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도 묘당도 이충무공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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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완도 묘당도 이충무공 유적은 정유재란 당시 이순신 장군과 명나라 장수 진린이 연합하여 왜군을 물리친 장소이다. 이순신은 1598년 8,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묘당도에 주둔했으며, 진린은 5,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인근 고금도에 도착하여 7개월간 조선과 명나라 해군의 본부가 되었다. 현재는 이충무공을 모시는 충무사와 옥천사가 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훼손되었으나 광복 이후 복원되었다. 2011년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으며, 이순신 장군의 유해를 임시로 안장했던 월송대도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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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일기》는 이순신이 임진왜란 중 군중에서 직접 쓴 친필 일기로, 전쟁 상황과 개인적인 소회, 사회상 등이 기록된 7권의 일기이며 국보 제76호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다. - 이순신 - 김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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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도 묘당도 이충무공 유적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
| 위치 정보 | |
| 기본 정보 | |
| 이름 | 완도 묘당도 이충무공 유적 |
| 영문 이름 | Historic Site Related to Yi Sun-sin on Myodangdo Island, Wando |
| 유형 | 사적 |
| 지정 번호 | 114 |
| 지정일 | 1963년 1월 21일 |
| 주소 | 전라남도 완도군 고금면 세동84번길 86-31 (덕동리) |
| 시대 | 조선시대 |
| 면적 | 4,959m² |
| 꼬리표 | 완도 묘당도 |
| 추가 정보 | |
| 문화재청 ID | 13,01140000,36 |
![]() | |
2. 역사적 배경
정유재란 당시 이순신 장군과 명나라 장수 진린(陳璘)이 이끄는 조명 연합 수군이 일본군에 맞서 싸웠던 곳으로, 묘당도와 고금도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이순신은 임진왜란에서 옥포대첩, 노량 해전, 당항포 해전, 한산도 대첩 등 여러 해전에서 승리한 경험을 바탕으로 정유재란에서도 활약하였으며, 그의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고 '충무(忠武)'라는 시호를 받았다.
2. 1. 정유재란과 조명 연합 수군
정유재란 때 충무공 이순신(1545∼1598) 장군과 명나라 장수 진린(陳璘)의 군사들이 힘을 합해 왜군을 물리쳤던 장소이다.충무공은 무과에 급제하여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를 지내던 때에 왜적의 침입을 대비하여 여수시를 중심으로 배를 만들고 군비를 늘리는 등 일본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선조 25년(1592)에 임진왜란이 터지자 옥포대첩, 노량 해전, 당항포 해전, 한산도 대첩 등 곳곳에서 전승을 거두었고, 정유재란 때에는 명량 해전 등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정유재란의 마지막 해인 선조 31년(1598)에 이순신이 약 8,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진을 쳤고, 그 해 7월에 명나라 장수 진린이 약 5,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고금도에 도착하였다. 가까이에 있던 이곳 묘당도에 진을 치면서 두 나라의 군사가 힘을 합하게 되었는데, 이후 7개월간 이곳은 조선과 명나라의 해군 본부가 되었다.
2. 2. 묘당도와 고금도의 역할
정유재란 마지막 해인 선조 31년(1598), 이순신은 약 8,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고금도에 진을 쳤다. 같은 해 7월, 명나라 장수 진린도 약 5,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고금도에 도착했다. 이들은 가까운 묘당도에 진을 치면서 힘을 합쳤고, 이후 7개월 동안 묘당도는 조선과 명나라 연합 해군의 본부 역할을 했다.묘당도와 고금도는 조명 연합 수군의 본부로서, 지리적 이점을 바탕으로 왜군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고 해상 교통로를 확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7개월간의 주둔 기간 동안 묘당도와 고금도에서는 다음과 같은 주요 사건들이 있었다.
| 시기 | 주요 사건 |
|---|---|
| 선조 31년 (1598년) |
정유재란 때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명나라 장수 진린이 이끄는 군사들이 힘을 합쳐 왜군을 물리쳤던 곳이다.
3. 묘당도 이충무공 유적
충무공 이순신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서 옥포 해전, 노량 해전, 당항포 해전, 한산도 대첩, 명량 해전 등에서 승리하며 큰 공을 세웠다. 선조는 이순신에게 선무공신 1등의 칭호와 영의정을 추증하고, ‘충무(忠武)’라는 시호를 내렸다.
정유재란 마지막 해인 선조 31년(1598), 이순신은 약 8,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고금도에 진을 쳤다. 그 해 7월, 명나라 장수 진린이 이끄는 약 5,000명의 군사도 고금도에 도착했다. 가까운 묘당도에 진을 치면서 조선과 명나라 군사가 힘을 합치게 되었고, 이후 7개월간 이곳은 조선과 명나라의 해군 본부 역할을 했다.
현재 묘당도에는 이충무공을 모시는 사당인 충무사와, 사당을 보호하는 의미를 지닌 옥천사가 있다.
3. 1. 충무사
정유재란 당시 이순신 장군과 명나라 장수 진린이 이끄는 군대가 힘을 합쳐 왜군을 물리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사당이다. 처음에는 진린이 꿈에 나타난 관우를 모시기 위해 지은 관왕묘였다. 현종 7년(1666)에 옥천사가 지어지면서 관왕묘를 관리하고 제사를 모시게 되었다.
