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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야시 시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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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야시 시헤이는 에도 시대의 학자이자 군사 사상가로, 일본의 해안 방어와 서양 군사 과학의 도입을 주장했다. 그는 1738년 에도에서 태어나 도쿠가와 막부에서 문서 담당관으로 일했으나, 아버지의 파면으로 로닌이 되었다. 이후 나가사키 등지를 여행하며 서양 문물을 접하고, 러시아의 위협을 인식하여 『삼국통람도설』과 『해국병담』을 저술했다. 『해국병담』은 쇄국 정책을 비판하며 서양 군사 과학의 도입을 주장했으나, 막부의 탄압으로 발금되었고, 그는 가택 연금되었다. 그는 "간세이 시대의 세 기인" 중 한 명으로 1793년에 사망했으며, 묘는 센다이시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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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야시 시헤이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고토다이 공원, 센다이에 있는 하야시 시헤이 동상
본명하야시 도모노스케 (林 友之丞)
자(字)기구 (毅叔)
출생1738년 8월 6일
출생지에도
사망1793년 7월 28일
사망지센다이, 미야기현
직업학자
국적일본
학문
분야군사 전략, 지리학
영향
참고
가족 성하야시 (林)

2. 생애

하야시는 에도에서 600 곡의 하타모토인 하야시 곤효에 요시미치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도쿠가와 막부에서 문서 담당관으로 일했다.[1] 그러나 하야시가 겨우 세 살 때, 그의 아버지는 어떤 이유로 파면되어 로닌이 되었다.[1][4] 하야시와 그의 형제는 그의 삼촌 하야시 쥬고, 즉 의사에 의해 길러졌다.[1][4]

얼마 안 되어, 장녀와 차녀는 센다이 번의 에도 저택에 시중들게 되었고, 센다이 번 5대 번주 다테 요시무라의 시녀로 섬겼다. 차녀 나오(키요)는 6대 번주가 되는 무네무라의 측실로 발탁되어, 오키요노카타라고 불리게 되었다.[4] 오키요노카타는 1남 1녀를 낳았다.[4] 그녀의 영향으로 하야시 쥬고는 센다이 번의 공식 의사로 임명되어 150곡의 봉급을 받았고, 하야시의 형제 하야시 카젠은 그의 후계자로 입양되었다.[1][4] 다테 요시무라가 사망하자 그들은 센다이로 이주했다. 그러나 하야시 자신은 공식적인 직위나 봉급이 없어 가문 내에서 실업 상태로 남았다.[1][4]

자평은 자신의 교육 정책과 경제 정책을 번 상층부에 진언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고, 녹을 반납하고 형 도료의 빈방에 기거하며, 북쪽은 마쓰마에에서 남쪽은 나가사키까지 전국을 행각한다.[4] 나가사키와 에도에서 배우고, 오쓰키 겐타쿠, 우다가와 겐스이, 가쓰라가와 호슈, 구도 헤이스케 등과 교우한다.[4] 그는 당시의 많은 주요 란가쿠 학자, 경제학자, 군사 과학자들과 활발한 서신 왕래를 유지했다. 그는 또한 1777년 나가사키로 여행하여 특히 네덜란드 선박의 크기와 강점에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네덜란드 오페르후프트로부터 러시아가 시베리아에서 아시아로 남하하려는 의도를 알게 되었다. 이것은 그가 북쪽의 마쓰마에로 여행을 떠나게 했고, 그는 나라의 해안 방어의 약점과 외부 세계에 대한 무지를 점점 더 인식하게 되었다.[1] 러시아의 위협을 설파하며, "대략 니혼바시에서 유럽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는 일수로나 된다"라고 갈파하여, 당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4]

1786년, 그는 삼국통람도설을 출판하여 조선, 류큐 왕국, 에조와의 관계에서 일본의 지정학적 위치를 자세히 설명했다. 그는 원나라가마쿠라 시대에 시도했던 것처럼 언젠가 일본을 침략하려 할 수 있다는 우려를 제기했고,[1] 또한 일본이 홋카이도의 북부 변경을 인구 증가시키고 개발할 필요성을 강조했다.[1]

