 또는 남작 등... 성스러운 건물에 예치된 물건을 감히 소유하려는 자는 파문 형을 받아야 한다."라고 명시했다. 이 칙서의 발표로 보니파시오 8세와 필리프 4세 사이에는 적대 관계가 형성되었다.

잉글랜드 및 플랑드르와 전쟁 중이던 필리프 4세는 프랑스 교회의 재산이 국가를 지원하는 데 사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41] 그는 교황 칙서에 맞서 프랑스에서 교황령으로 금, 은, 보석, 말, 무기, 식량 등의 수출을 금지하는 법령을 제정했다. 이는 교황청 수입의 주요 원천을 차단하는 조치였다. 또한 필리프 4세는 중동으로 떠날 새로운 십자군 원정 자금을 모으던 교황 대리인들을 프랑스에서 추방했다. 이에 보니파시오 8세는 필리프 4세에게 "하느님께서는 교황을 왕들보다 더 높은 지위에 놓으셨다"며 강력히 항의했다.

그러나 프랑스 내 성직자들의 지지와 콜론나 가문 문제로 로마 내부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프랑스의 지원이 필요했던 보니파시오 8세는 입장을 다소 누그러뜨렸다. 1296년 9월 교황 칙서 Ineffabilis amor|이네파빌리스 아모르la(형언할 수 없는 사랑)에서[42][111] 그는 국가적 비상사태 시 합리적인 과세는 승인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여전히 필리프 4세의 요구에는 이의를 제기했다.[43] 1297년 2월, 교황 칙서 Romana mater ecclesia|로마나 마테르 에클레시아la를 통해 왕이 비상사태라고 판단할 경우, 교황의 승인 없이도 성직자들이 자발적으로 기부하는 것을 허용했다. 결국 1297년 7월, 교황 칙서 Etsi de statu에서 보니파시오 8세는 왕이 교황의 사전 승인 없이도 비상사태 시 교회 재산과 수입에 세금을 부과할 수 있다고 인정하며 완전히 물러섰다. 이에 필리프 4세는 교역 금지 조치를 철회하고, 보니파시오 8세를 자신과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 사이의 분쟁 중재자로 받아들였다. 보니파시오 8세는 대부분의 문제에서 필리프 4세의 편의를 봐주었다.

필리프 4세가 에드워드 1세로부터 아키텐에 대한 신하로서의 경의를 받는 모습.


그러나 보니파시오 8세와 필리프 4세의 불화는 14세기 초반에 다시 불붙어 정점에 달했다. 필리프 4세가 보니파시오 8세에 맞서 강력한 반(反)교황 운동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분쟁은 필리프 4세의 측근과 교황 특사 베르나르 세세 사이의 언쟁으로 다시 촉발되었다. 1301년, 필리프 4세는 베르나르 세세를 반역 혐의로 체포하여 투옥하고, 그의 동맹인 나르본의 대주교 질 에슐랑(Gilles Aycelin de Montaigu)을 구금했다. 이에 격분한 보니파시오 8세는 1301년 12월 교황 칙서 Ausculta Fili (아들아, 내 말을 들어라)를 공표했다.[51] 이 칙서에서 그는 필리프 4세에게 지상의 모든 왕보다 높은 영적 군주인 그리스도의 대리자, 즉 교황의 말에 귀 기울이라고 촉구했다. 또한, 필리프 4세가 주최한 궁정 재판에서 성직자가 판결받는 것은 위법이며, 국가 이익을 위해 교회 재산을 계속 사용하는 것에 반대한다고 밝혔다. 더불어 '교회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를 논의하기 위해 프랑스의 주교들과 수도원장들을 로마로 소집하여 주교회의를 열겠다고 선언했다.[112]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필리프 4세는 이 칙서를 교황 사절의 손에서 빼앗아 불 속에 던져버렸다고 한다.[52][113]

