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흥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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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함흥차사는 조선 태조 이성계가 정종에게 양위한 후 함흥으로 거처를 옮긴 사건과 관련된 일련의 사건들을 가리킨다. 태종 이방원은 부친 이성계를 한양으로 모셔오기 위해 여러 차례 사신(차사)을 보냈으나, 이성계는 처음에는 이를 거부하고 함흥에 머물렀다. 이 과정에서 무학대사가 차사로 파견되어 환궁을 약속받기도 했지만, 이성계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소요산에 머물렀다. 조사의의 난 이후, 이성계는 한양으로 돌아왔으며, 이 사건은 야사 속에서 다양한 이야기로 재구성되어 전해진다. 함흥차사는 오늘날 '소식이 늦거나, 돌아오지 않음'을 비유하는 관용어로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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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흥차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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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흥차사 | |
![]() | |
정보 | |
유형 | 고사성어 |
유래 | 태조 이성계 |
뜻 | 심부름을 간 사람이 돌아오지 않음 |
비슷한말 | 감감무소식 오리무중 풍전등화 |
2. 사건 경위
1398년 태조 이성계가 정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함흥으로 간 뒤, 1400년 태종 이방원이 즉위하였다.[2] 태종은 아버지 이성계를 모셔오기 위해 성석린을 차사로 보냈으나, 태조는 방번, 방석, 이제 등 태종에게 죽임을 당한 이들을 언급하며 처음에는 거절하였다.[2]
1401년 4월, 태조는 성석린의 청을 받아들여 한양으로 돌아왔으나, 그해 11월 다시 한양을 떠났다.[2] 태종은 무학대사를 함흥에 보내 태조의 환궁을 요청하였고, 태조는 환궁을 약속했지만 소요산에 머물렀다.[2]
1402년 1월, 태종은 다시 성석린을 보냈지만, 성석린은 혼자 돌아왔다.[2] 같은 해 조사의의 난이 발생했고, 난이 진압된 후인 12월에 태조는 한양으로 돌아왔다.[3][4]
2. 1. 이성계의 함흥행과 태종의 즉위
1398년 태조 이성계가 정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함흥으로 갔다.[2] 1400년 태종 이방원이 즉위하였다.[2]2. 2. 태종의 차사 파견과 이성계의 반응
1398년 태조 이성계가 정종에게 양위한 뒤 함흥으로 간 후, 1400년 태종 이방원이 즉위하였다. 태종은 아버지 이성계를 모셔오기 위해 성석린을 차사로 보냈다.[2]《태종실록》에 따르면, 태종 1년(1401년) 4월, 이성계는 성석린의 요청을 받아들여 한양으로 환궁하였다. 그러나 그해 11월에 다시 한양을 떠났고, 1402년 1월 태종은 다시 성석린을 보내 환궁을 요청하였다.[2]
이때 태조는 부처를 모시기 위해 돌아갈 수 없다고 거절하였으나, 성석린은 "염불하고 불경을 읽는 일이 어찌 꼭 소요산이라야만 하겠습니까?"라고 설득했다. 이에 태조는 "그대들의 뜻은 이미 알고 있으나 내가 부처를 좋아하는 것은 다만 두 아들과 한 사람의 사위를 위함이다."라고 답하며, 방번, 방석, 이제 등 태종에게 죽임을 당한 이들을 언급했다.[2]
성석린은 빈손으로 돌아가 태종에게 태조의 환궁 여부가 불확실하다고 보고했다. 이후에도 성석린은 두 차례나 차사로 태조에게 갔으나, 태조는 끝내 환궁하지 않고 소요산에 머물렀다.[2]
