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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사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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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환사황후는 후한 환제의 황후로, 두융의 후손이자 두무의 딸이다. 165년 환제의 두 번째 황후 등맹녀가 폐위된 후 황후로 간택되었으나, 환제에게 무시당하며 고독한 생활을 보냈다. 환제가 사망한 후 황태후가 되어 섭정을 시작했으나, 아버지 두무와 진번이 환관 세력을 제거하려다 실패하여 두무는 자결하고, 두씨 일족은 몰락했다. 이후 환관들의 횡포 속에서 실질적인 권력을 잃고 유폐되었다가, 172년 사망 후 '사'의 시호를 받아 환사황후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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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사황후
기본 정보
휘호환사황후 (桓思皇后)
성명두묘 (竇妙)
출생지부풍 평릉현
사망지낙양
매장지선릉 (宣陵)
씨족부풍 두씨 (扶風竇氏)
아버지두무
재위 정보
재위 기간연희 8년 10월 20일 - 영강 원년 12월 28일 (165년 12월 10일 - 168년 1월 25일)
배우자환제
생애
사망일희평 원년 6월 10일 (172년 7월 18일)

2. 생애

165년(연희 8년), 두무의 딸 두씨는 귀인으로 책봉되었고, 같은 해 겨울 폐서인된 황후 등맹녀의 뒤를 이어 환제의 황후가 되었다.[5] 환제는 귀인 전성을 황후로 책봉하려 했지만, 진번이 전씨의 미천한 출신을 이유로 두씨를 천거했다.[6]

168년 1월 25일(음력 167년 12월 28일), 환제가 죽자 두씨는 환제의 당질 영제를 옹립하고 태후가 되었다. 영제가 어렸기 때문에 두씨의 아버지 두무와 진번이 조정의 실권을 쥐었다. 그러나 환관 조절왕보 등이 두태후에게 아첨하며 신임을 얻어 높은 관직에 올랐다. 두무와 진번은 환관들의 횡포를 보고 두태후에게 이들을 제거해야 한다고 간하였으나, 태후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조절과 왕보 측은 이를 알고 진번과 두무가 황제를 폐위하려 한다고 모함하여 진번을 죽였다. 두무도 자결했고, 두씨 일족은 처형되거나 비경(지금의 베트남)으로 유배되었으며, 두태후는 남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171년, 영제가 남궁에 있는 두태후를 만나 연회를 열었다. 두태후의 환관 동맹이 영제에게 두태후에게 보내는 물품을 늘려달라고 부탁하자, 조절과 왕보는 동맹이 영제의 생모 동태후를 비방했다고 모함해 죽였다. 172년 유배 중이던 어머니의 죽음을 알게 된 두태후도 병을 얻어 죽었다. 환관들은 두태후를 평소 입던 옷 그대로 수레에 실었고, 조절과 왕보는 두태후를 귀인의 예로 장사지내도록 간했다. 그러나 영제가 태후의 예로 장사지내도록 명했다. 조절과 왕보는 두태후가 환제의 종묘에 배향되는 것을 막으려 했으나, 태위 이함이 "두태후는 영제를 아들로 삼아 임조청정을 했는데 어찌 모친으로 모시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주장하여 영제가 이를 받아들여 두태후를 환제와 함께 장사지냈다.[5]

얼마 후 황성 주작궐에 다음과 같은 낙서가 발견되었다.

:천하가 크게 혼란하고, 조절과 왕보는 태후를 가두어 살해했으며, 상시 후람은 많은 당인을 죽였고, 공경은 모두 녹을 축내며 충언하는 자가 없다.

:(天下大乱、曹節、王甫幽殺太后、常侍侯覧多殺党人、公卿皆尸禄、無有忠言者。)

사례교위 유맹에게 범인을 찾게 했지만, 한 달이 지나도록 잡지 못했다. 결국, 조절 등은 유맹을 좌천시키고, 어사중승 단경에게 범인을 찾게 하여, 같은 해 7월부터 천 명 정도의 태학생이 체포되었다.

2. 1. 가문 배경과 환제와의 혼인

두묘는 광무제 때 공을 세운 두융[3]의 후손으로,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 아버지는 두무이다. 165년(연희 8년) 후궁으로 간택되었고, 그해 겨울 폐서인된 황후 등맹녀의 뒤를 이어 황후로 책봉되었다.[5]

원래 환제는 귀인 전성을 황후로 책봉할 생각이었지만, 태위 진번이 전성의 미천한 출신을 우려하여 간하였다. 결국, 출신 신분이 높은 두묘가 황후로 세워졌지만, 환제에게 무시당하며 고독한 생활을 보냈다. 그러나 두묘는 환제를 두려워하여 인내를 거듭했다.[6]

2. 2. 황태후와 섭정

168년 1월 25일(음력 167년 12월 28일) 환제가 아들 없이 사망하면서, 황태후가 된 두씨는 섭정을 시작했다.[5] 황실의 유씨 일족 중에서 12세의 영제를 황제로 세우고, 계속해서 섭정을 수행했다.[5] 그녀는 진번과 아버지 두무에게 막대한 권력을 부여했다.[5]

두 황태후는 환제의 총애를 받던 전귀인을 증오하여 환제 사후 처형했다.[5]

섭정으로서 두 황태후는 부지런한 모습을 보였고, 강족의 반란 진압을 포함하여 많은 중요한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녀는 장군 단경(段熲)의 강족 진압 계획을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지원했으며, 그의 작전은 성공적이었다.