1302년 2월 10일, 교황 칙서 《아들아, 내 말을 들어라》는 필리프 4세와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소각되었다.[53]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니파시오 8세는 1302년 3월 4일, 프랑스 성직자들에 대한 교황의 통제권을 재확인하기 위해 장 르무엔 추기경을 교황 특사로 파견했다.[54][114] 필리프 4세는 보니파시오 8세가 계획한 로마 주교회의를 방해하고자 1302년 4월 파리에서 삼부회를 소집했다. 프랑스 역사상 최초로 열린 이 삼부회에서 귀족, 성직자, 평민 세 신분 모두 왕과 왕의 세속적 권력을 옹호하는 서신을 로마에 보냈다. 한편, 필리프 4세의 금지령과 재산 몰수 위협에도 불구하고 약 45명의 프랑스 고위 성직자들은 1302년 10월 로마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했다.[55][115]

로마 주교회의가 끝난 후, 1302년 11월 18일 보니파시오 8세는 교황 칙서 Unam sanctam (거룩한 하나의 교회)을 공표했다.[56][116] 이 칙서는 중세 시대 교황권의 정점을 보여주는 가장 유명한 문서 중 하나로, 영적인 권력과 세속적인 권력 모두 교황의 권위 아래 있으며, 구원을 받으려면 모든 인간은 로마 교황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즉, 세속 군주들을 세우고 심판하는 권한이 교황에게 있음을 명백히 강조한 것이다. 내용은 '사람은 영적인 면과 세속적인 면으로 살아가며, 세속 권력이 정도를 벗어나면 영적 권력의 판단을 받아야 한다'는 요지를 담고 있으며, 왕들은 교황의 권력에 예속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다른 한편으로 교황은 장 르무엔 추기경을 필리프 4세에게 보내는 교황 특사로 임명하고, 필리프 4세를 파문 상태에서 해제할 특별 권한까지 부여하며 양측의 교착 상태를 해결하려 노력하기도 했다.[57][117]

5. 아나니 사건과 죽음

아나니 사건을 묘사한 19세기 프랑스 회화.


1303년 4월 4일 성목요일,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프랑스 성직자들이 로마로 오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사람, 심지어 황제나 왕이라 할지라도 파문한다고 선언했다.[118][58] 이 파문 대상에는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도 포함되었으나, 직접적으로 이름이 언급되지는 않았다. 이에 필리프 4세의 재상 기욤 드 노가레는 보니파시오 8세를 이단자라고 비난하며 공의회를 열어 심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303년 8월 15일, 교황은 프랑스 왕국 신민들에 대한 필리프 4세의 통치권을 중단시키고, 필리프 4세가 로마 교회 법정에 출두하여 해명할 때까지 프랑스 내 모든 교구장 주교와 수도원장 임명을 보류하는 조치를 취했다.[119][59] 이러한 갈등 속에서 프랑스는 결국 무력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1303년 9월 7일, 기욤 드 노가레와 시아라 콜론나가 이끄는 군대가 당시 아나니의 교황궁에 머물고 있던 보니파시오 8세를 급습했다.[120][60] 이는 교황이 1303년 9월 8일 발표할 예정이었던 필리프 4세와 기욤 드 노가레에 대한 파문 교서를 막기 위한 행동이었다.[121][122][61] 노가레와 콜론나는 교황에게 폭언을 하며 교황직 사임을 강요했지만, 보니파시오 8세는 "사임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고 응수하며 굴복하지 않았다.[62] 이에 격분한 시아라 콜론나가 당시 68세[123](또는 73세[62])였던 교황의 뺨을 때렸다고 전해지는데, 이 사건은 역사적으로 '아나니 사건'(Schiaffo di Anagni|스키아포 디 아나니ita) 또는 '아나니의 뺨'으로 불린다.