1787년, 그는 16권의 저서인 《해국병담》(해양 국가의 군사 방위)을 출판하여 일본의 해상 취약성과 일본이 서양 군사 과학을 채택하고 사무라이를 재교육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조직적인 훈련 운동의 부족을 불평하고, 단순한 개인적인 무술 훈련보다는 ''조련''(팀워크 훈련)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조선, 대포 및 기타 군사 설계에 대한 기술적인 설명을 제공했다. 그는 특히 막부의 쇄국 국가 고립 정책을 비판했다.[2] 『해국병담』은 해방의 필요성을 설하는 군사 서적이었기 때문에, 출판에 협력해 줄 판본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자평은, 16권·3분책에 달하는 대저의 판목을 스스로 조각하고, 자비 출판으로 스하라야 이치베에서 간행했다.[4] 『해국병담』의 서문을 쓴 것은, 센다이 번 의사 구도 헤이스케였다.[4]

『해국병담』은 간세이 3년(1791년), 센다이에서 상재되었다. 그러나 막부 관료 이외의 자가 막정에 간여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고, 두 저서는 모두 발금 처분이 내려졌으며, 『해국병담』은 판목 몰수의 처분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스스로 사본을 만들고, 그것이 다시 사본을 낳는 등 하여 후에 전해졌다.[4] 하야시는 가택 연금에 처해졌다.[2]

최종적으로, 센다이의 형 도료의 허가로 강제 귀향당한 후, 칩거에 처해진다. 칩거 중, 그 심경을 "어버이도 없고, 아내도 없고, 자식도 없고, 판목도 없고, 돈도 없지만 죽고 싶지도 않다"라고 한탄하며, 스스로 육무재(로쿠무사이)라고 칭했다. 하야시 자평의 근신의 땅이 된 센다이시와카바야시구 오모테시바타초(센다이 제1고등학교 남쪽)에는 "하야시 자평 유래의 땅"의 설명판이 설치되어 있다.[4]

간세이 5년 6월 21일(1793년 7월 28일) 사망. 향년 56세.[4]

하야시 자평의 묘는 센다이시 아오바구의 류운인에 있지만, 그 류운인의 소재지는 1967년(쇼와 42년)의 주거 표시 시에 그때까지의 한코초에서, 묘가 있는 것에 연유하여 '''고헤이초'''로 개칭되었다.[4]

메이지 15년(1882년), 정오위를 추증받았다.

2. 1. 초기 생애

하야시 시헤이는 겐분 3년(1738년) 에도에서 600 곡의 하타모토인 하야시 곤효에 요시미치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도쿠가와 막부에서 문서 담당관으로 일했다.[4] 그러나 하야시가 겨우 세 살 때, 그의 아버지는 어떤 이유로 파면되어 로닌이 되었다.[4] 하야시와 그의 형제는 그의 삼촌 하야시 쥬고, 즉 의사에 의해 길러졌다.[4]

얼마 안 되어, 장녀와 차녀는 센다이 번의 에도 저택에 시중들게 되었고, 센다이 번 5대 번주 다테 요시무라의 시녀로 섬겼다. 차녀 나오(키요)는 무네무라의 측실이 되어, 오키요노카타라고 불리게 되었다.[4] 그녀의 영향으로 하야시 쥬고는 센다이 번의 공식 의사로 임명되어 150곡의 봉급을 받았고, 하야시의 형제 하야시 카젠은 그의 후계자로 입양되었다.[4] 다테 요시무라가 사망하자 그들은 센다이로 이주했다. 그러나 하야시 자신은 공식적인 직위나 봉급이 없어 가문 내에서 실업 상태로 남았다.[4]

그는 "여섯 개의 부재"라는 시를 썼는데, "나는 부모도, 아내도, 아들도, 인쇄할 블록도, 돈도 없으며, '죽음 없음'을 바란다."라고 한탄하며, 스스로 육무재(로쿠무사이)라고 칭했다.[4]

그러나 하야시는 게으르지 않았다. 그는 당시의 많은 주요 란가쿠 학자, 경제학자, 군사 과학자들과 활발한 서신 왕래를 유지했다. 그는 또한 1777년 나가사키로 여행하여 특히 네덜란드 선박의 크기와 강점에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네덜란드 오페르후프트로부터 러시아가 시베리아에서 아시아로 남하하려는 의도를 알게 되었다. 이것은 그가 북쪽의 마쓰마에로 여행을 떠나게 했고, 그는 나라의 해안 방어의 약점과 외부 세계에 대한 무지를 점점 더 인식하게 되었다.[1]

