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 전라우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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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해남 전라우수영은 고려 우왕 3년(1377년) 무안 당곶포에 수군처치사영으로 처음 설치된 이후, 조선 세종 22년(1440년) 현재의 해남군 황원곶으로 이전한 전라도 수군의 본영이다. 임진왜란 때에는 명량대첩의 배후 기지 역할을 했으며, 16세기 중반에 축조된 성곽은 4개의 성문, 옹성, 치성, 여장, 수구문 등 다양한 부대시설을 갖추었다. 1895년 갑오개혁으로 폐지될 때까지 존속하며 조선 시대 수군 제도의 변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으로 역사적, 학술적 가치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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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전라우수영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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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정보 | |
주소 |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 남문길 25-2 |
기본 정보 | |
이름 | 해남 전라우수영 |
영문 이름 | Navy Headquarter Protecting Western Region of Jeolla-do Province, Haenam |
유형 | 사적 |
지정 번호 | 535 |
지정일 | 2016년 9월 30일 |
면적 | 166,622m² |
필지 수 | 362필지 |
관리자 | 전남 해남군 |
추가 정보 | |
문화재청 ID | 13,05350000,36 |
2. 전라우수영의 역사
고려 말 우왕 3년(1377) 무안 당곶포에 수군처치사영이 설치된 후, 조선 세종 22년(1440) 현 위치인 해남군 문내면 황원곶으로 옮겨졌다. 세조 11년(1465)에 수군절도사영으로 승격되었고, 성종 10년(1479) 순천 내례포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영이 설치된 후 이곳은 전라우도 수군절도사영이라 불리게 되었다.
처음 영역은 남북 길이 10리, 동서 너비 5리의 크기이며, 석축의 둘레는 3,843척, 높이 11척, 연못 3개소가 있었다. 『전라우수영지』에 의하면 영내에는 민가 620호, 수군 병력 1,085명을 보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전라우수영은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수사 김억추는 이순신과 함께 명량대첩을 거두었다.[1]
해안선을 따라 쌓은 전라우수영은 돌과 흙을 섞어 쌓은 혼합형으로, 사각형과 원형의 중간 형태를 띠고 있다. 성벽 아래쪽은 150cm 이상 되는 큰 돌을 사용하고, 위로 올라갈수록 30∼50cm 정도의 작은 돌을 사용하였다. 해남 전라우수영은 서해와 남해가 만나는 군사적 요충지에 자리 잡은 조선 시대 전라우도 수군의 본영이다. 앞바다는 물살이 빠른 명량해협이고, 안쪽에는 양도라는 섬이 있어 울돌목의 거센 파도를 막아주는 방파제 역할을 하는 동시에 외부로부터 전라우수영을 가려주는 천혜의 요새였다.
전라우수영성은 16세기 중반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바깥쪽은 돌로 쌓고 안쪽은 흙으로 다져 쌓은 내탁식 석성으로 배 모양에 가깝다. 4개의 성문과 옹성, 치성, 여장, 수구문 등 다양한 부대시설과 십자형 성내 도로망을 중심으로 관아 건물과 창고 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에 전하고 있다.
동쪽으로 7km 떨어진 곳에는 육지로부터의 침입을 막기 위한 차단성인 원문(轅門)을 쌓았다.
2. 1. 설치와 변천
고려 1377년(우왕 3년) 무안 당곶포에 수군처치사영(水軍處置使營)이 설치된 것이 전라우수영의 시초이다.[1] 1440년(세종 22년) 현 위치인 해남군 문내면 황원곶으로 이전하였고,[1] 1465년(세조 11년) 수군절도사영(水軍節度使營)으로 승격되었다.[1] 1479년(성종 10년) 순천 내례포(현재의 여수시)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영이 설치되면서 전라우도 수군절도사영(전라우수영)이라 불리게 되었다.[1] 1895년 갑오개혁으로 폐지될 때까지 존속하였다.[1]2. 2. 임진왜란과 명량대첩
임진왜란 당시 전라우수영은 전라우도 연해지역 14관을 관할할 정도로 군사적 역할과 규모가 매우 컸다.[1] 1597년 정유재란 때 수사 김억추는 이순신 통제사와 함께 명량대첩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1] 명량 해협의 거센 물살과 양도라는 섬이 울돌목의 거센 파도를 막아주는 방파제 역할을 하여 외부로부터 전라우수영을 가려주는 천혜의 요새라는 지리적 이점을 활용해 왜군을 격퇴하였다.[1]3. 전라우수영의 구조와 특징
해남 전라우수영은 1440년(세종 22) 목포에서 해남군으로 옮겨진 후 전라도 수군을 총괄하는 전라수영으로 운영되었다. 1479년(성종 10) 순천부 내례포에 전라좌수영이 설치되면서 전라우수영으로 개편되었고, 1895년까지 유지되었다. 조선 시대 수군 제도의 변화 과정을 보여주며, 정유재란 당시 명량대첩의 배후 기지 역할을 하는 등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높다.[1]
3. 1. 지리적 특징
해남 전라우수영은 서해와 남해가 만나는 군사적 요충지에 자리 잡은 조선 시대 전라우도 수군의 본영이다. 앞바다는 물살이 빠른 명량해협(울돌목)을 이루고 있고, 그 안쪽은 양도라는 섬이 울돌목의 거센 파도를 막아주는 방파제 역할을 하는 동시에 외부로부터 전라우수영을 가려주고 있어 천혜의 요새를 이룬다.[1]3. 2. 성곽 구조
해남 전라우수영성은 16세기 중반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바깥쪽은 돌로 쌓고 안쪽은 흙으로 다져 쌓은 내탁식 석성(內托式 石城)으로 평면 형태는 배 모양(舟形)에 가깝다. 4개의 성문과 옹성, 치성, 여장, 수구문 등 다양한 부대시설과 십자(十字)형의 성내 도로망을 중심으로 관아 건물과 창고 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에 전하고 있다.[1]3. 3. 원문(轅門)
동쪽으로 7km 떨어진 곳에 육지로부터의 침입을 막기 위한 차단성인 원문(轅門)이 설치되어 있었다.[1]4. 사적 가치
해남 전라우수영은 조선 시대 수군 제도의 변화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관방 시설이다. 군제사 및 성곽사 연구에 있어서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높다. 1440년(세종 22)에 수영이 목포에서 해남으로 옮겨진 후 전라도 수군을 총괄하는 전라수영으로 운영되었고, 1479년(성종 10)에 전라좌수영이 설치되면서 전라우수영으로 개편되어 1895년까지 유지되었다. 정유재란 시기에는 명량대첩의 배후 기지로 활용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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