태종은 왕사(王師) 무학대사를 차사로 보내기도 하고, 예문관 대제학 이직(李稷) 등을 보내 문안케 하기도 하였다. 태조는 시위 이자분(李自芬)을 태종에게 보내 제사에 쓸 물건을 요구하기도 하고, 시자에게 태종이 자신에게 사람을 보내지 않아 섭섭하다고 말하기도 했다.[2]
2. 3. 무학대사의 역할
무학대사는 태종이 함흥으로 돌아간 태조를 설득하기 위해 보낸 인물이다. 《태종실록》과 《오산설림》의 기록에 따르면, 태종 1년(1401년) 11월에 이성계가 다시 함흥으로 돌아가자 태종이 무학대사를 차사로 보냈다.[2]무학이 함흥에 도착하여 태조를 만나자, 태조는 "그대도 나를 달래러 왔구나"라고 말했다. 무학은 웃으면서 "전하께서 빈도와 서로 안 지가 수십 년인데 제 마음을 모르십니까? 저는 특별히 전하를 위로하기 위해 왔을 뿐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무학은 함흥 본궁에 머물면서 태조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태종의 단점만 말하여 태조의 신임을 얻었다.[2]
수십 일 뒤, 무학이 밤중에 태조에게 청하자 태조는 환궁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태조가 소요산에 머물면서 돌아오지 않자, 태종은 성석린을 소요산으로 보냈다.[2]
2. 4. 조사의의 난과 태조의 환궁
1402년 조사의가 함경도에서 난을 일으켰다. 조정에서는 박순, 송류 등을 보내 반군을 회유하려 했으나, 이들은 오히려 살해당했다. 초기에는 반군이 우세하여 관군의 선봉 이천우를 격파하기도 했다. 그러나 중앙에서 증원된 출정군이 관군과 합류하여 군을 재정비하고 조사의의 난을 진압하였다.[3]《태종실록》 2년(1402) 12월 8일 기사에 따르면, 조사의의 난이 진압된 후인 12월 8일에 태조가 한양으로 돌아왔다.[4] 바로 다음 날, 난을 진압하고 돌아온 이천우와 이빈에게는 안마(鞍馬)를, 이성도 절제사였던 최운해에게는 말을 하사했다는 기록이 있다.[4] 이는 조사의의 난 진압이 태조의 최종적인 환궁에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준다.
3. 야사 속 함흥차사
태종실록에는 이성계가 태종 1년(1401년)에 환궁하였다가 그해 11월에 다시 한양을 떠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정사와는 달리 야사에는 함흥차사에 관한 여러 이야기가 전해진다.[2]
- '''박순과 함흥차사''': 《노봉집시장》에 따르면, 가는 사람마다 죽어 돌아오지 못하는 상황에서 박순이 자원하여 함흥으로 갔다. 박순은 새끼 딸린 어미 말을 끌고 가거나, 장기를 두는 중에 쥐가 새끼를 안고 떨어지는 모습을 보여주는 등, 부모에 대한 정을 강조하며 태조의 귀경을 설득했다. 그러나 박순은 태조의 명령으로 용흥강을 건너던 중 병사들에게 죽임을 당한다. 이 이야기는 야사일 뿐이며, 실제 박순은 조사의의 난 때 함흥에서 죽임을 당했다.[2]
- '''태조, 태종에게 활을 쏘다''': 하륜은 태종에게 태조의 진노가 풀리지 않았으니 대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야사에 따르면, 태조는 태종을 보자마자 활을 쏘았으나, 태종은 기둥 뒤로 피했고 화살은 기둥에 꽂혔다. 이를 본 태조는 “모두 하늘의 뜻이로다”라고 탄식하며 옥새를 건넸다고 한다. 또한 태종이 태조에게 잔을 올릴 때도 하륜의 조언대로 직접 올리지 않아, 태조가 철퇴를 꺼내 놓으며 탄식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야사에서는 이 장소가 한양의 살곶이다리 근처라고 전하고 있으나, 《태종실록》에 따르면 황해도 금천의 금교역(金郊驛)이었으며, 위와 같은 살기등등한 장면은 없었을 것으로 추측된다.[2]
3. 1. 성석린과 함흥차사
태종실록에는 이성계가 성석린의 요청을 받아들여 태종 1년(1401년) 4월에 환궁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해 11월에 다시 한양을 떠나자, 다음 해 1월 다시 성석린을 보내 환궁을 요청한다.[2]이때 태조는 부처를 모시기 위해 돌아갈 수 없다고 거절하자, 종친과 함께 환궁을 요청하던 성석린은 “염불하고 불경을 읽는 일이 어찌 꼭 소요산(消遙山)이라야만 하겠습니까?”라고 따졌다. 이에 태조는 “그대들의 뜻은 이미 알고 있으나 내가 부처를 좋아하는 것은 다만 두 아들과 한 사람의 사위를 위함이다.”라고 본심을 밝혔다. 두 아들은 방원에게 죽은 방번과 방석을 말하고, 한 사람의 사위는 역시 방원에게 죽은 경순공주의 부마 이제(李濟)이다.[2]