2. 2. 학문적 활동과 저술

하야시 시헤이는 에도에서 600 곡의 하타모토인 하야시 곤효에 요시미치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도쿠가와 막부에서 문서 담당관으로 일했다.[1] 겐분 3년(1738년), 막신 오카무라 요시미치의 차남으로 에도에서 태어났다.[4] 그러나 하야시가 겨우 세 살 때, 그의 아버지는 어떤 이유로 파면되어 로닌이 되었다.[1]

얼마 안 되어, 장녀와 차녀는 센다이 번의 에도 저택에 시중들게 되었고, 센다이 번 5대 번주 다테 요시무라의 시녀로 섬겼다. 차녀 나오(키요)는 6대 번주가 되는 무네무라의 측실로 발탁되어, 오키요노카타라고 불리게 되었다. 오키요노카타는 1남 1녀를 낳았다.[4] 그녀의 영향으로 하야시 쥬고는 센다이 번의 공식 의사로 임명되어 150곡의 봉급을 받았고, 하야시의 형제 하야시 카젠은 그의 후계자로 입양되었다.[1]

자평은 자신의 교육 정책과 경제 정책을 번 상층부에 진언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고, 녹을 반납하고 형 도료의 빈방에 기거하며, 북쪽은 마쓰마에에서 남쪽은 나가사키까지 전국을 행각한다. 나가사키와 에도에서 배우고, 오쓰키 겐타쿠, 우다가와 겐스이, 가쓰라가와 호슈, 구도 헤이스케 등과 교우한다.[4] 그는 당시의 많은 주요 란가쿠 학자, 경제학자, 군사 과학자들과 활발한 서신 왕래를 유지했다. 그는 또한 1777년 나가사키로 여행하여 특히 네덜란드 선박의 크기와 강점에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네덜란드 오페르후프트로부터 러시아가 시베리아에서 아시아로 남하하려는 의도를 알게 되었다. 이것은 그가 북쪽의 마츠마에로 여행을 떠나게 했고, 그는 나라의 해안 방어의 약점과 외부 세계에 대한 무지를 점점 더 인식하게 되었다.[1] 러시아의 위협을 설파하며, "대략 니혼바시에서 유럽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는 일수로나 된다"라고 갈파하여, 당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4]

1786년, 그는 삼국통람도설을 출판하여 조선, 류큐 왕국, 에조와의 관계에서 일본의 지정학적 위치를 자세히 설명했다. 그는 원나라가마쿠라 시대에 시도했던 것처럼 언젠가 일본을 침략하려 할 수 있다는 우려를 제기했고,[1] 또한 일본이 홋카이도의 북부 변경을 인구 증가시키고 개발할 필요성을 강조했다.[1]

1787년, 그는 16권의 저서인 《해국병담》(해양 국가의 군사 방위)을 출판하여 일본의 해상 취약성과 일본이 서양 군사 과학을 채택하고 사무라이를 재교육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조직적인 훈련 운동의 부족을 불평하고, 단순한 개인적인 무술 훈련보다는 ''조련''(팀워크 훈련)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조선, 대포 및 기타 군사 설계에 대한 기술적인 설명을 제공했다. 그는 특히 막부의 쇄국 국가 고립 정책을 비판했다.[2] 『해국병담』은 해방의 필요성을 설하는 군사 서적이었기 때문에, 출판에 협력해 줄 판본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자평은, 16권·3분책에 달하는 대저의 판목을 스스로 조각하고, 자비 출판으로 스하라야 이치베에서 간행했다.[4] 『해국병담』의 서문을 쓴 것은, 센다이 번 의사 구도 헤이스케였다.[4]

『해국병담』은 간세이 3년(1791년), 센다이에서 상재되었다. 그러나 막부 관료 이외의 자가 막정에 간여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고, 두 저서는 모두 발금 처분이 내려졌으며, 『해국병담』은 판목 몰수의 처분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스스로 사본을 만들고, 그것이 다시 사본을 낳는 등 하여 후에 전해졌다.[4] 하야시는 가택 연금에 처해졌다. 그는 이듬해 사망했다.[2]

하야시는 다카야마 히코쿠로, 가모 준페이와 함께 "간세이 시대의 세 기인"(寛政の三奇人)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다.[1]

2. 3. 탄압과 죽음

하야시 시헤이는 에도에서 600 곡의 하타모토인 하야시 곤효에 요시미치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도쿠가와 막부에서 문서 담당관으로 일했다.[1] 그러나 하야시가 겨우 세 살 때, 그의 아버지는 어떤 이유로 파면되어 로닌이 되었다. 하야시와 그의 형제는 그의 삼촌 하야시 쥬고, 즉 의사에 의해 길러졌다.[1]