숙종 9년(1683)에는 관왕묘 서쪽에 사당을 새로 짓고 이순신을 함께 모시게 되면서, 동무(東廡)에는 관운장과 진린, 서무(西廡)에는 이순신 세 분을 모시는 사당이 되었다. 현종때는 경칩과 상강에 영암, 강진, 보성, 해남 등 6개 부군현 관원들이 제사를 모셨다. 정조 15년(1791)에는 정조가 탄보묘(誕報廟)[1]라는 현판을 하사하고, 노량 해전에서 전사한 명나라 장군 등자룡을 함께 모시게 하였다. 등자룡은 진린의 부장으로 이순신과 함께 용맹을 떨치고 전사한 인물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에 의해 관왕상과 위패, 유물들이 바다에 던져지는 수난을 겪었다. 옥천사의 불상만이 백운사에 옮겨져 보관되었다. 1945년 해방 이후, 유림을 중심으로 관왕묘가 있던 자리에 사당을 재건하고 충무사라는 현판을 걸어 이순신을 정전(正殿)에 모시게 되었다. 1959년에는 이순신의 보좌관이었던 가리포 첨사 이영남(李英男)을 동무(東廡)에 추가로 모시고, 매년 4월 8일 충무공 탄신기념제와 11월 9일(음력) 순국제(殉國祭)를 지내고 있다.
3. 2. 옥천사
현종 7년(1666)에 관왕묘를 보수하면서 그 옆에 수호와 제사를 담당하기 위해 지은 암자가 옥천사이다.[1] 옥천사는 충무사 옆에 나란히 위치하며 사당을 보호하는 의미를 지닌다. 일제시대에 관왕상과 위패·각종 유물들이 바다에 던져졌을 때, 옥천사의 불상만이 가까운 백운사에 옮겨져 보관되었다.
3. 3. 월송대 (이순신 장군 가묘 터)
정유재란 마지막 해인 선조 31년(1598년) 노량 해전에서 순국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유해를 임시로 안장하였던 터이다. 이순신 장군이 1598년 11월 19일 노량 해전에서 순국하자 본영이었던 이곳에 83일간 안장한 후 충청남도 아산 현충사 근처로 옮겼다.
4. 일제강점기의 수난과 광복 이후 복원
일제강점기 일본은 민족정신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묘당도 유적을 훼손하였다. 관왕상, 위패, 투구, 서적, 벽화, 현판 등 각종 유물들이 바다에 던져졌고, 옥천사의 불상만이 가까운 백운사로 옮겨져 보관되었다.[1]
1945년 광복 이후, 고금도 유림이 중심이 되어 관왕묘가 있던 자리에 사당을 재건하고 현판을 충무사로 바꾸었다. 충무사는 이순신을 정전(正殿)에 모시는 사당이 되었다. 1959년에는 이순신의 보좌관이자 당시 가리포 첨사였던 이영남(李英男)을 동무(東廡)에 모셨다. 현재는 매년 4월 8일 충무공 탄신 기념제와 11월 9일 (음력) 순국제(殉國祭)를 지내고 있다.[1]
5. 문화재 지정과 명칭 변경
원래 이름은 '''묘당도이충무공유적'''이었으나, 2011년에 현재의 명칭인 '''완도 묘당도 이충무공 유적'''으로 변경되었다.[2]
6. 현대적 의의
묘당도 이충무공 유적은 정유재란 때 이순신 장군과 명나라 장수 진린(陳璘)이 이끄는 조명 연합 수군의 주둔지였다. 이곳은 조선과 명나라 수군이 연합하여 왜군에 맞서 싸운 역사를 보여주는 중요한 장소이다.[1]
이 유적은 단순한 군사 주둔지를 넘어, 서로 다른 문화와 언어를 가진 두 나라 군대가 협력하여 공동의 적을 물리친 국제 협력의 상징적인 장소로 평가받는다. 특히, 이순신 장군과 진린 장군의 만남은 조선과 명나라의 군사적 협력을 넘어, 개인적인 우정을 쌓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1]
또한, 묘당도에는 이순신 장군을 기리는 사당인 충무사가 있다. 충무사는 원래 진린 장군이 관운장을 모시기 위해 세운 관왕묘에서 유래되었으며, 일제강점기에 훼손되었다가 광복 이후 이순신 장군을 모시는 사당으로 재건되었다. 이러한 역사는 묘당도 유적이 단순한 군사 유적지가 아니라, 이순신 장군을 추모하고 그의 업적을 기리는 공간으로 변화해 왔음을 보여준다.[1]
오늘날 묘당도 이충무공 유적은 우리에게 국가 안보의 중요성과 더불어, 어려운 시기에 서로 힘을 합쳐 위기를 극복했던 조상들의 지혜를 되새기게 하는 역사적 교훈을 준다.
참조
[1]
문서
큰나라의 은혜에 보답한다는 뜻
[2]
간행물
국가지정문화재(사적) 지정명칭 변경 및 지정·해제 고시
http://gwanbo.mois.g[...]
문화재청장
2011-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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