2. 3. 환관과의 대립

두무와 진번은 최고 관리로서 정부 개혁에 힘썼으며, 특히 환관 세력을 억제하려 했다. 이들은 제1차 당고의 화의 희생자였던 관료들을 복귀시켜 부패를 근절할 권한을 부여했다.[6]

환관들은 헌목황후 두씨에게 아첨하여 신임을 얻었고, 특히 조절과 왕보가 그러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진번과 두무는 환관 제거 계획을 세웠으나, 168년 여름, 헌목황후에게 보고했지만 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자들을 제거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이유로 반대하여 계획은 지연되었다.[6]

그 해 가을, 환관들은 이 계획을 알아채고 반격을 가했다. 환관 주유(朱瑀)는 17명의 환관들과 공모하여 영제를 억류하고(영제에게는 자신의 보호를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고, 영제는 이를 믿었다), 진번과 두무를 지지하는 군 사령관들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조서를 발표했다. 그리고 헌목황후 두씨를 납치하고 군대를 보내 진번과 두무를 체포하려 했다. 진번은 곧 체포되어 처형되었고, 두무는 공개적으로 환관들이 반역을 일으켰다고 선언하며 저항했다. 환관들은 장환 장군을 속여 두무가 반역을 저지르고 있다고 믿게 했고, 장환은 전투에서 두무를 격파했다. 두무는 패배 후 자결했고, 두씨 일족은 몰살당하거나 비경(현재 북부 베트남)으로 유배되었다. 헌목황후 두씨는 헌목황후의 지위를 유지한 채 가택 연금되었다.[5]

2. 4. 말년

171년 영제가 남궁에 있는 두태후를 만나 연회를 베풀었다. 두태후의 환관 동맹(董萌)이 영제에게 아뢰어 두태후에게 보내는 물품을 늘려달라 부탁했고, 이를 안 조절왕보는 동맹이 영제의 생모 동태후를 비방했다고 모함해 죽였다.[5]

172년 유배 중이던 어머니의 죽음을 알고 두태후도 병이 들어 죽었다. 환관들은 두태후를 평소 입던 옷 그대로 수레에 실었고, 조절과 왕보는 두태후를 귀인의 예로 장사지내도록 간했다. 그러나 영제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태후의 예로 장사지내도록 했다. 조절과 왕보는 또한 두태후가 환제의 종묘에 배향되는 것을 막으려 했는데, 태위 이함이 상주문을 내어 "두태후는 영제를 아들로 삼아 임조청정을 했는데 어찌 모친으로 모시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주장했다. 영제는 이함의 상주문을 받아들여 두태후를 환제와 함께 장사지냈다.[5]

두태후는 수년 동안 환관들이 정계를 장악하면서 어떠한 실질적인 권력도 되찾을 수 없었다. 그녀의 영향력은 사실상 영제의 어머니인 동태후에게 넘어갔다. 171년, 환관 동맹은 영제에게 그녀의 결백을 주장하며 그녀를 옹호하려 했고, 영제는 처음에는 그를 믿고 두태후를 자주 방문하여 많은 물품을 제공했다. 이로 인해 조절과 왕보는 동맹을 멸시하여 그를 동태후를 비방했다는 죄로 모함했고, 동맹은 투옥되어 처형되었다.

172년, 두태후는 어머니가 유배지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우울해져 병을 얻었다. 그해 여름, 두태후가 사망하자 권력 있는 환관들은 두씨를 매우 증오하여 그녀의 시신을 짐을 운반하는 마차에 싣고 며칠 동안 비바람에 노출시켰으며, 황후에만 해당하는 예우로 장례를 치르려 했다. 그러나 영제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그녀는 남편인 환제와 함께 태후의 예로 장례를 치르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황성 주작궐에 다음과 같은 낙서가 발견되었다.

:천하가 크게 혼란하고, 조절과 왕보는 태후를 가두어 살해했으며, 상시 후람은 많은 당인을 죽였고, 공경은 모두 녹을 축내며 충언하는 자가 없다.

