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극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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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묵극등은 1664년 청 제국에서 태어났으며, 강희제의 시위로 임명된 후 타생오랍총관을 역임했다. 1710년 조선인 월경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백두산 측량을 준비했으며, 1712년 조선과 백두산 경계 조사를 실시하고 백두산정계비를 세웠다. 이후 길림부도통, 팔기병전봉통령 등을 거쳐 신강 지역을 수비했으며, 1735년 과로사하여 광록대부로 추서되었다. 백두산정계비 건립은 간도 문제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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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12년 중국 - 백두산정계비
백두산정계비는 1712년 조선과 청나라가 국경을 명시하기 위해 세운 비석으로,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확정했으나 '동위토문'에 대한 해석 차이로 간도 영유권 분쟁의 원인이 되었고 현재는 유실되어 표지석만 남아있다. - 1712년 한국 - 백두산정계비
백두산정계비는 1712년 조선과 청나라가 국경을 명시하기 위해 세운 비석으로,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확정했으나 '동위토문'에 대한 해석 차이로 간도 영유권 분쟁의 원인이 되었고 현재는 유실되어 표지석만 남아있다. - 간도 - 대한통의부
대한통의부는 1920년대 초 만주에서 결성된 항일 무장 독립 운동 단체이자 자치 정부로서, 여러 독립군 단체들의 통합을 통해 조직되었으며, 군사 및 자치 행정 체계를 갖추고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으나 내부 갈등과 분열로 해체되었다. - 간도 - 윤명선 (1900년)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와 만주국 관리를 지낸 윤명선은 학무국장 윤치오의 아들이자 서울대학교 총장 윤일선의 동생으로, 만주국 젠다오 성 차장까지 지냈으나 해방 후 피습당해 사망했다.
목극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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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1664년 청 제국의 길림 우라갸(烏喇街, ᡠᠯᠠ
ᡤᡳᠶᠠᡳ/)에서 태어났다.[2] 1684년 강희제의 시위(侍衛, |Hiya}})로 임명되었다.[2] 1698년 눈강(嫩江, ᠨᡡ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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ᡠᠯᠠ/) 유역 및 다싱안링산맥과 샤오싱안링산맥 일대 용흥지지(龍興之地)에 거주하는 에벤키족·다우르·오로촌족·시버족·나나이족(赫哲) 등을 총칭하는 타생(打牲, |Butha}}) 부락의 행정사무를 관리하는 업무를 담당하면서 청 제국의 황실·궁정에서 필요로 하는 동북지구의 특산물인 동주·심황어(鱘鰉魚)·송자(松子)·봉밀(蜂蜜)·인삼 등을 전문적으로 처리하는 타생오랍총관아문의 총관(總管, |Alifi Butanaha Uheri Da}})이 되었다.[2] 그의 탁월한 성적에 의해 타생오랍총관은 5품관에서 3품관으로 승격되었다.[2]
1710년 조선인 이만지 일행이 월경하여 청국민을 살해하고 재물을 강취하는 사건이 발생했다.[4] 1711년, 강희제는 이 사건의 조사단에 묵덩을 포함시켰다.[4] 그런데 묵덩은 봉황성에서 사건을 조사하지 않고 북경으로 갔다가 성경(盛京)을 거쳐 다시 봉황성으로 돌아갔다. 이는 묵덩이 강희제의 밀지를 받고, 마테오 리파(Matteo Ripa, 馬國賢) 신부에게 서양 측량 기술을 배우기 위한 행보로 보인다. 이를 통해 묵덩의 활동이 단순한 월경 사건 조사가 아니라 사전에 계획된 장백산(백두산) 측량 작업이었음을 알 수 있다.[5]
하지만 조선 정부는 묵덩의 입국을 불허했다. 묵덩이 황제의 밀지를 내보인 후에야 입국이 허가되었으나, 조선 숙종은 관원에게 묵덩을 험한 폐사군 지역으로 안내하도록 암암리에 지시했다. 결국 묵덩 일행은 만포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북경에 연락했고, 강희제는 측량 작업을 중단시켰다. 묵덩 일행은 지나온 강산만을 그린 도면을 가지고 돌아갔다.[6]
강희제는 만주족의 발상지로 여겨지는 백두산에 대한 지리 조사를 위해 묵덩에게 조선과의 경계 조사를 지시했다. 이는 단순한 국경 확인을 넘어, 청나라의 영토 확장의 의도를 내포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1712년, 강희제는 예부에 명하여 조선 정부에 공식적으로 백두산 지역의 경계 조사를 제안했다. 묵덩은 조선 측 접반사 박권, 함경감사 이선부 등과 혜산진에서 회동한 뒤, 조선 측 인사들과 함께 백두산을 조사했다.