성석린은 그대로 빈손으로 돌아가 태종에게 “태상왕께서 빨리 돌아오실지, 늦게 돌아오실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라고 보고한다. 이후에도 성석린은 두 차례나 차사로 태조에게 갔으나 살아 돌아왔다.[2] 태종이 태조에게 보낸 성석린의 이야기는 명신록에 실려 있다.[2][5]
태종 이방원이 함흥차사로 자원한 성석린을 보내 아버지인 태조를 모셔오게 한다. 성석린이 밥을 짓는 시늉을 하였더니 태조가 오랜 지기인 그를 초대하였다. 성석린이 밤중에 부자 사이의 변고를 처리하는 도리를 말하자 태조는 “너도 너의 임금을 위해서 나를 달래려고 온 것이냐?”라고 의심했다. 이에 성석린은 “만약 그래서 왔다면 신(臣)의 자손은 반드시 눈이 멀어 장님이 될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 말을 믿고 태조가 한양으로 돌아왔다.[2]
《명신록》에 따르면, 뒷날 성석린의 맏아들 지도(至道)와 지도의 아들 귀수(龜壽)와 귀수의 아들이 모두 생모의 뱃속에서 배냇병신으로 눈이 멀었다. 석린의 작은 아들 발도(發道)는 후사가 없었다고 한다.[2]
3. 2. 박순과 함흥차사
《노봉집시장》에 함흥차사 이야기가 전해 오는데, 그때 함흥차사가 박순이었다. 가는 사람마다 죽고 돌아오지 못하니 태종이 여러 신하들에게 “다음에는 누가 가겠는가?”라고 물었으나 아무도 응하는 신하가 없었다. 그러자 판승추부사(判承樞府事) 박순이 자원하였다.박순은 새끼 딸린 어미 말을 함흥까지 끌고 가서 “어미를 따르는 말도 저러한데 하물며 인간의 부모에 대한 정이야 얼마나 깊겠습니까?”라며 태조의 귀경을 설득했다. 며칠을 묵으며, 하루는 태조와 박순이 장기를 두는데 천장에서 쥐가 새끼를 안고 떨어져 죽을 지경이 되었으나 서로 떨어지지 않았다. 이에 박순이 장기판을 제쳐놓고 눈물을 흘리며 돌아가자고 청하니 태조가 돌아가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그러나 주변 사람이 박순을 죽여야 한다고 태조에게 고하자, 태조는 이미 박순이 용흥강을 건넜으리라 여겨 “용흥강을 건넜다면 쫓지 말라”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병이 나서 쉬다가 용흥강을 건널 때, 쫓아 온 병사에 의해 죽음을 맞았다.
이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야사일 뿐 사실은 아니며, 실제로 박순은 조사의의 난 때 함흥에서 도순문사 박만(朴蔓)을 설득하다가 죽임을 당한다.[2]
3. 3. 태조, 태종에게 활을 쏘다
태조가 함흥에서 돌아올 때, 여러 야사에서 두 사람의 갈등을 이야기한다.[2]하륜은 태종에게 태조의 진노가 아직 풀리지 않았으니,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야 한다고 조언하며, 큰 장막을 받치는 굵고 높은 기둥을 많이 세우게 하라고 하였다. 태종은 이 조언을 따랐다. 태조는 태종을 보자마자 활을 쏘았으나, 태종은 재빨리 기둥 뒤로 몸을 피했고 화살은 기둥에 꽂혔다. 이를 본 태조는 “모두 하늘의 뜻이로다”라고 탄식하며, 태종에게 옥새를 건네었다. 또한 태종이 태조에게 잔을 올릴 때도, 하륜의 조언대로 직접 잔을 올리지 않고 중간의 내시를 통해 올리자, 태조는 소매 속에서 철퇴를 꺼내 놓으며 “모두 하늘의 뜻이로다”라고 말했다.
야사에서는 이 장소가 한양의 살곶이다리 근처라고 전하고 있으나, 《태종실록》에 따르면 이날은 태종 2년 12월 8일이며, 장소는 황해도 금천의 금교역(金郊驛)이었다. 또한 위와 같은 살기등등한 장면은 없었을 것으로 추측된다.[2]
4. 역사적 해석과 평가
함흥차사 사건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을 넘어, 다양한 해석과 평가를 낳았다.