하야시는 센다이 번의 에도 저택에서 다테 요시무라를 섬기는 누나 키요가 있었다. 그녀는 센다이 번의 6대 다이묘인 다테 무네무라의 첩이 되었고, 그녀의 영향으로 하야시 쥬고는 센다이 번의 공식 의사로 임명되어 150곡의 봉급을 받았다.[1] 다테 요시무라가 사망하자 그들은 센다이로 이주했다. 그러나 하야시 자신은 공식적인 직위나 봉급이 없어 가문 내에서 실업 상태로 남았다.[1]

그는 "여섯 개의 부재"라는 시를 썼는데, "나는 부모도, 아내도, 아들도, 인쇄할 블록도, 돈도 없으며, '죽음 없음'을 바란다."라고 표현했다.[1]

하야시는 당시의 많은 주요 란가쿠 학자, 경제학자, 군사 과학자들과 활발한 서신 왕래를 유지했다.[2] 1777년 나가사키로 여행하여 네덜란드 선박의 크기와 강점에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네덜란드 오페르후프트로부터 러시아가 시베리아에서 아시아로 남하하려는 의도를 알게 되었다.[2] 그는 북쪽의 마쓰마에로 여행을 떠났고, 나라의 해안 방어의 약점과 외부 세계에 대한 무지를 점점 더 인식하게 되었다.[2]

1786년, 그는 삼국통람도설을 출판하여 조선, 류큐 왕국, 에조와의 관계에서 일본의 지정학적 위치를 자세히 설명했다. 그는 원나라가마쿠라 시대에 시도했던 것처럼 언젠가 일본을 침략하려 할 수 있다는 우려를 제기했고, 일본이 홋카이도의 북부 변경을 인구 증가시키고 개발할 필요성을 강조했다.[1]

1787년, 그는 16권의 저서인 《해국병담》(해양 국가의 군사 방위)을 출판하여 일본의 해상 취약성과 일본이 서양 군사 과학을 채택하고 사무라이를 재교육할 필요성을 강조했다.[2] 그는 조직적인 훈련 운동의 부족을 불평하고, 단순한 개인적인 무술 훈련보다는 ''조련''(팀워크 훈련)의 중요성을 강조했다.[2] 그는 특히 막부의 쇄국 국가 고립 정책을 비판했다.[2] 이 작품은 큰 관심을 받았지만, 1792년 5월에 국가 안보 문제를 공식적인 동의 없이 논의했다는 이유로 금지되었다.[2] 하야시는 가택 연금에 처해졌고, 이듬해 사망했다.[2]

하야시는 다카야마 히코쿠로, 가모 준페이와 함께 "간세이 시대의 세 기인"(寛政の三奇人)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다.[1] 하야시 시헤이의 묘는 센다이시 아오바구의 류운인(龍雲院) 절에 있다.[3] 1942년에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3] 주변 지역은 1967년에 시헤이정(史平町)으로 개칭되었다.[3] 그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비는 센다이성 부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3. 사후 평가 및 영향

하야시 시헤이의 묘는 센다이시 아오바구의 류운인(龍雲院) 절에 있다. 1942년에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3] 주변 지역은 1967년에 시헤이정(史平町)으로 개칭되었다. 그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비는 센다이성 부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하야시 라이스를 발명한 인물은 시헤이의 가계(시헤이의 누나의 자손)라는 설도 있다.

시헤이의 호 육무재(六無斎)를 본떠 오무재(五無斎)(호시나 백조), 팔무재(八無斎)(원다 대육)라고 호를 지은 인물이 있다.

고콘테이 신쇼 5세는 린 부인과의 혼담에 대해 "돈도 없고, 재산도 없고, 입을 것도 없어요. 에도시대에 있던 하야시 시헤이(林子平)라는 사람의 친척 같은 거요."라고 못 박았다.[11]