조사 후 묵덩은 백두산 천지 동남쪽 4km 지점, 해발 2,200m 높이에 백두산정계비를 세웠다. 비문에는 "서쪽은 압록강, 동쪽은 토문강을 경계로 한다"는 내용과 함께 묵덩의 이름과 건립 날짜(강희 51년 5월 15일)가 새겨졌다.[7] 이는 청나라가 일방적으로 국경을 획정하려는 시도로 해석될 여지가 있으며, 훗날 간도 문제를 야기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1712년, 묵덩은 백두산정계비를 세운 뒤, 두만강을 따라 내려가면서 28일 경원부에서 외교문서인 자문(咨文)을 조선측에 전달하였다.[7] 다시 두만강을 따라 내려가면서 30일 경흥부에서 유숙한 후, 6월 1일 두리산(斗里山) 정상에 올라 두만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였다.[7] 곧 아산진에서 유숙하였고, 6월 2일 경원부에서 외교문서인 정문(呈文)을 수령하고, 3일 두만강을 건너 청 제국으로 귀환했다.[7][8]
묵덩은 1712년 백두산 일대를 조사하고 백두산정계비를 세운 후, 1713년 정사(正使) 두등시위(頭等侍衛) 아제도(阿齊圖) 등과 함께 조선에 방문하여 지도를 요구하였다.[9] 조선 조정은 비변사를 통해 두루마리 형태의 지도족자(地圖簇子)를 묵덩 일행에게 전달하였고, 지리에 대한 논의를 거쳐 묵덩 일행은 청나라로 귀국하였다.[9] 이때, 조선은 청나라 흠천감의 정9품 관원 오관사력(五官司曆)에게 관상감(觀象監)의 관원 허원(許遠)을 보내 천문 관측 기술을 배우도록 하였는데, 허원은 의주까지 따라가서 관련 기술을 습득하였다고 한다.[9][10]
묵덩은 1719년 길림부도통(吉林副都統, Girin Meiren-i Ejen)에 제수되었고,[7] 이듬해 길림 오라가의 팔기병전봉통령(八旗兵前鋒統領)에 제수되었다.[7] 1732년에는 신강(新疆)으로 출병하여 알타이 지방 일대를 수비하였으며, 내무대신에 임명되었다.[7] 1735년에 과로사하여, 옹정제는 그를 광록대부(光祿大夫)로 추서했다.[7]
2. 1. 초기 생애와 청나라 관리 임명
묵덩은 1664년 청 제국의 길림 우라갸(烏喇街, ᡠᠯᠠᡤᡳᠶᠠᡳ/)에서 태어났다.[2] 1684년 강희제의 시위(侍衛, |Hiya}})로 임명되었다.[2] 1698년 눈강(嫩江, ᠨᡡᠨ
ᡳ
ᡠᠯᠠ/) 유역 및 다싱안링산맥과 샤오싱안링산맥 일대 용흥지지(龍興之地)에 거주하는 에벤키족·다우르·오로촌족·시버족·나나이족(赫哲) 등을 총칭하는 타생(打牲, |Butha}}) 부락의 행정사무를 관리하는 업무를 담당하면서 청 제국의 황실·궁정에서 필요로 하는 동북지구의 특산물인 동주·심황어(鱘鰉魚)·송자(松子)·봉밀(蜂蜜)·인삼 등을 전문적으로 처리하는 타생오랍총관아문의 총관(總管, |Alifi Butanaha Uheri Da}})이 되었다.[2] 그의 탁월한 성적에 의해 타생오랍총관은 5품관에서 3품관으로 승격되었다.[2]
2. 2. 백두산 답사와 정계비 건립 (1712년)
강희제는 만주족의 발상지로 여겨지는 백두산에 대한 지리 조사를 위해 묵덩에게 조선과의 경계 조사를 지시했다. 이는 단순한 국경 확인을 넘어, 청나라의 영토 확장의 의도를 내포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1710년 조선인 이만지 일행이 월경하여 청국민을 살해하고 재물을 강취하는 사건이 발생하자,[4] 1711년 강희제는 이 사건 조사단에 묵덩을 포함시켰다.[4] 묵덩은 봉황성으로 가서 사건을 조사하는 대신 북경으로 갔다가 성경(盛京)을 거쳐 다시 봉황성으로 갔다. 이는 강희제의 밀지를 받고 백두산 측량 작업을 위한 사전 준비를 한 것으로, 마테오 리파(마테오 리파/Matteo Ripait) 신부에게 서양 측량 기술을 배운 정황이 이를 뒷받침한다.[5]
