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광한 (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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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허광한은 전한 시대의 인물로, 젊은 시절 안장 절도범으로 몰려 궁형을 받고 환관이 되었다. 이후 환자승을 지내다 상관걸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액정으로 쫓겨났고, 그곳에서 여태자의 손자 유병이를 만나 딸 허평군을 그에게 시집보냈다. 허평군은 이후 선제의 황후가 되었으며, 허광한은 평은후에 봉해졌다. 신작 원년에 사망했으며, 시호는 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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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젊은 시절 창읍애왕 유박의 낭(郎)으로 일했으나, 실수로 다른 이의 안장을 잘못 사용한 일이 빌미가 되어 궁형을 받고 환관이 되었다. 이후 액정(掖庭)에서 근무하던 중, 그곳에서 지내던 유병이(훗날 선제)를 만나 자신의 딸 허평군을 시집보냈다.

기원전 74년 유병이가 황제로 즉위(선제)하면서 허평군은 황후가 되었고, 허광한은 황제의 장인이 되었다. 당시 권력자였던 대장군 곽광은 허광한이 죄인 출신이라는 이유로 열후에 봉하는 것을 반대하여 창성군(昌成君)에 봉해지는 데 그쳤다. 그러나 지절 3년(기원전 67년), 외손자 유석이 황태자로 책봉되자 마침내 평은후(平恩侯)에 봉해지고 특진의 지위까지 더해졌다.

신작 원년(기원전 61년)에 사망하였으며, 대후(戴侯)라는 시호를 받았다.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봉국(封國)은 잠시 폐지되었으나, 후에 동생 허연수의 아들인 허가가 뒤를 이었다. 그의 동생들인 허순과 허연수 역시 후에 열후에 봉해졌다.

2.1. 초기 생애와 환관 시절

젊은 시절 창읍애왕 유박의 낭(郎)으로 일했다. 무제를 따라 감천궁에 갔을 때 실수로 다른 낭의 안장을 자신의 말에 얹었는데, 이것이 안장을 도둑질한 것으로 몰려 사형될 위기에 처했다. 사형 대신 궁형을 받고 환관이 되었다.

이후 환자승(宦者丞)을 지냈으나, 상관걸의 모반 사건 때 증거품을 제대로 찾아내지 못한 책임을 물어 액정(掖庭)으로 쫓겨나 폭실대부(暴室大夫)가 되었다.

당시 액정에는 무제의 황태자였던 여태자의 손자 유병이(훗날 선제)가 지내고 있었는데, 허광한은 그와 같은 관사에서 살게 되었다. 액정령(掖庭令) 장하는 본래 유거의 속관이었기 때문에 유병이를 매우 극진히 보살폈다. 장하는 자신의 손녀를 유병이에게 시집보내려 했으나, 그의 동생인 우장군 장안세가 반대하여 그만두었다.

한편, 허광한의 딸 허평군은 당시 14~15세였고, 내자령(內者令) 구후씨(歐侯氏)의 아들에게 시집갈 예정이었으나 마침 그 아들이 죽어 혼담이 깨졌다. 허평군의 어머니는 딸의 관상을 보게 했는데, 매우 존귀해질 상이라는 말을 듣고 기뻐했다. 장하는 허광한에게 딸이 있다는 것을 알고 술자리를 마련하여 허평군을 유병이에게 시집보낼 것을 권유하며 "황제의 증손이니, 설령 크게 되지 못하더라도 관내후 정도는 될 것이다"라고 설득했다. 허광한은 이를 승낙했지만, 그의 아내는 반대하며 노했다. 그러나 허광한은 결국 딸 허평군을 유병이에게 시집보냈다. 유병이는 자신의 할머니 집안인 사(史)씨와 더불어 허광한과 그의 동생 허순, 허연수를 의지하며 지냈다.

허평군은 유병이와 혼인한 이듬해 아들 유석(훗날 원제)을 낳았다.

2.2. 유병이와의 만남과 혼인

젊은 시절 창읍애왕 유박의 낭(郞)이었으나, 무제를 따라 감천궁에 갔다가 실수로 다른 낭의 안장을 자신의 말에 얹었다가 안장 절도범으로 몰렸다. 사형될 위기에 처했으나, 궁형을 받는 대신 환관이 되었다. 이후 환자승(宦者丞)까지 올랐으나, 상관걸의 모반 사건 때 증거품을 찾아내지 못한 책임으로 액정으로 좌천되어 폭실대부(暴室大夫)가 되었다.

