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치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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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홍치중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청나라와의 국경 분쟁에서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고, 조선 통신사 정사로 일본을 방문하여 외교 활동을 펼쳤다. 그는 북평사 시절 청나라의 국경선 주장의 오류를 지적하여 백두산 정계비 문제 해결에 기여했으며, 이러한 공로로 영의정까지 올랐다. 일본 방문 당시에는 『해사일록』을 저술하여 일본의 문화를 기록했으며, 온건한 외교 태도를 보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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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치중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한글 표기 | 홍치중 |
한자 표기 | 洪致中 |
로마자 표기 | Hong Chi-jung |
관직 정보 | |
영의정 임기 시작 | 1729년 7월 1일 |
영의정 임기 종료 | 1732년 8월 13일 |
영의정 이전 | 이광좌 |
영의정 이후 | 심수현 |
좌의정 임기 시작 | 1728년 7월 16일 |
좌의정 임기 종료 | 1729년 7월 1일 |
좌의정 이전 | 조태억 |
좌의정 이후 | 이태좌 |
좌의정 임기 시작 | 1726년 6월 12일 |
좌의정 임기 종료 | 1727년 8월 17일 |
좌의정 이전 | 이광명 |
좌의정 이후 | 조태억 |
우의정 임기 시작 | 1727년 8월 17일 |
우의정 임기 종료 | 1727년 |
우의정 이전 | 이의현 |
우의정 이후 | 심수현 |
우의정 임기 시작 | 1725년 2월 18일 |
우의정 임기 종료 | 1725년 |
우의정 이전 | 이광명 |
우의정 이후 | 조도빈 |
개인 정보 | |
출생 | 1667년 |
사망 | 1732년 |
국적 | 조선 |
2. 가계
홍치중의 할아버지는 홍중보, 아버지는 홍득우이다. 어머니는 김경여의 딸이며, 부인은 이인식의 딸이다.
2. 1.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
할아버지 | 홍중보 |
아버지 | 홍득우 |
어머니 | 김경여의 딸 |
부인 | 이인식의 딸 |
장남 | 홍제유 |
손자 | 홍익빈 |
차남 | 홍진유 |
장녀 | 박성한 |
차녀 | 이태좌 |
삼녀 | 권소 |
홍치중은 청나라와의 국경 분쟁 해결과 조선 통신사 정사 활동을 통해 외교적 수완을 인정받아 승지(정3품), 전라도 관찰사(종2품), 예조 판서(정2품)를 거쳐 영의정(정1품)에 올랐다.[11]
3. 생애 및 업적
3. 1. 청나라와의 국경 분쟁 해결
홍치중은 정6품 북평사 시절, 청나라와의 국경 문제에 대응하여 청나라 주장의 오류를 지적했다. 이 국경 문제는 현재의 조선-중국 국경에 해당하는 백두산의 어느 지점을 경계선으로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였다. 1712년 청나라의 목극등이 일방적으로 비석을 세우고 조선이 일단 그것에 따랐으나, 경계 위에 울타리를 건설하는 작업에 나선 홍치중이 작업 중에 이 비석의 오류를 증명·지적했다. 이 사건은 『연행록』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조선-중국 국경에 관한 협상에서 전거로 인용되는 자료가 되고 있다.[11]
3. 2. 조선 통신사 정사 활동
1719년, 숙종은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쇼군 조정에 외교 사절단을 파견했다.[3] 이 외교 사절단은 무역의 정치적 기반을 개발하는 통로로서 일본과 조선 양국 모두에게 이점으로 작용했다.[4]
이 사절단은 조선 조정에 의해 명확하게 "통신사"로 규정되었다. 이 사절단은 관계가 "정상화"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5]
조선 사절단은 당시 사용되던 일본 달력에 따라 교호 4년 10월에 교토에 도착했다.[6] 홍치중이 수석 사절이었다.[3]
홍치중은 조선 통신사 정사로 일본에 건너가면서 『해사일록』을 저술했다. 이 책은 그가 이전에 청과의 외교 경험을 쌓았기 때문인지, 일본 문화에 대한 거부 반응이 다른 사절단원의 저작에 비해 적다고 평가된다. 기재 내용은 매일의 날씨부터 일본의 풍속과 고유 물품까지 광범위하다. 아메노모리 호슈 등 일본 측 인물에 대한 대응 방식에 있어서, 제술관 신유한이 강경한 태도를 보인 반면, 홍치중은 온건한 대응을 한 인물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11]
