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 리주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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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필 리주토는 1937년 뉴욕 양키스와 계약하며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고, 1950년 아메리칸 리그 MVP를 수상한 유격수였다. 2차 세계 대전 참전으로 선수 생활이 중단되기도 했지만, 통산 1661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273, 1588안타, 38홈런, 149도루를 기록했다. 1957년부터 1996년까지 40년간 뉴욕 양키스 전담 라디오 및 TV 방송 해설자로 활동하며 'Holy Cow' 등의 유행어를 사용하며 인기를 얻었다. 또한 시각 장애인을 위한 자선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1985년에는 등번호 10번이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었고, 1994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2007년 8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필 리주토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필 리주토
원어 이름Phil Rizzu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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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포지션유격수
타석/투구우타/우투
출생지미국 뉴욕주 브루클린
사망지미국 뉴저지주 웨스트오렌지
신장167.6 cm
체중68 kg
선수 경력
프로 입단1937년
첫 출장1941년 4월 14일
마지막 출장1956년 8월 16일
소속 구단뉴욕 양키스 (1941 - 1956)
통계 (MLB)
타율0.273
홈런38
타점563
수상 및 업적
올스타 선정5회 (1942년, 1950년–1953년)
월드 시리즈 우승7회 (1941년, 1947년, 1949년–1953년)
리그 MVP1950년 AL MVP
영구 결번뉴욕 양키스 No. 10
양키 스타디움 모뉴먼트 파크 헌액모뉴먼트 파크
명예의 전당 헌액1994년 (베테랑 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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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선수 경력

필 리주토는 1937년 아마추어 자유 계약 선수로 뉴욕 양키스와 계약했다. 그의 별명은 양키스 해설가 멜 앨런이 붙여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마이너 리그 팀 동료 빌리 히치콕이 리주토가 베이스를 달리는 모습을 보고 붙여준 것이다.

1940년 캔자스시티 블루스(아메리칸 어소시에이션)에서 활약하며 더 스포팅 뉴스 마이너 리그 올해의 선수상을 받은 후, 1941년 4월 14일 메이저 리그 데뷔전을 치렀다. 타율이 .194로 떨어진 프랭크 크로세티를 대신하여 투입된 리주토는 양키스 라인업에 빠르게 적응하여 2루수 조 고든과 함께 뛰어난 중견수 수비를 구축했다.

리주토의 루키 시즌은 월드 시리즈에서 마무리되었고, 그는 부진한 타격을 보였지만 양키스는 다저스를 꺾고 우승했다. 이듬해 리주토는 1942년 월드 시리즈에서 8안타, .381의 타율로 양키스와 상대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를 통틀어 타율 1위를 기록했다. 타격 능력이 부족한 유격수였지만, 정규 시즌에서 4개의 홈런을 기록한 데 이어 홈런까지 추가했다.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1943년부터 1945년까지 선수 경력이 중단되었다. 1946년 시즌 복귀 후, 리주토는 .969의 수비율로 크로세티가 1939년에 기록했던 유격수 팀 기록(0.968)을 경신했고, 이듬해에는 0.973으로 자신의 기록을 경신했다.

리주토의 선수 생활 정점은 1949년 ~ 1950년 시즌으로, 이때 그는 1번 타자로 타순을 바꾸게 되었다. MVP를 차지했던 1950년 시즌에는 3할 2푼 4리의 타율과 200안타, 92 볼넷, 125득점의 성적을 올렸고, 수비에서도 수비율 1위와 238 연속으로 실책 없이 수비를 해내 단일 시즌 유격수 기록을 세웠다. 1949년 9월 18일부터 1950년 6월 7일까지 58경기 연속 무실책 기록은 에디 조스트가 1947년에서 1948년까지 세운 46경기 연속 무실책 기록을 경신한 것이다. 리주토의 기록은 이후 에드 브링크만이 1972년에 세운 72경기 연속 무실책 기록 전까지 22년 동안 1위를 차지했다. 1950년 시즌에 123개의 병살을 기록해 크로세티의 1938년 기록을 3개 차로 경신했고, 현재도 양키스 팀 내 기록으로 남아있다. 리주토의 1950년 수비율은 0.9817로 리그에서 가장 좋았고 루 부드로가 1947년에 세운 리그 기록 0.9824보다 1리가 모자랄 뿐이었다. 1976년 프레드 스탠리가 0.983을 세우기까지 팀 내 최고 기록이었다.