네덜란드와 독일을 거쳐 러시아에서 유럽 각 언어로 번역된 『삼국통람도설』은 지도가 정확하지 않아 혼슈·시코쿠·규슈 이외의 지역은 상당히 엉성하게 그려져 있었다.[7] 한국중국의 일부 연구자는 이 독일어판 혹은 프랑스어판이 페리 제독과의 오가사와라 제도 영유에 관한 미일 협상 시에 일본의 영유권을 나타내는 증거로 사용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삼국통람도설』을 독도·쓰시마 영유권의 증거라고 주장하고, 중국에서는 센카쿠 열도 영유권의 증거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19세기에 미일 간에 오가사와라 제도의 영유권을 다툰 사실은 없으며, 미일 양국에 그러한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7] 『삼국통람도설』이 오가사와라 제도 영유에 있어서의 미일 협상에 사용되었다는 이야기는 『가호쿠 신보』에 게재된 하야시 시헤이를 소재로 한 신문 소설이 원천이라고 여겨진다(와카마쓰 마사시 "오가사와라 제도의 영유와 하야시 시헤이 은인설의 전개" 『일본사 연구』536,2007.4,p.103)[8]

하야시 시헤이가 『삼국통람도설』 안에 그린 "삼국접양지도"에는 주로 러시아, 조선, 일본이 그려져 있고, 조선 바로 동쪽에 섬이 하나, 그리고 동해 중앙에 죽도라고 표기된 섬과 그 옆에 작은 섬이 그려져 있으며, 이 세 섬은 모두 조선과 같은 노란색으로 칠해져 일본 영토가 아니라고 구별되어 있다. 중앙의 두 섬 옆에는 "조선지지야"라고 표기되어 있어, 죽도(울릉도)와 그 바로 동쪽에 있는 작은 섬이 조선 영토라고 표시하고 있다. 호사카 유지는 이 작은 섬이 송도(독도)이며, 조선 영토라고 주장한다. 그 이유로, 『삼국통람도설』의 일본 지도 부분은 나가쿠보 세키스이의 지도에 의거했다고 지적하고 있다.[9]

이에 대해 일본 측에서는, 이 "죽도"는 울릉도에서 약 2km 거리에 있는 죽서라고 반론하고 있다. 이 기술은 1711년에 박석창이 제출한 "울릉도 도형"의 계통을 잇는 것으로, "그 죽도에는, '이 섬에서 은주를 바라본다/조선도 보인다'라고 적힌 또 하나의 부기가 있다. 이것은 하야시 시헤이가 '삼국접양도'를 작도할 때, 그 중심에 놓았던 나가쿠보의 『일본여지노정전도』에 유래하는 문구로, 사이토 호센의 『은주시청합기』로부터의 인용문이다. 거기에 하야시 시헤이가 다시 '조선노지야'라고 주석을 붙인 것은, 『일본여지노정전도』에서는 울릉도를 일본 영토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석의 대상은 울릉도만 해당되기 때문이다"[10]

3. 1. 삼국통람도설과 영토 문제

네덜란드와 독일을 거쳐 러시아에서 유럽 각 언어로 번역된 『삼국통람도설』은 지도가 정확하지 않아 혼슈·시코쿠·규슈 이외의 지역은 상당히 엉성하게 그려져 있었다.[7] 한국중국의 일부 연구자는 이 독일어판 혹은 프랑스어판이 페리 제독과의 오가사와라 제도 영유에 관한 미일 협상 시에 일본의 영유권을 나타내는 증거로 사용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삼국통람도설』을 독도·쓰시마 영유권의 증거라고 주장하고, 중국에서는 센카쿠 열도 영유권의 증거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19세기에 미일 간에 오가사와라 제도의 영유권을 다툰 사실은 없으며, 미일 양국에 그러한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7] 『삼국통람도설』이 오가사와라 제도 영유에 있어서의 미일 협상에 사용되었다는 이야기는 『가호쿠 신보』에 게재된 하야시 시헤이를 소재로 한 신문 소설이 원천이라고 여겨진다(와카마쓰 마사시 "오가사와라 제도의 영유와 하야시 시헤이 은인설의 전개" 『일본사 연구』536,2007.4,p.103)[8]

하야시 시헤이가 『삼국통람도설』 안에 그린 "삼국접양지도"에는 주로 러시아, 조선, 일본이 그려져 있고, 조선 바로 동쪽에 섬이 하나, 그리고 동해 중앙에 죽도라고 표기된 섬과 그 옆에 작은 섬이 그려져 있으며, 이 세 섬은 모두 조선과 같은 노란색으로 칠해져 일본 영토가 아니라고 구별되어 있다. 중앙의 두 섬 옆에는 "조선지지야"라고 표기되어 있어, 죽도(울릉도)와 그 바로 동쪽에 있는 작은 섬이 조선 영토라고 표시하고 있다. 호사카 유지는 이 작은 섬이 송도(독도)이며, 조선 영토라고 주장한다. 그 이유로, 『삼국통람도설』의 일본 지도 부분은 나가쿠보 세키스이의 지도에 의거했다고 지적하고 있다.[9]