(天下大乱、曹節、王甫幽殺太后、常侍侯覧多殺党人、公卿皆尸禄、無有忠言者。)

사례교위 유맹에게 명하여 범인을 찾게 했지만, 유맹은 한 달이 지나도록 잡지 못했다. 결국, 조절 등은 유맹을 좌천시키고, 어사중승 단경에게 범인을 찾게 하여 같은 해 7월부터 천 명 정도의 태학생이 체포되었다.

3. 평가

환사황후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가 엇갈린다.

연희 8년(165년) 황후가 된 두묘는 유교적 소양을 갖춘 귀족 가문 출신으로, 167년 환제 사후 영제가 즉위하자 황태후로서 수렴청정을 하며 국정에 참여했다.[1] 168년 아버지 두무와 태위 진번과 함께 환관 세력을 견제하고, 중상시 관패와 소강을 살해하기도 했다.[1] 그러나 두무와 진번이 환관들의 반격으로 죽임을 당하고, 두묘 자신도 남궁 운대에 유폐되었다.[1]

환제에게는 아들이 없었고, 종질인 영제가 제위를 계승했다. 두묘는 황태후로서 수렴청정했으며, 두무를 문희후로 봉하여 권력을 주었다. 환제 시대부터 환관이 강한 권력을 가졌기에, 두무는 진번과 결탁하여 환관 배척을 꾀했다. 건녕 원년(168년) 5월, 두묘의 허락을 받아 두무와 진번은 관패와 소강을 살해했다. 같은 해 8월 남은 환관들을 모두 죽이려 했지만, 계획이 새어나갔다. 두무와 진번은 오영의 군대를 움직여 영제를 폐위시키려 했지만, 근위군에게 패배했다. 두무는 자결했고, 진번은 체포되어 옥사했다.

희평 원년(172년) 두묘 사후, 황성 주작궐에 조절과 왕보가 태후를 가두어 살해했다는 낙서가 발견될 정도로, 두묘는 환관 세력에 의해 억압받는 상황에서도 백성들에게는 어느 정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1] 그러나 환관 세력의 발호를 막지 못하고 권력 다툼에서 패배하여 유폐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1] 또한 환제 사후 전성을 처형하는 등 지나치게 감정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1]

3. 1. 긍정적 평가

연희 8년(165년) 황후가 된 두묘는 유교적 소양을 갖춘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 167년 환제가 붕어하고 영제가 즉위하자 황태후가 되어 수렴청정을 하며 국정 운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1] 168년 아버지 두무와 태위 진번과 함께 환관 세력을 견제하고, 중상시 관패와 소강을 살해하는 등 과감한 결단력을 보였다.[1] 비록 같은 해 두무와 진번이 환관들의 반격으로 인해 죽임을 당하고, 두묘 자신도 남궁 운대에 유폐되었지만, 그녀의 섭정 기간 동안 보여준 정치적 역량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다.[1]

172년 두묘 사후, 황성 주작궐에 조절과 왕보가 태후를 가두어 살해했다는 낙서가 발견될 정도로, 두묘는 환관 세력에 의해 억압받는 상황에서도 백성들에게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1]

3. 2. 부정적 평가

환사황후는 환관 세력의 발호를 막지 못하고 권력 다툼에서 패배하여 유폐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1] 환제 사후 전성을 처형하는 등 지나치게 감정적인 모습을 보였다.[1] 또한, 두무와 진번의 환관 제거 계획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지 않아 정치적 혼란을 야기했다는 평가를 받는다.[1]

4. 기타

희평 원년(172년) 7월, 두묘는 "사"의 시호를 받아, 남편의 시호와 합쳐 "'''환사황후'''"로 칭해졌다.[3] 얼마 지나지 않아, 황성 주작궐에 다음과 같은 낙서가 발견되었다.[4]

天下大乱、曹节、王甫幽殺太后、常侍侯覧多殺党人、公卿皆尸禄、無有忠言者。|천하가 크게 혼란하고, 조절과 왕보는 태후를 가두어 살해했으며, 상시 후람은 많은 당인을 죽였고, 공경은 모두 녹을 축내며 충언하는 자가 없다.중국어

사례교위 유맹이 범인을 찾지 못하자, 조절 등은 어사중승 단경에게 범인을 찾게 하였고, 같은 해 7월부터 천 명 정도의 태학생이 체포되었다.[4]

참조

[1] 문서 guisi day of the 6th month of the 1st year of the Xi'ping era, per Emperor Ling's biography in Book of the Later Han
[2] 서적 Biographical Dictionary of Chinese Women: Antiquity Through Sui, 1600 B.C.E https://books.google[...]
[3] 문서 Dou Wu's father Dou Feng (竇奉) was a great-grandson of Dou Rong
[4] 문서 xinsi day of the 10th month of the 8th year of the Yan'xi era, per Emperor Huan's biography in Book of the Later Han
[5] 서적 조조의 면경 넥서스BOOKS 2004
[6] 서적 같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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