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현 (전한)
1. 개요
위현은 전한 시대의 학자이자 관료로, 《예기》, 《상서》, 《시경》에 능통하여 '추로의 대유'로 불렸다. 소제의 스승으로 급사중을 지냈으며, 광록대부, 첨사, 대홍려를 역임했다. 소제 사후 선제 옹립에 기여하여 관내후에 봉해졌고, 승상에 올라 부양후에 책봉되었다. 지절 3년에 은퇴한 후 신작 원년에 82세로 사망했으며, 시호는 절이다. 그의 아들 위현성 또한 승상에 올랐으며, 고향에서는 경서를 중시하는 풍조가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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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61년 사망 -
유충국 (효이후)
유충국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효열후 작위를 받았으며, 20년 후 사망하여 그의 아들 유광명이 작위를 계승했다. -
기원전 61년 사망 -
유탕 (하구효후)
유탕은 전한 문제 시기에 하구후에 봉해져 백성을 다스리고 국가에 봉사하며 명성을 얻었으며, 사망 후 효후라는 시호를 받은 인물로 그의 생애는 중국 역사서에 기록되었고 작위는 아들에게 계승되었으며 묘소는 대전광역시 동구에 있다. -
전한의 열후 -
유급
유급은 전한 말기에 신양후에 봉해졌으나, 전한 멸망으로 작위를 잃은 유영의 아들이다. -
전한의 열후 -
신도가
신도가는 전한 시대의 무관 출신으로, 항우와의 싸움과 영포의 난에 참여하고 혜제 때 회양태수를 거쳐 승상에 올랐으며, 청렴한 성품으로 황제의 총애를 받던 등통을 처벌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조조와의 갈등 끝에 죽음을 맞이하여 절후의 시호를 받았다. -
전한의 관료 -
구독
구기(緱起)는 전한 시대에 기후(騎虎)에 봉해지고 태상(太常)을 역임한 인물로, 기원전 32년 사망 후 그의 아들 구숭(求崇)이 기후 자리를 계승했다. -
전한의 관료 -
석편
석편은 전한 시대의 관료로, 기원전 138년에 내사에 임명되어 석경의 뒤를 이어 내사를 지냈으며, 정당시가 그의 후임자이다.
2. 생애
위현은 《예기》·《상서》·《시경》에 통달하여 "추로의 대유"라고 불렸으며, 대학자로서 명성을 떨쳤다. 조정에 박사로 임용되었고, 급사중이 되고 소제를 가르쳤다. 이후 광록대부·첨사·대홍려를 역임하였다.
소제가 붕어하고, 대장군 곽광은 대신들과 의논하여 선제를 옹립하였다. 위현 또한 곽광과 뜻을 함께하였기 때문에, 선제 즉위 후 공로를 인정받아 관내후에 봉해져 식읍을 받았고, 장신소부로 전임되었다. 위현은 소제의 스승이었기 때문에 조정에서 예우를 받았다.
본시 3년(기원전 71년), 채의의 뒤를 이어 승상이 되고 부양후(扶陽侯)에 봉해져 식읍 7백 호를 받았다.
지절 3년(기원전 67년), 위현이 연로함을 이유로 은퇴를 청원하니, 선제는 황금 백 근을 내려주고 관직을 거두었다. 승상이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는 건 위현으로부터 비롯하였다.
신작 원년(기원전 61년)에 죽으니, 향년 82세였다. 시호를 절이라 하였다.
위현은 위방산·위홍·위순(韋舜)·위현성 네 아들을 두었다. 위현의 작위는 요절한 장남 위방산을 대신하여 위홍이 잇기로 되어 있었으나, 위홍이 죄를 지어 투옥되었기 때문에 문하생과 유가족들은 위현성으로 하여금 작위를 잇게 하였다. 위현성 또한 위현처럼 벼슬이 승상에 이르렀다. 한나라에서 부자가 2대에 걸쳐 승상이 된 것은 위현·위현성과 주발·주아부, 조조·조비의 총 3쌍뿐이다.
고향 추(騶)에서는, 위씨가 경서를 배워 번성했기 때문에 "자손에게 금을 남기는 것보다 경서를 남기는 것이 낫다"라는 속담이 생겨났다고 한다.
2.1. 초기 생애와 학문적 성취
위현은 《예기》·《상서》·《시경》에 통달하여 "추로의 대유"라고 불렸으며, 대학자로서 명성을 떨쳤다. 조정에 박사(博士)로 임용되었고, 급사중(給事中)이 되고 소제를 가르쳤다. 광록대부·첨사로 승진하여 대홍려에 이르렀다.
고향 추(騶)에서는, 위씨가 경서를 배워 번성했기 때문에 "자손에게 금을 남기는 것보다 경서를 남기는 것이 낫다"라는 속담이 생겨났다고 한다.
2.2. 관직 생활과 선제 옹립
위현은 《예기》·《상서》·《시경》에 통달하여 "추로의 대유"라고 불렸으며, 대학자로서 명성을 떨쳤다. 조정에 박사(博士)로 임용되었고, 급사중(給事中)이 되고 소제를 가르쳤다. 이후 광록대부·첨사(詹事)·대홍려를 역임하였다.
소제가 후사 없이 붕어하자, 대장군 곽광 등과 함께 선제를 황제로 옹립하였고, 그 공적으로 관내후를 하사받았다. 장신소부로 전임되었으며, 소제의 스승이었기 때문에 조정에서 예우를 받았다.
본시 3년(기원전 71년), 채의의 뒤를 이어 승상이 되고 부양후(扶陽侯)에 봉해져 식읍 7백 호를 받았다.
지절 3년(기원전 67년), 위현이 연로함을 이유로 은퇴를 청원하니, 선제는 황금 백 근을 내려주고 관직을 거두었다. 승상이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는 건 위현으로부터 비롯하였다.
신작 원년(기원전 61년)에 죽으니, 향년 82세였다. 시호를 절이라 하였다.
고향 추(騶)에서는, 위씨가 경서를 배워 번성했기 때문에 "자손에게 금을 남기는 것보다 경서를 남기는 것이 낫다"라는 속담이 생겨났다고 한다.
2.3. 승상 취임과 은퇴
위현은 《예기》·《상서》·《시경》에 통달하여 대학자로서 명성을 떨쳤다. 조정에 박사로 임용되었고, 급사중이 되고 소제를 가르쳤다. 이후 광록대부·첨사·대홍려를 역임하였다.
소제가 붕어하고, 대장군 곽광은 대신들과 의논하여 선제를 옹립하였다. 위현 또한 곽광과 뜻을 함께하였기 때문에, 선제 즉위 후 공로를 인정받아 관내후에 봉해져 식읍을 받았고, 장신소부로 전임되었다. 위현은 소제의 스승이었기 때문에 조정에서 예우를 받았다.
본시 3년(기원전 71년), 채의의 뒤를 이어 승상이 되고 부양후(扶陽侯)에 봉해져 식읍 7백 호를 받았다.
지절 3년(기원전 67년), 위현이 연로함을 이유로 은퇴를 청원하니, 선제는 황금 백 근을 내려주고 관직을 거두었다. 승상이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는 건 위현으로부터 비롯하였다.
신작 원년(기원전 61년)에 죽으니, 향년 82세였다. 시호를 절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