하지만 조선 정부는 묵덩의 입국을 처음에는 불허했고, 이후 황제의 밀지를 확인한 후에야 허가했다. 조선 숙종은 묵덩을 험한 폐사군 지역으로 안내하도록 암암리에 지시하여 묵덩의 활동을 방해했다. 결국 묵덩 일행은 만포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북경에 연락했고, 강희제는 측량 작업을 중단시켰다.[6]
1712년, 강희제는 예부에 명하여 조선 정부에 공식적으로 백두산 지역의 경계 조사를 제안했다. 묵덩은 조선 측 접반사 박권, 함경감사 이선부 등과 혜산진에서 회동한 뒤, 조선 측 인사들과 함께 백두산을 조사했다.
조사 후 묵덩은 백두산 천지 동남쪽 4km 지점, 해발 2,200m 높이에 백두산정계비를 세웠다. 비문에는 "서쪽은 압록강, 동쪽은 토문강을 경계로 한다"는 내용과 함께 묵덩의 이름과 건립 날짜(강희 51년 5월 15일)가 새겨졌다.[7] 이는 청나라가 일방적으로 국경을 획정하려는 시도로 해석될 여지가 있으며, 훗날 간도 문제를 야기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백두산정계비 건립 이후, 묵덩은 두만강을 따라 내려가면서 경원부에서 조선 측에 외교문서인 자문(咨文)을 전달하고,[7] 경흥부를 거쳐 두리산(斗里山) 정상에서 두만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했다.[7] 이후 아산진을 거쳐 경원부에서 정문(呈文)을 수령하고 청나라로 귀환했다.[7][8]
2. 2. 1. 1710년 월경 사건과 묵덩의 역할
1710년 조선인 이만지 일행이 월경하여 청국민을 살해하고 재물을 강취하는 사건이 발생했다.[4] 1711년, 강희제는 이 사건의 조사단에 묵덩을 포함시켰다.[4] 그런데 묵덩은 봉황성에서 사건을 조사하지 않고 북경으로 갔다가 성경(盛京)을 거쳐 다시 봉황성으로 돌아갔다. 이는 묵덩이 강희제의 밀지를 받고, 마테오 리파(Matteo Ripa, 馬國賢) 신부에게 서양 측량 기술을 배우기 위한 행보로 보인다. 이를 통해 묵덩의 활동이 단순한 월경 사건 조사가 아니라 사전에 계획된 장백산(백두산) 측량 작업이었음을 알 수 있다.[5]하지만 조선 정부는 묵덩의 입국을 불허했다. 묵덩이 황제의 밀지를 내보인 후에야 입국이 허가되었으나, 조선 숙종은 관원에게 묵덩을 험한 폐사군 지역으로 안내하도록 암암리에 지시했다. 결국 묵덩 일행은 만포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북경에 연락했고, 강희제는 측량 작업을 중단시켰다. 묵덩 일행은 지나온 강산만을 그린 도면을 가지고 돌아갔다.[6]
2. 2. 2. 조선 정부의 대응과 강희제의 중단 지시
1710년 조선인 이만지 일행이 월경하여 청국민을 살해하고 재물을 갈취했는데, 1711년, 강희제는 월경 청국민 살해 및 재물 강취사건 조사단에 묵덩을 포함시켰다.[4] 목극등은 봉황성으로 가서 이 사건을 조사하지 않고, 북경으로 갔다가, 그 뒤에 북경으로부터 성경(盛京)을 거쳐 다시 봉황성으로 갔다. 이러한 행보는 전적으로 북경으로 가서 강희제로부터 밀지를 받고, 장백산 지구의 측회작업을 순조롭게 진행하기 위해서 마테오 리파(Matteo Ripa, 마테오 리파/Matteo Ripait) 신부에게 서양의 측회기술을 훈련받은 것으로 보인다.