1949년 MVP 투표에서 테드 윌리엄스의 뒤를 이어 2위를 차지했고, 1950년에는 큰 차이로 2위를 따돌리고 MVP에 선정되었는데, 희생 번트 리그 1위가 MVP가 된 건 그가 유일하다. 올스타전에는 5번 출장했고, 스포팅 뉴스 올해의 메이저 리그 선수, 히칵 벨트(Hickok Belt)에 선정되기도 했으며, 스포팅 뉴스 선정 포지션별 메이저 리그 최고 선수에서 유격수로 4년 연속 선정됐다.

1951년 월드 시리즈에서는 3할 2푼의 타격으로 미국 야구 기자협회(BBWAA)가 주는 베이브 루스 상에 선정되었다.

타이 콥은 리주토와 스탠 뮤지얼을 "전설적인 옛 선수들 사이에 어깨를 나란히 할 몇 안되는 요즘 선수들"이라고 평가했다. 케이시 스텡걸은 1935년에 리주토에게 "야구는 관두고 가서 구두닦이나 해"라고 했지만, 이후 양키스 감독으로 리주토와 함께 월드 시리즈 5연패를 이뤄냈다. 그는 "리주토는 내 야구 생활을 통틀어 가장 뛰어난 유격수"라고 평했다. 빅 래씨는 "땅볼이든, 라인 드라이브든, 플라이볼이든 상관없이 리주토에게만 가면 내가 던진 가장 최고의 피칭이 되었다"라고 말했다. 조 디마지오는 "사람들은 야구하고 있을 때의 나를 사랑했다. 하지만 스쿠터(리주토의 별명)는 그 자체로 사랑의 대상이었다"라고 말했다.

리주토는 '스몰볼'로 유명한데, 강한 수비, 찬스에 강한 타격으로 양키스의 7번 월드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공격적인 면에서는 번트를 가장 잘 대는 선수로 평가받고 있다. 1949년부터 1952년까지 매년 희생타 순위에서 수위를 차지했다. 그는 종종 스프링 트레이닝 동안 선수들에게 번트 훈련에 도움을 주었고, 은퇴 후에는 어떤 번트를 대야 하는가에 대한 이론을 얘기하기도 했다. 희생타 외에 도루에서도 뛰어난 능력을 보여 7번의 시즌에서 아메리칸 리그 Top 5 안에 들었다. 수비에서는 게임당 병살과 Total Chances에서 3번의 리그 1위, 수비율과 풋아웃에서 두 번의 1위, 어시스트에서 1번의 1위를 차지했다. 월드 시리즈에서는 출전 경기 수, 안타, 볼넷, 득점, 도루에서 Top 10에 들어간다. 7차전 기록은 11타수 5안타 0.455이다.

뉴욕 타임즈는 1951년 9월 17일 양키스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경기를 회상했다. 12경기를 남기고 공동 1위였던 당시, 1-1 동점인 9회말 1사 만루에서 리주토는 밥 레몬과 맞섰다. 첫 공이 볼이라 생각했지만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자, 3루 주자 조 디마지오에게 스퀴즈 플레이 사인을 냈다. 디마지오가 너무 빨리 스타트를 끊자, 밥 레몬은 번트를 피하려다 타자 뒤쪽으로 투구했다. 리주토는 재빠르게 번트를 성공시켜 디마지오가 득점하며 경기가 끝났다. 리주토는 "그 공을 번트대지 않았으면 아마 내 머리에 맞았을 것"이라고 했다. 스텡걸은 "최고의 플레이였다"라고 했고, 레몬은 화가 나서 글러브와 공을 바닥에 던졌다.

1954년부터 하락세가 시작되어 1955년에는 81경기, 1956년에는 31경기밖에 출전하지 못했다. 1956년 8월 25일 방출되었는데, 리주토는 방출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불만을 자주 터뜨렸다. 에노스 슬로터 재합류를 위해 프런트는 리주토에게 로스터 조정을 위한 미팅을 요청했고, 명단을 검토하며 선수들이 필요한 이유를 말하다 자신이 자리를 비울 수밖에 없음을 납득했다.