보니파시오 8세는 3일 동안 감금되었다가 아나니 시민들의 봉기로 풀려났다.[123][63] 그는 로마로 돌아와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주교회의를 소집하려 했으나, 아나니 사건으로 인한 정신적 충격과 모욕감으로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었다. 피렌체의 역사가 조반니 빌라니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124][63]

시아라와 그 밖의 적들이 교황에게 와서 매우 상스러운 말로 조롱하면서 교황과 교황과 함께 있던 이들을 포박하였다. 그 중에서도 프랑스 왕을 위해 협상을 지휘한 노가레의 기욤은 교황에게 경멸하는 어투로 그를 론 강이 있는 리옹으로 끌고가 교황직에서 폐위시키고 유죄 판결을 받게 하겠다고 협박하였다. … 어느 누구도 교황의 몸에 감히 손을 대지 못하였으나, 그들은 거리낌 없이 교황에게 손을 댔을 뿐만 아니라 그의 신변을 구속하고 교황과 교회의 보물들을 약탈하는데 정신이 팔렸다. 위대한 교황 보니파시오는 3일 동안 적들의 수중에 포로로 사로잡혀 고통과 수치심, 정신적 충격 속에서 지냈다. … 이에 분노한 아나니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 콜론나와 그의 무리들을 몰아내 죽이거나 생포하였으며, 교황과 교황청 관료들을 풀어주었다. … 보니파시오 교황은 즉시 교황청 관료들과 함께 아나니를 떠나 로마로 돌아가서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주교회의를 소집했다. 그러나 마음 속 깊이 새겨진 비탄과 마음의 상처로 인하여 로마로 돌아왔을 때, 그는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자기 손을 물어뜯는 생소한 병에 걸렸고, 결국 천주 강생 1303년 10월 12일 지상에서의 삶을 마감했다. 그의 시신은 생전에 그가 지은 성 베드로 대성전 입구 가까이 있는 화려한 경당에 명예롭게 안장되었다.


단테는 이 사건을 《신곡연옥 편에서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대리자 안에서 포로가 되시고 모욕을 당하셨다'고 표현하며 비판했다. 보니파시오 8세는 고열에 시달리다가 1303년 10월 11일(빌라니의 기록에는 10월 12일), 8명의 추기경과 교황청 관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신앙 고백을 하고 선종했다.[62]

15세기 보카치오의 ''De Casibus'' 필사본에 묘사된 보니파시오의 죽음


바티칸 그로토에 있는 교황 보니파시오 8세의 무덤


보니파시오 8세의 시신은 그가 생전에 마련한 성 베드로 대성전 입구 근처의 경당에 안장되었다.[124] 1605년, 그의 시신이 우연히 발굴되었는데, 당시 기록을 남긴 자코모 그리말디에 따르면 삼중 관 속에 안치된 시신은 상당히 온전한 상태였으며, 키가 '이례적으로 컸다'(약 일곱 자)고 한다.[125][64] 시신 검사를 통해 보니파시오 8세가 사망 직전 격분하여 자신의 손을 물어뜯거나 벽에 머리를 찧었다는 속설은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65] 당시 교황의 복식(수단, 영대, 제의, 반지, 장갑 등)도 잘 보존되어 있었다.[125][66] 현재 그의 시신은 성 베드로 대성전 지하 묘소(바티칸 그로토)의 대리석 석관에 안치되어 있으며, 석관에는 'BONIFACIVS PAPA VIII'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다.[126][67]

6. 유산 및 평가

보니파시오 8세 사후, 그의 정통성과 행적에 대한 논란은 끊이지 않았다. 특히 프랑스필리프 4세 국왕과의 극심했던 갈등은 교황 사후에도 이어져, 결국 사후 재판이라는 이례적인 상황으로까지 번졌다. 1309년 교황청이 아비뇽으로 옮겨진 후, 교황 클레멘스 5세는 필리프 4세의 강한 압력 아래 보니파시오 8세에 대한 재판 절차 개시에 동의했다.[68] 이는 아라곤, 카스티야를 비롯한 여러 왕국과 지역에서 교황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자 스캔들이라며 항의하는 목소리를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69]