[5] 하지만, 조선 정부는 묵덩에게 조선 경내로 들어가는 것을 불허했고, 이후 묵덩이 황제의 밀지를 내보여서야 비로소 입국을 허가했지만, 조선 숙종은 암암리에 관원에게 지시하여 묵덩을 길이 험한 폐사군으로 안내하였고, 마침내 목극등 일행이 만포 일대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더 이상 나아갈 수 없게 되어 북경에 연락을 취하자, 강희제는 이를 중단시킴으로써 묵덩 일행은 자신들이 거쳐갔던 강산만을 도면으로 그려서 가져갔다.[6]2. 2. 3. 백두산정계비 건립 이후의 행보
1712년, 묵덩은 백두산정계비를 세운 뒤, 두만강을 따라 내려가면서 28일 경원부에서 외교문서인 자문(咨文)을 조선측에 전달하였다.[7] 다시 두만강을 따라 내려가면서 30일 경흥부에서 유숙한 후, 6월 1일 두리산(斗里山) 정상에 올라 두만강이 바다에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였다.[7] 곧 아산진에서 유숙하였고, 6월 2일 경원부에서 외교문서인 정문(呈文)을 수령하고, 3일 두만강을 건너 청 제국으로 귀환했다.[7][8]2. 3. 조선 지도 요구와 귀국 (1713년)
묵덩은 1712년 백두산 일대를 조사하고 백두산정계비를 세운 후, 1713년 정사(正使) 두등시위(頭等侍衛) 아제도(阿齊圖) 등과 함께 조선에 방문하여 지도를 요구하였다.[9] 조선 조정은 비변사를 통해 두루마리 형태의 지도족자(地圖簇子)를 묵덩 일행에게 전달하였고, 지리에 대한 논의를 거쳐 묵덩 일행은 청나라로 귀국하였다.[9] 이때, 조선은 청나라 흠천감의 정9품 관원 오관사력(五官司曆)에게 관상감(觀象監)의 관원 허원(許遠)을 보내 천문 관측 기술을 배우도록 하였는데, 허원은 의주까지 따라가서 관련 기술을 습득하였다고 한다.[9][10]2. 4. 후기 생애와 사망
묵덩은 1719년 길림부도통(吉林副都統, Girin Meiren-i Ejen)에 제수되었고,[7] 이듬해 길림 오라가의 팔기병전봉통령(八旗兵前鋒統領)에 제수되었다.[7] 1732년에는 신강(新疆)으로 출병하여 알타이 지방 일대를 수비하였으며, 내무대신에 임명되었다.[7] 1735년에 과로사하여, 옹정제는 그를 광록대부(光祿大夫)로 추서했다.[7]3. 묵덩에 대한 평가
3. 1. 긍정적 평가
3. 2. 부정적 평가
4. 백두산정계비와 간도 문제
4. 1. 백두산정계비의 역사적 배경과 건립 과정
4. 2. 정계비문의 내용 분석과 해석 논쟁
4. 3. 간도 문제를 둘러싼 한국과 중국의 입장 차이
4. 4. 간도 문제의 현재적 의미와 해결 방안 모색
참조
[1]
뉴스
백두산 정계비 터 위치 확인
http://news.naver.co[...]
경향신문
2005-08-03
[2]
간행물
大淸會典事例 권1215, 「內務府ㆍ採捕」
[3]
서적
성조인황제실록(聖祖仁皇帝聖訓)
강희 12년 9월 2일
[4]
서적
성조인황제실록(聖祖仁皇帝聖訓)
강희 50년 2월
[5]
서적
Memoirs of Father Ripa, during Thirteeen Years' Residence at the Court of Peking in the Service of the Emperor of China
[6]
서적
숙종실록
7월 6일
[7]
서적
숙종실록
6월 초4일
[8]
논문
임진정계시 두만강 상류 수계 인식과 경계표지물의 종점
2015
[9]
서적
숙종실록
5월 16일
[10]
서적
승정원일기
강희 52년 6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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