3. 3. 일본 측과의 교류
1719년, 숙종은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쇼군 조정에 외교 사절단을 파견했다.[3] 이 외교 사절단은 무역의 정치적 기반을 개발하는 통로로서 일본과 조선 양국 모두에게 이점으로 작용했다.[4] 이 사절단은 조선 조정에 의해 명확하게 "통신사"로 규정되었으며, 관계가 "정상화"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5]
조선 사절단은 당시 사용되던 일본 달력에 따라 교호 4년 10월에 교토에 도착했다.[6] 홍치중은 수석 사절이었다.[3]
홍치중은 조선 통신사 정사로 일본에 건너가면서 『해사일록』을 저술했다. 이 책에는 이전에 청나라와의 외교 경험 때문인지, 이문화인 일본 문화에 대한 거부 반응이 다른 멤버들의 저작에 비해 적게 나타난다. 기재 내용은 매일의 날씨부터 일본의 풍속과 고유 물품까지 광범위하다. 아메노모리 호슈 등 일본 측 인물에 대한 대응 방식에 관해서는, 제술관인 신유한이 싸움도 마다하지 않는 강경한 태도를 보인 반면, 홍치중은 온건하게 대응하는 인물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11]
4. 서양에서의 인식
서양에서 조선에 대한 초기 출판물은 광범위하지는 않지만, 삼국통람도설(1832년 파리 출판)[7]과 일본왕대일람(1834년 파리 출판)[6]에 등장한다. 1834년 저서에는 조선의 외교 관계가 명시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5. 평가
홍치중은 정6품 북평사 시절, 1712년 청나라 목극등이 일방적으로 세운 백두산 경계 비석의 오류를 지적하고 청나라 주장의 문제점을 밝혀냈다. 이 사건은 조선과 청나라 간 국경 문제(현재의 중-조 국경)에 대한 중요한 대응으로, 홍치중은 이 문제를 『연행록』에 기록했다. 이 기록은 현대까지 중-조 국경 협상에서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11]
이러한 외교적 성과를 통해 홍치중은 승지(정3품), 전라도 관찰사(종2품), 예조 판서(정2품)를 거쳐 최고 관직인 영의정(정1품)에 올랐다. 또한 조선 연행사와 조선 통신사 정사로도 활동했다.[11]
조선 통신사 정사로 일본에 파견되었을 때 저술한 『해사일록』은, 청나라와의 외교 경험 덕분인지 일본 문화에 대한 거부감이 적게 나타난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책에는 날씨, 일본 풍속, 특산물 등 다양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제술관 신유한이 강경한 태도를 보인 반면, 홍치중은 아메노모리 호슈 등 일본 측 인사들에게 온건하게 대응했다는 평가를 받는다.[11]
참조
[1]
웹사이트
Hong Chi-jung, Naver encyclopedia
http://100.naver.com[...]
[2]
서적
Korea in the middle: Korean studies and area studies
[3]
서적
[4]
논문
Foreign Affairs and Frontiers in Early Modern Japan: A Historiographical Essay
2002
[5]
서적
Frontier contact between Chosŏn Korea and Tokugawa Japan
https://books.google[...]
[6]
서적
[7]
웹사이트
Accidental acquisitions: The nineteenth-century Korean collections in the National Museum of Ethnology, Part 1
http://www.rmv.nl/pu[...]
2012-06-22
[8]
서적
増補改訂韓国姓名字典: 韓国・朝鮮の人名を正しく読むために
https://books.google[...]
三修社
[9]
서적
対馬物語: 日韓善隣外交に尽力した雨森芳洲
https://books.google[...]
光言社
[10]
웹사이트
홍치중(洪致中)
http://encykorea.aks[...]
2022-07-18
[11]
간행물
18世紀初頭の朝鮮通信使と日本の知識人
https://cir.nii.ac.j[...]
Institute for Cultural Interaction Studies, Kansai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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