이에 대해 일본 측에서는, 이 "죽도"는 울릉도에서 약 2km 거리에 있는 죽서라고 반론하고 있다. 이 기술은 1711년에 박석창이 제출한 "울릉도 도형"의 계통을 잇는 것으로, "그 죽도에는, '이 섬에서 은주를 바라본다/조선도 보인다'라고 적힌 또 하나의 부기가 있다. 이것은 하야시 시헤이가 '삼국접양도'를 작도할 때, 그 중심에 놓았던 나가쿠보의 『일본여지노정전도』에 유래하는 문구로, 사이토 호센의 『은주시청합기』로부터의 인용문이다. 거기에 하야시 시헤이가 다시 '조선노지야'라고 주석을 붙인 것은, 『일본여지노정전도』에서는 울릉도를 일본 영토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석의 대상은 울릉도만 해당되기 때문이다"[10]

4. 저서

wikitext


  • 『新編林子平全集』일본어 전 5권 야마기시 토쿠헤이(山岸徳平), 사노 마사미(佐野正己) 공편 다이이치 서방(第一書房) 1978년-1980년
  • 『林子平全集』일본어 전 2권 야마모토 조(山本武夫) 편 세이카츠샤(生活社) 1943년-1944년

5. 가계

하야시 시헤이의 아버지는 오카무라 요시미치이며, 어머니는 불명이다. 양아버지는 하야시 주고(하야시 도메이)이다. 누나로는 나요와 나오(키요)가 있다. 나오는 센다이 번 5대 번주 다테 요시무라의 시녀였으며, 후에 6대 번주 다테 무네무라의 측실이 되어 오키요노카타로 불렸다. 형은 하야시 유랴쿠(하야시 카요시)이며, 여동생은 타치이다.

6. 관련 작품


  • 미나모토 타로의 작품 풍운아들에 등장한다.
  • Lederer, Friedrich가 번역 및 편집한 ''어떤 해상 국가의 국방력에 대한 담론''(『개국병담』)은 2003년 뮌헨의 Iudicium에서 출판되었으며, 이 작품의 최초 외국어 번역본이다.
  • 우에마츠 미소리의 『조잔 두 사람』은 주오코론신샤에서 2008년에 출판되었으며, 나카야마 요시히데 문학상을 수상했다.

7. 참고 서적


  • 히라 시게미치, 《하야시 시헤이 - 그 사람과 사상》, 호분칸 출판, 1977년
  • 나가타 코키치 편, 《하야시 시헤이》, 다이닛폰 유벤카이 강담사, 1943년
  • 나카이 미츠오, 《선철 하야시 시헤이 선생의 생애》, 하야시 시헤이 선생 200년 현창 실행 위원회, 1992년
  • 《하야시 시헤이 전 - 그 생애와 사상 기획전 도록》, 센다이시 박물관, 1992년

8. 기타


  • 하야시 라이스를 발명한 인물은 하야시 시헤이(자평)의 가계(자평의 누나의 자손)라는 설도 있다.
  • 자평의 호 육무재(六無斎)를 본떠 오무재(五無斎)(호시나 백조), 팔무재(八無斎)(원다 대육)라고 호를 지은 인물이 있다.
  • 고콘테이 신쇼 5세는 린 부인과의 혼담에 대해 "돈도 없고, 재산도 없고, 입을 것도 없어요. 에도시대에 있던 하야시 시헤이라는 사람의 친척 같은 거요."라고 못 박았다.[11]

참조

[1] 서적 China in the Tokugawa World Harvard University Press
[2] 서적 The Making of Modern Japan https://archive.org/[...] Harvard University Press
[3] 웹사이트 Agency for Cultural Affairs - Cultural Heritage Online http://bunka.nii.ac.[...]
[4] 웹사이트 説明板のご案内 https://www.city.sen[...] 仙台市 2024-01-22
[5] 서적 綺堂むかし語り 旺文社文庫
[6] 서적 贈位諸賢伝 増補版 上 近藤出版社
[7] 문서
[8] 웹사이트 Web竹島問題研究所 https://www.pref.shi[...] 島根県ホームページ
[9] 서적 〈独島・竹島〉の日韓史
[10] 웹사이트 Web竹島問題研究所 https://www.pref.shi[...] 島根県ホームページ
[11] 기타 びんぼう自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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