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좌
1. 개요
이태좌는 조선 숙종, 경종, 영조 시대의 문신이다. 1699년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 어사, 이조정랑 등을 거쳐 강원도관찰사, 대사성, 우의정, 좌의정을 역임했다. 이인좌의 난 진압 후 분무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으며, 시호는 충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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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9년 사망 -
카를 프리드리히 폰 슐레스비히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
카를 프리드리히 폰 슐레스비히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은 스웨덴에서 태어나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위를 계승했고, 러시아 여대공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으며, 그의 아들은 훗날 러시아 차르가 되었다. -
1739년 사망 -
베네데토 마르첼로
베네데토 마르첼로는 이탈리아의 귀족 출신 작곡가이자 법률가로, 법률과 공직 생활을 병행하며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작곡했고, 특히 《에스트로 포에티코-아르모니코》로 명성을 얻었으며, 오페라 제작의 문제점을 풍자한 저술 《유행 극장》을 남겼다. -
1660년 출생 -
조지 1세
조지 1세는 하노버 선제후 출신으로 1714년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국왕이 되었으며, 휘그당을 중용하고 로버트 월폴을 기용하여 내각을 이끌게 했고, 1727년 하노버에서 사망했다. -
1660년 출생 -
마쓰마에 노리히로 (5대)
마쓰마에 노리히로는 에도 시대 마쓰마에 번의 5대 번주로, 샤쿠샤인의 난 진압에 참여하고 번정 혼란을 겪었으며, 에조치의 섬주로서 다이묘로 승격되었지만 낮은 영지로 조롱받기도 하고 텔레비전 드라마 주인공으로도 등장했다. -
조선 경종 -
이인좌의 난
이인좌의 난은 1728년 이인좌를 중심으로 소론 강경파가 영조 즉위에 반발하여 일으킨 반란으로, 과도한 세금과 지주 착취에 대한 백성들의 불만이 사회적 배경이 되었으며, 3개월 만에 진압된 후 소론의 세력이 약화되고 탕평책이 추진되었다. -
조선 경종 -
신임사화
2. 생애
1699년(숙종 25년)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며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숙종, 경종, 영조의 치세 동안 어사, 강원도관찰사, 강화유수, 경기도관찰사 등 내외직을 거쳤으며, 이후 형조판서, 예조판서, 호조판서, 병조판서, 이조판서, 공조판서 등 6조의 판서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728년에는 우의정으로 승진하였고, 같은 해 이인좌의 난 진압에 기여한 공으로 분무원종공신 1등(奮武原從功臣一等)에 책록되었다. 이듬해인 1729년 좌의정으로 승차하였으며, 이후 판중추부사를 거쳐 1736년 봉조하가 되었다. 사후 충정(忠定)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2.1. 관직 생활
1699년 (숙종 25년)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며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초기 관직을 거쳐 어사로 활동하며 탐관오리를 처벌하기도 하였고, 이후 숙종의 신임을 얻어 이조정랑, 대사성, 강원도관찰사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경종 대에는 강화유수, 대사헌, 경기도관찰사 등을 지냈으며, 이후 형조판서, 예조판서, 호조판서 등 판서직에 올랐다.
영조 대에 이르러서는 여러 판서직을 두루 거친 뒤 1728년 우의정으로 승진하였고, 이듬해 좌의정에 올랐다. 1728년 이인좌의 난 진압에 기여한 공으로 분무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이후 판중추부사를 거쳐 1736년 봉조하가 되어 관직에서 물러났다.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2.1.1. 숙종 시대
1699년 (숙종 25년)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검열, 사서, 지평, 정언, 문학 등의 초기 관직을 거쳤다. 어사로 파견되어 탐관오리들을 적발하고 처벌하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이후 숙종의 두터운 신임을 바탕으로 여러 중요한 직책을 역임하였다. 사서, 부교리, 이조정랑, 검토관, 부수찬, 교리, 겸문학, 부응교, 수찬 등을 거쳐 이조정랑을 다시 맡았고, 부수찬, 사인, 부응교, 겸필선, 집의, 응교를 차례로 지냈다.
그 뒤 강원도관찰사로 임명되어 지방 행정을 살폈으며, 다시 중앙 정계로 복귀하여 이조참의, 대사성, 대사간, 승지 등을 거치며 왕을 보좌하는 대독관의 임무를 수행하기도 하였다. 숙종 말년에는 다시 대사성과 이조참의를 역임하였다.
2.1.2. 경종 시대
경종이 즉위한 후에는 강화유수를 지냈다. 이후 대사헌과 공조참판을 거쳤으며, 경기도관찰사로 임명되어 지방의 민정을 살폈다. 중앙으로 돌아와서는 동지의금부사와 병조참판을 역임한 뒤 형조판서로 승진하였다. 이어서 예조판서를 지내면서 세자를 보좌하는 좌빈객을 겸하였고, 이후 호조판서로 자리를 옮겨 약방제조의 역할도 함께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