태종실록과 같은 정사와 야사의 기록은 함흥차사 사건에 대해 서로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정사에서는 이성계가 성석린의 설득으로 비교적 순조롭게 환궁하는 것으로 묘사되지만, 야사에서는 태조가 차사들을 죽이거나 태종을 죽이려 하는 등 극단적인 갈등이 강조된다. 이는 정사가 객관적 사실 기록을 중시하는 반면, 야사는 흥미와 교훈을 위해 극적인 요소를 가미하고 민중의 상상력을 반영하기 때문이다.[2]
함흥차사 사건은 왕위 계승을 둘러싼 이성계와 태종 부자간의 권력 투쟁과 갈등을 보여준다. 태조는 아들들의 죽음에 대한 슬픔과 왕위에서 물러난 것에 대한 복잡한 심경을 가지고 있었고, 태종은 왕권 강화를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아버지와의 갈등을 겪었다.[2]
민중들은 함흥차사 이야기를 통해 권력의 무상함과 인간적인 고뇌를 느꼈다. 특히, 박순과 관련된 야사는 비극적인 죽음을 통해 부자간의 정과 권력의 냉혹함을 대비시켜 보여준다. 이러한 이야기는 민간에 널리 퍼져 다양한 형태로 전승되며 함흥차사 설화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2]
4. 1. 정사와 야사의 차이 분석
《태종실록》과 같은 정사에 기록된 내용과 야사에 전해지는 함흥차사 이야기는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정사에서는 태조 이성계가 성석린의 요청을 받아들여 비교적 순조롭게 환궁하는 것으로 묘사되지만, 야사에서는 태조가 차사들을 죽이거나 태종을 죽이려 하는 등 극단적인 갈등 상황이 부각된다.[2]《태종실록》에는 태종 2년(1402년) 12월에 태조가 평양에서 시자에게 "국왕(태종)이 사람을 보내지 않았으니 감정이 없지 않으리라"라고 말하며, 오히려 차사를 보내지 않아 섭섭해하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2] 또한 성석린이 여러 차례 태조에게 차사로 갔지만 무사히 돌아왔다는 기록도 있다.[2][5]
반면, 야사인 《노봉집시장》에는 함흥차사로 간 박순이 태조를 설득하는 데 성공하지만, 결국 돌아오는 길에 죽임을 당하는 비극적인 이야기가 전해진다.[2] 이는 실제 역사에서 박순이 조사의의 난 때 사망한 사실과는 다르다.[2]
태조가 한양으로 돌아올 때 태종을 활로 쏘려 했다거나, 철퇴를 꺼내 위협했다는 야사의 내용 역시 《태종실록》에 기록된 황해도 금천의 금교역(金郊驛)에서의 만남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2]
이러한 차이는 정사가 비교적 객관적인 사실 기록을 중시하는 반면, 야사는 흥미와 교훈을 위해 극적인 요소를 가미하고 민중의 상상력을 반영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특히 함흥차사 이야기는 왕권 교체 과정에서 발생한 부자간의 갈등을 극적으로 보여주면서, 권력의 무상함과 인간적인 고뇌를 강조하는 민간의 정서를 반영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4. 2. 권력 투쟁과 부자 갈등
權力鬪爭|권력투쟁중국어과 부자 갈등은 조선 초기 왕권 강화 과정에서 나타난 현상으로, 함흥차사 사건을 통해 그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이성계와 태종 부자간의 갈등은 왕위 계승을 둘러싼 권력 투쟁의 핵심이었다.태종실록에 따르면, 태종 1년(1401년) 4월, 성석린의 요청을 받아들여 이성계가 환궁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그해 11월 다시 한양을 떠났고, 이듬해 1월 성석린이 다시 환궁을 요청했다. 이때 이성계는 부처를 모셔야 한다며 거절했지만, 성석린은 "염불하고 불경을 읽는 일이 어찌 꼭 소요산이라야만 하겠습니까?"라고 반박했다. 이에 이성계는 "내가 부처를 좋아하는 것은 다만 두 아들과 한 사람의 사위를 위함이다"라고 속마음을 밝혔다. 여기서 두 아들은 이방원에게 죽은 이방번과 이방석을, 사위는 이제를 가리킨다.[2]
이후에도 성석린은 여러 차례 차사로 이성계를 찾아갔으나, 이성계는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이성계가 함흥에서 돌아올 때에도 여러 야사에서 두 사람의 갈등이 묘사된다.[2]
