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
1. 개요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는 일제강점기 징용 등으로 히로시마에서 원폭 피해를 입은 한국인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1970년 처음 건립되었으며, 거북이 받침대 위에 쌍룡이 새겨진 관을 둔 형태이다. 1999년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안으로 이전되었고, 2023년 5월에는 대한민국 대통령 윤석열이 일본 총리 기시다 후미오와 함께 방문하여 헌화했다. 비문에는 한국 민족의 평화 지향성과 원폭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는 내용이 담겨 있다.
| 명칭 |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 |
|---|---|
| 건립 위치 |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
| 좌표 | 34°23′26.7″N 132°27′16.2″E |
| 종류 | 위령비 |
| 비문 내용 | '원폭으로 희생된 2만여 한국인 영령들이여, 부디 편히 잠드소서. 해방된 조국에 돌아와 고이 잠드셔야 하건만, 이역에서 원통하게 스러져간 넋이여! 그대들의 염원을 받들어 이 땅에 평화가 깃들게 하리다. 1970년 4월, 재일한국인 거류민단' |
|---|---|
| 추가 설명 | 1970년 4월에 재일 한국인 거류민단이 세웠다. 위령비에는 원폭으로 희생된 2만여 명의 한국인 영령을 추모하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매년 8월 6일에는 위령비 앞에서 위령제가 열린다. |
| 관련 정보 |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에는 한국인 위령비 외에도 다양한 국적의 원폭 희생자를 기리는 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위령비는 원폭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고 평화를 염원하는 상징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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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 -
석파정
석파정은 철종 때 영의정 김흥근의 별서였으나 흥선대원군이 소유하게 되면서 그의 호를 따 석파정이라 이름 붙여졌고, 현재는 서울미술관의 부대시설로 운영되며 중국풍 정자와 한국전쟁 이후 고아원으로 사용된 역사를 지니고 있다. -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
원폭 돔
원폭 돔은 1915년 히로시마현 물산진열관으로 준공되어 1945년 원자폭탄 투하 당시 비교적 온전한 형태로 남아 원폭의 참상을 보여주는 상징이 되었으며, 1996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핵무기 없는 세계와 평화를 향한 국제적 노력의 중요한 상징으로 여겨진다. -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
히로시마 국제회의장
히로시마 국제회의장은 1989년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내에 재건축되어 개관한 국제회의 시설로, 다양한 회의실과 부대시설을 갖추고 재단법인 히로시마 평화문화센터가 운영하며 일본의 공공건축 100선에 선정될 정도로 건축적 가치를 인정받는다. -
일본에 거주한 한국인 -
막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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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거주한 한국인 -
지석영
지석영은 조선 후기의 의학자이자 개화 사상가로, 종두법 도입에 기여했지만 일제강점기에는 그의 업적이 식민지배 정당화에 이용되었다는 비판적 시각도 존재하며, 《우두신설》 등의 저서를 통해 의학 지식을 전파한 다재다능한 인물이다.
2. 건립 배경
1970년 4월 10일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 히로시마 현 본부가 주도하여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를 건립하였다. 이 위령비는 일제강점기 징용 등으로 히로시마에 거주하다 원폭 피해를 입은 한국인 희생자들의 영령을 위로하고, 원폭의 비극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건설되었다. 비석은 거북이를 형상화한 받침대 위에 쌍룡이 새겨진 관이 있는 구조인데, 이는 "죽은 자의 영혼은 거북의 등에 올라 승천한다"는 한국의 전통적인 믿음에 따른 것이다.
비석은 대한민국에서 가져온 명석(높이 5m, 무게 10톤)으로 만들어졌다. 비문 뒷면에는 일본어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 번역되어 있다. "유구한 역사를 통해, 우리 한 민족은 타 민족의 것을 탐내지 않았고, 타 민족을 침략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중략) 그러나, 5천 년의 긴 민족의 역사를 통해, 여기에 모신 2만여 위 영령이 겪었던 것과 같은, 슬프고도 고통스러운 일은 일찍이 없었습니다. 한 민족이 나라 없는 슬픔을 뼈저리게 맛본 것이, 이 태평양 전쟁을 통해서였고, 그 중에서도 정점을 이루었던 것이 원폭 투하의 비극이었습니다."
2023년 5월 21일, G7 히로시마 정상 회의에 참석한 일본 기시다 후미오 내각총리대신과 대한민국 윤석열 대통령은 양국 정상 부인(기시다 유코, 김건희)과 함께 이 위령비를 방문하여 헌화 및 묵념을 했다. 한국 대통령이 이 위령비를 방문한 것은 처음이었다.
2.1. 초기 건립 과정
1970년 4월 10일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 히로시마 현 본부가 주도하여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를 건립하였다. 비석 전면의 표제는 국회의장 이효상이 썼고, 뒷면의 비문은 국문학자이자 서울대학교 교수 한갑수가 지었다. 히로시마시의 반대로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내 건립이 어려워지자 이우가 피폭을 당한 후 발견된 장소였던 히로시마 아이오이 교 근처에 세워졌다.
2.2. 건립 위치와 이전
1970년 4월 10일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 히로시마 현 본부에 의해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가 건립되었다. 히로시마시의 반대로 위령비의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내 건립이 어려워지자, 이우가 피폭당한 후 발견된 장소였던 히로시마 혼가와의 아이오이 교 근처에 세워졌다. 1999년 7월 21일 위령비는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안으로 이전되었다.
3. 위령비의 특징
비석은 거북이를 형상화한 받침대 위에 쌍룡이 새겨진 관이 있는 구조이다. 이는 "죽은 자의 영혼은 거북의 등에 올라 승천한다"는 한국의 전통적인 믿음에 따른 것이다.
비석은 모두 대한민국에서 가져온 명석으로 만들어졌으며, 높이 5m, 무게 10톤이다. 징용으로 히로시마에서 피폭된 동포들의 넋을 위로하고, 원폭이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건설되었다. 비문 뒷면에는 일본어로 번역된 글이 새겨져 있는데, "유구한 역사를 통해, 우리 한 민족은 타 민족의 것을 탐내지 않았고, 타 민족을 침략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중략) 그러나, 5천 년의 긴 민족의 역사를 통해, 여기에 모신 2만여 위 영령이 겪었던 것과 같은, 슬프고도 고통스러운 일은 일찍이 없었습니다. 한 민족이 나라 없는 슬픔을 뼈저리게 맛본 것이, 이 태평양 전쟁을 통해서였고, 그 중에서도 정점을 이루었던 것이 원폭 투하의 비극이었습니다.・・・"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