이 무렵 여태자 유거의 손자이자 훗날 선제가 되는 유병이가 조부의 반란 여파로 액정에서 지내고 있었는데, 허광한은 그와 같은 관사에서 살게 되었다. 당시 액정령(掖庭令) 장하는 과거 유거의 속관이었던 인연으로 유병이를 극진히 보살폈다. 장하는 자신의 손녀를 유병이에게 시집보내려 했으나, 동생인 우장군 장안세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한편 허광한에게는 14~15세 된 딸 허평군이 있었다. 허평군은 본래 내자령(內者令) 구후씨(歐侯氏)의 아들과 혼인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혼례 직전 상대가 죽어 혼사가 무산되었다. 허평군의 어머니가 딸의 관상을 보게 했는데, 장차 매우 존귀해질 것이라는 말을 듣고 기뻐했다고 한다.

장하는 허광한에게 딸이 있음을 알고 술자리에서 "황제의 증손(유병이)은 평범하게 자라도 최소 관내후는 될 것이니, 딸을 시집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권했다. 허광한은 이를 승낙했으나, 그의 아내는 탐탁지 않게 여겨 화를 냈다. 하지만 허광한은 결국 딸 허평군을 유병이에게 시집보냈다. 혼인 후 유병이는 아내의 집안인 허광한과 그의 동생 허순, 허연수 등에게 의지했다. 허평군은 결혼 이듬해 아들 유석(훗날 원제)을 낳았다.

원평 원년(기원전 74년), 소제가 후사 없이 사망하고 뒤이어 즉위한 창읍왕 유하마저 폐위되자, 유병이가 황제로 옹립되어 선제가 되었다. 선제가 즉위하자 허평군도 후궁이 되었다. 대신들은 대장군 곽광의 딸이 황후가 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선제는 즉위 초 "가난하고 미천할 때 쓰던 옛 칼을 찾으라"는 조서를 내렸는데, 이는 조강지처인 허평군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선제의 뜻을 알아차린 대신들은 허평군을 황후로 세울 것을 주청했다. 하지만 곽광은 허광한이 죄인 출신이라는 이유로 열후에 봉하지 않고 창성군(昌成君)으로 삼았다.

2.3. 선제 즉위와 가문의 번영

궁형을 받고 환관이 된 허광한은 액정(掖庭)에서 근무하며 폭실대부(暴室大夫)가 되었다. 이때 여태자의 손자로 훗날 선제가 되는 유병이가 액정에서 지내고 있었는데, 허광한과 같은 관사에서 살았다. 액정령(掖庭令) 장하는 과거 유거의 속관이었기에 유병이를 딱하게 여겨 보살폈고, 자신의 손녀를 시집보내려 했으나 동생 장안세의 반대로 그만두었다.

당시 허광한에게는 14~15세 된 딸 허평군이 있었다. 원래 내자령(內者令) 구후씨(歐侯氏) 집안과 혼담이 오갔으나, 상대방 아들이 죽어 혼사가 무산되었다. 허평군의 어머니는 딸의 관상이 매우 존귀하다는 말을 듣고 기뻐했다. 장하는 허광한에게 딸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술자리를 마련해 "황제의 증손인 유병이는 평범하더라도 최소한 관내후는 될 것이니, 따님을 시집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권유했다. 허광한은 이를 받아들였고, 아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허평군을 유병이에게 시집보냈다. 유병이는 처가인 허씨 가문(허순, 허연수 포함)과 외할머니의 친정인 사(史)씨 가문에 의지하며 지냈다. 허평군은 결혼 이듬해 아들 유석을 낳았다.

원평 원년(기원전 74년), 소제가 후사 없이 사망하고 창읍왕 유하가 잠시 즉위했다가 폐위되자, 유병이가 황제로 추대되어 즉위했다(선제). 허평군은 후궁으로 입궁했다. 당시 조정의 실권자였던 대장군 곽광의 딸이 황후가 될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으나, 선제는 조강지처인 허평군을 잊지 않았다. 선제는 "옛 칼을 찾으라"는 조서를 내려 허평군을 황후로 삼고 싶다는 뜻을 간접적으로 드러냈다. 신하들은 선제의 의중을 파악하고 허평군을 황후로 세울 것을 주청하여 마침내 황후가 되었다.

그러나 곽광은 허광한이 환관 출신이라는 점을 들어 열후로 봉하는 대신 창성군(昌成君)에 봉하는 데 그쳤다. 이후 지절 3년(기원전 67년), 외손자 유석이 황태자로 책봉되자 허광한은 마침내 평은(平恩侯)에 봉해지고 특진의 지위까지 더해졌다. 이로써 허씨 가문은 외척으로서 번영의 기틀을 마련했으며, 허광한의 동생 허순과 허연수도 훗날 열후에 봉해졌다.

허광한은 신작 원년(기원전 61년)에 세상을 떠났고, 대후(戴侯)라는 시호를 받았다.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봉국은 잠시 폐지되었으나, 이후 동생 허연수의 아들인 허가가 뒤를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