야사에 따르면, 태종이 교외로 나가 이성계를 맞이하려 하자, 하륜 등이 만류하며 이성계의 분노가 풀리지 않았으니 대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태종은 굵고 높은 기둥을 세우게 했고, 이성계가 활을 쏘자 기둥 뒤로 피했다. 이성계는 "모두 하늘의 뜻이로다"라며 태종에게 옥새를 건넸다고 한다. 또한, 태종이 잔을 올릴 때도 하륜의 조언대로 직접 올리지 않고 내시를 통해 올리자, 이성계는 소매 속에서 철퇴를 꺼내 놓으며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이러한 장면은 살곶이다리 근처에서 벌어졌다고 알려져 있지만, 《태종실록》에 따르면 태종 2년 12월 8일 황해도 금천의 금교역(金郊驛)에서 있었던 일이며, 야사에서 묘사된 것처럼 살기등등한 분위기는 아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2]
태종 2년 11월 3일, 이성계는 환관 김완(金完)을 보내 문안케 하였다. 같은 달 7일에는 예문관 대제학 이직(李稷)을 보내 문안케 하고, 청원군 심종(沈淙)과 예문관 제학 유창(劉敞)을 보내 시위하게 하였다(이들 가운데 이성계에게 죽은 사람은 없다). 태종 2년 12월, 이성계는 평양에서 머무를 때 시자에게 “내가 동북면에 있을 때에 국왕(태종)이 사람을 보내지 않았고, 맹주(孟州, 평안남도 맹산군)에 있을 때도 사람을 보내지 않았으니 감정이 없지 않으리라.”라고 말했다. 그러자 시자는 “주상께서 안평 부원군 이서와 승려 익륜과 설오를 보냈으나 중간에 길이 막혀서 돌아갔습니다”라고 변명했다. 이처럼 이성계는 차사를 죽이기는커녕 보내지 않아 섭섭하다고 말하고 있다.[2]
4. 3. 민중의 인식과 설화 형성
태종이 태조에게 보낸 성석린에 관한 이야기는 《명신록》에 실려 있다.[2][5]태종 이방원은 함흥차사로 자원한 성석린을 보내 아버지 태조를 모셔오게 했다. 성석린이 밥을 짓는 시늉을 하자 태조는 오랜 친구인 그를 초대하였다. 성석린이 밤중에 부자 사이의 변고를 처리하는 도리를 말하자, 태조는 “너도 너의 임금을 위해서 나를 달래려고 온 것이냐?”라고 의심했다. 이에 성석린은 “만약 그래서 왔다면 신(臣)의 자손은 반드시 눈이 멀어 장님이 될 것입니다”라고 대답했고, 이 말을 믿은 태조는 한양으로 돌아왔다.
《명신록》에 따르면, 훗날 성석린의 맏아들 지도(至道)와 그의 아들 귀수(龜壽), 귀수의 아들까지 모두 어머니 뱃속에서 배냇병신으로 눈이 멀었다고 한다. 성석린의 작은 아들 발도(發道)는 후사가 없었다.[2]
야담 수필집 《노봉집시장》(老峰集諡狀)에는 박순이 함흥차사로 간 이야기가 전해진다. 가는 사람마다 죽고 돌아오지 못하자, 태종은 여러 신하에게 “다음에는 누가 가겠는가?”라고 물었으나 아무도 선뜻 나서지 못했다. 이때 판승추부사(判承樞府事)였던 박순이 자원하였다.
박순은 새끼 딸린 어미 말을 함흥까지 끌고 가 “어미를 따르는 말도 저러한데 하물며 인간의 부모에 대한 정이야 얼마나 깊겠습니까?”라며 태조의 귀환을 설득했다. 며칠을 머무는 동안, 하루는 태조와 박순이 장기를 두는데 천장에서 쥐가 새끼를 안고 떨어져 죽을 지경이 되었으나 서로 떨어지지 않았다. 이를 본 박순은 장기판을 제쳐놓고 눈물을 흘리며 돌아가자고 청했고, 태조는 돌아가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이 박순을 죽여야 한다고 태조에게 말하자, 태조는 이미 박순이 용흥강을 건넜을 것이라 짐작하고 “용흥강을 건넜다면 쫓지 말라”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박순은 병 때문에 쉬다가 용흥강을 건널 때 쫓아온 병사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 이야기는 야사일 뿐 사실이 아니며, 실제로 박순은 조사의의 난 때 함흥에서 도순문사 박만(朴蔓)을 설득하다가 죽임을 당했다.[2]
5. 현대적 의미와 영향
함흥차사라는 말은 오늘날에도 심부름을 가서 오지 않거나 늦는 사람을 비유하는 표현으로 자주 사용된다.
참조
[1]
웹인용
判承樞府事朴公請諡行狀(판승추부사박공청시행장)
http://db.itkc.or.kr[...]
2018-11-11
[2]
서적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
김영사
1999-04-20
[3]
웹사이트
태종실록 2년 11월 27일 1번째기사
http://sillok.histor[...]
[4]
웹사이트
태종실록 2년 12월 9일 3번째기사
http://sillok.histor[...]
[5]
서적
조선왕조 기네스북
씨앤드씨그룹
1998-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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