재판 준비 과정에서 클레멘스 5세는 기욤 드 노가레아나니에서 보니파시오 8세에게 저지른 행위에 대해 면죄를 해주었으나,[70] 보니파시오 8세를 고발하는 측에서 제출한 자료의 신빙성과 증인들의 진실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조사의 공정성을 강조하기도 했다.[71] 조사 과정에서는 보니파시오 8세가 여러 이단적인 견해를 가졌다는 증언들이 수집되었는데, 그중에는 소돔 죄 혐의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실질적인 증거는 부족했으며, 이는 필리프 4세가 정적을 공격할 때 흔히 사용했던 방식이라는 분석도 있다.[73] 성전기사단 역시 비슷한 혐의로 공격받은 바 있다.

결국 클레멘스 5세는 보니파시오 8세의 유죄 여부 판단을 1311년 열린 비엔 공의회로 넘겼다. 공의회 개막 전, 교황은 필리프 4세가 보니파시오 8세에 대해 제기한 문제들이 선의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공식적으로 용서하는 입장을 밝혔다.[74] 1311년 10월 개막한 비엔 공의회에서는[75] 세 명의 추기경이 보니파시오 8세의 정통성과 도덕성을 증언했고, 두 명의 기사가 결투 재판을 통해 그의 무죄를 증명하겠다고 나섰으나 아무도 도전에 응하지 않았다. 결국 공의회는 이 문제를 종결된 것으로 선언했다.[76]

피렌체 두오모 미술관에 있는 교황 보니파시오 8세의 조각상


보니파시오 8세는 후대의 여러 문학 작품에서도 중요한 인물로 다뤄졌다.

  • 단테 알리기에리는 그의 대표작 ''신곡''의 ''지옥편''에서, 보니파시오 8세가 아직 살아있음에도 불구하고 매관매직의 죄로 지옥에 떨어질 운명임을 교황 니콜라오 3세의 입을 통해 예언하게 했다. 또한 단테는 보니파시오 8세가 콜론나 가문과의 분쟁 과정에서 팔레스트리나를 파괴하고 많은 시민을 희생시킨 사건을 언급하며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다만, 단테는 기욤 드 노가레가 제기했던 소돔 죄 혐의는 채택하지 않았다.
  • 프랑수아 라블레의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에서는 지옥에서 천한 일을 하는 인물 중 하나로 보니파시오 8세를 묘사했다.
  • 조반니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에서는 풍자적으로 강도(기노 디 타코)에게 수도원장직을 주는 모습으로 그려지거나(10일째, 두 번째 이야기), 1300년 피렌체의 흑당과 백당 간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발루아 백작 샤를을 파견한 인물로 언급된다(I.i).
  • 존 고워는 ''고백록''에서 보니파시오 8세가 교황 첼레스티노 5세를 속여 교황직에서 물러나게 했다는 이야기를 소개하며 그의 기만적인 면모를 비판했다. 또한 보니파시오 8세가 자신의 손을 물어뜯으며 죽었다는 소문을 언급하기도 했다.


이러한 비판적인 평가 외에도 보니파시오 8세는 당대의 중요한 예술가였던 조토의 후원자였으며, 1300년 대희년을 맞이하여 성 베드로 대성당, 라테라노 대성전,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 등 로마의 주요 성당들을 복원하는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인 노바라의 캄파누스는 보니파시오 8세의 개인 주치의 또는 사제였다는 기록도 있다.[78]

현대에 와서는 히스토리 채널의 TV 드라마 ''나이트폴''에서 배우 짐 카터가 연기한 보니파시오 8세가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데, 여기서는 혼란스러운 중세 시대에 안정과 청렴함을 추구하는 지도자이자 따뜻한 인물로 묘사되기도 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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