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기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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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기룡은 대한민국 前 야구 선수로, 투수 포지션에서 활약했다. 부산고등학교, 효성고등학교, 배재고등학교를 거쳐 상업은행 야구단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1982년 MBC 청룡에 입단하여 프로 선수로 데뷔했으며, 한국 프로 야구 최초 3연속 완봉승 기록을 세우는 등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1990년 자유 계약 선수로 방출된 후 코치로 전향하여 삼성, 현대, OB, 두산 등에서 투수 코치를 역임했다. 2001년 프로야구 출범 20주년 기념 올드스타전에 참가했으며, 배명고등학교 감독과 원광대학교 야구부 투수 코치 및 감독을 지냈다. 2021년 식도암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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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룡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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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정보 | |
선수명 | 하기룡 |
원어명 | Ha Ki-ryong |
국적 | 대한민국 |
출생지 | 대한민국 부산광역시 |
생년월일 | 1955년 5월 8일 |
사망일 | 2021년 2월 10일 (향년 65세) |
신장 | 177cm |
체중 | 90kg |
수비 위치 | 투수 |
투구 | 우 |
타석 | 우 |
프로 입단 연도 | 1982년 |
드래프트 순위 | 프로 원년 멤버, 1981년 추첨으로 지명 |
첫 출장 | 1982년 3월 28일 동대문 대 OB전 구원 등판 |
획득 타이틀 | 해당 정보 없음 |
계약금 | 해당 정보 없음 |
연봉 | 해당 정보 없음 |
선수 경력 | |
소속 구단 | MBC 청룡 (1982년 ~ 1989년) |
코치 경력 | |
코치 경력 | LG 트윈스 투수코치 (1990년 ~ 1993년) 삼성 라이온즈 투수코치 (1993년) 현대 유니콘스 투수코치 (1993년 ~ 1997년) 두산 베어스 투수코치 (1998년 ~ 1999년) |
국가대표 경력 | |
대표 국가 | 대한민국 |
월드 게임 | 1981 샌타클래라 |
메달 정보 | 메달: 은메달 대회: 1981 샌타클래라 종목: 단체전 |
2. 선수 생활
2. 1. 프로 생활 이전
부산고등학교에서 선발 투수로 활동하다가, 효성고등학교를 거쳐 배재고등학교로 전학하였다.[2] 1973년에는 배재고등학교의 에이스로 활동하며 한국 고교 야구 국가대표팀 엔트리에 뽑히기도 했으나,[3] 같은 해에 "배재고로 전학하는 과정에서 결격 사유가 있었다"는 부정 선수 논란이 일어나는 등 물의에 휩싸여 한동안 잠적을 하기도 했다.[4] 배재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974년 상업은행 실업 야구단에 들어갔다.[5] 1976년에는 병역을 치르기 위하여 김준환 등과 함께 육군 야구단에 입단하여,[6] 1977년 육군 팀의 우승 멤버가 되었다.[7] 제대 후 상업은행 야구단으로 돌아와, 1980년 백호기에서 상업은행 야구단이 우승할 때 우수 투수로 뽑혔고,[8] 1981년 실업야구에서도 상업은행이 롯데와 공동 우승을 거둘 때 우수 투수로 다시 뽑혔다.[9]한편, 상업은행에 앞서 한일은행 입단설이 있었다.[10] 상업은행은 70년대 초 경북고 전성기를 연 황규봉을 놓고 고려대 영남대가 경쟁을 펼쳤으나[11] 고려대가 최종 선택했다.
2. 2. MBC 청룡 시절
1981년 12월 29일에 열린 MBC 청룡의 진출 희망 선수 추첨에서 이길환, 유승안, 이종도 등과 함께 뽑혀[12] 1982년 1월 26일 구단 창단과 함께 정식 선수가 되었다.[13] 같은 해 올스타전에서는 같은 팀의 유종겸, 투수를 겸임하고 있던 해태의 김성한 등과 함께 서군의 첫 올스타 투수로 뽑혔다.[14] 한국 프로 야구 최초의 3연속 완봉승 기록을 세웠으며,[15] 연말 연봉 조정 과정에서 같은 팀의 이종도를 비롯한 다른 네 선수들과 더불어 연봉이 2,000만원을 넘겼다.[16] 1983년에는 8월 16일 삼성 라이온즈와의 경기 때부터 9월 16일 해태의 김준환이 안타를 칠 때까지 41이닝 동안 무실점 기록을 세웠으며[17], 후기 리그에서 7승 4패를 기록하며 팀을 후기 우승으로 이끌었다.[18] 또한 같은 해에는 30승을 거둔, 삼미의 장명부를 제치고 평균 자책점 1위 기록을 세웠다.[19] 1984년에는 롯데의 최동원, 삼성의 김시진과 경쟁하면서[20] 10승(모두 선발)을 거두며 오영일과 함께 MBC의 에이스로 활약했지만, 결국 27승(선발승이 9개 밖에 없어 최다 선발승은 김시진(15선발승)에게 돌아감)을 거둔 최동원에게 밀려 다승왕 기록은 세우지 못했다.[21] 1985년 오영일과 함께 MBC와 재계약했으나[22] 그 뒤로 신인왕 김건우, 김태원, 정삼흠, 김용수 등의 등장으로 세대 교체가 이루어지며 입지가 줄어들다가[23], 1989년 트레이드 시장으로 나오고, 1990년에는 자유계약선수로 공시되며 방출당했다.[24][25]3. 은퇴 이후
1993년 이종도 등과 함께 LG의 코치직에서 물러난 하기룡은 같은 해 11월 삼성과 다시 코치 자리를 계약했다.[27][28] 그 후 현대 유니콘스의 투수 코치가 되었으나 1997년 다시 해임당했고[29], OB-두산 베어스의 투수 코치를 지내다 이후 물러났다. 2001년 7월 16일, KBO가 주도한 "프로야구 출범 20주년 기념 올드스타전"에서 같은 MBC 청룡·LG 트윈스 출신의 김용수, 정삼흠 등과 함께 투수로 뽑혔다.[30] 배명고등학교에서 감독을 지낸 뒤, 원광대학교 야구단의 투수 코치를 거쳐 감독으로 지내고 있다.[31][32]
2021년 2월 10일 식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4. 사망
5. 통산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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