2.1. 선수 시절 주요 기록

필 리주토는 통산 1661경기에 출장하여 타율 .273, 1588안타, 38홈런, 563타점, 149도루, 651볼넷을 기록했다. 1950년에는 아메리칸 리그 MVP를 수상했으며, 올스타에 5회(1942, 1950-1953) 선정되었다. 1951년에는 베이브 루스 상을 수상했고, 1950년에는 스포팅 뉴스 올해의 메이저 리그 선수로 선정되었다.

리주토는 유격수 부문 통산 병살타 2위(1217개)를 기록했으며, 월드 시리즈 통산 유격수 최다 출장 경기, 안타, 볼넷, 득점, 도루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다음은 필 리주토의 선수 시절 주요 기록을 정리한 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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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내용
통산 경기 출장1661경기
통산 타율.273
통산 안타1588개
통산 홈런38개
통산 타점563개
통산 도루149개
통산 볼넷651개
아메리칸 리그 MVP1회 (1950년)
베이브 루스 상1회 (1951년)
올스타 선정5회 (1942, 1950-1953)
스포팅 뉴스 올해의 메이저 리그 선수1회 (1950년)
유격수 통산 병살타2위 (1217개)
월드 시리즈 통산 유격수 최다 출장 경기, 안타, 볼넷, 득점, 도루 기록 보유

2.2. 병역

1941년 메이저 리그 데뷔 후, 제2차 세계 대전 발발로 1943년부터 1945년까지 미국 해군에 복무했다. 해군 복무 기간 동안 리주토는 피 위 리스와 함께 해군 야구팀에서 활동했으며, 이 팀의 감독은 빌 디키였다.

1943년부터 1945년까지 미 해군 복무 중, 태평양 남부에서 미 해군 해병들 앞에서 타석에 들어선 리주토
1943년부터 1945년까지 미 해군 복무 중, 태평양 남부에서 미 해군 해병들 앞에서 타석에 들어선 리주토

3. 방송 해설 경력

뉴욕 양키스의 라디오 및 TV 방송 해설자로 1957년부터 1996년까지 40년간 활동했다. "Holy Cow!", "Unbelievable!", "Did you see that?" 등의 유행어를 사용했다.

로저 메리스의 한 시즌 61호 홈런, 크리스 챔블리스의 1976년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 끝내기 홈런 중계 등으로 유명하다. 멜 앨런에 이어 양키스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해설을 맡은 인물이다.

1995년 은퇴를 선언했으나, 1996년에 복귀하여 한 시즌 더 활동했다.

* 다음은 방송 경력중 주요 중계 경기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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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경기
1961년 10월 1일로저 메리스베이브 루스의 한 시즌 홈런 기록을 경신하는 61호 홈런
1976년크리스 챔블리스의 ALCS 우승을 결정짓는 끝내기 홈런
1978년AL 동부 지구 타이브레이커 경기
1983년파인 타르 경기
1985년필 니크로의 300번째 통산 승리 경기

4. 사회 공헌 활동

리주토는 1951년 뉴저지에서 열린 자선 행사에서 에드 루카스라는 어린 소년을 만났다. 그는 보비 톰슨의 "세상을 뒤흔든 샷"이 나온 날, 야구공에 눈을 맞아 시력을 잃었다. 리주토는 이 소년과 그가 다니는 성 요셉 맹학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후 리주토는 자신의 광고와 책의 수익금을 기부하고, 연례 필 리주토 유명인 골프 클래식과 "스쿠터" 어워드를 개최하여 성 요셉 맹학교를 위해 수백만 달러를 모금했다. 리주토와 루카스는 친분을 유지했으며, 2006년 루카스의 결혼식이 양키 스타디움에서 열린 유일한 결혼식으로 치러진 것은 양키 중계 캐스터였던 리주토의 영향이었다. 루카스는 리주토가 사망하기 며칠 전 요양원에서 만난 마지막 방문객 중 한 명이었다.

