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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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람은 후한 환제 시대의 중상시로, 뇌물을 받고 부패를 저지르며 사치를 일삼았다. 양기 주살에 가담하여 고향후에 봉해졌으며, 장검을 모함하여 당고의 옥을 일으키는 등 악행을 저질렀다. 이후 장락태복을 지내다 고발을 받고 자결했으며, 《삼국지연의》에서는 하진을 죽이고 소제와 진류왕을 데리고 도주하다 자결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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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2년 사망 - 환사황후
후한 환제의 황후 환사황후는 두무의 딸로 환제의 총애를 받지 못했음에도 진번의 천거로 황후가 되었고, 환제 사후 영제를 옹립하여 섭정을 펼쳤으나 환관 세력 제거 시도 실패 후 몰락했으며, 사후 영제의 결정으로 황후의 예로 장례가 치러졌다. - 172년 사망 - 유회 (발해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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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람 | |
---|---|
기본 정보 | |
![]() | |
성 | 후 |
이름 | 람 (覽) |
시호 | 위후 (威侯) |
생몰년도 | ? ~ 172년 |
시대 | 후한 |
관직 | |
작위 | 고향후 (高鄉侯) |
최종 관직 | 중상시 (中常侍) |
가족 관계 | |
친척 | 후맹 |
기타 | |
관련 인물 | 조기 원굉 두밀 왕윤 단경 채옹 |
2. 생애
후람은 현재의 산둥성 지닝시 일대인 산양군 출신이다. 환제 즉위 초년에 중상시가 되었다. 조정 내에서 부패한 환관, 관리들과 무리를 지어 받은 뇌물은 막대했다. 연희 연간에는 군대의 출동이 해마다 이어져 조정의 창고가 비었고, 백관의 봉록과 왕후의 조세에서 조정이 빚을 지는 재정 상황이 되었다. 후람은 비단 5천 필을 헌상하고 관내후 작위를 받았다.
169년, 어머니가 사망하여 집에 돌아가 상을 치르고 큰 묘를 지었다. 이때 독우 장검이 후람의 탐욕스러운 사치를 고발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오히려 후람은 장검을 당인으로 무고했다.
2. 1. 환제 시기 (159년 ~ 167년)
환제 대의 중상시였다. 159년, 양기 주살에 가담하여 고향후(高鄕侯)에 봉해졌다.[1] 제음에 집이 있었던 소황문(小黃門) 단규와 함께 장원을 경영하여 제북 경계까지 이르렀고, 종복과 빈객들이 백성과 여객을 침탈했다. 제북상 등연(騰延)이 이들을 사로잡아 10여 명을 죽이자, 등연을 무고하여 면직시켰다.165년, 태위 양빙은 후람이 그의 동생 후참(후찬)이 갈취 및 부패 행위에 관여하도록 허용했다는 혐의로 환제에게 후람을 해임할 것을 요청했다.[2] 후람은 165년에 해임되었으나,[3] 166년까지 복직되었다.[4]
후람의 형인 후참은 익주 자사를 지냈는데, 부유한 백성을 잡아 대역의 죄로 무고하여 일족을 몰살시키고 재산을 몰수했다. 태위인 양병이 후참의 죄를 아뢰어 옥수레에 태워 연행시키자, 후참은 도중에 자살했다. 경조윤인 원봉이 여사에서 후참의 수레 300여 량을 조사해 보니, 모두 금은, 비단, 진귀한 보물들이 쌓여 있어 셀 수도 없을 정도였다. 후람은 형의 죄에 연좌되어 면직되었지만, 곧 관직에 복귀했다.
2. 2. 영제 시기 (168년 ~ 172년)
169년(건녕 2년), 후람은 장검 등이 사사로이 당을 조직해 국정을 어지럽힌다고 모함하여 제2차 당고의 옥을 일으켰다.[1] 이 사건으로 이응과 두밀 등이 연루되어 옥사했고, 장검은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1]172년 이전에는 두태후의 공식 거처인 장락궁의 태복을 지냈다.[5] 이는 환제 사망 이후 두태후의 비호를 받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5] 진번은 부패한 환관을 처형할 것을 태후에게 촉구했지만, 두태후가 후람을 조정 관리들의 처형으로부터 보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6]
172년(희평 원년), "사치와 오만을 범하고, 함부로 권위를 휘둘렀다"는 죄목으로 기소되어 관인과 관복을 반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7] 그 후 그는 자결했다.[7] 이러한 모호한 혐의로 인한 후람의 몰락은 그의 특별한 비행으로 인한 것이 아닌, 두무와 두태후의 체포로 이어진 논란에서 두태후와의 관계에 의해 더 잘 설명된다.[8]
3. 평가
후람은 환제 때 중상시를 지낸 환관으로, 백성을 수탈하고 정적을 모함하는 등 전형적인 탐관오리의 모습을 보였다. 이는 후한 말기 환관 정치의 폐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1]
후람은 양기 주살에 공을 세워 고향후에 봉해졌으나, 단규와 함께 장원을 경영하며 백성들을 침탈했다. 제북상 등연이 이들을 처벌하자, 무고하여 면직시키기도 했다.[1]
169년 (건녕 2년)에는 자신을 비판한 장검 등을 당인으로 몰아 제2차 당고의 옥을 일으켰다.[1]
172년 (희평 원년), 결국 백성 수탈과 전횡에 대한 고발로 인해 인수를 빼앗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1]
특히 진보 진영에서는 후람과 같은 환관들의 전횡이 결국 후한의 멸망을 초래한 원인 중 하나로 지적하며, 십상시의 난과 같은 혼란을 야기했다고 비판한다.
4. 《삼국지연의》 속 후람
189년, 장양과 함께 대장군 하진을 죽이고 십상시의 난을 일으켰다. 그러자 도성 밖에 있던 조조, 원소, 원술, 오광 등이 궁궐에 난입해 십상시들을 마구 죽이자, 수장인 장양 등과 함께 소제와 진류왕 유협을 데리고 도주하였으나, 민공이 추격해오자 황하 강에 몸을 던져 자결하였다.
참조
[1]
서적
Emperor Huan and Emperor Ling
Australian Nat. Univ., Faculty of Asian Studies
1989
[2]
서적
1989
[3]
서적
1989
[4]
서적
1989
[5]
서적
1989
[6]
서적
1989
[7]
서적
1989
[8]
서적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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