5. 명예

모뉴먼트 파크에 있는 필 리주토의 명판
모뉴먼트 파크에 있는 필 리주토의 명판

1985년 10월 4일, 양키스는 리주토의 등번호 10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하는 기념식을 열었다. 기념식에서 그를 기리는 명판을 모뉴먼트 파크에 봉헌했는데, 명판에는 "그는 양키스에서 두 빛나는 경력을 쌓았다. 양키스 역대 최고 유격수로, 그리고 방송인으로"라고 적혀 있었다. 조 디마지오도 참석해 "그는 내 명예의 전당의 선수이다"라면서 축하했다. 그에게는 방송에서 늘 쓰던 "Holy Cow"를 뜻하는, 후광을 쓴 암소가 수여되었다. 이 암소와 함께 있다 갑작스럽게 그라운드에 넘어지는 유머러스한 상황이 일어났는데, 둘 다 다친 데는 없었다. 나중에 리주토는 "그 큰 넘이 마치 가라데 영화처럼 내 오른쪽으로 오더니만 발을 밟고는 나를 뒤로 밀어버렸어."라고 말했다. 이날 경기에서 톰 시버가 통산 300승을 거뒀는데, 이후 시버는 은퇴한 뒤 리주토의 방송 파트너가 됐다.

1994년 베테랑 위원회를 통해 레오 듀로셔와 함께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리주토와 비슷한 업적의 유격수로 여겨졌던 피 위 리스가 1984년에 베테랑 위원회에 의해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게 되자, 리주토도 같이 들어가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는데, 특히 오랫동안 그가 명예의 전당에 들어가지 않는 것에 대해 불만을 가진 양키스 팬들의 지속적인 캠페인이 큰 힘이 되었고, 테드 윌리엄스처럼 리주토와 같은 시대에 뛰었던 동년배들이 그가 후보가 되도록 추천하는데 힘썼다.

리주토는 명예의 전당 입성에 대해 "나는 내가 명예의 전당에 들어갈 만한 선수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명예의 전당은 100마일의 빠른 공을 던지거나 많은 홈런을 치는 대단한 선수들이나 들어가는 곳이라고 생각해왔다. 그게 여태까지 명예의 전당에 들어간 선수들의 모습이었고, 또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해왔다"라고 말했다.

1999년 마이너리그의 스테이튼 아일랜드 양키스는 그들의 마스코트를 "Scooter the Holy Cow"로 지었다.

2009년 뉴저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2013년 밥 펠러 액트 오브 밸로 어워드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미국 해군에서 복무한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37명의 야구 명예의 전당 회원 중 한 명으로 리주토를 기렸다.

6. 사망

2005년 쿠퍼스 타운에서 해마다 열리는 행사와 뉴욕 양키스의 올드 타이머스 데이에 불참하면서 그의 건강에 대한 우려가 커졌다. 건강이 악화되면서 뉴저지주 웨스트 오렌지의 요양원에 머물게 되었다. 2006년 9월, 리주토의 1950년 MVP 명패는 175000USD에, 월드 시리즈 링 3개는 84825USD에, 껌 덩어리가 붙은 양키스 모자는 8190USD에 판매되었다. 판매 수익 대부분은 뉴저지 저지시티의 성 요셉 맹학교에 기부되었다.

2006년 9월 12일, 뉴욕 포스트는 리주토가 "사설 재활 시설에 있으며, 근육 위축과 식도 문제 극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2005년 말, WFAN 라디오 인터뷰에서 리주토는 위장의 대부분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고, 의료용 스테로이드 치료를 받고 있다고 밝혔다.

리주토는 양키스 선수로서 마지막 경기를 치른 지 51주년을 사흘 앞둔 2007년 8월 13일, 잠을 자던 중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미키 맨틀이 사망한 지 정확히 12년이 되는 날이었고, 그의 90번째 생일을 한 달 남짓 앞둔 시점이었다. 그는 수년 동안 건강이 악화되었고, 생의 마지막 몇 달 동안 뉴저지주 웨스트 오렌지의 요양원에서 생활했다. 향년 89세로 사망 당시 리주토는 야구 명예의 전당 생존자 중 최고령자였다.

리주토는 아내 코라(2010년 사망), 딸 신디 리주토, 패트리샤 리주토, 페니 리주토 예토, 아들 필 리주토 주니어, 두 명의 손녀를 유족으로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